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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鄕校)를 중심으로 본 조선시대의 교육기관
지배집단은 그들의 교육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또 영구화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종교적 의례, 신화, 통치제도, 교육제도 등을 만들고, 이를 통해 지배라는 행위의 존엄성과 권위를 유지, 강화시키려 했다.
교육기관도 이러한 목적으로 설립되어 운영되었고, 그중 국가에서 사액한 서원이나 향촌출신의 고급관리들에게 주어진 사패지등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문중의 자제를 교육하고 선현을 향사하는 곳은 서원이고, 국가에서 설립한 곳은 향교나 학당, 성균관 등이다. 그러나 초등교육기관인 서당은 국가에서 관여하지 않았기에 전부 사설교육기관이다.
조선시대의 교육은 인성교육과 관리양성이 목적이다.
상급학교로 갈수록 관리 양성이 우선시되었고, 과거급제를 목표로 둔 유교경전과 한자를 이용한 문장력을 기르기 위한 교육과 국왕에 대한 충성심고취 등의 교육을 우선시한다.
소과는 생원과와 진사과가 있었고, 이 소과에 합격한 자를 생원이나 진사라 일컫는다. 생진과 합격자는 총 47,748명에 이르렀고, 문과의 대과에는 진사와 생원, 하급관리, 성균관 유생들이 응시하였으며, 초시와 복시를 실시하여 급제자를 선발 한 후 국왕이 주관하는 전시에서 그 등위를 결정하였다.
갑오경장 때에 과거제가 폐지될 때까지 대과인 과거시험은 총 744회가 치러졌고, 총 선발인원은 14,620여명이다.
2. 향교의 역사
고구려 372년(소수림왕 2년)에 수도에 태학을 세웠다 하는데 고구려의 향학이 가장 빠르게 설립되었다 해도 이전으로 올라갈 수는 없을 것이다. 고구려의 향학에 해당하는 것으로 경당이 있었음은 분명한데 태학이 한무제 때 오경박사를 둔 태학과 같은 성격이 분명한 반면 독서. 습사하였다는 경당이 꼭 이 같은 유교적 성격의 향학이었는지 확언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방도 중앙의 학문성향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경당의 교과내용도 태학과 동류도 경당이 우리나라 식 최초의 향교였다
고려 987년(성종 6)에 전국 십이목 경기도 양주, 광주, 충청도 충주, 청주, 공주, 경상도 진주, 상주, 전라도 전주, 나주, 승주(순천), 황해도 해주, 황주)에 학교를 설치하고 경학박사를 배치하고 주군에 학사를 세웠다 향교에 관한 가장 확실한 기록이라 할 것이다. 다시 1127년(인종 5)엔 각 주에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진작시킬 것을 명하였다. 다시 1314년(충숙왕 6년)엔 이곡을 모든 주에 파견하여 향교를 부흥케 하였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태조는 1392년(태조 원년)에 각 도의 안찰사에게 명하여 학교의 흥폐로 그 지역 수령의 능력을 가늠하는 제도를 수립하고 향교 설치를 강조하였다. 이어 1398년(태조 7)에는 성균관의 설립과 더불어 향교의 설치를 재차 촉구하였다. 태종은 향교의 수학 성과를 수령에 대한 평가 기준으로 삼고 1413년엔 각 향교에 향교의 관리 및 유지에 충당할 비용을 마련토록 학전을 지급하는 등 더욱 강력한 정책을 추진함에 거의 주현마다 고루 1개씩 향교가 설치되어 전국의 향교는 1484년(성종 15)에 300여개소로 늘어났다. 향교 유생의 재학 연령은 17~40세였으나 연산군 이후 40세 이상도 재학하여 연령상한선이 지켜지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 정유 왜란과 정묘, 병자호란을 거치는 동안 국가 재정이 피폐하고 실정이 거듭됨으로써 향교의 기능 또한 점차 약화되었다.
1910년 일제강점 후 향교는 교육기능과 재산을 탈취당하고 근근히 존속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다시 수많은 향교가 전부 혹은 부분 파손을 입었고 이후 지금까지 각 지역 유림들의 눈물어린 노력으로 거의 다 복원하고 있다.
3. 향교의 의의와 역할
서울의 사학(四學)과 마찬가지로 향교도 성균관(成均館)의 하급관학으로서 문묘(文廟), 명륜당(明倫堂) 및 조선의 선철, 선현을 제사하는 동무(東廡)와 사무(西廡), 동재(同齋)가 있어 동재에는 양반, 서재에는 서류(庶流)를 두었다. 향교는 각 지방관청의 관할 하에 두어 부(府), 대도호부(大都護府). 목(牧)에는 각 90명, 도호부에는 70명, 군에는 50명, 현에는 30명의 학생을 수용하도록 하고, 종 6품의 교수와 정 9품의 훈도를 두도록 경국대전에 규정하였다.
향교에서는 정부에서 5~7결(結)의 학전을 지급하여 그 수세(收稅)로서 비용에 충당하도록 하고, 향교의 흥함과 쇠함에 따라 수령의 인사에 반영하였으며, 수령은 매월 교육현황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1894년(고종 31)년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향교는 이름만 남아 문묘를 향사할 뿐이어서 1900년에는 향교재산관리규정을 정하여 그 재산을 부윤, 군수 등이 관장하도록 하였다. 1918년 조사된 바로는 당시 향교의 수는 335, 소관 토지는 48만평이었으며, 그 재산은 문묘의 유지와 사회교화사업에 시설에 충당하였다.
4, 서울에 남아있는 향교
서울시 문화재 제8호인 양천항교 전경
지정연월일 : 1990년 6월 18일
시 대 : 조선 태종 11년(1411)
규 모/양 식 : 총 건평 72평 (8동)
재 료 : 석조기단 목조
소 유 자 : 서울특별시 향교재단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234 (향교길 50)
양천향교(陽川鄕校)는 1963년 김포군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서울에 있는 유일한 향교가 되었다. 궁산 아래에 남향하여 위치하고 있는데, 이 일대는 겸재(謙齋) 정선(鄭敾)이 양천현감(陽川縣監)으로 있으면서 진경산수(眞景山水)를 그린 풍경이 빼어난 곳이다.
이 향교는 1411년(태종 11년) 창건되어 문묘(文廟)의 기능과 함께 지방 교육기관의 기능을 하여 오다가 1909년 7월 5일 소학교령 대신 보통학교령을 반포하고 고등학교령이 신설되는 등 학제(學制)가 크게 개편됨에 따라 조선말 전국의 모든 향교와 마찬가지로 교육기능은 상실되고 문묘의 기능과 교화사업만 담당하게 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 지방행정구역의 개편으로 양천(楊川)·통진(通津) 2개 군이 김포군에 합군(合郡)되었고, 일제 당국은 이에 앞서 향교재산을 정부 소관으로 이속시킨데 이어 당시 폐지된 군의 향교는 합군된 군의 향교에 통합하도록 하는 '1군 1향교' 원칙을 세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각 지방 상황에 따라 1군내에 여러 개의 향교가 존립한 채 활동하였는데, 양천향교도 계속 독자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해방 이후 향교재산은 각 도별로 재단법인을 두어 관리하게 됨에 따라 양천향교는 재단법인 경기도향교재단의 관리 아래 독립 운영하면서 건물들이 복구되기 시작하였는데, 현재의 향교 자리는 본래 위치 그대로다.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의 변경으로 이 향교가 위치한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 가양동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편입됨에 따라 1965년 12월 재단법인 서울특별시 향교재단이 설립되었고, 경기도향교재단으로부터 양천향교의 재산을 인수하였다. 1969년에는 대성전과 외삼문을 보수하였다. 1977년부터 1979년까지 3년 동안 향교복원공사계획(鄕校復元工事計劃)을 수립하여 1980년 11월 19일 복원공사를 착공하여 1981년 8월 31일 완공을 보았다.
이 공사로 향교 경내를 넓히면서 성현에게 제사지내는 대성전(大成殿)·교육 장소로 사용되는 명륜당(明倫堂)·학문을 배우는 학생들이 머물렀던 동재(東齋)의 건물 규모를 키워 새로 세웠으며, 없어졌던 서재(西齋)도 새로 세웠다. 이외에도, 제사 음식을 준비하고 제사에 사용되는 그릇을 보관하는 전사청(典祀廳)·대성전 영역 출입문인 내삼문(內三門)·향교 출입문인 외삼문(外三門)을 넓혔으며, 담도 증축하였다. 구릉지에 건립된 이 향교는 강학(講學)을 위한 공간과 제향(祭享)을 위한 공간이 각각 담으로 둘러싸인 별도의 영역을 형성하며 앞·뒤에 위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하고 있다.
강학공간에는 명륜당이 계단으로 조성된 언덕 위에 남향하고 있고, 계단 아래에 동재와 서재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서있다. 명륜당은 전면에 길게 툇칸을 둔 정면 5칸, 측면 2칸 반, 초익공,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로서,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그 좌우로 각각 1칸의 온돌방 협실을 두었다. 동재와 서재는 같은 규모인데, 각각 전면에 툇칸을 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납도리, 팔작지붕 건물이다.
제향공간에는 대성전이 남향하여 서있고, 그 서쪽에 전사청이 동향하여 서있다. 대성전은 외벌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서있는 겹처마, 이익공, 맞배지붕의 건물로, 내부에는 공자(孔子)를 비롯한 안자(顔子)·자사(子思)·증자(曾子)·맹자(孟子) 등 5성(五聖), 주돈이(周敦 )·정이(程 )·정호(程顥)·주희(朱熹) 등 송조 4현(宋朝四賢), 그리고 우리나라의 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안유(安裕)·정몽주(鄭夢周)·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이이(李珥)·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 조헌(趙憲)·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박세채(朴世采) 등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석전(釋奠: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奉行)하고 있다.
향교 입구에는 홍살문이 서있고, 외삼문으로 오르는 계단 좌측에는 역대 현감과 현령들의 선정비(善政碑)가 모여 있는데, 이는 1988년 중수하면서 양천 현아 주변에 있던 것을 지방 유림들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향교 서북쪽 뒤로는 ‘궁산근린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향교가 있던 곳에 하마비가 세워져있었으므로 옛 지명은 '하마비마을' 이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강서구는 1997년 비를 복원해 놓았다.
향교(鄕校)도 서원(書院)처럼 동재·서재가 있었고, 동재는 양반자제가, 서재는 평민자제가 많이 기숙했다.
5. 전국에 남아있는 향교
1995년 현재 전국의 향교수는 230여개소인데 북한 소재 향교에 대해서는 파악하기 어려우나 1930년대의 향교자료에 의한 향교수는 101개소이다.
1). 남한에 남아있는 향교
* 서울특별시: 양천향교
* 부산광역시: 기장, 동래
* 인천광역시: 교동, 인천, 부평,
* 대구광역시: 대구, 칠곡, 현풍.
* 광주광역시 : 광주
* 대전광역시: 진잠, 회덕,
* 울산광역시: 언양, 울산,
* 경기도:광주, 교하, 김포, 남양, 수원, 안성, 양근, 양성, 양주, 양지, 영주, 이천, 적성, 지평, 죽산, 진위, 파주, 평택, 포천, 시흥, 연천
* 강원도: 동해. 삼척, 양구, 양양, 영월, 원주, 인제, 정선, 철원, 평창, 춘천, 홍천, 화천, 횡성,
* 충청북도: 괴산, 단양, 문의, 보은, 영춘, 영동, 옥천, 연풍, 옥천, 음성, 제천, 진천, 청주, 청산, 청주, 청풍, 충주, 횡간
* 충청남도: 금산, 남포. 노성, 당진, 대흥, 덕산, 면천, 목천, 보령, 부여, 비인, 서산, 서천, 석성, 신창, 아산, 연기, 연산, 온양, 은진, 예산, 오천, 임천, 임피, 전의, 직산, 정산, 진산, 천안, 청양, 한산, 태안, 홍주, 한산, 해미, 홍산. 은진, 남포,
* 경상북도: 군위, 금산, 문경, 봉화, 비안, 상주, 선산, 성주, 순흥, 신령, 안동, 연일, 예천, 영주, 영천, 영해, 예안, 영덕, 영양, 용궁, 울진, 예안, 예천, 의흥, 인동, 자인, 장기. 지례, 진보, 청도, 청하(경북 포항시 청하면), 평해, 풍기, 하양, 흥해, 함창, 의성, 성주, 청송
*경상남도: 김해. 남해, 단성, 마산, 밀양, 사천, 삼가, 안의, 양산, 영산, 의령, 의성, 진주, 창녕, 초계, 하동, 칠원, 통영, 함안, 합천, 산청, 창녕
* 전라북도: 금구, 김제, 남원, 만경, 무장, 무주, 부안, 순창, 여산, 옥구, 용안, 운봉, 옥구, 익산, 임실, 장수, 전주, 정읍, 진안, 흥덕, 함열, 임피,
* 전라남도: 구례. 나주, 낙안, 남평, 능주, 돌산, 동복, 무안, 보성, 여수, 오천, 영암, 영광, 완도, 용담, 장흥, 지도(신안군 지도면), 진도, 화순, 함평, 해남, 옥과, 창평
* 제주도 : 대정, 대흥, 제주, 정의,
2). 북한에 남아있는 향교
1930년대 자료에 의한 북한 향교는 다음과 같다.
* 경기도 성균관 및 향교
성균관(開城), 장단, 개풍
* 강원도 7개
회양, 통천, 김화, 김성, 평강, 이천, 안협
* 황해도 20개
해주, 연안, 백천, 금천, 토산, 평산, 신계, 옹진, 장연, 송화, 은율, 안악, 신천, 문화, 재녕, 황주, 봉산, 서흥, 수안, 곡산.
* 평안남도 23개
평양, 순천, 맹산, 양덕, 성천, 강동, 중화, 용강, 강서, 영유, 안주, 개천, 덕천, 녕원, 삼등, 삼화, 상원, 숙천, 순안, 은산, 자산, 증산, 함종.
* 평안북도 21개
의주, 구성, 태천, 운산, 희천, 영변, 박천, 가산, 정주, 곽산, 선천, 철산, 용천, 삭주, 창성, 벽동, 초산, 위원, 강계, 자성, 후창.
* 함경남도 16개
함흥, 정평, 영흥, 고원, 문천, 덕원, 안변, 홍원, 북청, 이원, 단천, 신흥, 장진, 풍산, 삼수, 갑산
* 함경북도 11개 향교
경성, 명운, 길주, 성진, 부녕, 무산, 회녕, 종성, 온성, 경원, 경흥
6. 교육기관으로서의 서당과 서원과 학당, 성균관.
1) 서당(書堂)
초등교육기관: 사립교육기관이다.
민중교육기관으로 신식교육이 실시될 때까지 존속해온 가장 보편적인 교육기관이다. 사적으로 설립된 것이 서당이었기 때문에 흥폐가 자유로웠다. 사족의 자제들이 자기 집에서 학동을 가르치는 경우와 훈장이 자신의 취미나 소일을 위하여 설립하는 경우, 독선생을 앉혀놓고 약간 명의 이웃 자제들을 무료로 동석시켜 수업하는 경우, 이웃이나 친지의 요청으로 학동을 받아들이는 경우, 그리고 훈장 자신의 생계를 위해 설립하는 겨우 등이 대부분이다.
훈장과 그의 가족들은 학부형이 부담하는 것이 관례였다.
서당의 인적구성은 훈장(訓長), 접장(接長), 학도(學徒)루 구성되었다. 연령층은 7세 이상부터 20세 이상까지 다양하였다. 접장은 서당의 학도가운데 학력이 우위이고, 나이든 자를 접장으로 내세워 가르치게 하였다. 접이라는 말은 단체라는 뜻으로 동접이란 같은 서당에서 공부한 자를 이름이다. 입학은 동짓날을 정하여 입학하는 것이 관례였다. 책거리나 입학하는 날은 마을의 잔치가 열리다시피 했다. 현대에 와서 운동회나, 학예회 때에 마을 사람들 모두가 모이는 풍속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2) 서원(書院)
청소년과 청년의 교육기관으로 사립교육기관이다.
조선 중기 이후 명현을 제사하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세운 사설교육기관으로 사(祠)와 재(齋)를 겸한 최초의 서원은 풍기의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최초이다. 그 뒤 퇴계 이황이 1550년(명종 5) 이를 권장하는 뜻에서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쓴 현판과 서적과 학전과 노비를 하사하면서 토지와 노비에 대한 면세, 면역의 특권을 내렸던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명종이전에 설립한 것이 29개, 선조 때에는 124개에 이르렀고, 숙종 때에는 130개소에 이르렀다. 서원이 증설되어 감에 따라 혈연, 지연, 학연등과 연결되어 양반의 이익집단이 되었고, 부속된 토지는 면제되고, 노비는 면역되었기 때문에 양민은 군역을 피하기 위해 사원의 노비가 되어 군정(軍丁)의 부족을 초래하였다, 서원의 폐단은 인조이후 계속 논란이 되다가 1864년(고종 1)에 사표가 될 만한 서원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그러나 문중을 중심으로 설립된 서원이기에 서원 철폐령이 내려졌음에도 복구하여 문준 중심의 선현과 향현에 대한 향사는 계속되어 왔으므로 현존하는 서원은 270여개이고, 각시도의 서원수는 서울특별시 1개, 부산광역시 1개, 대구광역시 10개, 인천광역시 1개, 광주광역시 1개, 경기도 18개, 강원도 4개, 충청북도 18개, 충청남도 22개, 경상북도 97개 경상남도 18개, 전라북도 53개, 전라남도 28개 등으로 경북지역이 전국 서원수의 4할에 가깝고, 그 다음은 전북으로 2할에 가까운 서원이 소재되어있다.
3) 사부학당(四部學堂)
국립청소년교육기관으로서 서울에 있었던 중등교육기관에 해당하는 성균관의 부속중고등학교로 주로 청소년들의 교육의 장이다. 전액 국비는 아니다 수업료가 없을 뿐이다.
관학으로 지방의 향교와 달리 문선왕묘(文宣王廟) 가없는 것이 특징이다. 1410년(태종 10)에 남부학당이 설립되면서 나머지 학당들도 학당은 기숙사제도를 마련, 그 비용은 국가에서 부담하였다. 전북연안에 있는 여러 섬들의 어장을 주어 그 세로써 그 비용을 충당하게도 했다. 교수(현재의 교장에 해당)와 훈도(현재의 교사에 해당)를 두어 학생들의 학업을 가르치고, 예조와 사헌부에서 학당의 수업상태를 감독하게 하였다. 서울에 사는 양반자제로서, 8세가 되면 입학자격을 주어 소학(小學),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배우고, 15세가 되어 승보시에 합격하면 성균관기재(成均館寄齋)에 입학하게 된다. 이것은 커다란 특전으로 기재생은 상재생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학당에서는 5일마다 시험을 치르고, 예조에서는 달마다 시험을 쳐서 1년의 성적을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임진왜란 때 학당이 불타서 다시 건물을 지은 뒤에는 학생수가 격감되어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고, 한말에는 개신교 선교사 등에 의해 세운 학교를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등으로 불렸다.
서울의 중학동, 남학동의 동명은 그 곳에 학당이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4) 성균관
국립대학교육기관으로 사학의 경우와 다르게 교육비와 기숙사비가 전액 국비이다.
1289년 성균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사용되었고, 조선에 들어와서도 그 이름은 계속 유지되어 1395년 새로운 도읍인 한양의 숭교방 지역에 대성전(大聖殿)과 동무(東廡), 서무(西廡), 명륜당(明倫堂), 동재(同齋). 서재(書齋), 양현고(養賢庫) 및 도서관인 존경각(尊經閣) 등의 건물이 완성되면서부터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최고의 책임자는 정3품인 대사성(大司成)을 두었으며, 그 아래에 교수를 두었다. 초시인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유생에게 우선적으로 입학허가를 주었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건국 초에는 150명이었으나. 1429년(세종 11)부터 200명으로 정착하였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유생은 하
상재생(上齋生)이라 하였으며, 소정의 선발시험인 승보(陞補)나, 음서에 의해 입학한 유생을 하재생(下齋生)이라 하였다. 성균관 유생은 기숙사격인 동재와 서재에서 생활하였으며, 출석점수 300점을 받아야 대과초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유생의 생활은 규칙에 의해 이루어지고, 자치기구인 재회(再會)가 있었다. 유생은 기숙사 생활을 하는 동안 국가로부터 학전과 외거노비 등을 제공받았으며, 교육경비로 쓰이는 전곡의 출납은 양현고에서 담당하였다. 유생은 정치현실에도 민감하여 집단상소를 올렸으며, 자신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권당(捲堂: 수업거부)와 공관(空館: 기숙사퇴장)이라는 실력행사를 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재정난으로 성균관의 기능은 약화되었음에도 국립대학격의 성균관은 존속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성균관은 폐지되고, 성균관은 개화의 흐름 속에서 한국의 전통과 도덕을 지켜가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으며, 1946년 성균관대학의 설립으로 그 전통은 유지되었다.
7. 현대에서의 향교의 역할
청소년 인성교육을 비롯하여 서예, 다도, 시조, 선비정신 등 전통문화 계승발전을 기여하고 있다. 특히 서울의 양천향교에서는 주민이 자치적으로 주민복지차원의 일도 병행하고 있다.
성균관에서는 강릉, 울산, 청주, 진주, 순천향교 등 5곳을 지정하였고, 순천향교에 2,000만원을 지원하였다.
<참고문헌>
http://blog.daum.net/009448/16141424 인용 재인용
향교 석전 : 전주향교·제주향교 / 글: 김경선, 이명진, 최숙경, 안경희 ; 사진: 이상윤 국립문화재연구소 2010
(2010年度)京畿道指定文化財 實測調査報告書 : 南陽鄕校 / 京畿道 華城市 2010
선택 13 丹陽鄕校誌 / 편집처: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단양군 : 단양향교 2010
(2009年度)京畿道指定文化財 : 實測調査報告書 : 交河鄕校 / 京畿道 坡州市 [編] 파주시 2009
유교문화체험 프로그램 활성화 방안 연구 / 문화체육관광부 [편] 2009
光州鄕校誌. 乾, 坤 / 光州鄕校誌編纂委員會 光州鄕校誌編纂委員會 2003
호서사림의 본향)충북의 유교문화를 찾아서 / 충청북도 ; 충북학연구소 [공편] 충청북도 2002
첫댓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