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를 가장 화려하게 보냈던 밴드를 꼽으라면 스매싱 펌킨스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너바나를 비롯한 시애틀 4대 천황이 군림하던 시절, 음악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직접적으로 그런지군(群)에 편입되는 것은 피하면서도 그 수혜를 충분히 누렸다고 할 수 있고, 커트 코베인의 자실과 함께 ‘그런지의 죽음’이 운운되던 시절에도 포스트 그런지의 비전을 기획한 최초의 메인스트림 밴드이다. 이처럼 빌리 코건이라는 영민한 뮤지션에 의해 적절하게 시도된 여러 가지 기획들로 인해서 그들은 90년대에 살아남은 소수의 밴드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이들의 지나온 궤적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베스트 앨범 [Greatest Hits]가 발표되었다.
글│이일환 Editor ·사진 제공│EMI
1-1
지난 세기말의 10년은 한마디로 정의될 수 없는 시기였다. 다양한 뮤지션에 의해서 광범위한 스타일의 음악들이 갖가지 방법으로 실험되었고 그 결과물들 또한 인터넷을 비롯한 여러 혁신적인 방법으로 널리 배포되었다. 불특정 대중으로부터 지지받게된 거대한 공룡 같은 밴드들이 있었는가 하면 대중의 기호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소수의 매니아들을 사로잡은 젊은 파이오니어들도 있었다. 기술적인 진화로 전전후 싱어 송라이터들이 등장하는가하면 로파이 미학에 기반한 인디 무브먼트는 스스로를 차별화하면서 주목을 얻어내었고 인터넷의 등장으로 취약점이었던 지역성의 한계를 극복하는데도 성공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자연스럽게 메이저급 마이너 레이블들의 탄생도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0년대를 호령한 영웅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밴드와 뮤지션이 떠오를 수 있지만 스매싱 펌킨스를 그 대열에 합류시키는데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2-1
작년에 내한했을 당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빌리 코건은 ‘적어도 미국에 있어서 미디어들이 예술과 엔터테인먼트를 구분해주지 않는다’며 엉터리투성이의 음악계에 대해서 성토한 적이 있다. 물론 빌리 코건이 예술과 엔터테인먼트의 경계가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의 성토에는 본질적으로 자신들을 포함한 음악계, 그리고 예술적인 영역으로 취급될 수 있는 것들을 포함하여 지금 세상을 굴러가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역시 돈이라는 것에 대한 자조적인 푸념이 섞여 있다. 빌리 코건처럼 영민한 뮤지션의 입에서 이런 푸념이 나올 정도였다면 성공한 대박 밴드였던 그들 또한 여전히 상업적 성공이라는 거대한 중압감에 짓눌리는 짜증나는 상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방증해준다. 앨범이 발매되면 온갖 미디어의 조명을 한 몸에 받으며 Top 10 차트에 오르는 것이 자연스럽게 기대되는 블록버스터 밴드들이 있다고 하자, 이들에게 과연 아무런 동요없이 스스로의 비전을 지키면서 음악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가능할까? 4백만 장의 앨범 판매고를 올리던 밴드에게 5만 장이 팔려도 좋으니 네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라고 독려해줄 레이블 프로듀서가 있을까? (실제로 중견 밴드들의 멀쩡한 새 앨범이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레이블 프로듀서에 의해서 발매를 거부당하는 사태가 적지 않게 발생한다.) 이런 점을 고려해보면 음악 비즈니스와 타협하지 않고 아티스트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빌리 코건이 스매싱 펌킨스의 해체를 결정한 것은(그것이 단독적인 결정이든 밴드의 중론이었던 간에) 자연스러워 보인다.
2-2
여기서 아직도 해체하지 않고 이 더러운 멍키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꿋꿋이 버티고 있는, 버티는 차원을 넘어서 즐기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밴드들은 무슨 경우냐고 질문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U2처럼 아티스트적인 자존심을 버리지도 않고 음악 비즈니스와도 적절하게 타협해오는 데 성공한 (적어도 그런 것처럼 보이는) 밴드들도 분명히 존재하니까 말이다. 그들은 어찌되었든 스스로를 설득할만한 길을 찾은 밴드들이다. 그렇지만 빌리 코건은 그렇지 못했고 그것을 두고 아쉽다거나 안타깝다고 궁시렁 대는 것은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 그는 지금 가던 길을 멈추거나 선회하기를 택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걷기로 작정했을 뿐이니까.
3-1
신곡 'Untitled'을 포함해서 여기에 선보인 스매싱 펌킨스의 베스트 앨범은 지난 90년대에 그들이 지나온 궤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앨범이다. 이미 그들의 팬이라면 충분히 친숙한 곡들로 채워져 있고, 설령 그들에게 무관심했던 사람이라도 'Today'처럼 귀에 익은 곡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편집 앨범의 묘미는 선곡과 배열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텐데, 과거 비스티 보이즈의 베스트 앨범을 연상시키는 아트워크로 꾸며진 이 앨범은 역시 비스티 보이즈의 그것만큼이나 훌륭한 편집 앨범으로 여겨진다. 다만 영화 'Singles'의 OST에 수록되었던 'Drown'이 풀버전으로 실리지 않고 에디티드 버전으로 수록되어 있다는 것과 역시 'Batman & Robin'의 OST에 실린 'The End Is the Beginning Is the End'가 빠져있다는 것은 아쉽다.
3-2
이미 스매싱 펌킨스는 정규 트랙으로 채택되지 못한 미발표곡들과 커버 곡들, 신곡들을 모아서 그들의 마지막 앨범 [Machina II: The Friends And Enemies Of Modern Music]의 음원과 아트워크를 포함한 모든 것을 상업적 음반이 아닌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배포하면서 음악 비즈니스계의 장악해버린 흉포한 상업적 마인드에 엿 먹여준 일이 있다. (이 앨범은 각각 세 장의 10인치 LP와 12인치 LP로도 제작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착각처럼 세상의 모두가 인터넷과 컴퓨터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과 그다지 좋은 음질의 음원이 아니었다는 것을 상기해보면 음반으로 존재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여겨진다(다행히도 이 보너스 CD로 인해서 두 장의 값을 받는 것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Machina II]를 포함한 여러 가지 희귀한 트랙들이 수록된 보너스 CD는 특별한 기획인 셈이다. 물론 여기에 수록된 음원들이 일관된 지향점이나 고른 수준의 완성도를 지닌 것은 아닌데다가 여전히 마스터링이 정교하게 이루어진 수준의 음질은 아니지만 보너스라는 점과 온라인 상에서 공개된 [Machina II]보다는 훨씬 향상된 음질이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하다. 특히 완벽하게 디페시 모드 취향의 사운드를 재현하고 있는 'Saturnine'나 자괴적인 가사와 멜로디가 생소한 발라드 넘버 'My Mistake'처럼 정규 앨범에서는 기대하기 힘든 다소 일탈에 가까운 트랙들이 흥미와 새로운 재미를 자극해줄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 [Adore]와 [Machina]시절에 만들어진 곡들이다.
BIOGRAPHY & DISCOGRAPHY
Part 1 : New Band From Chicago
19세에 집을 떠나서 플로리다에서 더 마크드(the Marked)라는 고딕 메탈 밴드에서 활동하던 빌리 코건은 다시 그의 고향인 시카고로 돌아왔다. 그는 아르바이트하던 레코드샵에서 블랙 새버쓰를 비롯한 비슷한 취향을 가진 제임스 이하를 만났고 클럽에서는 다아시를 만나서 스매싱 펌킨스를 결성했다. 트리오로 출발한 이들은 곧 드러머를 구하게 되었고 재즈 드러머였던 지미 챔벌린이 스매싱 펌킨스의 마지막 멤버가 되었다.
"지미를 처음 만난 것은 아마 1988년에 우리가 처음으로 메트로에서 공연을 갖기 4주에서 6주정도 전이었을 겁니다. 우리가 모두 기다리는 가운데 모습을 나타냈어요. 지미는 핑크 셔츠에 스톤 워시 청바지를 입고 노란 드럼을 들고 있었습니다. 우린 그 모습을 보고 뭔가 이건 아니야, 우리가 찾던 드러머가 아니잖아 라는 어조의 눈빛을 주고받았지요. 그렇지만 그와 한번만 맞춰봤을 때 우리는 연주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어요. (…) 1988년 10월 15일이었지요. 당시 우리는 일개 지역 밴드에 지나지 않았으니 무척 긴장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떠들고 있었지요. 수요일 밤, 시카고 바에 모인 사람들은 맥주를 마시지 않아요. 그래서 우린 마샬 앰프가 떠나가도록 크게 연주했지요. 아무도 떠들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첫 스타일이었지요, 모두들 입 닥치고 조용해!”(빌리 코건)
시카고에서 스매싱 펌킨스는 곧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특히 그들은 각종 스타일의 독특한 조합으로 당시의 밴드들과는 차별화된 음악을 들려주었다. 칩 트릭의 릭 닐슨(Rick Nielsen)는 빌리와 스매싱 펌킨스의 음악에 대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에 대해서 빌리 자신이 가사나 음악에 있어서 무엇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을 꼽았다. 클럽에서의 성장과 더불어 스매싱 펌킨스는 버진 레코드의 산하 레이블인 캐롤린(Caroline)에서 데뷔 앨범 [Gish]를 발표하게 되었다. 너바나의 프로듀서로 주목받던 얼터너티브의 교사자 부치 빅(Butch Vig)의 프로듀스로 제작된 이 앨범은 스매싱 펌킨스가 언더그라운드 씬을 넘어서 주목을 받게되는 계기를 마련해주기에 충분한 호응을 몰고 왔다. 밴드는 이런 기세를 몰아 레드 핫 칠리 페퍼스와 펄 잼의 오프닝 밴드로 투어를 하면서 인지도를 넓혀간다.
The One From [Gish](1992)
Part 2 : Dream Explosion
"약 14개월 동안의 「Gish」의 투어를 우리 밴드 외에 심각하게 고려할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조금 더 성장했고 22살의 철부지처럼 행동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곡을 쓰기 시작했고 행복하고, 슬프고, 정신나갔는가 하면 멍청했던 우리의 모든 것을 앨범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결국 [Siamese Dream]이 만들어졌습니다.”(빌리 코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의 두 번째 앨범 [Siamese Dream]은 대박을 터뜨리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들 자신을 포함한 그 누구도 그들이 그렇게 거물이 되리라고 기대하진 못했다. "좋은 앨범을 만든 다음에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서 직장을 구하자"고 농담할 정도였으니까. 이 앨범은 보스톤, 블랙 새버쓰에서부터 80년대의 팝/락 밴드에 이르기까지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에 이르는, 빌리가 들어왔던 모든 자양분이 녹아내린 사운드를 들려주었는데, 이것은 결코 무의식적인 것이 아니어서 빌리 스스로 자신이 누구로부터 무엇을 영향받았는지 항상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그는 예나 지금이나 헤비메틀 음악들을 많이 들어왔다고 고백했다.
"당신도 기억하시겠지만 당시로서는 헤비하다는 것이 쿨(Cool)한 것은 아니었지요. 오히려 매우 70년대적인, 케케묵은 것이었지요."
그러나 그들의 음악이 단순히 과거의 스타일을 조합해놓은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음악은 친숙하면서도 독창적인 부분이 있었고 특히 도래의 공감을 살 수 있는 진실한 내면을 담고 있었다. 특히 빌리의 노래는 굉장히 사적인 것이었는데 앨범을 통해서 빌리는 스스로를 이야기한 셈이었고 당시 팬들은 그와 모종의 연결고리를 느낄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 받은 학대받은 사람은 스스로를 표현할 자신감이 매우 낮습니다. 생각하고 느끼는 것들을 실제로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고민하게 되고 결국에는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Siamese Dream]에서는 정말 제 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진짜로 제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제 내면을 이야기하기로 선택한 것은 제가 노래하는 방식이 되었습니다. 나는 살고 싶었어요.”(빌리 코건)
[Siamese Dream]은 이들을 확실하게 얼터너티브 세대의 대표주자로 부상하게끔 만들어주었다. 작곡, 작사는 물론 솔로 기타와 베이스까지 독점해버린 리더 빌리 코건의 음악적 카리스마는 팬들에게 확실한 인상으로 각인되었고, 'Cherub Rock', 'Today'와 같은 싱글들의 연속된 강타로 얻어진 명성을 바탕으로 이들은 94년 롤러팔루자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로 초청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The One From [Siamese Dream](1993)
Part 3 : Flying With Butterfly Wings
1994년 8월에 싱글 B-사이드 곡들과 미발표곡을 모은 앨범 [Pisces Iscariot]을 발표한 스매싱 펌킨스는 드디어 95년에 빌리 코건이 그 동안 공언해왔듯이 더블 CD로 제작된 세 번째 오리지널 앨범인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를 발표한다. 마지막 앨범이라는 각오로 만들어진 이 앨범은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는, 정확히는 기대를 상회하는 음악을 들려주는 데 성공하였다. 밴드의 비전을 현실화시켜줄 프로듀서로 플러드(Flood)와 앨런 몰더(Alan Moulder)가 영입되었는데, 제임스의 증언에 의하면 플러드는 심사숙고형의 인물이라기보다는 본능에 의지하는 스타일의 프로듀서였다고 한다. '1979'처럼 어쿠스틱 사운드와 일렉트로니카가 완벽하게 조율된 넘버는 플러드의 손을 거치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Bullet With Butterfly Wings'로 시작하여 '1979', 'Zero', 'Tonight, Tonight'으로 이어진 히트행진으로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는 90년대에 발표된 앨범 가운데 가장 야심찬 기획으로 기록될 수 있었다. 두 장이라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차트 1위로 등극하면서 그들의 디스코그래피에서 가장 높은 판매고를 올린 이 앨범은 레이블 관계자나 밴드 스스로 염려했던 '두 장 짜리 재앙'이 아니라 '두 장 짜리 대박'으로 판명되었다. 이들의 약 일년에 걸쳐서 5차례에 걸친 투어에 160∼180회 공연을 강행했고 매공연마다 사람들은 점점 늘어갔다.
"Mellon Collie와 관련된 우리의 스케줄은 6개월 동안 아침부터 자정까지 하루도 빠짐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 이 앨범은 당시의 시대 정신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앨범을 여행으로 비유하자면 여행 내내 당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빌리 코건)
The One From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1995)
Part 4 : Songs From Infinite Sadness
"우리는 일주일에 4일을, 하루에 6시간을 일하면서 앨범을 6주안에 녹음해야했다. 그런 상황에서 지미의 소식을 들었을 때 어처구니없는 웃음 밖에는 안나왔다. 게다가 투어도 해야하는 상황이었는데 말이다.”(다아시)
스매싱 펌킨스에게 가장 위기의 순간이 닥쳤다. L.A.에서 멜랑콜리 투어 중에 밴드의 세션 기보디스트인 조나단 멜보인이 약물과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역시 약물에 중독되어 있었던 지미 챔벌린은 조나단의 죽음에 책임을 지는 한편 밴드를 위해서, 그 자신을 위해서 가장 친한 동료였던 빌리에 의해서 해고되는 지경에 이른다. 설상가상으로 빌리의 어머니가 암으로 별세하는 개인적인 아픔이 심화되면서 빌리는 극도로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되었다. 필터(Filter)의 드러머였던 매트 워커(Matt Walker)와 프로그스(Frogs)의 키보디스트인 데니스 플레미언(Dennis Flemion)가 긴급 투입되어 남은 5개월간의 투어를 마쳤지만 이 후 긴 휴식기에 들어가게 된다. 그 사이 제임스 이하는 솔로 앨범인 [Let It Come Down]으로 데뷔하는 등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스매싱 펌킨스의 공식적인 활동 재개는 영화 '배트맨과 로빈'의 사운드트랙에 실릴 'The Beginning Is The End Of The Beginning'을 녹음하면서 시작되었다. 지미가 없던 최초의 삼인조 밴드로 돌아간 스매싱 펌킨스는 달라진 상황에 맞추어 과거를 고집하진 않았다. 과거로 돌아가 예전 같은 사운드를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오히려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둘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이들은 지미 없이 예전과 같은 헤비한 락 음악을 고수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여기고 매트 워커의 세션과 미디 작업을 이용한 비트를 도입하면서 일렉트로니카적인 접근을 시도한 네 번째 앨범 [Adore]로 컴백하였다.
"[Adore]는 아마도 빌리에게는 좀 더 개인적인 앨범일 것이다.”(제임스 이하)
락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다 어둡고 내성적인 사운드를 들려주었던 이 앨범은 기대와는 달리 평론가들로부터나 팬으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얻어내는 데 성공적이지 못했다. 정작 앨범의 새로운 사운드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밴드의 뒷이야기만이 점점 무성해져갔기 때문에 이 앨범은 밴드의 통제를 벗어난 괴물처럼 되어버렸다.
"우리가 변화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달라졌으면서도 여전히 성공적인 밴드로 남아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단한 도박을 걸었습니다. 만약에 제대로 들어맞아서 그 도박에서 성공했다면 우리는 천재들처럼 보였겠지요. 하지만 그렇지 못했기에 바보처럼 보이고 말았지요.”(빌리 코건)
The One From [Adore](1998)
Part 5 : The Last Supper
빌리가 가장 신뢰하는 멤버였던 지미 챔벌린은 공식적으로 밴드로 컴백했고 한 장의 앨범을 더 녹음하기로 결정했다. 지미와 빌리 사이에서는 음악적으로 뭐가 제대로 된 소리고 그렇지 않은 소리인지 깊은 공감대가 존재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미는 엄처난 파워의 소유자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자신이 가진 재즈 백그라운드, 즉 스윙이나 비밥, 소울을 락 음악에 도입하는 섬세한 면도 지닌 능력있는 드러머였다. 그러나 다섯 번째 앨범 [Machina: The Machines Of God]의 녹음 중에 다아시는 아직까지도 노 코멘트로 일관되고 있는 개인적인 이유로 밴드를 떠나기로 결심하게 된다. 투어 동안 다아시를 대신해줄 베이시스트로는 홀(Hole)의 멜리사 아우프 데 마우어(Melissa Auf Der Maur)가 영입되었다.
이 앨범은 지금까지의 스매싱 펌킨스의 앨범 가운데 가장 모호한 앨범이다. 사운드에 있어서도 [Gish]와 같은 초기작을 상회하는 거칠고 헤비한 톤으로 일관한 'The Imploding Voice'와 같은 곡이 있는가 하면 부유해 다니는 느낌을 전하는 톤으로 그 어느 앨범보다 사이키델릭한 무드를 연출하고 있고 [Adore]에서 들려준 일렉트로닉 노선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Raindrops+Sunshowers'나 'The Scared And Profane'에서는 여전히 지미 챔벌린을 대신하고 있는 드럼 머쉰의 비트를 들을 수 있다. 이 앨범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스매싱 펌킨스의 사운드를 종합판이라는 면에서는 확실해 보였다. 이 앨범은 오리지널 곡으로 채워진 베스트 앨범이었으며 스스로나 밴드를 위한 최후의 선물이었다.
2000년 5월 23일 LA의 지역 라디오 방송에 출연한 빌리 코건은 밴드의 해산을 공언하였다. 이후 앨범 [Machina: The Machines Of God]을 위한 투어를 마친 후에 고향 팬들을 위해 시카고의 클럽 메트로에서 마지막 공연을 가진 후에 스매싱 펌킨스라는 이름으로 공연을 보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빌리 코건은 인터뷰를 통해서 스튜디오 녹음을 위해서 스매싱 펌킨스가 모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열어 두었다.) 이런 와중에서 불행 중 다행으로 2000년 8월에 밴드는 서울을 방문하여 공연을 가졌다. 이후 인터넷을 통해서 배포된 각종 미발표 음원들의 모음집인 [Machina II: The Friends And Enemies Of Modern Music]을 끝으로 스매싱 펌킨스는 해산하였다.
The One From [Machina: The Machines Of God](2000)
현재 스매싱 펌킨스의 홈페이지에 가보면 빌리 코건과 지미 챔벌린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새로운 밴드, 즈완(Zwan)의 홈페이지를 링크하고 있다. 즈완의 홈페이지에는 라인업과 공연 스케줄의 간결한 공지만이 존재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만나게 될 새로운 밴드 즈완에 대해서도 빌리 코건은 앞서 언급한, 오늘 거리에서 어제 침대를 함께 한 낯선 이성을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의 감정을 요구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