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낙태에 대한 세상의 시각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여러분들과 함께 이 시대에 큰 이슈가 되어 있는 “낙태”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매우 예민한 주제이므로 조심스러운 면이 있어 망설임이 있었지만 성경말씀을 근거로 힘을 얻고 내 의견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통하여 이 주제에 대한 진리를 우리함께 발견하고자 합니다.
이 주제에 대하여 저를 포함하여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다 자유롭지 못합니다. 낙태를 행했거나 최소한 우리는 낙태에 대하여 동의하거나 방조하거나 무관심했기 때문입니다.
헌법재판소는 2019년 4월에 형법에서 정하고 있는 낙태죄에 대하여 헌법불합치 판정을 내린바 있습니다. 이에 따라 낙태죄는 무효조항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이 판결을 근거로 보건복지부는 2020년 7월 7일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공고한 바 있습니다. 이 개정안을 놓고 낙태를 포괄적으로 허용해야 한다는 여성계도 반대를 했고, 당연히 낙태 허용 자체를 반대하는 기독교계에서도 반대를 했습니다. 찬반논의가 길어짐에 따라 지금은 개정안이 국회에서 의결되지 못하고 자동 폐기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상태는 사실상 형법상 낙태죄가 폐지되어 낙태를 행하는 의사를 처벌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2020년 7월의 개정안은 한마디로 낙태를 임신 기간에 따라 차등을 두고 조건부로 낙태를 허용하자는 개정안입니다. 말씀을 듣기 전에 여러분들은 찬성입니까? 반대입니까? 말씀을 들은 후에 어떻게 마음이 바뀌실지 저도 궁급합니다.
현재의 모자보건법 제14조,제15조에서 낙태의 허용범위를 정하고 있습니다. 본인이나 배우자가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 전염성 질환, 임신이 건강을 해치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에 낙태를 허용하고 있으며, 이 경우 외에는 강간 등에 의한 임신,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 간에 임신된 경우도 낙태가 허용됩니다. 그리고 낙태는 임신 24주 이내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번 개정안에서는 14주 이내에는 제한없이 자유롭게 낙태가 허용되며 15주에서 24주까지는 기존의 모자보건법에서 규정하는 원인에 해당하면 낙태할 수 있고 이번 개정안에 더 추가된 것이 사회적 경제적 사유가 있으면 허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회적, 경제적 사유는 사적인 사유에 해당하므로 24주까지는 낙태가 자유롭게 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개정안인 것입니다.
2. 태아가 생명인가? 아닌가?
낙태의 가장 핵심 이슈는 태중에 있는 태아가 생명이냐? 는 것입니다.
종교계를 중심으로 “생명이다” 그렇지 않는 사람은 아직 생명이 아니고 단지 “세포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낙태를 반대하신 분들은 아마 태중의 태아가 “생명”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태아가 세포덩어리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저 몸속에 있는 혹 하나 떼어내는 것과 같이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낙태를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연간 낙태건수가 음성적, 불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많으므로 통계청 발표와는 차이가 나지만 의사들은 년간 약 50만건 정도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년간 150만 건이 넘는다고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연간 신생아수 약 30만 건보다 많은 수인데요. 그렇지 않아도 우리나라 출산율 감소로 나라가 걱정하고 있는데 낙태로 죽어나가는 생명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놀라운 아이러니입니다.
우리나라 출산율이 감소되어 대체인구수인 2.1명보다 낮은지 오래입니다. 대체인구수는 가임 여성 1명당 2.1명을 낳아야 인구가 줄지도 않고 늘지도 않는 출산율입니다. 2019년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이 0.92명 정도입니다. 한 여성이 평균 한명의 자녀도 낳지 않는다는 겁니다.
낙태만 하지 않아도 우리나라 출산율은 2배 가까이 증가할 수 있습니다.
낙태는 생명윤리 문제뿐만 아니라 출산율을 감소시키는 원인이기도 한 것이죠.
또 다른 낙태의 주범은 헌법재판소에서 낙태 가능한 시기를 임신 22주까지로 명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2주의 의미는 이 기간이 지나야 아이가 태어난 후 생존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프로라이프의사회 회장 차희씨는 “지저스아미” (2020년 10월호)에 기고문을 통하여 이 판단기준에 대하여 강하게 반대의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태아가 통증을 느낄 때, 또는 태아가 독자적으로 움직일 때, 또는 태아가 외부자극에 반응할 때, 또는 태아의 심장박동이 확인될 때 등이 모두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판단 기준의 문제점은 인간의 편의에 따라 만든 잣대에 맞춰서 태아의 생사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인간의 잣대는 상황에 따라서 혹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생명을 규명하는 데에 있어서 과학적 사실 하나면 충분한 것이고, 여기에 법률적 해석이나 정치적 의도 같은 다른 것들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한 때 엄마 뱃속에서 태아였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생명이기에 임신 7주가 되면 눈,코, 귀, 팔다리가 형성되어 사람의 형상이 뚜렷이 보이고, 9주가 되면 심장 박동소리가 들리게 되는데 어떻게 생명이라 하지 않을 수 있는지 진보주의 헌법학자들의 주장을 저도 도무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결국 태아는 생명이며 인격체인 것입니다.
3. 성경은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성경은 태중에 있는 태아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단지 세포덩어리로 보고 있을까요? 이미 태어난 우리들과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을까요? 성경을 근거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 성경은 태중에 있는 아이를 하나님이 귀중한 인격체로 보고 있음이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예레미야 1: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모태에서부터 알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알다”의 히브리어 원어는 “야다”입니다. 이 단어는 부부가 서로 아는 수준의 단어입니다. 깊이 아는 것입니다. 서로 인격적인 연합체가 되었을 때 아는 수준입니다. 만약 태중의 태아를 세포덩어리로 본다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안다”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세례요한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세례요한이 모태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태아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태아가 인격이 아니고 세포덩어리라면 어떻게 성령충만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을까요?
예수님 모친이 될 마리아가 세례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그때 엘리사벳은 임신 여섯 달째였습니다 (눅 1:36,40)
그런데 복중에 있는 태아 곧 세례요한이 복중에서 마리아의 문안함을 듣고 기쁨으로 뛰어놀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 1:41, 44)
[누가복음 1:41]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태아가 생명이 아니라면 어떻게 마리아가 문안할 때 기쁨으로 뛰어놀겠습니까?
여러분, 요새 어머니들 태교를 많이 하시죠?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하고 단시 세포덩어리라면 왜 태교를 합니까? 태교와 낙태행위는 모순이지 않나요?
태아는 이미 태중에서 임신이 되자마자 어머니와 교감하고 느끼고 체험하고 외부 환경도 감지하고 있기 때문에 태교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세포덩어리 제거하듯이 아이를 갈기 갈기 찢어 떼어낸다고요?
성경은 결코 태중의 아이를 세포덩어리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의 생명, 인격체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죠.
4. 저항할 수 없는 생명을 구해야 합니다.
공산주의 유물론처럼 인간을 대하는 사상들이 진보주의자들에게 들어가 전 세계가 낙태죄를 없이하는 단계에 있습니다. 그것은 죄를 합법화하기 위한 그들의 구실인 것이구요. 여기에 속으시면 안됩니다. 마지막 때에는 동성애를 포함하여 성에 대한 순결함이 절대적으로 없어지는 시대가 다가옵니다. 아니 이미 낙태죄가 없어지는 것을 보니 와 있음이 분명합니다.
마지막 때에는 바벨론과 같이 음녀가 활동하는 영적인 음란한 시대가 됩니다 (계 17:2-4) 영적인 음란은 육적인 음란한 시대로 연결됩니다. 영과 육이 같이 가기 때문입니다.
낙태는 세상이 종말로 치닫는 하나의 큰 현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당연시 해서 그들과 같이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안됩니다. 안된다니까요!
하나님께서 귀한 생명을 우리들에게 축복으로 자기들의 유업으로 주셨는데 그것을 차버리면 결코 복을 받지 못합니다.
낙태를 한 그 자궁이 살인의 현장이 되어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신성한 어머니들의 자궁이 살인의 장소가 되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시편에서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모태에서 주를 의지하게 하셔야 합니다. 모태에서부터 주를 찬송하게 하여야 하구요. 모태가 공포와 두려움의 장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시편 71:6]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모태에서부터 사람들을 창조하고 계십니다.
[시편 139:13]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낙태는 생명을 창조를 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업에 방해꾼이 되는 일입니다. 결코 하나님은 그 행위를 의롭다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 낙태는 여성의 권리가 아닙니다. 자기 결정권도 아닙니다. 살인할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낙태는 살인죄입니다. 낙태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방해하는 일입니다. 낙태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일입니다. 낙태를 하면 하나님의 유업을 차 버리는 일이고 낙태를 하면 결국 복을 받지 못합니다. 특히 자녀들이 복을 받지 못합니다.
모태속에 있는 태아는 생명이므로 우리가 그 생명을 구해야 합니다!!. 저항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생명을 이제는 구해내야 합니다.
지금까지 연약해서 몰라서 그런일이 있었다면 회개 가운데로 나아가시고 지금부터라도 낙태를 반대하고 생명을 지키는 일에 동참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