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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헌영의 고은론을 소개하며 (1) 글 / 소천 정 혁 아래의 글은 계간문예 2008년 봄호(NO 11)에 게재된 평론가 임헌영 교수의 <경이로운 시인, 세계문학사에 등정하다>라는 고은 시인에 대한 신작평론을 요약 발췌한 글이다. 임헌영 교수와 고은 시인은 박정희 정권과 5공화국에 이르는 군사정권 시대에 민주와 민중에 대한 사상적, 문학적 궤를 같이하면서 각별한 인연을 가진 평론가이다. 그동안 고은 시인에 대한 비평적 논지는 상당수에 이르고 또한 다양한 시각적 비판이 있으나 여기에서는 임헌영 교수의 신작 <고은론>을 3회로 나누어 소개하고자 한다. 다만 상당량의 분량이기에 여기에서는 문학적 비평부분 보다는 고은 시인의 삶의 면모에 얽힌 부분을 중심으로 요약 발췌하였으며, 읽는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문단을 구분하거나 그 과정에서 가감 첨삭하였음을 밝힌다. 이로 인해 임헌영 교수의 글과, 고은 시인에게 결례가 되었다면 이는 소개자의 책임일 것이다.
<고은 시인 근영> 경이로운 시인, 세계문학사에 등정하다(1) - 임헌영 1. 메피스토펠레스와 결탁한 파우스트
임헌영 교수는 괴테의 <파우스트> 작품의 주인공 파우스트 박사가 그의 영혼을 메피스토펠레스와 결탁하는 도입 부분을 각각의 시를 대비하면서 설명한다. 밤. “철학도,/ 법학도, 의학도,/ 게다가 쓸데없이 신학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철저히 연구했다./……/ 그리하여 안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뿐이다.”고 독백을 늘어놓는다. 한때는 “영원한 진리의 거울에 완전히 접근한 줄 알고, / 하늘나라 광휘에 싸여서 스스로를 즐기고,/ 땅에 사는 자의 껍질을 완전히 벗어 던진 양 생각”했다. 그런데 홀연히 어느 밤에 “만권의 책을 펴 놓고,/ 어디서나 인간은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 어쩌다가 행복한 사람도 있다는 것을 깨달으란 말인가?/ 텅 빈 해골아. 왜 이빨을 드러내고 나를 쏘아보느냐?”고 자책한다. 고은은 노래한다. 멋부리던 가야산 시절 세상이 곧 만다라라 아는 척 했건만 이제 내 늙어빠진 핏줄 사무쳐 다시 아는 척 하느니 온통 나 에워싼 티끌 억조로 겨우 나를 벗어나느니 부디 어리석어라 더 어리석어라 나무가 되었다가 산 짐승이 되었다가 또 무엇이 무엇이 되었다가 하늘 그물 여기저기 숭숭 뚫려 내 집이 많기도 하느니 가거라 가노라면 길도 집이란다 - <집> 전문 어리석기를, 더 이리석기를 바라는, 길도 집이 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고은은 바로 밤에 홀로 앉아 자신의 무기력을 느끼는 파우스트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근대 유럽이 낳은 이 전인적 지식인상의 전형인 파우스트, 바로 현대판 파우스트인 시인 고은, 그처럼 당대에 문학예술계의 경계를 훌쩍 넘어 각계각층에 그 명성이 자자한데다 막강한 영향력을 끼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화두를 제공하는 지식인은 역사상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괴테가 창조해 낸 이상적인 지식인상인 파우스트가 지닌 결함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인간의 두뇌가 함유할 수 있는 모든 지식을 뇌세포에 간직하고서도 도달할 수 없었던 글 부족함을 일깨워 준 것은 스승도 신도 아닌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였다. 이성만으로는 지상에서의 행복을 만끽할 수 없다면서 이 악마가 일러준 것은 “시인과 결탁하십시오.”였다. “그 시인으로 하여금 공상의 날개를 펴게 해서/ 모든 뛰어난 성질을, 명예에 빛나는 / 당신 머리 위에 쌓게 하는 것입니다. / 사자의 용기라든가, / 북극인의 끈기 같은 것을 말이지요 ./ 그 시인에게 배우십시오. / 관대한 마음과 간악한 지혜를 결합시키고, / 뜨거운 청춘의 충동을 가지면서도 / 일정한 계획에 따라 사랑을 하는 비법을.”
파우스트에게다가 고은의 영혼을 보태라는 말인가? 아니다. 이미 고은은 현대의 파우스트이기에 시인을 보태고 말고 할 필요가 없다. 그럼 파우스트보다 더 탁월한 존재로 고은을 쳐다보란 말인가? 그것도 아니다. 시인 고은은 메피스토펠레스와 결탁한 파우스트란 의미다. 파우스트는 인문 사회과학을 습득한 뒤에 시인의 재능을 첨가하나 고은은 먼저 시인에다 인문 사회과학을 나중에 체험했다는 게 다를 뿐이다. “내가 전신 전령(全靈)으로 추구하고 있는, / 인류의 정화에 이르지 못한다면, / 대체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라는 파우스트의 깊은 고뇌는 바로 고은이 이 지상에서 전력투구하여 추구하던 화엄의 세계 탐구와 닮았다. ....<중략> 왜 하필 이 희귀한 천재에게 악마와 결탁한 파우스트란 호칭이 어울린다고 할까. 프랑스문학을 전공한 구조주의 우파인 평론가 김현은 “그의 신비스러운 유인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 그는 나의 이해를 초월한다.”고 하면서 고은을 가리켜 “가면의 마술사”라고 평한다. “그 가면은 미지의 부인(夫人)을 수없이 얻고 버린 자의 비애가 짙은 허무감과 동반되어 나타난다.”고 했는데, 이건 고은의 유미주의적인 청년기에만 해당되는 지적이다. 기자출신의 평론가 김병익은 “고은은 내게 여러 얼굴로 다가 온다.”고 하면서 “동승처럼 맑으면서도 처연한 빛을 부끄럽게 숨겼을 얼굴, 환속한 이후의 그 달랠 길 없는 허무에의 정열로 술좌석을 헤질러 놓고 옆 사람을 껴안기도 하며(고은은 좋아하는 남성의 입 속으로 혀를 깊숙이 넣어 키스하기로 유명했다 - 임헌영 주) 발로 걷어차기도 하는 질풍시대의 얼굴.(……) 때로 잡혀가기도 하면서 스스로를 엄숙한 표정으로 담금질하던 얼굴, 그리고 드디어는 민중들의 모임의 단상에서, 혹은 젊은 목숨을 버린 민중의 제단 위에서 격렬한 질타와 우렁찬 호곡처럼 울리는 시를 읊는 노도의 얼굴”이라고 표현하였으나 고은의 마스크를 연이어 데생하지만 여전히 미진하다.
2. 화엄의 세계 추구하기
여류시인 김승희는 고은을 “우리 당대에 가장 이름 붙이기 어려운, 이름 붙일 수 없는, 명명 불가한 에너지의 한 현상” 이라면서 이렇게 풀이해 준다. - “1960년대의 그 밑도 끝도 없는 소문 속의 그는 허무주의의 괴수, 그로테스크한 악마주의자, 연이은 자살미수자, 유미주의자, 환속 승려, 청진동의 음산하고도 현란한 스캔들의 극치, 그런 것 속에서 꽃 피어난 귀면(鬼面) 바로 그것이었다.” 작가 이문구는 고은을 가리켜 “그이는 중니(仲尼)와 모니(牟尼)가 함께 살고 있는 몸”으로 “그 자체가 문화의 집대성”이라고 묘사하였는가 하면, 시인 문익환 목사는 “나는 가끔 내가 고은보다 더 불교적이요, 그는 나보다 더 기독교 적이 아니냐는 느낌이 들곤 한다.”고 고은을 평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시대 인문 사회과학의 스승인 지성의 프로메테우스 리영희는 고은과 형님 아우 사이인지라 그 남다른 애정 때문에 문학인 보다는 더 정확하게 시인의 광기를 다음과 같이 묘파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임헌영 교수는 쓰고 있다. - 그의 천진무구한 광태에 탄복도 하고, 소리 ․ 노래 ․ 고함 ․ 매도 ․ 주먹질 ․ 발구름 ․ 박치기……, 인간의 신체가 발휘할 수 있는 온갖 작동 기능이 종합, 동시적으로 발휘되는 모습에 압도당해 있는데,(……) 고은은 야차, 석가, 악마, 예수, 놈팽이, 건달, 아기, 소년, 청년, 노인, 선인, 악인, 시인, 잡놈, 깡패, 군자…… 실재하는 인간과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이 갖출 수 있는 모든 속성이 뒤범벅이 되어서 한 판에 벌어지는 1인극을 연출했다.
- 리영희 <언제나 경이로운 시인> 이렇게 고은의 여러 ‘얼굴’을 설렵해도 여전히 그는 저 지평선 너머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응시하는 데, 그 지극한 경지는 바로 ‘화엄(華嚴)’의 세계를 유랑하는 고은의 참모습, 유럽적으로 바꾸자면 메피스토펠레스와 결탁한 파우스트인 셈이다. - (중략) - 그 투시력의 단전(丹田)이 화엄사상이다. 고은은 소설 <화엄경>에서 파우스트와 비견되는 일대 모험을 감행토록 하는데, 이건 불경을 빙자하여 자신의 인간수업 과정을 보여주는 형식이다. 둘은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메피스토펠레스와 결탁한 파우스트의 편력과 견줄만하다는 점에서 만난다. 화엄경은 <십지품(十地品)>과 <입법계품(立法界品)>으로 이뤄져 있는데 소설은 <입법계품>을 취한다. 주인공 선재동자(善財童子)는 우주만물의 진리를 탐구코자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안내로 53 명의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유행(遊行), 마지막으로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만나 십대원(十大願)을 학습,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로 왕생(往生)하여 입법계(入法界)를 이룬다는, 다분히 번얀의 <천로역정>식 줄거리지만 그 스승 중에는 바라문, 노예, 장사군, 뱃사공, 창녀 등등 메피스토펠레스적인 세계를 두루 체험할 수 있도록 장치했다. - 중략 - 고은 영혼의 자서전이자 초상화인 이 소설은 <신곡>의 다양하면서도 음산한 분위기, <서유기>적인 환상과 낙천성,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시적 표현과 예언성, <에밀>의 성장소설적인 요소 등등이 어우러지는 한 판 인생살이인데 그 궁극은 메피스토펠레스와 결탁하여 결국은 승리하는 파우스트의 모습이자 바로 시인 자신의 화엄의 세계관의 축도(縮圖)다.
2008. 7. 14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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