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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하 중에서
[육조스님]
보통 삼론종. 법상종. 천태종. 화엄종이라고 하면 교가(敎家)이론을 총망라한 것인데 이 모두는 중도(中道)에 입각하여 법을 설한 것입니다. 따라서 중도를 내놓고는 각 종(宗)은 성립되지 못할 뿐 아니라 중동의 이론이 불교교리의 최고원리라는 것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주장하는 선종(禪宗)에서는 무엇을 근본으로 삼았는가. 선종도 불교에 속하는 이상 중도를 근본으로 삼았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역대 조사스님들의 어록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육조(六祖)스님의 어록인(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면 중도를 근본으로 삼았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육조스님이 돌아가실 임시에 하신 법문을 살펴 봅시다. 조사께서 어느날 문인(門人)인 법해(法海).지성(志誠).법달(法達).신회(神會).지상(智常).지통(智通).지철(志徹).지도(志道).법진(法珍).법여(法如)등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내가 죽은 후에는 각각 한 지방의 스승이 될 것이니 내가 이제 너희들에게 설법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리니 내 근본 종지를 잃어 버리지 않게 하여라.
먼저 삼과(三科)법문과 동용(動用)36대(三十六對)를 들 것이니 드나듬에 양변을 떠나 일체법을 설할 때 자성을 떠나지 마라. 홀연히 어떤 사람이 너희들에게 법을 묻거든 말함에 모두 쌍(雙)으로 하여 모두 대법(對法)을 취하며 오고 감이 서로 원인이 되어도 마침내는 두 법을 다 없이 하여 다시 갈 곳이 없도록 하라. 삼과법문이란 음(陰).계(界).입(入)을 말한다. 음(陰)이란 곧 오음(五陰)으로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을 말하고, 입(入)은12입(十二入)으로서 외육진(外六塵)안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과 내육문(內六門)인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가 그것이다. 계(界)는 18계(十八界)로서 6진(六塵)6문(六門)육식(六識)이다. 자성(自性)이 능히 일체만법을 포함하는 것을 함장식(含藏識)이라
하는데 만약 사량(思量)을 일으킬 것 같으면 곧 전식(轉識)이다. 육식(六識)을 일으켜 6문(六門)으로 나아가서 여섯 객관(六塵)을 보니 이와 같이 18계가 모두 자성을 따라 작용을 일으킨다. 만약 자성이 삿되면 열여덟 가지 나쁜 것을 일으키고 자성이 올바르면 열여덟 가지 올바름을 일으킨다.
만약 아갛게 작용하면, 곧 중생의 작용이요, 착하게 작용하면 곧 부처의 작용이다.작용(作用)은 무엇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지는가. 자성(自性)으로 말미암아 대법(對法)이 있다. 외경(外境)의 물질세계에 다섯 상대(五對)가 있으니 하늘과 땅이 상대요 음과 양이 상대요, 물과 불이 상대이다. 이것이 다섯 상대(五對)이다.
법상(法相)의 말에 열 두 상대가 있으니 말.법(語法)이 상대요, 유.무(有無)가 상대요, 유색.무색(有色無色)이 상대요, 유상.무상(有相無相)이 상대요, 유루, 무루(有漏無漏)가 상대요, 색.공(色空)이 상대요, 동정(動靜)이 상대요, 청탁(淸濁)이 상대요, 범성(凡聖)이 상대요, 승속(僧俗)이 상대요, 노소(老少)가 상대요, 대소(大小)가 상대이다. 이것이 열두상대(十二對)이다.
자성이 작용을 일으키는 데 열아홉 상대가 있다.
장단(長短)이 상대요, 사정(邪正)이 상대요, 치혜(痴慧)가 상대요, 우지(愚智)가 상대요, 난정(亂定)이 상대요, 자독(慈毒)이 상대요, 계비(戒非)가 상대요 직곡(直曲)이 상대요, 번뇌와 보리가 상대요, 상.무상(常無常)이 상대요, 비해(悲害)가 상대요, 희진(喜瞋)이 상대요, 사취(捨取)가 상대요, 진퇴(進退)가 상대요, 생멸(生滅)이 상대요, 법신(法身)과 육신(色身)이 상대요, 화신(化身)과 보신(報身)이 상대이니 이것이 열아홉 상대(十九對)이니라."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이 36대법(三六對法)을 잘 쓸 것 같으면 도(道)가 일체경법(一切經法)에 관통하고 출입할 때 양변을 떠나 버려 자성 작용과 여러 사람의 말에 밖으로 상(相)은 있지만 상을 떠나고 안으로 공(空)은 있지만 공을 떠난다. 만약 상(相)에 집착할 것 같으면 곧 사견(邪見)을 기르게 된다. 만약 사람이 너희들에게 뜻을 물을 때 유(有)를 물으면 무(無)로써 대하고 무(無)를 물으면 유(有)로써 대답하며 범(凡)을 물으면 성(聖)으로써 대답하고 성(聖)을 물으면 범(凡)으로써 대답하여 이도(二道)가 서로 인(因)해서 중도(中道)가 성립된다. 한 번 물으면 한 번 대답하고 나머지 물음도 한결같이 이렇게만 하면 곧 이치를 잃지 않으리라.
가령 어떤 사람이 묻되 '어떤 것을 어두움이라 합니까'하면'밝음은 인(因)이 되고 어두움은 연(緣)이 되어 밝음이 없어지면 곧 어두움이다'라고 대답하여 밝음으로써어두움을 나타내고 어두움으로써 밝음을 나타내서 오고 감이 서로 원인이 되게 하여 중도의 진리를 이루게 해야 한다. 나머지 물음도 다 이와 같이 할 것이다. 너희들이 나중에 법을 전함에 있어서도 이렇게 하여 번갈아 서로 가르쳐 줌으로써종지(宗旨)를 잃지 말 것이니라. "육조스님을 모시고 있던 스님 중에서 남악 회양(南嶽懷讓)스님이나 청원 행사(靑原行思)스님은 딴 곳에 나가서 법을 펴고 있었지만 법해(法海)스님 등은 육조스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고 있었습니다. 스님을 모시고 있는 스님들 가운데 수승한 10대제자를 모아 놓고 무문자설(無問自設)로 이렇게 유촉하였습니다.
본래 수법제자(受法弟子)같으면 이러한 것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또 한번 말씀하신 것은 비록 안다고 해도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해서이고, 또 그 당시 사람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후세 중생들을 위해서입니다. 앞으로 육조스님이 하고 싶은 말씀이 선종에 있어서 근본원리이기 때문에 특별히 불러서 유촉한 법문입니다.
언제든지 설법을 할 때는 양변을 떠난 중도(中道)에 입각해서 설법을 하되 자성(自性)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자성이란 불성(佛性)을 말하는데 불성이란 비유비무(非有非無)이고 역유역무(亦有亦無)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누가 유(有)로 물으면 무(無)로 대답하고 무(無)로 물으면 유(有)로 대답해야 합니다. 유(有)란 스스로가 유가 아니고 무(無)가 있기 때문에 유(有)이고 유(有)가 있기 때문에 무(無)가 있습니다. 따라서 유를 떠나서 무가 없고 무를 떠나서 유가 없습니다. 이것을'오고감이 서로 원인이 된다(來去相因)'고 합니다. 그리고 구경에 두 법을 모두 버리라고 한 것은 다시 말하면 무를 떠나서 유가 없고 유를 떠나서 무가 없다면 이것은 생멸법(生滅法)이지 절대법(絶對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두 법을 다 버려야 됩니다. 생멸법을 버려서 다시 갈 곳을 없게 해야 합니다.
결국 양변을 여의는 것을 역설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누가 법문을 묻든지 간에 반드시 양변을 여윈 중도에 입각해서 법을 설해야 되지 그렇지 않을 것 같으면 근본 불법이 아닐 뿐 아니라 육조의 아손이 아닙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교의 별전이라고 하는 조계 선종(曹溪禪宗)의 근본 입장도 중도에 서 있지 중도를 떠나서는 조계선종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계선종을 바로 알려면 중도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천태종이나 삼론종이나 법상종이나 그 근본은 중도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첨가해서 설명할 것이 있는데 육조스님이 의발(衣鉢)을 전한 부분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혹자는 행사스님에게 육조스님의 의발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 본 것입니다. 그 부분을 [대장경]에서 살펴 보겠습니다.
그전에는 옷과 법(依法)을 함께 실행하여 스승과 제자가 주고 받았으니 옷을 가지고 믿음(信)을 표시했다. 내가 이제 사람을 얻었는데 어찌 믿지 아니함을 걱정하겠느냐. 내가 옷을 받은 이래로 고생을 많이 했다. 하물며 후대에서랴, 반드시 경쟁이 많을 것이다. 옷은 산문(山門)에 두고 너는 마땅히 각 지역에 나누어 교화하여 이 법을 단절케 하지 마라.
이 대목은 전등록 청원행사(靑原行思)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즉, 6조대사 이전에는 옷과 법(依法)을 서로서로 쌍행해서 전해 내려왔는데 이것은 옷을 가지고 신(信)을 표시한 것이고 법은 마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을 얻었는데 어찌 믿지 아니함을 겁낼 것이 있겠는가. '즉 네가 지금 법을 성취하였는데 그 신(信)을 표시함에 있어서 옷은 필요가 없다 하였으니 이것은 옷을 전할 필요가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뿐아니라 내가 옷을 전해 받은 이래로 옷을 서로 뺏으려고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하물며 후대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즉 옷 때문에 싸움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옷은 조계산에 그대로 두고 너희는 마땅히 딴 곳으로 가서 교화를 하라'며 이 법을 단절치 않게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여기서 옷은'산문에 두라(留鎭山門)'함은 조계산에 그대로 두라는 뜻입니다. 또[육조단경]에서 인용해 보겠습니다.
법해(法海)상좌가 재배하고 여쭈었다. "스님께서 입멸하신 후에 옷과 법은 마땅히 어떤 사람에게 맡기십니까."
"내가 대범사에서 설법한 이래 지금에 이르도록 기록하여 유통되는 것이 있으니 이것을 [법보단경]이라 한다. 너희들이 수호하여 번갈아 전해 주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되 다만 이 단경에 의지하여 설하면 이것이 정법(正法)이다. 지금 너희들을 위해 법을 설하고 옷은 전해 주지 않는다. 너희들의 신근(信根)이 순숙(淳熟)하기 때문에 결정코 의심이 없으며 큰 일을 감당할 만하다. 그러므로 이전 조사인 달마대사께서 붙이신 게송의 뜻에 의거하여 옷은 전하지 않을 것이다. "하시고 게송을 말씀하셨다.
내가 본래 이 땅에 와서법을 전하고 어리석은 중생을 구하니한꼿에 다섯 잎 피어열매가 저절로 이루리라. 이것뿐만 아니라 육조스님이 옷을 조계산에 두고 전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글을 지은 것이 있는데 이것이 유명한 불의 명(佛依銘)입니다.여기의 첫머리에'부처님 말씀은 행하지 않고 옷이 싸움의 근본이 된다(佛言不行佛衣乃爭)'그래서 옷을 전하지 아니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현종(玄宗)초 육조 스님이 돌아가신 뒤 얼마 안되어 현종이 육조스님의 의발을 청해서 궁중에 모셔 놓았는데 그 아들인 숙종이 죽고 난 뒤에도 옷을 조계산에 돌려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숙종 아들 대종(大宗)이 꿈을 꾸엇는데 육조스님이 의발을 조계산으로 도로 돌려 보내달라고 현몽을 했습니다. 그래서 영태(永泰)원년 5월 5일에 조칙을 내려 조계산에 돌려 보냈다는 대목이 육조스님의 비문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짐이 꿈에 혜능대사를 보았는데 전해 내려온 옷 가사를 조계로 보내달라고 청하니 내가 진국 대장군 유순경을 시켜서 받들어 모시고 보내며 이것은 나라의 국보이니 본사에게 여법하게 잘 보관하라 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증거를 보아서 육조 스님이 옷을 전하지 안했다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마조(마조도일(馬祖道一)스님이야기
마조 (마조도일;馬祖道一)스님은 1200여년 전 당(唐) 정원(貞元) 4년(AD.788)80세에 입적하였는데 육조스님 제자되는 남악 회양선사의 제자입니다. 마조스님이 법을 깨치게 되는 기연(得法機緣)은 잘 알려진 것이지만 이것을 보면 선(禪)이란 활동하는 원동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 것과 같이 한군데 체재하여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마치 죽음과 같습니다. 사람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낙오되기 마련이고 도태됩니다. 농사 짓는 사람은 논과 밭에서, 장사하는 사람은 시장바닥에서 쉬지 않고 노력해야 합니다. 수행(修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단히 정진하는 사람은 향상의 분(分)이 있거니와 정진하지 않고 방일하는 사람은 결국 전에 닦았던 경계조차도 미하고 맙니다.
모든 것은 쉬지 않고 변천하기 때문에 우리도 이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쉬임없이 움직여야 합니다. 선(禪)은 활동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참선을 한다는 것은 좌선한다고 말하는 이가 많은데 좌선만이 참선(參禪)이 아닙니다. 참선은 곧 선을 참구하는 것인 만큼 일체시(一切時)일체처(一切處)에 오로지 마음을 순일히 하여 자기가 의심하는 화두(話頭)에 몰두하는 것이 참선입니다. 마조스님의 득법기연인 남악선사와의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선의 진의(眞意)를 알 수 있습니다.
남악스님이 숭산(嵩山)의 전법원(傳法院)에서 수도하는 도일 스님의 법기(法器)를 알고 도일스님이 좌선하고 있는 바로 방문 앞으로 갔습니다.
"대덕(大德)은 무엇 할려고 좌선을 하십니까."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하루는 남악스님이 기와장을 가져와서 스님이 좌선하고 있는 방문 바로 앞에서 기와장을 숫돌에 갈고 있었다.
"큰 스님은 무얼 하시려고 기와장을 갈고 계십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갈고 있습니다."
"기와장을 갈아서 어찌 거울을 만들려고 합니까."
"그러면 좌선을 해서 어찌 부처를 이룰려고 합니까."
이 한마디에 도일은 큰스님이 기와장을 갈고 있는 진의(眞意)를 알았습니다.다시 남악스님이 물었습니다.
"우마차가 가지 않을 때 소를 떄려야 옳은가. 수레를 때려야 옳은가."
"......."
"부처를 찾는 데에 있어 좌선만 고집하면 설사 만 겁을 지내도 깨치지 못한다. "
도일스님은 남악스님의 말씀을 듣고 이내 마음을 깨쳐서 뒷날 남악스님의 수제자(首弟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경덕전등록 남악회양장(南嶽懷讓章)에 나오는 것입니다.
마조스님은 강서성(江西省)을 중심으로 교화를 하였기 때문에 가서마조(江西馬祖)라고도 불리우며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교화를 산 석두 희천(石頭希遷)과 더불어 당시 선계(禪界)의 쌍벽이라 불리웠습니다. 마조스님 밑에 139명의 대선지식이 있고, 그 중에서 뛰어난 이가 88명인데 이 이 88명이 천하에 흩어져서 육조 조계선을 천하에 유포시겼습니다. 선종을 천하에 유포시켜서 알게 한 것은 마조스님의 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조스님 밑에서 임제종(臨濟宗)위앙종(僞仰宗)이 나고 조동종(曹洞宗)도 이와 관련이 많습니다. 마조스님의 성품은 인자하며 얼굴이 특이하고 소걸음에 호랑이 눈길이었으며 혀를 내밀면 코를 덮고 발바닥에는 두 개의 고리 문채가 있었다고 합니다.
마조스님은 종문(宗門)의 걸출로써 천하에 선을 유포시킨 제일의 공로자라고 평하는 동시에 큰제자를 많이 두기로 마조스님 만한 이가 없다고도 평합니다. 그래서 마조스님의 법문이라고 하면 종문의 표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문이 많이 없고 마조어록(馬祖語錄)이라고 한는 간단한 것이 있습니다. 만약 도(道)를 알려고 할진대는 평상심(平常心)이 도(道)이다. 평상심이란 조작(造作)이 없고 시비(是非)가 없고 취사(取捨)가 없고 범성(凡聖)이 없고 단상(斷常)이 없다. 경에 말씀하시길 범부행(凡夫行)이 아니며 현성행(賢聖行)도 아닌 것이 보살행이라 하니라.
단지 지금과 같이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응기접물(應機接物)할 때 전체가 다 도(道)이다. 도(道)이대로가 법계(法界)이니 내지 항사사 같은 묘한 작용이 법계를 벗어나지 아니한다. 만약 그렇지 않을진대 어찌 이것을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 하며 무진등(無盡燈)이라 할 것인가 . 일체만법이 다 심법(心法)이요 모든 이름이 심명(心名)이니 만법이 마음을 따라서 일어난다. 마음이란 만법의 그놉ㄴ이다. 경에 말씀하셨다. 마음을 알아 본원(本源)에 통달하는 까닭에 사문(沙門)이라 한다.
도(道)란 평상심(平常心)을 말합니다.
평상심이 도이다(平常心卽道)고 하니까 평상심이란 일상 보통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므로 옷 입고 밥 먹고 성내고 좋아하는 마음 그대로의 활동이 도라고 쉽게 생각해 버립니다.
마조스님이 말씀하시는 평상심(平常心)이란 조작이 없고 시비도 없고 취사도 없고 범부와 성인과 단멸과 상주가 없는 마음이라고 했으니 , 이것은 곧 양변을 여윈 중도가 평상심이라는 말입니다. 생멸심을 가리켜 평상심이라고 한 것은 아닌 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行住坐臥), 기틀에 대응하고 물건을 접촉함(應機接物)이 모두 다 도라고 하는 것은 중생의 업식마역ㄴ(業識妄見)을 말하는 생멸심이 아니고 진여대용(眞如大用)을 말하는 것입니다. 흔히 마조스님이 말씀한 도란 생멸견해라고 잘못 오해하는 사람이 많이 있으나 그것은 양변을 여읜 중도(中道)를 도라고 한 마조스님의 뜻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도 이대로가 법계라 하였습니다. 법계란 연기를 말하는 것이고 연기는 중도입니다. 일체법이 마음법이라고 하는 이 마음이란 자성이라 해도 진여라 해도 뭐라 이름붙여도 괜찮은데 양변을 영읜 중도 즉 불성(佛性)입니다. 그래서 천태종에서 주장하는 한개의 색, 한개의 향이 중도아님이 없다.(一色一香非中道)는 것과 같은 말이며 진진찰찰(塵塵刹刹)이 중도 아님이 없다느 ㄴ것이니, 이 마음이라는 것이 중도불성에 입각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알아 본원에 도달한 사람, 즉 중도를 정등각한 사람이 사문의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즉 출가한 사람은 누구든지 평상심, 말하자면 양변을 여윈 중도를 깨쳐야지 이것을 깨치기 전에는 사문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응기접물(應機接物)이 모두 다 도(道)라 한다고 생멸의 변견으로 해석하면 그것은 자기의 망견이요 곡해지 마조스님과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규봉스님이 4종복기를 비판할 때도 생멸견해에서 마조스님을 공격하였던 것입니다. 그 뒤에 홍각범(洪覺範)스님이'규봉은 절대로 마조스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다'고 했고, 영원 청(靈源淸)스님도'규봉이 생멸 변견적인 해석을 한 망견이지 마조스님이 뜻은 모른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응기접물(應機接物)이 모두 다 도라 하는 것은 양변을 여윈 중도에 입각한 평상심의 진여대용이지 생멸망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능인(能仁)이니 지혜가 있고 기정(機情)을 잘 하여 능히 일체중생의 의심그물을 부수어서 유(有)무(無)등의 속박을 벗어나며 범.성(凡聖)의 망정이 다 없어져서 인(人)과 법(法)이 모두 공(空)하다. 최상 법륜을 굴리어 범위를 벗어나니 짓는 바가 걸림이 없어 사(事)와 이(理)가 함께 통달하니라. 하늘에 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이 홀연히 있다가 도리어 없어지며 종적이 없으니 비유하면 물에 글씨를 쓰는 것과 같다. 불생불멸은 대적멸(大寂滅)이니 속박 속에 있으면 여래장(如來藏)이라 이름하고 모든 속박을 벗어났을 때를 대법신(大法身)이라 한다.
법신(法身)은 다함이 없어서 체(體)는 증감이 없고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며 능히 모가 나고 능히 원만하여 사물에 응하여 형상을 나타내니 물속의 달과 같다. 도도히 운용하여 뿌리를 세우지 않아 유위(有爲)를 다하지 않고 무위(無爲)를 취하지 않는다. 유위(有爲)는 무위(無爲)집의 용(用)이고 무위는 유위집에 의지하나 의지하는 데 머물지 않는 까닭에 저 허공같이 의지하는 바가 없다고 한다.
능인(能仁)이란 석가(釋迦)를 의역한 것이고 기정(機情)을 잘한다고 함은 중생제도를 함에 있어서 부처님은 응기접물(應機接物)외 수단이 묘하여 능히 일체중생의 의심그물을 부수고 유.무에 묶인 변견을 벗어나게 합니다. 결국 중도를 가지고 일체중생을 제도한다는 말입니다. 유.무의 속박을 벗어나서 중도를 성취할 것 같으면 범성(凡聖)의 정(情)이 없어져서 법공(法空)아공(我空)이 됩니다. 진여대용의 무애자재한 법을 쓰게되면 쌍차쌍조해서 무장무애한 법계가 현전하게 되어 범주를 완전히 떠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사(事)와 이(理)가 서로 함께 통하여 이사무애 사사무애의 무장애법계가 됩니다. 이것이 불법의 진수입니다.
중생이든지 보살이든지 아직 대법(大法)을 성취하지 못한 때를 여래장(如來藏)이라 하는데 아직 유.무 양변을 해탈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속박을 벗어나 해탈을 성취한 것을 대범신(大法身)이라 합니다. 법신(法身)은 무궁하여 다함이 없고 체(體)는 증감이 없어서 대소(大小)가 완전히 원융자재하게 됩니다. 체에 증감이 없다 함은 양변을 여읜 쌍차(雙遮)를 말하는 것이고 능소능대(能小能大)란 쌍조(雙照)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 법신은 주처(住處)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위(有爲)를 다하지 않고 무위(無爲)에 주(住)하지 아니하며 유위를 버리지 않고 무위를 취하지 않습니다. 유위는 무위집의 작용이고 무위는 유위집에 의지합니다. 하지만 의지하는 데 머물지 않는 까닭에 저 허공같이 의지하는 바가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중도라는 것은 원융자재해서 머무는 곳이 없음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마음밖에 부처가 따로 없고 부처 밖에 다른 마음이 없다. 선(善)도 취하지 아니하고 악(惡)도 버리지 아니하여,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의 양변에 함께 의지하지 아니하여, 생각생각에 죄성이 공함을 얻어 볼려고 해도 얻어볼 수 없음을 통달한다. 자성(自性)이 없는 까닭에 삼계(三界)가 유심(唯心)이다. 삼라만상이 한 법의 인(印)이니라. 무릇 색을 보는 이것이 모두 마음을 보는 것이니. 마음은 스스로 마음이 아니요
색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있다. 너희가 때를 따라 말로써 설명하되 사(事)에 즉하고 이(理)에 즉하여 모두 조금도 막히는 바가 없으니 보리도과(菩提道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마음에서 나는 바를 색(色)이라 이름하고 색(色)이 공함을 아는 까닭에 생(生)이 즉 불생(不生)이다. (中略) 게송을 들어보아라.
심지법문을 때에 따라 설하니보리도 이와 마찬가지다.
사(事)와 이(理)가 다 거리낌이 없어생(生)이 즉 불생(不生)이니라.
마음밖에 부처가 따로 없고 부처 밖에 다른 마음이 없다는 것은 마음이 부처이고 부처가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취사(取捨)를 하게 되면 변견에 떨어지기 때문에 선악을 다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의 양변에 함께 의지하지 아니하여 죄의 본성이 공함을 통달하여 생각생각에 죄성이 공함을 얻어 볼려고 해도 얻어볼 수 없습니다.
왜 죄의 본성이 공함(罪性空)을 말하느냐하면 보통 자성청정(自性淸淨)을 말하면 알기 쉬운데 죄라 하면 다른 줄로 알고 있습니다. 자성청정이나 죄성청정이나 같은 의미입니다. 이것은 마(魔)와 불(佛)이 같다는 의미입니다. 중생이 모르고 변견으로 볼 때는 마군은 나쁘고 부처는 좋고 선은 좋은 것이고 죄는 나쁘다고 보지만 죄성이 본래 청정하여 공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성청정이나 죄성본공(罪性本空)이라는 것을 확철히 깨칠 것 같으면 이것이 부처이고 이것이 도(道)입니다.
자성이 공했기 때문에 삼계가 유심입니다. 삼계유심이란 자성청정심을 말하는 것인데 일체만법이 다 공하여 쌍차쌍조하며 진공(眞空)이 묘유(妙有)한 것인데 이것을 마음이라 하고 중도라 합니다. 앞에서 선도 취하지 않고 깨끗하고 더러움의 양변을 버린 것을 마음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삼라만상이 모두 쌍차쌍조해서 차조(遮照)가 동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삼라만상이 일법지소인(一法之所印)으로 중도와 자성청정 내놓고는 하나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일법(一法)이란 마음.법계.연기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결국 마군이라고 해도 괜찮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모든 것이 융통자재하기 때문에 무슨 마로 표현하든 흠이 되지 않습니다. 왜 흠이 되지 않냐하면 쌍차한 쌍조. 즉 원융자재한 곳에서 말하기 때문에 중생의 변견과는 틀리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색을 보는 이것이 모두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색 다르고 심(心)이 따로 없습니다. 색이 즉 심이고 심이 즉 색입니다. 색이 즉 공이고 공이 즉 색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원융무애합니다. 전부가 하나입니다.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입니다. 따라서 색이 즉 심이고, 심이 즉 색이며, 색이 즉 공이고, 중생이 즉 불이고 불이 즉 중생입니다.
그래서 색을 바로 보면 마음을 보는 것이고 중생을 바로 보면 부처를 보는 것입니다. 중생을 변견으로 보게되면 영원히 중생으로 되고 말지만 중도정견으로 중생을 바로 보게 되면 이것이 부처를 보는 것입니다. 마음은 스스로 마음이 아니요, 색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있습니다. 너희가 때를 따라 연설할 때 사(事)에 즉하고 이(理)에 즉하여 조금도 막힌 바가 없으니 우리의 대법(大法)도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막힌 데가 없이 무애해서 조금도 안 통하는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에서 나는 바를 색이라 이름하고 색은 공함을 아는 까닭에 생(生)은 불생(不生)입니다. 마음이 즉 색이고 색이 즉 마음입니다. 마음이 공한 동시에 색이 공했고 색이 공한 동시에 마음이 공했다는 말입니다. 색이 공했기 때문에 아무리 색이 생하고 마음이 생한다고 해도 생(生)을 내놓고 불생(不生)이 따로 없고 불생(不生)을 내놓고 생(生)이 따로 없습니다. 생과 불생이 언제든지 원융무애합니다. 생(生)이란 쌍조(雙照)를, 불생(不生)이란 쌍차(雙遮)를 말하는 것인데 언제든지 서로 통한 것으로 보아야지 서로서로 막힌 것으로 보면 불법(佛法)이 아닙니다. 게송으로 말하기를 양변을 여윈 중도에서 법을 설하면 사(事)와 이(理)에 걸림이 없다 하였습니다.
이제까지 마조스님의 어록을 살펴보았는데 이 설법의 중심사상도 양변을 여윈 중도의 입장에서 설한 것이지 원융무애한 중도를 떠나서는 한번도 설법을 한 일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禪)이라고 해도 불법 가운데 말하는 것이지 딴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설하는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아라한은 무엇인가
정각을 성취한 부처님이 사슴동산, 즉 녹야원이라는 곳에서 전에 함께 수행한 적이 있던 다섯 사람의 수행자에게 맨 처음 설법을 했다는 것은 소위 초전법륜 初轉法輪이라 하여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이후 다섯 사람은 부처님과 함께 생활함으로써 원시적인 교단의 형태를 이루게 되는데 , 이들은 차례 차례 모두가 정각을 얻게 됨으로써 부처님을 포함한 여섯 사람의 아라한이 생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전승을 통해서 보면, 애초에 아라한은 부처님과 같은 사람을 가리켰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아라한은 부처님의 칭호로써, 여래의 열 가지 이름중의 하나가 되어 있다. 나한 羅漢이라 약칭되기도 하는 아라한이라는 말의 의미는 존경할 가치가 있는 사람, 공양을 받기에 어울리는 사람(이런뜻에서 한자로는 應供이라 번역된다.), 존경할 만한 수행자, 수행을 완성한 사람 등으로 알려져 있다. 이 아라한은 신자들로부터 의식주 등의 공양을 받음으로써 그 자체가 신자들에게 보다 많은 공덕을 부여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에서 응공 應供이라 번역되는 아라한은 복전 福田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부파불교에 이르러서는 아라한이 부처님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지 않고 불제자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계위 階位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나중에 아라한은 소승의 수행을 완성한 사람을 가리키게 되어 , 부처와는 구별되기에 이르른 것이다. 즉 아라한은 소위 사향 四向과 사과 四果라는 8단계로 된 수행의 계위 중에서 최고의 계위가 된 것이다. 아라한과라 불리는 이 계위에 도달하면, 번뇌가 모두 사라지고 다시는 미혹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일이 없게 된다. 따라서 이제 아라한은 더이상 배우기나 닦을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니며, 이런 의미에서 무학 無學이라고도 불린다.
한편 이 무학의 아라한을 보다 현학적으로 연구하여, 6종 또는 7종의 아라한이 있다고 분류하기도 한다. 6종의 아라한이란 아라한이라는 계위를 얻더라도 후퇴해 버리고 마는 자(退法아라낳), 후퇴를 염려하여 스스로를 해침으로써 무여 無餘열반, 즉 육신을 멸해서 얻는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려 생각하는 자(思法아라한), 후퇴하지 않으려고 방호하는 자(護法아라한), 후퇴도 증진도 하지 않는 자(安住法아라한), 증진하여 속히 다음 단계에 이르려고 하는자 (諶違法아라한), 일단 아라한과를 얻으면 어떠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후퇴함이 없는 뛰어난 자(不動法아라한)이다.
여기서 앞의 다섯은 성격이 느리고 둔한 아라한이라 하며, 이들이 얻는 해탈에도, 때를 기다려 명상에 들어가 얻는 해탈과 아라한의 깨들음을 애호하여 얻는 해탈의 2종이 있다 한다. 맨 뒤의 아라한은 성격이 예리한 자로서 때를 기다리지 않고서 해탈한다. 이 마지막 아라한에는 감각기관을 단련하는 수행력에 의해 다섯째로부터 여섯째에 나아가는 아라한과, 그러한 수행력에 의하지 않고 본래의 탁월한 소양에 의해 여섯째에 이르는 쫑을 구분함으로써 총 7종의 아라한이 있게 된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아라한을 이런 식으로 복잡하게 규정하는 것을 무가치하다고 본다. 사실 이러한 아라한에 대해서는 , 아직 부처와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열심히 노력하여 수행자로서는 상당한 경지에 이른 자를 가리키는 이외의 특별한 의의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대승의 시각인 것같다. 대승에서는 성문, 연각(또는 독각).보살의 삼승 三乘이라는 구별을 강조하고, 보살승의 우위를 설했다. 특히<법화경>에서는 이 삼승은 모두가 부처라는 일승으로 유인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간주한다. 이것이 소위 일승 사상이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아라한 역시 부처의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임시의 한 단계가 되므로 아라한 그 자체가 배척되어야 할 대상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관념상 아라한이라는 인간상을 뭔가 저급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대승의 견지에서 생각할 때,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아라한에 대한 지나친 현학적 분석은 수행의 심리적 단계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수행의 심리적 단계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종교인으로서의 실천적 자세가 고려되어 있지 않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아라한이 바람직한 인간상으로는 경시된다면, 바로 그러한 점 때문일 것이다. 이는 결국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는 보살의 한 측면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절에는 무엇하러 다니는가
(성수스님)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모든게 달라지는 거여, 사람이 사람짓을 하면 사람이 되고, 사람이라도 소짓을 하면 소가 되는 거여, 원효대사도 말씀하시기를"소가 물을 먹으면 단 젖이 되고, 뱀이 물을 먹으면 독이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다 같은 땅에서 크는 식물도 고추는 맵고 수박은 달아, 고추 마음을 쓰기 때문에 독하고 매워지고, 수박 마음을 쓰기 때문에 수박은 시원하고 달아.
그러면 우리 사부대중은 어떠냐? 우리 사부대중도 부처의 마음을 스면 부처가 되는 거여, 어떻게 부처의 마음을 써야 되느냐 하면, 애기가 장판바닥에 똥을 탁 싸놨는데 똥 싼 자리를 들고서도 그 애기가 밉다는 생각은 그만두고 참는다는 생각도 없이, 어린애 궁둥이를 톡톡 두드리면서 볼때기를 싸감고 뽀뽀 꺼정하는 엄마의 마음 같은 생활이 바로 부처의 새끼가 되는 거여,
만약에 마음 가운데 조금이라도 불평이 있다든지 원망이 있다든지 하면 그건 부처 하고는 십만 팔천리여, 여러가지 배울려고 하지말고 내 자신이 자신을 짓밟지 말고 귀하게 생각해야 하는 거여,
하루 아직(아침)에 화를, 원망을, 불평을 세번만 하면 그날은 마음에 꾸정물이 까라앉지 않해, 머리도 아프고, 배도 아프고, 소화도 안되고, 아픈 데가 자꾸 생겨서 필경은 병원에 가야돼, 그 병을 만드는 놈은 누구냐?바로 나여! 자신이 자신의 병을 만들어서 의사한테 목을 매단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여, 어린애가 장판바닥에 똥 싼 그 자리를 든 엄마의 모습과 같이 원망, 불평이 뚝 끊어지면 거기에는 병마가 몸에 침범을 못해, 나는 말만 그러는게 아니고 이십오년 동안 병원에 안 갔어도, 칠십이 넘어도 요렇게 짱짱하고 분 안 발라도 반들반들 하잖어.
우리 부처님 마음을 가지고 살면 정말 내 좋고 남도 좋고 다 좋은 거여, 얼굴 찡그려 가지고 불평, 원망하며 찌_이하고 살아봐. 어느 누가 좋다고 하는고. 부처님 한테 가서 복은 태산같이 빌어 놓고 빈 복, 있는 복, 준 복도 관리를 못해, 진심(화내는 맘)을 한번 팍 내어뿔면 태산같이 빌어놓은 복도 하루 아직에 다 무너지는 거여, 있는 복이라도 자알 관리를 하고 보호잘해서 자알 가지고 써 보래이, 정말 사는 재미가 오도독 오도독 나는 거여,
모두 사는 거 보면 다 바보여, 바보짓 하고서도 부처님 앞에 가서 복 달라고 엎드려 사정하는 꼴을 보면 내가 부처라도 콱 쥐어박고 싶은 심정일 거여, 그러니까 내가 나를 소중하게 가질줄 알아서 이 몸을 청정하게 해야 하는 거여,
그래서 이 몸을 진여탑이라고 하는 거여. 이 진여탑을 잘 보호하고 가꾸지도 않으면 남의 돌탑, 목탑, 그런데 가서 꾸벅꾸벅 절을 해대는 사람은 참말 어리석은 사람이여.
정신은 산 부처여, 활불이여, 생각은 철학이고 이 몸은 물질과학이여, 몸뚱이만 다듬고 입히고 애껴주는 거 보면 장관이여, 그러면서도 성신은 쉬게 할 줄도 모르고 있는 줄도 몰라. 물질이 소중하냐 정신이 소중하냐 , 정신이 없으면 생각할 수 없고 생각지도 못하는 물건 , 이 팔, 다리는 암만 있어도 무용지물이야, 팔이나 다리가 떨어져도 이 몸뚱이는 살 수 있지만 정신은 5초만 없어도 송장 되는 거여. 이 내 정신이 내 한테 얼마만치 가치가 있는지, 소중한지, 이것도 모르면서 부처님께 와서 절을 꼬박꼬박 하는 걸 보면 우스운 거여.
사람은 자기의 가치를 스스로 찾고 살아야 되여, 신라 때 선덕여왕은 자기 관리를 참말 제대로 해 낸 여자였어요, 우리나라 여자들은 누구나 한번 쯤 선덕여왕 릉에 가서 "어떻게 해야 자기 분수에 맞게 자기 자리를 찾고 살 수 있습니까?"
하고 물어봐야 되여, 맨날 남자한테 찔찔 끌려가지고 허덕허덕 사는 여자는 여자 될 자격이 하나도 없어, 왜 자기 가치를 못 찾아 먹고 사느냐 이거여. 또 시집을 가서는 남편이 잘해 주느니 못해주느니 하면서, 원망, 불평하고 사는 꼴을 보면 그 또한 우스운 거여, 남자를 위해서 시집가는 게 아녀, 지가 여자니께 남자를 따라간거지, 여자 아니면 남자를 뭐하러 따라가겠어. 지를 위해서 시집을 갔으면 불평할 필요도 없고 원망할 필요도 없는 거여. 남자는 또 돈 몇냥 벌어와 놓고는"당신을 위해서 돈 벌어왔다"고 유세를 떨거든, 그것도 싱거운 짓이여. 지가 남자니까
여자가 필요해서 모셔다 놓고 끙끙 벌어다 먹이면서도 당신을 위해서 한다는 건 싱거운 사람이여, 둘 다 결혼 시작할 때부터 자기를 위해서 결혼한다는 생각을 갖고 하면 원망, 불평이 뚝 끊어지고 거기가 바로 극락이 되는 거여.
이처럼 자기 정신이 소중한 줄 알고 제대로 한번 살아 보래이. 제법 사는 법을 알고 턱 살면 죽을 때 죽을 줄 알고 척 죽는 거야, 불법(佛法)은 살 때 멋지게 살다가, 갈 때 아들딸 척 불러 놓고. 손 턱턱 흔들고 말야, 싱긋이 웃고 가는 생사자재법(生死自在法)이여.
부처님께서는 회향을 잘하셨기 때문에 삼천년을 존경받는다는 것을 잘 알고 절해야 하는거여, 이 세상 인류 가운데 죽을 때 부처님처럼 "내가 간다"하고 웃고 가신 분이 얼마나 되여. 생사 자재법을 제대로 아록 가신 어른이기 때문에 우리가 존경하는 거여.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절 하지도 안 할끼고 당신도 절 받을 자격이 없어.
그럼 우리는 절에 뭐 하러 가느냐. 안 늙고 안 아프고 안 죽는 걸 배우러 가는 거야, 그래서 절에 오면 이 어른한테 그걸 물어서 가르쳐주면 고맙다고 절을 해야 되는데. 이것도 저것도 안 가르쳐 주는데도 절을 꾸벅꾸벅 해대는거 보면 참 싱거운 사람들이여.
목적과 희망과 원하는 것이 있어서 절에 왔으면 반드시 물어보는 거여, 아는지 모르는지 맨날 그러면 다 소용없어. 우리 부처님은 확실히 모르고, 크게 모르는 것을 분명히 깨달으셨어. 안 늘고 안 죽는 것을 깨달으신 거여, 그걸 물으러 절에 간다는 개념만이라도 분명히 갖고 가르쳐 달라고 졸라
야 되여. 상주설법(常住說法)이야. 부처님은 그걸 가르쳐주고 싶어서 앉아 계신거여. 그 양반이 밥만 똑똑 따 먹는 양반이 아녀. 물으러 오는 사람이 없어 밤낮 가만히 앉아 계시니 그냥 심심한 거여.
가르쳐 달라고 사정사정하다 안되면 눈물로 사정하고 알고 싶은 심정이 간절하면 저절로 눈물이 나오는 거여. 애원하다 안되면 저절로 항의가 나와. "네 이몸, 부처야! 대자대비 어디다 팔아 먹었느냐?"고 벽력같이 항의하면 부처님이 입장 곤란해서 말없이 알려주고, 소리없이 들려주고, 그대로 보여주는 거여. 그래서'상주설법'이라 하는 거야. 그것을 배우겟다는 생각없이 절에 오는 사람들은 전부 헛걸음이여.
달마대사가 9년을 면벽(面壁)한 것은 9년을 수도한게 아니여. 이미 인도에서 인정받은 달마가 왜 앉아 있었느냐?사람을 기다린 거여. 당시 천하의 멋쟁이, 중국의 한량들이 다 와서 2년, 3년만에 다 떨어져 나갓는데 혜가대사 만은 9년동안 사정한 거야. 그랫더니 9년 만에 한마디 턱 일러주는 것이"일언지하 돈망생사(一言之下 頓忘生死)"여. 생사 밖의 도리를 잘 알라는 거야. 이 한마디 일러준 걸 가지고 '동토불교(凍土佛敎)를 살린거여.
불교는 이처럼 잘 안 일러주는데 매력이 있는 거야. 부처님이 절에 앉아서 알려 줄 사람을 기다리시는데 맨날 절만 꾸벅꾸벅 하면 무슨 소용이 잇나 한번 생각해 봐야 되여.
오늘부텀 여러분들도 집에 가서 스물네시간 가운데 오분 만이라도 내 정신을 뺏기지 말고, 놓치지 말고, 잃어버리지 않는 연습을 해야돼. 오분도 자기가 자기를 지배하지 못하면 부처님 앞에 합장할 자격이 없어 . 흐리멍텅한게 부처님법이 아녀. 가장 정확하고 가장 밝고 가장 현명한 것이 부처님 법이라. 절이 뭐하는 곳인지 자기가 뭐하러 가는지 이것도 모르고 간다는건 불교인이 아니여. 예전에 내가 조계사 주지할 때. 외국에서 신부나 수녀들이 오면 조계사 구경시키러 우리나라 신부들이 에려오거던 , 들어오라고 하면 안 들어 올라고 해. 그럼"이 집 문턱에 발 들여놨으면 집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하고 억지로 끌고 들어가서 차 한잔 대접하지. 그리고는 "종교인간의 장벽을 트자"고 제안해서 종교협의회를 만들기로 했어요.
종교협의회를 갖기 전에 신부. 목사. 수녀 오십여 명이 조계사 법당으로 내한테 그 이유를 물으러 왔어. 그런데 머리속엔 '우리가 물으러 오긴 왔지만 부처 자랑 되게 할거다'라는 생각을 칠십프로는 갖고 있더라고 . 저 칠십프로를 비워내야 내 말이 백프로 들어갈 것 같어.
그래서 내가 턱 나가서'내가 열아홉살에 중이 됐는데 내 부모보다 부처님이 너무 좋아서 중이 됐다. "고 했더니'저거 봐라. 부처 자랑 시작했다'고 생각하더라고.그렇게 삼십프로를 모아 백프로를 꽉 채워놓고는 "45년. 그렇게 좋아하며 믿고 살아온 45년을 오늘에 와서 가슴에 손을 얹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 부처한테 몽땅 속았다"고 했더니 그 사람들이 그냥 놀라 자빠지는 거야.
그래 나도 가만히 좀 안정하고 있다가"아담과 이브가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굳이 먹어서 천당과 지옥으로 떨어졌다고 했는데 선악과 먹기 전에는 거기가 어디냐?"하고 물었더니 아무 말도 못하고 땅에 탁 엎드리는 거야. 그래서"그거를 모르면 나처럼 속는 놈이 된다."고 내 속았다고 한 것까지 보태가지고 그들한테 폭 덮어 씌어버린거야. 그러니 꼼짝 못하고 당하는 거여.
종교인이라면'종(宗)'자가 뭔지 '교(敎)'자가 뭔지 잘 알고 믿어야지 . 그것도 모르면 바보 온달이여.원효대사의 그 좋은 '활구'법어는 어디다 팔아먹고, '제대보살 마하살 하사오
니'어짜고 저짜고 중국말만 할게 아니라 모르면 스님들께 물어가지고서라도 똑바로 믿어야 하는겨. 물에 물탄 것처럼 시브적시브적 살지말고 하나라도 똑똑히 묻고 배워서 믿어주기를 바라며 좀 알고 사는 불자가 되기를 부탁합니다.
부처되는 일등 수행의길
(서암스님)
사람들은 무엇이든 대체로 삼단계로 나누는 습관이 있습니다. 운동경기에서도 보면 1등 2등 3등을 선정해서 상을 주고 나머지는 다 등외가 되지요. 그렇듯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도 일등 생활하는 사람, 이등 생활하는 사람, 삼등 생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일생을 산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참으로 사는 이치를 알고 잘 사느냐 못 사느냐 경기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거든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이 다 잘살려고 하는 것이지, 이 사는 일 빼놓고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모두들 잘 살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지요
부처님 말씀도 무슨 별다른 법은 아닙니다. 우리가 눈을 뜨고 이 세상에 나왔는데, 무엇 때문에 왔으며 할 일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 문제 하나 뿐입니다. 그 길을 모르면 결국 사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니.\, 그야말로 사는 것이 아니요, 항상 죽는 구덩에 빠져 헤매이게 됩니다. 그 헤매이는 구덩이를 벗어나 잘 사는 길을 가는 부처님 법도 일등 법이 있고 이등 법이 있고 삼등 법이 있습니다.
상등 인물은 간단하게 한 마디에 깨달아서 나고 죽는 그 그물을 뛰쳐 나옵니다. 이런 사람이 일등이지요
그렇지 못하면 경(經)도 배우고 율(律)도 배우고 온갖 기도와 주력을 하는 등 자신을 갈고 닦으면 이등으로도 생사해탈, 그 경지에 참석이 됩니다. 물론 도달하고 보면 그 자리는 일등이나 마찬가지지요
또 그런 자리를 분명히는 모르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 즉 복을 닦는 것으로도 그 자리에 도달합니다. 절도 짓고, 시주도 하고, 절에 와서 나무도 하고 땅도 파고 일체 일을 하면 삼등으로 참석되거든요. 결국 모든 길이 그 궁극에는 일등이나 목표가 같습니다.
만약 일등법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이것을 한번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참선은 조용한 곳에만 있지는 않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조용한 곳에만 참선이 있는 것이 아니요. 그렇다고 시끄러운 곳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일용행사 행주좌와 온갖 행동하는 그 속에도 있지 않고 , 이리저리 따지는 사량분별에도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면 참선은 어느 곳에 있겠는지요. 이것을 알아내야 합니다.
꽃을 하나 가꾸고 곡식 한 톨을 키우는 데도 부단히 살펴야 합니다. 벌레가 침범하지 않는가. 가물지 않는가. 너무 습하지 않는가.....
이렇게 여러가지로 살피고 돌보지 않으면 훌륭한 꽃은 하나도 볼 수 없습니다. 곡식도 마찬가지로 살피지 않고는 제대로 되지 않지요.
만사가 다 그렇습니다. 더군다나 시시각각 자기 인생을 반성하고 살피지 않으면 저 생사해탈의 등급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요사는데 바빠서 시시각각으로는 반성 못한다 해도 적어도 취침에 이르러서는 내가 하루 종일 어떠한 생활을 했느냐 가만히 살펴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다만 살펴보기 위해서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내 정신 차리고 살기 위해서는 살펴보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펴서 허물이 있으면 참회해야 되고요. 허물이 있더라도 그것을 살펴서 반성하며 다시는 않겠다고 하는 데에서 진리에 들어가는 문이 열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 참회문을 중요하게 여기셨지요. 이것이 혹 내힘을 잘 안될 때에는 부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부처님의 가피로써 참회하는 길도 있습니다.
중생의 세상살이에 불법을 모르면 전부 허물 투성이지요. 한마디 말로도 상대방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자기 편견으로 남을 오해하는 등. 가만히 살펴보면 한없이 많이 허물을 짓고 있거든요. 그런것을 항상 자기 마음의 밝ㅇ느 빛으로 참회하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생사의 그물로 떠내려 가버립니다.
우리가 염불하고 부지런히 법문 듣는 이유도 참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 내 인생을 바로 찾자는 노력이거든요. 이것 없이는 도저히 안되지요
따라서 주력을 하든, 염불을 하든, 독경을 하든지 항상 열심히 참회 정진하는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등 수행법이라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그런 이치도 전혀 모르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지만 남이 장에 가니 나도 장에 가는 식으로 남이 좋다니까 따라서 절에 가는 식이지요. 아는 것도 없고 용기도 없지만 그래도 뭔가 부처님 법으로 문제를 풀 수 있을까 하여 부지런히 쫓아다니는 사람들이지요. 그렇게 해도 열심히만 하면 궁극에는 저 길에 들어갑니다.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더디지요.
사실 저 일등법으로 도달하는 생사해탈의 불법은 멀리서 찾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을 통해 항상 자기를 반성해서 부처님의 법에 어긋남이 없는가 하는 것을 비추어 보는 것에서 찾아집니다. 그렇게 비추어 보면 부지런히 염불하고 정진하면 자연히 마음이 한가해져 흔들림없이 살아집니다. 그러니 농사를 짓든지 장사를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 한 정신이 항상 빛나지요.
이것을 일러'목대천차(目對千差)나 심한일경(心閒一境)이라'합니다. 즉,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천가지 차별이 있어, 보기 좋은 것도 있고 보기 싫은 것도 있고 듣기 좋은 것, 듣기 싫은 것, 사랑하는 사람, 미운 사람등 몇 천 형형색색의 말할 수 없이 수많은 경계가 우리 앞에 닥치고 있거든요. 그러니'목대천차'지요. 그러나 이렇게 천가지 만가지 차별을 대하더라도'심한일경''마음은 항상 한가한 경계에 있다'는 이것이 무슨 뜻이냐. 자기를 살피고 관조하고 뉘우치고 참회하는 그 빛나는 자기의 본래면목을 살필수 있는 한가한 경계가 하나 있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참선 화두하는 사람은 화두로써 그 자리를 점령하고, 염불하는 사람은 염불하는 염불로써 점령하고, 주력하는 사람은 주력으로써 점령하고, 독경하는 사람은 독경으로써 그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요. 법당을 향해 합장하는 마음 하나만으로도 천가지 차별경계에 흔들리지 않고 요요하게 그 한 자리가 빛나는 것입니다.
인생살이가 참 눈코 뜰새 없이 바쁩니다. 그런데도 만사를 집어 던지고 절에 갈 때는 한 발자국씩 옮기는 그것이 부처님 세계에 한 발자국씩 다가서는 것이지, 누가 공연히 걸어가는 것이 아니지요. 거기에는 다만 기도하는 정신 그 하나뿐이지요.
항상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절을 향해 집을 나서면 그때부터는 바로 법당에서 정진하는 그런 정신을 잃어버리지 말아야겠습니다. 절에 간다고 하면서 온갖 생각에 뒤흔들리고 가다 오다 누가 싸움하면 참견하고, 놀고 춤추는 데 참여하고, 온갖 경계에 마음이 다끌리면 법당을 향해 오는 순수한 정신은 없다고 봐야 하거든요.
이렇게 항상 부처님 품 안에 있는 그 생각을 갖는 것이 일등 수행법의 태도요, 참선법이지 참선법이 따로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걸망 들고 거리를 헤매든지 법당에 앉아있든지 간에 두 경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웃을 수 있고, 내가 물 할 수 있어야지. 남이 울린다고 울고 남이 웃긴다고 웃고, 바람에 날리는 기폭 마냥 경계에 흔들리는 것은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남이 나를 살아주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고 있든지 항상 자기 중심을 잃어버리지 않고 정진하면 그것이 다 공부입니다. 그렇게 공부가 되고 보면 세계는 완전히 달라지지요. 한 마디로 꿈을 깨는 세계예요. 그야말로 목에 칼이 들어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런 세계를 획득하게 합니다.
화두를 하든 염불을 하든 항상 진실하게 하고, 배운 것을 진실하게 실행한다면 다 그러한 길, 생사를 초월하는 경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이 법을 모르면 천당 가고 지옥 가고, 소 되고 말 되고, 아들 되고 딸 되고, 귀신 되고 도깨비 되어 만나는 그야말로 등외(等外)의 인간이 헤매는 세계가 펼쳐지니 이것이 참말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원통한 줄 알았으면 이 몸 받았을 때 어떻게 하든지 이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만약 해결하지 않으면 다 헛사는 것이요.낙제생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는 부처님께서 간곡히 설하신 팔만사천 법문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불법이란 그야말로 우리 중생에게 주신 부처님의 영원한 선무이지요. 이 선물을 잘 받아 간직하고 이어나가는 것이 부처님의 제자요. 또 그 길밖에 우리가 사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참으로 원수도 적도 없이 개미 한 마리 풀 한 포기도 일체 중생을 불쌍히 여기고 감싸주시는 부처님의 대자대비가 아니고는 이러한 세계에 이르지 못합니다. 오직 부처님만이 이 세상에 적이 없고 절대 평등하며, 누구나 마음하나 깨치면 그 자리에서 꿈을 깨고 성불한다고 하십니다. 소 잡는 백정이 칼을 집어 던지니 그 자리에서 '즉신성불이라'했거든요.
그야말로 인과나 모든 것을 뛰어넘는 것이지요.
인생살이란 다 한바탕 꿈입니다.우리는 이 꿈을 깨야 합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 저 숱한 가르침이 모두 꿈 깨라는 것입니다.
꿈을 깨고 보면 어느 신이나 창조주가 나를 못살게 하고 잘살게 하고, 죄짓게 하고, 영리하게 하고, 바보스럽게 하고, 건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전부 자업자득으로 자신이 그런 꿈을 만들어 자신이 받는 것이지요.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인과법입니다.
꿈 깨는 방법-이것이 참선이고, 염불이고 주력이며 공부입니다.
물론 그런 것 저런 것 다 모르고 남이 장에 가니 나도 장에 가는 식으로 절에 가고 , 불공을 쌓아놓고 '복많이 주십사'고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그야말로 백원 갖다 놓고 천원 만원 기다리는 것으로 뭘 자꾸 욕심으로 요구하는 식이지요.
이런식드로도 열심히 하다보면 일등 이등은 아니지만 삼등으로 그 길에 도달할 수는 있습니다.그러나 시간이 늦지요.
이 인생이 그냥 한없이 사는 것이 아닌데 어찌 그리 더딘 길을 가겠습니까?
이렇게 불법인연 만난 공덕으로 기필코 다시는 삼계 고해에 휩쓸리지 않고 부처되는 일등 수행에 힘쓰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루일하지 않으면 하루.
(성철스님)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굶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말은 백장(百丈)스님에게서 연유된 것입니다. 백장 스님 때부터 선종(禪宗)스님들이 독립한 총림(叢林)이 생겼는데 대부분 깊은 산중에 있는 까닭에 생활이 곤란했습니다.
주로 대중(大衆:스님)들이 파전(播田)을 하고 나무를 해서 겨우 자작자급(自作自給)하며 살았으니 사실 총림에서는 낮에는 별로 정진할 시간이 없었고 주로 밤에만 공부했습니다. 주경야독식으로 낮으로는 일하고 밤으로는 정진하고 그랬는데 그런 때일수록 큰스님이 많이 났습니다. 예전 스님네 치고 그렇게 생활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까.
그럼 어째서 하루 일 안하면 하루 굶느냐?
백장 스님이 연로하여 아흔이 넘었는데도 대중이 일을 하면 언제든지 꼭 같이 하시거든, '운력(運力)목탁은 송장도 움직인다'는 말이 있어, 누구든지 나와서 일 안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이 말입니다.
대중이 보니 팔십도 아니고 구십이 넘은 노인이 대중과 같이 장(늘) 일을 하니 도저히 송구스러워 안되겠단 말입니다. 좀 그냥 계시라고 해도 꼭 같이 다니면서 일하시니 대중이 상의를 해서 그만 도구를 모두 감춰버렸습니다.
노장(老長)님 일 하시려고 연장을 찾으니 연장이 하나도 없거든. 괭이도 낫도 호미도 없단 말입니다. 그랬더니 아, 그날부터 굶으신단 말이예요.
"스님, 공양 잡수시지요"
"대중은 다 일했지만 나는 일 안했어. 뭣이 내가 도가 높고 덕이 높다고 가만히 앉아서 밥 먹겠어."
'일 안하면 굶는다'이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실제로 당신이 그렇게 실행을 했으니까.
이것이 우리 수도인(修道人)의 근본정신이며 승려의 근본생활입니다. 역대로 깊은 산중의 총림에서 밭갈고 나무해서 자급자족으로 살아 오면서'一日不作 一日不食'은 만고의 철칙이었습니다. 일 안하고 가만히 앉아서 공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 정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무수한 도인이 나온 것을 불교 역사가 증명하고 있고, 하루 일 안하면 하루 굶는다는 이 원칙을 벗어나서는 실제 도인도 없고 선지식(善知識)도 없고 참다운 승려도 없습니다.
이런 정신은 우리나라에도 많이 살아 있었어요. 젊었을 때 만공(滿空)큰스님을 모시고 있어봤는데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내가 처음 덕숭산 정혜사(定慧寺)에 와서 살 때는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었어. 움막도 얄궃게 지어놓고 심신있는 대중들이 모여서 동냥을 했어. 봄 되면 보리 동냥을 해서 절구에 넣고 쿵쿵 찧어서 밥을 해 먹거든. 순전히 꽁보리밥이야, 그래도 참으로 공부하는 재미로, 어떤 대는 그 시꺼먼 누룽지를 서로 먹겠다고 장난하던 것이 내 눈에 훤하네.
그렇게 살 때는 한 철 지나고 나면"나도 알았다. 내 말 한마디 들어보라!"며 공부 성취한 사람이 나온단 말이야. 누구누구 하는 사람들이 다 그때 보리방아 찧고 공부하던 사람들인데 그 후 절집안이 먹고 살기 넉넉해지니까 공부는 무슨 공부, 하나도 공부인은 안나더란 말이야."
장 하시던 말씀입니다. 병 중에 제일 큰 병이 무슨 병이냐하면 게으름병입니다. 사람이 편하면 죽는 줄 알아야 돼요. 누구든지 하루 일 안하면 하루 굶는다는 정신으로 공부하면 안될래야 공부 안될 수가 없습니다. 근본 정신상태부터 고쳐라 이것입니다. 썩은 씨에서 무슨 싹이 나겠어. 근본 정신상태가 썩어버리면 아무리해도 공부가 안된다 이발입니다.
한참 가야산을 국립공원 만든다고 할 때 도지사하는 정해식이라는 사람이 찾아왔어요.
"스님 , 여기를 국립공원으로 개발하면 돈이 많이 생깁니다.
그러면 해인사가 얼마나 좋겠습니까. "
하더군. 그래서 "이 사람이 돌았나 보아?승려는 돈 생기면 죽는게야! 우리는 가난하게 살아야만 참으로 도를 이룰 수 있어. 편하면 공부가 안돼. 당신 말하는 것 보니 이 해인사에 있는 승려까지 없애버릴 작정인것 같아." 해서 보내 버렸지.
예전에 수행으로 생각하고 동냥도 많이 다녔어요. 한 시간쯤 동냥을 하면 쌀 한말 반은 동냥을 했어. 그땐 인심이 좋아 동냥이 잘 됐거든. 요새는 어떤지 몰라(웃음). 동네를 돌아다니다 보면 참으로 찢어지게 못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딱 점翩 찍어 놓고 동냥을 다해가지고는 그 집을 찾아간단 말입니다.
"내 동냥한 것 당신네 잡수시오"하면 아무리 어려워도 스님이 동냥한 것 읜 받으려 해요. 그러니 거짓말을 하지요. "무거워서 지고 다니기가 힘들어서 그러니 당신네 집에 좀 맡겨놓고 갑시다. "그러면 얼른 그릇 주거든요. 모두 부어 놓고 나오면서"내가 안 오거든 그냥 잡수시오"하고는 줄행랑을 처버리곤 했어요. 한번은 청담하고 향곡하고 셋이서 뇰고 동냥을 나섰습니다. 절에는 하나도 안 가져오고 남 다 주기로 하고 동냥을 했는데 어떤 집에서는 쌀 한 말을 들고 나오는 집도 있쐴어요. 그러면 딱 한 종그래기만 받고 나오곤 했어요. 석달을 그렇게 돌아다니던 중에 한 찍러진 집을 만났는데 거적대기로 가려놓은 문을윳用〈 시커먼 솜뭉친지 돼지새끼 같은 것이 꼼지락 꼼지락 해. 아이들 셋만 남겨두고 부모는 다 일하러 갔대. 그래서 솥에다 얻어온 쌀음며 돈이며를 다 쏟아놓고 왔던 적도 있습니다.
남 주는 것이 보시이고 또 재(齋)라고 합니다.
헤월(慧月)스님이라는 참 무심도인(無心道人응 한 분 있었습니다. 안양암(安養庵)에 계실 때 큰 재가 하나 들었어요.
돈을 몇 십원이나 갖고 재 장보러 가는 도중 다리를 지나게 됐싱니다. 그 때가 마침 추운 겨울인데 거지들이 다리 밑에서 자고 일어나 아침 햇볕을 쬐이려고 올올 떨고 앉았거든요. 노장이 하는 식이에오. 우리도 봤어요.
"왜 이러고 있어?"
"추워서 안 그럽니까."
"아니 .옷도 없십시요"
"그래?그럼 그러지."
그만 재 장볼 돈을 싹 다 나누어 버렸단 말입니다. 거지들
옷 사입으라고 다 주어버리고 빈 지게로 돌아왔습니다.
온 일꾼이 그 얘길 해주니 신심있는 신도인지라.
"스님. 재 잘했습니다. "하고는 보시하는 그것이 를 가다가 추워 벌벌 떤느 사람이 있으면 당신 옷을 훌쩍 벗어 주고는 장삼바람으로 돌아다닌단 말입니다. 나이 많은 노인이 불알이 덜렁님 동생이 좀 부자야. 한번은 동생보고. "대구 감사(監司)가 자기 어머님이 돌아가셨는데 큰 재를 지낸다고 내 한테 편지를 했으니 자네가고 했어, 아무말 말고 준비나 하게. "준비가 끝나고 재를 다 마쳐도 아무도 안왔습니다. 할 수 없이 점심 공양으로 다 먹고 난 후에 노장윗한)사람들을 새벽 일찍 오라고 해서는 대문간에 딱 숨겨 놉니다. 동생이 아침 공양하러 방에 들어가면 동생방에서 열쇠를 가져와서는 스린"자네 , 쌀 뒤주 한번 가보게. 이 사람아, 자네 큰복 지었네 그려. "하십니다.
이것이 참으로 승려 정신입니다. 승려 정신! 지난번에 봉 광명이 방광(放光)을 한단 말입니다.
영서(榮西)라는, 일본에 처음으로 선(禪)을 전한 스님이 있었습니다. 한해는 큰 흉년이 들어 대중이 이제 며칠 동안은 밥을 먹게 되었다고 얘기하고 있는 판입니다. 밖에서" 큰 스님 계십니까?" 하거던. 그 아랫마을 사는 아주 가난한 사람 며칠 안 살겠나" 하고 대중 공양시키라는 비단을 그만 턱 내주어 버렸단 말입니다. 대중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굶어 죽지는 않을테니까. 그 만 그 금을 주어 버렸습니다.
"아이!스님 그건 부처님 개금할려고 한 것인데 그것을 주면 어쩝니까?"
"에잇! 고약한 놈. 부처님은 당신 몸뚱이도 모두 남을 위해 보시했는데 네 놈은 그 금을 뭐 어째!이놈, 그러고도 부처님 제자라 하겠느냐!"하며 호통을 치셨답니다. 일본 이야기 하나만 더하렜습니다. 영평 도원(永平 道元)선사라고 중국에서 조동종(曹洞宗)법을 받아 가지고 간 스님입니다. 호소도끼요리라는 사람이 그 스님을 청해서 몇 달을 모시고 있어보니 참 거룩합니다. 그런데 스님이 빈손이야. 아무것도 없거던. 그래.
"스님. 그 좋은 법을 펼려면 절도 있고 논도 있고 온갖 것이 있어야 안 됩니까?
허같으면 한 오천 마지기나 일만 마지기쯤 되는 땅 문서를 갖다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도원 스님이 빤히 쳐다보며"나를 그렇게 봤어?"하고 야단야단 하셨습니다.
도원 선사가 토굴로 돌아온 후. 그 밑에 있는 혜명(慧明)이란 스님이 호소 도끼요리를 보고 그 문서를 자기가 큰 스님께 전해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라고 논문서를 주었어요. ]
그것을 도원 선사에게 가져와서는 "스님, 이것으로 우리가 편하게 공부할 수 있지 않습니까?"했습니다.
"뭐야, 이놈이. 내가 안 받아올 때는 그것은 가져오면 안되는 것이니까 안 가져온 것인데. 네놈이 왜 가져왔어!"그리고는 대중공사를 했습니다.
"저놈 가사 베껴라(벗겨라). 장삼 베껴라. 몸둥이로 탕탕 두들겨 패서 내쫓아라. 그놈 앉았던 자리 널판지 뜯어 내고 땅 밑을 파내라. 논문서 가져왔다고!그런 더러운 놈 앉았던 자리 널판지 뜯어 내고 땅을 일곱자 파서 그 흙을 저 십리 밖에 내다 버려라. "
이것이 참으로 산 정신입니다. 그런 정신으로 생활하고 살아야 승려도 나고 도인도 난다 말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돈이 눈에 보이면 결국 가서는 그만 지옥입니다. 딴 것이 지옥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도 한 백년 전에 영산(影山)스님과 허주(虛舟)스님이라고 있었습니다. 영산 스님은 거지 대장이고 허주 스님이라는 이는 큰 강사면서 선객(禪客)이었는데, 둘 중에 누가 더 탈속(脫俗)했는가 볼려고 영산 스님 가는 앞에다가 큰 돈뭉치를 갖다 놓았습니다. 스님이 가다가 보니 뭐가 발에 턱 채이거던 , 그랬더니 보지도 않고 그냥 가버린다 말입니다. 또 허주 스님은 가다가 뭣이 턱 채이는데 보니 돈이거던요, 자꾸 보고 보고 하다 가버렸습니다. 뭣 할 것 같으면 보고 보고 하겠습니까. 남이 볼까 싶어 얼른 걸망에 집어 넣고는'다리야 날 살려라'하고 도망가 버리지.
거지 대장인 영산 스님은 어느 절에 큰 재가 들었다 하면 어간(御間, 절의 법당이나 큰 방의 한복판에 있는 칸)한복판에 서가지고 딱 갈라버립니다.
"이쪽은 내 것!"
그러면 그만입니다. 그래 놓으면 거지떼들이 와 몰려와서 한 쪽 것을 싹 가져가 버립니다. 그리고는"오늘 재 잘 지냈다"그럽니다.
이 영산 스님은 죽고 난 뒤에 영찬(影讚)을 현몽(現夢)했다고 합니다.
影是影山影 山是影山山
人影無二虛 都盧是影山
(그림자는 영산의 그림자요 산은 영산의 산이니
사람과 그림자 둘 아닌 곳에 영산이 뚜렷하구나. )
탈속한 것을 얘기하다 보니 이런 얘기를 한 것입니다. 승려는 근본적으로 돈을 독사(毒蛇)같이, 비상(砒霜)같이 믿고 가장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최고의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노력해서 법문도 보시하고, 물질도 보시하고 해야지 편할려고 하면 그만 도둑놈 패에 들어가 버리고 맙니다. 승려는 죽어 버리고 만다 이말입니다.
요새는 보면 너무 돈!돈! 한단 말입니다. 야단났어요. 이러다가 승려고 뭐고 불교가 없어져 버리지는 않을지 걱정입니다.
안을 다스려 밖을 대하다
o 할당 혜원스님
도를 배우는 인재라면 요켠대 우선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 그런 뒤에 자기를 바르게 하고 상대도 바로잡을 수 있다. 그 마음이 바르고 나면 만물이 안정되니 마음이 다스려졌느데도 몸가짐이 흐트러졌다는 자는 이제껏 보지 못하였다. 불조의 가르침은 안으로부터 밖으로 미치며 가까운 곳에서 먼 데로 이른다.
성색이 밖에서 현혹하면 사지가 병들고 허망한 감정이 안에서 발동하면 마음 속에 병이 든다. 마음이 바른데도 사물을 다스리지 못하거나, 몸가짐이 올바른데도 다른 사람 교화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는가. 이는 마음이 근본이 되고 만물이 지엽이기 때문이다. 뿌리가 튼튼하고 알차면 지엽이 풍성하고, 뿌리가 메마르면 지엽도 말라 죽는다. 훌륭하게 도를 배우느 자라면 먼저 안을 다스려 바깥을 대적하고, 바깥을 탐하느라 안을 해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만물을 인도하는 요점은 마음을 청정히 하는 데 있으며, 남을 바로잡는 것은 원래 자기부터 바로잡는 데 있다. 마음이 바로되어 자기가 바로 섰는데도 만물이 따라서 교화되지 않는 경우는 없다. (여안시랑서)
ㅇ 간당 행기스님
도를 배우는 것은 마치 나무를 심는 일과도 같다. 잎이 무서해야 베어서 땔감에 공급하고 좀 자란 뒤에야 찍어서 서까래를 만들며, 더 자라면 베어서 기둥을 만들고 완전히 켜져야 대들보가 되니, 이는 노력을 많이 들여야 그 쓸모도 커진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때문에 옛사람은 그 도가 견고하고 커서 좁지 않았고 지향하는 목적은 멀고 깊어서 지나치게 세속적이지 않았으며, 말은 고상하여 천박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침 때를 잘못 만나 추위와 주림으로 언덕이나 골짜기에서 죽었다 해도, 그가 남긴 가풍과 공덕은 백 천년토록 뻗쳐 뒷사람들이 본받고 전하였던 것이다.
가령 지난날 짧은 도로 구차하게 용납되고 가까운 목적으로 영합되기를 구하며, 비루한 말로 세력 있는 이를 섬겼더라면 그 이익은 자기만을 영화롭게 하는 데 그쳤을 뿐, 남은 은택이 훗세에 두루 미칠 수 있었겠는가. (여이시랑이서) 사람의 마음은 미혹이 없는 경우가 드문데. 이는 맹신에 가리우고 의심에 막히며, 가볍다고 소홀히 하고 애착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 치우치면 말만 듣고 사실을 생각하지 않으므로 드디어는 타당성을 잃는 말을 하게 된다. 의심이 심하면 사실이라 해도 그 말을 듣지 않고 드디어는 사실을 놓치고 듣는 경우가 있게 된다. 어떤 사람을 가볍게 보면 중요한 일까지 빠뜨리고, 그 일만 아끼다 보면 버려야 할 사람을 놔두게 된다. 이는 모두가 자기 생각을 구차하게 멋대로 하고 도리에 맞는지를 묻지않았기에, 드디어는 불조의 도를 망각하고 총림의 인심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통사람이 경솔하게 여기는 것을 성현은 소중하게 여긴다
. 옛 스님은 말하기를, "원대하게 계획하는 자는 우선 가까운 데서 시험하고, 큰 것을 힘쓰는 자는 반드시 은미한 데서 조심한다" 하셨다.
그러므로 널리 듣고 채택하여 중도를 살펴 운용함이 중요할지언정 실로 실정에 맞지 않는 고상함만을 흠모하고 특이함을 좋아하는 데에 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여오급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