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어권 세계를 다니면서 수업료를 받고 광범한 주제에 대해 가르쳤다.
'소피스트'라는 말은 그리스어 sophistes에서 유래했으며, '영리한' 또는 '능숙한 사람'을 뜻했으나 점차 '현인'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BC 7~6세기의 '7현인'도 소피스트라고 불렸다(→ 그리스 7현인)프로타고라스
소피스트들은 많은 저술을 남겼다. 현재 대부분 제목만 남아 있지만 최근에는 그리스도교 시대에 그들의 저술을 베낀 약간의 파피루스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소피스트의 주장을 요약·모방한 후대의 저술들이 있는데,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AD 3세기 시리아의 신플라톤주의자 이암블리코스가 쓴 〈철학에 대한 충고 Protrepticus〉와 섹스토스
BC 5세기의 소피스트
지금까지 이름이 남아 있는 이 시기의 소피스트는 약 30명이며 중요한 인물은 프로타고라스·고르기아스·안티폰아테네(교육사)
소피스트 사상의 본질
소피스트들이 진리를 중요시하지 않고 논쟁에서의 승리만을 가르쳤다는 플라톤의 평가는 아직도 별 의문 없이 받아들여진다(→ 논쟁술)
그러나 플라톤도 현상세계에는 반논리적인 면이 있음을 인정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키가 한 대상보다는 크고, 다른 대상보다는 작은 것처럼, 한 진술이 그와 모순되는 다른 진술에 비해 진리의 정도가 더 크다고 할 수 없을 때, 이 현상은 반논리적이다(→ 관념). 그리고 플라톤은 이 반논리적 현상에 대한 연구가 진리를 얻는 데 꼭 필요한 예비단계라고 보았다. 이 맥락에서 보면 소피스트의 반논리 사용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은 지나친 면이 있다. 그러나 고대와 근세의 사상가들은 대부분 소피스트들을 철학자로 여기지 않았고 그들의 사상도 철학적 가치가 없다고 평가했다.
근세 사상가 중 소피스트를 그리스 철학의 역사 속에 다시 끼워넣은 최초의 인물은 헤겔변증법엘레아 학파
완전한 회의주의의 위험이 도사리는 이러한 경향은 이제 인간이 자연현상의 궁극적 기초를 알 수 없다는 불신을 팽배하게 만들었다. 철학은 막다른 골목에 빠졌다. 헤겔에 의하면 이러한 극단적 처지가 소피스트 운동이라는 반정립을 불러일으켰다. 소피스트 운동은 객관주의자들의 정립을 거부하고 자연 대신 인간에 관심을 집중했다. 헤겔은 소피스트들을 주관적 관념론자로 보았다. 헤겔이 보기에 그들은 오직 정신과 그 내용만이 실재라고 주장했고, 그결과 인식의 주관적 요소에 관심을 둠으로써 철학이 발전할 수 있었다(→ 관념론)
소피스트들과 이전 철학자들의 대조적 사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종합'되었다. 플라톤 이후 많은 철학자들은 형이상학
교의
개요
소피스트들의 어떤 저술도 완전히 남아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각 소피스트의 교의를 엄밀하게 재구성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들에게 교사라는 직업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는 영국 역사학자 조지 그로트
이론적 문제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는 소피스트 운동 전체의 공통점으로 여겨졌다(윤리적 상대주의)
프로타고라스는 지식을 감각경험에 제한했지만 감각으로 안 것은 틀림없이 참이라고 생각했다. 고르기아스는 존재하는 것은 없고, 존재한다고 해도 알 수 없으며, 안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고르기아스가 공격하고 있는 것은 지각된 실재나 지각능력이 아니라, 지각된 것에 존재나 비존재를 부여하려는 시도이다. 프로타고라스와 고르기아스는 감각 불가능한 존재가 있다는 엘레아 학파의 주장을 거부했다.
소피스트들은 현상세계 내에 관찰자를 포함시킴으로써 현상 외부의 원리에 의존하지 않고 현상세계를 설명하려고 했다. 소피스트들은 과학과 물질세계에 대한 탐구를 반대했다고 알려져왔다. 그러나 히피아스·고르기아스·프로타고라스·프로디코스 등을 보면 사정은 정반대이다. 그들은 감각으로 알 수 없는 원리에 호소하여 물질세계를 설명하려는 시도에 반대했을 뿐이다.
소피스트 운동의 가장 유명한 교의는 도덕에서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관례적인 것이 서로 대립한다고 본 점이다(자연법)
그러므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도 인간의 본성에 기초한다는 의미에서 소피스트들이 시작한 접근법을 계승한 것이다.
인문주의 문제
소피스트의 특징으로 그들이 그리스의 전통적 종교관을 공격한 점이 자주 거론된다(그리스 종교). 사실 프로타고라스는 신의 존재를 알 수 없다고 말했고 프로디코스는 종교의 발전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했다.
크리티아스는 신을 악인에게 공포감을 주기 위해 발명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올림포스 신들에 대한 이러한 적대감은 소피스트에게만 특유한 것이 아니었다. BC 6~5세기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 대부분이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소피스트의 인간중시 사상은 곧 인간사회의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반영한다(역사철학)
그들에게 인간의 역사는 야만에서 문명으로 가는 진보의 과정이었다. 프로타고라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교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소피스트의 견해는 후세의 교육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인문주의 전통의 한 부분이 되었다.
2차 소피스트 운동
그리스 문학은 BC 1세기와 초기 로마 제국시기에 쇠퇴했지만, AD 1세기에 이르러 그리스어 문화권에서는 소피스트들의 웅변술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커졌다. 이러한 그리스 정신의 부활은 수사학자·웅변술가·산문작가 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스스로를 '소피스트'라 불렀다(아티카 학파). 그뒤 2세기에 들어 그리스 시인들은 이른바 '제2차 소피스트 운동'을 폈다. 그러나 이 운동은 BC 5~4세기 아테네 작가를 본보기로 삼은 퇴행적 운동이었다. AD 3세기가 되면서 이 운동은 곧 쇠퇴해 그리스 문학의 주된 흐름에서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