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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절 선도회禪道會 조직
네 번째 결혼
첫 제자 이창훈과 선도회 발족
선도회의 유랑 생활
무문관無門關 투과 제자 배출
법시사
법시사 이사장 정종원
좌선 도량 건립의 꿈
일한친화회日韓親和會
다까스기 거사와의 만남
기금 모금 실패
월간 ‘법시法施’ 발간.
최초의 한국 선 전문지 월간 ‘선문화’ 발행
선문화 17호를 끝으로 폐간
다까스기씨 내한과 일본 방문
다시 일본 방문 추진
다까스기 총재의 임기 만료
정규헌씨를 통한 선원 건립 재추진
법시 출간에 몰두
마지막 선원 건립 계획 무산
자택에서 참선 지도
거사居士[대자大姉]의 네 가지 자격 조건
입참자入參者들
현재 한국의 선 현실
저술
선은 훗날 역수입될 것이다
제4절 선도회禪道會 조직
네 번째 결혼
그 동안 나는 독신獨身으로 지냈다. 해방 직후 입산入山 해야 할 것을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에 승적僧籍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한국의 승적에 입적하기 곤란했었고 서울에 도량을 마련하여 참선 지도를 해보겠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일본 임제종 ‘한국 개교사’여서 참선을 지도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고 허송세월만 했다. 교육계에 10여 년 있었고 ‘교양문고’를 간행한다고 했으나 이들은 나의 본의가 아니었다. 역시 좌선 지도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용이한 일이 아니다.
선은 들기 어려운 점이 있고 지식층이나 부유층富裕層은 선禪을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학생 몇 사람으로 도량을 건립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기회를 보는 동안 백성욱 박사님의 소개로 김순가 씨와 다시 네 번째 결혼했다.(이 부인의 적극적인 후원이 없었으면 오늘날의 선도회는 불가능했다.) 내 팔자는 중 될 팔자로 사바세계에서 허우적거릴 팔자가 아니다. 그러니 몇 번이나 결혼생활을 했으나 원만하게 되지 않는다. 사람은 팔자에 따라야지 그렇지 않으면 불행에 허덕이는 모양이다.
첫 제자 이창훈과 선도회禪道會 발족
어느 날 한 청년이 찾아왔다. 좌선을 지도해 달라는 것이다. 신심이 견고해 보이는 청년이다. ‘무無’자字 공안公案을 주었다. 매일 아침 찾아온다. 내 집과 그 청년의 집은 1Km 쯤 되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온다. 그런데 용이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6개월이나 걸려 겨우 ‘無’字를 봤다. 건강도 좋고 머리도 좋은 청년이다. ‘無’字를 쉽게 보면 뒤가 개운치 않다. 그래서 처음에 힘을 들여 보는 것이 좋다. 중국의 유명한 무문無門 스님은 6년이나 걸려 ‘無’字를 보았다고 한다.
이 청년의 이름을 이 창훈이라고 한다. 나는 이 군 때문에 용기를 얻었다. 한국에도 좌선하려는 청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조계사 법당을 빌어서 좌선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매주 일요일 밤 6시에 시작해서 30분간 앉고 한 시간 설법했다. 처음에는 청년 학생이 한두 사람씩 나왔고 보살님들도 나오게 되어 매주 10여명 모였다. 그 중에 법제처 법제관(현 관리국장)으로 있던 정규현이라는 사람이 열심히 입참入參했다. 얼마 후에 ‘선도회禪道會’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초대 회장으로 정규현 씨를 추대했다. 조계사 법당은 가끔 기도가 있어서 쉬는 때가 많았다. 여학생들도 나왔다. 수십 명씩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
선도회의 유랑流浪 생활
그 후 장소를 여러 곳으로 옮겼다. 성약사에서 삼사 년 계속했다. 그 절의 관리자가 동참했기 때문이다. 중이 아닌 거사가 절을 운영하니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그래서 절을 팔게 되었다. 절을 매매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우리나라에는 개인 사찰이 얼마든지 있다. 일반 가옥을 매매 하듯이 복덕방도 있다고 한다.
성약사가 팔리게 되어 장소를 백우정사로 옮겼다. 이곳은 빌딩 4층인데 김경만이라는 신도가 경영하는 절이다. 이곳에서 한 동안 계속했다.
여기에서도 사정이 생겨 다음은 불심원으로 옮겼다. 이 절은 서 경보스님의 절인데 그의 제자가 경영하고 있었다. 얼마 동안 계속했는데 중지하라는 말도 없이 선禪 공부를 방해했다.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비원 앞의 백우정사로 다시 옮겨 공부를 계속했다. 을지로 3가에 있는 달마회관으로 옮겨 계속하기도 했으며 그 다음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조계사에서 시작하여 장소를 여러 곳에 옮겼으니 제 집이 없어 셋집으로 돌아다닌 셈이다.
무문관無門關 투과 제자 배출
선禪에는 들기 어려운 점이 있어서 한 번 와 앉아 보고는 다시는 오지 않는다. 몇 번 나와 보고 안 나오는 사람, 몇 년 해보고 안 나오는 사람 등 가지각색이다. 처음부터 꾸준히 계속해서 나오는 사람은 불과 사 오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무문관無門關도 모두 다 보고 벽암록碧巖錄에 들어갔다. 20여 년 동안 入參한 연 인원수는 천 명도 넘을 것이다. 그런데 성공한 사람은 사오 명밖에 안되니 선禪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공한 사람이란 무문관 48칙을 본 사람을 말한다. 선에는 천 칠백여 화두가 있다. 이 가운데 48칙을 봤다고 해서 성공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겨우 걸음마할 정도이다. 더욱이 힌트를 주었기 때문에 제 것이 못 된다. 그래서 선禪의 냄새나 맡아본 데 지나지 않는다. 힌트를 주지 않으면 ‘무無’자字 하나를 볼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의 근기가 약화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법시사法施舍 참여
‘법시사’라는 불교단체가 있었는데 사단법인으로서 이호성씨가 부이사장이었고 박진환 씨가 상무이사로 있었다. 사무실로는 이호성씨가 경영하는 타자학원에 연락처를 두고 있었다.
이사장은 공석이었다. 이사장은 운영비를 부담할 만한 사람이 아니고는 안 된다. 그래서 종교단체나 사회단체가 제대로 운영되는 일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유명무실한 단체가 많다는 말이다. 우리 선도회도 남의 장소를 빌어 다니는 처지였으니 제대로 운영이 될 리가 없다.
그런데 박진환 씨가 갑자기 작고했다. 부이사장인 이호성씨가 하루는 찾아와서 법시사를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맨 주먹으로 어떻게 맡느냐 하니 일해 나가노라면 타개책이 생길 수도 있지 않느냐고 간곡히 권유한다. 그래서 박진환 씨 대신으로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박정희 씨가 정권을 장악한 얼마 후 어느 단체를 막론하고 해산시켰다. 그래서 법시사도 해산되고 말았다. 한 동안 사회단체 등록을 취급하지 않았다. 일을 하려면 역시 사단법인으로 하는 것이 유리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법시사를 살려 보려고 했다. 불교단체라는 명목을 내세우고 일 년여를 쫓아 다녔다.
이사장을 물색했다. 석유회사를 경영한다는 송만일 씨와 인연을 맺게 되어 송 씨 사무실 한 구석에 법시사 사무실을 두었는데 송 씨가 사업 실패로 이사장직을 내놓고 법시사도 철거하게 되었다. 갈 곳이 없다. 다시 이호성씨 타자학원을 연락처로 하고 가끔 이 장소 저 장소를 얻어 사계의 저명인사를 초청하여 법회를 열었다.
법시사 이사장 정종원
어느 일요일 홍사단 강당을 빌어 법회를 했는데 매우 성황을 이루었다. 법회가 끝난 뒤에 정종원 씨가 수고한다고 하면서 손을 잡는다. 정종원 씨는 법시사 초대 이사장이었는데 박정희 씨가 혁명을 일으키자 곧 세계 일주라는 명목으로 출국했다. 정종원 씨는 일제 때 경시警視(경찰직의 최고관직)를 지냈다. 박정희 씨의 혁명 이전까지 조흥은행장으로 있었는데 불교의 독신자였다.
정종원 씨가 법시사를 도와주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나는 매우 반가웠고 법시사가 다시 살아나겠구나 하고 마음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좌선 도량 건립의 꿈
나는 일본에 한번 다녀오려고 여권 신청을 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에 가려고 한 것은 한․일 국교 정상화가 성립된 지 2년이 지났기 때문이었다. 도량건립 비용을 얻어 오려는 목적이었다. 좌선도량을 조그마하게 라도 꼭 건립하고 싶었으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학생 몇 사람으로써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지식층이나 부유층에서 ‘선禪’자字 조차 잘 이해 못하는 형편인데 청년 학생들이 도리어 좌선하려고 하는 것은 어떤 호기심에서가 아닌가 본다. 이런 처지에서 좌선도량을 건립한다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일본에 가서 사정해 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권 발급 수속이 매우 까다로워서 일 년 이상이 걸렸던 것 같다.
여권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면서 「법시」라는 팜플렛을 인쇄하여 수개월에 한 번씩 냈다. 이는 월간지로 만들 준비 작업이었는데 한 사람도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었다. 약 20년 전만 해도 불교 사업은 대단히 어려웠다. 일제 때도 불교 잡지가 3회를 계속한 일이 드물었다. 현재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기필코 해볼 작정으로 덤벼들었다. ‘대한불교’를 3년이나 속간續刊했던 경험이 있어서 누군가가 김 춘강 씨처럼 도와주는 사람이 나올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던 중 일본 비자가 나왔다. 나는 기뻤다. 일본에 가면 자그마한 도량건립 자금은 쉽게 모금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생각과는 딴판인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나는 최대한 노력해 보기로 결심하고 구두끈을 단단히 맺다. 이때가 1966년 11월이 있다.
일한친화회日韓親和會
그 때 동경에는 일한친화회日韓親和會라는 단체가 있었다. 회장은 스즈끼[鈴木]씨였다. 이 분은 종전 직후 총리대신의 장남으로 총리대신의 비서실장을 거쳐 외국출입 관리국장을 역임한 사람이다. 그는 모든 공직을 내놓고 일한친화회를 주재하면서 친화親和라는 월간지도 발행하여 한국 소개를 많이 했다. 한국 요리와 한국말 강좌 등을 연재하여 한국인의 호감을 얻고 있었다. 더욱이 한국인의 청탁도 잘 봐 주었다. 인품이 훌륭하고 성격도 원만했다. 나는 인척관계인 박상훈 씨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박상훈 씨는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나온 사람으로 일본주재 UN군에서 일을 보다가 일본에 주저앉은 사람이다.
스즈끼 씨의 소개로 과거 한국과 인연이 있는 인사에게 소개장을 가지고 여러 사람을 찾아 다녔다. 적극 호응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내가 입적하고 있는 묘심사파 절을 찾아다녀 봤으나 역시 호응하는 절은 하나도 없었다. 한일韓日 정상화가 되었다고는 하나 일본인들이 한국을 보는 눈이 전과 다르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개별적으로 모금하는 것은 이미 구식이었다. 라디오나 TV를 통해서 호소해야 한다고 귀띔해 주는 사람도 있었으나 나는 그럴 만한 일을 할 능력이 없단다.
다까스기 거사와의 만남
그러던 중 다까스기 신이찌[高杉晋一]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이 분은 일본에서 미쓰비시 상사를 육성한 재계에서 제일인자로 손꼽히는 분이다. 더욱 禪에도 조예가 깊은 분이었다. 그래서 일맥상통하는 점도 있었다. 내가 만났을 때는 미쓰비시의 공직에서 손을 떼고 미쓰비시의 상담역으로 있었다. 나이는 82세의 고령이었으나 매우 정정했다.
그는 세끼덴[石田]이라는 거사호도 받은 분이었다. 한국에서는 거사는 싸구려로 절에서 심부름하는 사람을 모두 거사라고 하지만 일본에서는 禪에 조예가 깊지 않고는 거사 호를 주지 않는다.
그는 ‘경제해외협력기금經濟海外協力基金’의 초대 총재이기도 했다. 이 기금 중에서 한국에 많이 협력했다고 한다. 작은 것은 말할 것 없고 굵직한 것으로는 포항제철 및 소양강 댐 건설과 일차 지하철 건설 등이라고 한다.
기금 모금 실패
처음 만나 사정을 말하니 별말 없이 5만 엔을 기부장에 기입하면서 “내가 기입하면!”이라고 했다. 이 말은 자기가 찬성하면 모든 사람이 찬성하여 얼마간 기입할 것이란 뜻이다. 그러나 5만 엔 정도로 기부받자면 몇 십 년 걸려도 도량건립 기금이 달성되거나 말거나 할 노릇이다. 그래서 중단하고 말았다.
한국에서 어렵기 때문에 일본에 가서 모금해 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나는 허탈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까스기 거사를 알게 된 것만은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앞으로 좋은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고 귀국했다.
한 가지 더 부언할 일이 있다. 도림사 수축비로 한국 서울에서 모금했던 4만 엔을 도즈[戶津]라는 사람의 통장에 예금하고 필요할 때마다 도즈 씨에게서 빼내 쓰곤 했다. 해방되기 3개월 전에 서울에 왔다가 도림사가 미군 폭격에 전소했으나 다시 동경에 가지 않고 서울에서 해방을 맞았다. 그러므로 도일한 것은 20여년 후가 된다. 마침 도즈씨도 생존해 있어서 반가이 만났다.
통장에 잔고가 얼마나 있었는지 모른다. 그 당시 돈으로 상당한 액수가 남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귀국하면서 청산해 달라고 하니 백 원을 주었다. 잔고가 얼마인지는 몰라도 20여 년간 이자만 하더라도 엄청난 액수일 터인데 백 원이란 말도 안 된다. 일본인의 근성을 알 수가 있었다.
월간 ‘법시法施’ 발간
정종원 씨를 모시고 ‘法施’발간에 착수했다. 그러나 자금을 담당할 능력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찬조금을 구하기로 했다. 정종원 씨가 조흥은행장으로 있었던 관계로 모금은 어렵지 않았다. 소개장을 가지고 찾아 가면 박대薄待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종원 씨 자신이 부탁해 놓은 곳을 찾아가면 잘 내주었다.
찬조회비 만 원 이상, 특별 회비 2천원, 보통회비 천 원 한 달 수입금으로 [법시法施]를 내고도 남아돌았다. 그래서 사무실도 얻고 전화도 가설하고 살림을 잘 꾸미게 되었다.
이는 정종원 씨의 원력願力이었다. 나도 몇몇 친구에게 부탁하여 회비를 염출했으니 날로 살림이 늘어갔다. 이때가 1966년이었다. 불교잡지로는 [법시法施]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인기를 독점했다. 그리고 월례 행사로 사계의 저명인사를 초청하여 설법회도 가졌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일은 정종원 씨가 염불종念佛宗을 신앙했고 나는 선종이었기 때문에 같은 불교라고 하지만 신앙의 방향이 달랐던 것이다. 나는 선에 관한 글을 쓰려고 했으나 선은 정이사장의 구미에 맞지 않았다. 불교 잡지라면 교리와 선을 반반씩 싣는 것이 이상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현재도 불교지가 몇 가지 있으나 선에 대한 글은 얼마 게재하지 않고 있다. 주관하는 사람이 선에 조예가 없는 탓도 있겠지만 선에 대한 글을 쓸 만한 사람이 없는 관계도 있으리라.
생각해 보면 딱한 일이다. 불교는 깨침의 교라고 해서 선이 중심이 되는 것을 모르니 말이다. 불교 잡지라면 불교를 포교하는 데 목적이 있을 것인데 알맹이는 빼고 수박 겉핥기식이니 노고가 많고 효과가 적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법시’를 열심히 했다. 처음에는 천부를 찍다가 돈의 여유가 생겨서 2천부를 찍어 배포했다. 그때에는 보통 단행본도 2천부를 찍는 일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돈은 점점 불어나갔다. 기금을 조성하겠다는 욕심에서 근검절약했다. 나는 문방구를 사도 소매상에서 사지 않고 거리가 멀어도 도매상에 가서 샀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자기 사무실이 없이 남의 사무실 구석을 빌려 쓰게 되니 일 년에도 몇 번 옮겨야 했다. 사단법인이 되어서 그런지 한 번 옮기는 데 수속이 복잡했다.
남의 곁방살이를 면하고 내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도록 기금을 조성해야 앞날이 순탄하다는 일념으로 신촌 전 내과 3층을 다시 빌려 쓰게 되었다. 전 내과는 정종원 이사장과 친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될 수만 있으면 공짜로 쓰고 기금을 한 푼이라도 더 만들어 보자는 목적이었다. 정이사장이 80여세가 되었으니 세상을 떠나면 찬조금 내는 사람도 없을 것을 예상하고 절약했다.
최초의 한국 선 전문지 월간 ‘선문화’ 발행
나는 1976년에 「법시사」에서 손을 뗐다. 이때 재고가 8백여만 원이 되었다. 매달 2천부나 찍으면서 8백여만 원을 저축했다는 것은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법시사를 맡아 13년이나 일했다.
나는 법시사를 그만두었다. 봉투 인쇄하고 있던 이완규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역시 불교 독신자였다. 禪에는 문외한이었는데 나와 친했고 禪의 전문지를 발간할 의논을 했다. 조판 인쇄 제본을 자기가 담당할 터이니 종이만 대라고 했다. 봉투나 명함을 찍는 시설로는 월간지를 찍지 못한다고 여러 번 다짐도 하고 당신의 인쇄시설로는 월간지를 인쇄 못한다고 했으나 활자를 얼마든지 살 수가 있으니 조금도 염려 말고 원고를 가져오란다. 4․6판에 최소한 34면으로 천부를 발행하자면 적지 않은 돈이 든다. 이를 담당하겠다고 하니 나는 숙원의 일이 성취되는 것으로 알고 기뻤다.
나는 법시사 상무이사직을 사퇴하고 ‘선문화禪文化’라는 제목으로 일에 착수했다. 문화공보부에 등록을 마치고 창간호를 냈다. 창간호를 내보니 힘도 들거니와 적지 않은 비용이 든다고 이완규는 다음 호를 못 내겠다고 한다. 큰일이다. 내가 맨 주먹으로 어떻게 속간 하느냐 말이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생각다 못해 선도회 몇 사람과 상의하여 월 만원, 5천원, 2천 원씩 내도록 하고 종이 대금은 친구인 홍성표 씨가 부담하고 대구에 있는 제자인 임재호 씨가 매달 만원을 보내 주어 겨우 17호까지 간행했다.
선문화 17호를 끝으로 폐간
매달 천부를 인쇄하여 큰절과 각계에 배포했으나 대금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유사이래 선의 전문지로는 처음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선풍禪風을 일으켜 보려 했으나 한 사람도 관심 있는 사람이 없었다. 스님 한 분과 원주에 사는 시인 박일송 씨 외에 몇 사람으로부터 격려의 편지를 받은 일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했다.
선禪이 ‘불립문자不立文字’이기는 하나 종지宗旨를 전하려면 문자文字를 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무조건 문자를 배격함은 선의 참다운 이치를 알지 못하는 소치다. ‘언전불급言詮不及’도 마찬가지다. 말로 이치를 설명 못하는 종지宗旨이기는 하나 설명 없이는 종지를 전할 수가 없지 않겠는가! 나는 이런 점을 생각하고 버티어 보았으나 갑자기 신경통으로 한 달이나 출입을 못했다. 회복 후에도 용기를 잃게 되었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일 년 7개월이나 속간續刊 했으니 여러분의 협조가 컸던 것을 나는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
다까스기 씨 내한과 일본 방문
어느 날 신문에서 일본 해외경제협력기금 총재 다가스끼 씨가 내한하여 조선 호텔에 투숙하고 있다는 보도를 읽고 매우 반가웠다. 곧 찾아가 만났다. 소양강 댐을 시찰하러 왔다고 한다. 경제협력기금으로 만든 것인지 우리 자본과 합작인지 잘 모르겠다.
그때 서울에 경제협력기금의 사무실을 두고 집무하고 있었다. 여하튼 소양강 댐, 지하철, 포항제철 등에 많은 액수의 기금을 협력했던 것으로 안다.
내 생각에는 경제협력이니 경제방면에만 협력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도량건립 같은 데에는 해당되지 않는 줄을 알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서울에 일본인 상공회의소가 있다. 회장이 미쓰비시 상사 서울 지점장 사도오메인 줄로 알고 있었다. 다까스끼 씨보고 사도오메[山小女]씨에게 소개해 달라고 하니 아무 말 없이 명함을 써 준다. 그 때 서울에 일본 상사가 수 없이 와 있었다. 지금은 얼마나 와 있는지 모른다. 일본의 큰 메이커들이 모두 진출하고 있는 듯하다. 장사가 되기에 화려한 사무실을 차려 놓고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번 일본 방문 때 실패하고 돌아와 생각해 보았다. 막대한 비용을 쓰고 어려운 여권발급 운동을 할 것 없이, 서울에 있는 일본인 상사를 상대로 도량건립 기금을 모집해 볼 것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막상 미쓰비시 상사 지점장을 만나 도량건립에 대하여 협력해 줄 것을 호소하니 그는 냉담했다.
나는 일본인 상공회를 통하여 모금해 보려고 했으나 빗나갔다. 일본에는 불교가 13종 58파가 있는데 자기 파가 아니면 협력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 되어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임제종파이므로 일연종파는 협력은커녕 도리어 경원한다. 이런 관계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다. 또 실망하고 말았다.
다시 일본 방문 추진
일본 해외경제협력기금 총재 다까스끼가 소양강댐 시찰을 마치고 귀국할 때 공항에 전송하러 갔다. 그 때 그가 다시 일본에 올 기회가 없었느냐고 한 말을 그렇게 귀담아 듣지 않았다. 얼마 후 일본 무역상을 하는 다까기[高木]라는 사람이 내한하여 호텔로 만나러 갔다. 여러 가지 얘기를 하다가 다까스기 총재를 잘 안다고 하니 일본 해외경제협력기금 중에는 아직 한국에 원조할 돈이 좀 남아 있으니 속히 손을 쓰라고 했다. 다까스기 총재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기뻤다. 다까스기 총재가 공항에서 “다시 일본에 올 기회가 없겠습니까?”하고 말한 뜻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곧 오까야마에 있는 국청사 주지에게 초청해 달라는 편지를 냈다. 이 스님은 하나야마[華山]씨로서 나의 사숙寺叔이 된다. 경성 묘심사 별원에도 여러 해 같이 있었고, 경도 묘심사파의 종무총장도 지냈고, 하나조노[花園]대학의 이사장도 지낸 일본 임제종의 고승高僧이다. 지난번에도 초청하여 준 스님이다. 또 초청을 부탁했다. 그때 항공 우편도 20여일이 걸렸다. 편지가 왕복하려면 한 달 걸렸다.
방일하는 목적이 분명해야 했는데 나의 경우는 도량건립 모금이 목적인데 이를 명시하면 일본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무슨 학술 연구차라고 하면 한국에서 거부당한다. 그래서 거짓 문서를 작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관계로 처음에 온 초청장은 거절당했다. 초청장이 와서 거절당하는 기간이 반년이나 걸린다. 다시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편지했다. 몇 달 후에 초청장이 왔다. 한국에서 또 거절당했다. 다시 부탁했다. 몇 달 만에 초청장이 왔다. 이번에는 접수되었다. 세 번째 접수된 것이다.
보련각 이봉수와 동행하기로 되어서 두 사람을 일시에 초청받은 관계로 초청자가 오까야마시에서 고오베시까지 가야 했던 관계도 있었다. 일본의 외국출입국관리국과 한국 영사관이 고오베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 한 사람만 초청하는 것과 두 사람을 초청하는 것이 서류 작성에도 달랐다. 그래서 더욱 초청 받기가 어려웠다. 그 당시 일반인으로 일본에 다녀오기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초청 받은 사람이 일본에 체류 중의 재정을 부담해야 했고 비행기 표도 보내야 했으니 이렇게 귀찮은 일을 누가 해 주겠는가! 우리나라의 요구에도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달러를 절약하기 위한 일이라고 하면 부득이한 사정인 줄은 알만도 하지만, 좀 지나친 일인 듯하다. 그때 한 사람에게 오백 달러만 바꾸어 주었다. 나는 2백 달러로 백만 달러를 얻어 낼 작정이었다. 백만 달러를 우리 돈으로 바꾸면 약 4억 원이 된다. 4억 원이면 도량을 짓고 의료원도 두고 불교방송국도 설립할 수 있었다. 희망이 부풀지 않을 수 없었다.
다까스기 총재의 임기 만료
비자가 나오기 15일 전에 다까스기 총재가 임기만료로 사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만 쳐다보고 한숨만 지었고 나는 허탈감에 빠졌다.
그러나 기왕 비자가 나왔으니 가 보기나 한다고 이봉수와 동행했다. 사실 나 혼자만 초청을 부탁했더라면 쉬웠을 지도 모른다. 이봉수와 같이 초청해 달라고 해서 두 사람의 비행기 표를 보내야 했다. 그 당시 한 사람 비행기 표 값은 5만원이었다. 두 사람의 것으로 10만원을 보내야 했으니 좀 시간이 걸리지 않았나 싶다.
대판 비행장에 내려 김태연 스님의 절에 가서 하루 밤 묵고 다음날 초청자인 오까야마 국청사에 갔다. 옛날 묘심사 경성별원 신도 20여명이 모여 환영해 주었다. 그 다음 날 동경에 올라가 한국 절에서 하루 밤 쉬고 다까스기 전 총재를 집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온천에 휴양 갔다는 것이다. 언제 오시느냐고 물으니 기한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휴양지까지 찾아 갈 수도 없고 명함만 내놓고 돌아섰다. 이미 총재직에서 물러났으니 만나 보아야 별 수 없을 것이다. 호사다마라고 하더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동경에 하루도 더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아 3박 4일로 귀국하고 말았다. 나는 도량을 지을 인연이 없어 보인다. 다시 말하면 禪을 선양할 시기가 되지 못했나 생각되기도 했다.
정규헌 씨를 통한 선원 건립 재추진
법시사의 기관지인 월간‘法施’발간에 착수했다. 원고를 일본에 가기 전에 수집해 두었던 것을 곧 인쇄소에 넘겼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法施’ 발행은 순풍에 돛단 듯이 잘 되어 갔다.
어느 날 선도회禪道會 전 회장이었던 정규헌 씨가 일본에 출장가게 되어 부탁할 일이 없느냐고 묻는다. 다까스기 전 총재가 내한했을 때 비행장에서 그에게 소개한 일이 있다. 다까스기를 만나 보라고 소개장을 써주었다. 박 대통령에게 나를 소개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박 대통령을 만나 도량건립을 알선해 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정규헌 씨가 일본에 가서 호텔에서 전화하니 감기로 누워 있어 못 만나겠다고 한다. 그 음성이 확실히 감기 걸린 목소리였다고 한다. 궁여지책으로 한번 해본 것인데 될 리가 없다.
다까스기씨와 박 대통령은 친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한국 원조금이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나 일본 해외경제기금에서 막대한 돈을 얻어 온 것은 사실인데 이가 다까스기와 박 대통령 사이에 이루어 졌으므로, 두 분의 친분을 이용해 보려고 했다.
다까스기씨가 재임 중이라면 몰라도 임기 만료로 사임한 때이니 나무 위에서 고기를 낚아 보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래저래 나는 도량을 건립할 운명이 못 되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종교 일은 시기가 당도 않고는 안 되는 모양이다.
법시 출간에 몰두
이 이상 더 망상을 부리지 말고 ‘법시法施’나 열심히 해 나가는 것이 득책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도 정종원 씨가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에 순조롭게 되어 나갔다. 불교 전문지로는 유일했던 관계로 인기가 좋았다.
잡지에는 좋은 내용을 실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무게가 있고 독자에게 유익한 참고가 될 만한 원고를 엄선했다. 불교에 조예가 깊은 문인이나 사학자나 고고학자에게 원고를 청탁했다. 원고 받기에 힘이 들었으나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발이 닳도록 다녔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속담을 명심하고 찾아 다녔다.
내가 발행하는 ‘禪文化’도 계속하면서 역시 좌선법회는 부지런히 계속했다. 그런데 신경통으로 한 달 동안이나 출입 못하고 누워 있었다. 신경통에는 약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별별 약을 다 썼다. 침도 맞아 보았으나 차도가 없었다. 그래서 ‘선문화禪文化’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 선원 건립 계획 무산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좌선법회만은 계속했다. 불심원에서 좌선법회를 할 때 이 경지라는 보살님이 있었다. 이 보살님은 각 절로 다니면서 좌선을 많이 했고 고아원도 경영하는 독지가이다. 하루는 불심원에 찾아 와서 방 한 간의 도량이라도 만들어 보자고 했다. 불광동 고개를 넘어 구파발에서 오른편으로 약 5백 미터 들어가면 8백만 원에 내놓은 집이 있다고 했다. 서양인이 건축한 집인데 한국인이 사서 예식장으로 사용하던 집으로 홀이 있어서 불상도 모실 수 있는 좋은 집이었다. 대지가 백 평이나 되는 집이다.
이 보살님은 선도회가 3백만 원을 부담하고 자기가 5백만 원을 부담하여 집을 사자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는 도량이 마련되는 줄 알고 희망이 생겼다. 그런데 가장 힘이 되는 한韓회장 법전法田 거사가 (단독으로 부담하라는 것은 아닌데) 적극 나서지 않는다. 그밖에는 선도회에서 힘이 될 만한 사람이 없다. 그러던 중 또 신경통이 재발했다. 그래서 그 일은 유야무야가 되고 말았다. 얼마 후 이 경지 보살님이 작고作故했으니 이 문제는 끝이 나고 말았다.
자택에서 참선 지도
내가 부덕한 탓으로 도량건립은 안 되었고 결국 인연이 당도하지 않은 것으로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노쇠하여 외출하기 힘이 들었으므로 내 집 방에서 법회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내 집에서 계속 한 지도 10여년이 된다.
1959년 조계사 법당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는 동안 입참入參한 사람은 무려 수백 명이 될 것이다. 그 중에서 무문관을 마찬 사람은 불과 네 사람밖에 안되고 무문관을 보고 있는 사람이 8명밖에 안 된다.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계속했으나 이 정도이니 禪이 실로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힌트를 주어 겨우 통과한다. 내 나이가 80이니 이 정도에서 끝날 것이다.
거사居士[대자大姉]의 네 가지 자격 조건
현재 우리나라에서 간화선看話禪을 지도하는 사람은 나 한 사람밖에 없는 듯하다. 여러 곳에 선방이 있으나 모두 묵조선黙照禪을 하는 것으로 안다. 묵조선은 근기가 좋은 시대에 적합하지만 오늘과 같이 근기가 약한 시대에는 역시 간화선이 효과적일 것이다. 간화선도 좋고 묵조선도 좋다. 어느 쪽이건 깨치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니 가부를 말할 필요가 없다.
선禪은 파수예불입把手曳不入이어서 손을 붙잡아 끌어도 오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20여 년 동안 한 번 왔다가는 도망치는 사람, 몇 번 왔다가 도망치는 사람, 몇 달 다니다가 도망치는 사람, 더욱이 거사[대자]호를 받고 그만두는 사람 등, 여러 가지다.
거사[대자]호는 무문관이나 통과한 사람이 아니고는 안주는 것이지만 유인하는 의미에서 ‘무無’자字만 본 사람에게도 거사[대자]호를 주었다. 거사[대자]호를 받은 사람에게는 네 가지 조건이 있다.
1. 관리官吏 노릇을 하지 않는다.
2. 욕심慾心이 없고 덕德이 있어야 한다.
3. 베풀 수 있을 정도로 재력財力이 있어야 한다.
4. 스스로 깨쳐 도道에 안安해야 한다.
이것은 예부터 일러온 것이다. 이 네 가지 조건을 갖춘다는 것은 오늘날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싸구려로 ‘무無’자字만 본 사람에게 거사[대자]호를 주었다. 이들은 대부분 중도에서 그만 두었다. 그러나 ‘무無’자字 하나만이라도 봤다면 못 본 사람보다 그래도 선禪이란 어떤 것임을 알 정도는 될 것이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도 힌트를 주어야 했다.
입참자入參者들
오늘까지 ‘무無’자字를 봐서 거사호居士號나 대자호大姉號를 준 사람을 순서대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철심鐵心 거사 이창훈李昌薰,
삼소三笑 거사 정규현鄭奎賢,
법능法綾 대자 이춘례李春禮,
법상法常 거사 정삼룡鄭三龍,
원오圓悟 거사 김종호金鍾浩,
도안道安 거사 정종호鄭鍾浩,
법원法元 거사 조보환曺寶煥,
송운松雲 거사 김두영金斗永,
간운看雲 거사 하상범河相範,
법현法賢 거사 민태식閔泰植,
도심道心 거사 김기린金基麟,
법봉法峰 거사 임재호林在浩,
법능法能 거사 민승호閔承鎬,
법홍法弘 거사 정화옹鄭和翁,
법원法圓 거사 한상봉韓相奉,
법전法田 거사 한기창韓基昌,
법은法隱 거사 오세환吳世煥,
법혜法惠 대자 전춘자全春子,
종은宗隱 거사 박동준朴東俊,
종능宗能 거사 박만실朴晩實,
종운宗雲 거사 박홍태朴弘太,
종실宗實 거사 김윤태金潤泰,
종원宗圓 거사 이상규李相圭,
종혜宗惠 대자 신사현申士弦,
법광法光 거사 최연태崔演台,
법성法性 거사 이 은李 銀,
법웅法雄 거사 정부한鄭富瀚,
법진法珍 거사 박은증朴銀增,
법경法境 거사 박영재朴英才,
법근法根 거사 김진태金鎭泰,
법온法蘊 대자 박덕업朴德業,
법진法眞 거사 이만성李萬成,
법공法空 거사 김무발金無髮,
법련法蓮 대자 이정수,
법혜法慧 대자 조인숙,
법화法華 대자 유을규柳乙圭,
법해法海 거사 이규택李圭宅,
법철法徹 거사 정희종鄭熙淙,
법란法蘭 대자 문희정,
법열法悅 거사 이봉규李鳳圭,
법통法通 거사 홍성의洪性儀,
법정法晶 대자 곽임규郭任圭,
법향法香 대자 정연수鄭延秀,
법화法和 대자 어숙례魚淑禮.
위의 44인 중 거사居士가 34명이고 대자大姉가 10명이다. 내가 앞으로 일 년 더 산다면 몇 사람이 더 늘어날 것이다. 27년 간 한 번도 쉬지 않고 계속해 왔으나 앞으로 일 년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까 생각된다. 나의 기력이 해마다 약화되어 가기 때문이다. 나는 노력할 수 있는 데까지 힘을 다했다. 인연이 없어 도량을 마련 못 한 것이 유감이다.
달마 대사가 중국에 오기는 했으나 법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없어서 소림사에 9년 동안 면벽面壁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혜가 한 사람을 얻었으니 역시 인연이 다다르지 않고는 안 되는 모양이다.
현재 한국의 선禪 현실
우리나라 경우도 법랑 선사가 중국에 들어가서 4조 도신 스님의 법을 받아 가지고 귀국했으니 선禪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 후 2백년을 지나 도의 선사가 또 중국에 들어가 선법을 받아 가지고 귀국했으나 역시 이해하는 사람이 없어서 진전사에 가서 사십 년 간 두문불출杜門不出 했다고 한다. 선은 기연機緣이 없이는 안 되는 것이 사실이다.
중국에 교리가 들어오기는 서기 67년이고, 선禪이 들어온 것은 453년 뒤가 된다. 우리나라는 교리敎理가 서기 372년에 들어오고, 선은 650년에 들어왔으므로, 278년 차가 된다. 일본은 서기 617년에 교리가 들어오고, 선은 서기 1191년에 들어왔으므로 574년이나 뒤진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교리로 어느 정도 소지를 만들어 놓은 후가 아니면 직접 선을 가져와서는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선禪이 들어온 동기를 살펴보면 교리로써는 만족할 수가 없어서 禪을 찾았다는 것이다. 교리는 경전을 해석한 것을 말하는데 남이 해석한 것으로는 물론 만족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체험하지 않고 어떻게 만족할 수가 있겠는가! 신라 때 수많은 청년들이 다투어 구도(求道)의 길에 나서서 중국에 들어갔다는 것은 이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나라에는 禪이 건재하다. 그러나 지도 방법이 구태의연하여 선풍을 진작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삼십 년 후에는 그 방법이 달라지지 않을까 본다. 왜냐하면 현재 구미 제국에 선객이 20만이나 된다고 하니 이삼십 년 후에는 그 영향이 우리나라에도 미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는 미지수이지만 현대인의 근기에 맞도록 지도 방법이 변하지 않을까 본다. 나는 이때를 대충 50년 후로 짐작하고 있다. 따라서 50년 후로 유언遺言을 남기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려고 한다.
저술著述
팔십 평생 써 놓은 나의 저술로는 모두 선 공부하는데 반드시 구비해야 할 것들이다. 그러나 미흡한 점이 많다. 이는 50년 후에 보완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따질 것 없다. 50년이나 5백년인들 하등 문제시되지 않는다. 선禪은 시간 관계를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은 기다리지 않고 흐른다. 하루라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그런데 그것이 기연機緣에 따르기 때문에 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터전을 닦아 놓아야 한다. 터전[소지素地]을 닦아 놓으면 씨를 뿌리기 쉽고 씨를 뿌려야 싹이 트니 말이다.
해방 후 일본에 가지 않고 교육계에 십여 년 있었고 다음은 선禪을 지도하면서 좌선 공부하는데 가장 필요한 책을 저술하며 일평생을 보냈다. 저서는 다음과 같다.
1. 무문관無門關: 이는 48칙으로 엮여 있어서 제 일칙 조주의 無字로부터 일일이 봐 나가가야 한다.
2. 선종사부록禪宗四部錄: 이는 심신명, 중도가, 십우도, 좌선의를 합친 것이다. 좌선의는 백장청규를 근거로 썼으며, 그 밖의 것은 모두 선지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들이다.
3. 선림구집禪林句集: 6천여 구를 수록한 것이다. 선서 중에서 단적을 뽑아냈다. 출처는 광범위하다. 화두를 본 경지에 계당 되는 구를 찾아내는 것이므로 반드시 구비해야 할 책이다.
4. 생활生活속의 선禪: 초심자를 위하여 앉는 법, 호흡하는 법 등을 대략 써서 이 한 권이면 혼자서도 좌선할 수 있다.
5. 선정사상사禪定思想史: 선禪과 정定을 설명하고 역사적으로 흘러내려온 과정을 서술한 것이다.
6. 선禪과 과학: 선은 근본과학이다. 대개 선과 과학은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일치되는 점을 구체적으로 쓴 것이다.
7.선 속에 약동躍動하는 인생人生: 선의 전체관을 파헤쳐 우리의 일상생활이 선禪의 저력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8. 선禪과 한국문화재韓國文化財: 우리나라의 문화재는 선의 밑바닥 힘으로 이루어 진 점을 강조했다.
9. 생활 속의 반야심경 : 심경은 대반야경 6백부 중에서 가장 선적인 것만 뽑아서 엮은 것으로 대승경전 가운데서 으뜸가는 짤막한 경이다. 이를 대승의 입장에서 구체적으로 쓴 것이다.
10. 좌선坐禪: 좌선하는 요령을 간단히 써서, 이 한권이면 누구든지 혼자 좌선할 수 있을 것이다.
11. 송고집頌古集 上,下 : 좌선에 관한 중요한 것을 총망라한 책이다. 무문관, 벽암록, 갈등집, 종용록, 기타 여러 편을 합치고 선구禪句를 써서 착어着語에 편의를 준 것이다. 이는 편編이다.
12. 인생人生의 계단階段 : 이는 나의 일대기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기까지 정한 행로를 밟는 것으로 숙명론이라고나 할까.
13. 불교의 교단생활: 이는 2백 5십계를 중심으로 부처님의 교단조직과 수행규범을 총망라 한 것이다.
위의 책들을 쓰느라고 펜을 놓을 틈이 없었다. ‘대한 불교신문’에서 3년, ‘법시法施’에서 10년, ‘선문화禪文化’ 17호까지 펜을 놓을 틈이 없었다. 손가락에 혹이 생길 정도가 되었다.
원고 쓰다가 단전호흡하고 있음
선은 훗날 역수입逆輸入될 것이다
이 책들은 모두 지형을 떠 두고 기회가 있으면 재판할 수 있게 해 두었다. 10년 후도 좋고 20년 후도 좋고 50년 후에도 좋다. 인연이 다다르면 자연히 되는 법이니,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50년 후에는 내가 쓴 책들보다 더 구체적으로 쓴 책이 나올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러기를 기대한다.
언젠가는 구미歐美에서 선禪을 역수입하지 않으면 안 될 날이 올 것이다. 역수입이란 우리나라에서 간 것을 뜻하지 않고 일본에서 간 것이니 동양에서 보면 역수입이란 말이다. 구미는 어느 면에서 보든 여건이 좋은 것은 부인치 못할 사실이다. 종교에 동서가 없고 국경이 없는 것이니 우리보다 좋은 것이라면 서슴지 말고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물질문명을 서구에서 수입하고 있으니 禪을 역수입한다고 탓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디서 불어오건 선풍이 불 날이 오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