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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
부산 지명 문현(門峴) 어원 연구
1)이 근 열*
1. 들어가기
2. 문현의 지명 정보 분석
3. 문현의 지명 연원
4. 문현의 어원
5. 마무리
<국문초록>
본 논문은 부산 문현의 어원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었다. 연구 결과 ‘문현’은
‘모너메, 못너메, 문너머, 못넘을고개’ 등 다양한 지명으로 나타나지만 기저에
는 높은 산을 뜻하는 ‘mVrV’과 ‘고개’를 뜻하는 ‘너머’가 결합한 형태로 ‘산을
넘어가는 고개’가 그 어원이었다. 이 형태에서 모음 변화에 따라 ‘*물너머, *몰
너머’가 나타나고, 음운 탈락에 의해 ‘무너머, 모너머’로 나타나며, 어형의 유연
성을 상실한 ‘모, 무’가 음성적 유연성을 가진 어형인 ‘못’이나 ‘문’으로 대체되
어 ‘못[池]너머, 문[門]너머’로 나타난 경우이다. 또한 ‘못너머’는 ‘못[毋]’으로
이해한 언중에 의해 너무 험해 ‘못넘을고개’로 그 뜻이 바뀌게 된다.
* 주요어: 부산 지명, 문현, 못너머, 문너머, 못넘을고개
* 부산대학교 언어정보학과 강사(gonya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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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지명은 일반적 의미가 세분화․개별화되는 과정을 거쳐 점차 고유성을
획득하게 되어 특정지역을 구별하는 변별소로 기능을 한다. 지명이 고유성
을 확보하게 되는 근저에는 주로 언어 변화의 다양성과 해당 지역인들의
어원 의식에 따른 변화가 원인을 이룬다. 언어 변화의 다양성이란, 특정한
지명이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보편적 언어 변화의 규칙과 함께 해
당 지역의 음운 체계나 음운 현상의 특이성에 따른 변이를 의미한다. 어원
의식이란 해당 지명의 본래 어원에 대한 지역인의 정확한 의식을 의미하는
데, 이러한 어원의식이 없으면 원래의 지명은 의미적 유연성과 관계없이 음
성적 유연성에 의해 대응되는 다른 지명으로 바뀐다.
부산 남구에 있는 ‘모래구찌’도 일본식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부산의
자연마을에 의하면 “모래구찌[沙谷浦] 마을은 감만1동 285번지 일대에 있
었던 마을로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이 마을은 모래가 많은 바닷가에 입을
의미하는 ‘구찌[口]’라는 일본말이 첨가되어 만들어진 이름이다. 모래가 많
은 마을 입구란 뜻이 이렇게 마을 이름으로 변한 것이다”라고 소개하고 있
다.1) 여기서 ‘구찌’가 입[口]을 뜻하는 일본말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보고
‘모래가 많은 바닷가 마을의 입구’로 해석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우선, 이
마을은 일제 강점기를 기원으로 하는 마을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자연 마을이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마을의 이름은 토속어로 존재했을 것
이며 나중에 일본식 발음에 따라 변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이 지역은 지
형적으로 황령산 줄기가 바다 쪽으로 뻗어 있는 형상으로 만[灣]의 안쪽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또한 이 마을에는 모래의 흔적이 없다.2) 이 지명은 ‘모
래+구찌’로 분석될 수 있는데, 여기서 ‘구찌’는 ‘입구’의 뜻이 아니라 부산
1) 부산광역시, 부산의 자연마을 제1권 남구편, 2006, 218쪽.
2) 모래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모래’의 대응 한자인 ‘沙’는 잘못 분석된 지명이 된다.
이 지역에서는 ‘모래’는 ‘몰개, 몰기’ 등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ㄱ’의 흔적이 지명에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모래’의 어원은 지형적 특성으로 보아 ‘산’의 뜻인 ‘몰’의 변화형으
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은 천소영, 한국 지명어 연구, 이회, 2003, 115쪽에서 언급된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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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안리의 ‘늘구지[판관포]’처럼 산이 바다 쪽으로 튀어 나온 지형을 의미하
는 고유어 ‘곶’의 변화형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 지역 사람들이 ‘곶’에서 변화한 ‘고지, 구지’의 어원에 대한 유연
성이 부족해지자 고유어 ‘구지’를 음성적 유사성이 있는 일본어 ‘구찌’와 대
응하여 ‘입구’의 뜻으로 의미를 해석하여 원래의 형태와 전혀 다른 지명으
로 고정하게 된 것이다.
일반적 의미를 지닌 고지명을 어원적 유연성을 무시하고 대체한 한자 지
명은 원래 어원에 대한 불완전한 정보에 의거한 추론 과정에 의해 형성된
청각적 영상이거나 머릿속 사전의 대응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형성된
지명은 일반 사람들에게 대상이나 사물에 대한 객관적 정보나 지식에 의존
한 어원보다 더 강한 대응관계를 형성하여 후대에까지 전승되는 경우가 많
다. 왜곡된 어원 의식이 본래의 실상을 대체하며 해당 지역의 지명에 대한
개인과 집단의 반응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지역의 특정 지명의 경우, 앞선 연구자들이 왜곡된 어원 의식에 대한 논
리적 검토 없이 공식화하고 여기에 특정한 전설이나 유래가 보태어 지게
되면 더 강하게 고착이 되어 교정할 수 없게 된다.
부산 문현동의 문현(門峴)은 ‘지겟골고개’에서 기원한 지명으로 ‘문고개’라
고도 불린다는 것이 정설이다. ‘戶谷’으로 표기되는 ‘지겟골’은 ‘지게+골’로
분석이 되고, ‘지게’는 ‘외짝문’의 의미로 여기서 ‘문고개’가 연유하는 것으로
파악된다.3)
문현이 지겟골에서 기원한 것이 분명하다면 지겟골 골짜기에 있는 고개
란 의미로 ‘호곡현(戶谷峴)’이나 ‘호현(戶峴)’이 되지 않고 ‘문현(門峴)’으로
바뀐 것은 특이한 지명의 변이에 속한다. 왜냐하면 ‘지게’의 의미를 정확하
게 해석하여 ‘문’으로 지명을 고정하는 것은 고유어에 대한 정확한 어원의
식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문과 지게문을 구별하여 인식하
는 것도 어렵고, 외짝문과 두짝문의 지형적 차이를 인식하는 것은 더욱 어
3) ‘지게골’은 표기부터 잘못되었다. 원래 이 지역인들은 [지게골]로 발음하지 않고 [지게꼴]
로 발음하기 때문에 된소리를 반영하여 ‘지겟골’로 표기하는 것이 올바르다. 부산 지하철
역명부터 바꿔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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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운 일이다. 또한 고개의 형태가 문처럼 생겼다는 것도 지형적으로 납득하
기 어려운 일이다. 일반적으로 고개는 산의 안부(鞍部)에 있는데, 문처럼
생긴 지물이 존재하지 않는 한, 고개의 지형을 문의 형상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의문을 시작으로 잘못 알려진 문현(門峴)의 지명 어원
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 문현의 지명 정보 분석
‘문현’의 지명 어원과 관련된 문헌은 한글학회에서 간행한 한국지명총
람(1980), 최해군의 부산의 맥(1990), 부산시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부산지명총람 제3권(1997)이다. 먼저 한국지명총람을 살펴보자.
(1) ㄱ. 문현-동(문현동) [문너머, 문현, 문넘, 호곡] <동> 본래 동래
군 서하면의 지역으로서 문너머, 문넘 또는 문현, 호곡이라
하였는데, 고종 33년(1896) 지방 제도 개정에 의하여 북서부
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래군 서면
에 편입되었는데, 1936년 부산 부 구역 확장에 의하여 다시
부산부(시)에 편입되고, 1957년 1월 1일 법률 제407호에 의하
여 부산진구에 편입되었는데, 1959년 1월 21일 부산시 조례
제156호의 동제 개편에 의하여 문현동을 1,2동회로 가르고,
1975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 7816호에 의하여 다시 1,2,3동
회로 갈라서 남구에 편입됨.
ㄴ. 문-너머 <마을> → 문현동.
ㄷ. 문-넘 <마을> → 문현동.
ㄹ. 문-넘 <마을> → 문현동.
ㅁ. 문-현(문현) <마을> → 문현동.
ㅂ. 문현동-고개 [찌깻골고개] <고개>
→ 문현동에서 대연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ㅅ. 찌깻-골 <마을> 문현 제1동에 있는 마을.
문현동 고개 밑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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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찌깻골-고개 <고개> → 문현동 고개.
ㅈ. 호-곡(호곡) <마을> → 문현동.4)
(1)에 나타난 ‘문현’의 지명 정보를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문현’을 ‘문너머, 문현, 문넘’으로 불렀으며, 고개이름이 마을 이름
이란 점이다. 특히, ‘문현’이라는 고개 이름과 마을이름이 있지만 또 다른
‘찌깻골’이 존재한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는 ‘문현’이 ‘찌껫골’과 다른 지
명임을 알려주는 정보이다. ‘문현’이 ‘찌껫골’과 대응되지 않는다는 것은 문
현동 고개 밑 마을이라는 점과 ‘찌깻골’이란 고유어 지명이 ‘문너머’라는 고
유어 지명과 공존한다는 점이다. 같은 지명이라면 ‘찌껫골’과 ‘문너머’가 대
립하고, ‘호곡’과 ‘문현’이 대응하는 꼴로 나타나지 않는다. 즉, ‘찌껫골’은
‘호곡’과 부류칭이 ‘골(谷)’로 일치하고 ‘문너머’는 ‘문현’으로 부류칭이 ‘너매
(峴)’로 일치하기 때문에 ‘문현’과 ‘찌껫골’은 다른 지명으로 보아야 함을 알
수 있다.
둘째, (1ㄴ)의 ‘문너머’의 경우, ‘문+너머’로 분석이 되며, ‘너머’는 ‘고개’
를 의미하는 고유 부류칭임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너머’는 축약되어
‘넘’으로도 쓰여, ‘문넘’으로도 나타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문너머’가 ‘문현’으로 대응되어 나타나는데, 이는 속성을 칭하는
단어는 그대로 음차하여 ‘문(門)’으로 표기하고, ‘너머’는 훈차하여 ‘현(峴)’으
로 표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전히 ‘문’의 뜻이 모호함을 알 수 있다.
셋째, (1ㄱ)에 의하면 ‘문현’이라는 지명이 고종 33년(1896)에 북서부에
편입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문현’이 1896년에 처음 등장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문헌에 의한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사료에 의
하면 1896년에는 동래에 관한 기록이 없고, 동래 기록은 1895년에 간행
된 동래(東萊) -附事例이다. 이 읍지는 1894년 11월에서 이듬해 5월에
걸쳐 작성한 것으로 갑오경장 직후 지방 제도의 개편을 앞두고 그에 대한
기초 자료 조사의 일환으로 간행된 것으로 기재형식이 1871년의 읍지와 유
4) 한글학회, 한국지명총람 10권 부산․경남편, 1980, 151쪽(이하 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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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한 것이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동래 서면(西面)에는 부산리(釜山
里), 화촌리(華村里), 미남리(尾南里), 거인리(巨人里), 여고리(余古里), 거평
리(巨坪里), 대제리(大堤里), 양정리(楊亭里), 연지리(蓮池里), 범전리(凡田
里), 전포리(田浦里), 초읍리(草邑里), 문현리(門峴里), 만덕리(萬德里) 등
14개의 동리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5)
넷째, ‘지게골’로 알고 있던 지명이 ‘찌깻골’로 표기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는 ‘지게’과 ‘찌깨’의 유사성을 의심하게 하는 자료이다. 일반적으로 부산․
경남 지역에서는 초성을 된소리로 발음하는 경향이 높지만 등에 지는 ‘지게’
를 된소리 발음하여 ‘찌깨’로 발음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찌께’가 ‘지
게’의 어형에서 변화한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6)
다음으로 향토 사학자인 최해군의 부산의 맥이라는 지명 해설서를 살
펴보자.
(2) 문현고개 - 지금의 남구 문현동과 대연동을 넘나드는 고개를 문
현고개 또는 대연고개라고 한다. 황령산이 용호반도(또는 우암반
도)로 이어지는 능선에 난 고개다. 이 문현고개 서쪽 골짜기 일대
를 지난날에는 ‘지게골(戶谷)’이라 하고 그 지게골을 따라 고개 이
름을 ‘지게골고개’라 했다. 지게골의 ‘지게’는 ‘지게문’을 말하는데
그 지게문은 위 아래로 돌쩌귀가 달려 종이를 바른 외짝문이다.
마루나 밖에서 열고 방으로 들어가게 돼 있다. 이 고개를 지게골
고개라 한 것은 지금의 문현동로터리 부근은 양 쪽 산이 오목하
게 앞뒤를 둘러싸서 바다 바람을 막아주어 지게문을 열고 드는
방안같이 오붓하다고 지게골이라 하게 되고 이 고개가 그 지게문
의 구실을 한다고 지게골 고개가 된 것이다. 찌께골, 찌게골고개
라고도 불려졌으나 그것은 ‘지게골’, ‘지게골고개’의 소리가 되게
나서의 일이다. 문현동이란 동명은 지게문(門) 고개(峴)에서 나왔
지만 1910년의 서하면에 소속된 동명으로 처음 나오는 것으로 보
아 문현동이란 이름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것으로 본다. 문현동
5) 김동철 외, 東萊史料 제2권, 려강출판사, 1989, 184쪽을 참고할 것.
6) 경남방언의 된소리되기의 일반적인 특징은 이근열, 경남방언의 음운론, 세종출판사,
1997, 136~146쪽을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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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동명이 되고난 뒤 고개 이름이 문현고개가 되었다. 이 고개
는 지금도 보는 바와 같이 양쪽이 반석을 깎은 절벽으로 돼 있다.
그 반석을 깨기 이전은 가파른 고개로 해운대지구의 교통이 원활
하지 못하다가 1965년 2년간의 착평공사 끝에 지금처럼 30M 폭
의 도로로 낮아져 남구와 해운대구의 발전을 크게 보게 되었다.7)
(2)의 지명 정보를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문현고개’가 바로 ‘지겟골’ 위의 고개라는 점이 확인된다. 그러나
문제는 ‘지겟골’과 ‘문현고개’와 대응되지 못한다는 점이 문제이다. 즉, ‘지겟
골’ 위의 고개가 된다면 ‘지겟골고개’가 되어야 하고, ‘문현’으로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겟골과 문현은 다른 어원에서 출발한 지명이 될
수 있다.
둘째, 문현을 ‘찌께골’, ‘찌게골고개’라고도 불렸으나 이것은 ‘지게골’, ‘지
게골고개’의 소리가 되게 나서의 일이라고 지적한 점이다. 만약에 ‘지겟골’
이란 지명이 있었다면 1980년에 간행된 한국지명총람에서는 ‘지게골’이
나타나야 했으며, ‘찌께’가 ‘찌게’로 음운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은 없다. 왜
냐하면, 된소리가 예삿소리로 바뀌는 음운 현상보다 예삿소리가 된소리로
바뀌는 된소리되기 현상이 일반적이고, ‘찌께’에서 ‘찌게’로 변화할 경우, 음
식의 ‘찌개’와 의미적인 혼동이 일어나기에 언중이 의식적으로 구별하려는
노력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찌께’가 ‘지게’로 변화할 가
능성은 어원의식의 부재에 따른 유사어형으로의 대체 가능성에 의한 것이
다. 즉, ‘찌께골, 찌게골’을 ‘지게’와 대응하여 ‘지게골’로 고정시켜 나타난
지명일 가능성이 있다.
셋째, ‘지겟골’의 어원이 처음 언급된다는 점이다. ‘지겟골’이 ‘양 쪽 산이
오목하게 앞뒤를 둘러싸서 바다 바람을 막아주어 지게문을 열고 드는 방안
같이 오붓하다’는 뜻에서 비롯되었고 ‘뒤의 고개가 그 지게문의 구실을 한
다고 지게골고개’라는 설명이 그것이다. 이 설명대로라면 바닷바람을 막아
주는 고개가 지게문의 역할을 하고 그 안쪽에 있는 골짜기가 지게문 안의
7) 최해군, 부산의 맥, 지평, 1990,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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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늑한 골짜기로 본 것인데, 고개가 지게문의 역할을 하면 고개 안쪽의 마
을을 ‘지겟골’이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지게문이 입구의 역할
을 해야 하므로 골짜기의 뒤가 고개로 이루어져 있고 양쪽이 오목하게 파
인 형태로 입구는 열린 꼴이 되어야 하는데, 왜 열린 문 안쪽에 있는 마을
을 ‘지겟골’이라 하는지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이 지역사람
들이 ‘찝게꼴, 찍게꼴’이나 ‘찌께꼴’ 등으로 이름하는 것이 이러한 지형적 특
성을 반영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즉, 입구가 좁고 양쪽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으며 안쪽이 넓고 아늑한 분위기를 나타낼 수 있는 모양이 ‘집게’ 모
양과 유사하다. 이곳을 잘 아는 지역인들도 지겟골이 집게 모양이라고 확인
한 바가 있다.8)
넷째, ‘문현동’이란 동명의 기원을 ‘지게문(門)고개(峴)’에서 나왔다고 보는
는 점이다. 지게문이라면 호(戶) 고개(峴)로 대응해야 타당하지 문(門)으로
대응하는 것은 불합리한 대응이다. 또한 ‘1910년의 서하면에 소속된 동명으
로 처음 나오는 것으로 보아 문현동이란 이름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것으
로 본다. 문현동이란 동명이 되고난 뒤 고개 이름이 문현 고개가 되었다.’
는 것인데, 이는 역사적 사료의 고증이 잘못된 것으로 정확한 고증이 필요
하다. 특히, ‘문현동’이라는 동명이 되고 난 뒤 고개이름이 ‘문현’이 되었다
는 말은 잘못된 추론이다. 이는 문현이라는 지명 뒤에 고개가 덧붙여 쓰였
다는 이유로 추론된 것이라 생각되는데, 문현은 ‘문고개’이고 ‘고개’가 덧붙
는 것은 지명의 일반적인 특성과 유사하다. 고개의 부류칭으로 붙인 ‘현
(峴)’이나 ‘치(峙)’는 고개의 속성이 잘 드러나지 않으므로 이를 뚜렷이 하기
위해 ‘-현고개, -치고개’로 붙여 이름한다. 즉, 부산의 서구의 ‘대치’는 큰
고개를 의미하는데, ‘대치고개, 대티고개’ 등으로 고개를 붙여 부류칭을 뚜
렷이 하는 특성이 있다. 그러므로 문현동은 ‘문현’이라는 고개가 있는 동으
로 보아야 하며, ‘문현동’이라는 명칭 때문에 ‘문현고개’가 생겼다는 말은 오
류이다.
8) 이 지역을 토박이로 하는 김봉모 님(1944년생, 부산시 전포동 출생, 현재 부산 동래구 온
천동 럭키아파트 9동 903호 거주)의 도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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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부산지명총람 3권을 살펴보자.
(3) 문현 마을, 문현동
ㄱ. 문현마을: 문현1동에서 있던 마을이다. 문현(門峴)이란 지명 유래
에는 다음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다음과 같다. 문현동에서
대연동으로 넘어갈 때 그곳 지형은 고개가 높고 산이 양쪽으로
겹쳐 있어 마치 집밖에서 지게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가는 형세
라고 한다. 즉, 이곳의 산 모습이 지게문처럼 가리워져 있어 이
골짜기를 지게골(戶谷), 고개를 지게고개, 찌께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지게문고개를 한자로 적은 것이 문현(門峴)이라는 것이
다. 다른 하나는 문고개의 위치가 위의 내용과 다르다. 문현 안동
네 즉, 성동초등학교 동쪽의 문현1동 쪽의 상당히 높은 고개가
있었는데, 이 고개를 문고개라 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약 200
년 전에 문안동네에 영산(靈山) 신(辛)씨가 맨 먼저 들어와 살면
서 마을이 생기고, 그 후 문밖 동네에 몇 집이 생기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문안․문밖의 두 마을에 사람이 왕래할 때에는 이
고개가 문의 구실을 하였기 때문에 문고개(門峴)이란 명칭이 생
겼다 한다. 그러므로 문현마을은 문현 안동네에 영산 신씨가 들
어와 살면서부터 생긴 마을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1904년에 간
행된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에 의하면, 서하면 관내에 문현리
가 있는데, 당시의 호수는 21호이고 김․이․정(丁) 등의 성씨가
많이 살고 있었다. 21호 가운데 신(辛)씨는 2호 뿐이었다.9)
ㄴ. 문현동 연혁: 문현동의 옛 이름은 찌께골이라고 한다. 찌께골은
지게골(戶谷)에서 온 말로서 지게는 마루나 바깥에서 방으로 드
나드는 곳에 문종이로 안밖을 두껍게 싸서 바른 외짝문이라는 뜻
이다. 이 일대의 지형은 양쪽에 산에 의해 에워싸여 마치 집안의
방으로 들어가는 문(門)과 같기 때문에 옛날부터 찌께골로 불리
워왔다.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인가는 적었고, 찌게골 고개
밑의 좌우에 초가(草家)만 드문드문 있었다고 한다. 문현동은 동
래부지나 동래부읍지에는 동리명이 보이지 않으나 1904년에
간행된 경상도동래군 가호안과 일제 때에 편찬된 동래군지(東
9) 부산시사편찬위원회, 부산지명총람 제3권 남구․해운대구편, 1997, 56~57쪽(이하 부
산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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萊郡誌)에 비로소 서하면 문현리, 서면 문현리란 동면이 나온다.
이는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후 순수 우리말 지명을 한문식으로
바꾸면서 지게는 문(門)으로, 고개는 현(峴)으로 바꾼 것이다. 해
운대로 통하는 찌께골 고개, 즉, 문현 고개는 상당히 높은 고개
였기 때문에 해운대로 가는 길이 상당히 불편하였다. 1965년 부
산시에서는 지역개발의 일환으로 이 고개를 착평(鑿平)하여 오늘
날과 같이 완만한 고개를 만들었다. 한편, 문현과 관련하여 이와
는 다른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오고 있다. 문고개(門峴)라 함은 문
현안동네 즉, 성동초등학교의 동편의 문현1동 쪽에 상당히 높은
고개가 있었는데, 이를 문고개라 했다는 것이다. 문고개의 유래
는 조선 후기 문안동네에 영산신씨가 먼저 들어와 살았고, 그 후
문밖동네에 몇 집이 생기게 되어 이 두 마을에 사람이 왕래할 때
에는 이 고개가 문의 구실을 하였기 때문에 문고랑 명칭이 붙었
다 한다.10)
(3)의 지명 정보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문고개의 위치에 대한 혼란이다. (3ㄱ,ㄴ)의 정보를 분석하면, 문
현1동에 있던 마을이 ‘문현’이고 이것이 ‘지겟골’이며, ‘찌게골고개’라는 점과
문현 안동네 즉, 성동초등학교 동쪽인 문현1동 쪽의 높은 고개를 ‘문고개’라
는 두 개의 고개가 나타난다. 즉, ‘찌게골고개’가 ‘문고개’와 동일한 고개가
아니란 말이 된다. 특히 ‘문고개’의 어원이 문현 안동네와 바깥 동네의 출입
문 역할을 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 정보가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문
고개’는 ‘지게골고개’와 다른 의미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한글학
회의 한국지명총람자료에 의하면, ‘찌께골’이 대연동에 있는 것으로도 나
타나는데, 이는 ‘찌께골’의 위치가 문현동보다 대연동쪽에 치우쳐 있음을 암
시하는 것으로 보인다.11) 이러한 점은 다음의 부산의 자연마을에서도 동
일하게 제시되어 있다.
10) 부산지총 3권, 48~49쪽.
11) 지총 10권, 5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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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지겟골마을: 지겟골[門峴] 마을은 남구 문현3동에 있는 마을이다.
지금 문현 교차로에서 대연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골짜기 잔등
일대를 옛날에는 지게골[戶谷]이라 하였고 그 고개를 지게골 고
개라 불렀다. 먼저 지게골이란 이곳이 골짜기 위쪽 산이 양쪽으
로 겹쳐 있어 그 모습이 마치 집 밖에서 지게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데서 비롯된다. 즉, 이곳에서 바라보는 산
의 형태가 지게문처럼 가려져 있다고 해서 이 골짜기를 지게골이
라 부르게 되었고, 이 고개를 지게고개 또는 찌께고개라 불렀다
고 한다. 이 지게문고개를 한자로 적은 것이 문현(門峴), 즉 지금
의 지명 ‘문현동’이다. 한편, 다음과 같은 다른 설도 있다. 문현
안동네 즉 성동초등학교 동쪽의 문현1동 쪽에 상당히 높은 고개
가 있었는데, 이 고개를 문고개라 했다는 것이다. 이 설은 지금부
터 약 200년 전에 문안동네에 영산 신씨(靈山辛氏)가 들어와 살
면서부터 생긴 마을이라고 한다. 1904년에 간행된 경상남도동래
군가호안에 의하면, 서하면 관내에 문현리가 있는데, 당시 호수
는 21호이고 김․이․정 등 성씨가 많이 살고 있었다. 21호 가운
데 辛씨는 2호뿐이었다. 어쨌든 辛씨가 제일 먼저 이곳에 들어와
살게 되었고 그후 다른 성씨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되면서 ‘이 고
개가 문안과 밖을 구분하는 구실을 하였다’고 하여 문고개라 불리
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요즘은 지겟골이라 하면 문현3동의 문현
교차로 부근과 옛 길을 따라 문현고개까지를 말한다.12)
(4)에서 ‘문고개’가 두 마을을 이어주는 문과 같은 역할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어원해석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고개가 두 마을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문과 같은 역할로 보는 것은 발음에 이끌린
오류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고개가 두 개의 산의 안부에 위치할 경우
양쪽의 산이 문처럼 인식될 수는 있어도 문안과 문밖을 연결하는 구실을
하는 고개가 문으로 인식될 수 없는 것이다. 이 경우, ‘목’으로 인식될 가능
성은 있다.
둘째, ‘문현’이라는 지명이 문헌에 등장하기 시기의 문제이다. (3ㄴ)에서
12) 부산광역시, 부산의 자연마을 제1권 남구편, 2006, 238~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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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지나 동래부읍지에는 동리명이 보이지 않으나 1904년에 간행한
경상도동래군 가호안과 일제 때에 편찬된 동래군지(東萊郡誌)에 비로소
서하면 문현리, 서면 문현리란 동명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문현’이라는 지
명은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후 순수 우리말 지명을 한문식으로 바꾸면서
‘지게’는 ‘문(門)’으로, ‘고개’는 ‘현(峴)’으로 바꾼 것으로 보고 있다. 즉, ‘문
현’을 일본식 지명으로 보는 것이다. 만약 ‘문현’의 지명 연원이 이보다 오래
된 것이라면 일본식 지명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는 따로 고증될 점이다.
셋째, ‘문고개’에 대한 지형 정보이다. 문고개가 지형적으로 ‘상당히 높은’
고개란 점이다. 다른 제보자들에 의하면 이 ‘문고개’를 ‘못너메고개, 못넘을
고개’라고도 불렀는데, 그 이유는 고개가 높아 화적떼가 많이 나타나서 넘
기에 힘든 고개라는 뜻으로 붙여 부르기도 했다고 전하기도 한다는 점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13)
위의 논의를 종합해 보면, ‘지겟골고개’와 ‘문현’은 다른 곳에 위치한 지명
으로 ‘문현’이 ‘지겟골고개’와 대응되는 지명이 아니며, 원래 ‘찌께골, 찍께
골, 찝께골’ 등으로 불리던 지명이 어원의식이 약해지자 유사한 어감의 ‘지
게’로 대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찌께’에서 바뀐 ‘지게’가 보통은 지는 ‘지
게’로 인식하게 되지만 향토사학자의 지나친 어원 의식으로 인해 ‘지게’의
의미를 ‘문고개’의 ‘문[門]’의 의미와 관련지어 ‘지게문’으로 고정하게 된 것
이다. ‘찌께골’의 ‘찌께’는 부산 지방에서 첫 음절을 강하게 발음하게 되는
습성에 따라 발음하면 [찍께]로 나타날 수 있고, 이 형태는 음운 동화를 통
해 [찝께]로 변화할 수 있다. 지역인들이 증언한 골짜기의 형태가 ‘집게’와
유사함을 생각해 볼 때, ‘찌께골’은 넓고 아늑한 집게 모양의 골짜기에서 연
유한 지명으로 해석해야 타당하다.
결국, ‘높은 산을 넘어 가는 고개’의 지형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문고개’
는 ‘찌께골고개’와는 다르게 그 어원이 확인되어야 한다.
13) 이 지역 토박이인 이상일 님(1940년 생)의 도움을 받았다.
부산 지명 문현(門峴) 어원 연구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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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문현의 지명 연원
위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문현’의 지명 유래에 대한 정보는 각기 다양하다.
이미 알려진 정보 중에는 서지학적 자료가 잘못된 것도 있고, 정확하게 확
인하지 않은 것도 있다.
(5) 문현동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들어와 마을을 이루며 살게 되었는
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지만 1894년에 발행된 동래
부지(東來府誌)에서 동래부 서면(西面) 문현리 명칭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1890년경부터 마을이 형성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904년에 간행된 경상도 동래군 가호안과 일제시대 편찬된 동래군지(東來郡誌)에서 ‘하면 문현리’, ‘서면 문현리’란 동리
명을 찾아 볼 수 있으며, 1907년 동래부 서하면에 소속되었다가
한일합방 후 1919년 1월 4일에 동래군 서면으로 통합되었고,
1936년 4월 1일 ‘부산부 부산진출장소’에 소속된 이후 1946년 10
월 1일 ‘문현리’를 ‘문현동’으로 개칭하였다가, 1957년 1월1일부로
‘부산진구’에 편입되었고, 그 뒤 인구증가에 따라 문현리가 1962
년 1월 1일에 문현1,2동으로 분동이 되었으며, 1975년 남구가 신
설되면서 1월 1일에 ‘남구’로 편입되었다. - 남구청 지명유래.14)
문현 지명의 연원을 알기 위해서는 여러 동래 사료를 참고할 필요가 있
다. 동래에 관한 사료 중에서 동래부지(東萊府誌)는 1740년(영조 16년)
동래부사 박사창(朴師昌)이 편찬한 책이다. 이 자료는 국가 주도하에 이루
어진 것이 아니라 당시의 동래부사가 직접 관할 지역을 방문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이것을 독자적으로 편찬하였기 때문에 기재 사항이 풍부하고 항
목도 다른 읍지에 비해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에 따르면 18세기 중엽 당
시 동래는 읍내면, 동면, 남촌, 동평면, 사천면, 서면, 북면 등 7개의 면과
98개 동리가 있었다. 그러나 ‘문현’이라는 지명은 나타나지 않는다.15)
14) http://tour.bsnamgu.go.kr/cultural/06_history (검색일: 2010년 7월 10일)
15)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邑內面에는 東部지역으로 狐峴里, 忠烈祠里, 安樂里, 廉倉洞, 舊
鄕校洞, 蛤旨洞, 驛洞, 林山洞, 堂下洞, 池洞, 水門洞, 新鄕校洞, 南門東邊洞 등 1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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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1832년(순조 32년)에 간행된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는 경상
도 전체의 지리지 편찬의 목적으로 간행된 것으로 항목의 설정이 동래 부
지에 비해 체계적이나 동래부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내용이 적은 편에
속한다. 이 책의 방리조(坊里條)에 따르면 서면에는 부산리(釜山里), 산저리
(山底里), 미남리(美南里), 거인리(巨人里), 여고리(余古里), 거벌리(巨閥里),
양정리(楊亭里), 초읍리(草邑里), 연지리(蓮池里), 범전리(凡田里), 전포리
(田浦里), 문현리(門峴里), 만덕리(萬德里) 등 13개 동리가 있었다.16) 여기
에 처음 ‘문현’이라는 지명이 나타난다.
동리가 있었으며 西部 지역으로 南門西邊里, 西門路上里, 西門路下里, 北門路上里, 北
門路下里, 堂洞, 玉味井洞, 大井洞, 西門外洞, 凡魚洞, 野井洞, 客達洞 등 12개 동리
가 있었다. 東面에는 鳴藏里, 盤如里, 栽松里, 海雲臺里, 右洞里, 中洞, 左洞, 地境里,
石臺里, 新川里, 西洞里, 五倫臺里 등 12개 동리, 南村면에는 崇亭里, 東部里, 西部里,
北門外里, 南門外里, 丑山里, 甘浦里, 漆浦里, 包伊浦里, 南川里, 大淵里, 石浦里, 盆
浦里, 龍堂里, 戡蠻里, 牛岩里 등 16개의 동리가 있었다. 東平面에는 古代里, 釜峴里,
甘勿里, 堂里, 尾要里, 伽倻里, 釜山城內里, 凡川一里, 凡川二里, 左自川一里, 左自川
二里, 豆毛浦里, 海汀里 등 13개 동리가 있었다. 또한 沙川面에는 上端지역에 周禮里,
毛羅里, 掛乃里, 德浦里, 場門里, 嚴光里 등 6개 동리와 下端 지역에는 新草梁里, 舊
草梁里, 大峙里, 牧場里, 甘川里, 禿㫖里, 長林里, 西平里, 多大里 등 9개의 동리가
있었다. 西面에는 山底里, 余古里, 石寺里, 大鳥里, 居伐里, 草邑里, 羊亭里, 蓮地里,
凡田里, 田浦里, 萬德里 등 11개의 동리가 있었고, 北面에는 釜谷里, 仙洞, 豆口里, 鵲
掌里, 蘇山里, 南山里, 仇世里, 長箭里, 山城里 등 9개의 동리가 있었다.
16) 구체적으로는 邑內面에는 狐峴里, 安樂里, 書院里, 伏龍里, 回龍里, 驛洞, 栗北里, 休
山里, 生民里, 鶴林里, 安民里, 南門東邊里, 南門西邊里, 西門路上里, 西門路下里, 北
門路上里, 北門路下里, 玉味井洞, 大井洞, 西門外洞, 凡魚洞, 校洞里, 客達洞 등 23개
동리가 있었다. 東面에는 鳴藏里, 西洞, 絲川里, 北洞, 東臺里, 五倫臺里, 石臺里, 盤
松里, 盤如里, 舞亭里, 栽松里, 右洞, 中洞, 左洞, 海洞 등 15개의 동리가 있었다. 北
面에는 九世里, 長箭里, 釜谷里, 南山里, 鵲掌里, 杜邱里, 仙洞, 蘇山里, 伸川里, 蘇
亭, 山城里 등 11개의 동리가 있었고 알려져 있다. 南村面에는 北外里, 東一牌里, 東二
牌里, 東三牌里, 西一牌里, 西二牌里, 西三牌里, 南門外里, 求樂里, 大淵里, 龍湖里,
龍堂里, 戡蠻里, 牛巖里, 南川里 등 15개의 동리가 있었다. 東平面에는 古垈里, 釜峴
里, 堂里, 甘村里, 尾要里, 伽倻里 등 6개 동리가 있었으며, 원래 동평면에 분리하여
釜山面을 새롭게 분화시켰다. 이에 부산면에는 凡川一里, 凡川二里, 自川一里, 自川二
里, 東部里, 路下里, 西部里, 豆毛里, 豆中里, 釜海汀里, 豆海汀里 등 11개 동리를 두
었다. 또한 沙川面이었던 지역을 上端은 沙上面, 下端은 沙下面으로 면을 나누어 沙上
面에 毛羅里, 德浦里, 掛乃里, 周禮里, 大樹里, 嚴光里, 九德里 등 7개 동리, 沙下面
에 平林里, 堂里, 新平里, 新草梁里, 槐亭里, 大峙里, 甘川里, 舊草梁里, 長林里, 西
平里, 嚴南里, 多大里 등 12개의 동리를 두었다.
부산 지명 문현(門峴) 어원 연구 /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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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고종 8년)에 간행된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事例大槩는 전국적
인 읍지 편찬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1832년의 동래부읍지(東萊府
邑誌)와 1895년에 간행된 동래(東萊)-附事例에 비해 중간적인 성격으로
내용이 간략하고 체계적이지 못하다.17) 이 책의 방리조(坊里條)에 기록된
동리 중에 서면에는 산저리(山底里), 석사리(石寺里), 대조리(大鳥里), 거벌
리(居伐里), 여고리(余古里), 양정리(羊亭里), 초읍리(草邑里), 연지리(蓮池
里), 범전리(凡田里), 전포리(田浦里), 만덕리(萬德里) 등 11개의 동리가 있
었고 남촌면에는 숭정리(崇禎里), 북외리(北外里), 남외리(南外里), 동부리
(東部里), 서부리(西部里), 감포리(甘浦里), 축산리(丑山里), 포이포리(包伊
浦里), 칠포리(漆浦里), 대연리(大淵里), 석포리(石浦里), 남천리(南川里), 분
포리(盆浦里), 우암리(牛巖里), 감만리(戡蠻里), 용당리(龍塘里) 등 16개의
법정동이 있었지만 ‘문현’이라는 지명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 후 1895년에 간행된 동래(東萊)-附事例에는 ‘문현’이 다시 나타난
다. 이 읍지는 1894년 11월에서 이듬해 5월에 걸쳐 작성한 것으로 갑오경
장 직후 지방 제도의 개편을 앞두고 그에 대한 기초 자료 조사의 일환으로
간행된 것으로 기재형식이 1871년의 읍지와 유사한 것이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18) 방리(坊里)조 서면에 부산리(釜山里), 화촌리(華村里), 미남리(尾南
17) 동리의 내용으로 보아 1740년에 간행된 동래부지와 유사하다. 여기에 邑內面에는 狐峴
里, 忠烈祠里, 安樂里, 廉倉里, 舊鄕校里, 驛洞, 蛤旨里, 休山里, 堂下里, 水門里, 生
民里, 新樂里, 平南里, 會寅里, 萬和里, 安民里, 壯南里, 壽民里, 安國里, 福祥里, 富
嘉里, 槐井里, 玉泉里, 西豪里, 凡魚里, 校洞里, 太平里 등 27개의 동리가 있었다. 東
面에는 鳴藏里, 盤如里, 栽松里, 海洞, 盤松里, 西洞, 新川里, 蔚禮里, 五倫臺里, 東
臺里, 石臺里, 舞亭里, 右洞, 中洞, 左洞 등 15개의 동리가 있었다. 北面에는 九世里,
南山里, 鵲掌里, 豆口里, 蘇山里, 仙洞, 山城里, 釜谷里, 召幕陣里, 長箭里, 金山里
등 11개의 동리가 있었다. 또, 동평면을 분리해 동평면과 부산면으로 나누었는데, 東平
面에는 古代里, 釜峴里, 堂里, 甘勿里, 尾要里, 伽倻里 등 6개의 동리를 두었고, 釜山
面에는 凡川一里, 凡川二里, 左自川一里, 左自川二里, 城內里, 豆毛里, 海汀里 등 7개
동리를 두었다. 沙川面에는 앞서 분리된 사천면을 사상면과 사하면으로 분리된 것을 다
시 합쳐 毛羅里, 德浦里, 掛乃里, 周禮里, 場門里, 嚴光里, 禿㫖里, 牧場里, 新草梁
里, 舊草梁里, 大峙里, 甘川里, 長林里, 西平里, 多大里 등 15개의 동리가 있었다. 또
한 桂西面을 새롭게 만들어 萬德里, 大里, 倉里, 古城里 등 3개의 동리를 두었다.
18) 邑內面에 東部지역으로 狐峴里, 安樂里, 書院里, 廉倉里, 栗北, 回用里, 驛洞里, 新樂
里, 生民里, 萬和里, 安民里, 平南里, 會寅里 등 13개의 동리, 西部지역에는 壯南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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里), 거인리(巨人里), 여고리(余古里), 거평리(巨坪里), 대제리(大堤里), 양정
리(楊亭里), 연지리(蓮池里), 범전리(凡田里), 전포리(田浦里), 초읍리(草邑
里), 문현리(門峴里), 만덕리(萬德里) 등 14개의 동리가 있었는데, 여기에
‘문현리’가 나타난다.
다음으로 1899년 간행된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19)에는 남촌면에 숭정
리(崇禎里), 북문외리(北門外里), 남문외리(南門外里), 동부리(東部里), 서부
리(西部里), 감포리(甘浦里), 축산리(丑山里), 포이포리(包伊里), 칠포리(漆
浦里), 대연리(大淵里), 석포리(石浦里), 남천리(南川里), 분포리(盆浦里), 우
암리(牛巖里), 감만리(戡蠻里), 용당리(龍堂里) 등 16개의 법정동이 있었고,
서면에 산저리(山底里), 석사리(石寺里), 대조리(大鳥里), 거벌리(巨伐里),
安國里, 壽民里, 福祥里, 富嘉里, 玉泉里, 槐井里, 西豪里, 凡魚里, 校洞里, 太平里
등 11개 동리를 두었다. 東面에는 鳴藏里, 西洞里, 錦川里, 絲川里, 回川里, 東臺里,
五倫里, 石臺里, 盤松里, 盤如里, 舞亭里, 栽松里, 右洞里, 中洞里, 左洞里, 海洞里
등 16개의 동리를 두었다. 北面에는 九瑞里, 老圃里, 鵲掌里, 杜邱里, 伸川里, 山城里,
蘇亭里, 靑龍里, 仙洞里, 上賢里, 釜谷里, 長箭里, 錦陽里, 杜實里, 南山里, 蘇民里,
蘇驛 등 17개의 동리가 있었다. 南村面에는 北外里, 東一里, 東二里, 東三里, 西一里,
西二里, 西三里, 南外里, 平民里, 求樂里, 包伊里, 大淵里, 大二里, 龍湖里, 龍塘里,
戡蠻里, 牛岩里, 南川里 등 18개의 동리가 있었다. 東平面에는 古垈里, 釜峴里, 堂里,
甘村里, 伽倻里, 尾要里 등 6개 동리가 있었으며 釜山面에는 凡一里, 凡二里, 左一里,
左二里, 左川里, 東部里, 西部里, 路下里, 豆毛里, 豆中里, 東三里 등 11개의 동리를
두었다. 沙上面에는 毛羅里, 德圃里, 掛乃里, 昌法里, 西田里, 甘洞里, 周禮里, 鶴城
里, 場門里, 九德里, 嚴光里 등 11개 동리, 沙下面에 堂里, 平林里, 長林里, 槐井里,
甘川里, 嚴南里, 富民里, 新草梁里, 舊西平里, 大峙里, 新平里, 多大里, 富平里, 瀛仙
里 등 14개의 동리를 두었다.
19) 전국적인 읍지 편찬의 일환으로 1871년(고종8년)에 간행된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事
例大槩와 방리조가 유사하다. 구체적인 동리는 邑內面에는 狐峴里, 忠烈祠里, 安樂里,
廉倉里, 舊鄕校里, 驛洞, 蛤旨洞, 休山里, 堂下里, 水門里, 東門內里, 南門東邊里, 西
邊里, 西門路上里, 西門路下里, 北門路上里, 北門路下里, 玉味井里, 大井里, 西門外
里, 凡魚里, 野井里 등 22개 동리가 있었다. 東面에는 鳴藏里, 盤如里, 栽松里, 海洞,
盤松里, 西洞, 新川里, 蔚禮里, 五倫臺里, 東臺里, 石臺里, 舞庭里, 右洞, 中洞. 左洞
등 15개의 동리가 있었다. 北面에는 九世里, 南山里, 鵲掌里, 豆口里, 蘇山里, 仙洞,
山城里, 釜谷里, 召幕陣里 등 9개의 동리가 있었다. 東平面에는 古代里, 釜峴里, 堂里,
甘勿里, 尾要里, 伽倻里 등 6개의 동리를 두었고, 釜山面에는 凡川一里, 凡川二里, 左
自川一里, 左自川二里, 城內里, 豆毛里, 海汀里 등 7개 동리를 두었다. 沙川面에는 毛
羅里, 德浦里, 掛乃里, 周禮里, 場門里, 嚴光里, 禿㫖里, 牧場里, 新草梁里, 舊草梁
里, 大峙里, 甘川里, 長林里, 西平里, 多大里 등 15개의 동리가 있었다.
부산 지명 문현(門峴) 어원 연구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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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리(余古里), 양정리(羊亭里), 초읍리(草邑里), 연지리(蓮池里), 범전리
(凡田里), 전포리(田浦里), 만덕리(萬德里) 등 11개의 동리가 있었지만 ‘문현’
은 기록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1937년에 동래향교에서 문기주(文錡周)가 편찬한 책인 동래군지
(東萊郡誌)는 이미 발행되었던 동래부의 여러 읍지를 참고하여 만들었는
데, 읍면동리조(邑面洞里條)에 의하면 동래읍 서면(西面)에는 범전리(凡田
里), 연지리(蓮池里), 초읍리(草邑里), 부암리(釜巖里), 당감리(堂甘里), 가야
리(伽倻里), 개금리(開琴里), 양정리(楊亭里), 부전리(釜田里), 전포리(田浦
里), 문현리(門峴里), 대연리(大淵里), 용호리(龍湖里), 용당(龍塘), 감만리
(戡蠻里), 우암리(牛巖里) 등 16개의 동리가 있었다.20) 여기에도 ‘문현’이
지명으로 나타난다. 그 뒤 1937년에 성주의 정원호(鄭源鎬)가 대구의 경문
당에서 활자본으로 간행한 교남지(嶠南誌) 속의 동래군(東萊郡)․부산부
(釜山府)의 읍면동리조의 서면에는 범전동(凡田洞), 연지동(蓮池洞), 초읍동
(草邑洞), 부암동(釜巖洞), 당감동(堂甘洞), 가야동(伽倻洞), 개금동(開琴洞),
양정동(楊亭洞), 부전동(釜田洞), 전포동(田浦洞), 문현동(門峴洞), 대연동
(大淵洞), 용호동(龍湖洞), 용당(龍塘), 감만동(戡蠻洞), 우암동(牛巖洞) 등
16개의 동리가 있었는데, ‘문현’이 기록으로 나타난다.21)
20) 구체적으로 東萊邑에 校洞, 福泉洞, 壽安洞, 樂民洞, 漆山洞, 蓮山里, 院里, 鳴藏里,
書里, 錦絲里, 盤如里, 回洞里, 五倫里, 石臺里, 盤松里, 溫泉里, 余古里, 巨堤里 등
18개 동리가 분화되어 있었다. 北面에는 釜谷里, 長箭里, 老圃里, 靑龍里, 杜邱里, 仙
里, 南山里, 久瑞里 등 8개의 동리가 있었다. 南面에는 裁松里, 佑里, 佐里, 中里, 南
壽里, 廣安里, 望美里, 民樂里, 南川里 등 9개의 동리가 있었다. 沙上面에는 周禮里,
鶴章里, 甘田里, 嚴弓里, 掛法里, 德浦里, 毛羅里, 柳斗里, 三樂里 등 9개의 동리가
있었으며 沙下面에는 槐井里, 新平里, 堂里, 下端里, 甘川里, 長林里, 舊平里, 嚴南
里, 多大里 등 9개의 동리가 있었다. 새롭게 설정된 龜浦面에는 龜浦里, 德川里, 萬德
里, 金城里, 華明里, 金谷里 등 6개 동리가 있었다.
21) 여기에 東萊邑에 福泉洞, 壽安洞, 漆山洞, 樂民洞, 蓮山洞, 院洞, 校洞, 溫泉洞, 余古
洞, 巨堤洞, 盤如洞, 石臺洞, 回東洞, 五倫洞, 鳴藏里, 錦絲洞, 書洞, 盤松洞 등 18개
동이 있었다. 北面에는 釜谷里, 久瑞洞, 仙洞, 杜邱洞, 長箭洞, 老圃洞, 南山洞, 靑龍
洞 등 8개의 동리가 있었다. 龜浦面에는 龜浦洞, 德川洞, 金谷洞, 萬德洞, 金城洞 등
이 있었고 沙上面에는 德浦洞, 周禮洞, 鶴章洞, 掛法洞, 嚴弓洞, 甘田洞, 柳斗洞, 三
樂洞, 毛羅洞 등 9개의 동리가 있었다. 沙下面에는 槐亭洞, 新平洞, 堂洞, 下端洞, 甘
川洞, 長林洞, 舊平洞, 嚴南洞, 多大洞 등 9개의 동리가 있었다. 새롭게 설정된 龜浦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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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문헌 정보를 살펴 보면 ‘문현’이라는 지명으로 기록으로 나타
난 것은 1832년(순조 32년)에 간행된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가 최초이
다. 그 뒤에 편찬의 목적과 편찬자에 따라 누락되기하고 기록되기도 하여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문현’은 일제식의 지명이 아닌 셈이 된다.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가 경상도 전체의 지리지 편찬으로 만들어 진 것
이라 지역 관리들이 정확한 정보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현지의 고유 지
명을 최대한 반영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문현’이라는 지명은 이전에
기록되지 않은 고유한 자연 지명을 당시의 관리가 한자로 옮긴 것으로 추
정할 수 있다.
4. 문현의 어원
‘지겟골고개’와 다른 어원인 ‘문현’은 ‘문너머, 문너매, 문넘’ 등으로 나타
나는데, 이는 ‘문+너매/너머/넘’로 분석할 수 있다. 부류칭인 ‘너매’는 ‘넘-’
[越, 過, 踰]에 위치를 나타내는 ‘-에/애’가 결합되어 ‘너메, 너매’로 나타난
형태로 ‘넘어가는 곳’ 즉, ‘고개’의 의미이다.22) ‘너머’는 ‘너매’에서 변화된
형태로 축약의 빈도가 높은 부산지역에서는 ‘넘’으로 축약될 수 있다.
속성칭인 ‘문’은 일반적인 고개의 명명 특성과 관련하여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고개의 속성칭은 주로 고개의 위치, 지향점이나 출발점, 고개의 지형
적 특성, 고개의 지물 등을 기준으로 명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23) 이러한
고개 속성의 명명 특성과 관련하여 ‘문’의 어원을 고찰해 보자.
첫째, ‘문고개’의 ‘문’의 속성이 고개의 위치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다. 고
개는 특정지역에 위치하여 특정지역과 타지역을 연결하는 통로로 기능하는
것이 일반적 기능이므로 고개의 속성칭이 고개가 위치한 특정 지역과 관련
에는 龜浦洞, 德川洞, 萬德洞, 金城洞, 華明洞, 金谷洞 등 6개 동리가 있었다.
22) 부산 지역에서는 ‘넘’에 ‘에’를 붙여 ‘너메’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나 다른 지역에서는
‘넘-’에 ‘-이’를 붙여 ‘너미’로 나타난다. 천소영, 앞의 책, 116쪽.
23) 이근열, 「부산 동래 지역 고개 말밑 연구」, 우리말연구 제23집, 우리말학회, 2008,
7~9쪽.
부산 지명 문현(門峴) 어원 연구 /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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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가질 수 있다. 종전에 ‘문현’의 속성칭인 ‘문’이 ‘지겟골’의 ‘지게’와 관
련해서 해석되었던 것도 이러한 특성에 기인한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
듯이 문현의 속성인 ‘문’은 ‘지겟골’과 대응되어야 타당하지 ‘지게문’과 대응
되는 것은 논리적 타당성을 획득하지 못한다. 이는 잘 알려진 해당 지명을
근거로 고개의 속성칭을 부여해야 고개의 인지적 속성이 높아지고 명명의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문고개’의 ‘문’의 속성이 지물과 관련될 가능성이다. ‘문고개’가 나
타나는 지형은 대체로 산을 넘어가는 안부로 완만한 산등성이다. 그러므로
문고개는 전국적으로 다양하게 분포될 수 있다. 경남 지역에 존재하는 문고
개는 다음과 같이 다양하다.
(6) ㄱ. 문고개[문고갯재] [고개] 고봉저수지 동남쪽에 있는 고개(고성
군 삼산면 고봉리)24)
ㄴ. 문고개[고개] → 고실재(고성군 영현면 봉발리)25)
ㄷ. 문곡[고개] 연동에서 방홧골로 가는 고개(고성군 대가면 연지
리)26)
ㄹ. 문고개[고개] 부촌 남서쪽에서 상리면 고봉리로 가는 고개.
조선 때 큰 길로서 행인이 많이 다녔다 함(고성군 영현면 영
부리)27)
ㅁ. 문고개[문헨, 문현][고개] 돌마을 남쪽에 있는 고개(남해군 상
동면 난음리)28)
ㅂ. 문고개[고개] 한질등 서쪽에 있는 고개(울주군 범서면 구영
리)29)
ㅅ. 문고개[고개] 상삼에서 소석리로 넘어가는 고개(양산 상북면
상삼리)30)
24) 지총 8권, 206쪽.
25) 지총 8권, 217쪽. 고실재[큰고개, 문고개] [고개] 쌧등 서쪽에서 상리면 고봉리로 가는
큰 고개. 영부리의 문고개 밑이 됨.
26) 지총 8권, 187쪽.
27) 지총 2권, 220쪽.
28) 지총 8권, 306쪽.
29) 지총 9권, 383쪽.
20 / 한국민족문화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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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문고개[문곡] [고개]: 양달 서북쪽에서 외광리로 넘어가는 고
개(울주군 온양면 운화리)31)
(6)의 ‘문고개’는 대부분 넓고 큰 고개이거나, 높은 고개로 산등성이에 위
치한 고개이다. ‘문고개’가 한자로 옮겨질 경우, ‘문곡’으로 옮겨지는 것이
대부분이고 ‘문현’은 (6ㅁ)과 같이 남해 지역에서만 나타난다. 여기서 다른
지역에 나타난 ‘문고개’를 살펴보자.
(7) ㄱ. 문재(門嶺)(울산 동구 방어진 문현): 방어진목장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던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의 문현지구
입구의 신호등 일대이다. ‘문현지구’의 ‘문현(門峴)’이나 ‘문재
(門嶺)’는 같은 뜻이다. 옛날 이곳에는 고구마 밭이 있었고,
그 맛이 일품이었다.32)
ㄴ. 문혜리(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문현리, 지혜리 일부와 대동,
능곡, 논골, 새말, 토기점지석, 엄음성, 평촌, 삼셍이 등을
병합할 때 문현의 문자와 지혜의 혜자를 한 자씩 따서 문혜
리라 하였다. 그러나 문혜리의 옛 이름은 문열이(문여리)였다
는 유래도 전해오고 있다. 그것은 이 곳의 문고개에 당시 김
화와 함경도로 가는 관문이 있어 이 곳을 통행하는 이에게
문을 열어주었던 때문으로 풀이한다.33)
ㄷ. 문고개(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달지말에서 남면 조전
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영 마루에 문틀처럼 솟아난 두 개
의 바위 사이로 고갯길이 나 있으므로 ‘문고개’라고 하는데
그 안에는 ‘방고개’가 있다.34)
ㄹ. 문재(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김부리): 갈밭무기에서 신남으로
가는 고개로 문처럼 생긴 바위가 길 좌우로 우뚝 서 있는 데
연유한 이름 = 문현(文峴)35)
30) 지총 9권, 269쪽.
31) 지총 9권, 423쪽.
32) http://www.donggu.ulsan.kr/kor/notify/history23.php (검색일: 2010년 8월 20일)
33) http://www.cwg.go.kr/galmaleup/sub.html (검색일: 2010년 8월 20일)
34) http://yeongwol.kccf.or.kr/home/main/history.php (검색일: 2010년 8월 20일)
35) http://www.inje.go.kr/home/main/intro (검색일: 2010년 8월 20일)
부산 지명 문현(門峴) 어원 연구 /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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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 문고개: 문산리(門山里)(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새왕
동 입구에 용립한 암석의 형태가 문짝을 세워 논 듯한데 유
래하여 지은 이름. 문현(文峴) = 맞바위1 : 번이터 동북쪽에
있는 마을. 맞바우2 : 바우 마을 어귀에 있는 큰 바위가 마
주 서 있어서 문과 같다고 한다.
ㅂ. 문고개(강원도 원주시 단구동): 내남송에서 단구동 구루니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문바우란 바위가 있는데 옛날에 바
위를 떠넘겨 적병이 오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ㅅ. 문현(文峴)(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대부분의 지역이 낮은 산
지와 평지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마을 북쪽으로 내촌천이 흐
르며 내촌천으로 흘러들어가는 작은 지류가 흐른다. 문고개
밑으로 문현광산이 있다. 자연마을로 문고개가 있다. 와야리
비선동으로 가는 고개인 문고개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
다.36)
ㅇ. 문고개(경북 영주시 문수면 대양2리): 지금 43가구가 살고
있으며 옛날에 文殊庵이라는 寺院이 있었다고 한다. 서편에
대문이 있었는데 자주 열지 않았다고 하며 지금도 마을 사람
들은 武보다 文을 숭상한 탓에 그 고개 이름을 문고개라고
하고 마을 이름을 文峴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37)
(7ㄱ)의 ‘문현’은 ‘문재’로 방언진 목장으로 통하는 길목의 역할로 ‘문’의
의미를 해석하고 있고, (7ㄴ)의 ‘문혜리’의 문현도 ‘관문’의 역할을 하는 의
미로 ‘문’으로 해석하고 있다. (7ㄷ)의 ‘문고개’는 고개에 문틀처럼 솟아난
두 개의 바위가 문 역할을 해서 고개를 해석하고 있고, (7ㄹ)의 ‘문재’ 역시
‘문’처럼 생긴 바위가 길 좌우에 서 있다는 데서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7ㅁ)의 ‘문재’ 역시 ‘맞바위’란 지물 때문에 생긴 지명이며, (7ㅂ)의 ‘문고개’
도 ‘문바위’에 의해 생긴 지명으로 풀이하고 있다. (7ㅅ)의 ‘문현’과 (7ㅇ)의
‘문현’은 그 유래가 모호하다.
위의 (7ㄱ,ㄴ)의 경우는 ‘문’의 어형에 이끌려 ‘입구’로 해석한 경우이다.
36) http://www.hongcheon.gangwon.kr/2009/page.asp?pagecode (검색일: 2010년 8월 20일)
37) http://www.yeongju.go.kr/pages/sub.jsp?menuIdx=1587 (검색일: 2010년 8월 20일)
22 / 한국민족문화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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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문’이라는 특성을 부여하는 것은 고개의 특성 중에 하나이다. 고개는 특
정지역과 특정지역을 이어주는 것이 고유 역할이다. 고개 지명 중에 ‘목’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의미에 유연성을 부여해 붙이는 일반적인 명명
법이다. (7ㄷ,ㄹ,ㅁ,ㅂ)은 고개의 지물인 ‘문바위’에 의해 ‘문고개’가 형성됨
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특정한 지물로 고개의 지명이 부여될 경우는 그
지물의 명칭을 정확하게 밝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바위’가
고개의 속성이 될 경우는 ‘문바위고개’가 나타나야 명명의 일반원리에 부합
된다. ‘문박고개, 문바우고개’ 등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고개 속성에
나타난 ‘문’에 이끌려 특정한 지물을 근거로 해서 나름대로 유연성을 모색
한 결과로 보인다. 문제는 (7ㅅ,ㅇ)이다. ‘문현’과 ‘문고개’의 ‘문’이 일반적으
로 인식되는 ‘문[門]’이 아니라 ‘문[文]’에 대응되었다는 점은 ‘문고개’가 ‘문’
과의 유연성을 가지지 못함을 보이는 증거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산등성이
를 넘어가는 고개는 두 개의 산 사이에 낮은 구릉이 되는 경우 양 옆에 큰
산이 두 개의 문으로 인식할 수 있다. 이 경우, ‘문고개’를 한자로 옮길 경
우 인지적으로 ‘門’을 떠올릴 것이 타당하지만 ‘文’에 대응된다는 것은 고개
의 형상이 드나드는 문으로는 인지되지 않음을 뜻한다.
특히, 문현동의 ‘문고개’는 황령산의 안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특정한 지
물이 존재하지 않고, 특정한 관문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 않다는 점
에서 지형이나 지물의 속성으로 ‘문’을 해석하기 어렵다. 여기서 ‘문’의 속성
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문고개’가 대부분 높은 고개이거나 큰 고개로
산의 안부에 위치한 고개이므로 ‘높은 고개, 큰 고개, 산 고개’로 그 의미를
추정해 수 있다.
셋째, 다음으로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지향점으로서의 ‘문’의 가능성이다.
‘문현’은 전포동에서 대연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대연동이 ‘못골’
로 불린다는 것을 참고로 하면 ‘문현’이 ‘못’으로 가는 고개의 뜻으로 ‘못고
개’로 불릴 수 있다. 그 근거로는 ‘문현’이 기록된 시기인 1832년(순조 32
년)에 간행된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에는 남촌면에는 숭정리, 동부리,
서부리, 북문외리, 남문외리, 축산리, 감포리, 칠포리, 포이포리, 남천리,
부산 지명 문현(門峴) 어원 연구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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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연리, 석포리, 분포리, 용당리, 감만리, 우암리 등의 16개의 동리가 있었
는데, 그 중에 ‘대연리’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문고개’가 ‘못골’과 관련될
가능성은 존재한다.38) 그러나 아래의 (8)의 해설을 살펴보면, 대연동의 못
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동골에도 오래된 못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8) 못골마을: 못골 마을은 현재의 남구 대연5동에 있는 마을이다. 못
골은 대연동에서 북쪽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데, 북쪽으로 황령산
의 줄기인 연주봉과 바람고개에 가리워져 있다. 산줄기가 양쪽
팔로 감싸 안은 듯이 좌청룡 우백호의 형세로 아늑한 분지를 이
루며 북고남저의 형세인데, 절반 정도가 북쪽의 산지로 되어있다.
오랜 옛날부터 황령산 골짜기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큰 못이 여
러 곳에 있었다. 이 못의 지(池 또는 淵)와 골짜기의 곡(谷)에서
연유되어 지곡(池谷), 일명 못골이라고도 부르던 것이 한자로 표
기되면서 크다는 의미의 대(大)와 못이라는 뜻의 연(淵)을 합하여
지금의 대연동(大淵洞)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옛날 이 지역은 황
령산의 남쪽에서 동쪽으로 지형의 경사도가 높아서 비가 오면 그
물길이 골짜기를 따라 자연적으로 형성된 못에 모이게 되었다.
이 일대에는 세 개의 못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신라시대
에 축조된 것으로 지금의 대연초등학교 부근에 있었던 아랫못,
현재 중앙고등학교와 해연중학교 입구 일대의 고동골 작은 못,
일제강점기 때에 축조된 것으로 현재 부산예술대학과 동천고등학
교 일대에 윗못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30년에 일제가 수리조합을 만들고 옛날의 못
자리 위쪽에 제방을 쌓아 다시 새로운 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즉
지금의 대연5동의 북쪽 골짜기(현 부산예술대학과 부근의 아파트
일대)에 또 하나의 큰 못을 축조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의 못(현 해연중학교 입구에서 중앙고등학교 일대)은 고동골 골짜
기에서 흘러내리는 골짜기의 물을 모아서 인근의 마을에 공급하
38) 1740년(영조 16년)에 간행된 동래부지(東萊府誌)에는 남촌면(南村面)에는 崇亭里, 東
部里, 西部里, 北門外里, 南門外里, 丑山里, 甘浦里, 漆浦里, 包伊浦里, 南川里, 大淵
里, 石浦里, 盆浦里, 龍堂里, 戡蠻里, 牛岩里 등 16개의 동리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데, ‘대연’이 ‘문현’보다 기록상으로 먼저 나타난다.
24 / 한국민족문화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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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농사를 짓게 하였다고 한다. 이제는 그 당시의 예스러운 정경
을 찾을 수는 없지만 대연동은 지형적 특성으로 못의 물을 이용
하여 타 지역보다 넓은 농토(당시 못골 논밭의 면적이 약
495,000m2(15만평) 되었다고 한다)에서 논밭을 경작하던 전형적
인 농촌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못도 남구 토지구
획 정리계획에 의하여 메워지고 아파트 등 주택단지로 변하여 못
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못골’이란 이름만 남아 전한다.
지금 지하철 2호선의 대연2동사무소 앞 역명이 못골역이다.39)
위의 (8)의 정보에서 나타난 못은 ‘아랫못, 윗못, 작은못’ 등 세 개이다.
위 세 개의 못 중에서 일제시대에 축조했다는 윗못(큰못)은 ‘문현’이 최초
기록된 시기와 일치하지 않으므로 명명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대연초
등학교 근처의 신라 때 축조한 ‘아랫못’과 고동골 근처의 ‘작은 못’이 명명의
대상이 된다. ‘아랫못’을 대상으로 한다면, 못으로 넘어가는 고개보다는 ‘못
골’로 가는 고개가 더 타당해 보인다. 못이 여러 개가 존재하기 때문에 특
정한 ‘못’이라는 지물보다, ‘못이 있는 골짜기’가 더 지명의 인지적 타당성이
있다. 또한 ‘작은 못’이 있는 고동골이 지금의 문현 고개 근처에 있는 점을
고려할 때, ‘못이 있는 고개’이거나 ‘못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문너메’는 지역인들이 ‘못넘을 고개’로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고개가 높아서 화적떼들이 자주 나타나 혼자 넘기는 어렵다는 뜻에서 붙인
지명이다. 이것도 ‘못너미’에서 ‘넘지 못함’으로 유추된 지명으로 파악할 수
있으므로 ‘문현’이 ‘못고개’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어원적으로 볼 때, ‘못넘을고개’는 고개가 높고 험할 경우 붙이는
일반적인 지칭이라는 점이다. 부산의 만덕 고개 역시 화적떼가 많아 만 명
이나 모여야 넘어갈 수 있다고 해서 ‘만등고개, 못넘을고개’ 등으로 불리기
도 했다는 점, 양정의 ‘마비현’도 ‘못넘을고개’로 불렀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못넘을고개’는 ‘못’과 관련된 의미가 아니다.
또한 ‘못’의 의미가 ‘못[池]’과 관련을 부인할 수 있는 여러 증거가 있다.
39) 부산광역시, 앞의 책, 225~227쪽.
부산 지명 문현(門峴) 어원 연구 /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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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ㄱ. 못안못(기장군 일광면 원리)40)
ㄴ. 못안골못(기장군 일광면 신평리)41)
(9ㄱ)에서는 ‘못 안 쪽에 있는 못’으로 해석되는 지명이지만, 이 지역에는
못이 하나만 존재하므로 속성으로 제시된 ‘못’은 부류로 제시된 못[池]과는
다른 것임을 추론할 수 있다. 이 지역을 확인한 결과 못이 위치한 지역이
산등성이로 산 속에 위치한 ‘못’이다. ‘못’이 ‘산’의 의미와 관련될 때 ‘안’의
위치가 정확해 진다. 또한 (9ㄴ) ‘못안골못’도 ‘못안골’에 있는 ‘못[池]’으로
해석되는 지명인데, ‘못안골’의 위치가 ‘못[池]’에 의해 결정되었다면 ‘못골’
로 되어야 타당한 것이므로 ‘못안골’의 ‘못’은 ‘못[池]’의 의미가 아니다.42)
이러한 점은 (10)에서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10) ㄱ. 못넘못[못] 댓골 서쪽 등 너머에 있는 못(경남 울주군 범서
면 천상리)43)
ㄴ. 모시골[마을] 본동 서남쪽에 있는 마을. 전에 모시풀을 묻었
다고 함(경남 진양군 이반성면 용암리)44)
(10ㄱ)의 경우, ‘못’을 지칭하는 속성칭은 ‘못넘’이다. 이 부근에는 다른
못이 없으므로 속성칭의 ‘못’은 물을 모아둔 ‘못[池]’의 의미가 아니다. 여기
서 ‘못’은 지명의 위치에서 나타나듯 ‘등’의 의미로 보인다. 즉, ‘못’이 ‘산등
성이’의 의미로 쓰인 것이다. 또한 ‘너머’가 ‘넘’으로 나타나는 것이 이 지역
에서는 일반적이므로 ‘못넘못’은 ‘산등성이를 넘어 있는 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10ㄴ)에서 ‘모시골’은 ‘못[池]’과의 유연성을 가지지 못하
40) 지총 8권, 113쪽.
41) 지총 8권, 83쪽.
42) 김해군 김해읍 지내리에 있는 ‘못안못’(지총 8권, 249쪽)은 ‘지내(못안)에 있는 못’으로
‘지내(못안)’라는 곳에 위치한 못을 의미하는데, 이때의 ‘지내’는 지형적으로 못 뒤로 산
안 쪽에 위치한 곳이므로 ‘못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기보다는 ‘산 안에 있는 마을’의 의미
일 가능성이 있다. 이 지역에는 물봉산(勿峰山)이 위치해 있다.
43) 지총 9권, 388쪽.
44) 지총 9권, 5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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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모시풀을 묻었다’는 해석을 붙인 것도 ‘못’이 ‘산’의 의미를 지지할 수 있
는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지명에서 특정한 행위를 한 것을 지명으로 붙이
는 것이 타당하지 않으며, 모시풀을 땅에 묻는 것도 일반적인 행위에 어긋
나는 일이기 때문에 모시풀을 묻었다고 해석을 한 것은 ‘모시골’의 ‘모시’란
어형에 이끌린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곳도 산과 인접한 곳이기 때문에
‘모시골’은 ‘못골’ 즉, ‘못’=‘산’의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못’이 ‘산’에 대응
되는 국어학적 증거가 부족하다.
그런데, 고개의 뜻인 ‘너머, 너매, 넘’의 의미로 보아 넘어가는 대상이 되
는 ‘못’은 특정한 지역을 속성으로 하는 것으로 확인된다.45) 또, 해당 지역
의 지명에 ‘너머’의 형태와 유사한 변이형인 ‘너미, 네미, 니미, 냉기’의 대
상물로서 ‘못’에 해당하는 유사한 형태가 ‘모’나 ‘목’, ‘무’, ‘물’로 주로 나타난
다는 점은 ‘못’의 의미를 규정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
(11) ㄱ. 모너머고개(북구 만덕동)46)
ㄴ. 목너머고개(기장군 기장읍 교리)47)
ㄷ. 무내미[고개] 청현에서 생비량면 도리의 한더미로 넘어 가는
고개(산청군 신안면 청현리)48)
ㄹ. 물넘기[고개] 용산 서북쪽에 있는 고개(사천군 곤명 용산리)49)
ㅁ. 미네미산[산] → 모남산: 실안 마을 북쪽에 있는 산(삼천포
시 와룡동)50)
45) 부산지역 지명 중 ‘너머’ 유형으로 보이는 것은 ‘갓너메들(기장군 장안읍 효암리), 고개넘
고개(기장군 기장읍 청강리), 대넘에보(기장군 장안읍 효암리), 대넘엣들(기장군 장안읍
효암리), 덤넘산(기장군 정관면 방곡리), 들넘들(기장군 정관면 달산리), 집너매고개(기장
군 기장읍 신천리), 집넘보(기장군 철마읍 안펑리)’ 등 8개의 지명이다. 모두 ‘너머’ 앞에
있는 대상이 ‘갓(산), 고개, 대, 덤, 들(들겅), 집’ 등 넘을 수 있는 자연물이거나 지물이다.
46) 부산지총 3권, 151쪽.
47) 부산지총 7권, 38쪽. 부산지역에서 ‘목넘, 목너메’로 나타나는 지명은 ‘목넘고개’(기장
군 장안읍 좌동리), ‘목넘고개’(기장군 장안읍 좌천리), ‘목넘곡고개’(기장군 정관면 두명
리), ‘목넘고개’(기장군 일광면 칠암리)이고 ‘넘’이 ‘논’으로 나타나는 지명은 ‘목논고개’(기
장군 기장읍 만화리), ‘목논고개’(기장군 정관면 월평리) 등이다.
48) 지총 7권, 212쪽.
49) 지총 7권, 85쪽.
50) 지총 7권, 238쪽.
부산 지명 문현(門峴) 어원 연구 /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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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11)에서 보듯 부산 경남 지역에서 ‘고개’를 뜻하는 ‘너머, 너미, 네
미, 내미’ 등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지명이다. (11ㄱ)의 ‘모’ (11ㄴ)의 ‘목’ (11
ㄷ)의 ‘무’ (11ㄹ)의 ‘물’은 각각 ‘못’과 대응되는 대상이다. 위의 지역은 대체
로 ‘물’인 강과 관련되는 지역이 아니고 ‘못’이 있는 지역도 아니다. 특히
(11ㅁ)의 ‘미네미산’는 ‘모남산’으로 대응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넘다,
남다’가 변이형임을 고려하면 ‘나미’가 ‘남’으로 축약되어 나타날 수 있으므
로 ‘미’가 ‘모’에 대응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미’는 산의 고유어인 ‘메’에
해당하는 의미이므로 ‘모’는 ‘산’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속성칭이 ‘물’이 ‘산’으로 대응된다는 점이다. ‘물’은 지명에서 ‘못’
이나 ‘강, 내, 바다’ 등의 의미로 주로 나타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물’이
‘산’에 대응할 수 없는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물’이 그 어형의 유사성으로
인해 ‘수(水)’로 나타날 수 있지만 다음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도 않을 수도
있다.
(12) ㄱ. 수안리(水安里) [물안, 수안] [리] 본래 김해군 하동(대동면)
의 지역으로서 앞에 숲이 많으므로 수안, 또는 물안이라 하
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수안리라 함.(김해
시 대동면 수안리)51)
ㄴ. 물봉산(勿峰山)[산] 수안리에 있는 산
(12ㄱ)에 나타난 것처럼 ‘물안’은 ‘수안(水安)’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물[水]’과 대응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이 옳다면 당연
히 ‘물[水]’과 관련된 해석이 붙어야 한다. 그렇지만 ‘앞에 숲이 많다’는 지
명해설은 이 지명이 ‘물[水]’과 관련 없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으
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같은 지역에 있는 (12ㄴ)의 ‘물봉산’의 경우에도
‘물[水]’과 관련되어 한자 표기가 나타지 않고 음차하여 ‘물(勿)’로 표기한 것
도 ‘물[水]’과의 연관성을 부정한 것으로 보인다.52)
51) 지총 8권, 253쪽.
52) 지명에 쓰이는 ‘물’의 속성을 정확하게 규명하기 위해서는 ‘물’과 관련 지명의 지형적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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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지명의 속성칭으로 쓰이는 ‘물’이 ‘산’이 될 가능성은 아래의 지명
에서도 나타난다.
(13) ㄱ. 물무디미[산] 싸릿재 북쪽에 있는 산(고성군 영현면 연화
리)53)
ㄴ. 무리메기곡[무리미곡][고개] 송상 동쪽에 있는 고개(남해군
상동면 송정리)54)
(13ㄱ)의 ‘물무디미’는 ‘물+무디미’로 분석되는데, ‘무디미’의 경우, ‘모여
있는 것’ 등으로 해석되는 ‘산’의 부류칭이고, ‘물’은 ‘산’의 속성을 가진 부
류칭으로 보인다. (13ㄴ)의 ‘무리메기곡’도 ‘물+메기+곡’으로 분석되는데,
‘메기’는 고개를 뜻하는 부류칭이고, ‘곡’은 부류칭을 뚜렷하게 하기 위해 덧
붙인 것이므로 ‘물’은 ‘물[水]’과 관련 없는 것이며 지형적 속성으로 보아
‘산’의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부류칭으로서의 ‘물’이 ‘산’을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는 지명은 아
래 (14)와 같다.
(14) 눈나물[산] 누룩나무. 느태 북쪽에 있는 산. 누룩나무(느릅나무)
가 있었음(거제군 장승포면 두모리)55)
(14)에서 보듯 산의 부류칭으로 ‘물’이 나타나는데, ‘물’이 산을 의미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여 ‘누룩나무’가 있는 곳으로 해석한 경우이다. 보통, 느
릅나무는 산의 변별성을 가지는 지물이 아니므로 ‘눈나+물’로 분석되는 것
이 타당하다.
‘물’이 ‘산’과 관련된 지명으로 해석될 수 있는 국어사적 근거는 삼국사
성을 검토하여 물[水]과 관련된 지명과 물[山]과 관련된 지명을 밝힐 필요가 있다. 대부
분 지명은 어형의 유사성으로 ‘물’을 ‘수(水)’로 대응하여 옮긴 것이다.
53) 지총 8권, 219쪽.
54) 지총 8권, 309쪽.
55) 지총 8권, 69쪽.
부산 지명 문현(門峴) 어원 연구 /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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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지리지의 자료 중 복수 지명으로 나타난 ‘물’이다.
(15) ㄱ. 水谷城縣一云買旦忽<37:4b>
ㄴ. 水谷縣一云德頓忽<37:4b>
ㄷ. 於支呑一云翼谷<37:5b>
(15ㄱ,ㄴ,ㄷ)에서 보듯 일반적으로 ‘谷’에 대응되는 ‘旦, 頓, 呑’에 주목하
면 ‘谷’의 옛새김을 ‘*tVn’으로 재구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水’에 대
응되는 ‘買, 德’에 주목하면 구체적인 대응 쌍을 만들기 쉽지 않다. 왜냐하
면 ‘물’을 ‘買’에 대응하여 고정된 인식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크다는 ‘德’
의 ‘’의 훈차에 해당하는 사실에는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56) 만약
‘水’에 대응하는 옛새김을 ‘mVrV’로 재구하는 것도 가능하다면 ‘산’의 의미
로 ‘메, 미, 물, 몰, 말’의 어형이 나타날 수 있음을 설명할 수 있다.57) 특
히 삼국사기 지리지의 복수 지명은 고유지명을 한자로 기록한 것이므로
‘水谷’역시 *(높은골짜기, 산골짜기)의 음차지명으로 해석되는데 ‘水谷’
이 실제 지명이 고유지명과 달랐기 때문에 새롭게 바꾸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58)
56) ‘德’은 ‘크다, 높다’에 대응되는 훈차자인데, 크다는 뜻의 고유어 ‘’과 ‘德’은 서로 대응
되어 나타날 수 있다.
57) 천소영, 앞의 책, 201쪽에서는 ‘mVrV’형 어사가 기원적으로 높은 곳을 지칭하는 공간지
시어가 으뜸, 처음, 근본, 크고 우세함을 뜻하는 추상어로 그 의미 영역을 확대하고 있
음을 지적하고 ‘’가 가장 정확한 표기로 추정한다. 특히, ‘mVrV’의 기원형이 ‘mVr’
(모음탈락형), ‘mVt’(관형형), ‘mVy’(모음간 ㄹ탈락형)으로 분화됨을 지적하고 있다.
58) 이종학, 「훈차 지명어소의 새김 변천고」, 지명학 15집, 한국지명학회, 2009, 75쪽에서
도 “훈차자 ‘水’가 신라의 지명에서는 ‘勿’과 대응하고 고구려 지명에서는 ‘買’와 대응하
며, ‘買’는 ‘川, 井’의 새김으로 쓰였음은 주지의 사실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德勿縣
<德水縣 <35:5b>에서 보듯이 고구려 지명에서도 ‘水’의 새김이 ‘勿’이 쓰이고 있다고 지
적하고 있지만 ‘수=매=물’이 동일한 어형에서 출발함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남영우, 「두모계 고지명의 기원과 분포」, 지명의 지리학,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2008, 50쪽에서도 “산의 중세어 ‘뫼’는 ‘모, 모이, 모로>뫼>메’의 음운 변천 과정에서 연
유된 것이며, 물[水]을 의미하는 ‘뫼’ 역시 m음계의 파생어이다”로 밝히고 “「계림유사(鷄
林類事)」에 의하면 ‘수왈매(水曰每)’라 하였으므로 적어도 중세 초기까지 물을 ‘뫼(moj)’
라고 칭한 것 같다. 따라서 산과 물이 모두 뫼의 m음계에서 유래한 어휘임을 알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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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지역에서는 ‘’은 주로 높은 곳에 위치한 지명에 주로 붙이는데,
산을 뜻하는 ‘’과 유사한 의미를 갖고 있다.
(16) ㄱ. 달배미[논] 호박수통 위쪽에 있는 논(거창군 신원면 양지리)
ㄴ. 말배미[논] 달배미 위쪽에 있는 논(거창군 신원면 양지리)59)
(16)에서 보듯이 ‘달’이나 ‘말’은 높은 곳에 위치한 지명에 주로 붙이는 것
으로 산 쪽에 위치한 논을 지칭한다. 이러한 ‘말’은 주로 ‘馬’로 훈차되어 지
명이 변화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경상도 지역에서는 양순자음 뒤에 주로
원순성 모음으로 변화하여 ‘몰’과 ‘물’로도 나타나기도 한다.
(17) ㄱ. 마산(馬山) [몰뫼][마을][산] 평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산)60)
ㄴ. 몰티고개 → 말티고개61)
ㄷ. 큰말등 → 큰몰등62)
ㄹ. 물상개[골] → 마산곡63)
(17ㄱ,ㄴ,ㄷ)의 경우에는 ‘말’이 ‘몰’과 대응되는 지명이고 (17ㄹ)는 ‘말’이
‘물’로 대응되는 지명이다.
산의 고형인 ‘모래, 모리’는 후대에 ‘몰’로 바뀌기도 하지만 ‘산’의 어원적
유연성을 상실하게 되면 음성적 유사성을 가진 ‘모래’로 인식되어 ‘모래[沙]’
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 경우, 산에 위치한 지명이지만 ‘모래’가
많은 것으로 해석되어 전혀 다른 뜻의 지명으로 바뀌게 되는 계기가 된
다.64)
다”로 언급하고 있다. 또 “우리 조상들은 물, 즉 하천의 근원이 산에 있으므로 그것을
모두 ‘뫼’라고 일컬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지적은 시사하는 점이 크다.
59) 지총 8권, 136쪽.
60) 지총 8권, 303쪽.
61) 지총 9권, 511쪽.
62) 지총 9권, 357쪽.
63) 지총 8권, 305쪽.
64) 「物名類考」(4-木)에서도 ‘몰’을 ‘산’의 옛말로 확인하고 있음을 참고로 할 수 있다.
부산 지명 문현(門峴) 어원 연구 /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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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ㄱ. 몰아실 → 모래실 : 고성군 거류면 당동리
ㄴ. 모래실[모래칠, 몰아실, 하련동] [마을] 봉곡 동남쪽에 있는
마을65)
(18)는 ‘몰’과 ‘모래’가 동일한 지명으로 나타난 경우이다. 이 경우 ‘몰’에
서 ‘모래’로 바뀐 것으로 보이며 ‘몰’의 의미보다는 ‘모래’의 의미로 지명의
해석이 바뀔 가능성이 있다.
(19) ㄱ. 모래배미[논] 굼배미 위에 있는 논(굼배미는 범바웃들에 있
는 논. 거창군 남상면 임불리)66)
ㄴ. 모래배미[논] 장구배미 위쪽에 있는 논. 모래가 많음(거창군
신원면 수원리)67)
(19ㄱ)은 ‘모래’가 ‘높은 곳’이라는 위치적 속성을 가지는 경우인데, (19ㄴ)
에서처럼 ‘모래가 많은 논’으로 해석되어 전승되고 있다. 상식적으로 모래가
많은 논은 벼가 잘 자랄 수 없는 환경이므로 ‘모래’가 ‘모래[沙]’로 해석되는
것은 잘못이다. 더러는 바다와 인접한 지명에서도 모래와 전혀 관계없는 지
역임에 불구하고 ‘모래가 많은 지역’으로 해석이 붙을 수 있는 것도 ‘모래’와
‘몰’의 형태적 유연성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20)에서처럼 ‘mVrV’의 변화형인 ‘마래’ ‘마르’도 ‘말’과 같이 산의
의미로 나타난다.
(20) ㄱ. 마랫들[들] 진배밋들 위쪽에 있는 들(고성군 대가면 금산
리)68)
ㄴ. 마르티[고개] 말티에서 도둑골로 넘어가는 고개69)
65) 지총 8권, 170쪽.
66) 지총 8권, 115쪽.
67) 지총 8권, 135쪽.
68) 지총 8권, 184쪽.
69) 지총 8권, 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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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ㄱ)의 ‘마랫들’은 다른 들보다 산 쪽에 가깝게 위치한 들을 의미하는
데, ‘마래들’에서 ‘말들’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 것이며, (20ㄴ)의 경우 ‘마
르티’와 ‘말티’가 동일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은 이유로 산을 뜻하는 ‘mVrV’에서 ‘모르’로 변화하고 여기서 어
말모음이 탈락하여 ‘몰’로 나타난 후 ‘ㄹ’이 탈락하여 ‘모’로 고정될 가능성이
높다.70)
(21) ㄱ. 모르실골[모곡] [골] 길가땀 북쪽에 있는 골짜기(고성군 심산
면 이당리)71)
ㄴ. 모곡(暮谷)[골] → 모르실골
(21)은 ‘모르실’의 ‘모르’가 ‘모’로 대응되어 나타난 형태이다. 이 곳의 ‘모
르’도 산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한편, ‘mVrV’의 변화형인 ‘물, 물’이 ‘너머, 너메’ 혹은 ‘내’와 결합할 경우
는 ‘ㄹ+ㄴ’의 연쇄가 생겨 ‘ㄹ+ㄹ’, ‘ㄴ+ㄴ’로 음운이 변동하거나 앞의 ‘ㄹ’이
탈락하여 ‘ø+ㄴ’로 실현되게 된다. 또한 그 외의 음운과 연쇄가 일어날 경
우에는 그대로 ‘몰, 말’로 유지되거나 ‘ㄹ’을 탈락, 연음시켜 ‘모, 무’로 나타
나는데, 이러한 어형은 그 어형적 유연성을 상실하므로 언중은 어감이 비슷
한 ‘못’이나 ‘문’으로 대응하여 그 형태를 고정하여 인식의 편리함을 도모하
게 된다. 이러한 지형과 유연성을 상실한 ‘못’은 ‘못(池)’ 의미를 넘어 ‘못
(毋)’의 의미로 발전하여 원래 지명과 전혀 다른 지명이 생겨나게 되는 원
인이 된다.
(22) ㄱ. 문의리(文義里)[무내, 문의] [리] 본래 남해군 설천면의 지역
으로 무내, 또는 문의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
라 남양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문의리라 함72)
70) ‘모르’에서 말음절이 탈락하여 ‘모’로 나타난다고 설명하는 것보다 ‘모르’에서 ‘몰’로 축약
된 후 ‘모’로 나타나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음운론적으로 설명적 타당성이 높다.
71) 지총 8권, 205쪽.
72) 지총 8권, 319쪽.
부산 지명 문현(門峴) 어원 연구 /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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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모섬[목섬] [섬] 진동리 남쪽에 있는 섬- 남해군 창선면 진
동리73)
(22ㄱ)은 ‘문’과 ‘무’과 음운론적 연관성을 보이는 지명인데, ‘무내’가 한자
로 옮겨지면서 ‘문의(文義)’로 변한 경우이다. ‘문’에서 ‘ㄴ’ 탈락현상이 일어
난 것이 아니라 ‘무’에서 ‘ㄴ’이 첨가되어 ‘문’으로 바뀐 형태이다. 또, (22
ㄴ)은 ‘목’과 ‘모’의 연관성에 관한 것인데, ‘목섬’이 ‘모섬’으로 바뀌는 음운
현상에는 ‘ㄱ’이 첨가되거나 ‘ㄱ’이 탈락되는 현상으로 ‘모’와 ‘목’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
산을 뜻하는 ‘물’에서 ‘문’으로 변화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지명은 다음과
같다.
(23) 문막리(文幕里)[물막]: 본래 원주군 미내면(彌乃面)의 지역으로
서 섬강(蟾江)을 건너는 사람을 위하여 막을 치고 물막이라 하
던 것을 차차 번성하여 문막이 되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에 따라 물구미, 웃골말, 아래골말을 병합하여 문막리라고 하여
건등면에 편입되었다가 1936년 문막면이 됨. 면 행정의 각 기관
과 학교, 시장이 있음.(강원도 원성군 문막면 문막리)74)
(23)에서 보듯 ‘문막리’는 원래 ‘물막’에서 ‘문막’으로 표기된 경우이다.
‘물’의 의미를 문제 삼지 않더라도 ‘물’이 한자로 표기될 때 ‘문’으로 바뀔 가
능성이 충분히 존재한다. 또한, ‘물막’은 ‘물[水]’와 관련될 수 있음에도 불
구하고 ‘문(文)’으로 표기한 것은 ‘물’이 ‘물[水]’과 유연성을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결국, ‘물, 무, 문, 몰, 모, 목, 못’은 동일한 어원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음운 규칙에 의해 변화한 지명 속성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물, 무, 문,
몰, 모, 목, 못’의 기저형은 ‘높은 곳’을 뜻하는 ‘mVrV’로 설정할 수 있다.
‘mVrV’에서 ‘마르, 무르, 모르’, ‘마래, 무래, 모래’ 등의 어형이 나타나고
73) 지총 8권, 335쪽.
74) 지총 2권, 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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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어말모음이 탈락하여 ‘mVr’로 나타난다. 여기서 모음의 변이에 따라
‘말, 물, 몰’ 등 다양한 어형으로 출현하는데, 경남 지역에서는 ‘말’형보다는
‘물, 몰’형이 우세하게 나타난다. ‘말, 몰, 물’형은 ‘ㄹ’이 음운론적 환경에
따라 탈락하여 ‘마, 모, 무’ 형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나타난 형태는 어원적
유연성을 상실하여 ‘못, 목, 문’의 기존의 어형에 맞춘 재분석된 어형이 나
타난 것으로 확인된다.
부산 ‘문현’은 ‘모너메, 못너메, 문너머, 못넘을고개’ 등 다양한 어형으로
나타나지만 그 기저에는 높은 산을 뜻하는 ‘mVrV’과 ‘고개’를 뜻하는 ‘너머’
가 결합한 형태에서 변화한 형태로 추정될 수 있다. 여기서 모음의 변화에
따라 ‘*물너머, *몰너머’가 나타나고, 음운 변화에 의해 ‘무너머, 모너머’로
나타나고 어형의 유연성을 상실한 ‘모, 무’가 음성적 유연성을 가진 어형인
‘못’이나 ‘문’으로 대체되어 ‘못너머, 문너머’로 어형이 고정되었다. 특히 ‘못
너머’는 ‘못[池]’에 대한 지물의 유연성을 가지지 못하여 너무 험해 ‘못넘을
고개’로 전해지기도 하는 지명이 되었다.
5. 마무리
본 연구는 부산의 지명 문현(門峴)이 ‘문(門)’에서 유추된 ‘지겟골고개’가
대응될 수 없다는 점에서 ‘문너머’의 어원을 살피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위의 논의를 요약하면 ‘지겟골고개’와 ‘문현’은 다른 곳에 위치한 지명으
로 원래 ‘찌께골, 찍께골, 찝께골’ 등으로 불리던 지명이 어원의식이 약해지
자 유사한 어감의 ‘지게’로 대체한 형태이다. 이렇게 ‘찌께’에서 바뀐 ‘지게’
가 보통은 지는 ‘지게’로 인식하게 되지만 잘못된 어원 의식으로 인해 ‘지게’
의 의미를 ‘문고개’의 ‘문[門]’의 의미와 관련짓게 되어 ‘지게문’으로 고정되
었다. ‘찌께골’의 ‘찌께’는 부산 지방의 발음의 특성상 ‘찍께’로 나타나며, 음
운 동화를 통해 [찝께]로 변화한다. ‘찌께골’은 넓고 아늑한 파인 집게모양
의 골짜기에서 연유한 지명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문현’이라는 지명으로 기록으로 나타난 것은 1832년(순조 32년)에
부산 지명 문현(門峴) 어원 연구 /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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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된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가 최초임을 여러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문현’은 ‘모너메, 못너메, 문너머, 못넘을고개’ 등 다양한 지명으로 나타
나지만 기저에는 높은 산을 뜻하는 ‘mVrV’과 ‘고개’를 뜻하는 ‘너머’가 결합
한 형태이다. 이 형태에서 모음 변화에 따라 ‘*물너머, *몰너머’가 나타나
고, ‘ㄹ’의 탈락에 의해 ‘무너머, 모너머’로 나타난다. 또, 어형의 유연성을
상실한 ‘모, 무’가 음성적 유연성을 가진 어형인 ‘못’이나 ‘문’으로 대체되어
‘못[池]너머, 문[門]너머’로 나타난다. 또한 ‘못너머’는 ‘못[毋]’으로 해석하여
너무 험해 ‘못넘을고개’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나아가 ‘몰’과 관련된 ‘모래[沙]’류의 지명, ‘물’과 관련된
‘수[水]’류의 지명, ‘말’과 관련된 ‘말[馬]’류 지명이 서로 유연성을 가질 수
있음을 밝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결국, 지명은 일반어에서 출발하여 고유성을 획득하는 다양한 과정이 전
제되지 않고서는 올바른 해석이 될 수 없음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으며, 해
당지역의 언어 인식과 어원 의식에 대한 종합적인 해석 없이는 정확한 지
명의 어원이 올바르게 밝혀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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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Etymological Study of Busan Munhyeon-Pass
Lee, Geun-Yeol
The purpose of this essay was to make an etymological study of
Munhyun-pass, Busan. As a result, Munhyun-pass, can be represented as to be
a variety of forms of words, such as ‘mo-neomeo, mot-neomeo, mun-neomeo,
and motneomeul-goge’. But, we were able to find Munhyun-pass could be
interpreted, at the base, as pass going over a lofty mountain.' That is, ‘mVrV’
meaning high mountains is combined with ‘neomeo’ of a hill country.
We could discover that ‘mul-neomeo, mol-neomeo’ might be seen in
‘mVrV+neomeo’ as a result of change of vowel shifts. These forms of words are
again changed into ‘mu-neomeo, moneomeo’ by elision. Since ‘mot[pond],
mun[gate]’ with phonological motivation has replaced ‘mo, mu’ without the
phonological motivation of the forms of words, the word form is fixed in the
form of ‘mot-neomeo, mun-neomeo’.
Especially, because ‘mot-neomeo’ has lost the motivation at land mark on
pond, its interpretation ‘mot-’ be varied as too rough mountains to go over.
* Key Words: Busan Place Names, Munhyeon-Pass, Mot-Neomeo, Monneomeo,
Motneomeul-Goge
ㆍ논문투고일: 2010년 10월 5일 ㆍ심사완료일: 2010년 11월 1일 ㆍ게재결정일: 2010년 11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