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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승 제110호 화양구곡을 찾아서....
-소재지 :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지정번호 : 명승 제110호
-지정일 : 2014년08월28
-답사일 : 1차:2019년03월11, 2차:2019년04월16일
화양구곡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이곳 계곡에 은거하면서 중국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9개의 계곡에 각각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지는데 이후 수제자인 권상하(權尙夏, 1641∼1721) 가 화양구곡이라 명명했다고 전해집니다.
대중교통으로 찾아가는 길
-동서울터미널->괴산행버스(06:50, 07:50, 08:20, 08:50, 09:50---2시간소요)
-괴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약3~4분 거리에 있는 시내버스터미널로 이동
-괴산시내버스터미널에서 09시10분 옥양동행버스 승차 후 송면에서 하차하여 화양계곡으로 이동하며 9곡에서부터1곡까지 답사
-화양리정류장에 도착 후 청천으로 가는 버스는 정류장으로 들어오지 않으므로 32번 도로로 나가 청천가는 버스를 약14시40분 전후로 탈 수 있으며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도 세워줌.) 청천에서 16시버스로 괴산으로 이동한다.
-1곡부터 답사하는 경우 괴산시내터미널에서 09시에 출발하는 청천행버스로 청천을 가서 10시50분 청천에서 삼송리행 버스를 탄 후 화양동에 하차한다.
-9곡까지 답사를 마치고 송면으로 이동하여 옥양동에서 괴산으로 가는 버스를 16시 전 후로 탈수 있다.
자세한 교통편은 괴산시내버스 043-834-3351~4, 청천버스-청천은 별도 관리소가 없고 괴산에서 관리합니다.
구곡에 대해서
우리나라의 전역을 다니다 보면 팔경(八景)이나 구곡(九曲)을 종종 보거나 들을 수 있습니다.
오래전 권세있는 선비들은 말년에 좋은 계곡을 찾아 속세와 인연을 끊고 은둔생활을 하며 팔경이나 구곡이라는 명칭을 붙여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하고는 했습니다.
이러한 팔경이나 구곡은 본래 중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팔경(八景) 문화는 송나라 문인화가였던 송적이라는 사람이 양자강 중류 아름다운 곳 8곳을 그린 ‘소상팔경도’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며 구곡(九曲) 문화는 송나라 때 주희가 이름 붙인 ‘무이구곡’에서 유래된 후 남발되어 우리나라에 만 ‘구곡’의 명칭을 사용하는 곳이 102곳이나 된다고 합니다.
<클릭하면 원본 사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전국 곳곳에 구곡이 널리 퍼져 있지만 구곡만큼은 아마도 괴산지방이 시초이자 우리나라 지자체 중 가장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괴산지방의 구곡은 으뜸으로 치는 화양구곡을 시작으로 쌍곡구곡, 갈은구곡, 선유구곡, 고산구곡, 풍계구곡 그리고 괴산댐으로 물속에 잠긴 연화구곡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나라 구곡을 대표할 수 있는 구곡은 유일하게 명승으로 지정된 화양구곡일 것입니다.
화양구곡이 있는 화양계곡과 화양계곡을 품고 있는 낙영산을 포함한 가령산, 도명산, 조봉산은 일찍이 1975년에 충청북도 도립공원으로 지정하고 관리해 오다가 이후 1984년 국립공원속리산지구로 편입되면서 도립공원에서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는데 5년 전인 2014년 8월 28일에 명승 제11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화양구곡은 화양천을 따라 상류에 제9곡부터 하류로 내려가며 제1곡에 이르기까지 자연경관이 잘 보존된 곳으로 아름다운 경치를 간직하면서 명승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클릭하면 원본 사진으로 볼 수 있습니다.>
화양계곡은 넓고 깨끗한 암반과 맑은 하천, 우뚝하게 솟은 기암절벽과 울창한 수목이 한 폭의 산수화처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화양구곡 중 제1곡은 경천벽(擎天壁), 제2곡은 운영담(雲影潭), 제3곡은 읍궁암(泣弓巖), 제4곡은 금사담(金沙潭), 제5곡은 첨성대(瞻星臺), 제6곡은 능운대(凌雲臺), 제7곡은 와룡암(臥龍巖), 제8곡은 학소대(鶴巢臺), 제9곡은 파곶(巴串)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화양구곡 중 제1곡 경천벽(擎天壁)
화양계곡의 관문이 되는 경천벽은 화양리정류장에서 약3~4분 거리에 있으며 경천벽 전망대와 경천벽 중간에 화양천이 있어 멀리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겨울 화양천이 얼었을 경우 건너가 가까이에서 경천벽이라는 각자를 확인 할 수 있는데 멀리서도 관심을 가지고 보면 각자를 볼 수 있습니다.
<정 중앙에서 본 경천벽의 풍경입니다.>
<상류에서 경천벽을 발견하고 멀리서 본 풍경입니다.>
경천벽이라는 명칭 붙인 이유는 기암이 가파르게 솟아 있어 그 형세가 자연의 신비라고나 할까 산이 길게 뻗히고 높이 솟은 것이 마치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듯하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라고 합니다.
화양구곡을 일삼아 답사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경천벽을 보고, 또 감상할 수 있지만 자동차로 주차장으로 바로 오는 경우 경천벽을 지나서 주차장으로 들어서므로 대부분 보지 못하며 산악회에서 산행과 화양구곡을 병행해서 오는 팀도 화양구곡 주차장이나 자연학습관에서 하차하게 되므로 다중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습니다.
이 바위에는 擎天壁(경천벽)이라는 각자이외에 '華陽洞門(화양동문)'이라는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전망대에서 보면 擎天壁 각자는 확인 할 수 있었는데 華陽洞門 각자는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확인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스터디가 부족해 華陽洞門이라는 각자가 있는 줄 몰랐는데 다른 사람들 블로그에도 사진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화양천 건너가서 확인하고 사진을 찍었더라면.......... 많은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화양구곡 중 제2곡 운영담(雲影潭)
운영담은 경천벽에서 주차장을 지나고, 속리산 국립공원 화양구곡 관리사무소를 지나 화양2교를 건너서 화양천 우측으로 잠시 가면 화양천 건너편에 있는데 경천벽에서 약400m 거리로 15분 정도 걸립니다.
송시열이이곳에 머물 때나 권상하가 2곡으로 정할 당시와 다른 점은 화양2교 위쪽에 콘크리트로 인공 물막이 시설을 설치하여 운영담의 풍경을 더욱 돋보이게 했는데 원형이 손상된 물막이 시설이 올바른 것인지는 각자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운영담 역시 화양천 건너편에 있으므로 멀리서 감상할 수 있는데 아주 많은 암석이 불규칙하고, 일정하지 않게 자연 벽돌을 쌓아 올린 듯, 아슬아슬한 절벽을 이루고 있는 곳에는 나이를 알 수 없는 작지만 노송이 풍경을 한 층 더 돋보이게 만들며 물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 바위에는 雲影潭이라는 글씨가 암각되어 있습니다.
운영담은 주자(朱子)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에 나오는 시구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하늘빛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화양구곡 중 제3곡 읍궁암(泣弓巖)과 만동묘
운영담을 지나 화양천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5분을 지나면 우측에 사당같은 건물이 나옵니다.
이 건물은 만동묘라고 부르는데 친명파였던 송시열이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을 해준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고 합니다.
<만동묘의 풍경, 밖에서 만 보고 지나칩니다.>
송시열은 전라도 정읍에서 숙종의 사약을 받기 직전 수제자 권상하에게 서면으로 유지를 내려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사당을 짓고 제사를 모실 것을 당부했고 이에 권상하는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1703년 민정중 등 노론계 인물의 협력을 얻어 사당을 짓고 이름을 만동묘라고 했으니 이는 가평군에 있는 조종암(朝宗巖)에 새겨진 선조 어필인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취한 것이라고 합니다.
명나라 신종은 임진왜란 때 20여만명의 대군을 파견한 왕으로 만동묘에 위패가 모셔지는 것은 당연한데 의종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로 임진왜란과는 무관한 황제입니다.
만동묘 맞은편 화양천에 읍궁암 안내판이 있고 안내판 앞에는 석비 4개가 있는데 읍궁암에 세웠던 석비가 장마에 훼손되어 쓸려 내려가자 다시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읍궁암 너럭바위에는 석비를 세웠던 흔적이 있으며 너럭바위 곳곳에 포트홀도 있습니다.
읍궁암비는 충청도 관찰사 윤헌주가 1717년 처음 세웠으며, 비문은 수암 권상하가 썼다고 알려지는데 비문은 읍궁암의 역사와 사연을 적고 그 끝에 우암의 오언절구를 새겼으니 이러합니다.
此日知何日---이 날이 무슨 날인지 아는가,
孤衷上帝臨---외로운 충정만 하늘에 닿았도다.
侵晨痛哭後---새벽이 되도록 통곡한 연후에,
抱膝更長吟---또 다시 엎드려 무릎 꿇고 탄식하노라.
(이 한시는 중부매일신문 이지효님의 글에서 모셔왔습니다.)
<읍궁암에는 아무런 각자가 없습니다.>
안내판 뒤편 화양천 변에 장방형의 너럭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읍궁암으로 송시열이 제자였던 임금 효종이 죽자 매일 새벽마다 이 바위에 올라 활처럼 엎드려 통곡하였다 하여 후일 사람들이 읍궁암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후일에 사람들이 읍궁암이라고 불렀다면 송시열은 이 바위를 무슨 이름으로 제3곡으로 정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분명 이름이 있었을 것인데 유일하게 읍궁암에는 각자가 없는데 혹자는 읍궁암 어딘가에 있던 각자가 장마로 인해 훼손되어 쓸려갔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기도 합니다.
처음부터 제3곡으로 정했다면 읍궁암이라는 명칭은 후일에 사람들이 붙인 것이라기보다 송시열이 붙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후일에 사람들이 읍궁암이라고 붙인 것이 맞는다면 송시열이 이 바위를 부르던 처음의 명칭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필자의 생각은 전자입니다.
화양구곡 중 제4곡 금사담(金沙潭)
읍궁암 동남쪽으로 곡선으로 이어지는 화양천을 따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화양천 건너편에 금사담이 있습니다.
거리는 멀지 않지만 화양천에 물이 많아 건너기가 쉽지 않으며 화양3교를 돌아 각자바위나 암서재를 간다면 10분 이상 돌아서 가야합니다.
송시열이 제4곡의 금사담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은 맑은 물속에 보이는 모래가 금싸라기 같다고 해서 붙였다고 하며 금사담 뒤로 대형 절벽을 이룬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 金沙潭이라는 글씨가 암각되어 있습니다.
답사해 본 사람들은 느꼈을 것으로 금사담도 좋지만 금사담 뒤 각자바위와 각자바위 위에 있는 암서재 그리고 금사담이 함께 이루는 풍경이 으뜸입니다.
금사담 각자바위에 지은 암서재(巖棲齋)는 1666년 송시열이 정계에서 은퇴한 후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들을 양성했다고 하는데 이는 주자께서 무이구곡 제5곡에 무이정사를 짓고 후학에 힘쓴 것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암서재의 기록은 암서재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암서재기는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가 썼다고 합니다.
또한 1994년 1월 7일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75호로 지정되었다가 1999년 12월 29일 지정 해제되었다고 하는데 대지 약 20평 정도에 2칸의 방과 1칸의 마루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측 방 쪽마루 위에 巖棲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방 안에도 현판 5점이 걸려 있다고 하는데 확인할 수 없었으며 낮은 담장을 둘러친 우측 일각문이 있는데 굳게 잠겨 있으며 우측 담장 밖 CC-TV가 있는데 세워져 있으며 관리가 부실하여 암서재 내부는 낙엽이 수북했고 쓰러진 고목이 담장을 부수며 넘어진 상태로 엉망이었는데 괴산문화원이아 문화재청의 돌봄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암서재 주변으로는 아애명과 마애각이 있는데 마애명은 이곳과 제9곡 파곶에몰려있습니다.
파곶에는 무명인들의 마애명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암서재 우편 직립바위에는 忠孝節義(충효절의)라는 각자가 있는데 명나라 태조의 글씨라고 하며 충의절의 좌편으로 세로2줄로 ‘蒼梧雲斷 武夷山空(창오운단 무이산공)이라는 각자가 있는데 이는 송시열의 글씨로 창오산은 예로부터 중국에서 임금을 상징하는 산이며, 무이산은 주자가 살던 산으로 「창오산에 구름 끊어지고 무이산도 텅 비었다.」는 뜻으로 세월무상을 노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암서재 부근의 각자바위입니다.>
<충효절의 앞에 있는 각자바위로 관리가
엉망입니다, 각자를 지운다고 한 행위가 더 흉하게 보입니다.>
<암서재 아래 각자바위로 훼손이 적은 편입니다.>
화양구곡 중 제5곡 첨성대(瞻星臺)
첨성대는 화양2교를 건너기전 화양천 우측 에 있는 바위로 층층 쌀인 바위위에 또 다른 바위가 얹혀 있는 형상으로 별자리를 관측하던 곳이라고 해서 첨성대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도명산에서 내려서며 옆으로 지날 때만 해도 이 바위가 첨성대인지 확실하게 알지 못해 옆으로 지나면서도 가깝게 접근하여 각자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구곡을 답사할 때 첨성대의 전망대는 화양2교를 지나 가깝게 있는데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도명산 기슭에 층암이 얽혀 대를 이루었으니 제5곡이다. 경치도 좋을 뿐더러 우뚝 치솟은 높이가 수십 미터이고 그 아래 "비례부동"이란 의종의 어필이 새겨져 있으니 이름하여 첨성대라 했다. 또한 평평한 큰 바위가 첩첩이 겹치어 있고 그 위에서 성진을 관측할 수 있다하여 첨성대라 한다.」
첨성대 바위벽에는 첨성대라는 각자가 아닌 非禮不動(비례부동)이라는 각자와 萬折必東(만절필동)이라는 각자, 그리고 大明天地 崇禎日月(대명천지 숭정일월)이라는 각자가 있습니다.
<1번 비례부동으로 명나라 숭정황제의 어필 각자입니다.>
<2번 대명천지 숭정일월로 송시열의 글씨 각자입니다.>
非禮不動(비례부동)은 민정중이 사신으로 북경에 갔을 때 구해 온 숭정황제의 어필로 송시열이 받아 3년을 보관했다가 1674년3월 바위에 새긴 것이라고 하는데 非禮不動(비례부동)이란 예가 아니면 따르지 말라는 뜻입니다.
또, 이곳 첨성대 바위에는 萬折必東, 華陽書院(만절필동, 화양서원)이라는 각자도 있는데 萬折必東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 소경대왕의 어필로 가평에 있는 조종암에서 복사해온 글씨를 새긴 것이라고 하며 華陽書院(화양서원)은 숙종 원효대왕의 어필이라고 합니다.
<만절필동은 선조의 어필 각자입니다.>
萬折必東(만절필동)은 강물이 도중에 만 번을 구비치며 돌더라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으로 선조는 곡절은 있을 수 있지만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충(忠)은 변함이 없다는 의미로 쓴 글로 야만 오랑캐인 청을 배척한 송시열의 결의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大明天地 崇禎日月(대명천지 숭정일월)은 조선의 하늘과 땅은 명나라 것이고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으로 의종은 하늘의 해와 달 같이 존귀한 존재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화양구곡 중 제6곡 능운대(凌雲臺)
능운대는 첨성대 전망대에서 불과 100여m 떨어진 곳, 채운암 입구에 있는 바윗덩어리로 시냇가에 우뚝 솟아 그 높이가 구름을 찌를 듯하여 능운대라 고 명칭을 붙인 곳입니다.
2016년에 발행한 「산서26호」에 의하면 凌雲臺(능운대)라는 이름은 삼국지에 나오는 위나라 문제 조비가 낙양에 지은 누대의 이름이라고 하며 마치 바위의 형상이 사람의 모습과 원숭이와 흡사하다고 했고 또 다른 블로거는 멧돼지 형상 같다고 기록하기도 합니다.
필지가 보기에는 멧돼지 형상 보다는 큰바위 얼굴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능운대는 관람로 옆에 있어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데 안내판에는 凌雲臺라는 각자가 있는 사진을 실었지만 어느 방향 어디쯤에 있는 적시나 표시를 하지 않아 볼 수가 없었으며 관리부실로 능운대 앞 가시덤불을 깎아 내지 않아 접근하여 각자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정리를 하며 알았는데 능운대 위 정수리에
각자가 있다고 합니다. 이 사진은 충청북도 공식블로거 신나라님에게서 모셔왔습니다.>
화양구곡 중 제7곡 와룡암(臥龍巖)
와룡암은 능운대에서 동쪽으로 약650m 지나면 관람로 옆에 있는데 장마가 졌을 때는 접근이 불가능 할 수도 있겠으나 그러지 않은 상태에서는 손쉽게 와룡암으로 갈 수 있는데 도로를 내며 일부가 묻힌 상태라고 합니다.
와룡암은 화양천과 평행을 이루며 길게 뻗혀 있으며 바위 곳곳이 계곡물살에 패인 곳과 골진 곳이 많이 있어 생감이 마치 용이 꿈틀 거리는 듯한 형상으로 생겼다고 해서 누워있는 용의 형상을 한 바위, 바로 와룡암이라는 명칭이 붙었습니다.
와룡암 중앙에 송시열의 臥龍巖(와룡암)이라는 글씨가 암각되어 있습니다.
와룡암 주위는 거대하고 요상한 바위들이 즐비하며 상류방향이나 하류방향으로 확 트여 시원스러우며 상류방향으로는 멀지 않은 곳에 학소대가 있으며 학소대 뒤로는 가령산의 암봉 자락이 운치를 더해주며 학소대 앞쪽으로는 화양천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보이는데 이 다리는 도명산 학소대 들머리가 되는 곳입니다.
권진응은 와룡암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고 합니다.
<와룡암의 풍경은 사진보다 실제 풍경이 더 보기가 좋습니다.>
六曲奇岩枕綠灣---육곡 기이한 암석이 푸른 물굽이 베고 누워
重重雲樹隔塵關---겹겹이 구름 드리운 나무들 속세와 격리되었네.
天時群陰剝---날씨는 쨍쨍 짙은 녹음은 늘어졌는데
潭底潛龍臥自閒---물웅덩이 잠룡이 절로 한가로이 누워 있네.
(이 한시는 중부매일신문 이지효님의 글에서 모셔왔습니다.)
화양구곡 중 제8곡 학소대(鶴巢臺)
학소대는 와룡암 동쪽으로 약330m 지나면 도명산 들머리가 되는 다리 상류쪽으로 70~80m 쪽에 위치합니다.
화양천변 가령산 자락의 우람하면서도 절묘한 바위로 이루어진 학소대는 층층이 쌓아 올린 듯한 암벽에 중간 중간 소나무 분재가 있으며 위에도 소나무가 듬성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큰 바위가 하나로 이루어져 있지만 전면에서 보면 3~4개의 바위로 보이기도하는 학소대는 오랜 세월이 지나며 일부 바위들이 떨어져 나가 검푸른 바위에 연한주황색 색깔을 디는 곳도 나타납니다.
학소대 앞으로는 그리 깊지는 않지만 넓은 소(沼)가 있는데 학소대라는 명칭은 옛날에 백학이 이곳에 집을 짓고 새끼를 쳤다 하여 이름을 학소대라 하였다고 하는데 필자가 알기로는 백학은 나무위에 집을 짓고 새끼를 기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학도 독수리나 올빼미와 같이 바위위에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르나 봅니다.
학소대는 화양천 건너편에 있으므로 접근이 용이하지 않으나 겨울철 물이 언 뒤에는 손쉽게 접근 할 수 있으며 학소대 암벽 상류방향으로 송시열의 鶴巢臺라는 글짜가 암각되어 있습니다.
학소대는 경치가 뛰어나며 상류쪽이나, 전면, 하류쪽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아름다운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명산을 오르며 다리위에서 학소대의 풍경을 감상합니다.
화양구곡 중 제9곡 파곶(巴串)
화양구곡 중 마지막이 되는 곳이 파곶 또는 파천으로 부릅니다.
파천과 파곶 중 어느 명칭이 맞는지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巴串이라는 한자의 뒷글자가 곶곶, 뀌미관, 꼬챙이천으로 쓰이기 때문인데 권상하가 화양구곡을 정하며 우리말로도 기록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우리말로 기록된 문헌을 보면 어떤 음으로 발음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파천을 한문으로 기록하며 巴串으로 기록해야 하는데 巴川으로 기록하는 글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 잘 못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파천이란 움퍽 패인 곳이라는 의미로 해석이 되는데 巴川은 개천의 이름으로 받아들어서입니다.
파천은 송면3거리에서 3.08km, 괴산자연학습원에서 1.3km, 학소대에서 1.5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합니다.
송시열이 구곡중 제일 사랑했다고 전해지는 파곶은 아름다운 곳으로 화양천 파곶 일대가 화강암을 덮여 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며 개천 물에 휩싸여 곳곳에 원시의 공룡 발자국 같은 모양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생겼으며 백옥같은 암반과 암반위로 흐르는 물이 구슬이 굴러가는 듯 한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기록한 것과 같이 차량을 세우고 1.3km를 걸어야 하는 불편을 겪어야 하며 관람로에서 화양천까지 200여m 내려가야 하므로 산을 찾는 사람들이 관람로로 지나기는 하지만 문화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그냥 지나치게 됩니다.
관람로에서 화양천으로 내려서면 상류 냇가로 내려서기전 우측으로 집채만한 바위가 있는데 바위에는 마애명과 마애각이 새겨져 있으며 주변 바위들도 마애명이 아주 많습니다.
때로는 마애명을 시멘트로 지우기도 했는데 어차피 새긴 마애명이나 마애각이라면 그대로 방치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주변 마애명을 보고 냇가로 발을 들이면 넓적하고 비스듬한 바위에 예서체로 된 송시열의 巴串이라는 글짜가 암각되어 있습니다.
巴串 암각바위 너머로는 마치 메기주둥이처럼 등근 바위가 있는데 바위위에 정자를 지었던 흔적같은 4개의 사각 홈통이 있는 것으로 보아 송시열이나 그 후예들이 이곳에 정자를 짓고 시를 읊지는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巴串 암각바위가 있는 주변으로도 바닥의 바위들이 아름답지만 巴串 암각바위에서 하류쪽으로 50여m 내려가면 넓은 면적의 백옥같은 암반이 펼쳐지는데 이곳에 공룡발자국과 같은 흔적이 수없이 많은데 오랜 세월 물길이 지나며 매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중앙으로 가면 작은 와폭이 있는데 물이 흐르는 반석도 곳곳이 패인 아주 예술의 극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필자는 송시열이 제일 사랑했다는 파곶에서 30여분을 머물렀습니다.
파곶을 떠날 즈음 인천에서 왔다는 한 분을 만나 잠시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2016년에 발행한 「산서26호」에 나오는 글을 올려봅니다.
파곶(巴串)의 巴는 옥편에는 땅이름 파로 나오는데 큰뱀을 뜻한다고 한다고 합니다.
손자병법 구지(九地) 편에 나오는 솔연이라는 큰뱀은 중국 오악(五岳) 중의 하나인 상산에 사는 전설 속의 큰 뱀으로 행동이 민첩하며, 성질 또한 몹시 사납고 용맹한데 상대가 자신의 머리를 공격하면 재빨리 꼬리를 들어 반격하고, 꼬리를 공격하면 머리를 틀어 반격하며, 몸뚱이를 치면 머리와 꼬리로 동시에 반격한다고 합니다.
첫댓글 회장님의 상세한 설명이 곁들여진 화양구곡 풍경, 즐감하였습니다.
한참 전에 화양구곡을 찾았던 기억이 있는데 언제인지 생각조차 나질 않습니다.
초여름을 방불케 하는 날씨가 찾아왔는데 다음 가시는 산행길,
무탈하고 안산하시길 기원합니다.
명승이라서 가야했었는데 미루다 이제서 갔습니다.
구곡을 다보면 산행이 부족하고, 산행을 제대로 하려니 구곡을 볼 시간이 없고 해서 미루었습니다.
생각하다가 X자 형태로 2번에 산행과 구곡을 답사하기로 하고 실행한 결과입니다.
일반인 들이야 구곡에 대해 큰 관심 없음이 당연시 되지만
지 블로그에' 명승을 소개합니다' 코너가 있으니 자세하게 쓴다고 하긴 했는데.......
별일 없지요?
일욜에 보겠습니다.
에고 설악산은 어떡하고 속리산을 찾으셨나요
누가 뭐라고 하던가요^^
설악산은 산방기간이라 갈 때가 응봉 한 곳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 가다 만 괴산지방 마무리 짓느라고요.
이제 5월중순이 되면 설악도 찾아야 하는데 점점 자신이 없어집니다.
이게 병인가요.........
@범솥말 별소릴 다하십니다 괴산지방도 산방기간 아닌가요
하긴 요즘 갈만한 곳 별로 없지요 단속권한도 없는 사람들한테 쫒겨다니고^^
나도 자신이 없어지고 귀찮을 때가 있습니다
한번 시작한 일인데 용기를 내십시요 끝없이 자신을 격려하십시요 다 가게 됩니다
그리고 정하신 목표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일욜 뭔일 있어요?
@신경수 일욜은 대구팀들과 합동산행이 있는 날입니다.
선배님께서도 바람 쐴겸 함께가면 좋을텐데요?
의령인가 있는 한우산인데 산행거리도 약8km라고 하는데.....
전국이 다 산방기간인데 설악산은 감시도 심하고, 백담사 버스를 이용해야하니까요.
@범솥말 그렇군요 이궁 저는 오늘밤 심야버스로 광주갑니다
화순에 있는 발랑까진 용한마리 잡으려구요
안산 즐산하시고 올라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