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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죽음과 회갑잔치
미산성실 재가복지센터 요양보호사 박정혜
저는 결혼 전에 행려 정신병자 요양원에서 오랜 동안 생활 지도사로 근무한 경력이 있습니다.
그런 저에게 요양보호사 교육이라는 소식은 매우 마음이 끌리는 일이었습니다.
2008년 2월 4일부터 전국적으로 교육이 시작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부지런히 내가 교육받을 장소를 찾았으나 우리지역에서는 시작되는 교육원이 없었습니다.
이리 저리 묻고 물어서 2008년 1월 30일 서울에 있는 모 교육원 설명회에 참석을 하고 그 자리에서 수강 접수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보령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내가 사는 마을행 버스를 갈아타고 막 자리에 않으려는데 핸드폰이 울렸습니다.
남편이 손을 크게 다쳐서 천안의 대학병원으로 가야한다는 말을 듣고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겨우 한쪽 손으로 운전을 해서 봉고차를 몰고 나온 남편을 만났습니다.
서둘러서 남편을 태우고 천안단국대병원을 향했습니다.
수술과 치료로 꼭 한 달 동안 입원한 남편 수발드느라 개강 일을 놓쳐버렸습니다.
그러는 동안 보령에도 교육원이 개원을 하게 되어서 마침 잘되었습니다.
나는 경력자반에서 이론과 실습 160시간의 교육과정을 이수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일찌기 구종회 교수님을 만나 케어복지사로 충남 지부장이되어 함께 활동을 했었습니다.
구교수님께서 요양보호사 교육원에 오셔서 강의를 하시고 그런 인연으로하여 남편도 신규자 반에서 240시간의 교육을 받고 98년 8월말에 나란히 1급 자격을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14년간 농촌 목회사역속에서 지적장애 1급을 가진 부부를 전도하여 늘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마을 주민 대다수가 몸이 불편한 노인들 이어서 항상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실정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요양보호사 제도가 실시되고 전문성을 갖추어 도움을 드리면 정당한 수고의 댓가 가 돌아오게 되니 정말 반갑고 잘 된 일이라 생각되어 열심히 교육을 받았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재가 복지 센터와 노인 공동생활 가정을 운영할 계획으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차에 어느 재가 복지센터에서 1등급 와상 환자 한 분을 돌봐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가정을 방문해 보니 대중교통이 잘 연결 되지 않는 곳으로서 우리 교회에서 걸어서 산 하나를 넘어 1시간 10분 소요되는 외딴 곳이었습니다.
그 노인의 손녀딸이 한 동안 저희 교회 출석하다가 부산으로 전학을 간 학생의 할아버지여서 못한다고 거절할 수 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 노인을 돌보기로 작정하고 하루 4시간씩 한 주간 에 6일 동안 돌보게 되었습니다.
마침 오전10시에 산 을 넘어가는 버스가 있어서 갈 때는 버스를 타고 올 때는 한 시간씩 걸어다니면서 열심히 노인을 돌보았습니다.
그분의 상태는 12년 전 뇌졸증으로 쓰려져서 왼쪽이 마비되었고 전혀 거동을 못하셨는데 다행히 언어 장애는 없어서 의사소통은 불편이 없었습니다.
식사도 오른손은 사용할 수 있어 스스로 할 수 있으셨습니다.
연하기능도 정상이어서 음식을 삼키는데도 크게 불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오랜 지병에도 살 수 가 있었던것 같았습니다.
시골에서 할머니 혼자서 환자 수발하랴, 농삿일하랴 고생이 너무 심해서 한때는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입원 시킨적도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견디지못하시고 집으로 가기를 원하셔서 부천에있는 아들 집으로 옮겨 방문 요양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못마땅해하시며 할아버지께서 시골집으로 돌아오시기를 고집하여 결국은 저와의 만남도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수염이 너무 길어서 면도기로는 해결이 되질 않아 전기 이발기로 우선 밀고 나서 면도기로 면도해 드리고 나니 인물이 훤한 미남이셨습니다.
거울을 보여 드리며 잘 생기셨다고 칭찬을 해 드리니 비록 병든 몸이지만 얼굴 가득 환하게 웃음꽃을 피우셨습니다.
그리고는 나도 젊어서는 한가락 하셨다며 바람피우며 마누라 속 썩였던 얘기 등을 술술 풀어내시며 이미 마음은 옛날로 돌아가 얼굴에 생기가 돌았습니다.
목욕을 시켜드리고 손톱 발톱을 잘라 드리고 욕창이 있는 부위도 자주 체위 변경을 시키며 혈액 순환촉진을 위해 온몸을 손으로 문질러 맛사지 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은 버스에서 내려 노인의 집으로 오르는 언덕에 노랗게 핀 금잔화를 한웅큼 꺽어들고갔습니다.
유리컵에 꽂아서 노인이 눈만 뜨면 종일토록 지켜보는 TV위에 놓아드렸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직접 나가볼 수 없는 농촌의 가을 풍경을 이야기해 드렸습니다.
매일 매일 주어진 4시간이 그렇게 빨리 지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식사 수발 후에 틀니를 빼서 닦아 드리고 양치를 시키면 개운하다고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저 할망구는 무식해서 이런 것 한 번도 해 준적 없다고 하시며 귀가 어두워 잘 알아듣지 못하시는 할머니 때문에 속이 타 죽겠다며 마치 어린애가 응석부리듯 이런 저런 속내를 드러내셨습니다.
할머니가 기독교 신앙인 이었습니다.
건너 마을에 사시는 노인의 누님도 교회 권사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이 노인은 신앙젊어서부터 자기중심적 고집불통이셨다고 했습니다.
할머니를 세 번 씩이나 집에서 쫒아 내기도 하셨고 자녀들에게도 무섭고 독선적인 아버지였다고 고백하셨습니다.
대변을 닦아 내 드리고, 목욕을 시켜 드리고, 이렇게 정성껏 수발해 드리는 것이 제가 믿는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서 이렇게 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라도 할머니와 마음을 같이하여 믿음을 받아 드리시 라고 권면해 드리기도 했습니다.
할머니는 사모님이 이렇게 도와 주셔서 아무 걱정이 없다고 하시며 할아버지 수발드시는 동안 미루어 두었던 밭일을 하시느라 점심도 거르고 열심히 일을 하셨습니다.
정작 누워 계시는 환자보다 할머니의 건강이 걱정이 될 만큼 일에 지쳐 있어서 끼니를 거르지 않도록 챙겨 드리고 하다 보면 언제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가 의아할 지경이었습니다.
늘 더 많이 해 드리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산언덕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데구르르 알밤이 구르고 겨우살이 준비하러 나왔던 다람쥐가 내 발소리에 놀라 꼬리를 치켜세우고 달음질치곤 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노인을 돌보기 팔일 째 되던 날 주일을 지내고 이틀 만에 만난 노인의 상태가 다른 때와 확 달라보였습니다.
물수건으로 온몸을 닦고 귀저기를 갈고 그렇게 몸을 이리저리 뒤척여도 자꾸 잠이 드셨고 흔들어 깨우면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똑바로 눈을 뜨질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호흡도 거칠어지고 점점 혼수상태가 되는 듯 했습니다.
밭에 나가 계시는 할머니를 불러 들여서 마을 가까이 사시는 친척들께 연락 하시라고 했습니다.
부천에 있는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의 상태를 전하고 센터에도 보고를 드리며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켜 호흡에 도움을 드렸습니다.
할머니는 연신 눈물을 찍어내시면서 집에서 편안하게 운명하시도록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가까이 사시는 집안 친척 분들도 너무 오래 고생했으니 이제 이리 저리 병원에 끌고 돌아다닐 필요 없다는 생각들을 밝히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속히 아들과 다시 통화를 하고 집에서 운명하시기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일본에 계시는 큰 딸도 강원도, 부산, 각 곳에 있던 손자 손녀들도 다 연락하여 모이게 했습니다.
노인은 곧 운명 할 듯 맥박도 약해지도 가래도 끓고 호흡도 거칠고 그렇게 대기 상태에서 사흘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노인을 돌보면서 매일 요양보호 일지와 아울러서 일기를 썼던 것을 가족들에게 보여드렸습니다.
그 일기 속에는 노인이 아들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셨던 사연도 기록되었습니다.
멀리일본에서 생활하는 큰딸을 보고싶어하셨던 노인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가족들에 대해 저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들과 매일 매일 어떻게 요양보호를 진행했는지를 기록 해왔던 것이어서 아버지의 상태와 마음을 한 눈에 보여줄 수가 있었습니다.
인체 중에서 청각기능이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가족들 에게 혹시라도 그동안 잘 못한 것이 있으면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 마지막 가시는 길에 마음 편히 가실 수 있도록 도와 드리도록 권했습니다.
가족들은 순순히 말을 들어 생각나는 대로 노인의 귀에 대고 고백을 했습니다. “할아버지” 말 잘 안 듣고 고집 부리고 할아버지 속 썩여 드린 것 잘못했어요. 이제 할머니에게 잘할께요. 용서해주시고 편히 가세요. "손자 손녀들 아들 딸 차례로 고백했습니다. 특히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사모님에게 맡기고 밭 일 하느라 더 잘 돌봐 주지 못했던것, 그리고 오랜 병으로 속 썩여서 그동안 많이 미워 했던것 등등 생각 날 때마다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위로를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지금 쉽게 못 돌아가시는 것은 그동안 지었던 모든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서 이 땅 에서의 모든 허물을 다 씻고 깨끗한 영혼으로 천국에 가시려고 시간을 지체하고 계시는것 이라고 하니 온가족이 크게 마음에 위로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과 직장인인 손자 손녀는 돌아가고 자녀들만 남도록 하였습니다. 나흘째 되는 날 노인의 허리 밑으로 손을 밀어 넣어보니 척추가 가라앉아 손이 들어가질 않았습니다. 저는 운명의 시간이 가까웠으니 임종을 지키도록 자녀들에게 권하고 그날 그렇게 자녀들이 지켜 주는 가운데 너무나 편안한 모습으로 할아버님은 한 생을 마치셨습니다.
제가 결혼하기 전 직장에서 정신병자들과 생활하면서 5년 동안 58명의 임종을 경험 한 것이 지금 이렇게 담대하고 침착하게 가족들을 위로하며 도와 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라 생각되어집니다.
가족들의 간곡한 부탁에 남편 목사님의 집례로 기독교식으로 은혜롭게 장례를 치르게 되었고 가족들은 이러한 요양보호사 제도로 큰 도움과 위로를 받게 되었다며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나의 첫 번째 요양보호사의 업무가 큰 보람으로 나에겐 또 다른 경험의 재산이 쌓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교회가 센터를 열게 되어서 내가 다른 센터에서 받았던 대우를 생각하면서 상업적이고 영업적인 센터가 아니라 대상자 한분 한분을 부모님을 대하는 마음으로 돌보는 센터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요양보호사들의 사랑과 수고의 댓가가 흡족하게 보상되어 보람과 긍지로 일할 수 있는 센터로 운영되기를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충남 보령 미산이라는 산골 농촌마을이어서 전체인구 절반이상이 65세 이상 노인들이랍니다.
많은 노인들이 홀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고 요양 등급자는 아니라도 도움의 손길이 많이 필요하여 수시로 선생님들과 자원봉사를 합니다.
요즈음 내가 돌보고 있는 대상자는 정신지체장애 1급이며 요양등급 2급이신 김명옥 씨입니다.
2009년 2월26일은 그분의 회갑이었습니다.
자신의 생일인지도 모르는 지적장애인이며 칠년 전에 남편의 회갑잔치는 친정 동기간들이 그런 아내 데리고 살아 주는 것이 고마워서 식당을 빌려
마을 사람들도 초대하고 그럴싸한 잔치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친정식구들을 가까이오지도 못하게 하고 아무리 잔치를 준비해놓고 오라한들 친정에 가지도 않을 사람입니다.
그리고 요즘은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길어진 탓에 거의 환갑잔치 하는 것을 시골에서도 보기가 드문 것이 현실입니다.
날짜는 다가오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았습니다.
본인의 생일도 모르는 사람, 남편도 역시 날자를 계산 할 줄도 모르는 정신지체장애2급입니다.
친정식구들도 누가 마땅히 챙겨줄 사람이 없는데 어쩌면 내가 들추어 내지 말고 조용히 지나가길 은근히 바라는것 같았습니다.
아무런 말없이 지나면 이런저런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실정 이긴 했습니다.
어차피 아침저녁으로 가서 돌보고 있으니 생일날 아침에 집에 가서 미역국이나 끓여줄까도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회갑을 그냥 너머 가고 칠순까지 살아있기나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조촐하지만 잔치분위기를 만들어서 축하해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목욕을 씻기고 머리도 예쁘게 파마를 해 주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오랜만에 해준 파마가 맘에 들었는지 마을 정자 나무아래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 불러 세워놓고 “이거봐 나 이쁘지 우리 사모님이 해줬다” 자랑을 하느라 신이 났습니다.
김명옥씨 집은 좁아서 사진 찍어주기도 불편해서 장소를 우리 집으로 정했습니다.
풍선을 불어서 달고 사진이 예쁘게 나오도록 이리저리 장식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축 회갑 김 명옥 여사"라고 컴퓨터로 글자를 빼서 벽에 부쳤 습니다.
재가 서비스 시간을 조정하고 전날 저녁부터 음식장만을 했습니다.
도토리 가루와 올방개 묵 가루를 꺼내서 참깨를 솔솔 뿌려서 묵을 쑤었습니다. 밀고기로 동그랑땡도 굽고 당일 날 새벽기도를 마친 후 들깨 즙을 만들어 넣고 미역국을 끓이고 조기도 굽고 그럴싸한 회갑 잔치상이 차려졌습니다.
명옥씨 남편이 사 들고 온 생크림케잌 까지 올려 놓으니 부러울것이 없었습니다.
버릇처럼 아침 일곱시쯤이면 아침 식사를 하고 출근하듯이 집을나가 온종일 버스정류소나 농협 대기실 쇼파를 차지하고 하루를 보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쁘게 잔치상을 차리고 명옥씨 어린 시절부터 지켜본 이웃 할머니 와 친정 올케를 초대해서 축하객으로 모셨습니다.
우리집 문을 열고 들어서서 눈이 휘둥그래지며 목사님 생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주인공 자리로 부축해서 앉혀주니 손뼉을 치면서 “오늘이 내생일이여~~?”
하면서 정말 좋아서 어쩔줄 몰라 했습니다.
생일축하노래도 불러주고 이리 저리 사진도 찍어주니 마냥 행복해하며 신나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이리저리 열심히 사진을 찍어주시는 목사님!
사실은 목사님과 동갑이어서 몇 년 전만해도 목사님이랑 같이 환갑잔치 할 것이라고 목사님만 보면 손짖하며 말했었습니다.
생일 선물로 핸드폰 공 기계를 목에 걸어주니 입이 다물어지질 않습니다.
천연덕스럽게 폴더를 열고 자판 몇 개를 누르고 혼자 열심히 대화를 합니다.
“언니여 이 바보 오늘이 내 환갑이여~~ 응 이따 온다구 이거 내 핸드폰이여 사모님이가 선물줬어 “ 끝없이 혼자웃고 손짓해가며 핸드폰을 들고 마냥 행복해 합니다.
아무리 해도 요금도 안나오고 저렇게 좋아하는것을 왜 진즉 생각을 못했을까 요즘은 멀쩡한 핸드폰도 새로 바꿔서 왠만하면 집집마다 공기계가 있는데 좀더 새심한 관심으로 보살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 조금 덜자고 수고는 했지만 정말 잘했다싶고 그런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어린아이 같이 마냥 행복해하는 김명옥씨 그리고 너무 고마운데도 잘 표현 하지 못하는 그 남편의 마음이 읽혀지면서 내 마음은 너무나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나를 오히려 행복하게 해주고 부자의 마음으로 채워주는 고맙고 사랑스런 그 부부를 내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성심으로 돌봐 주리라 나를 향해 다시 한번 다짐을 했습니다.
이 시골마을로 와서 지난 14년 동안 아무런 댓가 없이 보살펴주고 했던 일이 이제는 노인 장기요양보험제도의 실시로 요양보호사라는 전문인의 자격이 되고 돌봐 드린 만큼 수입도 되니 가정 경제와 나의 노후대책에도 큰 도움이 되고 무었보다도 내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건강해야만 다른 사람을 돌볼 수 있기때문에 스스로 나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관리에도 게으르지 않게 돌아보며 보람으로 하루하루가 저물어갑니다.
보낸이
주소: 충남 보령시 미산면 내평리 321-2번지 미산성실 재가복지쎈터
전화: 041-933-1475. 010-2742-1475
첫댓글 수고하는모습이 눈에선하구나! 그런데 "올방개묵"과 "밀고기"가무엇인지? 매우궁금하구나!!친구~~~화 이 팅^-^~~~
올방개는 논에서식하는 덩이줄기풀이라고알고있는데 그줄기를 채취해서 말려서 가루낸것이라고해 그런데 너무 쫄깃하고 묵중에 가징 맛있는것같애 이덕인사모한테 선물받았던것 밀고기는 글루텐에다가 여러가지 견과루를 갈아넣어서 반죽해서만든 식물성고기 맛이 진짜고기같아.안식교에서 많이 사용하는것 정말 정성덩어리지!ㅎㅎㅎ
또궁금한것있어 핸드폰공기계느 무엇이야? 하루종일 이해가않가는것이야~알려줘!!
핸드폰 을 새로구입하면 쓰던기계가 등록이 해제된것을 공기계라고해 한국에는 집집마다 굴러다닌다고해도 과언이 아니야 성능과 디자인좋은 기계가 계속 새로 개발되어 쏱아지니까 멀쩡한걸 바꿔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