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 빛낸 인물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시조(始祖) 장사의 현손(玄孫) 장하(張夏)가 고려 공민왕조(恭愍王朝)에 홍건적 (紅巾賊)의 난을 토평하여 2등공신(二等功臣)에 책록(策錄)되고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은청광록대부 (銀靑光祿大夫)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라 결성군(結城君)에 봉(封)해졌으며, 1388년 (우왕 14)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있을 때 고려왕조(高麗王朝)의 국운(國運)이 다함을 느껴 치 사(致仕)하고 결성(結城)에 내려와 은둔(隱遁)하였으며 조선이 개국되자 몇 차례의 부름이 있었으나 불 취하였다. 한편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장언호(張彦浩)와 부호군(副護軍) 장서익 (張瑞翼),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장후중(張後中) 등이 유명했고, 장혼(張混)은 학자(學者)로 효성(孝誠)이 극진하여 고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또한 시문(時文)과 글씨에도 뛰어나 정조조(正 祖朝)에 감인소사준(監印所司準)으로 서적 편찬에 전력하여 「몽유편(蒙喩篇)」•「시종당률(詩宗唐 律)」등을 저술하였다. 근대에 와서는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이며 정치가(政治家)인 장덕준(張德俊)와 장덕진(張德震)이 임 시정부(臨時政府) 수립에서 광복(光復)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업적을 남겨 결성장씨의 가문을 더욱 빛 나게 하였다.
> 장하(張夏) 생몰년 미상. 고려 말기의 관인. 본관은 결성(結城). 용문(用文)의 아들이다.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1363년(공민왕 12년) 전의주부(典儀注簿)로서 2등 공신 에 올랐다. 1372년 신돈(辛旽)이 제거된 뒤 이보림(李寶林) 등과 함께 간관으로 있으면서 신돈의 일당인 김문현(金 文鉉)을 탄핵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378년(우왕 4년) 밀직부사 (密直副使)에 올랐으며, 1381년 가뭄이 무척 심하자 밀직제학 (密直提學)으 로서 개경 대정(大井)에 비를 빌었더니 비가 내려 포상을 받았다. 다음해 각 도의 산성순심사(山城巡審 使)에 임명되었다. 1383년 한양부윤 (漢陽府尹)으로 있으면서 의성 (義城)에서 왜구를 쳐부수기도 하였고, 몰래 숨어들어 온 왜구의 간첩 3명을 체포하는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 뒤 평양부윤이 되었다. 1388년(창왕 즉위년) 제도(諸道)의 안렴사(安廉使)를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개편하였는데, 이 때 경상도도관찰출척사(慶尙道都觀察黜陟使)가 되었다. 다음해인 1389년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올랐으나, 1390년(공양왕 2) 명나라에 몰래 숨어들어가서 이성 계(李成桂)일파를 모함하였다는 윤이(尹彛) • 이초(李初)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고 먼 곳으 로 유배를 당하였다가 얼마 뒤에 풀려 나왔다. 조선개국 후에는 결성군(結城君)에 봉하여졌다.
> 장혼(張混) 1759(영조 35)∼1828(순조 28). 조선 후기의 학자•시인. 본관은 결성(結城). 자는 원일(元一), 호는 이이엄(而已#엄01) 또는 공공자(空空子). 우벽(友璧)의 아들로 서울에서 대대로 살던 중인출신이다. 그의 증조인 필한(弼漢)은 유명한 위항시인(委巷詩人)으로 《소대풍요 昭代風謠》에 시가 실렸고, 아 버지 우벽은 문음으로 통례원(通禮院) 우통례(右通禮)에 보직되었으나 곧 그만두고 가객으로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아들 창(昶)과 욱(旭), 손자 효무(孝懋)도 시로 이름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상당한 문학세가였음을 알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지극한 효자로 이름이 났다. 그는 특히 시에 천재적인 소질을 보여 그가 시 한 수를 지으 면 서로 읊어 전해지고는 했다고 한다. 1786년(정조 10년) 여름에 천수경(千壽慶) 등과 함께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를 결성하여 그 모임을 이 끌어가는 중추적 구실을 담당하였다. 1790년 정조가 감인소(監印所)를 설치하자 대제학이던 오재순(吳載純)의 추천으로 교서관사준(校書館 司準)이 되어 서적편찬에 종사하였다. 이후 1816년경까지 여기에서 근무하면서 사서삼경을 비롯한 수많은 어정서(御定書)를 교정하였고, 《율곡전서》 등 문집류를 수교(修校), 간행하였다. 인왕산 옥류동(玉流洞)골짜기에 ‘이이엄’이라는 집을 짓고 자기와 같이 중인에 속하는 위항시인들과 더 불어 시주(詩酒)를 즐겼다. 1797년에는 천수경과 더불어 《풍요속선 風謠續選》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이이엄활자라는 목활자를 만들어 사용하였는데 이것으로 그의 수많은 편저들을 인쇄하고, 주변의 위항시인 (委巷詩人) 들의 시문집을 간행하였다. 그의 편저작은 대단히 많은데 《호산외기 壺山外記》에 책명이 소개되어 있다. 자신의 문집 《비단집 # 비63段集》 20권이 있었으나 현재 전하지 않고 중국의 고대로부터 명대(明代)까지의 시가를 수집, 분류 한 《시종 詩宗》•《당률집영 唐律集英》•《이견 利見》•《아희원람 兒戱原覽》•《몽유편 蒙喩篇》• 《근취편 近取篇》•《절용방 切用方》•《동습수방도 童習數方圖》 등이 간행되었다. 《고문가칙 古文 柯則》•《정하지훈 庭下至訓》•《대동고식 大東故寔》•《소단광악 騷壇廣樂》•《초학자휘 初學字 彙》•《동민수지 東民須知》•《문단성보 文壇姓譜》•《제의도식 祭儀圖式》 등이 가장(家藏)되어 있었 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현재 전하는 것으로는 《이이자초 而已自艸》•《동사촬요 東史撮要》가 있 으며 문집 《이이엄집》 14권이 전한다. 장혼의 저술은 상당히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있는데 특히 아동용 교과서가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그 중 《계몽편 啓蒙篇》은 1913년에서 1937년까지 열 차례나 간행되어 아동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는 표현이 새롭고 용어의 구사가 자유롭다는 평을 받았으며, 특히 고체(古體)에 뛰어났다. 대표 저서로 《비단집》《집영리견(集英利見)》《몽유편(蒙喩篇)》 등 이다.
> 장가순(張可順) 1493(성종 24)∼1549(명종 4).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결성(結城). 자는 자순(子順), 호는 사재(思齋). 해서(海西)출생. 참봉 유(裕)의 아들이다. 자질이 뛰어났으며 효성과 우애가 깊었다. 주자의 가르침을 준행 하였고 서경덕 (徐敬德)과 친교를 맺 었다. 명종 때 조정에서 그의 명성을 듣고 건원릉참봉 (健元陵參奉)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여러 경전을 두루 공부하였으며, 또한 저술도 많았으나 병화로 없어지고 사재언행록(思齋言行錄)과 인사심 서목 (人事尋緖目)만이 전하고 있다. 사재언행록 (思齋言行錄)에는 학문하는 방법과 그의 경학관 (經學 觀)이 나타나 있다. 그는 천(天)•인(人)이 하나의 이(理)라는 입장에서 천리(天理)에 따라 인사(人事)가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의 학문은 대체로 의리에 중점을 두고 수양(修養)의 노력을 강조한 것으로, 그 본체론은 인사심서목 (人事尋緖目)에 나타나 있다. 1689년(숙종 15년)숙종이 이 책을 보고 호조정랑에 추증 (追贈)하였다.
> 장유순(張裕淳) 1877(고종 14)∼1952. 일제강점기의 대종교 중진, 독립운동가. 본관은 결성(結城). 자는 호문(浩文), 호는 야은(野隱). 경기도 개성출신.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21세 때부터는 경상도•강원도 등지에서 수리개발사업에 종사하였다. 29세 때인 1905년(고종 42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서울로 올라와 이시영(李始榮) • 이동녕(李東寧) 등 과 함께 6년 동안 광복을 위한 지하운동에 참여하였고, 1911년에는 만주(滿洲)로 건너가 유하현(柳河 縣), 불라디보스토크, 용정촌(龍井村) 등지에서 상업에 종사하면서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모집에 힘썼 다. 1923년 대종교를 신봉하여 1932년 참교(參敎)가 되었고 1949년초에 경의원(經議院) 참의(參議), 같은 해 총본사(總本司) 전리(典理)가 되어 교단의 행정총책임자로서의 중책을 수행하였다. 이듬해인1950년에는 원로원 부원장이 되었으며 대일각(大一閣)전교권한대행을 겸임하는 등 교단발전 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 장도빈(張道斌), 1888∼1963. 언론인•국사학자.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산운(汕耘). 평안남도 중화출신. 봉구(鳳九)의 둘째 아들이다. 가정은 중농(中 農)이었다. 할아버지 제국(濟國)의 훈도로 5세에 사서삼경을 통독하여 신동으로 이름이 났다. 1902년 대한제국의 학부가 관장하던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에 평양감사의 천거로 입학, 1906년 졸업하였다. 한성사범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던 《황성신문 皇城新聞》의 주필 박은식(朴殷植)의 소개 로 1908년 봄 《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에 들어갔다. 21세인 1908년에 논설위원이 되어, 8세 위이며 역시 신동으로 알려진 신채호(申采浩) 및 양기탁(梁起 鐸)과 함께 논진으로 일하였다. 입사 몇 개월 후 신병을 앓던 신채호의 후임으로 논설주필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아, 당시 친일내각 과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와 맞서 투쟁을 벌였다. 이 시절 안창호(安昌浩)의 신민회(新民會) 비밀 회원으로 가담, 국권회복운동의 선봉에 섰다. 1910년 일제강점으로 신문사의 명맥이 끊어질 때까지, 한편으로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다녔 으며(4회 졸업), 국사연구에도 몰두하였다. 1910∼1912년 서울의 오성학교(五星學校)학감으로 울적한 나날을 보내다가, 1913년 노령(露領) 블라디 보스토크로 망명하여 가까운 신한촌(新韓村)에서 다시 신채호를 만나고, 최재형(崔在亨) 홍범도(洪範 圖) 이동휘(李東輝) 이상설(李相卨) 등 독립투사들과 교류하며, 보성전문학교 교수이던 이종호(李鍾浩) 의 《근업신문 勤業新聞》에서 논설을 썼다. 1916∼1918년 병고의 몸으로 귀국, 평안북도 영변의 서운사(棲雲寺)에서 요양한 뒤 처음으로 민족혼을 일깨우는 《국사》를 발간하였고, 이를 계기로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 조만식(曺晩植)교 장의 초청을 받아 약 1년간 교사생활을 하였다. 1919년 《동아일보》의 발간을 출원하여 허가를 받았으나 운영을 양도하고, 이어 한성도서주식회사를 허가 내어 1926년까지 사이에 잡지 《서울》•《학생계》•《조선지광 朝鮮之光》을 발간하였다. 한편으로는 자영출판사 고려관(高麗館)을 설립, 《조선사요령 朝鮮史要領》 • 《조선위인전 朝鮮偉人 傳》 • 《조선역사록 朝鮮歷史錄》 등 숱한 책자를 편찬하였다. 1927∼1945년 고적답사를 통한 역사연구에 전념하였으며, 일제 말에는 총독부의 끈질긴 중추원참의 제 의를 거부하고 심산에 은둔하였다. 1928년 발간한 《조선역사대전 朝鮮歷史大全》은 식민사가들에게 경종을 울렸고, 《대한역사 大韓歷 史》를 통한 기자조선설(箕子朝鮮說)의 반론은 유명하다. 광복 직후 월남하여 9월 19일 서울 종로구 견지동 동덕국민학교 뒷자리의 방 3칸에서 민중일보 (民衆日 報)를 창간, 공산언론과 대항하였다. 같은해 조선신문주간회 (朝鮮新聞主幹會)를 조직하여 대표가 되었 다. 1949년 민중일보가 화재를 만나 재건이 어렵게 되자, 윤보선(尹潽善)에게 판권을 무상으로 양도하였다. 그 동안 언론활동과 병행하여 1947년 한국대학(韓國大學)을 설립하였고, 1948년 단국대학(檀國大學) 을 설립하여 초대학장, 1949년 육군사관학교 국사학교수로 봉직하였다. 노후는 서울시사편찬위원, 고등고시위원을 지냈으며,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 문화훈장을 수상하였 다.
> 장덕준(張德俊) 1891(고종 28)∼1920. 언론인.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추송(秋松). 황해도 재령 출신. 붕도(鵬道)의 아들이며, 동생 덕수(德秀)는 동 아일보사 초대주간이었고, 덕진(德震)은 독립운동중 상해에서 순사(殉死)하였다. 1914년 《평양일일신문 平壤日日新聞》의 한국문판의 주간을 1년여 지낸 뒤, 1917년 일본에 건너가서 동경의 한국인 기독교청년회(YMCA) 부간사가 되어 청년운동과 아울러 사회운동에 정열을 기울였다. 일본어에 능통한 그는 당시 일본의 데모크라시운동의 제창자로 이름난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의 요시노(吉野作造)교수와 교분이 두터워, 민주주의사상과 우리나라의 장래에 관하여 서로 솔직하고 진 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처럼 민주주의 및 민족주의에 대한 이론연구에 힘쓰는 한편, 고학하는 어려운 유학생을 위하여 자진 해서 일하였다. 사색하는 것보다도 행동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성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1919년 3•1독립운동 무렵에 는 신병으로 요양 중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한 곳에 가만히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 홋카이도(北海道)로 뛰어들어가서 한국인 노무자들의 생활실태를 살펴보고 왔으며, 김준연(金俊淵)을 통하여 조국에서 국 문신문의 창간을 서둘렀다. 1920년 4월 마침내 김성수(金性洙)를 주주대표로 한 《동아일보 東亞日報》 창간에 참획하여, 논설위 원이면서 통신부장 겸 조사부장 등을 겸임하였다. 같은 해 8월 특파원으로 베이징(北京)에 파견되어 미 국의원단의 활동을 취재하는 한편, 그들에게 한국의 실정을 알리는 데 노력하였다. 그 해 7월 홍범도(洪範圖)의 독립군이 왕청현 봉오동(汪淸縣鳳梧洞)에서 일본군 1개 대대를 완전 섬멸 하는 커다란 승리를 거두자, 일본군은 이를 복수하기 위한 전제수단으로 지린성[吉林省]에서 한국인 교포와 독립운동가들을 대량학살한 이른바 혼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 나남의 제19사단을 비롯하여 시베리아에 출동 중이던 부대 및 관동군 일부 등을 북간도로 대량 진입시키기 시작하였다. 당시 《동아 일보》는 발행정지를 당하고 있었을 때였으나 자진 종군을 지원, 그 해 10월 15일 서울을 출발, 11월 6 일 간도에 도착, 삼성여관(三成旅館)에 투숙하고 일본 영사관과 이른바 토벌군사령부에 종군할 것을 요 청한 뒤, 일본군의 무고한 한국인대학살을 취재하다가 일본군에 의하여 살해당하였다. 한번 옳다고 생각하면 곧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파의 청년지사로서, 일본식민통치 아래 최초로 순직한 언론인이 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장덕진(張德震) ?∼1924, 독립운동가. 황해남도 재령(載寧) 출신. 1920년 미국국회의원으로 구성된 극동시찰단이 중국 상하이[上海]를 거쳐 한국을 방문할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한국 독립의 정당성과 일본의 야만성 을 호소하고, 굴복하지 않고 독립을 열망하고 있음을 보여주도록 하였다 (평안남도 도청 투탄의거 平安 南道道廳投彈義擧). 임시 정부의 명을 받은 광제청년단(廣濟靑年團) 총영장(總營長) 오동진(吳東振)은 평양을 담당한 안경신(安敬信) 장덕진(張德震) 박태열(朴泰裂) 문일민(文一民) 등 정예대원을 선발, 파 견하였다. 장덕진(張德震)은 박태열(朴泰烈) 등과 황해도 부근의 일제기관을 폭파하고 국내외에 독립을 선언하 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문일민(文一民) 등과 평안남도 도청 제3부 건물 경찰부에 폭탄을 던져 파괴, 일본경찰 2명을 살해하고, 다시 평양부청에 투탄하였으나 불발이었다. 그 뒤 궐석재판에서 무기 징역을 선고 받았다. 1922년 강석훈(姜錫勳) 등 10명의 서명으로 국민대표회주비회(國民代表會籌備會) 를 후원하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민족의 대단결을 촉구하였다. 1923년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 에 설치된 교민단의 의경대원을 지냈으며 이듬해 중국인에게 피살되었다. 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 서되었다. 유고로 《장덕진전》이 있다.
> 장학엽(張學燁) 1903∼1983. 실업가 교육가.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우천(友泉). 1903년 5월 평안남도 용강군 대대면 월곡리에서 아버지 근자(根字)와 어머니 고성덕(高聖德) 사이에서 6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비교적 유복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슬하에 3남2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봉룡(鳳龍), 들째 아들은 진호(震浩), 셋째 아들은 준룡(峻龍)이다. 1923년 진남포 공립상공학교(鎭南浦公立商工學校)상과를 졸업하고, 그 해 4월 황해도 곡산공립보통학 교(谷山公立普通學校)교사로 부임, 조선어를 가르쳤다. 그러나 2년 후 교원생활을 청산하고 스스로 육영에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사업에 투신하였다. 1924년 진천양조상회(眞泉釀造商會)를 설립, 브랜드를 ‘진로(眞露)’로 정하였다. 이것이 오늘의 진로의 효시이다. 1938년 오랜 숙원이던 명덕학원(明德學院)을 개설하였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휴교하고, 광복 후 공산치하에서 지주요 자산가라고 하여 갖은 핍박 속에서도 1946 년 진지소학교(眞池小學校) 진지중고등학교 진지여자고등학교 등 3개교를 개설, 육영사업에 전념하였 다. 6•25동란이 터지자 자유를 찾아 월남하였다. 피난수도 부산에서 동업으로 동화양조를 설립, ‘금련(金 蓮)’이라는 상표로 소주를 생산, 판매하다가 동업을 청산하고, 1952년 구포양조회사를 설립, 소주 ‘낙동 강’을 생산하였다. 1954년 6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동에 공장을 세우고 서광주조주식회사를 설립, 제품명을 진로로 결정, 본격적인 진로시대가 개막되었다. 꾸준한 기술개발로 소주업계의 선두주자로 올라섰고, 이를 기 반으로 사업을 식품공업•수출산업으로 확장하여나갔다. 1961년 의류수출업체인 서광산업을 설립하고, 1966년에는 효성유리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사업영역 을 확대하는 한편, 1972년 부산에 도원관광주식회사(道苑觀光株式會社)를 설립하였고, 용두산공원에 부산타워를 건립, 부산직할시에 기증하는 한편, 태종대에 공원을 개발하였다.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필생의 숙원이던 육영사업에의 꿈을 펴고자 학교법인 우천학원(友泉學園)을 설 립, 서울특별시 구로구 궁동에 1974년 1월 우신중고등학교(宇信中高等學校)를 설립하였다. 기업가이 자 교육사업가로 재계 및 교육계에 크게 공헌하였다.
> 장욱진(張旭鎭) 1917∼1990. 서양화가. 본관은 결성(結城). 충청남도 연기출생. 서울의 양정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9년 일본 동경의 데이코쿠미술학교 (帝國美術學校)에 입학, 유화 를 전공하고 1944년에 졸업하였다. 그 직후의 작품으로 현존하는 〈마을〉과 〈독〉(1949)은 한국인의 삶의 본색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정서를 농촌의 여인상과 쌀독 같은 대상을 특이하게 단순화시켜 주제 로 삼은 내용이다. 일직부터의 그러한 특징은 그 뒤로 더욱 독특하게 발전하여, 동심적 상상력과 순수한 표현감정이 내재 된 시골생활과 그 자연환경을 주제로 하는 일관된 작업으로 추구되었다. 작품들은 거의가 작은 화면에 지극히 밀도 있는 선묘(線描) 윤곽과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독특한 색채표 현의 이야기 그림으로 형상화되었다. 마치 아동화 같고 동화책의 그림 같기도 하면서 표현의 세련성과 조형적 구성의 치밀성으로 독특한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구체적인 주제요소로는 시골 환경의 초가집•기와집•남녀노소•강아지•소•새•산•나무•해와 달 등이 있고, 이러한 주제들을 임의롭게 또는 동심적이면서도 해학적으로 그려 장욱진 예술의 전형을 성립시켰다. 한편, 그러한 시골의 삶의 이야기와 동심적인 자연애의 그림 외에 붉은 벽돌구조의 양옥과 도시 일각, 그리고 자동차 또는 자전거가 나타나 있는 화면도 그렸다. 작가의 어릴 적 체험과 어떤 추억이 주제된 듯한 작례(作例)로는 〈자동차 있는 풍경〉(1953)•〈자전 거 있는 풍경〉(1955) 등이 있다. 다른 시골 풍정의 작품에는 〈모기장〉(1956)•〈까치〉(1958)•〈나무 가 있는 풍경〉(1965)•〈하얀 집〉(1969)•〈두 아이〉(1973) 등의 명제가 붙여졌다. 1947∼1952년 김환기(金煥基)•유영국(劉永國)•이규상(李揆祥) 등과 비사실주의 지향의 현대적 창작이 념으로 신사실파(新寫實派)동인전 활동을 하였고,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 및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개성이 강하여 기인적인 면모와 일화도 많이 남긴 예술가로서, 1960년대 이후에는 서울 근교의 시골로 거처를 옮기며 제작생활을 계속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공기놀이(1938)》 《자동차 있는 풍경(195 3)》 《까치(1958)》 《두 아이(1973)》 《가로수(1978)》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면서 신문•잡지의 청탁으로 예술적 사색과 자연찬미의 짧은 글도 많이 썼으며, 1976년 그것들을 묶 은 수상집 《강가의 아틀리에》가 출판되었다. 1986년 중앙일보사 제정 중앙예술대상을 수상하였다.
첫댓글 장욱진 화백님은 내판 출생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