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2. 제 2차 세계대전(1939년 9월 1일-1945년 8월 14일)
(1)유럽의 서부전쟁 히틀러 구상은 먼저 유럽 대륙을 통일해 대제국을 건설하여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얻는 것이었고, 그리고 대서양에 강력한 함대를 건설해 독일을 대영제국과 일본 및 미국과 동등한 지위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미국과 전쟁을 해도 영국은 어쩔 수 없이 독일 동맹국이 될 것이라 예상하고 그 구상을 실현으로 옮기였는데 1938년 강력한 군대를 갖춘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였다. 본래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같은 민족이며, 신성로마 시대에 같은 나라이었고, 베르사유 조약은 2나라의 합병이 금지되어 있었는데도 유럽은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독일은 같은 민족이 많이 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서부 서데텐 지방을 요구하였고,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수상은 뮌헨에 모였고, 히틀러 기세에 눌려 이 정도 양보하면 만족하리라 생각하고 양보하였다. 그러나 다음해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서반부 뿐 아니라 나머지 영토도 보호국으로 만들었으며, 이렇게 되자 영국과 프랑스도 사태의 중대함을 깨닫고 군비를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독일은 그 여세를 몰아 폴란드의 영토를 요구했고, 영국, 프랑스, 소련은 손잡고 독일을 억압하려 하였으나 소련의 스탈린은 전쟁준비가 되지 않아 독일과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1939년 8월 23일 독 ·소 불가침조약을 맺어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고, 독일은 예정데로 1939년 9월 1일 대군으로 폴란드를 침공하여 세계 2차 대전은 막이 올랐으며, 독일은 보름만에 폴란드를 점령했다. 그런 후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에게 화평을 제의하였지만 두 나라는 이를 거부하였고, 소련은 1939년 9월 17일 러시아인 보호라는 명목으로 갑자기 폴란드 동부를 공격해 독일과 분할하여 점령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서부전선에서 적극적 공세를 취하지 않아 약 반 년 동안 전쟁다운 전쟁은 볼 수 없었는데 이를 기묘한 전쟁(Phony War)이라 하며,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 프랑스 국경에 구축된 요새 마지노선 (線)에 의존하였고, 해상봉쇄로 경제압박에 의한 독일의 국력을 소모시키려고 하였다. 1939년11월 핀란드는 영토 일부를 합병하자는 소련의 요구를 거절하여 소련은 100만의 대군으로 핀란드를 침공하였고, 핀란드는 용감히 싸워 초반에는 승리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핀란드 원조의구실과 독일 공업에 불가결한 스웨덴 철광석을 장악하려고 노르웨이 항구를 확보하려고 했으나, 독일군은 선수를 쳐 1940년 4월9일 덴마크를 점령함과 동시에 노르웨이에 침입했다. 노르웨이에 있던 영국과 프랑스군을 격퇴했는데 이 전쟁 성공은 노르웨이 파시스트인 육군장관 '크비슬링'이 기여하였는데 그후부터 '크비슬링'은 ‘나라를 판 사람'이라는 뜻이 되었다. 독일은 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해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점령하였으며, 1940년 6월 14일 파리를 점령하였는데 너무 빠른 독일의 움직임에 영국과 프랑스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이탈리아는 형세를 살피다가 독일의 우세함을 보자 갑자기 영국과 프랑스에게 선전포고하였으며, 6월 10일 남프랑스에 침입하였고, 프랑스는 항복하였으며, 드골 장군은 런던으로 피신하였다. 1940년 6월 22일 프랑스와 독일은 휴전협정이 조인되었고, 프랑스는 이탈리아가 국경 주변의 좁은 지역을 점령하는 조건으로 6월 24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었으며, 이때부터 프랑스시민은 비밀조직을 만들었다. 이렇게 저항한 것을 '레지스탕스 운동'이라고 하며, 1940년 6월 10일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물자를 폭력과 맞서 싸우는 세력에 제공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영국을 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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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 원조는 1941년 11월까지 총액이 거의 13조 달러에 이르렀으며, 1943년부터 히틀러는 동부전선의 독일군 병력을 빼내어 서부전선을 강화했고, 1944년 6월 6일 프랑스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시작됐다. <1944년 노르만디 상륙작전> 히틀러는 연합군 15만 6,000명의 병력을 노르망디에 묶어 두려고 노력하는 동안 소련의 공세로 동부전선의 독일군이 전멸하여 독일 국경에 이르렀고, 서부전선도 무너지고 서쪽국경을 향해 전진하였다. 1944년 7월 20일 나치 정권의 범죄에 진저리가 난 현역 군고위간부들이 비밀 군사 조직을 결성하여 서류 가방에 숨긴 폭탄을 들고 동프로이센 최고사령부로 들어가 히틀러가 회의를 열고 있는 방에 놓고 왔다. 폭탄은 터졌지만 히틀러는 살아났고 쿠데타는 불발로 끝났는데 나치의 반응은 야만적이었으며, 직접 연루된 200명의 음모자 이외에 암살 계획과 약간의 관계를 갖고 있거나 전혀 관계가 없는 5,000명이 처형되었다. 히틀러는 독일 영웅 로멜이 자신의 적으로 교수대로 보내지는 것을 원치 않아 10월 14일 로멜은 히틀러가 보낸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하였으며, 장례는 최고의 예우로 치러졌다. 히틀러의 고집스럽고 어리석은 '후퇴 불가'명령으로 독일군은 묶여 있다가 궤멸하여 20만 명이 포로로 잡혔고, 1,200대의 탱크가 파괴되었으며, 연합군 전력은 독일군보다 20배가 많았다. 독일군의 저항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는데도 연합군의 진격은 중지되었고, 이 일은 전쟁 종료 후 독일영토에 소련이 많은 지역을 선점하여 유럽이 공산주의 때문에 정치 상황이 어렵게 만드는 중대한 결과를 낳았다.) 연합군의 진격 중지로 독일군은 서부전선에 수비군을 집결할 시간적 여유를 얻어 1944년 12월 16일 8개 기갑 사단을 앞세우고 연합군을 기습하여 12월 24일 연합군 진영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퇴로를 차단 당할 위기에 놓인 선봉 부대는 1945년 1월 8-16일에 퇴각하였는데 이 공격은 연합군에게 작전 차질과 많은 피해를 주었고, 독일은 이 공격에 너무 많은 힘을 탕진해 항전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벌지 전투에서 독일은 12만 명의 사상자를 냈었고, 미국 사상자수는 7만 5,000명에 이르렀으며, 독일 군인과 민간인의 유일한 소망은 연합군이 되도록 빨리 진격하기를 바랬다. 소련군이 오기 전 베를린에 도착하여 되도록 많은 독일 영토를 점령해주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파리의 모든 산업 설비와 주요발전소, 상수도 시설 및 가스 공장을 파괴하라는 지시를 했으나 군수 장관인 알베르트 슈페어가 이 명령에 반대하였고 그는 포고령을 실행하지 말라고 설득해 실현되지 못했다. 4월 25일 연합군은 베를린을 포위하였으며, 고립에 절망한 히틀러는 4월 28-29일 밤 정부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하고 4월 30일 아내와 함께 자살했을 때 소련군은 그의 벙커 800m 되는 곳까지 진격해 있었다. 두 사람의 시체는 정원에서 급히 화장되어 확인이 어렵게되자 히틀러가 살아 있다는 말이 나돌게 되었으며, 히틀러가 아직 살아 있을 때인 4월 29일 조인된 항복문서로 전쟁은 5월 2일 막을 내렸다. 전체 독일군을 포함하는 항복문서는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대표도 참석한 가운데 좀더 엄숙하게 격식을 갖추어 1945년 5월 8일 자정을 기해 유럽에서 전쟁은 공식적으로 끝을 맺었다. 그 지루하고 잔인한 유럽의 제 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유럽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4인방 히틀러, 괴링, 괴벨스, 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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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유럽 동부전선의 러시아 1941년 6월 독일은 막강한 힘을 영국과 미국에 과시해 미국이 유럽에 개입하는 것을 단념시키고, 공산주의에 뿌리 깊은 반감과 스탈린을 의심해 소련 점령 작전에 나서기로 결심하였다. 독일은 300만명, 150개 사단, 기갑사단 19개, 탱크 3,000여 대, 야포 7,000문, 항공기 2,500대로 이것은 인류 역사상 최대 최강의 침략군이었고, 독일에 맞설 태세를 갖추지 못한 소련을 일방적으로 당했다. 그러나 국토를 지키려는 국민과 협력한 소련군은 모스크바 부근서 독일의 진격을 가로막았고, 소련은 초토화 정책으로 농작물을 불태우고 다리를 파괴하였으며, 철도 차량도 대부분 파괴하였다. 또한 소련의 철도 궤도는 독일의 궤도가 달라 철도망을 이용할 수 없었고, 서쪽 끝에 있는 철강공장과 군수품 공장의 생산 설비를 운반해 동부서 조립하여 강철과 군수품을 생산하였다.
또 독일 점령지의 주요도로를 계속 공격하여 봉쇄함으로써 독일군을 괴롭혔는데 독일은 소련 국민이 정부에 대해 불만이 많으므로 지지를 얻지 못하여 몇 달만 싸우면 굴복할 것이라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후방에서 동원할 수 있는 예비 병력을 무시하여도 된다고 예상했지만 이 예상은 빗나가고 겨울이 되자 오히려 불리하게 전개되었고, 군인들은 겨울옷을 지급 받지 못해 동상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혹독한 추위는 기계화 된 수송기관, 탱크, 대포, 항공기를 마비시켰고, 대조적으로 소련군은 두툼한 옷을 입었으며, 겨울에는 독일군보다 훨씬 효율적인 전투력을 과시하였다. 1941년 11월부터는 미국 항공기와 탱크를 비롯한 보급품이 소련에 인도하기 시작해 더욱 불리하게 되었고, 독일의 소련 침공은 자멸 직전의 영국에게 살길을 열어 주었다. 1943년 1월 히틀러는 소련에서 병력을 철수하지 않으면 더 큰 재난을 당할 것을 알고 철수하기 시작하였고, 1945년 1월 12일 소련군은 공격을 시작하여 바르샤바를 점령하였으며, 2월 13일 부다페스트를 점령했다. 그리고 서쪽으로 계속 전진하였다.
<엘베강에서 미군과 만나는 러시아 군인>
(3)러시아의 핀란드 침공 독일과 맺은 협정으로 이익을 얻은 소련은 1939년 10월 10일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핀란드에 소련군 주둔하려고 하였으나 이들은 소련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11월 핀란드는 핀란드의 일부 영토를 합병하자는 소련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소련은 약 100만 명의 군대와 약 1,000대의 탱크를 동원해 1939년 11월 30일 핀란드 공격을 시작했으나 대부분 전선에서 격퇴 당하했. 서구 열강은 소련의 패배를 기뻐하였고, 핀란드가 초기에 거둔 승리로 히틀러 야욕은 커지고 또 서구 열강은 소련의 군사적 능력을 과소평가 했으며, 소련은 실패를 교훈 삼아 맹렬한 공격으로 핀란드를 굴복시켰다. 핀란드는 이 전투에서 약 7만 명, 소련은 2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고, 1941년 독일이 러시아를 침공할 때 핀란드도 러시아 영토로 진격해 들어갔다가 1944년 독일이 패하여 핀란드는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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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아프리카 전쟁 1940년 6월 이탈리아가 영국에 선전포고했을 때 리비아는 30만 명에 이르는 이탈리아군이 있었고, 이집트에 배치한 3만 6,000명의 영국군은 선제 공격을 가해 4만 명의 포로를 잡았다. 이집트 주둔군이 그리스로 빠져나가고 영국군 전력이 크게 줄어들었고, 히틀러는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을 가진 젊은 장군 에르빈 로멜(롬멜)에게 2개 기계화 사단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였다. 이탈리아군을 돕기 위해 아프리카로 파견하여 크게 줄어든 영국군에게 승리를 거두었고, 1942년 7월 이집트 전투에서 장거리를 너무 급하게 진격해 온 로멜 부대는 지쳐 영국군 수비대를 격파하지 못하였다. 영국군도 지쳐 반격을 할 수 없었고, 로멜도 부하들이 휴식을 취하는 사이 증원군을 투입할 시간적 여유를 얻어 7월 말 로멜은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1942년 10월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이 이끄는 제8군은 병력 23만 명, 탱크 1,230대, 항공기 1,500대 이였고, 반면 독일과 이탈리아의 병력은 8만 명, 탱크 210대, 항공기 350대 이었다. 그기에 로멜 군대는 연료와 탄약 및 식량까지 충분히 보급 받지 못하였고, 로멜는 오스트리아에서 요양하고 있었는데 아프리카로 돌아가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받아 1942년 10월 5일 저녁 전선에 도착했다. 이 때 장갑차량은 이미 절반이 파괴된 상태였고, 로멜은 더 이상 저항할 힘을 잃어 튀니지로 쫓겨가 1943년 5월 마침내 항복하였으며, 1942년 북아프리카 작전에서 롬멜과 전쟁을 치른 미군 장성 패턴은 2차 세계대전 중 유럽과 지중해 전장에서 기동력을 필요로 하는 전차 전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패턴은 1943년 북아프리카 작전을 마친 뒤 시칠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제7군을 지휘하여 휘하의 기갑부대를 신속하게 움직여 시칠리아의 팔레르모를 점령하였고, 또한 패턴의 군대는 제7군과 합류하여 독일군 10만 명을 포로로 잡으며 자르와 팔츠 지방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북아프리카에서 적진을 관찰하는 패턴 장군>
(5)그리스와 유고 전쟁 히틀러는 소련 침공을 준비하면서 1941년 4월 6일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를 공격하여 4월 22일 그리스가 항복하였고, 5월 11일 크레타 섬을 제외한 에게 해의 그리스 섬들을 전부 점령하였다. 그리스에 있던 영국군 5만 명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들은 탱크를 비롯한 중장비를 모조리 내버린 채 황급히 철수했고, 1941년 6월 티토 지휘아래 유고슬라비아의 공산당원들이 파르티잔 분대를 조직화하였다. 1943년 말까지 30만 병력으로 늘어나 독일군 20개 사단을 물리칠 수 있었고, 1943년 시칠리아 섬에 있었던 병력은 오합지졸의 이탈리아군 10개 사단과 독일군 2개 기갑부대뿐이었다. 한편 연합군은 약 50만 명의 병력을 시칠리아 섬에 투입하였고, 시칠리아인들은 독일군을 못마땅하게 여겨 애써 막으려 하지 않았으며, 시칠리아 점령으로 무솔리니가 몰락했다. 그리고 몽고메리가 지휘하는 2개 군단은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하여 천천히 진격하였으며, 이탈리아 정부는 연합국이 제시한 비밀조항에 동의하였고, 9월 8일 항복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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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아시아의 태평양전쟁 일본은 유럽이 전쟁을 시작하자 이틈을 이용하여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했고, 영국 지배의 말레이 반도에서 산출되는 주석, 고무, 석유를 강탈하여 경제자립을 이루었다. 태평양 지배세력이 되기 위해 미국을 무력(無力)하게 만들어야만 했고, 그러기 위해 'Z작전계획'을 세웠으며, 암호명은 '도라도라'로 하여 1941년 12월 일요일 항공모함과 360여 대의 항공기를 새벽에 동원했다. 그리고 하와이 진주만, 대만, 필리핀에 있는 미국군을 기습 공격해 진주만에서 전함 8척, 순양함 3척, 구축함 3척, 기뢰 부설함 1척을 비롯한 수많은 함정을 파손하였고, 180대가 넘는 항공기가 파괴되었다. 2,000명이 넘는 미군 장병이 죽었고, 부상자도 1,000명이 넘었으나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3척과 해안에 있는 군사시설과 유류 저장 설비는 피해를 면하였다. 필리핀에서는 극동군이 보유하고 있던 항공기의 절반 이상이 파괴되었고, 해군기지도 파괴되었으며, 아시아 함대의 일부는 남쪽으로 내려가 피해를 면했는데 기습공격은 미국국민을 단결시켰다. 그리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잠재웠고, 1941년 12월 8일 미국의회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진주만 습격을 영화로 만든 '도라 도라'> 마닐라는 1942년 1월 2일 일본군에 함락되었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휘하의 미군과 필리핀군은 일본군 공격을 저지했으나 일본은 계속하여 병력을 증강했으며, 맥아더는 3월 11일 전속명령을 받았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났고, 그 후 4월 9일 필리핀의 미군은 일본에 항복하였고, 일본은 필리핀을 점령한 후 동남아시아와 미얀마의 대부분 지역과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태평양의 자바 등 많은 섬들을 점령했다. 1942년 4월 18일 미군 폭격기가 도쿄(동경)를 공격해 일본정부의 위신을 떨어뜨렸고, 연합군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으며, 6월 일본군은 싸움의 결말을 내기 위해 미드웨이 해전을 했다. 해전에 동원한 것은 대형 항공모함 4척, 소형 항공모함 3척, 수상비행기를 탑재한 항공모함 2척, 전함 11척, 순양함 15척, 구축함 44척, 잠수함 15척, 그리고 소형 함정들로 구성되었다. 미국의 태평양함대는 대형 항공모함 3척, 순양함 8척, 구축함 18척, 잠수함 19척, 함대를 지원해줄 항공기 115대 가량을 보유하였는데 전투의 결과는 미군은 일본의 대형 항공모함 4척을 모두 격침했다. 그리고 대형 순양함도 1척 침몰시켰고, 일본은 가장 우수한 해군 조종사를 거의 다 잃어버려 태평양전쟁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일본이 미국과 전쟁은 중국에 영향을 주었다. 1941년 12월 장제스(장개석) 정부는 정식으로 일본에 선전포고 하였고 독일과 이탈리아에게도 하였으며, 중국의 3개 야전군은 미얀마 국경으로 가 연합국이 중국에 보급품을 보낼 수 있는 육로를 확보했다. 1942년 1월 3일 장제스는 중국 전투 지역의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 인정되어 미국의 조지프 W. 스틸웰 장군을 장제스의 참모장으로 파견하여 일본군이 미얀마 진격을 저지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일본군은 아삼 동부에 확고한 방어선을 구축하려 하였으나 연합군은 아삼 지방에 대한 일본군의 위협을 막아내고 미얀마 내부로 진격할 수 있는 주도권을 먼저 잡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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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는 유능하지만 성격 때문에 스틸웰의 소환을 요구해 1944년 10월 떠났고, 1945년 5월 초 인도군 1개 사단이 미얀마 양곤의 점령으로 미얀마 탈환은 사실상 마무리되었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로는 일본은 수세로 돌아섰고, 일본 해군의 활동이 제한을 받아 병참과 증원군을 받지 못하였으며, 일본은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섬들은 점령되어 갔다. 1943년 3월 마지막 증원군을 파견하려는 일본 함대는 비스마르크 해전에서 전멸하여 연합군을 공격하는 것은 남은 비행기뿐이었고, 6월 15일 미국 해병 2개 사단이 마리아나 제도의 사이판 섬에 상륙했다. 3만 명의 일본군 수비대는 격렬하게 옥쇄로 저항한 것 중에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항복은 없었고, 오직 죽음으로 대신하였는데 사이판 함락은 도조 히데키 내각 전체가 사임해 이미 패전을 의미했다. 일본 본토를 폭격 위해 개발한 B-29 대형폭격기(사다리 비행기)의 기지를 사이판 섬에 세우고 1944년 11월 24일 이 섬에서 발진한 100대의 B-29 폭격기가 처음으로 도쿄를 폭격하였다. 이것은 1942년 이후 일본 수도에 대한 최초의 최대공습였고, 2차 세계대전 중 최대 항공모함 전투는 1944년 6월 19일 430대의 일본군 항공기가 미국 함정을 공격한 것으로 필리핀 해역에서 전투가 시작이 되었다. 미국공군은 300대가 넘는 일본 항공기를 격추했고, 항공모함 2척을 침몰시켜 일본군의 재앙으로 끝났으며, 일본 함대는 북쪽의 오키나와까지 퇴각하는 동안 1척의 항공모함과 100대 이상의 항공기를 잃었다. 일본군 조종사들은 속성 훈련을 받은 뒤 전투에 투입되었고, 일본 항공기에 씌운 장갑용 강철판은 불충분해 항공전에서 패배하는 결정적 요인이었으며, 1944년 말부터 1945년까지 일본을 꾸준히 폭격했다. 사이판과 도쿄는 2,400㎞나 떨어져 B-29한테도 너무 긴 비행거리이였으며, 사이판과 일본 중간쯤에 있는 오가사와라 제도의 작은 화산섬 이오지마를 점령하기로 하였다. 일본군은 이오지마를 지키기 위하여 자연동굴과 바위투성이의 험준한 지형을 활용하여 지하 방호시설을 만들었고 병력은 2만 명이 넘었고, 미국 해병대가 1945년 2월 19일 상륙했다. 하지만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고 공중에서 가미카제 공격으로 수많은 연합군 함정이 파손되었으며, 이 섬을 점령한 것은 3월 16일이었고, 미국 해병대 6,000명의 목숨을 잃었으며, 일본군 수비대는 거의 전멸하였다. 그후 5개월 동안, 2,000대가 넘는 B-29 폭격기가 이 섬에 착륙하여 대낮의 높은 고도에서 폭탄을 투하하면 적중률이 낮기에 밤에 낮은 고도에서 폭탄을 투하해 도쿄에 대한 최초 야간 공습을 했다. 도쿄 건물의 1/4가량이 파괴시키고, 8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으며, 100만 명은 난민이 되었는데 임기 중 사망한 루스벨트 후임으로 해리 S. 트루먼이 대통령이 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군의 생명을 덜 희생시키기 위해1945년 8월 6일 1941년부터 비밀히 개발한 원자폭탄을 히로시마(광도)에 투하했는데 열기, 돌풍, 화재로 11㎢에 이르는 모든 것을 파괴되었다. 그리고 7만 명 이상이 죽었고, 7만 명 이상이 다쳤으며, 8월 9일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4만 명을 죽었고, 7만의 부상자를 냈으며 4.6㎢를 폐허로 만들었다. 한편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여 한반도의 북쪽을 점령하였고, 8월 14일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지시에 국왕도 복종해야 한다는 단서를 일본이 무조건 받아들였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일본의 공식 항복을 받아들일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지명했고, 1945년 9월 9일 일본은 중국에서 마지막으로 공식 항복해 길고도 고통스러운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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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독일의 U보트 1942년 독일의 U-보트는 600만 톤이 넘는 선박을 격침하였고, 1943년 U-보트는 240척으로 늘어났고 1개월 동안 60만 톤이 넘는 선박을 격침하였으며, 최대 규모의 호송선단 전투에서 20척의 U-보트는 상대편 선박 77척 가운데 21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거두었고 손실은 1척뿐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는데 연합군은 항공모함을 호위함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장거리 항공기가 호송 선단을 엄호하기 시작했으며, 엄호하는 함정들은 U-보트가 포착할 수 없는 초단파 레이더를 장착하여 U-보트의 통로를 정기적으로 공습하여 U보트를 격침시켰다. 활동에 제한을 받은 U-보트는 그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10만 톤을 넘지 못하였고, 1944년말 U-보트는 개량 되어 환기장치를 장착하여 물 속에서도 전지를 재충전하는데 필요한 산소를 공급받았다. 그리고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는 거의 완전한 잠수함이 만들어졌고, 이 잠수함은 잠수시간도 더 길고 잠항 속도가 더 빠른 새로운 양식의 U-보트이었다. 그러나 이 잠수함이 작전에 참여 하여 전세를 뒤집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
(8)공중전 1940년 7월 16일 히틀러는 영국 침공 계획을 마련하면서 독일 공군은 공습을 가해 영국 공군력을 파괴하여 영국 상륙 작전의 길을 연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공중전(브리튼 싸움:Battle of Britain)에서 패했다. 이로서 영국 침공을 무기한 연기하였고, 1942년초 영국 공군의 폭격기는 독일 공장, 철도역, 조선소, 다리와 댐, 그리고 도시를 공습하여 군수산업 시설을 파괴하였다. 민간 가옥을 파괴함으로 전쟁의 의지를 꺾으려는 의도로 공습했고, 연합국은 1942년 3월 소이탄을 투하하여 불을 지르는 독일방식을 이용해 1,000개가 넘는 소이탄을 쾰른에 퍼부어 건물 밀집지역 1/3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독일도 야간전투기 부대가 방어전에 나서기 시작했으나 값비싼 대가를 치루었는데 영국에 기지를 둔 미국 제8공군도 1943년 1월부터 공습에 참여했고, 이중 폭격기들은 전투기의 호위범위를 벗어나면 독일 전투기의 공격을 받는 약점이 있었으며, 공군력의 균형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장거리 전투기인 P-51B(무스탕 Ⅲ)가 제 8공군에 배치된 1943년 12월이었고, 독일 사람들은 군사 시설이 없고 유적지가 많은 드레스덴를 폭격하지 않으리라는 판단에 많은 사람이 이 도시로 모였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을 뒤엎고 영국은 폭격 받은 것에 대한 보복으로 1945년 2월 13-14일 밤 영국 공군은 무자비하게 800대의 항공기와 미국 제8공군이 5차례의 연속 공습하였다. 공습동기는 독일의 동부전선 방어에 중요한 교통 중심지 드레스덴를 파괴해 소련군의 진격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고, 독일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기 위해 폭격을 융단 같이 퍼부어 '융단 폭격'이라는 단어가 생겼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들 가운데 하나를 거의 다 파괴하였으나 고작 3만 5,000-13만 5,000명을 죽이는 결과만 있을 뿐이다.  <도시를 폭격하는 폭격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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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독일이 행한 강제노동과 대학살 히틀러는 점령한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과 짚시를 물리적으로 멸종시킬 예정이었고, 슬라브족의 폴란드인과 러시아인을 값싼 노동력으로 이용해야 할 '하등인간'으로 간주해 폴란드는 이 목적의 실습장이 되었다. 1939년 히틀러는 친위대를 이용해 300만 명의 폴란드 지식인을 사살했으며, 1941년 7월 독일을 우크라이나 인들이 스탈린의 억압에서 구출해준 해방자로 환영했으나 많은 곡식을 징발하였다. 그리고 노역자 수백만을 강제로 독일로 데려와 저항이나 태업을 하면 잔인하게 보복을 가하여 호의는 곧 원한으로 바뀌었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무기공장에 동원하여 750만 명을 강제노동이나 노예노동으로 혹사시켰으며, 소련의 유대인은 살인특수기동대가 조직적으로 1941년 약 140만 명을 사살했다. 한편 1941년 유럽 중부와 서부 유대인을 폴란드 아우슈비츠나 트레블링카의 강제수용소에서 집단으로 학살 하거나 죽을 때까지 노예노동자로 혹사시켰고, 1942-44년 9월까지 400만 명이 넘는 유대인이 학살당했다. 전쟁 중에 약 570만 명의 유대인이 목숨을 잃었고, 유대인들이 반항 한번하지 못하고 죽어간 것은 독일군의 잔인함이 인간의 반항 심리마저 파괴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잔인하였는지 짐작하기가 어렵다. 독일의 잔학성에 대항해 1944년 소련,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프랑스, 그리스가 저항운동을 강하게 전개했고, 저항이 성장하여 많은 독일 병력들을 후방에 묶어 두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독일은 전투에 투입하여야할 병력의 손실을 가져왔고, 저항운동을 뿌리뽑으려고 민간인에게 무차별보복을 자행했는데 이것은 더 큰 저항운동을 일으켰고, 유럽 국가 대부분은 독일인에게 큰 반감을 품게 되었다. <그릇을 베고 있는 나치의 강제 수용소>
(10) 일본이 행한 대학살과 만행 독일도 점령지에서 인간으로서 상상하지 못할 만행을 저질렀으나 일본은 그보다 더 악랄했고, 유럽 전쟁은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라면 일본은 땅뿐 아니라 점령지에서 문화와 사상마저 일본화려 했다. 그 때문에 더 많은 만행을 저지르게 되었으며, 그리고 종전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독일과 일본이 다른 점은 독일은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거기 비하여 일본은 반성보다는 자신의 과오를 미화하려 안간힘을 다 쏟고 있고, 교과서마저도 왜곡하면서 야망을 키우고 있다.
(11)카이로 선언(1943. 11. 22-26) 연합국 지도자 윈스턴 처칠과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논의하기 위해 모였고, 장제스는 그들과 함께 일본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한 것을 선언하였다. 1914년 이후 일본이 점령했던 모든 영토를 빼앗고,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고 선언했으며, 이것은 한국이 최초로 세계 관심에 등장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이 일본 영토문제에 대해 내린 최초 공식성명이다. 내용은 3국(미국, 영국, 중국)은 일본에 대해 가차없는 압력을 가하여 침략을 저지하고 응징하나 영토확장의 의사는 없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얻은 태평양제도의 박탈과 만주와 타이완 등을 중국에 반환한다. 그리고 점령지역으로부터 일본을 몰아낸다는 것 등이고, 또한 한국에 대한 특별조항을 넣어 '한국 국민이 노예상태에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할 것을 결의한다'고 명시해 한국의 독립이 처음으로 국제적인 보장을 받은 회담이다.
(12)얄타회담(1945. 2. 4-11) 2차 대전이 종전이 되기 전에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스탈린 및 처칠은 크림 반도의 얄타에서 만나 전쟁수행, 전후처리문제, 국제연합창설, 독일의 분할점령, 비무장화, 전범자처리 등 중대한 결정을 하였다. 그 외에도 폴란드는 미국과 영국이 지지하는 런던망명정부와 소련이 지지하는 인민해방위원회와 교섭에 맡기기로 하였고, 소련이 일본에 참전하는 대가로 사할린과 치시마 열도를 획득한다. 일본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의 처리는 대연항구는 국제화하고 여순에 소련의 조차권을 회복하며, 만주철도는 중국과 소련의 공동운영 등의 권익을 보장받고, 이 회담으로 모든 이익이 거의 소련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1946년 협정 내용이 밝혀지자 미국에서 비난의 소리가 높아 얄타회담이 논란 대상이 되었고, 이것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병에 걸린 것을 원인으로 보고있다. 지도자의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예를 들 때 얄타회담을 인용하는데 루스벨트 대통령은 얄타회담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4월 12일에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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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포츠담 회담(1945. 7. 17-8. 2) 포츠담회담은 포츠담 선언과 포츠담 협정을 함께 말하고 있으나 회담 참석자가 다르다.
1)포츠담 선언(1945. 7. 26) 독일 베를린 교외 포츠담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 회담으로 주요참석자는 미국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영국 윈스턴 처칠, 중국 장제스(장개석)가 참석해 일본의 항복권고와 전후의 일본처리방침을 선언했다. 얄타회담의 약속에 따라 일본에 참전하기로 한 소련의 스탈린이 8월 회의에 참석하여 서명했는데 선언문은 13개항으로 1-5항,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세계인류와 일본국민에게 사죄하고 선언문을 즉각 받아드리라. 6항, 일본 군국주의을 배제 한다. 7항 일본의 영토를 보장하고 점령한다. 8항, 카이로 선언을 실행하고 일본 영토를 한정한다. 9항 일본을 무장해제한다. 10항, 전범자 처벌과 민주주의 부활하고 인권을 존중한다. 11항, 일본 군수산업금지하며, 평화산업은 유지하고 허가한다. 12항, 일본에 민주주의를 수립한 후 점령군은 철수한다. 13항, 일본은 무조건 항복한다. 특히 8항은 카이로 선언의 실행으로 다시 한국독립을 보장받았다. 2)포츠담 협정(1945. 8. 2) 주요참석자는 미국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영국 윈스턴 처칠 총리(총리후임 클레멘트 애틀리로 교체) 소련의스탈린이 참석해 포츠담 선언과 협정에 서명했고, 이 회담에서는 유럽 평화협정의 내용과 절차를 논의했다. 그러나 평화조약을 서면화하려고 하지는 않았으며, 이 회담에서는 대체로 옛날 전시 회담에서 볼 수 있었던 우호와 친선은 찾아볼 수 없고 각 나라는 오로지 자국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었다. 특히 처칠은 스탈린의 속셈을 의심하여 완강하게 표현을 하였고, 독일 점령 목적을 무장해제, 비(非)나치화, 민주화, 비중앙집권화, 비공업화 등에 두었으나 특히 독일의 비군사화에 역점을 두었다. 협정의 내용은 1. 독일에 중앙정부를 두지 않고 단일 단위로 다루고 분할은 일시적으로 한다. 2. 독일 처리를 위하여 외무장관이사회를 둔다. 3. 독일로부터 배상금징수 등을 정한다. 동부국경을 오데르강, 나이세강을 정하는데 3국이 이를 지지한다는 것 등이다. 7월 26일 일본에 무조건 항복할 것과 포츠담 선언을 수락할 것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눈여겨볼 가치가 없다'며 거절하였다가 원자폭탄 2개를 얻어맞고 또 소련이 전쟁에 개입하여 8월 10일 불쌍한 일본 정부는 무조건 항복하였다. 2차 대전으로 전체 사망자의 수는 3,500만-6,000만 명으로 다양하게 추산된다. 이중에 소련이 가장 많이 죽어 약 2,500만, 중국인 약 780만, 폴란드 약 600만, 유대인 약 570만 이다. 군인보다 민간인이 피해가 1차 대전보다 훨씬 많은 것은 폭격으로 민간인이 피해를 많이 입었고, 인종과 민족주의를 주창하던 독일과 일본은 죄 없는 민간인을 조직적으로 살해하였기 때문이다.  <1945년 얄타 회담 중인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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