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말 쥬스의 추억
한 일 자(一)로 지어진 기와집엔 방이 4칸 있었다.
마루 하나를 경계로 두 칸이 있고,
그 방들의 바깥 쪽 벽으로 두 개의 방이 붙어 있는 구조였다
동쪽 끝방에는 깡패로 짐작되는 춘식이 아저씨와 동거하는 춘자 누나가 살고 있었고
서쪽 끝방에는 자식이 셋이나 되어 항상 싸우는 소리와 아이들 우는 소리가 그치지 않던
이발사 이씨 아저씨가 살고 있었다.
석구네 가족과 마루 하나를 사이에 둔 건너방에 사는 또순이 아줌마는
쌍꺼풀진 눈에, 피부가 하얗고 이마가 시원스럽게 생긴 도회적 이미지의 여인이었다.
간혹 집에 들리는 남편도 좀 무섭게 생기긴 하였지만 어른들 말로 잘 생긴 편이었고
또순이 아줌마가 '아저씨는 미스터 코리아이고 나는 미스 코리아'라고 이야기했으므로
석구는 '코리아'가 붙는 사람은 힘이 세거나 아주 예쁜 사람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그때부터 알게 되었다.
방문을 항상 열어 놓는 또순이 아줌마의 방에서는 석구네가 사는 방과는 다른 향내가 났고
그것이 아기에게 먹이는 분유냄새 때문이라는 것은
언젠가 아줌마가 아기에게 분유를 먹이기 위해 분유 깡통을 열 때서야 알게되었다.
한여름, 매미가 시원스럽게 울던 어느 날,
아줌마는 유리 컵에 뭔가를 담아 쟁반을 받쳐든 채 석구 어머니께 가져왔다.
입에 물을 담아 물푸레를 하며 다림질을 하시던 어머니는
보기에도 맛있게 생긴 컵 속의 물을 반 쯤 드시다가 석구에게도 마셔보라 주셨고
컵을 받아 든 석구는 혀끝으로 맛을 음미하며 야금야금 마셨다.
새콤 달콤한 것이 생전 처음 먹어보는 쥬스 맛이었다.
그 시절 쥬스라 하면 동네 구멍가게 앞,
물을 가득 채운 양은 다라이에 둥둥 뜬,
빨간색, 노란색 색소가 너무도 선명한 삼각형 모양의 비닐주머니에 담긴 불량쥬스가 전부였던 터라
또순이 아줌마가 주는 쥬스는 그야말로 고급스럽기 짝이 없는 진짜 황홀한 것이었다.
석구는 그날 이후로 아줌마가 방문을 열면 그 쥬스를 또 주지 않나 갈망하며 기대했다.
하지만 한 여름이 다 가도록 쥬스를 나누어 주는 일은 결코 없었고
오히려 아줌마는 약 올리기라도 하듯 진한 복숭아 향내를 마루로 내 보내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아줌마가 아기를 데리고 병원에 간 것을 알게된 석구는
문이 열린 또순이 아줌마의 방안으로 살며시 들어섰다.
방문 옆 전축 위에 그 쥬스 봉지가 담긴 상자가 올려져 있던 것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슬며시 한 봉지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들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다시 내려 놓았다가
'이렇게 갯 수가 많은데 한 개가 없어진 것은 절대 알 수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곤
잽싸게 집어 들고 밖으로 튀었다.
물에 타지 않고 혀끝으로 찍어 먹는 주스 가루는 더 맛있었다.
석구는 이튿날도, 그리고 그 다음 날도 눈치 껏 한 개씩 빼어내 그 맛을 즐겼다.
하지만 그 짓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 또순이 아줌마가 석구를 불렀다.
"야, 나석구! 바른 대로 말해. 너 쥬스 몇 개나 갖다 먹었어?"
아니라고 말 하려다 아줌마의 눈과 마추 친 석구는 그만 눈물부터 흘리고 말았다.
천천히 그러나 또박또박, 또순이 아줌마는 그것이 얼마나 못 된 짓인가를 말했고
드디어는 쥬스 한 봉지에 5원이니 먹은 만큼 물어내라 요구했다.
석구는 5원이 생길 때 마다 아줌마에게 갖다 바쳤다.
그리고 어머니가 시키는 심부름을 가지 않겠다 버팅길 때 또순이 아줌마가
" 나석구! 너~ ......" 하면서 말 끝을 올리면 부리나케 일어나 심부름을 해야했다.
영화배우 홍세미를 닮았던 또순이 아줌마는
이사하던 날 석구에게 봉지 쥬스 한 상자를 선물하고 떠나갔다.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석구가 자라면서 이성에 눈 뜰 무렵, 석구의 이상형은 또순이 아줌마 타이프로 굳어져 갔다.
하지만 막상 그런 타이프의 여인들 앞에 서면 알 수 없는 컴플렉스에 혀가 굳어져
말 한 마디 못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나석구씨는 드라마 속 배우의 반듯한 이마와 쌍꺼풀진 눈을 보며
뜬금없이 어릴 적 또순이 아줌마를 떠 올렸다.
세살 위 아내는 오십 대에 알맞은 몸매로 초저녁부터 자고 있었다.
*** 2003년 11월 3일 paran블로그에 올려졌던 글을 보며 이런 글도 썼었구나.... 그냥 웃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