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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곽정과 양과 원문보기 글쓴이: 이정범
이번 글은 김용이 독자들의 질문에 답한 내용입니다. 김용의 작가로서의 생활이 짧은 시기가 아님에도 인터뷰나 독자들의 질문에 답한 것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2회에 걸쳐 독자와의 문답을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김용이 본 김용 소설(1)
어떤 소설이 당초 계획한 것과 다른 방향으로 나가 후회한 적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다만 결점이 있는 곳은 수정할 것입니다.
호비와 묘인봉의 대결의 결과는 어떻게 된 것 입니까?
호비가 결국 칼을 내려쳤을까 아닐까 하는 것은 독자 스스로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만약 그랬다면 어떻게 될까? 안 그랬다면? 이는 흥미 있는 것이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소용녀가 부활함으로서 <신조협려>의 특질이 파괴되었는데 그렇게 쓴 것에 후회하지 않습니까?
소용녀가 살아나지 않았다면 내가 제일 먼저 울었을 것입니다.
어째서 <녹정기>의 풍격은 다른 소설과 차이가 큰 입니까?
이전의 소설들과 중복시키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일부로 다른 작품들과 큰 차이를 둔 것입니다.
<의천도룡기>가 당신이 가장 만족하는 작품입니까?
모든 작품은 모두 내 자식과 같은 것으로 고하를 나눌 수 없습니다.
이전에 자신이 창작한 소설을 되돌아보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막 작품을 쓰기 시작한 것은 연재하기 위한 것이므로 쓰는데 바빠 어떤 곳은 세밀하지 못하여 지금은 몇 몇 작품을 잘 수정하고 싶습니다.
쓰면서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구조를 완성한 후에 쓰십니까?
큰 틀이 사전에 되어야 그림이 잘 나옵니다. 세밀한 것은 쓰면서 생각합니다.
양과를 창조할 때 누구를 모델로 삼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양과의 개성은 현대성과 반역성, 아울러 제멋대로의 기질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책 속의 인물을 모두 동일 시대에 놓는다면 누가 ‘천하제일’ 입니까?
이건 모두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김 선생께서 가장 좋아하는 남여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남자로는 곽정, 교봉, 영호충이 내가 좋아하는 인물이고, 여자로는 황용, 임영영, 소용녀 같은 사람을 매우 좋아합니다.
소설중의 무공초식과 명칭은 어디서부터 영감을 얻는 것입니까?
초식의 명칭은 책으로부터 얻은 것으로 ‘항룡십팔장’의 초식은 <역경>으로부터 영감을 얻었고 어떤 것은 스스로 생각해낸 것입니다. 비교적 특별한 명칭을 좋아하는데 일반 무협소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흑호투심(黑虎偸心)’과 같은 종류는 매우 평범한 것으로 독자들의 상상력을 이끌어 내지 못하므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36권의 책을 연관성 있게 할 계획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심해서 시대적 연관성을 넣더라도 오히려 좋지 않습니다.
일부 작품의 결사단체와 방파조직이 합리적인 세계라고 생각하십니까?
얼마 전 김용 소설 국제 학술 연구토론회에서 쓰투다시엔(司徒達賢) 교수가 내 소설 속의 남자주인공과 방회조직이 경영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을 제기했는데 나는 어느 정도 수긍합니다. 개방 같은 경우 관리가 매우 좋지 않고, 홍칠공 같은 사람은 온종일 보이지도 않는데 관리가 좋을 리가요!
<천룡팔부>의 통솔자 대형은 무림 중에서 무척 높은 지위입니다. 그런데 그의 동료들이 그의 신분을 감추다 모두 해를 입는데 그는 왜 모습을 나타내지 않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소원산이 핍박하니 자신이 통솔자 대형이라고 시인하는 것입니까?
통솔자 대형은 바로 현자방장입니다. 강민이 단정순을 통솔자 대형으로 모함할 때 소봉이 볼 때 단정순은 중년이므로 안문관의 사건으로부터 시간을 추산해보면 단정순의 나이가 너무 젊다는 것을 당연히 생각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이것이 이치에 맞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얘기해 보면 통솔자 대형을 찾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별안간 찾아낸 것으로 정서적으로 매우 흥분된 상태였으므로 이런 것을 생각해내지 못 한 것입니다. 하지만 소봉은 세심한 사람이므로 생각해볼 수 있었으며 그래서 나중에는 이를 고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약간 동문서답인 듯-_-;)
단정순은 도처에서 다른 사람과 정을 뿌리고 다니는데 최후에 이르러선 그 자신 스스로도 자신의 부인도 그러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떤 의도로 이러한 줄거리를 안배한 것입니까?
이것은 인과응보의 문제가 아니라 극의 구조와 관계된 문제입니다. <천룡팔부>에서 단예와 많은 여인들은 사랑을 하게 되는데 마지막에 그는 그 여인들이 모두 아버지의 사생아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매우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로 만약 단예가 나중에 자신이 단정순의 소생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면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요한 의도는 극의 구조의 문제 때문인 것입니다. 결코 단정순이 다른 사람의 처를 유혹하니 다른 사람도 그의 처를 유혹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단정순의 처는 너무 불쌍하지 않습니까?
<소오강호>의 도곡육선은 이미 육칠십 세의 노인입니다. 하지만 책에서 그 중 한명의 신선이 다른 신선에게 말하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있습니다. “우리 어렸을 적에 언젠가 한번 이웃집에서 훔쳐 먹던 기억이 안 나오?” 그러자 다른 한명이 말했다. “그건 이미 삼십여 년 전의 일이다.” 만약 도곡육선이 6, 70세라면 30년 전에는 그들은 당연히 3, 40세의 사람들인데 어째서 “우리 어렸을 적”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첫째는 도곡육선은 육칠십세의 사람이 아니고 사오십세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도곡육선은 머리가 좋지 못하고 어렸을 때는 그들 시기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이므로 그들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우리 어렸을 적”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습관적인 문장입니다.
황약사는 여섯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차례로 배열하면 진(陳), 매(梅), 육(陸), 곡(曲), 무(武), 풍(馮)입니다. 만약 이런 배열로 본다면 진현풍은 당연히 대사형입니다. 하지만 한번은 둘째인 매초풍이 진현풍을 두 번째로 놓기도 하고 자신을 세 번째로 놓기도 합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도대체 누가 대사형 입니까? 다른 방면으론 곡령풍이 스스로 곡삼(曲三)이라 하는 것으로 보아 세 번째 항렬이지만 한번은 또 황약사가 육승풍에게 말하길 “내 셋째 제자”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진, 매, 육, 곡 인지 아니면 진, 매, 곡, 육인 것 중 어느게 맞는 것입니까?
이 문제는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지만 곡삼이란 것은 반드시 동문 간에서 세 번째란 뜻은 아닙니다. 진현풍, 매초풍, 곡령풍의 이 관계는 다시 새로이 안배해야할 문제로 <사조영웅전>의 설자[楔子 -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의 시작 부분으로, 본 이야기 앞에 나와 어떤 사건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따로 설명하는 절]속의 허점은 다시 보완할 것입니다.
김용선생께서 곽정을 매우 추앙하는 것은 “협지대자”라는 원칙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곽정은 처음에는 양과와 소용녀가 사도관계이므로 같이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모든 사람이 양, 용 두 사람을 싫어할 때 곽정도 그러하였는데 16년이 지나고 양과가 신조대협이 되어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게 되자 두 사람을 곽정은 혼인한 것처럼 표현합니다. 이런 전후의 불일치 된 표현방법이 정말 “협지대자”의 풍모입니까?
당시 송조는 심지어 지금의 대만에서도 스승과 제자가 사랑의 감정을 갖는 것은 불륜이지만 나는 스승과 제자는 사랑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의 사고방식에선 만약 법률규정이 사람들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연애할 수 없는 것으로 연애란 것은 성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국가의 법률규정은 상이하고 민간의 전통적인 관념 등이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영국과 프랑스에선 cousin은 결혼할 수 있고 중화민국에선 외종사촌은 결혼할 수 있지만 사촌오누이는 결혼 할 수 없습니다. 난륜과 불륜은 다른 것으로 난륜은 아버지와 딸 오빠와 누이 혹은 동생과 누나 등....이것은 당연히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난륜이라는 것은 때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예를 들자면 한 고조의 아들은 한 혜제는 그의 누나의 딸을 황후로 취했는데 조카가 외삼촌에게 시집오는 것은 현대 대만이나 홍콩 혹은 대륙에서도 모두 법률로서 금지되는 것이지만 한나라 때는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혜제가 황후를 취한 시기에는 황태후 여치(呂雉)가 정식으로 혼사를 주관한 것입니다. 총합해보면 법률규정이 허락하면 연애는 가능하고, 성관계를 맺는 것이 가능하다면 결혼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남송과 북송은 중국에서 예교가 가장 엄격하던 시기로 가장 폐쇄적인 사상을 가졌고 가장 개방적이지 못한 시기이므로 당시의 사람들은 스승과 제자는 결혼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했으므로 양과와 소용녀는 결혼할 수 없었고 당연히 연애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의 곽정에 대한 묘사는 “위국위민 협지대자”로 국가를 배반해선 안되고, 백성을 배반해선 안되며, 협의의 신조를 반드시 준수한다는 것입니다. 곽정의 사고방식에선 양과가 국가와 백성을 위해 큰 공을 세웠으니 스승과 제자간의 결혼은 사회도덕상 사소한 문제이므로 그들을 이해하고 탓하지 않은 것입니다. 대절(大節)이 어긋나지 않는다면 작은 일은 수월해지는 것입니다.
영호충이 사과애의 동굴 안에 있을 때 뜻하지 않게 많은 검초가 새겨진 석벽의 비밀통로를 발견하게 됩니다. 마교장로들이 동굴에 갇혀 통로를 뚫을 수 있었다면 몇 촌을 더 파 벽을 뚫어 탈출 할 수 도 있었을 텐데 의외로 마지막에 힘을 다하다 죽고 맙니다. 나는 이것이 이상하다고 생각되는데 어려움을 겪을 때 힘을 다해 활로를 뚫을 생각은 안하고 왜 검초를 새긴 것입니까? 만약 마교장로들이 검초를 조금만 새겼다면 탈출할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요?
인생에선 우연의 요인이 매우 많습니다. 소설가 예광 선생은 인생의 슬픔도 여기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탄식했는데 인생의 차이란 매우 작은 것으로 큰 차이가 없으며 생사의 거리 또한 아주 짧은 시간에 결정되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사랑하는 사람을 뜻하지 않게 우연히 만나는 것은 종종 한 걸음을 더 간다거나 5분 일찍 도착한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만날 수 있습니다. 한걸음 적게 가거나 5분이 늦어 두 사람이 서로 만날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마교장로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운이 좋지 않다면 적게 벽에 새겼더라도 나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조협려>에서 독자들을 가장 실망시키는 부분은 아마도 소용녀가 윤지평에게 정절을 잃은 부분 일 것입니다. 소용녀는 어렸을 적부터 고묘에서 자랐고 세상과 격리된 삶을 살았으므로 그가 알고 있는 사람은 아주 적었으니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특히 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손씨 할머니가 죽은 후 그녀는 양과와 많은 해를 조석으로 맞대고 있었으므로 양과의 몸에서 나는 냄새와 숨소리, 행동과 몸무게 등을 소용녀는 무척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윤지평을 양과로 오해하는 것입니까? 또한 무학의 각도에서 생각해 본다면 양과와 윤지평이 수련한 내공심법이 다른데 어째서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소용녀가 호흡소리로 두 사람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어째서 그렇게 쉽게 자신의 몸을 잃은 것입니까?
이 문제를 제기한 독자는 내가 생각하기에 나이가 아마 적고 성경험이 완전히 없는 독자인 것 같습니다. 소용녀가 정조를 잃을 때는 지금까지 성경험이 전혀 없는 처녀로 처음 겪는 일로 마음은 당연히 놀라고 부끄럽고 기쁘기도 하며 분노하기도 하는 것으로 정서적으로 매우 혼란스럽고 복잡한 상태인 것입니다. 이런 감정상태에 비추어 본다면 소용녀가 무공의 문제를 전혀 생각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로 만약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한다면 경험이 없는 처녀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런 상황에선 소용녀가 아니라 더 세심하고 무공이 높고 심지어 나이가 더 많고 성적 경험이 더 풍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공에 관한 문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장취산과 은소소는 빙화도에서 결혼해서 십년을 같이 살았는데 어째서 장무기 하나만 낳은 것입니까? 설마 당시에 매우 진보된 피임기술이 있었던 것입니까? 누군가는 줄거리의 안배를 위해선 장무기가 형제를 가지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불합리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합리적인 해석이 가능할까요?
이 문제는 간단하게 대답한다면 은소소는 다시 아이를 낳을 여력이 없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있는가하면 생물학상의 해석에 따르면 만약 생장환경이 좋지 못하다면 동물은 자연히 생육을 감소시키게 됩니다. 예로 기후가 매우 한랭하면 흰곰과 같은 유의 동물은 많은 번식을 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해 한대지방의 생물은 번식하기가 쉽지 않지만 열대지방의 생물은 번식력이 비교적 좋습니다. 은소소는 빙화도에 있었으므로 기후가 무척 추웠고 따라서 그녀의 생식능력은 자연히 영향을 받게 된 것입니다.
소용녀가 곽부의 빙백은침에 맞은 후에 독에 중독되고 이미 오장육부에 깊이 스며 이치에 맞다면 그녀는 살아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절정곡의 밑으로 뛰어내렸을 때 벌꿀을 먹고 백어(멸치, 은어 등의 치어)를 먹었다고 다시 건강을 회복하는 것입니까? 이런 안배가 비록 양과와 소용녀의 개성에 따른 안배였다고는 하지만 아무의 도움도 없이 그랬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것으로 사실 소용녀의 중독이 심하지 않았던 것 아닙니까? 인물의 성격이 그러하였다면 두 사람을 16년이나 떨어지게 할 필요가 있었나요?
양과와 소용녀는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첫째는 소용녀가 중독 된 후 양과와 소용녀는 심리적으로 매우 절망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그들의 생명을 구해줄 수 있는 천축승이 이막수에게 죽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그들의 혼인은 줄곧 곽정과 황용의 반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엔 살고 죽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들의 사랑에 미래를 가질 수 없었으므로 죽는 것이 나으며 죽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했기에 자연히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소용녀가 절정곡 지하에서 16년 동안 살았는데 어떻게 나무껍질로 흰옷을 만들고 16년의 풍상을 겪으면서도 옷이 계속 하얀 것입니까?(이 문제는 통신상에서 열렬한 토론을 불러 일으켰다.)
이 문제에 관해선 쑤덩(蘇墱)선생이 이미 일종의 해석을 제공했는데, 절정곡의 밑엔 먼지가 없어서 소용녀가 입고 있던 백의가 16년이 지나도 여전히 흰 옷이었다는 것입니다. 소용녀가 입고 있는 옷이 찢어지면 나무껍질로 잇고 구멍난 곳을 꿰매였을 테니 아직 흰옷으로 남아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소용녀가 절정곡에 오래 있었기에 양과가 그녀를 봤을 때 그녀의 옷엔 구멍이 나있고 꿰맨 흔적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백의는 어떻게든 백의로 검은색이나 빨강 혹은 누런색으로 변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의천도룡기>에서 멸절사태는 도룡도와 의천검은 황용이 양과가 곽양에게 준 현철중검을 녹여 서방의 제련술을 이용해 만든 후에 도룡도엔 무목유서를 넣어 무목유서를 얻은 후세사람이 원을 무찌르길 희망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의천검엔 구음진경을 넣어 만약 무목유서로 원을 물리친 자가 백성을 괴롭히면 다른 사람이 구음진경의 무공으로 그의 생명을 뺏을 때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무목유서나 구음진경을 얻으려먼 반드시 도룡도와 의천검을 서로 부딪혀야만 했는데 이렇게 된다면 두 권의 보전은 한사람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니 이러면 황용의 배려는 성립되지 않게 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확실히 빈틈으로 도검이 서로 깨진 후에 보전이 한사람의 수중에 떨어진다면 한사람이 다른 사람을 억제하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문제는 다시 천천히 생각해봐야겠습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좋은 의견이 있다면 거리낌 없이 말씀하셔서 내가 수정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신조협려>에선 양과와 소용녀가 꽃 수풀 속에서 옥녀심경을 연마할 때 윤지평과 조지경의 방해로 소용녀가 주화입마를 당해 중상을 입게 됩니다. 당시 양과는 소용녀의 “혈행이 부족해서 운공해서 치료할 수가 없어.”라는 말을 듣고선 자기의 팔목을 물어 상처를 소용녀 입에 갖다대고 선혈을 소용녀의 입속으로 넣게 됩니다. 이런 양과의 수혈방식이 정말 가능한 것입니까? 만약 두 사람의 혈액형이 맞지 않다면 오히려 소용녀의 상세는 너 나빠지는 것 아닙니까?
이는 절대 혈액형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수혈방식을 쓰면 피는 위속으로 들어가 소화되고 절대 혈액형이 맞나 안 맞느냐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정리에 비추어 말한다면 만약 당신과 애인이 넓은 벌판에서 갑자기 그 사람의 피가 멈추지 않고 당신도 의학상식이 전혀 없는데 그의 얼굴이 갈수록 창백해져만 간다고 합시다. 이럴 때 “그이의 피가 부족하니 내 피라고 먹여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자기를 상처 내 그 사람에게 마시게 하지 않을까요. 이건 당연히 그것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이런 급박한 상황 하에선 이런 가장 원시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피를 보충해주고 싶지 않을까요?
혈액형에 관한 문제로는 중국시보의 부 편집장인 쑤덩 선생이 이미 제기한 문제가 더 중요합니다. <소오강호>에서 남봉황은 네 명의 묘족여자로 하여금 거머리로 자신들의 피를 빨아먹게 한 다음 영호충에게 수혈하고자 합니다. 이런 직접적인 수혈방식은 혈액형의 문제와 관계가 있습니다. 남봉황 등의 사람의 혈액형이 영호충과 일치할 수는 없으므로 이런 수혈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한 가지 해석을 생각해 낼 수 있는데, 가능한 것으로 영호충이 당시 내공은 매우 이상하였으므로 묘족 여자들의 혈액형이 그와 달랐지만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항룡십팔장을 계산해보니 항룡십팔장은 15장이나 16장만 있다고 하는데 내가 계산한 바로는 18장입니다. 하지만 어떤 초식은 중복된 것으로 용전어야와 전룡재야, 어약어연과 혹약재연은 중복된 것입니다. 이것은 중복된 것입니까?
항룡십팔장은 소설 속에서 다 사용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16장만 쓰면 됩니다. 다른 2가지의 초식은 굳이 쓸 필요가 없는 것으로 홍칠공이나 곽정이 일부러 사정을 봐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의 이런 해석은 억지 부리는 것으로 농담하는 것이니 모두를 조금이나마 기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수정하면서 여러분의 의견을 수렴해 합리적으로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김용이 그녀를 걸고넘어지다.”이는 다음과 같은 역사시험문제 때문입니다. “송나라 사람들의 몽고에 대한 저항은 매우 장렬했다. 송나라가 양양성을 지킨 것은 몇 년인가?” 그녀는 원래 6년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신조협려>에서 곽양의 출생 전부터 곽정과 황용이 양양을 지키고 있었고 곽양이 16살 생일이었을 때도 아직 함락되지 않았으니 6년을 16년으로 고쳤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태클이 걸린 거지요. 김용 선생은 이 소녀의 억울함을 어떻게 풀어주실 건지요?
좋습니다. 누명을 벗겨드리겠습니다. 송나라 사람이 얼마나 양양를 지켰는가에 대해 나는 절대 6년임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사서에 기재된 근거로 보면 몽고인이 양양을 친 것은 가장 이른 게 서기 1234년으로 송나라 이종 단평원년입니다. 몽고인이 양양을 공격한 원인은 남송이 몽고와 연합하여 금나라를 멸한 후 양양등지를 회복했는데 몽고인은 그 영토가 자기들 것이라 생각해서 양양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지만 함락시키지 못한 것입니다. 이후에 몽고인이 사천(四川)으로 우회하여 양양을 공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다시 우회하여 대리로 들어가 두 방면으로 협공을 가했지만 양양을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당시는 서기 1273년으로 송나라 군사가 양양을 지킨 지 39년이 되었으니 절대 16년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6년도 아닙니다.
양과는 주백통에게 “이것은 내가 독창한 17로 장법이요.”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이 자세히 계산해본 결과 18초인 것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이렇습니다. 심경육도(心驚肉跳), 기인우천(杞人憂天), 무중생유(無中生有), 타니대수(拖泥帶水), 배회공곡(徘徊空谷), 역불종심(力不從心), 행시주육(行尸走肉), 도행역시(倒行逆施), 폐침망식(廢寢忘食), 고형척영(孤影隻影), 음한탄성(飮恨呑聲), 육신불안(六神不安), 궁도미로(窮途末路), 면무인색(面無人色), 상입비비(想入非非), 태약목계(呆若木鷄), 신수불사(神守不舍 혹 魂守不舍), 약유소실(若有所失). 암연소혼장은 몇 초입니까?
전 17초가 비교적 합리적인 것으로 봅니다. 당시 이야기가 잘못 되거나 인쇄가 잘못 된 것 같은데 지금은 확정적으로 17초가 맞습니다. 양과가 암연소혼장을 시전할 때 넋이 나가 있는 상태고 소용녀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정신이 없을 때라 17초인지 18초인지 계산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으로 미루어 보면 양과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여러분께선 그를 책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황약사가 30살에 제 1차 화산 논검에 참가했다고 가정하더라도 제 3차 화산 논검 때에는 대략 8, 90세입니다. 황약사뿐만 아니라 일등대사 노완동 주백통, 심지어 <사조>에서 이미 늙은 도사인 전진칠자들은 <신조>에도 등장합니다. 이런 “백 살 클럽”의 사람들은 제 3차 화산논검에도 참여해 펄펄 날라다니니 정말 사람들의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바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재미는 있지만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
무예를 연마한 사람들 게다가 내공이 훌륭한 사람은 수명이 좀 깁니다. 그래서 주백통 같은 사람은 8, 90세에도 화산논검에 참여할 수 있는 것으로 전 이것이 가능하다 생각합니다. 만약 불가능하다면 그들을 말처럼 풀어놓는다면 더 오래 살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