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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기원전 3세기에 마힌다Mahida에 의해 스리랑카에 전래되어 정
착되었다. 마힌다는 인도의 위대한 불교황제 아쇼카의 아들이었으며, 아
라한의 경지에 있었던 불교 승려였다. 그 당시 실론은 이미 상당히 발전
되어 있었다. 수도 아누라다뿌라Anuradhapura는 잘 정비된 대도시였다.
통치 행정은 중앙과 지방 모두 잘 조직되어 있었고 조화를 이루고 있었
다. 건축은 상당히 훌륭한 수준으로 발전해 있었다. 농업을 위한 관개
시설이 대단히 발달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 국가로서 스리랑카의 도약은
불교가 정착된 후에 시작되었다.
우리가 '문화'라는 용어를 역사의 과정에서 인간들에 의해 창조된 물
질적, 지적, 문학적, 예술적 가치들을 집합체로 정의한다면, 불교는 스
리랑카의 문화에 이천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직접적으로 주도적 영향
을 미쳐왔다.
불교가 스리랑카에 정착된 이래 영향을 미쳐 온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의 삶 전반에 완전하고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25년 경부터 였다. 그 시기에 힌두교도인 남 인도
촐라의 왕, 엘라라Elara가 침략해 왔다. 그는 아누라다뿌라를 점령하고
실론 섬의 북부를 사십 년 넘게 지배하였다. 그러나 섬의 남부는 여전히
독립된 상태였다. 이 지역의 싱할라 왕인 두투개무누Dutugamunu(Duttha-
gamani) 왕이 침략자에게 대항하여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울 주변의 세
력을 규합하였다. 그의 전쟁 슬로건은 '왕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불교를
위해서'였다. 그 슬로건은 심리적 효과가 매우 좋아서 심지어 비구들도
승가를 떠나 해방군대에 참여하였다. 그렇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외적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은 불교의 전통이 되었다. 왜냐하면 자유는 공동체의
물질적인 진보 뿐 맛肝아니라 정신적인 진보에 있어서도 필수적이기 때
문이다.
이것이 진정한 싱할라 민족주의 또는 종교 민족주의의 시초였다. 그
이후부터 오늘 날까지 스리랑카의 전 역사를 통해서 불교는 국가와 민중
들의 삶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여였다. 두투개무누의 슬로건은 오늘
날까지도, 특히 선거철에 스리랑카의 몇몇 정당들에서 현대적인 구호로
바꾸어서 사용하고 있다.
스리랑카 문화에 불교가 끼친 영향의 정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불교 사원의 역할부터 명확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사찰과 승원들은 경배
와 종교 활동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교육과 문화의 중심이기도 하다. 모
든 불교사원은 종교적 경배의 장소에 부설하여, 자유 학교를 포함했으며
사원에 거주하는 비구들은 항상 교사의 역할을 하였다. 아누라다뿌라에
마하비하라Mahavihara와 아바야기리Abhayagiri 같은 거대한 사원 기관은
인도의 날란다 마하비하라Nalanda Mahavihara와 같은 대학이었다. 모든
교육은 비구들이 맡았다. 그들은 종교 과목 뿐만 아니라 세속의 예술과
과학, 즉 언어학, 문법학, 시학, 수사학, 논리학, 역사, 의학, 천문학,
건축, 회화, 조각등 민중들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가르쳤다. 심지어 병
원도 이 큰 사원기관에 부속되었는데, 환자들의 치료뿐만 아니라 의사의
양성을 위해서였다.
어떠한 교육에 있어서나 교육의 배경은 불교였다. 그래서 모든 학생들
은 불교의 기본 원리, 즉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계율, 생명을 존중하는
사상, 부모와 웃사람에 대한 헌신과 존경, 가족, 친척, 친구에 대한 의
무, 바르게 살기, 사상의 자유, 관용등을 배웠다. 지금도 불교사원은 마
을 생활의 중심지이며, 절에 있는 비구들은 보통 마을 사람들의 친구이
자 스승이며 상담자이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많은 분쟁이
지금까지도 절에서 승려들의 중재에 의해서 해결되고 있다. 도덕적, 사
회적 발전과 마을의 개발을 위한 회의가 절에서 이루어진다.
스리랑카에서 불교 전래 이전의 문학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가
장 오래된 문자 기록들은 기원전 2~3 세기 경에 속한다. 그것은 불교 승
려들이 私室로 주거하던 동굴의 빗물 받이 아래에 세긴 간략한 비명들인
데, 그 동굴들을 승가에 헌납한 사람들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이다.
마힌다는 스리랑카에 불교와 함께 몇 가지 문학 작품을 소개한 사람으
로 여겨져야 한다. 그는 빨리 三藏(Tipitaka)에 대한 주석서를 싱할라
말로 쓰기도 했다고 보고된다. 이 싱할라 주석들은 풍부한 문헌을 형성
하였다. 이것들은 5 세기에 붓다고사에 의해 다시 빨리어로 번역되었고
오늘날까지 빨리주석서로 알려지고 있다. 이 번역의 결과 모든 싱할라
주석 원본은 불행하게도 소실되었다. 이것은 싱할라 문학에 있어서 회복
할 수 없는 손실이다.
지금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초기의 문학 작품들이 (싱할라어로 된 서
사시의 비문을 제외하고는) 빨리어로 보존되어 있다. 약 6세기에 살았던
위대한 싱할라 시인들이 연대기에 언급되고 있는데, 그 작품들은 현존하
지 않는다. 시와 산문 모두에 걸쳐서, 현존하는 모든 상할라 문학 작품
들은 9세기 이후에 쓰여졌다. 문법, 시학, 수사학, 의학 같은 몇 개의
세속적인 주제에 대한 문헌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불교 주제를 다루고
있다.
스리랑카에서 불교 문학을 통털어서 <<자따까Jataka>>(本生譚) 만큼
대중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책은 없다. 이것은 부처님의 전생에 대한
550 가지의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싣고 있다. 그것들은 약간 우화적인 형
식으로, 단순한 도덕적 교훈과 현실적인 상식을 가르치는 재미있는 이야
기들이다. 비구들이 설법을 할 때 흔히 예화로써 사용하였으며, 布薩日
에 사찰에서 사람들이 독송하고, 듣고 하였다. <<자따까>>는 오랜 세월
동안 스리랑카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불교 국가의 시인과 예술가들
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여러 고전 싱할라 시들이 주제를 <<자다까>>으
로부터 빌어왔다. 불교사원에 있는 벽화들은 주로 어떤 잘 알려진 <<자
다까>> 이야기들을 그리고 있다. 현대 스리랑카의 작가, 시인, 예술가들
도 이 <<자다까>>의 전통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
스리랑카가 건국이래 현재까지 중단되지 않은 역사를 갖게 된 것도 불
교의 영향 덕분이다. 律典(Vinaya)과 주석서에서 보듯이 비구들은 초기
부터 중요한 사건을 역사적인 기록으로 보존하였다. 이러한 불교 전통에
따라서 5세기에 마하나마Mahanama 승려가 <<마하방사Mahavamsa>>(스리랑
카 섬의 위대한 연대기)를 지었다. 이 연대기는 지금까지 승려들에 의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우아한 빨리 운문으로 쓰인 이 위대한 저작은 거의 시적인 어법과 이
미지로 장식된 서사시이다. 스리랑카의 역사가 진행해 갈 수록, 불교의
역사가 진행해 가며, 그것은 불교의 싱할 민족의 역사이다. 이책은 불
교와 싱할라 민족을 분리할 수 없도록 밀착시켰다. 그 이야기들은 불교
사원의 회화와 조각에서도 그 방식이 발견된다. 그 주제들에서 나온 새
로운 희곡들이 쓰여져서 애국정신, 민족주의, 그리고 불교에 대한 헌신
을 일깨워주었다. <<자따까>>처럼 <<마하방사>>는 싱할라 민중들에게 어
마어마한 영향을 끼쳐왔다.
불교는 예술에 무관심하다는 인식이 있는데 이는 정반대이다.[*이 글
은 서양사람들을 대상으로 쓴 것임*] 불교란 단순히 종교 뿐만 아니라
문화 전체, 문명 전체를 가리킨다. 예술과 건축은 불교를 따라 인도 뿐
만이 아니라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자바, 중국, 한국, 티
베트, 일본 같은 나라에서 널리 퍼지고 발전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
실이다.
律典과 주석서들은 부처님 당시에도 그림을 그리는 비구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스리랑카에서 승려들은 그림과 조각이 훌륭하여 칭송
되었다. 5 세기에 난다Nanda라는 싱할라 비구가 다른 몇 명의 비구와 사
절단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황제에게 직접 자기 작품을 선사하였다. 그런
데 이 불상은 진기한 미술 작품으로 여겨졌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보
면 부처님 얼굴 모습의 윤곽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데, 점점 가까이 다
가갈 수록 점점 희미해지면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 후에 다른 나
라의 왕과 부호들이 미술가를 보내서 이 불상을 모조하려고 했으나 아무
도 난다 비구의 원작같은 것을 만들지 못하였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18 세기에 스리랑카의 불교문화가 퇴조를 보이던 시기에도 데
갈도루바Degaldouruva와 리디비하라Ridivihara에 있는 유명한 그림들은
미술 평론가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이 그림들은 칸디Kandy의 모라
또타 마하나야까Moratota Mahanayaka 大師의 감독하에 승려들이 제작한
작품이다.
불교 승려들은 언제나 절에 매력적인 영감을 불어넣는데 관심이 있었
다. 그래서 부처님의 일생, <<자따까>> 이야기, 또 <<마하방사>>에 나오
는 역사적 사건을 그린 회화와 조각으로 절을 아름답게 장식하는데 세심
한 주의를 기울였다. 승려들은 한편으로 대중들의 미적인 만족을 위하여
절을 미술관과 같이 하여 봉사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들에게 윤리
도덕적 정신과 경건한 정서로 헌신할 것을 고무시키며 설법하였다.
이 종교적 회화와 조각과 함께, 사원 그리고 浮屠나 塔婆(예를 들면
미힌딸레Mihintale에 있는 깐타까Kantaka 탑)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역
사의 어느 시대에서나 다양한 형태의 장식 미술로 꾸며져왔다.
시기리야Sigiriya에 있는 유명한 그림 같은 소수의 세속 예술의 예를
제외하고, 실제로 스리랑카에 모든 고대와 중세의 그림과 조각들이 불교
또는 불교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전통적인 싱할라 화가 싯따라Sittara
는 불교 사원에서 교육을 받고 불교 사원에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주제가 무엇이든지 간에 기본적으로 불교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현대 싱할라 예술가도 이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스리랑카 문화에 대한 불교의 영향은 기원전 3 세기부터 계속되어 왔
는데, 16 세기 초 부터 외세의 침략에 의해, 특히 일부 지역에서는 거의
완전히 중단되었다. 그 때 나라는 분할되고 내부적 혼란으로 국력이 쇠
약했었다. 16 세기 초로부터 대략 150 년 동안 일부 해안 지역을 점령한
포르투갈 인들은 불교에 대해 근단적으로 배타적이고 강한 적대감을 품
었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해안 지방의 상할라 불교도
들을 카톨릭으로 개종시켰다. 불교와 불교 문화, 나라의 전통적인 풍속
은 억압되었다. 상할라 불교도의 이름은 포르투칼식 카톨릭 이름으로 창
씨개명되었다. 불교도들에게는 실론 섬에서 어떤 지위도 주어지지 않았
다. 심지어는 법정에서 불교도의 증언이 인정되지 않았다.
17세기 중엽에는 네델란드가 싱할라 불교도 왕의 도움으로 포르투갈
인들을 몰아내고 그 해안 지방을 138년 동안이나 점령하였다. 그러나 네
덜란드 인들도 불교와 나라의 불교 문화를 억압하는 같은 정책을 계속
실시하였다.
18세기가 말엽(1796년)에 영국이 네덜란드 인들을 내 고 그 해안 지
역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1815년에 실론 섬 전체를 점령하였다.(영국은
이천 오백 년의 역사상 스리랑카 전역을 점령한 최초의 유일한 나라였
다.) 영국도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불교와 싱할라 불교
문화를 억압했는데, 더욱 더 교묘하고, 더욱 더 파괴적이었다.
이렇게 거의 4세기 반에 이르는 세월 동안 세 개의 유럽 열강이 불교
와 싱할라 불교 문화를 파괴하고 약화시켰으며 기독교와 기독교 교육과
문화를 주입시키려고 하였다. 그것은 상당히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해
안 지역과 도시에서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무시무시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불교와 불교 문화, 나라
의 전통과 제도들은 얼마간 살아있었고, 엄청난 어려움에 불구하고 유지
되고 살아남았다. 특히 내륙의 지방과 농촌에서 승려들의 호한 용기,
결의, 헌신과 노력으로 지속될 수 있었다.
1880년대에 미국의 신지학자인 H.S. 올코트Olcott 대령이 스리랑카에
와서 불교를 받아들이고서, 불교와 불교 교육 그리고 문화를 부흥시키려
는 거대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힉까두베 쉬리 수망갈라Hikkaduve S
ri Sumangala, 밧따라물레 쉬리 수부띠Battaramulle Sri Subhuti, 미겟
투밧떼 구나난다 꼬라또타 솝비따Migettuvatte Gunananda Koratota Sobb
ita 같은 지도적 승려들의 도움으로 불교 신지학회를 설립하고 전국에
걸쳐서 수 백개의 불교 학교를 열었다.
1948년에 스리랑카는 정치적 독립을 얻었다. 그 때부터 전국에 걸친
각성과 불교와 불교 문화에 대한 부흥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섬 전
체에 사회적 문화적 발전을 위한 크고 작은 수 많은 불교 단체와 조직이
결성되고 있다. 수 백 개의 다함 빠살daham pasal(어린이들에게 불교와
불교 문화를 가르치는 특수 종교학교)이 설립되고 있다. 조롱받고 무시
되었던 민족적, 불교적 전통, 제도, 풍속이 되살아나서 장려되고 있다.
이제 불교는 다시 퓜針스리랑카 민중들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삶에
거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Rahula, W., "Zen & the taming of the bull"(London: The Gordon
Fraser, 1978), pp.11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