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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숙공 휘 관 사적비문 (文肅公 諱 瓘 事蹟碑文) |
推忠佐理平戎拓地 鎭國功臣 守太保門下侍中 文肅公 尹瓘大元帥 事蹟碑 (추충좌리평융척지 진국공신 수태보문하시중 문숙공 윤관대원수 사적비)
오랜 옛날부터 우리 한겨레는 단군조선(檀君朝鮮) 개국이래(開國以來) 한반도(韓半島)와 만주(滿洲) 전 지역을 강역(疆域)으로 하여 살아왔다 동명성제(東明聖帝)는 고구려(高句麗)를 졸본 부여(扶餘) 환인(桓仁)지방에 건국하였고 그의 아들 유리황제는 서울을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겨 만주일대는 고구려의 영토(領土)이었다 그러나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하매 불모(不毛)의 땅이 되어 거란(契丹)과 여진(女眞)이 임의로 넘나드는 지역이 되어버렸다 고려시대에 드니 거란과 여진은 끊임없이 고려(高麗)의 변경을 침구(侵寇)하여 살인과 납치 약탈과 방화 등 온갖 만행을 자행하는 것 이었다 그래서 예종이년(睿宗二年) 서기 1107년에 다물북진사상(多勿北進思想)의 거성(巨星)인 수사도중서시랑평장사(守司徒中書侍郞平章事) 윤관(尹瓘)이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로 제배(除拜)하여 三十萬 大軍을 거느리고 기치(旗幟)도 장엄하게 진군하여 변방을 항상 소란케 하던 여진(女眞)족속을 정벌 소탕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공험진(公嶮鎭)과 선춘령(先春嶺)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고 간도리(幹都里) 여진족이 살았던 두만강 유역에도 정계비(定界碑)를 세워 나라의 위세(威勢)를 온 누리에 크게 떨쳤으며 속전속결로 아홉 진성(鎭城)을 축조(築造)하였으니 함주(咸州) 영주(英州) 복주(福州) 웅주(雄州) 길주(吉州) 공험진(公嶮鎭) 의주(宜州) 통태진(通泰鎭) 평융진(平戎鎭) 등이며 특히 공험진(公嶮鎭)은 두만강 북쪽 七百里 소하강변(蘇下江邊)에 있고 선춘령비(先春嶺碑)는 수분하상류(綏芬河上流) 노송령(老松嶺) 일대에 있었던 것이다 경원(慶源)에다 내방어소(內防禦所)를 설치하고 목단강(牧丹江) 중상류(中上流)의 공험진(公嶮鎭)에다 외방어소(外防禦所)를 구축하니 그때 송화강(松花江) 상류지역(上流地域)인 간도(間島)지방은 윤관대원수(尹瓘大元帥)의 완전한 점령하에 다스려졌던 것이다 그에따라 공험진(公嶮鎭)영역을 비롯하여 동북면(東北面) 일대를 확고하게 우리의 국토(國土)로 확보하기 위해 남방(南方)의 四十萬 백성들을 一千八百里에 걸쳐 사민(徙民)하여 정착시켰으니 一次로 六千四百六十六丁戶를 二次로 六萬九千戶를 대이동(大移動)케 한 것이다 가장 북쪽에 있는 공험진의 영역은 북으로 수분하(綏芬河) 일대에 이르고 南으로 두만강 內外까지며 東으로 연해주(沿海州)에 이르고 西로 목단강(牧丹江) 유역에 걸치어 골간兀적합(骨看兀狄哈)까지 확장하니 公에게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지군국중사(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知軍國重事)를 제수(除授)하고 재차 출정후(出征後)에는 영평현개국백(鈴平縣開國伯)을 심봉(尋封)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千年史를 恨되게 한 일이 벌어졌다 예종(睿宗)四年에 함주(咸州) 영주(英州) 복주(福州) 웅주(雄州) 길주(吉州) 통태진(通泰鎭) 숭령진(崇寧鎭) 진양진(眞陽鎭) 선화진(宣化鎭) 등 아홉 진성(鎭城)을 자자손손(子子孫孫) 조공(朝貢)을 바치며 고려(高麗)를 부모(父母)의 나라로 받들겠다는 여진(女眞)의 거짓 조건에 넘어가 되돌려 주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여진의 농경민(農耕民)에게 돌려준 아홉 진성지역은 다시 종래의 기미주(羈縻州) 상태로 되돌아가서 고려에 복속(服屬)한다는 조건이 전제된 것이매 척지(拓地)의 후과(後光)은 단절되지 아니하였다 공험진(公嶮鎭)은 그대로 지켜져 내려오다가 오랫동안 방치되었으나 한겨레는 끊임없이 목숨걸고 두만강을 건너가 간도(間島)지방을 옥토(沃土)로 일구어내는 정착지역이 되어왔던 것이다 그러기에 조선조(朝鮮朝) 숙종(肅宗)은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다시 세워 옛 공험진지역인 간도지방(間島地方)이 우리의 영토(領土)임을 증거하여 국토개척(國土開拓)의 목표지(目標地)가 되게 한 것이다 문숙공(文肅公)은 시조(始祖)인 좌고려태조통합삼한공신삼중대광태사(左高麗太祖統合三韓功臣三重大匡太師) 諱 신달(莘達)의 현손(玄孫)으로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위인(偉人)인지라 경서(經書)를 탐독하는 문사(文士)이며 탁월한 외교가(外交家)이며 홍익(弘益)의 현상(賢相)이기도 하다 일곱 살때의 七言詩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맹아(萌芽)를 보였고 요(遼)에 숙종즉위(肅宗卽位)의 表를 傳하였고 고려숙종(高麗肅宗)二年에 公이 전폐(錢幣)의 통용(通用)을 강력(强力)히 주청하여 주전도감(鑄錢都監)이 설치(設置)되었고 외교정사(外交正使)로 송(宋)에 가서는 정이천(程伊川)등과 더불어 詩를 창화(唱和)하였으니 응제시(應制詩)는 널리 회적(膾炙)되는 명시(名詩)가 되었고 숙종(肅宗)六年에 서기1101에 公은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에 나가 삼각산(三角山) 南쪽 지금의 청와대(靑瓦臺)터에 남경(南京)궁궐을 건설하였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公의 위업을 추모해서 김종서장군(金宗瑞將軍)은 경성(鏡城)에 노당(蘆堂)을 세워 公의 위패(位牌)를 봉안하였는바 훗날 정북사(靖北祠)로 개액(改額)된 것이고 경성(鏡城)의 원수대(元帥臺)에는 公의 개선비(凱旋碑)가 있고 단천(端川)에 장사대(壯士臺) 북청(北靑)에 시중대(侍中臺)가 모두 公의 유적지(遺蹟地)이고 북청(北靑)의 만뢰사(萬賴祠)와 평북가산(平北嘉山)의 조양사(朝陽祠)와 청원(淸原)의 호남사(湖南祠)는 公의 영정(影幀)을 모신 사당(祠堂)이고 파주(坡州)엔 公의 별서유지상서대(別墅遺址尙書臺)가 있고 예천(醴川)에 화남사(花南祠) 함평(咸平)에 수벽사(修闢祠) 광주(光州)에 단강사(端岡祠) 등은 모두 公의 위대(偉大)한 업적을 추모해서 사림(士林)들이 봉축(奉祝)하여 왔던 곳이다 이러매 公의 위대한 사적을 영구히 기리며 보존하기 爲하여 公의 묘역(墓域)에 비(碑)를 세워 公의 웅대(雄大)한 계획이었던 고려대제국(高麗大帝國) 건설(建設)이 고구려와 발해의 옛 강토에서 펼쳐졌기에 간도(間島)의 역사는 끊이지 않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연변 조선족은 공험진 영역을 지키었음을 증거하여 위대할손 우리의 원수(元帥)여 대원수(大元帥)여 찬양과 더불어 삼가 온 누리에 문숙공(文肅公)의 한겨레 얼을 드높이 드러내 밝히노라
文肅公誕降 九五三年 檀紀四三二五年 西紀一九九二年 壬申 (문숙공탄강 구오삼년 단기사삼이오년 서기일구구이년 임신) 文肅公 尹瓘大元帥記念事業會 會長 申鉉碻 (문숙공 윤관대원수기념사업회 회장 신현확) 坡平尹氏 大宗會 主管 會長 尹誠敏 (파평윤씨 대종회 주관 회장 윤성민) 國史編輯委員會 調査委員 大宗報主幹 尹富鉉 謹撰 (국사편집위원회 조사위원 대종보주간 윤부현 근찬) 書藝家 慶州后人 崔承洛 謹書前面 (서예가 경주후인 최승락 근서전면) 大宗會 副會長 麗忠嗣 都有司 尹璇基 謹書後面 (대종회 부회장 여충사 도유사 윤선기 근서후면) 大宗會 副會長 尹鎬錫 謹竪 (대종회 부회장 윤호석 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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