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회 지정 시는 해마다 수정되고 삭제, 추가되오니 신청서 접수 전 꼭 다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지정 시는 계속 추가될 수 있습니다. ▶ 5회 대회 대상작 '주흘산 달빛을 보다' / 황봉학'은 지정 시에서 제외 되었습니다.
문경새재전국시낭송대회 지정시
가을 바람 / 강상률
문경 새재 넘는 사람아! 가을 들녘에 꿈을 감추고 경건히 기도하는 밀레의 만종을 보라 고난과 역경의 비바람 이겨낸 계절을 말없이 꿋꿋이 견딘 오늘 땀을 식히는 새재 바람 앞에서 저 벼 이삭처럼 조용히 머리 숙여 보라
빈 가슴에 와 닿는 대지의 숨결 머문 부끄러움들 서로 잘난 체 뻐기며 눈을 부라리던 일이나 굳어진 얼굴로 부질없이 마음 상하던 일 모두 가을바람에 날려 보내고 이제는 서로 용서하고 사랑할 일이다.
문경새재 넘는 사람아! 산바람 넘쳐나는 기운을 보라 런링의 깃발 휘날리는 저 벌판 황금 물결 넘실거리는 번영과 희망이 영순 들에도 새재골 주흘산 자락에도 빈궁한 우리들 가슴속에도 풍성한 결실이 고운 햇살을 타고 가을바람 속에 차곡차곡 쌓여 가리라
그 여자 / 강혜규
못나고 거친 흙이라 찰진 반죽도 못돼 그저 생긴 대로 불길에 몸을 던진다 주름살 자잘한 얼굴 억장이 무너진다
염천 하늘 아래 수건 하나 질끈 메고 소처럼 느린 소처럼 묵묵히 밭을 맨다 고단한 하루하루가 옹이로 맺힌 손마디
어머니의 어머니도 찻사발 받쳐 들고 울음을 비우듯이 시름을 비웠는지 찻사발 해묵은 주름이 웃을 듯이 말 듯
문경새재 / 고성환
아버지 도포자락 휘날리던 문경새재 시대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가시던 날 한사코 버티고 서서 산맥들은 열병했지
아버지 양복 깃이 말쑥하던 종착역 시대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오시던 날 두 팔을 말없이 열어 눈물로 싸안았지
아버지 넘나들던 굽이굽이 양장(羊場)길 어머니 치맛자락 간절히 찢겨진 길 억새풀 희어진 머리가 아리랑을 부르는 길
문경 사계(四季) / 공광규
조령길 봄비 내려 연두색 칠을 하고 봄 나무 가지마다 꽃망울 터뜨렸네 초목이 가득한 고개 꽃이 피어 극락원
봉암사 굽어보는 희양산 밝은 얼굴 푸르른 산허리에 흰 구름 쏟았구나 계곡에 수행승 하나 발을 담근 극락천
주흘산 산 능선에 내려온 반쪽 하늘 밤별이 돌아가고 달빛도 사라지면 새들이 햇살 물어다 비단 짜는 극락산
점촌역 상록수에 백로 떼 장엄하고 문경역 폐철로 가 백목련 눈부셔라 바람이 휘파람 불며 오고가는 극락역
그대 맨발로 오라 – 문경새재 1 / 권갑하
오랜 안부를 묻듯 목련은 피어나고
누군가 저만치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산보다 마음이 앞서 문을 먼저 여는 길
물박달 잎새에 이는 향긋한 푸른 전설
길은 멀어도 우리 사랑 끝이 없으니
세상 일 다 벗어놓고 그대 맨발로 오라
먼 그대에게로 흘러가는 계곡물 따라
새소린 청아한 곡조로 하늘 다시 펼치고
비질한 황톳빛 가슴 달빛 쏟아지리니
觀音窯 / 권형하
청학 몇 날으는 문경 관음요에는 푸른 눈물 불로 지펴 우려낸 하늘 속을 등 환한 여울 발길로 낮달이 떠 옵니다.
철 따라 손짓 따라 매화 피고 국화 피어 한 움큼 꺾어 들면 번져나는 구름송이 먼 산 빛 가슴 맑은 새 하늘 길로 납니다.
솔빛 길러내신 붉은 가슴 언덕과 저 바람 말투들을 시로 쓴 나무들과 마음에 별 담기는 방 나눠들고 앉습니다.
문경새재를 읽다 / 김겨리
한 걸음 한 걸음이 문장인 길이 있다 능선으로 제본된 목차마다 행간이 경건한 순례, 일목요연하게 펼쳐지는 둘레길이 고금으로 웅숭깊다
철릭을 입은 나무들의 호위를 받으며 첫 장을 넘기자 새재의 서곡인 주흘관에 당도하니 관문교 물소리가 풍경風磬이 울리듯 애잔한 건 쥘부채 펴듯 펼쳐진 서사를 다 서술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일출과 일몰로 빚은 윤슬로 밝히는 너덜길 따라 조곡관에 이르러 다리쉼하듯 산세를 굽어본다 발자국과 손길, 요凹와 철凸로 한 칸 한 칸 쌓은 성곽은 쉼표 없는 문장, 행갈이도 없이 편집된 질곡의 역사다 그랭이 공법으로 축조된 문장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차곡차곡 집필되고 있으므로
등고선에 밑줄 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능선을 넘는다 주흘관에서 조곡관을 지나 조령관에 이르고 나서도 뉘엿뉘엿 지는 해가 부봉에 걸려 있는 것은 아직 다 읽지 못한 새재의 내력을 체득하려 하기 때문인가
능선을 넘고 계곡을 지나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관문 문경새재, 오체투지체로 휘갈겨 쓴 절필의 장르여!
바위 하나 나무 한 그루까지 문맥이 섬세하다 곳곳마다 탈자와 마모된 비문으로 편집되는 역사이지만 반으로 접어 놓고 두고두고 읽어야 할 지침서이기에 서표로 꽂아 놓은 달빛도 문장 부호가 되는 문경새재는 사계절의 의태어로 빚은 경전을 아직도 집필 중이다
달빛과 새재를 동행하다 / 김도솔
거친 맞바람에 세월을 짊어지고 등 시린 그림자 하나 새재로 들어서면 옛길이 온 가슴 열어 시린 등을 끌어안는다
적막을 유영하던 개똥벌레 불 밝히며 반갑다 어서 오라 손짓하듯 반겨주고 흙길은 지친 두 발을 부드럽게 감싸준다
윤슬이 부려놓은 물그림자 들며 날며 어둠을 여미는 고즈넉한 계곡물 소리 교귀정 말 없는 정이 쉬어가라 발 붙든다
새들은 잠을 청할 둥지를 찾아들고 계곡물 돌 틈에서 꾸구리도 잠이 들면 그림자 휘청이는 밤을 달빛이 도닥인다
한 모금 약수로 가쁜 숨을 축여가며 시오리 굽잇길 저미고 편 이 길에다 세월을 내려놓고서 처진 어깨 활짝 편다
어머니의 사발 / 김동관
어머니 한쪽 가슴 땅 끝에 묻던 날 선잠 깬 흙가래 알몸을 드러내고 사라진 젖내음 찾아 똬리를 틀고 있다
기억의 끈 마디마디 빚어 올린 초벌인생 기울은 물레 위를 멈칫멈칫 걷다가 젖은 손 어루만지며 둥근 마음 새긴다
출산 앞둔 산모처럼 긴장한 불가마 뼛속까지 스민 열기 훈훈하게 달아올라 살갗이 터지는 고통 외로움을 벗긴다
하늘이 열리고 흰 연기 날개 펴면 갓 태어난 빛깔들이 꿈틀대는 잔불 속 어머니 빈 가슴 채울 사발 하나 숨을 쉰다
문경사발 / 김동인
한 때 어느 파발마가 목젖을 삼켰을까
망댕이에 구워 낸 흙냄새를 따라 가면
관문 밖 물소리에도 굳은살이 박혀 있다
달빛 아래 잠 못 들던 울컥했을 사발도
한달음에 삼켰을 뜨거웠던 찻잔도
문질러 닦으면 닦을수록 낮아지는 문경새재
접혀 있던 수백 년 길 다시 펼쳐 걸어 보다
급류에 떠 밀려간 사금파리 잇대보면
흙으로 돌아가는 길 징검돌로 놓여 있다
문경 / 김명인
길에는 기쁨만 아니라 슬픔도 오고 간다 누님 돌아가셨을 때 부고 받고 굽이굽이 감돌던 새재, 아래 첫 동네, 문경 "구부야 구부야 눈물"대신 축축한 갈증으로 허기져 나, 차 세우고 자장면 시켰던 곳
마흔 넷의 하직이 짜고도 검어 그 길 지날 때마다 마음 안쪽이 자장처럼 컴컴했다, 조카들 다 자라 막내까지 장가 들었는데 신부가 그곳 사람이라 읍사무소 근처 결혼식장 더듬던 곳
갈아 신은 새 신발인 듯 터널 뚫렸지만 무엇을 아낄 것도 없는 나, 예전의 영마루 돌아서가니 뉘엿뉘엿 가을해 진다, 어느새 아뜩하던 그 슬픔 기쁨 다 가라앉고
쏟아버린 알약인지, 고개 아래로
고향 시인 / 김병중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그 고을에 가면 무명 시인 한사람 조용히 살고 있단다 토끼꽃 팔찌 낀 딸아이 손을 이끌고 때때로 개울가에서 조약돌 줍고 있더라
삽 한 자루 들고 논으로 나서면 물거울 속에 낯익은 얼굴 하나 가는 실바람에도 잔주름지지만 따뜻한 논물 속에 구름이 같이 눕더라
시인의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나무 이름을 줄줄 외는 푸른 피 도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엔 성은 불러도 이름을 부르지 않더라
풍월주인 별호를 가진 시인이 푸나무 단 위에 노을을 한 짐 지고 천천히 시오리 저 벼릿길을 지나더니 삽짝 없는 초가집 이마에 큰 달 하나 걸더라
경천댐 / 김선옥
하늘은 바람과 해와 귀 떨어진 낮달을 데리고 왔다 물속 달 뒤쪽에서 아이들 책 읽는 소리가 들린다
물결에 귀대고 들어보면 물고기 떼들이 아이들 웃음 속을 수없이 드나든다
동구 밖, 하늘로 발을 뻗은 느티나무는 간간이 찾는 꼬마물떼새와 동네 어르신들의 안부를 전한다 사랑방 할아버지 기침 소리, 고요의 물결 위에서 섬처럼 출렁인다
이곳 사람들은 밤늦도록 머리맡에서 젖은 책장 넘기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발과 손이 전부였던 아버지 어머니의 이야기를 두툼한 물결 속에서 찾아야 했다
고요가 흔들림을 지그시 누르고 이야기 속으로 가라앉았다가 수없이 일어서다 다시 고여 있는 듯 고요가 수평을 재고 있다
책은 두껍고 내용은 여전히 푸르다
아이들 발자국 물고기와 담 모퉁이를 돌며 뛰어노는 소리가 물속 낮달로 돋는다
새재 맨발걷기 / 김석태
시어의 푸른 숲이 솔바람에 출렁대는 새잿길을 걸을 땐 답답한 신발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걸어보세요. 우리들이 끝내는 되돌아가야 할 부토의 그 부드러운 촉감이 잠자고 있는 영혼을 일깨울 테니까요.
조령관 너머 흙살을 가둔 시멘트 길을 걸을 때도 조여 맨 신발 끈을 풀어버리고 맨발로 걸어보세요. 우리들이 끝내는 되돌아가야 할 어둠 속 그 아우성들이 잠자고 있는 사랑을 불태울 테니까요.
잃어버린 자아를, 방황하는 영혼을, 울부짖는 이웃을 찾으며 굽이굽이 세월 같은 새잿길을 다함께 맨발로 걸어보세요.
문경새재 / 김시종
산새는 안 보이고, 억새만 보인다.
머리 허연 국가원로들이, 은거하시는 문경새재.
문경새재를 자주자주 찾으면, 젊은이도 쓸만한 현자가 된다.
‘조령진산도’를 읽다 / 김영욱
사라진 호랑이가 배꼽을 떨어뜨린 곳은 이쯤일 거야 성곽 옆구리에 엎드려 숨소리에 귀기울여봐 고깔 운무 쓰고 돌아앉은 어미 산 새재를 품에 안은 그림자도 우뚝한데 골짝 물길이 실핏줄로 감아 도는 등고선 한가운데 어느 멸망한 종족의 태실이 있지 예로부터 태를 묻은 곳엔 복이 들었지 장돌뱅이들이 등목을 하던 삼복더위에도 털옷을 걸치고서 평생을 떠돌았을 호랑이가 죽어서도 숲의 으쓱한 쇄골에 덮어둔 가죽은 하룻밤 묵어가는 길손들의 지름길 되고 봄비도 티 나지 않게 몸 낮추는 곳이 있다면 바로 여기 성황당 어디쯤일 거야 처녀치마로 둘러쳐진 아름드리 귀목을 노령의 소나무가 호위무사처럼 지키고 서있는 무림에서 아침햇살도 동티가 나지 않게 만다라를 그리는데 흙꽃 위에 두툼한 그늘막을 덮어주는 단풍 손은 어느 내생의 천수보살일까 길이 나기 전부터 탯줄을 품고 있던 이 숲은 보름달의 태반 오래전 궁예가 반달 같은 활을 내려놓고 신의 태엽을 발굴한 물의 나이테가 생사윤회의 바퀴라면 지아비의 발등 위로 불거진 핏줄은 사방으로 뻗은 산맥 못 박힌 발바닥에서 팔자로 갈라진 샛길은 괴나리봇짐 지고 호랑나비로 날아가는 활주로 이 울창한 안개들이 숨겨놓은 수구막이숲 길섶에 묻혀 있는 호랑이의 발품은 미래의 족보라지 예로부터 혈을 지른 자리에서 영웅이 났지 대대로 기를 받는 명당이 있다면 백두대간 등줄기를 제 피로 서늘하게 적시며 진달래꽃밭서덜로 새끼들을 밀어낸 어미의 자궁처럼 옴폭해서 아늑한 여기 이쯤일 거야
잡기(雜器) / 김영재
사발이 되려거든 막사발쯤 되어라 청자도 백자도 아닌 이도다완(井戶茶碗) 막사발 일본국 국보로 앉아 고려 숨결 증언하는 백성의 밥그릇이었다가 막걸리 사발이었다가 삐뚤삐뚤 생김새 거칠고도 투박하다 용처가 저잣거리라 잡기(雜器)라고 했던가 무사함이 귀인(貴人)이요, 단지 조작하지 마라* 임제록(臨濟錄)을 바친 그윽한 속뜻 있어 본색이 천한 것 아니라 백성의 밥그릇이었거늘
* 임제록의 한 구절을 일본인 무네요시가 이도다완에 바쳤다 함.
새재를 넘는 선비 / 김완수
청운의 꿈 둘러메고 집 떠난 영남 선비 새들도 할딱이는 이 고개 넘다가 올차게 동여맨 봇짐 나무 그늘에 놓고 쉬었겠다 꿈을 풀어 놓기엔 아직 먼 길 어사화 아른거리는 꽃가지 가만 꺾어 금의환향 스쳐 가는 머리에 꽂다가 사립문 앞에 섰던 어머니 생각에 애꿎은 풀 뽑았겠다 푸르른 꽃가지는 달빛에 흔들리고 안개 헤친 달도 멧부리에서 쉬어 갈 때 범종 소리 잦던 곳엔 소쩍새 울음 가득 하룻밤 시름이야 골짝에 묻히겠지 바람이 넌짓 권한 꽃향기는 안주던가 들병장수 눈웃음 밴 한 잔 술로 목 축이다가 들메끈 바짝 조이고 봇짐 다시 졌으리 하늘로 오르는 듯 끝도 없는 이 고개 구름처럼 쉬엄쉬엄 가는 길이어도 선비는 새재 넘어 하늘까지 넘었겠다
찻사발 앞에서 / 김종렬
툇마루를 닦다 보면 하늘 한 쪽 비치듯 우려낸 찻물 속에 출렁이는 만첩청산 천만 근 묵은 근심이 징소리로 풀린다.
소박함이 하늘 닿아 우주를 품었는가 다호시*한 자락 외며 마주하는 찻사발 누군들 네 심성 앞에 무릎 꿇지 않으리.
문경 땅 처마 위로 사발달 뜨는 저녁 가마내기*앞에서는 천지도 숨 멎는다 다시 핀 천년의 불꽃, 아! 조선의 살빛.
*다호시 : 찻물이 우러나기를 기다리며 읊는 시 *가마내기 : 사기, 옹기, 도자기 등을 구워서 가마에서 꺼내는 일
시(詩) 담은 찻사발 / 김찬자
맨 처음 내 몸은 흙이라 하더이다 맨 나중 내 육신은 옥돌이라 하더이다 이 찻사발이 어디메서 왔는지요 흙과 불의 만남이라지요
어찌 그 둘만의 만남뿐이겠어요 문경 앞산 뒷산이 다가와 섰고 문경 새재 넘나드는 골바람이 쓰담쓰담 달빛 별빛 곱게 받으며 문경 전설 가슴에 담은 흙과 문경 사람 냄새가 밴 흙이 밤새 이슬 내려 새날을 기다리던 도공의 부지런한 손길 따라 푸른 새벽이 오는 길섶 따라 흙사발은 푸른 꿈을 키워가더이다
그날, 하늘재 아래 관음리 동네가 온통 망댕이 전통 장작가마 뜨거운 어둠 속에서 황톳빛 살과 살을 부비며 온몸으로 걱정을 지우며 내 안의 욕망도 하나씩 내려놓더이다
도공은, 두 손 모아 보살마냥 불가마가 식을 때까지 한 자리에 지켜 서서 여태 말 못 한 사랑의 시어들이 찻사발에 가득 담아지길 소망하더이다
문경사과 / 노두원
빗장 열어 속살보이는 문경이라 관문에 들면 햇살 받아 맛살 불린 사과를 맛볼게다 순한 햇빛 시린 달빛 밤낮으로 몸을 키운 호사로움 문경에는 속향 깊은 맛깔스런 사과가 있다
휘어진 가지 잡고 꽃잎 따는 여인들이 문경 아리랑 배음으로 애잔히 깔았으니 씨방에는 열애의 격정 살랑이는 봄바람에 결 고운 문경사과 가지가지마다에 눈을 뜬다
검은 구름 천둥소리에 여름이 다 지나도록 수줍어 잎 속에 숨어 크는 풋 사과 이슬로 꿈을 덮고 밤마다 하얀 바람 쐬며 속살 같은 문경사과 탱글탱글 자란다.
깊어진 가을 햇살 얇은 산기슭에 누런 잎사귀 밀치며 수줍게 내미는 빨간 얼굴이여 문경에는 해를 닮은 사과가 있다
임금(林檎)이 능금 되고 능금이 사과 되듯 고사리가 문희 되고 문경이 된 역사의 텃밭에는 꿀맛 짙은 문경사과 영원으로 자란다
새재 8 – 봉암사*/ 리강룡
가을날 저물녘이면 봉암사를 찾아가자 굳게 닫은 산문을 열고 주지스님을 만나거든 나뭇잎 붉게 물드는 그 의미를 물어보자
정갈한 마당 가 돌탑 앞에 마주서자 세상사 번뇌들을 개석(蓋石) 끝에 걸어두면 비로소 다가서는 소리 젊은 산의 숨소리
구산선문(九山禪門) 그 언저리를 나는 알지 못하지만 법계 피안의 뜰에 그대*이미 와 있거늘 구태여 면벽좌선(面壁坐禪)으로 아홉 해를 가던가.
*봉암사 : 희양산 기슭에 있는 선승의 도량, 일반인에게는 음력 4월 8일 하루만 개방 *그대 : 이 절에서 참선 수도했던 故 성철 스님
술도가가 있는 골목 / 문성해
산사춘 복분자 오가피주 백세주 매실주는 물론이거니와 막걸리 한 병을 마시다가도 그 병을 들어 만든 곳을 확인하는 일 그때마다 나는 경상북도 문경의 어느 오래된 술도가 골목을 더듬더듬 헤매지도 않고 흘러들어가게 된다 산사나무 열매나 복분자 오가피 냄새와 시큼덜큰한 막걸리 냄새가 흘러나오는 그 골목을 찾아들면 누런 냄새 위에 쓰러져 누운 술꾼이 있고 술지게미를 얻어먹고 비틀거리는 개가 있고 삐끔 열린 솟을대문 안에는 조금쯤 요망한 자세로 누워 깔깔거리는 여자들이 있다 어느새 나는 노란 한되들이 술 주전자를 들고 한모금 두모금 마시며 가는 간 큰 애가 되어 미나리꽝이나 앞산이나 저수지가 타박타박 내 눈 속을 아프지도 않게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며 하늘과 땅과 마을과 들판 중에서도 내가 참 크다 하고 돌아앉은 뒷산도 그때만큼은 내 편이란 생각을 하며 이런 술도가가 있는 우리 마을을 내가 참 사랑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옆집 새댁이 내는 스란치마 소리처럼 조금쯤 은밀하고 조금쯤 세상에서 붕 떠나 있는 그 술도가 골목을 어린 나는 어미의 품처럼 파고들었으니 지금도 술을 받아놓고 술병을 들고 소재지를 확인하는 나는 술 한 잔 마시지 않고도 어느새 그 많은 술도가를 다 편람한 듯 마음이 화끈해지고 그 골목에서 술꾼들의 오줌을 다 받아먹고 사는 맨드라미 모양 너도 나도 이해할 수 있는 수굿한 고개가 되곤 한다
문경새재 넘자 / 문인수
여기 문경엔 오래 걸어 오르는 길이 있다. 마음이 날아올라 그 아름다운 산중, 큰 고개를 보게 된다.
무엇이 가로막히느냐, 이 고갯길을 걷자.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지나 정자 터, 주막 터에선 또 쉬었다 가자. 성황당 돌무더기에 돌멩이 주워 얹으며 그래, 한 가지 소원을 빌 때 저 새, 새 한 마리 산 넘는 것 볼 수 있다. 오늘은 그렇게 사람들의 옛길, 문경새재 넘자. 넘어가자.
문경새재를 넘다 / 맹문재
눈발 치는 이 저녁 문경새재를 넘어 묵밥 한 그릇 말아먹고 싶다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불알친구인 동석이가 낡은 방문을 열고 점촌(店村)이란 세상을 찾아 넘었던 길
연둣빛 발걸음이었지만 등 뒤의 어머니와 지게와 보리밥과 그리고 내가 그리워 싸리나무처럼 흔들리지 않았을까
억양 높은 경상도의 사투리를 만나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려다가 다시금 나아가지 않았을까
그 착하고 못나고 꺼벙한 애송이가 꿈꾼 오붓한 겸상
눈발 치는 이 저녁 그의 등잔불 아래에서 묵밥 한 그릇 나누고 싶다
대성암(大成庵) / 민병찬
여승방 빈 뜨락에 사루비아 붉게 타고
선방(禪房)은 비었는지 고무신이 두어 켤레
샘물이 혼자서 종일 절 그림잘 헹구더군.
절 앞에 어능나무 암 수 두 그루 서 있다가
잘 익은 열매 하나를 길손에게 툭 던지며
운달산(雲達山) 가을 소식을 알고 왔냐 묻더군.
조령원터에서 / 박경희
타임캡슐을 연다
낡은 도포자락의 선비가 봇짐을 푼다 어둠이 절벽에서 떨어지고 있는 이름 없는 날 새도 넘기 힘든 고개를 짚신 하나로 넘어왔나 부르튼 선비의 한숨이 툇마루에 벌렁 누웠다 유생의 꿈이 곤두박질한다 여궁폭포에 갓을 두고 온 선비 산은 제 가슴 내어주며 바람을 흔들고 매끈한 여자의 하반신이 초승달에 얼비친다 막걸리 한 사발 생각나는 후끈 달아오른 시간 까악 까악 주흘산의 어둠을 까마귀 한 마리가 쪼아내는
조령원터는 가슴 빛 사연들이 돌이 되어 탑으로 쌓여 있다
주흘관을 지나며 / 박권숙
문경에 와서 문득 길이 새였음을 안다 긴 침묵의 부리로 석양을 쪼고 있는 거대한 저 바위들도 원래 새였음을 안다
죽지뼈 한 대씩을 부러뜨려 길 밝히고 부신 뒷모습으로 재를 넘는 가을산 봉암사 극락전 한 채 봇짐처럼 떠메고
내게는 또 몇 개의 영과 재가 남았을까 그리움의 시위를 당겨 날개를 꿈꾼 이들 저렇게 새재를 넘어 먼 길 갔을 것이다
문경새재, 멧발이 펼쳐지고 / 박봉철 험준한 길이라 새도 쉬어가게 하는 길마루에 젖어 고루한 고개처럼 유곡일까 깎아지른 벼랑의 이력들이 제 몫을 품은 채였다 숨 가쁘게 올라온 축성이 요충지가 되고 새재 곳곳 종일 수런대는 날갯짓, 새의 문자로 기록하는지 길목 몸피 마디마디 출렁이는, 이름 모를 나그네의 족적足跡이 선명하다 골골샅샅이 요충지로 이어가고 눈빗질에 목울대 곧추세우고 당당하게 사수하고 버티고 선 물오른 산줄기, 그 멧발이 펼쳐지네 녹음으로 짙게 물들이는 계절 초입 무성한 생각들이 늘 관문의 갑옷자락으로 휘날린다 한참을 걸어서 낮새껏 넘어가던, 너울가지 새재 철마를 타고 잊혀가는 한적한 발자취, 겅중겅중 달아나고 몸피에 그을린 너른 돌비석들, 즐비하고 저기 쭉 물레걸음하는 긴 관문, 총총 흙길로 뻗은, 문경새재는 고스란히 불그레한 역동域動의 몫이다
모전천 산벚나무 / 박영석
해가 뜨면 귀를 여는 산벚나무 아래로 모전천이 흐르고 그 나무 물 쪽으로 구부려 소리 듣는다
사월 중순 물때가 차면 이파리 꽃봉오리 만선의 봄배가 든다 싣고 온 싱싱한 것들 부려놓으면 꼭 비린내 훅 풍기는 어시장 같다 소래포구 구룡포구 또는 수산시장쯤 되리 비린 것은 비린 것끼리 사람들은 사람들끼리 왁자하니 크고 작은 사설 미끄러진다 어깨위로 등으로 하염없는 꽃 비늘 아가미도 가시도 없는 꽃의 편린들
비늘 화륵 모전천으로 뛰어든다 동심원이 마음에 파랑을 일으킨다 하늘이 몽땅 빠져 흐르는 모전천 푸른 물속에 그림자 거꾸로 박고 산벚나무 어디서 저 하얀 구름 한 자락 펼쳤을까? 구름 둥둥 밟으며 괜히 어부가 되고 싶은 사람들 괜히 물고기가 되고 싶은 산벚나무 집 나선 사람들이 잠시 서성이는 곳 햇살은 가끔 비늘을 뒤집다 주저앉는다
전나무 / 박찬선
문경 새재 관문에 선 나이 많은 전나무를 보고 온 날 밤 꿈에 나는 말 못하는 벙어리가 되었네.
아무리 입을 열어 얘길 할래도 떨어지지 않는 안타까움으로 잠을 설쳤네.
옛 말씀은 살아나 몇 쪽 잔잎으로 피고 아, 이른 봄에 매미 한 마리 가지 끝에서 울고 있네
문경새재, 오리무중을 헤치다 / 배한봉
제3관문 가까이 이르자 문경새재는 안개의 나라라는 생각, 너럭바위 사이로, 소나무 사이로 새어나오는 안개, 계곡 물소리를 덮치며 흘러나오는 안개, 들은 바, 새재라는 이름에는 여러 유래 있지만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말이 가장 시적이지 않느냐 묻던 김형은 안개 때문에 새들이 더 날기 힘들었을 거라고, 새재할매집에서 곱으로 먹은 점심밥 벌써 소화 다 됐다며, 너스레웃음을 친다. 오솔길에 불과했을 옛 문경새재 도적이 다가와 옆구리 찔러도 길동무와 얼굴 구분 못 했을 그 오리무중 헤쳐 과거장에 도착한 선비는 어떤 답 남겼을까. 안개 세상에서의 길 찾는 법 소백준령 같은 필법으로 써내었을까. 일행들이 바삐 걸음을 옮기는 동안 김형과 나는 그런 이야기 나누며 아름드리 소나무에 등을 기댄다. 안개가 만든 이쪽과 저쪽 세계의 경계 어떤 걸음으로, 어떤 마음으로 넘을 것인가.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상주의 닭 찾아준 달성판관 같은 이를 떠올리며 짙은 안개 속에서 다시 가야할 길 가늠하는 우리에게 안개 없어도 안개 낀 새재보다 길 찾기 어려운 이 시대, 길 잘 찾아 가라 일러주는 것인가. 이제야 뿌옇게 삼킨 하늘과 비경 햇살과 함께 슬금슬금 풀어내는 문경새재
흙의 길 / 변현상
씨앗 품어 싹 올리던 엄마의 태반이던 흙이, 흙이 아닌 꽃으로 피기까지 뜨거운 불길 속에서 얼마나 녹았던가
황금빛 어느 집안의 진열장에 나앉을지 향 깊은 노시인의 다완으로 동행할지 어디서 무엇이 되던 모두의 흙이었음을....
손에서 손으로 이어진 문경고을 도요(陶窯) 앞에서 또 다시 생각한다 펄펄 끓었던 그 순간을 식어서 환한 향기여! 눈부신 보물이여!
문경*/ 변희수
그날 흙과 불을 부리고 마루를 넘는 이들 편에 어떤 소식을 들으러 갔는데 귀를 열어 소문을 듣기도 전에 뜬금없는 곳에서부터 들리는 경사가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우리보다 먼저 경사를 확인하고 간 이가 있어서 골짜기마다 사과꽃들이 범람하고 있었다 흰옷을 입은 바람의 종지기들이 몰려와서 댕댕댕 종을 흔들어댈 때마다 꽃들은 일파만파여서 영을 넘는 종소리가 예사롭지가 않았다 품속에서 일제히 꺼낸 두루마리 소식처럼 가만히 귀 기울여 듣고 있으면 어떤 경사가 짐작되고도 남았지만 그 중에는 서둘러 일찍 낙향하는 이들도 있는 눈치여서 후일을 미리 낙점해두고 떠나기도 했다 그때마다 흰 꽃 옆에는 붉은 딱지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뜯어보지 못한 소식들이 궤짝마다 넘쳐났다
* 문경새재. 옛 과거시험을 보러 가던 조령의 길목.
진남교 벚꽃 / 송찬호
경북 문경시 진남교반에는 문을 연 지 백 년이 넘는다는 아주 오래된 벚꽃 은행이 있는데요
해마다 사월이면 나도 그 벚꽃 은행을 찾는데요 갈 때마다 꽃 사태 사람 사태 천지간 온통 희부옇게 벚꽃 예금 인출 사태가 벌어지는데요
그렇게 꽃을 퍼내다 그 늙다리 나무 은행 파산하는 거 아닌지 몰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올해는 벚꽃철 맨 끄트머리에 찾아갔는데요
늦은 오후, 풀풀 날리는 꽃그늘 아래 한 평짜리 평상 휴게실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빗자루 경비가 들려주는 말, 오늘은 내 앞으로 딱 두 사람 고모산 흰 사슴과 서울 사는 비단 구두 장수가 다녀갔다는데요
문경새재에서 / 송택경
백두대간 험준한 조령산 마루 여덟 폭 병풍이 철따라 내걸리고, 오랜 세월의 터를 지키며 말없이 우뚝 선 관문 위에는 천하를 호령하던 신립장군 목소리가 지나가는 발길을 멈추게 한다.
가파른 새재길 푸른 그늘 위에 긴 그림자가 소리 없이 다가오면 산새는 우거진 억새숲에서 속삭이며 잊혀져가는 전설을 정답게 이야기하고, 바람은 또 박달나무숲에서 사각거리며 골골이 얽힌 역사를 꼼꼼히 읽는다.
옛 과거길 굽이돌아 주흘산 혜국사 그윽한 풍경소리 가슴에 파문을 던지고, 깊은 계곡마다 물안개가 조용히 내리면 소쩍새가 들려주는 자장가 소리에 새재는 오늘도 아름다운 내일을 꿈꾸며 설레는 마음 안고 포근히 단잠을 청한다.
막사발 / 서정택
누에 등 굽은 가마 스쳐 나는 불새 한 마리
선홍빛 주둥이로 길어 올린 새재 달빛을
흰 불꽃 넝쿨 번지는 망댕이에 쏟아 붓는다
야윈 어깨 긴 목하고 고단한 님 오셨을 제
휘영청 막사발에 찻잎 띄워 두었으니
외발로 수레 돌리던
바퀴 멈추고 잠시 쉬시게
초적(草笛)을 불고 있는 바람소리 물소리
세사에 반항한 벌로 죄죄 데인 모진 심사를
오늘은 생각 다 벗고
잠겨 봄즉 하잖는가!
문경막사발 연가 / 신동익
호랑이 우렁찬 산마을, 송진내 진동하는 장작과 점토자태(粘土瓷胎) 민요(民窯)에서 결혼했네 천년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아이 막사발.
청자에 밀리고 백자에 누질이고 요강이 밥이 되고, 화분이 밥이 되던 이 땅에 뿌리내리지 못한 기구한 그 막사발.
귀족적 여성적 온화함 그다 분수 밖 깨끗하고 담백하고 검소함 그도 사치 날마다 씀에 편하고 수더분한 막사발.
쌍둥이로 태어나 권좌에 앉을 만한 남성적 분청사기 족보에 올라도, 너는 꾸미지 않아도 수수한 서민적 막사발.
심봉사 눈을 뜨듯, 소박미의 재발견 한류에 돛 달아라, 신안 앞바다 유물처럼 밥그릇 술잔 찻잔에 그대 바코드, 막사발.
가은(加恩) 가는 길 / 신선미
가슴자락 그리움에 바람처럼 우는 날 하루를 접어두고 가방을 챙겨본다 아버지 거칠고 마른 손 기다리는 외딴 집
한 굽이 돌아들면 솔 공지* 물소리가 그동안 품어왔던 내 집 소식 전하겠지 누렁이 순한 눈빛으로 끔벅끔벅 말하겠지
잡풀이 수북해진 언덕 위 제각(祭閣)에는 돌아와 오도카니 선 빈 가슴 안아주며 휘돌아 대처(大處)로 가던 바람도 누웠으리.
* 문경 가은 고향집 앞 내(川)가 흐르는 소나무 공토를 그곳에선 솔 공지라 부른다.
성주(城主) / 신후식
성돌 다섯 포개놓은 외로운 성 성주로서
오는 날 엮다 보면 눈망울들 별이 되고
튼튼한 옹성(甕城) 그리며 자람점을 셈한다.
일흔넷 성돌 주워 외성(外城)과 내성(內城 )쌓고
다른 읍성(邑城) 손잡으며 주민 함께 웃고 즐겨
뛰는 말 휘몰아 가며 키워 보는 진취성.
허물어진 조령산성(鳥嶺山城) 근 삼백 쪽을 나눠
이끼도 털어보고 서린 한도 풀어 담아
묻힌 날 되짚어 보니 불확실성 미랠러라.
새재 죽령 남쪽 사람 큰 산 벌려 세워가니
태고적 이어온 삶 영강(潁江), 낙강(洛江) 그와 같아
치켜든 높은 파고(波高)를 예서부터 삭인다.
문경새재 / 심강우
문경에서 나는 박달나무는 홍두깨가 되었지요 주흘산 조령산을 넘어온 구름이 보자기란들 사시장철 굽잇길 다듬잇돌을 시늉하던 걸음 성황당 고개에서 비손을 하던 여인, 자드락자드락 해동갑으로 잇대던 구김살 어이 다 싸맬 수 있을까요
때까치 울고 오목눈이 직박구리 추임새에 저 멀리 조령관 너머 수안보 지나 한강으로 신수 훤한 도포자락을 언제 또 보려는지, 옷고름에 젖은 사연 낙동강 굽이마다 새재라 새재, 눈 밝은 새들의 기별도 마애비로 남아 하인의 옹심도 선비의 큰마음도 가루를 자청한 기와 조각이 되었지요
새재에 불던 바람은 길이 되었지요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한 줄로 꿴 오르막 내리막 패랭이 쓴 장꾼이 걷던 길 넘으면 시름이요 앉으면 푸념이라던 질경이 바랭이 억세게 핀 황톳길 가도 가도 첩첩산중 애옥살이 닮은 길 어이 다 지울 수 있을까요
새재를 넘어도 새재 새재에 못 미쳐도 새재 사람살이 천길만길 다함없는 발짝으로 문경에 가면 우리 한세상 닮은 새재가 있지요 경사를 들을 날 있다고 문경聞慶 계절이 빗장을 걸고 새들이 문지기를 서는, 새재가 있어 문경이 완성된 그런 곳이 있지요
문경 옛길 / 안도현
가파른 벼랑 위에 길이, 겨우 있다
나는 이 옛길을 걸으며 짚어보았던 것이다 당신의 없는 발소리 위에 내 발소리를 들여놓아 보며 얼마나 오래 발소리가 쌓여야 발자국이 되고 얼마나 많은 발자국이 쌓여야 조붓한 길이 되는지
그해 겨울 당신이 북쪽으로 떠나고 해마다 눈발이 벼랑 끝에 서서 울었던 것은,
이 길이 벼랑의 감지 못한 눈꺼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보았던 것이다
이화령 / 안상학
물처럼 살고 싶어서 그대에게 흘러갔습니다 그 많은 밤길 다 지나서 그 많은 구름 다 돌아서 쑥부쟁이 키 작은 그대 그 맑은 그곳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사랑은 산정에서 구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산을 내려가는 물의 마음이라는 것을 깨달은 뒤늦은 소식 하나 안고 내 이제서야 물처럼 살고 싶어서 그대에게 흘러흘러 갔습니다
새재의 달빛 / 엄재국
새재에 오면, 달의 뒷면을 걸을 수 있다
달 속을 흐르는 계곡물소리에 서로의 눈빛으로 젖었다가 물속에서 갓 건져낸 달을 단풍잎으로 닦아 가슴에 품을 수 있다 주흘관 옛길 걷는 바람에게 수백 년 전, 그 너머 이야기를 들으며 겪으며 조곡관이 펼치는 하늘, 푸른 담장 위에서 왜병을 온 몸으로 막아서던 조선 병사의 마지막 눈길을 만날 수 있다
그 옛날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의 등짝과 가슴이 파여지고 헤쳐지던 여기 새재는, 달빛이 알 스는 마을
모여든 발자국에 땅위의 것들이 익고 풀썩이는 흙먼지 붉은 눈빛이 조령관 가슴 속에 붐비는 노래이려니 낮은 몸 발끝으로 순한 길을 펼치는 우리는 다 같이 길 위의 사람들
누구라도 대문 활짝 열어 놓은 달 속의 첫 동네 문경새재에 오면, 잘 익은 사과를 뚝뚝 따듯 한 광주리 달빛을 담아 갈 수 있다
문경새재 / 오세영
물어물어 찾아왔다. 짐승도 길을 잃고 새들도 쉬어서 넘는다는 문경 새재, 인생살이 고단타 해도 어찌 길 없는 세상이 있겠느냐 은산철벽(銀山鐵壁)엔 무지개가 걸리고 절해고도(絶海孤島)엔 북극성이 뜨는 법. 이 계곡 들어서면 또 다른 계곡 이 봉우리 넘어서면 또 다른 봉우리, 나무에게 물어 메꽃에게 물어 삶의 한 고비를 예서 넘는다. 더듬더듬 오른다. 험하고도 가파른 길, 이 고개 올라서면 기쁜 소식 접할까. 짐승도 날 새도 길을 잃고 헤매는 아, 문경 새재.
문경새재 / 오영록
박달나무 속에는 조탁(彫琢) 공이 살고 있다 겨우내 저 둥근 나이테를 빗도 깎아놓고 다듬어 조각해 놓았다가 보부상 보따리에 끼워 넣는다
박달은 본디 물렀을 거다 겨우내 마음을 다잡듯 햇빛에 바래고 눈보라로 담금질하여 마음을 다잡듯 그리 단단해졌을 거다 새소리로 결을 만들고 재를 넘는 바람의 가쁜 호흡으로 단단해졌을 것이다
겨우내 나이테와 꽃을 조탁하였다가 이른 봄부터 가지가지 연등처럼 연초록 등을 매다는 수고로운 장인의 손길
햇볕에 천 일을 말리고 뒤틀린 결을 천 일 동안 바람으로 바로잡고 유월 소나기로 정제하고 나야 어느 집 식탁으로 대갓집 참빗이 될 수 있다
참선에 들지 못한 나이테는 또 이내 울긋불긋 물들였다가 이듬해 다시 조탁에 들어가는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는 장인이 있다
겨울날 박달나무에 귀를 대보면 그 조탁하는 소리가 쿵쿵 들리기도 했다 문경새재에 들면 숟가락이나 주걱 깎는 소리가 메아리치기도 했다.
문경새재, 높푸른 꿈의 고개 / 유안진
하늘과 땅 사이의 드높은 사이고개 새들도 쉬어 넘은 문경 땅 새재는 백면서생(白面書生)이 넘어가고 초립동(草笠童)이 넘어가고 그이들의 피땀 절은 십년공부가 넘어가서
알성급제(謁聖及第)가 넘어왔고 장원급제(壯元及第)가 넘어왔지만 더 많이 넘어온 한숨 눈물 구비 구비 새소리만이 아니다 바람소리만은 더 아니다
넘어야 하는 꿈의 고개가 하도나 높고 험해 꿈도 높푸르러 고갯길이 되었으리니 바라고 소망하는 그 이름이 되었으리니 문경(聞慶), 귀하고 아름다워 경사스런 이름대로 발뒷꿈치 발걸음마다 기쁜 소식이 뒤따라와 흰 구름 속 고갯마루 문경새재에는 내 모국어의 목소리가 울려 퍼져 낭랑 랑.
흙꽃으로 핀 전설 / 윤보영
잃어버린 전설로 아픈 마음을 반죽해서 찻사발을 빚어내는 사기장!
자제할 수 없는 슬픔을 생사기에 덧칠하고 날마다 장작 가마에 태웁니다.
금이 가고 주저앉고 찾을 수 없는 사연에 소리 내어 우는 불꽃! 가마도 따라 울었습니다.
낙엽 한 잎에 담길 듯 무심한 세월은 안타깝게 지나가고 가마 문을 나서는 사발은 깨어집니다.
그립다, 그립다 날 선 사금파리에 세월이 베이고 끊임없는 실패 끝에 손끝으로 감기는 전설!
가마 속에 들어가 꽃을 피웠습니다 정호다완(井戶茶碗) 문경에서 찻사발로 태어났습니다 지지 않는 사랑이 되었습니다.
물박달나무의 노래 / 이가림
새재 골짜기 물박달나무는 딱 한 곡조 우리네 어메의 어메의 어메 그 어메가 부르던 아리랑밖에 부를 줄 모른다 그것도 아르르르 아르르르 아라리요 나직이 흐르며 이어지는 끝자락만 되풀이 되풀이 흥얼거린다
원래 도끼날도 튕겨져 나가게 하는 꽝꽝한 성미인데, 제 몸뚱이가 방망이로 만들어져 하많은 세월 달빛에 젖어 다듬이질이나 하며 살아온 신세가 너무도 기막힌 탓일까
새재 골짜기 물박달나무는 딱 한 곡조 우리네 할메의 할메의 할메 그 할메가 부르던 아리랑밖에 부를 줄 모른다 그것도 아르르르 아르르르 아라리요 천만 번 다듬이질에도 끊어지지 않는 가락 되풀이 되풀이 흥얼거린다
새재 / 이경림
칠흑의 새재를 넘어 보고야 알았다
한 재가 얼마나 많은 골짜기를 품고 있는지 골짜기들은 또 얼마나 깊은 어둠을 품고 있는지 새들도 넘지 못한다는 재를 칭칭 감으며 낡은 승용차가 위태롭게 내려갈 때 골골의 어둠이 노랗게 언 달을 밀어 올리고 한 치 앞의 벼랑이 시간을 자꾸 헛바퀴 돌릴 때 우리는 생사의 경계 위에 선 아버지를 보았다 온 산에 슬픔이 달빛처럼 번지고 있었다
누구였는지 문득, 넋 없는 사람처럼 재 아래 어른거리는 어린 날을 끄집어냈다 바람나 재 넘어간 옥자 얘기, 구랑리에서 떼죽음 당한 어느 一家의 얘기, 육이오 때, 목숨 걸고 재를 넘겨준 家僕의 얘기며 난리통에 관문 속 어느 골짜기에 묻히신 증조부 얘기를 두서없이 중얼댔지만 두려움보다 재는 높고 슬픔보다 길이 더 휘어 끝내 우리는 말을 잃었다
그러나 누군들 몰랐으리 그 모두 한 재가 토해낸 한숨이라는 걸 그 숨으로 깊어진 골짜기라는 걸 그것이 밀어올린 봉우리라는 걸
이화령쯤에서 / 이기철
황혼의 집들은 조금씩 신의 모습을 닮아 있다 산 아래 산이 눕고 길 아래 길이 누워 살아 있는 것들은 나무도 짐승도 조금씩 신의 모습을 닮아 있다
문경새재는 밤에도 키가 크고 서로 부대끼면서도 아파하지 않는 상수리들만 푸름을 놓쳐버린 잎들을 벌려 남쪽 마을을 향해 펄럭인다
이우출 시조비 제막식에 뇌졸중으로 오지 못한 신동집의 시 한 구절은 우리의 시월을 쓸쓸하게 했다 그날 모인 사람들은 아무도 수안보 길을 묻지 않고 병든 시인의 안부를 물었다
누가 나에게 신의 모습을 그리라 한다면 나는 산짐승들의 유순한 눈에 비친 저녁놀을 그리겠다
저녁의 빛깔이 하늘을 데우는 온기로 떠돌 때 숲은 햇빛을 제 몸 속으로 흡수하고 새소리를 몸 밖으로 뱉아낸다 사람보다 나무들이 먼저 겨울을 예감하기 때문이다
이름 모르는 마을의 집들이 짐승처럼 엎드려 있는 이화령쯤에서 아무도 제 슬픔의 빛깔을 채색하지 못할 때 주황색의 깃발을 들어 나는 지상의 추위타는 것들을 데워주고 싶다
정호다완(井戶茶碗) / 이민숙
연분홍 볼터치하고 기다리는 처녀예요 하고픈 말 다 못하는 조선의 새댁이죠 불길에 화르르 감기는 하혈(下血)을 꿈꾸어요
엄동을 뚫고 나올 어둠 속의 죽순 같은, 비상하려 웅크린 둥지 속의 새끼 같은, 늦은 봄, 바람에 터진 석류알 불빛 같은,
양털 같은 이야기들 한 땀 한 땀 수를 놓아 징소리 퍼진 세상 터질 듯이 볼에 넣고 시간을 길게 저어서 매화꽃을 피워요
새재를 넘으며 / 이상범
관문을 내려서면 발길은 허공을 밟아 급제한 선비들의 주막얘기 들을 수 있다 일찍이 판서를 지내고 문집도 낸 박달대감. 작은 대청 크기만한 암반 위에 걸터앉아 산적들 모의도 듣고 술도 몇 잔 기울인다 늙어선 사냥도 하다 세상 떠난 털보영감. 이제는 고려적 궁궐 자리 잡아 경이로운 듣고 싶은 말발굽소리 아득히 귀에 젖고 계곡을 때리는 산울림 물길 열며 하산한다.
문경 / 이성남
대륙을 포효하는 국토 복판 소백산맥 나래 펴고 조령. 희양. 주흘산 정기 품더니
무문토기 고려청자 청동불상 석회암 무연탄 삶의 흔적 같은 빛깔이네
이제금 빛 한 줄기 다시 뻗혀 함박웃음 만방에 알리니
양산, 농암. 소야천 휘돌아든 계곡 물살로 문경시가 낙동강 장천 큰 뿌리로 우렁차네
무슨 사연들 쏟아부어 새재를 만들었네 – 내가 걷는 백두대간 135 / 이성부
곱게 분바른 얼굴 같은 길이다 험한 벼랑 내려오느라 땀 흘린 만큼 이번에는 편안함이 나를 반기는구나 주흘과 부봉*이 힘줄을 세워 굽어보고 주름 가파른 치마바위도 눈이 부시다 저 많은 절박한 생들은 어디로 갔는지 저 한숨들 잠재워 산은 제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새 세상을 찾아 힘들여 넘었다는 길이 오늘은 너무 잘 닦여서 겨울도 햇볕 아래 노닥거리며 간다 활빈당 무리들이 숲에 숨어 눈을 밝히고 허균의 어린 아들 이 고개를 넘어 도망길을 재촉했다 임진년 관군들도 백성들도 의병들도 돌배와 연이*도 이강년*도 이 고개 넘나들며 흙에 피를 보태었다 역사는 비록 지금 관광명소로 남았지만 좌우 숲에서는 느슨하면서도 팽팽한 긴장이 내 온몸을 감전처럼 흐른다
* 주흘과 부봉 : 경북 문경시 북쪽에 있는 주흘산과 부봉. * 돌배와 연이 : 신경림 시인의 장시 「새재」에 나오는 주인공들 * 이강년(1858~1908) : 구한말의 의병대장
그래여↘ 안 그래여↗/ 이인원
해마다 가을걷이 후면 갓 캐낸 따스한 고향소식과 함께 감또개 잔뜩 넣은 찰떡함지를 지고 오던 문경아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새재 너머 저 먼 나라로 떠난지 오래지만 환갑 지나 들인 양자(養子) 재성이는 어엿한 기관사가 되어 오늘도 서너 량 쯤 이어붙인 귀이개만한 완행열차를 몰고 그래여, 안 그래여로 끝나던 아재의 넉넉한 사투리 사이를 오가고 있을 것이다 그래여↘ 은성, 봉명, 광업소는 모두 폐광 되었어도 문경이라는 이름은 긴긴 갱도 따라 아직도 무진장 채굴 되어서는 내 귓속 그 비좁고 낡은 레일 위를 기적소리 울리며 매일 진입하고 있다 우리는 문경을 한 발짝도 못 벗어났다 재성아, 안 그래여↗
달빛이 새재를 산책하다 / 이종숙
흐르는 길 위의 역사에 풀린 시간은 박달나무 잔가지 질긴 울음으로 슬픔의 모서리가 닳아지는 물굽이마다 소복을 고쳐 입은 억새의 넋을 펼쳐 놓았다
어스름 달빛 하늘재를 잇는 능선 따라 주흘산을 구비구비 느루* 찍어 새재에 이르면 낮은 풀꽃들 살랑이며 이화령에 발그레한 볼 내민다
사슴의 맑은 눈망울에 별빛이 쏟아져 내리고 능선의 잔물결 위에서 제 명에 못간 선조의 영혼이 천 리 길 삼각산**에서 소쩍새 울음소리 잦아들어 낙심한 주흘산이 한양을 등지고 앉았다
하늘재에 기대어 이화령을 바라보며 영남대로 고갯길에 자리를 틀어 앉아 읊는 시 한 수는 흰 꽃 대궁 서걱이는 억새의 노래 술잔 속에 떠 있는 달은 가신 임 붉은 얼굴 설화로 밝히고 머나먼 길 사유의 가슴마다 풀 내음이 스민다
기암절벽에 핀 싸리나무 분홍 꽃송이 저 수심 깊은 곳 칠 선녀 숨결 묻힌 물기둥에 여궁폭포 눈물이 바람결에 별빛처럼 반짝이면 초록의 혼, 숨결에 매혹된 이 밤 사랑의 연분을 익히고 있다
혜국사 풍경소리 저무는 노을 업고 고단한 하루, 햇볕 한 줌으로 분칠한 새재에 그리운 얼굴 닮은 저 달의 흥건한 말들이 문경 밤하늘에 총총 미리내를 깔아 주고 있다.
*느루 : 한꺼번에 몰아치지 아니하고 오래도록. **한양 도읍시 주산을 모집할 때 뒤늦게 소식을 들은 주흘산이 달려가 보니 이미 삼각산이 자리 잡은 뒤였다. 낙심한 주흘산은 삼각산이 보기 싫어 한양을 등지고 앉았다.
문경새재 / 이해웅
새 한 마리 공중 높이 차고 오르며 똥 몇 번 갈기고야 새재에 닿는다 헐떡거리는 것이 어찌 새뿐이랴 지금 눈앞의 시간도 눈시울 적시는 눈물 찔끔거려야 옛 시간에 당도하듯 문경새재는 영남에서 충청도로 건너가는 눈물겨운 고갯길이다 해질녘 긴 그림자는 영남으로 뻗어 있고 나의 야망은 저 북녘 한양으로 불타오르는데 떠나간 뒤의 남은 이야기들은 낙엽처럼 고갯길에 뒹굴고 있다
교귀정에서 / 임병기
가을바람 솔솔 불어 이파리 살랑이고 먼 하늘 반짝이는 별님과 밤 새우며 그님의 뜨거운 연서 그대 온 몸 살랐네.
가을날 시집 못간 여인 입술 붉은 연지 가을 산천 골골마다 듬뿍듬뿍 찍었나 톡톡톡 터질 것 같은 절정의 산 앞자락.
옛선비 한양 갈적 아름다운 계곡 가다 문경새재 교귀정서 시 한수를 읊었겠네 숫처녀 수줍은 가슴 양 볼처럼 붉은 단풍.
이순 인생길 문경새재에서 / 장순덕
문경새재 옛길 더듬어 가는 길, 이순 인생의 쌍곡선이 길 위에 도열한다. 굽이굽이 인생길 위에는 잔도에 갇혀 버린 선조들의 험난한 발걸음이 허상으로 패여있고, 더러는 과거급제 금의환향하는 선비의 기상이 등림하는 풍경마다 수려하게 박혀있다.
우뚝 솟은 주흘관은 남쪽으로 왜적을 경계하고 조령원터 돌담에는 발목 부은 조선 바람이 숨죽이며 휘돌다가 등짐 나그네를 다독인다. 문경새재 탄생 100주년 타임캡슐탑에는 500년의 시간을 앞당기고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역사의 증거가 담겨 땅 아래 묻혀있다.
교귀정에 관찰사 부임 인수인계 서로 귀히 대접하니 새재도 떠들썩하니 축복 소리 울리고 “현세의 귀감 삼으라.” 새 한 마리가 지저귄다. 교귀정 쪽 뿌리를 두고 남쪽으로 가지 뻗어 일제의 만행 상처로 보듬고 춤추며 살아온 소나무의 푸르름을 눈으로 우러러본다.
세상사 찰라 같은 인생 모든 욕심 너럭바위에 부려놓고 제행무상 숨비 솔바람에 반추한다. 용추정에 부르튼 발을 담가 세태에 더럽혀진 발가락을 눈물 시리도록 닦아본다.
물박달나무 군락지 긴 소원탑에 소원 하나 점찍어 올려놓아 오며 가는 속세의 발길 따라 다시 일어서는 인간 닮은 속 깊은 뼈저린 일생으로 살고 싶어라. 조곡관 제2관문 조령산 주흘산 양쪽에서 빼어난 절경 직립하니 천혜의 요충지대 뉘라서 감히 넘볼 손가.
제3관문 백두대간 조령 표지석에 방점 찍고 문득 고개 들어 하늘 받쳐 우러러보니 기우뚱 하늘 끝점, 만공을 가득 품은 새 한 마리 인생 희비쌍곡선을 기류 타며 유유히 유영한다.
새재 石城 / 장용복
상초리 가을 울녘 하초리 겨울바람 그리운 고향 등진 과거길 수향 만리 영 넘어 여울향 소리, 새재의 시린 石城
미소 띤 찻사발에 울궈진 다향 내음 오동꽃 주막 마당 밟고 선 도포자락 관문루 처마 끝 누대 뒤돌아 가던 그길
오동꽃 5월에 피워 강물 위에 띄운 달빛 막사발 아미 닮은 그대의 그믐달로 영남의 능선을 따라 길을 가는 나그네여,
여궁폭포 – 산하 31 / 정석주
문경땅 새재골을 바른 팔로 안아 들면 하늘을 이은 비말(飛沫) 전설마냥 쏟아내고 여인의 고운 숨결로 청류 한 폭 펼친다.
올려다, 올려다보면 거긴 구름 둘러 있고 자욱하게 내려앉은 수해(樹海) 속의 나신(裸身) 하나 이 골 안 향 젖은 바람, 그 숨결의 풀림이라.
내 차마 신선이래도 이 골 안엔 못 살리라 달빛이 쏟아지면 금동불로 환생하는 그 여신(女神) 고운 몸매를 어이 훔쳐 볼 것인가.
새재 영가 / 정완영
<주흘관 뻐꾸기> 한 평생 더벅머리 숯을 굽던 총각 놈이 죽어서 이 산중에 뻐꾹새가 되었던가 뻑뻑국 해종일 산자락 싸리꽃만 흩고 있다.
<조곡관 들찔레> 세월을 울리기야 천년 두고 같은 골물 주막집 설운 각시 빨래하며 나왔다가 뉘 몰래 하얀 발 담근 채 들찔레가 됐더란다.
<조령관 뜬구름> 어차피 한 냥 빚도 빈 소매엔 무거운 것 괘나리 봇짐 벗어 솔가지에 걸어두고 정처도 없는 구름이 혼자 재를 넘고 있다.
소식, 한 소식 / 정일근
문경 김룡사 해우소에 쪼그리고 앉아 앞가리는 문짝 없는 해우소에 앉아 끙끙거리며 뱃속의 소식 기다리는데 얇은 판자로 아슬아슬 뒤를 가린 엉덩이 뒤편에 늙은 보살 한 분 들어 앉자마자 요란한 소리 큰일 보시는데 흠흠 헛기침하며 사람 있소 알렸지만 큰일 보는 틈틈이 더 큰 줄방귀까지 즐겁게 신나게 일을 보시는데 그 보살 큰일 당당하게 마치시고 입측 오구진언 다 외고 나가시는데 사람의 구린내가 연꽃의 향기 같아 뱃속의 근심이나 그 근심 푸는 일이 그게 무슨 가릴 부끄러움이라고 또 다른 근심에 전전긍긍하는 나에게 뻔쩍 번쩍 양 뺨을 치고 가는 소식 막힌 뒤와 오장육부까지 뻥뻥 뚫리는 한소식 찾아오시는데
왕릉장터 / 정형석
십여 년 전만해도 은성탄광 문 닫기 전 사 구일 장날이면 어깨 치며 지났는데 시방은 눈 설레만 치는 허기진 쾡한 장터
나주에서 온 섭이네, 밀양 댁 당진 아저씨 뿌리 뽑힌 숨결들이 꾸역꾸역 밀려와서 하늘을 두 번 이고 산 막장 인생 그들은
낯익은 고향이랍시고 송곳 꽂을 땅뙈기 없어 고만 고만한 새끼들 짠하게 앞이 밟혀 먹뱅이 기적소리에 얹혀 홀씨되어 날려 왔다
푸념만 할 수 없어 동전 짝 하늘보고 음양 비낀 지하막장 개미굴 탄부들은 폐 속에 돌덩이만 담은 무늬 좋은 산업역군
안도 밖도 까만 밤을 싸이렌 소리 흩어놓고 옥녀봉 눈썹위로 우유빛 햇귀 부려놓을 즈음 성냥곽 판자집 사택, 제비집처럼 부산했다
왁자지껄 도탄교길 보름치 봉급날은 상주 집 석쇠판 위 돼지기름 요란하고 헛기침 객기에 실려 색시 화장 짙어갔지
비루먹은 강아지도 낙엽은 시답잖아 진녹색 독이 오른 배춧잎만 물고 다니고 시장 통 술집 다방은 휘청대며 기대섰다
주판알 이해타산, 솜뭉치 육신들로 신사 갱 하품하고 가은선마저 주저앉자 움츠린 폐탄 더미 위 떨고 선 망초꽃들
떠날 사람 떠나가고 갈수 없어 남은 사람 흙바람 부는 왕릉장터 머쓱하게 어정대다 깡 소주 탁배기 한잔에 가을 해를 삼킨다
바람, 안개, 벚꽃 등 / 조향순
왜 울었는지 몰라. 삼십여 년 전 첫해 겨울 토요일 오후, 바람만 무성한 빈 운동장에서 왜 그렇게 흐느꼈는지 몰라.
그러면서 슬금슬금, 새재를 넘나드는 훤칠한 바람에 홀렸네. 진남교의 애잔한 안개에 발목 잡혔네.
십 년이 가고 또 가고 사람이 가고 또 가고
어느 날, 고목으로 어우러진 모전천변 벚꽃길을 간 세월 생각하며 걸을 것 같애. 간 사람들 생각하며 걸을 것 같애 걸으면서 또 한 번 흐느낄 것 같애.
또 그 다음 어느 날, 꽃잎이 눈처럼 떨어지는 날이나 눈들이 꽃잎처럼 흩어지는 날에 나도 꽃잎처럼 떨어질지도 몰라. 나도 눈처럼 녹아버릴지도 몰라.
영남, 문경, 조선요 / 천숙녀
자존(自存)의 이름 얹어 뼈대 하나 세우셨네 억새 떼 몸 부비며 지켜온 시간의 구릉 달 뜨는 호흡까지도 누르고 또 눌렀었다
울리는 종소리에 새 문을 활짝 열고 우주를 품어 안고 정심세계 걷고 있다 닭 울음 여명을 쫓아 튕겨 오른 저 빛 부심
질곡의 자국마다 푸른 혈(血) 돌게 했다 속살 깊이 파고 드는 천년의 운기 심어 불 무덤 가르며 일어선 푸른 부활 명장이여
주흘산 / 채만희
문경의 진산이다 새파란 하늘에 치솟은 사람 형상의 돌산 그 아래에는 미끄러지는 물줄기가 폭포를 이룬 여궁폭포, 문경의 어머니를 만난다
주흘산과 조령산 사이의 계곡 홍건적난 때 공민왕이 피난했던 그 길 위에 혜국사 풍경소리가 흩날린다 지금 역사의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오늘의 역사를 만들어 간다
역사 드라마 촬영 세트장, 백제궁에서 잠시 자신의 안에 있던 왕을 만나기도 하고 초가의 저잣거리에서는 우리들 일상을 돌아보기도 하는 관람객들 과거와 현재가 만나 오늘을 현상한다
문경의 어머니, 주흘산에서 오미자 막걸리 한 잔으로 태평성대가 열린다
문경새재 / 채천수
물소리 듣고 섰고 산너울 보고 섰는 길이고 물 바위고 나무고 산입니다 걷다가 사진 찍다가 저를 닮아 가세요.
환한 마사토 길 성벽 위에 올려놓은 주흘관 용마루가 추녀선을 다 빼문 가을 하늘에 부끄럽지 않은 당신을 써보세요.
봉마다 한번 올라 당신을 가다듬다 돌아가 오미자차를 마시다 생각나면 그때는 당신도 누구의 길이 되어 오십시오.
문경새재 / 최재영
억새풀 우거진 고갯길에 달빛이 휘황하다 조령과 주흘을 곁에 둘러앉히고 굽이굽이 넘어 온 길을 둘러보는데, 달빛을 가득 품고서야 비로소 환해지는 옛길이다 새들은 벌써 다 건너갔을까 오래된 그리움들이 폭설처럼 쏟아지고 막사발은 천년의 비경을 품고 고요하다 수백리 물길을 여는 초점(草岾)*에 이르러 새재를 넘던 옛사람을 생각한다 물굽이 시퍼렇게 일으켜 세워도 못다 이룬 꿈이었을까 아슬아슬 벼랑길을 비껴가는 바람은 계곡마다 눈물꽃을 피워내느라 허기진 산기슭 한사발은 들이켰으리 먼 후일 가슴 뜨거워진 내가 찾아와 다시 맨발로 천년을 거슬러 오르리니, 달빛이 슬어놓은 푸른 전설이 아직도 구슬픈 아리랑곡조로 흘러가는 아, 문경새재
*초점(草岾): 낙동강 발원지 중 하나 (태백 황지, 영주 순흥, 문경 초점)
문경새재에 갔다 / 최형만
조령에 서면 옛사람이 보인다 도포자락 너풀대던 선비도 봇짐 진 그림자도 서둘러 넘어가는 곳 억새풀 움켜쥔 돌길을 따라 걷다가 멀어지면 처음처럼 돌아본다 모가지가 얼어붙는 계절에 섰어도 새재의 풀포기는 피고 지고 또 피는 걸까 재를 넘어간 소식 없는 안부에 숨소리는 몇 갑자가 지나서야 돌아왔다 빛이 다녀간 길마다 들숨을 품고 벗겨진 무늬엔 그 밤의 별빛만 총총 하늘재는 몇 개의 계절을 이고 살았는지 구릉의 말은 물처럼 흐른다 젖은 날숨이 바닥으로 기울 때마다 마른 결기로 흩어지는 청운靑雲의 이름 궁리를 다한 숨도 빗더섰을까 풋내 나는 흙내를 끌어안고 새처럼 휘어간 새재의 후예들 허기진 등골에 그을린 바람을 읽는다 기쁜 소식 죄다 달빛에 숨겨 놓고 천 길 바깥까지 걸어간 사람들 풋눈에 엎드려 문희*聞喜를 적어보면 고개는 그늘의 울음까지 기억하는지 한 시대가 문경聞慶을 불러온다 아, 나는 호시절에 맨발로 왔구나
*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는 문경의 옛 지명으로 과거길과 관련 있다
책바위 무늬에 대한 관찰 / 한분순
흐드러진 마음들을 다독여 품어 안으면
휘날리는 바람, 바람 온몸으로 스며들어
눈 밝은 바위의 큰 뜻 모든 속내 보듬는다.
기대어 있는 저 산 외침의 속삭임들
겹겹이 에워싸는 저마다의 메아리
바위에 들려준 얘기 내려앉아 무늬 된다.
* 책바위 : 문경새재에 있는 돌무더기로 이곳에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전설이 전하는 바위.
문경이 고향이라 했다 / 황금찬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날아간다. 집에서 문경새재가 가깝습니까. 방문을 열면 첫 손님으로 찾아 드는 그가 문경새재였지요.
1942년 그 무렵 동경 어느 직장에서 만났던 친구 그의 이름은 권진태 하도 옛날이어서 내가 잘못 알고 있는지도 모르니 그렇거든 용서 하시라.
나이는 내가 한두 살 위였지. 그 친구는 천재였지 중앙대 법과재학생 그 후 그는 학도병으로 끌려 갔고 나는 성진으로 돌아왔었지. 6.25 피난 때 대구에서 그 친구를 만났다. 우리는 울며 웃으면서 차를 마셨지 그리곤 지금까지 못 만났네.
친구여 지금 어디에 있는가 말하라 대답하라 문경새재보다도 더 그리운 친구 권진태 내가 부르고 있으니 대답해주시오 그리운 친구 내 이름은 황금찬이야.
풍장 25 / 황동규
희양산 봉암사에 다가갔다.
늦가을 저녁 발목이 깊은 낙엽에 빠지고 시냇물 소리도 낙엽에 빠지고 바람 소리까지 낙엽에 빠지는 늦가을 저녁.
걸음 멈추면 소리내던 모든 것의 소리 소멸, 움직이던 모든 것의 기척 소멸, 문득 얼굴 들면 하얗게 타는 희양산 봉우리, 소리 없이 환한,
주위엔 저 옥보라색. 빛들이 몸 가벼운 쪽으로 쏠리다 맑아져 分光 그만두고 스펙트럼 벗어나 우주 속에 사라졌다가 지구의 하늘이 그리워 돌아온 저 색!
때맞춰 하얗게 타는 산봉우리.
마법의 숲 / 황범순
주흘산 내려오다가 문경새재 2관문 오솔길에 걸음 멈추고 햇살 투명이 거미줄을 그리고 아른아른 맑은 물소리 걸러내는 바위에 앉으니
모든 걸 버릴 수 있다 모든 걸 가질 수 있다
꿈도 사랑도 행복도 바람도 구름도 하늘도 겸손도 오매불망도 염치도 당치 않음도 버림도 도 도 다
미움도 아픔도 절망도 독선도 오만도 불손도 설마도 집착도 공연히도 허무도 오히려도 속절없음도 까닭 없음도 가짐도 도 도 다
숲 속에 발 담그고 하늘을 보면 어느덧 마법에 걸려있다
산새노래 살가운 숲으로 가자 도 도 다 가질 사람 도 도 다 버릴 사람 하늘만 이고 섰는 숲으로 가자 마음이 맑게시리 숲으로 가자
주암정(舟巖亭) / 황봉학
바로 여기로구나 비단 물결에서만 돛을 달고 흐른다는 주암이 잠시 쉬고 있다는 곳이
세파를 견디며 노를 젓고 닻을 올리던 사공은 도천사의 부처님 불경을 들으려고 이곳에 정자를 짓고 능소화를 피우고 부처손을 심었으리라
도천사가 사라지고 석탑이 사라진 산을 등에 지고 연꽃을 피우고 달빛을 부르는 사공은 달빛을 안고 비단처럼 흐르는 강을 따라 먼 바다를 떠돌고 있다는 전설은 만들지 말자 오늘도 사공은 금천 어디선가 주암을 띄워 보내는 꿈을 꾸고 있으리라
주암이 쉬고 있는 주암정으로 금천의 소식을 물어 나르는 물총새가 전하는 말을 비천한 나는 알아듣지 못한다 아마도 아마도ⵈⵈ 사공을 불러 주암의 닻을 걷어 올리고 금천의 물길을 가르자는 속삭임이겠지만
거친 뱃전에 앉아 노래를 부르는 달빛이 이슬을 털며 달려오는 사공에게 어서 오라고 어서 오라고 어서 와서 함께 노를 젓고 돛을 올리자고 오늘도 그 하얀 손짓을 멈추지 않는다
-도천사 : 문경시 서중리에 있던 통일신라시대의 절. 석탑 2기는 지금 김천 직지사로 옮겨져 있다.
그릇 이야기 / 황인필
문경 새재에는 말하는 흙이 있다 그 말 받아 적는 사람이 있다 재 아래 사람들이 그를 일러 사기장이라 한다
사기장은 날마다 흙의 말을 받아 적지만 물에 젖은 말은 어려운 한자처럼 칸을 넘어 의미가 파생되는 일이 많아 밥과 잠을 굶으며 자전을 열독한다 흙이 하는 말은 자연의 모음이다 개념과 이념과 관념이 한꺼번에 출렁거리는 문장이다
이렇듯 호방한 문장을 불의 재단에 올리고 사기장은 한 가리 장작으로 눕는다 오정과 자정이 신혼처럼 누운 방 캄캄한 불꽃이 파생을 안고 격렬히 침묵하는 자궁 달 뜨는 소리 꽃 피는 소리 바람 소리가 양수를 덮고 숭고해지는 우주
이 광활한 천체를 사기장은 겸손하게 가마라 한다 가마에서 태를 풀고 나온 자연의 모음 그 아름답고 눈부심을 사기장은 이렇게 읽는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생그릇이라고
도공(陶工) / 황재연
망댕이 불가마에 적송(赤松)만 사루는 이 구릿빛 삶이더라 조선의 미소더라 힘차게 밀고 당기는 풀무질도 신명나고
순백의 혼을 살라 하늘 가득 띄우는 이 눈부신 빛이더라 다독인 외롬이더라 혼신의 힘을 다하니 쏟는 땀이 구슬 되는
화산재 털어 내며 눈물을 흘리는 이 결 고운 흙 한뜸이 무문(無紋)의 달로 뜨면 마침내 흙이 백자(白瓷)로 환생하는 것이리
문경 찻사발 / 황정희
은하 속 환한 혼불 문경새재 차 오르고 천년을 감고 돌아 또 한 세상 여는 물레 황토빛 거친 몸뚱이 깊은 염원 두른다
잉걸불 삼킨 점토 뼈와 살이 타는 가마 유체이탈 정점 위로 열반의 빛 선명하다 죽었다 다시 태어난 찻사발의 저 윤회
눈을 뜬 우아함도 그 반은 울음이다 깊어진 고른 숨결 절절한 맥을 짚어 살아난 정교한 자태 핏빛마저 감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