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일은 빨리 잊어라
어머니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으로 나는 기억을 한다.
장사를 해도 나라에 세금을 내야하는데 나는 그동안 계를 하면서 나라에 세금을 한푼도 안 냈으니까 못 받은 돈은 나라에 세금을 납부한 것으로 치신다는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떼인 돈을 더 이상 마음에 두고 싶지 않으셨던 것이다 아마도 어머니께서는 그렇게 당신에 마음을 여유롭게 다스렸기 때문에 95세 라는 연세에도 불구하고 건강하시고 곱게 늙으신 것 같다.
우리가 흔히하는 말로 버는 사람 따로 있고, 쓰는 사람 따로 있다고 우리 집이 그랬다.
아버지께서는 술을 무척 좋아하셔서 내 기억으로는 하루도 아버지께서 술이 안취하신 모습을 본적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그러다 보니 어린 나로서는 아버지라는 존재는 당연히 그렇게 매일 술을 마시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집안 살림에 그다지 큰 도움은 되지 못했고 그래도 어머니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사채를 놓고는 이자놀이를 하시면서 계를하여 그나마 집안에 보탬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문제는 자식 중 남자로는 나 말고 하나밖에 없는 형이 문제였다.
형은 1945년생 해방둥이였다.
나보다는 8살이나 많은 형 이었는데 나하고는 같은 형제라도 생김새부터가 달랐다.
쉽게 표현해서 나는 4남매 중에 막내로 어려서부터 순둥이로 통했고 매사에 조용했으며 한편으로는 막내답지 않게 어른 스러웠으며 부모님에 말씀을 고분고분 잘 듣는 편이였고 생긴 모습도 그런대로 귀엽게 생겨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특히 막내라 더욱 그런 사랑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형은 터프한 성격에 생긴 모습은 야구선수 박찬호처럼 생겨 전에 LA 다저스 야구 중계 때 투수로 나오는 박찬호 선수를 보면 마치 돌아가신 형님을 보는 듯 나는 착각을 하고는 했다.
그런데다가 형은 공부하기를 무척이나 싫어했고, 반면에 시골에서 짐승 키우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해 중고등학교 다닐 때 집에서 학교에 내라고 등록금을 주면 형은 그 돈을 가지고 외가가 있는 충청도 태안으로 도망을 가서는 짐승을 키운다고 각종 연장을 사서 우리를 짓는다고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매번 아버지나 외할아버지에게 붙들려 인천으로 끌려와서는 아버지에게 호되게 매 맞는 것을 나는 울면서 곁에서 지켜보고는 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일들이 한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서너 번은 그랬던 것으로 기억이 되고 결국 형은 고등학교를 3군데나 전전하면서 졸업도 제대로 하지를 못하였다.
돌아가신 형님에게는 안된 이야기지만은 형이 얼마나 천방지축이었으며, 또 얼마나 시골에 대한 동경심이 강했으면 1971년 내가 동산고등학교 3학년 제학시절 나는 당시 학교에서 야구선수로 대학을 가느냐 마느냐하는 상황에서 그래도 어머니께서 워낙 알뜰 하셔서 조금은 여유 있는 돈으로 허름한 초가집을 헐고 단층이지만 슬래브 집을 짓기로 하셨다,
그 당시 기억으로 집을 짓는 돈이 전부 110만원이 드는데, 그 중 50만원을 은행에서 찾아와야 하는데 어머니께서는 형한테 돈을 찾아오라고 시켰다가는 예전처럼 돈을 가지고 시골로 도망을 칠 것 같아 미덥지 못하셨는지 나보다 5살 위인 작은 누이를 붙여서 동생과 함께 은행에 가서 돈을 찾아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오전에 돈을 찾으러 간 남매가 저녁때가 되어도 돌아오지를 않자 어머니께서는 도대체 애들이 무슨 일이 있어 이렇게 안 오나 하고 노심초사 기다리고 있던 중 저녁 무렵 골목길 저쪽에서 작은 누이가 혼자서 오는 것을 보고는 어머니께서 "아니 오빠는 어디 가고 이제서 너 혼자 오냐"고 묻자 작은 누이는 기겁을 하며 어머니에게 "오빠가 돈 가지고 안 왔냐"고 되물었다.
어머니께서 안 왔다고 하자 작은 누이는 그 자리에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아이고 내가 친구하고 약속이 있어 그렇지 않아도 오빠한테 오빠 이돈 무슨 돈인지 잘 알지 이돈 가지고 또 도망가 하면서 건네주었는데 정말로 도망을 갔다고 울부짖었다. 그 당시 나는 형님이 우리식구 모두를 배신했다고 생각을 하면서 그야말로 내 눈에 당장보이면 형 이구 뭐구 요절을 낼 것 같았다.
그 도 그럴 것이 다른 돈도 아니고 집 지을 돈을 가지고 도망을 가버렸으니 식구 모두가 기가 막혔다 그러나 이번에 집을 나간 형은 시골 외 가집에도 나타나지를 않았다. 결국은 집 지을 돈의 절반을 형이 가지고 집을 나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시집간 큰누이가 돈을 여기저기서 융통을 하여 우여곡절 끝에 겨우 집을 지을 수가 있었고 어렵게 지은 조그만 단층 슬래브 집은 그래도 전에 살던 초가집보다는 훨씬 좋았다.
우선은 여름철 장마가 져도 비가 새지를 않아서 좋았고 전에는 장마철 비가 많이 올 때는 앞마당 하수구에서 개천물이 역류를 하여 안방 문턱까지 찰랑 거릴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온 식구가 비상이 걸려 양동이로 물을 퍼내며 난리를 피웠지만 이제는 그런 불편함에서 해방 된다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아마도 나는 어려서부터 낮은 지대에 살면서 그러한 일들을 겪으며 살아서 인지 내가 처음 장만한 집이 수봉공원 꼭대기에 위치를 하였는데 어찌나 높은지 옥상에서 내려다보면 인천 앞바다가 내려다 보일정도다.
그 후 새로 장만한 지금의 아파트위치도 답동로얄아파트로 1층 높이가 주변건물 3층높이로 고지대에 위치한 아파트를 분양받았는데 그러한 것들이 아마도 어려서 저지대에 살면서 물에 대한 안 좋은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높은 곳에다 지은 집을 선호 하는 것 같다.
형에 대한 야속함과 미움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원망과 미움에서 걱정과 그리움으로 변하였다.
그것이 피를 나눈 형제이고 부모자식인 모양이다 특히나 어머니께서는 이따금 눈물을 지우시며 큰 아들 걱정이 날로 날로 늘어만 갔다 아버지는 전 보다 속이 상하셨는지 술을 더 많이 드셨다.
그러던 어느날 누군가를 통해서 형이 동네를 배회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온 식구가 형님을 찾아 나섰는데 골목길 모퉁이에서 초췌한 모습의 형을 찾았다.
형은 가지고 나간 돈을 몽땅 쓰고는 오갈 때가 없자 결국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한테 혼날 것이 두려워 집에는 차마 들어오지도 못하고 집주변만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어머니께서는 자식에 대한 원망 보다는 형이 돌아와 준 것만도 고마우 셨는지 형을 끌어안고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셨다.
저녁 잠자리에서 형은 이불속에서 나를 꼭 안고서는 연거푸 미안 하다고 미안 하다고 말을 하였다. 나는 그런 형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고개만 끄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