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가서의 개요
아가서는 그 내용이 남녀 사랑에 대한 것으로 너무 사실적인 묘사로 인하여 그 정경성에 의심을 받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표론적으로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곧 그의 신부와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정되어 오늘날 “노래 중의 노래”라는 뜻을 가진 한글성경은 “아가서” 영어는 “song of songs” 히브리어로는 “쉬르 하쉬림‘이란 제목이 붙여져 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사랑이므로 유월절 절기에 아가서를 유대인들은 지금도 읽고 있습니다.
아가서를 볼 때마다 우리들을 향한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경험할 수 있고 또한 신부되는 술람미 여인이 신랑되는 솔로몬에 대한 아름다운 사랑을 통하여 우리가 신랑되신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남녀 교창으로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많은 부분 상징성을 띄고 있어 해석에 난해한 부분도 있으며 화자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오늘 아가서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마음을 깨닫는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2.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아가서에서는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향한 이런 사랑의 호칭을 자주 사용함을 알 수 있습니다 (1:8,2:13,5:9,6:1)
원어를 보면, ”라으야티(라야)는 친구, ”야파티 (야페)는 아름다운, 깨끗한“을 뜻하며, 영어로는 my love my fair, my darling my beautful”입니다. 그러니 “내 사랑, 내 친구는 아름답다“는 호칭입니다.
이것은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는 호칭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님께서 신부된 우리를 부르는 호칭이기도 합니다. 아직 신부로 가꾸어지지 않았어도 이렇게 불러주실까요?
이 ”아름다움“은 술람미 여인이 내면의 아름다움을 갖추어 솔로몬의 친구가 되었을 때 붙여지는 아름다움입니다. 외모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마치 회개한 우리들을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친구라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요15:14-15)
신랑되신 예수님께서 믿는 우리들을 향하여 지금도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자” 라고 부르십니다. 외적인 아름다움을 보고 그러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장애인도 추남도 추녀도 주님 안에서 거룩해지면 아름답다고 하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도 외적으로는 남의 포도원을 지킨다고 자기를 가꾸지 못해서 검고 거무스럼하게 모습입니다, 검은 염소털로 만들어진 게달의 장막 같은 것입니다 (아1:5-6)
하지만 그 내면이 솔로몬의 휘장과 같은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아름다움, 나웨, beautiful)입니다.
게달의 장막은 검은 염소털로 만들어 집니다. 또 염소털로 성막의 덮개를 만들어 덮습니다. 성막의 성소와 지성소는 외부에서 보면 검은 염소털과 붉게 물든 인 숫양의 가죽과 그 위에 해달의 가죽으로 덮혀 있어 겉으로는 볼품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소와 지성소의 내부는 청색, 홍색, 자색,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만든 휘장이 덮혀 있고 벽체는 조각목으로 만들어 금으로 입힌 화려함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술람미 여인도 겉은 검고 거무스럼하지만 내면은 솔로몬의 휘장처럼 화려하고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그녀를 아름답게 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외부는 볼품이 없다 하더라도 회개한 양심을 가져 있다면 솔로몬의 휘장처럼 주님은 우리들을 아름답게 보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이런 모습입니다.
[이사야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의 인성은 사람들과 같이 된 초라한 모습이지만 그의 신성은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3. 때가 되었다, 일어나 함께 가자
솔로몬이 이런 술람미 여인을 사역에 동참시키고자 이제 부르십니다.
“일어나서 함께 가자” (쿠미 울레키)
“쿰”은 “일어나다”는 뜻입니다 (달리다쿰, 소녀야 일어나라, 막5:41)
우리들은 주님 안에서 은둔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14절에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처럼 말입니다. 마치 수도사가 광야 바위 틈에 굴을 파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은둔의 시간을 가지지 않고 싸돌아 다닙니다. 그러면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꿀 수 없습니다. 이런 은둔의 시간을 갖는 동안이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시간입니다. 은둔하다가 보니 외면은 가꾸기 쉽지 않습니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이루어지면 때가 되었으므로 이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 주저 앉아 있으면 안됩니다. 이제 주님과 함께 사역하기 위해서는 일어나야 합니다. 하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일어날 때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적계절이 ”겨울도 지나갔습니다 (완료형), 비도 그쳤습니다“ (완료형) 겨울이요 비가 올 때는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일 할 수 없는 때까지 일어나 함께 가자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그동안 영적으로 긴 겨울을 보냈습니다. 비가 와서 도무지 일할 수 없는 시즌에 있었습니다. 어둠의 세력들과 영적 싸움을 하느라고 긴 영적 겨울을 보냈고 비도 많이 맞기도 했습니다. 이 기간은 훈련 기간이었습니다.
이제는 그 기간이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면에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습니다“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면 머지 않아 곡식과 열매가 맺히는 시기가 옵니다. 포도나무도 꽃을 피워 향기를 풍기를 풍기고 있으며, 가장 먼저 열리는 무화과 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벌써 맺혔습니다.
▶영적인 겨울을 지내고 영적인 비를 맞으며 인내하며 기다린 결과입니다. 대체로 겨울이 추워야 농사가 잘된다고 합니다.
우리들은 그동안 오래동안 힘들게 영적 싸움을 하면서 인내하며 살아왔습니다. 이런 시련과 고통이 거름이 되어 드디어 꽃이 피고 가장 먼저 달리는 무화과는 푸른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 13절에, 또 다시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에게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하면서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초청합니다.
두 번이나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 관계를 언급하면서 초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내 사랑이 되었다. 너는 내 친구가 되었다. 오랜 시련과 고난을 통하여 나와 서로 사랑하는 단계가 되었으니 일어나자 함께 가자” 라고 초청하는 것입니다.
때를 놓치면 안됩니다. 그 이유는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아2: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
포도원에 꽃이 피어 있는 지금 시기에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여우가 뿌리를 갉아 먹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작은 여우를 잡으러 함께 일어나 가야 합니다.
“슈아림 슈아림” 두 번이나 복수 형태로 “여우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많은 여우들입니다. 그런데 작은 여우라고 합니다. 작아서 잘 보이지 않고 간과하기 쉬운 여우들입니다. 그러나 그냥 두면 이것들이 포도원을 망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속에 잔잔한 벌레와 같은 영적 존재들이 우리들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파리와 같은 것들, 작은 영적 유충들도 잡아야 합니다. 뱀과 용과 같은 것들도 잡아야 하지만 작은 것들도 그냥 두면 위험합니다.
이런 여우를 잡을 때 신랑과 함께 해야 합니다. 곧 오늘날 예수님과 함께 잡으러 가야 합니다.
4.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어떻게 여우를 잡습니까?
먼저 얼굴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예배의 자리에 오는 것입니다. 기도의 자리에 오는 것입니다. 사역의 장소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아오는 얼굴이 “아름다운 얼굴”(나웨)인 것입니다 (14절), 그리고 네 소리를 듣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소리입니까? 기도의 소리, 간구의 소리입니다. 사역을 위한 소리입니다. 그 소리가 “부드러운 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아레브, 즐거운, 달콤한, 감미로운)
우리들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하지만 (샤마) 또한 우리의 기도소리가 하나님께 들리게 해야 합니다.
▶ 그동안 술람미 여인은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었습니다.
바위 틈은 갈라진 반석 (셀라, 민20:11)으로 십자가에서 살 찢기신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그동안 우리들은 잠근 동산과 같고 덮은 우물과 같고 봉한 샘과 같이 예수님 안에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이것도 다 우리를 신부 만들기 위함입니다. 영적 순결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 은밀하게 세상에 물들지 않고 비둘기처럼 (14절) 오직 한 곳 주님 만을 바라보며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때가 되면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포도원으로 나와서 포도원, 영적 필드에서 얼굴을 내밀고 예배하며 기도하며 사역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우를 잡는 사역에 동참하라는 것입니다.
<맺는 말>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동안 예수님 안에서 바위 틈에 숨어 있다시피 한 우리들에게 이제는 나오라고 일어나라고 부르십니다. 겨울을 지내면서 비를 맞으면서 기다린 오랜 세월은 우리를 예수님의 아름다운 신부, 친구로 만들어졌습니다. 오늘 그 아름다운 신부의 정체성으로 우리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일어나 함께 가자, 작은 여우를 잡으러 가자”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들으시고 주님 나라를 위하여 사역을 위하여 결연히 일어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