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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농 사무실 이사에 이것저것 정신이 없어서 오랜만에 올립니다. 다시 틈틈이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의장님께서는 광주민중항쟁당시 탈취해서 당신이 가지고 계셨던 칼빈소총을 비닐에 싸서 전남 어디에 묻어두셨다는 말씀을 종종하시곤 하셨는데..
이번 글은 의장님이 직접 겪으셨던 80년 광주민중항쟁 이야기입니다.
정광훈의 농민운동이야기 4
농민의 길 통권 7호(2004.05)
전남 강제농정철폐 대회 망치는 80년 5월 17일
전두환이 반란 일으키는 날
5월 17일 가톨릭 센터 농민회 사무실은 바쁘다. 19일 전남 농민 “강제농정 철폐”대회 준비하느라 각구목 피켓엔 “강제농정철폐”라고 글씨를 쓰는 사람, 붉은 머리띠를 자르며 매직으로 구호를 쓰는 사람, 담양에서 왔다는 대나무로 죽창을 만드는 사람, 플랑카드 글 쓰는 사람, 지하에서 작업하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그날 집회는 농민운동 잘하는 지역이 아닌 앞으로 조직을 해나갈 수 있는 농민운동 무공해 지역에서 많이 동원할려고 했었다. 그래서 데모를 통해서 청년들도 간댕이를 키워야 한다며 몇차례 교육도 했었다. 남녀 청년들이 우굴우굴 많았던 영암군 삼호면으로 19일 인원 동원차 부당한 농정에 대한 교육을 하던 차에 라디오 방송에서 “광주계엄선포”소식을 들었다.
무공해 청년들에겐 공포와 충격이었다. 교육은 하다말고 그들이 내놓은 딸기만 몇 개 집어먹고 광주가 심상치 않으니 빨리 가봐야겠다고 강진 정순이, 해남 남흥이랑 급하게 대회준비중인 금남로 가톨릭센타로 모였다. 5층 사무실에서 내려다보니 완전무장한 공수대들이 M16총에 칼을 꽂고 아주 위협적으로 시민들과 격렬한 투석전을 벌이고 있었다.
농민운동에 처음 맛을 본 해남 마산면 이영춘 선생은 학교 교장과 불의에 항의하다가 그만두고 농민운동이 아주 체질에 맞는 운동이라며 집회가 있을 때마다 참가했다. 가농사무실 5층에서 내려다보니 이영춘 선생이 돌멩이를 던지기도 하고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공수대가 던진 사과탄, 최루탄을 터지기 전에 빨리 주워 던질려고 뛰어가기도 하다가 먼저 터진 연기에 쐬여 눈물을 흘리고 재채기도 한다. 저 무공해가 모처럼 광주에 왔다가 붙들릴까봐 내려가 ‘영춘 선생’하고 불렀더니 구세주를 만나듯이 하얀 목장갑을 낀 채로 반가워했다.
“이선생! 아무리 시골에서 최루탄 구경을 못했다고 그걸 주워 던지다가 코앞에서 터지면 어쩔려구 모험을 하시고” 농민회 사무실로 가자고 했다.
높은 건물 사무실에서 내려다보니 금남로에서 정말 무서운 전두환 반란이 시작되었다. 어디서 잡아 실었는지 군트럭뒤엔 어깨가 뒤로 묶인 청년들이 머리를 차바닥에 엎드린 채 차곡차곡 생선 고등어처럼 가득 채워져있었고 어깨엔 ‘기자’라고 쓰인 어깨띠(완장)을 찬 기자들도 막무가내로 군트럭에 실렸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차를 배달해주고 자기 다방으로 들어가는 다방레지들을 쫓아 들어가 지하실 비좁은 다방에도 사과탄을 몇 개 씩 까 던졌다. 참다 못한 손님과 일꾼들이 연기피운 오소리굴에서 오소리나오듯 꾸역꾸역 기어나왔다. 모두들 꽥꽥거리며 눈을 못 뜨고 방향감각을 잃은 채 공수대쪽으로 가면 방망이로 내리치고 아스팔트위에 굴비 엮듯이 엎드려 눕게 하고 뒹굴게도 하는 등 군대식 기합을 주기도 했다. 시키는 대로 못하는 이에게는 방망이로 후려치기도 했다. 군트럭이 오면 모두 싣고 어디론가 가곤 했다.
사람으로서 해야 할 짓들이 이미 그 도를 넘어섰다. 길가를 지나가던 젊은이들은 누구나 가릴 것 없이 머리를 내쳐 쓰러지게 한 다음 차에 실었다. 금남로 뒷건물들은 학원들이 많았는데 재수생들을 보이는 대로 두들겨 패서 연행했다.
분노한 시민들이 가톨릭센타쪽에 많이 모여 소리를 질러도 막무가내다. 농민회원들도 모여있었으나 별 수가 없었다. 농민대회 때마다 수문장을 섰던 영광의 정병원 회원은 키도 크려니와 생김새도 보디가드형이어서 가수 ‘휘트니 휴스턴’ 수행하면 딱 맞는 형인 데도 공수대 앞에서는 맥을 못춘다. 금남로뿐만 아니라 광주역, 광주공원 등 전대 앞 각 요소요소에서 광주시민과의 군사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공원운동장으로 올라갔더니 해남종합병원 김재현원장을 만났다. 내가 평소 농민운동을 할 줄 아는 원장은 고향 해남에서 온 데모꾼을 만난 것이 걱정이 되는 듯 전두환의 반란이니 몸조심하며 당부를 했다. 나는 배가 몹시 고파 있었다. 원장 운전을 하던 손주뻘 철호가 광주공원 순대국밥집으로 데리고 가는데 우리 담당 정보과 직원을 만났다. 그 이도 군사반란인데 경찰정보과도 끝발이 있는지 오히려 나더러 몸조심하라며 바삐 어디론가 가버렸다.
나는 전두환이가 누구인지 몰랐다
서울에서 한국기독교농민회 조직준비모임을 위해 김용복 교수집에서 회의를 했던 적이 있었다. 저녁식사를 위해 동대문운동장 옆에서 중국집을 하던 창윤이네 조카집으로 식사를 하러나갔다. 전남에서 올라온 문경식, 배종렬, 정광식 등이 같이 식사를 하는데 나상기가 오늘 서울 명동 YMCA에서 위장 결혼식 데모를 한다고 전한다. 열차시간도 많이 남고 데모하는 데는 하도 즐기는 사람들이라 가기로 했다. 신랑입장도 있었고 주례도 있었고 사회자도 있었고 많은 축하객들도 있었다. 밤중에 결혼식을 한다니 의심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었다. 함석헌 선생이며 백기완 선생, 서울에서 내노라하는 유명인들은 다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망토를 입은 이상한 테러단들이 치고 들어왔다. 깡패 집단들임에 분명했다. 우린 의자를 들어 후려치며 방어했으나 담장뒤로 도망간 사람, 담장뒤로 커텐뒤로 숨은 사람, 난장판이었다.
그때 그 독종 전두환이는 보안사령관이었고 그이가 앞으로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는다고 했었다. 그 이듬해 80년 5월 17일 광주에서 전두환, 노태우 일당들이 시민을 학살하고 권력을 탈취했다.
전남 강제농정철폐대회 작품 버리는 날
5월 19일 강제농정철폐 농민대회는 전두환, 노태우 일당들의 반란으로 인하여 완전히 무산되었다. 북동성당에 모여든 전북 남원, 임실에서 오는 몇 사람도 있었다. 회원들은 광주에서 난리가 나는 줄 모르고 왔었다. 그리고 그들은 농민운동 했다는 이유로 삼청교육대로 끌려가 생지옥맛을 보았다. ‘오늘 대회는 이대로 끝내고 집으로 다들 돌아가라’고 했다. 그날 곧장 집으로 못 간 사람은 1주일 내내 차가 끊겨 광주에서 얻어 먹어가며 지냈다. 나는 광주에서나 전남에서 대회가 있으며 앰프담당이었다.
교회에서 빌려온 앰프이기 때문에 해남 옥천교회로 내려갈려고 강진가는 완행버스를 탈려고 올라가보니 농민운동을 함께 하던 강진 장영근 회원이 있었다. 버스터미널 전체는 안개처럼 최루가스로 자욱했었고 직행버스 안내양이며 마구 두들겨 패 비명소리를 지르는 등 내가 타고 있는 버스기사는 겁에 질려 안내양도 안태우고 차를 빼기 시작하는데 공수부대 두 놈이 올라와 차 뒤쪽 바께쓰와 청소걸레로 젊은 놈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차례로 무조건 두들겨 팼다. 앞자리 앉아 있는 청년의 머리를 내리치다 피가 위로 솟았다. 공수부대 두 놈이 차에서 내리자 운전수는 안내양도 없이 내빼기 시작했다. 광주에서 행해진 그 만행을 말로 다 말할 수 없다. 강진 성진에 도착하자 한숨을 돌리고 장영근 회원이랑 다방에 들어가 차를 마시면서 아무리 독한 악질들이라고 죄없는 청년들뿐만 아니라 어른, 늙은이 할 것없이 마구 팰 수 있냐며 국민을 대상으로 전쟁을 하는 놈들이라고 한숨 섞인 이야기를 하고서 나는 해남으로 가고 장영근 회원은 강진으로 갔다.
TV 방송이 멈추던 날
방송이 끊기던 날, 나는 밤새 잠을 못 이뤘다. 8시가 되자 MBC방송이 끊겼다. 한 시간 후에는 KBS도 방송이 끊겼다. 광주는 이제 난리가 났다는 걸 알았다.
다음날 아침 터미널에 갔었는데 버스가 광주로 못 들어간다는 둥 뒤숭숭했다. 교회청년들이 모여 있었다. 월출산 등반을 간다며 여러 교회 청년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말했다. “광주에 반란이 났는데 청년들이 싸우러 가지 않고 등산을 가냐”며 “너희들 일기장에 80년 5.18 등산가다, 그렇게 써라”며 비아냥 거렸더니 모두들 광주로 가기로 하고 올라갔었다. 목포에서도 안철, 이철우도 목포로 가자며 했는데도 광주로 보냈다. 내가 탄 완행버스는 영암을 지나 신북으로 가다가 운전기사가 손님은 모두 내리라며 어디론가 되돌려 차를 몰고 피난을 가는지 가버렸다. 택시를 타고 신북면까지 가는데 광주에서 내려온 데모대들이 몽둥이와 파이프를 들고 차바닥을 쿵쿵거리며 태워주었다.
우린 영산포로 올라갔다. 연속 데모차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용기가 충천에 올랐다. 나주 소방대앞에 도착하자 광주에서 천일고속버스를 빼앗아 타고온 대오들이 왔다. 차 안에 올라와보니 돌멩이, 호미, 뺀치, 연탄집게 등이 운전대 옆에 쌓여 있었다. 소방대 건너편에 있는 무기고가 보였다. 블록으로 지어놓은 무기고를 허망하게 무너뜨리고 안에 있는 무기를 전부 꺼내왔다. 수류탄이며 칼빈 실탄 케스, M1, 세원실탄과 총, 어떤 젊은이는 권총만 두 자리 혁대에 차고 서부활극에서나 보았단 폼을 내며 실탄도 없는 권총을 빼어들고 지휘하는 척 폼을 잡았다.
그 차에선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았는데 칼빈만 두 정 들고 실탄을 여러 케스 담고 있었다. 모처럼 총을 만진 학생들은 차안에서 M1방아쇠를 당겨 차지붕이 구멍이 뚫리고 큰 소리가 났다. 앞가슴에는 달걀보다 조금 큰 검정색 수류탄을 두 세 개씩 차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안전핀만 빠지면 차안에 있는 사람들이 몰살할 것인데도 이들은 함부로 만지고 있었다.
서울에서 동철이가 준 소형카메라로 교회 청년 남흥이를 시켜 모든 장면을 다 찍게 했다. 역사는 역사이기 때문에 하나도 빠짐없이 찍으라고 했다. 그런데 총을 메고 길가에서 있던 고등학생같이 보이는 젊은이가 쫓아와서 이마에 총을 대며 사진을 찍는다고 경고를 했다. 그 뒤로는 사진을 못 찍었다. 광주에서 맨손으로 내려온 데모대는 총으로 무장을 했으니 의기양양하였다. 광주에는 무기가 필요하다며 우리 차에 탄 사람들은 모두가 무장했기 때문에 이제 무서워 보이는 것이 없었다.
나주 비료공장으로 가자!
비료공장 정문수위도 무서웠는지, 동조를 했는지 그대로 통과. 무기고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총 한 방이면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 문을 열어보니 낡은 칼빈총 두 정이 있었다. 덕진으로 가자 지서옆 무기고 역시 텅 비어있었다. 해남으로 갔다. 옥천면 지서옆 무기고에다 칼빈총 한 방 쏴버리니 허망없이 떨어져나갔다. 거기도 녹슨 칼빈총 뿐이었다. 이미 쿠데타를 목적으로 며칠 전 사전에 군부대에서 예비군 중대 무기고에 있는 무기들을 모두 빼옮겨 간 것이다. 나주에서만 미처 철수하지 못했다. 의도적이었는지는 모른다. 해남 경찰서에서도 통운차로 후진기어를 넣고 적재함으로 무기고를 밀어 허망하게 부서졌다며 실탄도 없는 칼빈총 몇을 메고 우리 차로 합세한 이들도 있었다. 탄창에 들어있는 실탄을 나누어 주었다.
강진읍으로 가자고 했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양껏 채웠다. 강진에도 농민운동을 같이 했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어디론가 도망갔다며 마침 그 부인은 나를 보고서 울먹이며 조심하라는 부탁을 하고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들마냥 걱정을 했었다.
그 난리통에 윷놀이 하는 광식이
옥천 초등학교 탱자나무 울타리가에는 멍석을 깔아놓고 윷놀이를 하면서 데모대 차가 지나다니는 것을 구경나온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윷놀이를 하고 있어”, 어서 차를 타고 사람들을 동원해 그이는 곧바로 데모대 버스를 타고 완도로 내려갔다. 남창에서 차를 잠깐 세웠는데 사복을 하고 주위를 살피던 윤지서장은 그때 눈만 빼꼼이 내놓고 완전히 일지매처럼 하고 있던 광식이를 알아 보았다. 같은 고향 동창이었다. 광식이는 완도에 도착하자 미역공장 아가씨들이 너나할 것없이 서로 차에 올라오자 말릴 수도 없고 그들을 모두 싣고와 옥천교회에 내려놓고 거기서 숙식을 하는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걱정이었다.
광주가 공수대에 완전히 진압되지 그이는 지서장과 눈이 마주쳤다는 죄 때문에 고향을 떠나 남모르는 이리에서 미꾸라지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며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지금은 아파트 수위를 한다는 YWCA 위장결혼식 사건 때도 경찰서 지하실에서 되지게 얻어맞은 그 광식이가 보고싶다.
경하 딸기방 원두막에서 잠자던 날
무장을 한 데모대원들은 버스를 타고 다닌 사람, 구백화물을 차타고 다닌 사람, 라면 운송차를 타는 사람, 택시를 빼앗아 타고 다닌 사람, 고속버스 오토바이 군인 탑차며 군트럭들도 많았었다. 목포에서 시내버스를 끌고온 무안 경율이도 만났다. 내가 탄 차는 천일고속버스였는데 운전하는 사람이 운전을 아주 잘하였다. 다른 차들은 운전도 할 줄 모르는 청년들이 차를 몰고 가다가 금꺼부며 다리난간을 뛰어넘어 냇가에 처박는 놈, 길가에 넘어지는 놈, 급정거로 앞뒤 서로 박어뿐 놈, 질서가 말이 아니었다.
우리 대오들은 나주 공동묘지에 모두 차를 세웠다. 어떤 중년쯤 되는 사람이 “나는 군에서 중대장을 했다. 지금부터 사격연습과 차량운행에 대해 주지사항을 전하겠다. 차량은 50m 간격으로 천천히. 급커브 다리 난간을 다닐 때 조심할 것.” 이라고 말을 했다. 그리고 사격연습을 시키려는데 여기저기서 젊은이들이 말도 듣지 않고 처음 만져보는 M1소총을 실탄이 있는데도 공중을 향하여 아무렇게나 방아쇠를 당겼다. 오합지졸이었다. 이러다 우리 총에 맞을까봐 중대장과 일행들은 트럭이며 버스에 나누어 타고 광주로 들어갔다. 송정리 다리에 도착하자 건너편 비행장쪽에서 장갑차에 기관총을 겨누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려고 하자 뒤돌아가라며 손짓을 했다. 안그러면 발포한다며 소리쳤다. 우리는 장에서 소를 실어나르는 작은 차를 타고 노안역으로 후퇴했었는데 운전수가 잠깐 내리라 하더니 쏜살같이 내빼버렸다.
정순이랑은 칼빈총 하나씩을 메고 걸어서 나주로 내려갔다. 공중에선 헬기가 어디에 데모대가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길을 따라 날아다녔다. 우리는 아카시아 꽃이 흐드러지게 핀 숲속에 숨어 헬기가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아카시아 꽃잎이 눈처럼 날리는 비포장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어서 패잔병처럼 나주로 갔었다. 군청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보아하니 공무원들, 사복경찰들이 시민들과 섞여 동태를 관찰하고 있었다. 보리섞인 김밥을 산더미처럼 싸놓고 오고간 데모대들이 마음껏 먹게 했다. 가게에서는 장갑과 요구르트며 빵들을 상자채 가져왔다.
정순이는 그 통에 서점에 가서 지도를 사가지고 산으로 광주에 들어가자고 했다. 만약 그날 산으로 갔더라면 매복군인들에게 모두 사살됐을 것이다.
전두환 일당들의 반란조건
광주에선 연일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시위를 했었다. 그 시위대들은 도청으로 모여들었다. 도청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노동청쪽에서 대열을 지어오는 학생, 충정로에서 들어오는 학생, 전대병원족에서 금남로에서 횃불을 들고 대열을 지어오는 학생, 너무 감격스러웠다. 나는 YMCA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남주 총무, 이성학 이사들이랑 도청앞을 내려다보며 그 장관을 보고서 환호를 했다. 길건너 전일빌딩앞에서는 해남에서 잠시 생활했던 홍희담 소설가도 하얀 손수건을 흔들며 환호하고 있었다. 송운마을 우리집 옆집 무공해 김재율 교수도 학생들과 학교 버스를 이용해 참가했다. 이 정도라면 이미 우리가 승리하는 사움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두환 일당에게는 좋은 먹이사슬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민주화의 성지 광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고 싶었는데 전두환에겐 진압이란 명분으로 군이 투입되어 쿠데타를 한 것이다. 군사쿠데타는 아무렇게나 하지 않는 법. 군작전계획과 한국군 지휘를 담당하고 있는 미군들의 명령에서만 군인을 이동시킬 수 있다. 미국의 개입없이 특히 분단국가에서는 쿠데타를 할 수 없다.
금남로 가톨릭센타 앞에 신발 쌓이던 날
모든 뎀대, 구경꾼 할 것 없이 도청앞 전일빌딩 근처로 모였다. 그때는 금남로 지하상가 공사중이라 차길은 엉망진창이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기름 드럼통에 불을 놓고 전두환이 물러가라! 전두환이 물러가라! 때려잡자! 때려잡자! 구호를 외치며 군중들이 운집하였다. 그런데 6층쯤 되는 유리창문을 열고 대머리까진 사람이 M16총과 철모를 빼앗았다며 총과 철모를 흔들었다. 민텡서는 환호가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도청쪽에서 최루탄을 쏘며 달려드는 공수대들이 쫓아왔다. 그 많은 군중들은 가톨릭 센터로 밀려나면서 자전거 등에 걸려 넘어져 많은 신발이 벗어졌는데 그것을 모아 놓은 신발이 큰 돌무덤만큼이나 많았었다.
녹슨 기찻길
10여일간 기차가 못 다녔다. 장성에서부터 목포, 광주에서 여수가지 완전히 기차가 끊겼다. 전 도로에는 전 차량이 데모하던 것 뿐이었다. 시민군들이 접수한 도청지휘본부가 계엄군에 의해 탈취되자 광주주변에는 전남 일대를 장악하고 다녔던 대오들이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우유농민, 달기농민, 오이농민들은 차가 10여일간 못 다녀 출하를 못하고 딸기며 원액 우유들을 데모대들에게 마구 주었다. 그때 우유를 실컷 먹었다. 설사를 한 사람도 많았다. 몽탄 병상이 부인은 목포로 걸어서 딸기를 팔러다녔다. 주열이도 해남읍 청년들 먹으라며 팔지 못한 우유를 몇 통씩 갖다 주었다.
녹슬은 기찻길은 휴전선 철원, 전곡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장성, 몽탄, 다시, 고막, 원일로, 목포, 영산포, 화순, 감곡, 보성... 호남선 일대는 완전히 녹슬은 기찻길이 되었다.
전주에서 순천쪽은 기차가 다녔는데 벌교에서 해남까지 버스로도 비포장 6시간 달리는 거리를 서울에서 순천으로 돌아 걸어서 해남까지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때 농작물을 팔지 못한 딸기, 우유, 오이 등 농사꾼들의 피해는 말할 수 없다. 지금도 농민만 5.18 피해자 중 피해자이다. 지금이라도 전두환, 노태우 일당들의 비자금을 몰수해 5.18 전두환 반란피해자들에게 보상해주어야 한다. 병상이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1가족 3명이 5.18때 행불이라며 투덜대기도 했다.
영산포에서 해남까지 걸어서 가던 날
공중엔 헬기가 돌아다니며 삐라를 뿌렸다. 최규하 이름으로 뿌려졌다. “폭도 여러분, 무기를 반납하고 자수하십시오.” 산이며 도로 전역에 뿌려졌었다. 그러나 한 사람도 자수하거나 총을 반납하는 이 없었다. 만약 자수하는 날이면 죽도록 고문당할 판이니까. 그리고 데모대는 폭도가 아니었다. 전두환, 노태우가 광주시와 전남지역에서 국민을 대상으로 학살을 하며 테러를 한 것이다.
데모대차는 씽씽거리며 빈차로 어디론가 달리기만 하고 있었다. 광주전남일대는 차도 끊기고 기차도 전화도 방송도 신문도 TV도 모두 끊겼다. 공중에는 헬기만 펄덕거리며 전남안 각 군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작전명령을 했다.
우리는 걸어서 영산포에서 영암을 지나 강진 성천면으로 내려갔었다. 아직도 술취한 학생처럼 보이는 청년이 검문소 다리위에서 삼발이 달린 기관총을 들고 데모때 부리던 객기를 부리며 공수대를 쏴 죽인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맨발로 아스팔트 먼길을 걸으니 처음에는 걸어갈만 했으나 발바닥이 닳아서인지 쓰리기 시작했다.
차가 못 다녀 광주에 학교다니는 아들을 데리고 같이 온다며 경운기를 광주에서 해남까지 몰고간 황산면 농민도 있었다. 경운기 위에는 광주에서 간호사, 학생들이 10여일동안 긴장됐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고향으로 오고 있었다. 우린 다시 패잔병이 된 구백화물차를 타고 계곡면 월암고개에서 내려달라고 했다.
왜냐하면 해남에 가면 낯이 드러날까봐 절대로 차를 타고 가지 않았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청년이 우리들이 다 내리자 M1소총을 겨누며 왜 총을 가지고 다니냐며 총을 차에 두고 가라는 것이다. 한 정만 주고서 한 두정은 가지고 산속 외딴집을 갔었다. 배가 고파서이다. 그 집에도 밥이 많지 않았다. 보리밥 남은 것과 라면 세봉지와 김치뿐이었다. 라면을 삶아 그 집 식구들과 나누어 먹었다. 외딴집 농민도 5.18을 전두환 반란이라며 잘 알고 있었다.
각자 거기서 밤이 돼서야 누나집으로 옮겼다. 총은 횃가리 푸대 종이에 둘둘 말아 들고 누나집에서 잠을 잤었다. 그날 아침부터 통일벼 모내기를 한다고 일찍 들녘으로 함께 나갔다. 도로에는 패잔병들의 버스소리만 왱왱거리며 씽씽 달리고 있었다. 며칠을 모내기하는 들녘을 쫓아다니며 모내기를 해주고 밥을 얻어 먹다가 안되겠다 싶어 잠시 피하기 위해 보성 거석되로 가기로 했다. 워낙 산골인데다가 계선이집에 가면 편하기 때문이다. 문경식이도 옆집이어서 좋았다.
버스가 운행되기 시작하였다. 해남에서 직행버스를 타고 장을 지나자 검문이 있었다. 나는 나이가 있어서인지 젊은이들만 조사를 하고 짐가방을 일일이 조사했다. 짐속에 무기가 들어있을까봐 샅샅이 보았다. 어느 가방 주인가, 누구 가방이냐고 해도 가방임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가방속에 분명히 무언가 들었었다. 군인들은 그 가방을 들고 내렸다.
5.18 광주에서 그 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몰골이 거지중 상거지처럼 하고 갔었다. 문경식이 집은 모처럼 보교조생 딸기재배를 했는데 대깔도 좋고 맛도 좋았다. 그런데 버스도 멈춘 도로, 녹슬은 기찻길 때문에 딸기를 하나도 못 팔았다. 덕분에 나는 딸기 원두막에서 지내면서 실컷 먹었다.
문경식이네 마을에서 며칠동안을 지내다가 감곡역에 나오니 그때서야 처음 기차가 다녔다. 신문도 그날 처음 나왔다. 신문제목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머릿기사 큰 글씨로 “무등산은 알고 있다.”, 김준태 시인이 쓴 기사였다. 그렇게 해서 80년 5.18은 전두환 반란군에게 점령되었다.
갑오농민전쟁과 5.18이 다른 점이 있다면 갑오년 농민전쟁은 전봉준 장군이 지휘하는 동학군 조직이 일어서 혁명을 일으켰고, 5.18은 전위조직도 없이 시민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시민군을 조직했었다는 것이다. 갑오농민전쟁도 일본놈과 싸우는 척약척왜, 보국안민, 제폭구민이었고 5.18 역시 전두환의 빽인 미국과의 싸움이었다. 지금도 그 싸움은 초국적 자본들과의 전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항상 상윤이 헌책점을 지키던 검정색 미군야전 점퍼를 입고 다니던 말 수 없는, 끝까지 도청을 지켰던 윤상원, YWCA 신용협동조합을 하던 용준이, 말 수 없는 두 청년은 망월동에 묘만 있다.
그때 농민대회 때 왔다가 머릿통을 맞아 지금도 비만 올려고 하면 아픈 무안 현경면 김용수는 보상금을 받아 내가 청주교도소에서 나올 때 800만원을 주면서 농민운동 하는 사람에게 주라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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