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2. 종교개혁 각국을 지배하는 원수(元首)이며, 교황청은 세계정부였으나 극도한 부패가 종교개혁을 불렀다. (Puritan)이라고 하는데 1529년 스파이어 의회는 카톨릭 신자는 루터교국가에서 전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루터교는 독일 카톨릭국가에서 전도 할 수 없다고 결정했는데 루터교 제후들은 이 결정을 정식으로 반대(Protest)하였고, 이 때부터 루터교도 들에게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을 사용했다. 후에 개신교 전부에 사용되었고, 영국에서는 '퓨리탄(청교도)'은 칼뱅주의를 따르는 엄격한 신앙자만을 따로 이렇게 불렀으며, 프랑스는 프로테스탄트 사람을 유그노(Huguenots)라고 불렀다. 침례교, 구세군 등을 말하고, 구교 또는 카톨릭은 로마교황의 명령을 따르는 신도전부를 말한다. 그 외에는 영국의 성공회, 그리스의 정교회가 있으며, 이단으로 안식교, 전도관, 통일교, 크리스챤 싸이언스, 여호와 증인, 말일성도 등이 있고, 신교라는 용어는 적절치 못한 표현이다. 되는 교이고, 신교는 나중에 생겨 아우쯤 되는 종교로 착각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성서대로 살고 인간의 방법을 보태지 않는 다는 것이나 지금도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교단 헌법이 성경 아래 있다라고 말하기가 어렵고, 또 헌법이 성서대로만 만들어 졌다고 보기에 너무 인간적 욕심이 있다라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잘 못된 헌법 때문에 신교의 위기설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은 사견을 말한 것이다. 것도 많이 있으며, 교단헌법이 성서권위 위에 있거나, 인간의 욕심이 더 하여지면 이단이다. < 400 주년 '종교개혁기념비' 세계 칼뱅파 성금으로 만든 제네바 대학의 바스티옹 공원> (1)알비파 혹은 카타리파 순결을 강조하는 초기개혁자들로 1200년경 남부프랑스 대부분과 북부이탈리아에서 많은 신도가 있었다. 1208년 인노센트3세가 남녀노소 구별 없이 학살하였고, *종교재판을 설치하여 100년 안에 전멸하였다. 그레고리 9세가 완성하였으며, 로마 가톨릭교회가 자신들을 반대하는자를 탄압하기 위해 전 그리스도교 국가를 대상으로 하여 제도화된 비인도적인 혹심한 재판 또는 이단심문(異端審問)을 말한다. 그 임무로 하였고, 이단자에 대한 탄압은 4세기 교회의 성립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당시는 관용적이었으나 12세기 이르러 그 태도가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그것은 남프랑스에서 일어난 대규모 적인 알비파 운동은 로마교회에 대한 체제 변혁을 목표로 하는 혁명운동으로 교황의 충격은 대단했다. 충성된 재판장은 교황대리로서 치외법권적(治外法權的)인 권한을 부여받았다. 전 그리스도교국에 파견하여 전문적이고도 항구적인 조직을 만들었고, 재판 방법은 피고에게 유리한 변호는 일체 허용되지 않았고 불리한 증언만 허용되었으며, 밀고는 비록 친자식 형제 사이의 것이라도 정의라는 이름으로 칭송을 받았고, 또한 다종다양하고 처절한 고문에 의해 자백이 강요되었다. 또는 날조되어 용의자는 반드시 종신징역이나 화형을 받도록 짜여진 암흑재판이었고, 마녀 재판도 여기에 속하였으며, 피해자의 재산은 교회와 국가가 분배하였다. 특히 스페인은 국왕의 적극적인 영합에 힘입어 가혹의 극을 이루었는데 교황 이노센트 8세(1484-92)는 (領主), 지방자치단체 등의 세속적인 재판으로도 행해졌다. 프로테스탄트 국가에서도 종교재판이 성행되었다. |
|
(2)발도파 하였는데 그의 주장은 성직자들의 횡령과 낭비를 반대하고, 성직자만 복음 가르칠 특권을 부인하였다. 연옥을 반대하며, 성서를 신앙과 생명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가르쳤고, 그들은 종교 재판으로 90만명이 처형되어 거의 소멸되었으나 지금까지 알프스의 서남쪽 계곡 '터린'에 남아 있다. 이들이 이탈리아의 지도적 프로테스탄트 단체가 되었다. 권위, 화체설, 고해성사 등을 부인 하으며, 일반인도 성경을 읽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는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였고, 이들 무리를 '롤라드'라고 하며, 교황이라도 정당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적그리스도라고 주장하였고, 교황 마틴 5세는 죽은 그를 무덤에서 시체를 꺼내어 화형시켰다. 주장을 두려움 없이 전하는 선교사이었으나 화형 당하였다. 그를 따르는 무리는 17년간 독일황제와 교황에게 전쟁을 하다가 거의 전멸하였는데 '틴'교회 앞 광장에 있는 그의 동상에는 '진실만을 말하고 진실만을 사랑하고 진실만을 지켜라'쓰여 있다. <'진실만을.... 진실만을 지켜라'고 써 있는 안 후스 동상> (5)사보나롤라(1452-1498) 개혁을 주장하여 많은 사람이 회개하였고, 교황 알렉산더 6세는 그에게 추기경자리로 회유했으나 실패했다. 플로렌스 대 광장에서 교수형함께 화형을 받았다. 것이라고 하였고, 교황을 향하여 '거룩한 명령을 하는 가장 거룩하지 못한 자들'이라고 조롱은 하였다. 부패와 불만이 극에 달했으며, 종교재판의 잔인성에 반항하기 시작 할 때 루터가 개혁을 부르었다. 모두들 정신차리고 가담하였고, 그는 예수의 탄생 이후 바울 다음으로 위대한 사람으로 역사상 가장 험악한 제도로부터 자유를 얻어내기 위하여 세계를 지도하였는데 그의 생애를 간략하게 설명하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훌륭한 학생으로 말 잘하고 사교적이며, 토론과 음악을 좋아하며 매우 짧은 기간에 학위를 얻었으나 그의 몸은 병약하여 움직이는 종합병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에 믿음을 얻고 평화를 찾았다. 교수가 되어 성서에 대한 그의 강의는 독일 전체 학생들에게 매력을 주기 시작하였다. |
|
2)면죄부와 95개 조항(1517, 10, 31일) 주장하였는데 파스칼 1세(817-824)와 요한 8세(872-882) 때에 시작하였다. 레오 10세(1513-1521)는 면죄부를 규정된 금액으로 발행하였고, 면죄부는 이단자(예: 십자군)와 싸우는 사람 또는 교황의 명령으로 출정하는 군사(예: 무적함대의 승선군인)나 그곳에 쓰일 물품이나 돈을 내는 사람에게 주거나 돈으로 사고자하는 사람에게 팔았고, 면죄부는 아주 수지 맞는 장사였다. 교황 수입의 중요한 근원으로 중간 상인이 도매로 사서 소매로 팔았고, 1517년 베드로 성당 건축비용을 충당 하기 위해 교황이 보낸 면죄부 상인 요한 테첼이 루터 앞에서 선전한 말을 옮겨 보면 '여러분의 동전이 돈궤에 떨어짐과 동시에 원하는 사람의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진다' 라고 하였다. 95개 조항으로 적어 비덴베르그 교회 문에 붙였다. 이것이 뜻하지 않게 유럽의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다. 반박 문'을 발표한 것으로 내요을 간추려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교수형이나 화형)'을 받아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루터는 이 칙서를 많은 사람 앞에서 불태웠다. 취소하라고 명령하였으나 루터의 대답은 '나는 여기에 섰다. 성서에 위반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취소 할 수 없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라고 말하였고, 루터는 선고를 받았다. 제후 중에 친구가 많아 황제의 칙령은 실행되지 못했고, 비덴베르그에 사는 친구 집에 숨어 1년 동안 강의와 저술을 계속하였으며, 성서의 독일어 번역은 독일을 영적으로 만들었고, 독일어의 기초가 되었다. 폭군으로 돌변하여 제후의 편을 들게 되었고, 농민들은 평정되었으며, 조금은 좋은 대우를 받게 되었다. <프랑스 유그노(후보노텐)와 독일 루터파가 함께 있는 개신교회는 쌍둥이 건물로 현재는 유그노 박물관이다.> 지지해 1540년엔 북부 독일은 모두 루터교도가 되었고, 교황 바울 3세는 루터교를 박멸하라 지시했다. 독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스페인과 식민지를 다스리는 세계최대의 지배자 카를 5세의 군대에게 참전한 모든 군대에 면죄부를 주었으나 루터주의 세력이 확장되고 있는데도 이를 억제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의 세력을 적대시하는 프랑스와 만성적인 전쟁에 돌입하였고, 또 오스만투르크제국의 계속적인 공격으로 독일 제후의 지지를 얻어야만 했으나 루터교는 작센 선제후들의 비호 아래 있었다. 5세는 십자군 전쟁이라 선언하며 프로테스탄트와 1546-55년까지 긴 전쟁을 하였다. 1555년 '아우그스부르크' 강화로 전쟁을 끝내고 루터교도들을 합법적으로 인정하였다. |
|
(2)스위스 받아 들어져 면죄부, 미사, 독신생활, 형상숭배를 폐지하였고, 성서만을 유일한 권위로 사용하였다. 돈을 받고 전쟁을 하거나 순례 여행자에게 음식과 침식을 제공하면서 돈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으로 알프스 중턱에 사는 농토 없는 용병과 여관업과 음식업을 하는 카톨릭신자들은 생사가 달렸기에 반대하고 일어나 1531년 카펠에서 전쟁을 했으며, 즈빙글리파의 너무 많은 개혁과 참견에 불만이 많았다. 결국 그는 용병으로 구성된 카톨릭파에 대패하여 자신도 목숨을 잃었고, 스위스 평야는 신교를 믿었으나 산악 지대는 구교를 믿었는데 산악과 평야를 가진 3개주는 반반식 나뉘어 정착했다. 쓸 때 밑거름이 되었으며, 1533년 종교개혁을 받아드려 1534년 프랑스에서 추방되었다. 1536년 스위스 제네바서 학원을 차리고 학원 중심으로 신교를 펴 여러 나라의 관심을 끌었고, 그는 루터보다 더욱 강력하고 날카로운 개혁을 들고 나와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성공하여 신정정치를 실시했다. 엄격한 신앙생활을 강요하였는데 예로 간통죄는 사형에 처하였고, 음주, 노래, 춤, 데이트(사음 죄), 화려한 식탁을 차리면 추방했으며, 하나님에 절대순종하게 했으며, 반대자는 감금했고 이단자는 교수형에 처했다. 그도 루터처럼 잔병이 많아 '살아 움직이는 병동'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프랑스에 퍼졌으나 국왕들의 반대와 교황의 탄압으로 대륙에서는 그의 말살되었다. 섬나라 스코틀랜드만 살아남아 칼뱅 장로교(청교도)가 되었으며, 그는 예정론을 주장했는데 이것은 유전론에 가깝고 장로교회의 기초가 되었고, 그는 공업을 일으켜 팔려 다니던 스위스 용병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엄격한 신권정치를 한 칼뱅> 사람이 받아드려 25종의 성서가 번역됐으며, 1522년 카알 5세와 아들 필립2세는 종교재판을 설치했다. 말할 수 없는 잔인한 방법으로 10만 이상을 학살한 것이 독립에 도화선이 되었고, 1566년 '오라녜'공 빌렘의 지휘로 스페인의 필립 2세를 쫓아내어 1581년 북부는 신교 국으로 독립하였다. 1618년 스페인이 벨기에를 거점으로 하여 네덜란드를 공략하려고 할 때 30년 전쟁이 일어났고, 30년 전쟁이 끝난 1648년 웨스트팔리아 조약으로 완전 독립했으며, 이 전쟁 와중에 네덜란드는 해외개척은 진행했다. 1602년 동인도회사, 1621년 서인도회사 설립했고, 현재 뉴욕에 뉴암스테르담을 건설했으며, 1653년 하멜이 표류하여 제주도에 도착하였다. |
|
2) 네덜란드의 역사(고대에서 현대까지 간략한 역사) BC 1세기 켈트족과 게르만족이 로마 정복당시에 살았고, 5세기초 게르만 민족의 침입으로 로마의 지배가 끝났으며, 5세기말 프랑크족의 메로빙거 왕조가 이 나라를 지배하였다. 1세가 죽은 후 분할되었으며, 10-14세기 중엽까지 세속 공국들과 교회 공국들이 출현하였다. 서로 지배권을 갖기 위해 다투었고, 1519년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한 지방이 되었으며, 종교개혁 동안 북부 지방들은 칼뱅주의로 개종하였고, 오렌지 공(公) 빌헬름(1533-84)이 스페인 왕 펠레페 2세의 종교개혁 탄압에 저항하여 칼뱅주의자들과 반란을 일으켰다. 스페인 사이의 전쟁이 계속되었으며, 1648년 스페인은 네덜란드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설립하여 1619년 이 회사는 인도네시아 자바와 그 주변 섬들을 정복하려고 자카르타를 거점으로 삼았다. 이 회사는 희망봉과 마젤란해협 사이 바다에서 무역을 독점해 원주민과 계약을 맺을 수 있는 권한을 네덜란드 정부가 주었고, 요새를 짓고 군대를 가질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또 관리들을 통해 행정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권리도 주었고, 1618-43년 강력한 총독 통치 아래 영국 함대를 물리치며, 포르투갈을 제치고 동인도제도를 장악하였다가 점차 해상세력 쇠퇴하였다. 그 대신 인도네사아 섬을 점령하는 일에 더욱 몰두 하였고, 네덜란드 정부는 동인도회사 부패로 많은 부채 때문에 1799년 회사의 특허장을 취소하고 부채와 재산을 넘겨받았다. 축소시키려는 영국의 항해조례가 선포되어 1652-54년 영국과 네덜란드와 전쟁에서 패하였다. 명예혁명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그들 부부는 같이 윌리엄3세와 메리 2세로 영국 국왕이 되었다. 윌리엄 3세는 영국과 네덜란드를 함께 다스리면서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물리쳤고, 18세기 동안 네덜란드의 해상력은 쇠퇴하였으나 자유로운 나라가 되었고, 무역은 잉글랜드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공 빌렘 6세에 의해 오라니에가(家)가 회복되었으며, 그는 빌렘 1세로 재위했다. 그는 벨기에와 룩셈부르크가 포함된 새로운 네덜란드 왕국을 세웠고, 1830년 벨기에가 반란으로 독립했으며, 1840년 빌렘 2세는 왕국을 의회국가로 만들면서 1848년 신(新)헌법은 영국 체제를 본 따서 만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중립을 지켰으나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 의해 점령되었다. 대전 후 네덜란드는 중립국을 버리고 1949년 NATO에 1958년에는 유럽경제공동체(EEC)에 가입했다. 1950-70년대 초반까지 가톨릭당이 개신교도들을 포함해서 재조직한 국민당이 우세하였고, 1973년 그 자리를 노동당에게 빼앗겼으며, 1977년 이후로는 다수 연합정부가 계속되고 있다. 을사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에 대한 열강의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아 자결하여 순국한 일이며, 네덜란드는 튤립과 꽃이 연상되는 나라이고, 국민이 유럽인종 중에 가장 크고 성질이 나쁘다고 하는데 여행 중에 이 나라 기사가 운전을 했는데 실감했다. 제주도에 표류하여 서울로 압송되어 벨테브레(한국 명은 박연-朴燕)과 만났다. 이들을 통해 서양 세계가 상당히 소개된 것으로 생각되며, 하멜은 우리나라 표현하기를 성질이 급하고 매사에 이판사판으로 행동한다고 기록했고, 한국을 서방에 소개한 최초 책으로 유명하며, 유럽 각국어로 번역됐다. 네덜란드는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바람이 강한 네덜란드와 풍차> |
|
(4)스칸디나비아 불렀고 이들이 경건하고 진실하며, 깨끗한 생활을 하여 카톨릭과 큰 대조가 되었다. 2)성 바돌로메(바르톨로메오) 대학살(1572, 8월24일) 교황의 도구가 되어 '성 바돌로메' 기념일(축일)에 유그노 7만 명을 학살한 날이다. 역사상 가장 참혹한 사건의 하나로 1572년 8월 18일 앙리 4세와 카더린 드 메데치 딸과 정략결혼했고, 카더린 드 메데치는 앙리 3세를 편애하여 샤를 9세는 섭섭하여 이 때문에 그는 프로테스탄트 편으로 돌아섰다. 이를 승인할 계획이었는데 카트린 드 메데치는 유그노인 콜리니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염려했다. 가톨릭교도인 기즈가(家)가 계획한 콜리니의 암살을 승인하였고, 그녀의 딸 마르그리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위그노들은 파리로 몰려들었으며, 이 기회를 노려 콜리니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였다. 왕이 이를 조사하자 암살 음모가 탄로날 것을 두려워한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파리에 모인 위그노 지도자들의 암살계획을 꾸몄고, 8월 24일 새벽, 가톨릭교도들은 위그노들에 대한 무차별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혼식'이라 불렀고, 교황은 크게 기뻐해 훈장을 만들어 파리로 추기경을 보내 노고를 치하했다. 학살 후에 유그노는 무장 단결하여 탄압에 대항하는 유그노 전쟁을 하였고, 1598년 유그노는 낭트칙령으로 예배의 자유를 얻어냈는데 이 날은 카톨릭의 클레멘트 8세는 '저주받을 일'이라 하였다. 예수회의 꾸준한 지하운동으로 1685년 낭트칙령이 취소되어 50만 유그노는 프로테스탄트 국가로 도망갔고, 그들이 독일에 기술과 상업에 부흥을 일으켜 독일이 부강하는 원인이 되었고, 스위스로 간 유그노는 그들의 기술로 시계산업에 공헌하여 '스왓치 시계'의 기초가 되어 스위스를 세계적인 시계국가를 만들었다. 보석기술을 발전시켜 세계의 보석거래 중심지가 되게 하였다. 나폴레옹은 신성로마제국을 점령하여 1802년 모두에게 종교의 자유를 주었다. 정치적 권력의 회복은 없을 것이며, 만약 회복이 된다면 그것은 계시록의 실현으로 세상의 종말을 뜻한다. (Catalina), 이탈리아-카테리나(Caterina), 카타리나(Catarina), 프랑스-카트린(Catherine)] 교육을 받아 일찍이 카톨릭 맹신자가 되었고, 그의 삼촌 교황 클레멘트 7세 주선으로 앙리2세와 결혼했다. 딸 3명 중 하나가 미모와 교양을 겸비한 마르그리트(마가레트)는 앙리 4세의 부인이 되었다. 그녀는 품행이 바르지 못해 1599년 교황에 의해 결혼이 취소되었고, 후첩으로 피렌체 메디치가 출신인 마리 드 메디시스(메데치)와 결혼해 루이 13세를 낳았으며, 그녀의 손자가 유명한 루이14세이다. 카드린은 프랑스가 화장품으로 유명하게 한 장본 이기도 한데, 그의 친정 플로렌스에서 회교인 들이 가지고 온 화장품을 향료를 기름에 개어 만들어 더욱 발전시키고 상품화해 화장품 산업의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 동기라고 하며, 향수를 달래기 위하여 친정의 연회석에서 즐기던 발레를 프랑스 궁중에서 하게 했다. 이것이 프랑스 발레의 기원이라고 하며, 그는 아들 앙리를 발레에 빠지게 하여 그 틈에 자신이 정치하려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발레는 그녀를 통하여 널리 전파된 것은 부인 할 수 없다. 에스파냐 대사의 권유로 담배를 태웠다고 전하며, 기록상 최초의 여성 흡연자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서구는 여성이 더 많이 흡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유그노 대 학살자 카트린 드 메데치> (6)스페인과 이탈리아 |
|
스페인은 종교재판이 있는 곳이라 종교개혁이 성공하지 못하였는데, 이유는 재판장 토케마다는 18년 동안 10,200명을 화형 시키고 97,000명을 종신 징역을 시켰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종교개혁에 실패로 낙후되었으며 유럽의 고아로 남게 되어 현재까지도 힘을 펴지 못하고 있다. 이탈리아도 교황국이라 종교개혁이 성공하지 못한 나라이며, 종교개혁이 성공하지 못한 나라는 국력에서 뒤쳐지는 결과를 낳았다. 고백을 기초로 해 카톨릭 교회가 된 것처럼 이 신앙고백을 성(聖)과 공(公) 두 자로 함축한 것이 성공회이다. 영국에 처음으로 카톨릭이 전파된 것은 1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며, 596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 1세(540-604)는 어거스틴(?-604)과 수도사 40명을 영국에 파견한 이후 로마카톨릭은 정치적으로 영국을 지배했다. 영국은 윌리엄 시대부터 교황지배를 반대했고, 헨리 8세는 선조들처럼 영국교회가 교황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는데 개혁은 헨리 8세(1491-1547)와 캐서린 왕비의 결혼무효소송이 동기가 되었다. 발표한 데 이어, 1536년 로마의 감독권을 폐지하는 법령을 발표하였다. 되었으며, 먼저 부도덕의 근원인 수도원을 폐지하였고, 영어성서와 영어기도를 교회에 사용했다. 그리고 많은 카톨릭의 의식을 버렸고, 1553년 여왕 메리 1세(피의 여왕, 1553-1558)가 로마카톨릭으로 복귀 했으나 여와 엘리자베스 1세(1558-1603)가 즉위하고 종교개혁의 정착기를 맞이하였다. 발표하여 카톨릭적이며 개혁적인 성공회의 전통을 형성하게 되었다. 온건한 칼뱅주의를 표방하면서 캔터베리 대주교아래 주교들로 이루어지고 이들은 결혼도 했다. 때론 결혼한 카톨릭 신부로 착각 할 때도 있으며, 구약과 신약 66권 외에 외경 14권을 준정경으로 삼고 있고, 영국교회에서 청교도와 감리교가 생기었고, 스코틀랜드에서는 칼뱅의 장로교가 생기었다. 임명 받고 찰스와 함께 웨슬리는 북아메리카의 인디언들에게 선교를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보고 감명을 받은 후에 모라비아교도 페터 뵐러를 만나났다. 이 사람으로부터 자신이 필요한 것은 '오직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의롭다' 함을 인정을 받는다는 루터의 교리로 확신을 얻게 되면서 모라비아교도들의 모임에 참석하였다. 지적인 확신이 개인적인 체험으로 바뀌었고, 35세인 그는 이 순간부터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필생의 사명으로 여기고, 4만 번의 설교와 40만Km의 여행을 하면서 이 복음을 전했다. (Rules)'을 발행하였으며, 헌신적인 일반신도들을 통한 사역을 추구하였다. 이들도 순회설교자들이 되어 감리교 단체들을 관할하는 일을 도왔고, 설교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미국으로 갔으나, 미국의 독립으로 대부분 돌아왔으며, 그는 1784년 독자적으로 성직자들로 임명하였다. 그가 만든 단체들은 영국국교회의 통제를 받지 않고 사역한다고 선언해 지금의 감리교가 창시되었고, 말년에 그는 영국서 존경받는 인물이 됐으며, 그의 공로로 영국은 프랑스 대혁명과 같은 혁명을 격지 않게 되었다.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 가서 칼뱅 사상을 공부하였다가 1559년 스코틀랜드 국회의 소환을 받았다. 그는 민족적 종교개혁 지도자로 교회개혁과 민족적 독립을 하나의 운동으로 만들었으며, 메리는 유그노 대학살을 명령한 카드린 드 메데치의 아들 프랑수아(프란시스)2세와 결혼하였다. 스코틀랜드와 프랑스는 합병하여 카톨릭 아래 놓였고,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 적대관계이어서 같은 처지의 프랑스와 유대가 잘되었으며, 교황과 프랑스는 신교인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를 몰아내려 했다. 메리 스튜어트로 하여금 전 영국을 다스리게 하는 음모가 진행되었고, 엘리자베스가 곤경에 처하도록 교황은 파문하여 신하들이 충성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잉글랜드는 존 녹스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에 성공해야 잉글랜드와 결속이 이루어 질 것으로 믿었으며, 가장 급한 것은 프랑스군대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를 국교로 만들어 오늘날과 같이 되었다. 카톨릭을 육성해 성공회와 신교를 탄압하여 수 만 명 학살하였다. 지배자의 신앙에 따라 수십 만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
|
3] 종교개혁의 결과 없애고 도덕적 악습은 폐지하였고, 또 추종자를 통하여 개혁자들을 박멸하려고 하였다.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2세 등이 있다. (2)예수회 출현 조직했는데 목적은 종교재판을 주재하고 교황에게 절대 복종하게 하는 것이었다. 부도덕, 비행, 살인도 정당화 하였으나 그래도 표어는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였다. 예수회는 권력자들을 모든 수단(매수, 회유, 무력사용)을 동원하여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400만 개신교도가 80만으로 줄었으며, 이들은 아시아를 선교해 우리나라에서는 '야소교'라는 이름을 얻었다. 1648년까지 100년 동안 전쟁을 치루고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개종하면 공직과 소속영지를 잃고, 영주의 신앙이 영내를 지배한다. 그 마저도 칼뱅파는 제외되었다. 영국 및 미국의 뉴잉글랜드에서 칼뱅주의를 투철하게 개혁하려는 주의를 '청교도'라고 말한다. 하였고, 향락의 제한을 주장하여 그들이 영국국교회(성공회)를 장로교로 바꾸어 국가를 변혁시키려는 노력이 반란으로 이어졌으며, 또 다른 방법으로 모색한 것이 의회로 진출하여 뜻을 이루려고 하였다.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장로파와 독립파로 분열했으며, 청교도 문학은 밀턴의 '실낙원(잃어버린 낙원)'이 있다. 미국의 개척지로 떠났는데 그들 102명 중 35명만 청교도이고, 머지는 자기의 이익을 찾아 간 사람이다. 웹스터가 처음으로 '필그림 파더(Pilgrim father-순례태조)'라고 이들을 불렸다. 떠나 영국으로 가 영국의 사우샘프턴(플리머스) 항구를 출발한 날이 1620년 8월 15일이다. 개척해 플리머스로 명명했는데 본래 뉴플리머스 식민지라고 불렀던 곳으로 처음 세워진 유럽인 영구정착지이다. <청교도인이 교회 가는 모습> |
|
(6)30년 전쟁(1618-48) (1619-1637) 2세는 황제가 되기 전 예수회의 교육을 받아 황제가 된 후 프로테스탄트를 억압하였다. 보헤미아와 헝가리 프로테스탄트는 단결해 방어했고, 이것이 30년 전쟁의 시작으로 초반 11년는 프로테스탄트가 연합군이 패하였으며, 카톨릭은 독일의 프로테스탄트에게도 공격하였다. 웨스트팔리아(베스트팔렌)조약으로 끝났는데 처음 전쟁은 종교전쟁의 성격이었다. 후에는 각자 나라의 이익에 따라 양상이 바뀌었으며, 구교권은 합스부르크를 중심으로 반 프랑스를 형성하였고, 폴란드가 발트해 패권을 바라고 구교 편에 참전하였다. <30년 전쟁 상상도> 덴마크는 독일 영토를 탐내어 참전하였다가 1629년 패하여 루터파 공인을 선포했으며, 것으로 인하여 강대국의 지위도 잃었고, 프랑스는 신성로마의 합스부르크와 적대 관계로 개신교 편에 가담하였다. 수호하기 위해 참전하였으며, 전쟁은 독일의 영토에서 이루어졌고, 주로 의용군이 참가하였다. 이 문에 보급과 급료를 받지 못해 전쟁터 주민의 약탈로 황폐하여 피해가 심하여 인구는 2/3으로 줄었고, 주민의 약탈로 '늑대 전략'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이 전쟁은 유럽의 판도를 바꾸는 세계대전이었다. 독립하게 되었고, 신교파가 우세하여 많은 이익을 얻었다. (7) 베스트팔렌조약(1648) 영토일부와 발트해의 패권을 차지하여 무역에 발판을 마련하였다. 것이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다시 승인되었으며, 폴란드는 발트해 패권을 얻지 못했다. 합스부르크는 네덜란드를 잃고, 독일 내 제후의 영토에 대한 완전주권과 외교권 및 조약체결 권이 인정되어 독일의 기본법이 되었는데 이것은 독일을 작은 나라로 200년 이상 갈라져 통일을 늦게 하였다. 근대에 이르러 영국과 프랑스에 뒤떨어지는 결과를 가져왔고, 대세를 모르는 신성로마제국은 많은 영토를 잃었으며, 사실상 와해되어 명분만 유지하다가 1806년 나폴레옹에 멸망하였다. |
|
(8)근세역사의 중요한 사건(1500-1700) [보기: 1(장)-7(대 단위)-(소 단위)] 1517: 독일의 종교개혁 시작 [종교개혁 참조] 1522: 마젤란 세계일주 성공[필리핀, 신대륙 발견 참조] 1526: 무굴제국 성립[인도 참조] 1541: 스위스 칼빈 종교개혁 시작[종교개혁 참조] 1555: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종교개혁 참조] 1558: 엘리자베스 1세 즉위[영국 참조] 1571: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제국에게 승리[무적함대 참조] 1581: 빌렘 1세(오렌지 공)에 의하여 북부지역만 독립[네덜란드 참조] 1588: 무적함대 격파[엘리자베스참조]와 영국의 국교 믿지 않는 자들 국외 추방 1598: 낭트 칙령발표[ 앙리 4세 참조] 1600: 12월 31일 영국 동인도 회사 설립[엘리자베스 참조] 1602: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설립[네덜란드 역사 참조] 1607: 북미 버지니아에 영국이 식민지 건설[식민지 시대 참조] 1613: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 시작[러시아 참조] 1618: 독일의 30년 전쟁시작[종교개혁 참조] 1620: 미국에 청교도 이주[식민지 시대 참조] 1628: 영국 권리청원[ 차알스 1세 참조] 1642: 청교도 혁명[ 청교도 혁명 참조] 1643: 루이 14세 즉위[루이 14세 참조] 1648: 베스트팔렌조약[종교개혁 참조] 1649-58: 크롬웰의 공화정치시대[크롬웰 참조] 1660: 영국의 왕정복고[차알스 2세 참조] 1661: 청의 강희제 즉위[청나라 참조] 1682: 러시아 표트르 1세 대제 즉위[러시아 참조] 1687: 영국 뉴톤의 만유인력법칙발표[과학의 발전 참조] 1688, 89: 영국의 명예혁명과 권리장전[영국 제임스 2세 참조] |
|
첫댓글 역시 생각보다 방대한 자료가 담겨 있네요
이렇게 역사를 많이 연구하신 분을 믿음의 선배로 두어서 좋네요
이런 것들을 알려고 많이 노력했었는데 님께서 다 정리해 두셨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