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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9:3, 10:18-19, 11:23 / 43:1-5>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고 무너지는 솔로몬 성전, 우상숭배, 질투의 우상, 담무스, 태양신, 새로운 에스겔 성전, 여호와 삼마
1. 말씀배경
오늘 말씀은 지난주 성전정화 사건의 말씀과 관련이 있습니다.
지난주 말씀에 예수님께서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소와 양들을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셨다고 말씀드렸는데, 이렇게 분노한 이유는 첫째는 성전을 장사하는 집,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이므로 더 이상 이런 구약적 제물과 성전이 필요없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제 우리들 마음의 성전을 지어 그 안에 계시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강도의 소굴이 된 성전은 AD 70년에 예루살렘 성과 함께 로마 티투스 장군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부활 승천 후에는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믿는 자들 속에 마음의 성전이 세워진 것입니다.
더러워진 성전이 무너지고 나니 이제는 새성전이 마음속에 세워진 것입니다.
이런 성전을 짓기 위한 주님의 사모함과 열심이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것입니다.
▶ 헤롯 성전이 AD 70년에 무너지는 것과 똑 같이 역사적으로 BC 586년에 솔로몬 성전도 죄로 인하여 무너졌습니다.
솔로몬 성전에서 이루어진 많은 우상숭배로 성전이 더러워졌고 그래서 여호와의 영광이 떠났고, 결국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더러워진 성전이 파괴되고 나니 14년 후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성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났던 여호와의 영광이 에스겔 성전에 다시 임한 것입니다.
[겔 43:4]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5 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마음의 더러워진 옛 성전이 무너지면, 그리고 새로운 성전이 세워지면 다시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는 성령의 전이 되는 것입니다.
2. 여호와의 영광이 솔로몬의 성전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이스라엘의 죄가 무엇일까요?
에스겔서 8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안에서 어떻게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 바깥에 있는 세상사람들의 우상숭배는 말할 나위도 없는 것입니다.
성전 안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그들을 에스겔이 보면서 놀라고 또 놀랍니다.
우리 성경에는 다 번역되지 않았지만 겔8장에서 “힌네” (그런데 보라)가 몇 번이나 나옵니다 (겔 8:2,4,7,10,16)
에스겔의 눈이 놀라서 뒤집혀질 정도입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기 때문입니다.
① 그들은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이 있는 곳 제단문 어귀 북쪽에 질투의 우상을 세웠습니다 (겔 8:3,5), 이곳은 제물을 잡는 곳입니다. 어린양이 죽는 곳입니다. 오늘날로 본다면, 어린양 되신 예수님이 죽는 것처럼 내 자아가 죽어야 하는 곳입니다. 오늘날 철저히 회개하는 장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철철 흘러야 하는 곳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마음의 성전에도 교회공동체에도 예수님이 없는 모습인 것입니다. 자신이 죽지 않고 대신에 다른 우상들을 갖다 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예수를 섬기고 있는 모습입니다.
질투를 일으키는 우상은 아마 므낫세 왕이 세웠던 아마 바알과 아스다롯과 같은 우상이었을 것입니다 (왕하 21:3,7)
하나님은 질투하십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다른 것들에 빼앗기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주님의 질투를 일으키는 우상을 섬기면 안됩니다. 주님보다 이것들에 더 마음이 빼앗기고 있다면 그것이 질투의 우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크게 가증한 일”인 것입니다(겔 8:6)
이런 상황에서도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지 않고 그곳에 있음을 봅니다(겔 8:4)
그러시면서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 (겔 8:6)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치 하나님이 하소연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저들이 자꾸 나를 떠나게 해!
② 또 뜰 문이 있는 쪽에 담을 쌓고 은밀히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 사방 벽에 그려 놓았습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 장로 칠 십명이 사반의 아들 야아샤냐와 함께 향로에 향연을 피우고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겔 8:7-12), 사반은 서기관입니다 (대하 34:15 등) 오늘날 고위층입니다. 고위층 자녀가 그런 것입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은 백성의 지도자들이며 70명이라는 것은 완전수(7)에 충만한 수(10)이므로 모든 장로가 그 모양이라는 의미입니다. 영적 지도자급이 우상숭배를 위하여 담에 작은 구멍만 뚫어 놓은 담을 쌓아 놓고 또 담 뒤에 문을 만들어 놓아 은밀히 은밀히 남 몰래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증한 곤충과 짐승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들은 하찮은 피조물로 인간이 다스려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곤충보다 짐승보다 못한 인간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습을 “가증하고 악한 일”이라 하셨습니다 (겔 8:9)
③ 북문에 이르니 여인들이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을 하고 있었습니다(겔 8:14)
바벨론 종교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바벨론 종교에서 담무스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같은 존재입니다. 세미라미스와 담무스는 모자신인 것입니다.
가물 때에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면 비를 내리게 하여 곡식을 풍성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세미라미스인데 이것이 각 나라에서 이쉬타르, 아스다롯, 이시스, 비너스, 마리아로 불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본다면 이것도 다른 예수를 섬기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큰 가증한 일”이라 하셨습니다 (겔 8:13)
④ 또 성전 안뜰에 들어가니 여호와의 성전 문 곧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스물 다섯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를 하고 있었습니다(겔 8:16)
태양신을 숭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새해가 되면 해돋이를 보고 소원을 비는 것은 모두 태양신 숭배의 영향입니다. 기독교도 바벨론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태양신의 축제일의 영향을 받은 성탄절을 지켜야하나 마나 고민입니다 (시리아 정교회 주교, 바 살리비 주장). 성탄절이 아니라 성육신절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창세 전부터 계신분인데 탄생한다는 것은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이미 계신 분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 앞에 “더 큰 가증한 일”입니다 (겔 8:15)
하나님은 태양과 달, 별들에 마음이 미혹되어 경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4:19] 또 그리하여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해와 달과 별들, 하늘 위의 모든 천체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배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기지 말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안에서 이런 짓을 함에 따라 여호와께서 성소에 머물지 못하고 멀리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가증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한 것입니다. 성전이 더렵혀지면 성령이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죽게 됩니다.
“그들이 여기에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 (겔 8:6)
[겔 18:31]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 오늘날은 예수님을 통하여 주어지는 은혜의 시대이니까 죄를 지어도 성령님 영원히 떠나지 않으십니까? 자칫 구원파가 될 수 있습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닙니다. 성경은 죄와 성령과의 관계에서 죄를 지으면 이렇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성령을 소멸시킵니다 (살전 5:19)
성령을 거스르게 합니다(행 7:51,갈 5:17)
성령을 근심하게 만듭니다(엡 4:30)
성령을 거역(모독)하면 사하심을 얻지 못합니다 (마 12:32, 막 3:29)
성령을 속이면 죽습니다(행 5:3-10)
성령에 참여한 바가 되고 타락하면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고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입니다(히 6:4, 6)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히 10:29)
성령이 시기합니다(약 4:5)
우리 주님은 한명도 잃어버리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대원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런 마음을 모르고 죄의 삶이 지속된다면 예외가 있는 것입니다. 멸망당한 가룟유다도 있습니다. 죄에 따라서 용서받지 못하는 죄도 있는 것입니다.
3. 이런 남 유다의 죄악으로 에스겔은 여호와의 영광이 솔로몬 성전을 떠나 성읍 동쪽 산으로 떠나는 것을 봅니다.
그룹과 함께 성전에 머물럿던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는 장면을 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어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단번에 여호와의 영광이 그룹과 함께 성전 문을 나와 동문으로 떠나가실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가고 싶지 않아서 머뭇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지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떠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한번 그려보세요
① 먼저, 그룹에 머물러 있던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릅니다.
[겔 9:3]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개역개정에는 빠졌지만 원어에는 “떠올라, 올라”(알라/룸)가 있습니다 (겔 9:3, 겔 10:4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그룹에서 위로 떠 올라서 성전 문지방에 이른 것입니다. “그룹아 너 잠시 여기 있어 내가 성전 문지방까지 갔다와 볼께” 마치 이런 분위기입니다.
성전 문지방은 성소의 문의 문지방입니다. 지성소에서 그룹과 함께 여호와의 영광이 머물렀다면 이제 성소의 문까지 여호와의 영광 만이 나온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이동할 때에는 그룹과 함께 이동을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영광이 그룹과 함께 단번에 성전 문으로 나가야하는데, 그렇지 않고 여호와의 영광만 문지방에 이른 것입니다. 왜요, 성전을 떠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떠나고 싶지 않는 마음을 앞으로 계속 더 볼 것입니다.
우리들이 죄를 지었을 때 우리들 마음속에 거하시는 성령님도 아마 이런 갈등을 할 것 같습니다. 마음의 좌소에서 마음의 문까지 왔다 갔다 할 것만 같습니다.
“떠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떠나는 것은 공의이고 머무르고자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과 공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에게서 떠나가면 그는 끝장이니까요. 죽음이니까요.
또 보십시요! 그룹에서 “떠 올라가”가 능동태가 아닌 “수동태”입니다. 이것도 떠나고 싶지 않는데 어쩔 수 없이 떠나야만 하는 하나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떠 밀어내는 어쩔 수 없는 힘은 죄로 인하여 작동되는 하나님의 공의인 것입니다. 사랑의 법으로는 머물러야 하는데, 죄 때문에 떠밀려 떠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성전 문지방은 40장 이후에 보여주시는 에스겔 성전을 본다면 생수가 흘러나오는 곳입니다 (겔 47:1)
그러므로 아직까지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면 영광이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수 있는 것입니다.
성전 문지방에 여호와의 영광이 이르렀을 때에도 여호와의 영화로운 광채가 뜰에 가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직 여호와의 영광에 대한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10:4] 여호와의 영광이 그룹에서 올라와 성전 문지방에 이르니 구름이 성전에 가득하며 여호와의 영화로운 광채가 뜰에 가득하였고
② 그러나 떠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점점 다가옵니다.
성전 문지방에 머물러 있던 여호와의 영광이 문지방을 떠나서 다시 그룹 위에 머무르게 됩니다.
[겔 10:18]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
그룹과 함께 떠나야 하기 때문에 그룹으로 돌아갔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떠나고 싶지 않아 다시 그룹으로 갔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모습은 그룹과 성전 문지방 사이를 오가는 모습입니다.
여기서도 떠나고 싶지 않은 하나님의 마음이 보여집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영광은 그룹과 함께 떠나 다음 머무를 곳으로 갑니다. 어디까지 갔을까요?
③ 여호와의 영광은 이제 그룹과 함께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까지 이르러 머물게 됩니다.
[겔 10:19]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내 눈 앞의 땅에서 올라가는데 그들이 나갈 때에 바퀴도 그 곁에서 함께 하더라 그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물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덮였더라
여호와의 영광이 그룹과 함께 성전문 문지방에서 동문까지 나온 것입니다.
동문은 안뜰에 있는 번제단을 지나 바깥으로 나가는 문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이 있는 성소의 문을 나와 번제단을 지나서 동문까지 이른 것입니다. .
동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출입하는 문입니다. 들어오는 문이요 나가는 문인 것입니다. 들어왔던 그 여호와의 영광이 이제 나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를 나서면 이제 완전히 성전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 관문입니다. 데드라인입니다. 여기서 떠나면 거룩하지 않는 성전 바깥 (바깥 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아직도 동문을 나가지 않았으므로 소망이 남아 있습니다. 회개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오면 동문에서 성소로 다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④ 결국 여호와의 영광은 성전을 떠나서 성읍 동쪽 산에 머무르게 됩니다.
[겔 11:23]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가운데에서부터 올라가 성읍 동쪽 산에 머무르고
성전을 완전히 떠난 것입니다.
떠나서 여호와의 영광이 머문 곳이 성읍 안도 아닙니다. 성읍에도 머무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로 본다면 성전된 교회나 마음의 성전에도 머물수 없고, 도시에도 다 죄로 가득차서 머물 수가 없어서 여호와의 영광이 산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성읍 동쪽 산으로 가야했습니다.
산은 그나마 영적으로 덜 오염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대산교회가 여호와의 영광이 머무는 큰 산 (대산)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성전을 떠나는 과정을 다시 정리해 보면, 처음에는 여호와의 영광이 그룹을 떠나 성전 문지방에서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룹으로 돌아가 그룹들 위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그룹과 함께 마지막 데드라인인 동문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 성읍 동쪽 산에 머물렀습니다.
이 과정에서 “머무르다” (히, 아마드)의 동사는 계속법, 미완료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해석하면 “그리고 머무르고 있었다”입니다.
성전을 떠나고 싶지 않아서 미완료형으로 머물러 있는 여호와의 영광의 모습입니다. 지체하면서 머뭇거리는 여호와의 영광의 모습입니다.
이것도 성전을 떠나지 않고 계속 성전에 머물러 지체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여기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성전을 떠나 성읍 동쪽 산까지 가서도 바로 떠나지 않으시고 다시 성전으로 돌아가고자 계속 머물러 있었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는 곳이 되었지만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면 그 성전은 의미가 없어지고, 보호도 되지 않아 결국 무너지게 되며,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사함받는 길도 없어지게 되고 죽음이 다가오기 때문에 하나님은 계속 머무르시면서 끝까지 기다리시고 계시는 모습인 것입니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십니까? 다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십니까? 우리들을 떠나고 싶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 함께 있고 싶은 하나님의 마음이 절절이 느껴지십니까?
죄로 인하여 우리 마음의 성전에서 떠났다 할지라도 가까이 계셔서 다시 들어오고 싶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떠나지 않고 영원히 함께 하고 싶어서 그 이름까지 “임마누엘”이라 하신 분입니다.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우리들은 마음의 성전을 얼마나 많이 더렵히고 있는지요! 여전히 아직도 자기가 주인인 자기의 우상을 세워놓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의 시간, 물질, 삶이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까?
마음 속에 아직도 강한 탐욕과 음란이 있고, 다원주의 혼합주의가 썩여 있지 않습니까? 혹시 새해에 정돈진에 가서 해돋이를 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그런 우리의 모습임에도 하나님은 지금까지 떠나지 않으시고 머뭇거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근심하면서, 슬퍼하면서, 마치 새색시처럼 우리들이 죄를 짓는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워 하면서 말입니다.
칼빈의 교리와는 다르지만,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닙니다. 긍휼이 거두어지는 데드라인이 있는 것입니다. 종말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회개가 없고, 돌아오지 않아서 하나님께서도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어 그래서 결국 동문을 통하여 여호와의 영광이 떠났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들을 바라보시면서 사랑과 공의 사이에서 지금 머뭇거리고 있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머무를 만큼 머무르다가 끝까지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공의가 작동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4. 그러면 여호와의 영광이 떠난 결과가 무엇입니까?
결국 바벨론에 의해 솔로몬 성전이 무너지게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헤롯 성전이 무너지고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과 같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완전히 떠나면 하나님의 분노가 동시에 쏟아집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고자 할 때에 동시에 활동하는 천사들이 있었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긍휼없이 죽이는 “손에 죽이는 무기를 가진 여섯 사람”과 죽을 자와 산자를 구별하는 “가는 베 옷을 입은 서기관의 먹 그릇 찬 사람”이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겔 9:1-8).
가는 베옷을 입은 서기관의 먹 그릇 찬 사람이 이마에 표를 그린 자 외에는 다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성소 안에 있다고 피할 수 없습니다. (겔 9:3-7). 성소 안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진멸되는 속에서도 살아남은 자가 누구입니까?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입니다. 그의 이마에 먹 그릇 찬 사람이 표를 한 사람들입니다 (겔 9:4)
[겔 9: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1)표를 그리라 하시고
그러므로 오늘날 세상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거룩함을 다 잃어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들은 눈물로 통곡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멸망의 시점에서 살아남는 것입니다.
손에 무기를 잡고 죽이는 자가 성읍 중에 다니며 사람들을 칠 때에 에스겔은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에스겔 9:8] 그들이 칠 때에 내가 홀로 있었는지라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아하 주 여호와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분노를 쏟으시오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두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러나 이미 늦었습니다. 이렇게 되돌릴 수 없는 때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종말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족속의 죄악이 심히 중하고 그 땅에 피가 가득하며 그 성읍에 불법이 차서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려 보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긍휼을 더 이상 베풀지 아니하고 그 행위대로 머리에 갚기 때문입니다 (겔 9:9-10)
기회가 주어지지만 그 기회를 놓치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오는 것입니다.
결국 성전이 우상숭배로 더렵혀지니 BC 586년에 예루살렘 성과 함께 성전도 파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것입니다.
[왕하 25:8]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열아홉째 해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9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겔 33:21] 우리가 사로잡힌 지 열두째 해 열째 달 다섯째 날에 예루살렘에서부터 도망하여 온 자가 내게 나아와 말하기를 그 성이 함락되었다 하였는데
그렇게 오래도록 경고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는데, 이스라엘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영광이 떠났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보호가 되지 않습니다. 성도 함락되고 성전도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나라가 부강하고 약하고가 아닙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강한 나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 하나님 보호하지 않으면 그 나라는 끝이 납니다.
▶ 우리의 마음의 성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더러운 것들로, 우상숭배의 죄로 가득차면 성령님은 떠날 것입니다. 성령이 소멸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떠난다는 것은 멸망인 것입니다. 개인적인 종말도 있습니다. 우주적인 종말도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과 성전, 솔로몬 성과 성전은 그 예표인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성령이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시편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성령이 떠나면 다윗은 전쟁에서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동안 이겼던 것은 다윗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5:10]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죄는 성령을 떠나게 합니다 (겔 8:6). 성령을 소멸시킵니다 (살전 5:19)
성령을 거스르게 합니다(행 7:51). 성령을 근심하게 만듭니다(엡 4:30)
그러면 육적인 사람이 되어 멸망을 당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롬 8:13).
또한 성령이 떠나면 악령이 그를 점령하게 됩니다.
사울이 그랬습니다.
[사무엘상 16:14]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그는 결국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 못하고 악령에 이끌리어 살다가 왕의 자리도 내려와야 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죄가 가득한 성전은 여호와의 영광이 거하실 수 없어 떠나기 때문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마음의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 우리들은 멸망하는 더러워진 옛 성전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성전을 지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이 무너진 14년 후에 새로운 성전을 보여주십니다. 새로운 땅도 보여주십니다. 새로운 예배도 보여주십니다.
성전이 없이 14년 동안 그들을 지내게 한 다음, 성전을 사모하는 즈음에 그들에게 소망의 성전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는 성전도 영적으로 새롭게 지어지는 에스겔 성전과도 같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성전도 동일하게 에스겔 성전처럼 지어야 합니다.
새 성전인 에스겔 성전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는 다음 주에 전할 것입니다.
건물 성전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새성전을 지으셔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교회가 되시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