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불타는 밤
제33군 산하 제31사단 제28연대는 하남성(河南省)의 낙양(洛陽) 가까이까지 진출해 있었다. 때는 1944년(昭和 19년) 1월 하순이었다. 일본군은 중국대륙에서 결정적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 몸부림 치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 전쟁에 시달린 지금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31사단만 해도 중부 중국을 목표로 대공격을 개시했었지만 지금은 겨우 산발적인 전투에 열을 올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처음 예상과는 달리 전쟁이 장기화되자 중국군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도처에서 기습작전을 해오고 있었다. 중국군이 용감하다는 것이 차차 구체화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군은 잠시도 마음을 놓을 여유가 없었다.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이 터졌을 때만 해도 중국군은 별로 훈련도 받지 못한 오합지졸에 불과했었다. 그러던 것이 연륜이 쌓이자 정예군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고, 더우기 미군의 지원으로 중무장을 갗추어 나가고 있었다. 따라서 처음과는 달리 이제 중국군은 일본군에게 있어 얕잡아 볼 수 없는 두려운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장개석(蔣介石)이 이끄는 중국군 주력은 중경(重慶)을 중심으로 한 대륙 남부에 진을 치고 있었다. 중경으로 천도한 장개석은 결사항전(決死抗戰)을 외치며 완강히 저항하고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일본군 사단병력이 궤멸되기도 했다. 따라서 장개석이야말로 일본군으로서는 가장 위험한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장개석 그는 확실히 우수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청렴강직했고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특히 흡인력이 있었다. 일본군에게 추풍낙엽처럼 휩쓸리는 수억의 중국인을 항일(抗日)의 기치아래 한데 묶어 중국을 지키게 한 것은 전적으로 그의 공이었다. 이 점에서 그는 중국 현대사의 영웅이었다. 모택동(毛澤東)은 그 다음의 인물이었다. 만일 장개석이 없었다면 모택동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장개석 없이 모택동이 혼자 중국을 이끌고 항일전을 전개하는 것은 극히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모택동은 장개석에 훨씬 못 미치는 인물이었다.
중부지방은 그렇게 혹독하게 춥지가 않았다. 이른 새벽 28연대는 갑자기 출동했다. 낙양(洛陽)을 점령하기 위해서였다. 3중대 소속 최대치(崔大治) 이등병은 오오에(大江) 오장의 뒤를 멀찌감치 따라갔다. 가까이 따라 가다가는 또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에 그는 가능한 한 오오에와 떨어져 걸을려고 애를 썼다. 보병 소총수는 말처럼 뛰고 걸어야 한다. 차 타는 법이 거의 없이 걷고 또 걸어야 한다. 발바닥은 부르트고 장딴지는 부어서 탱탱했다. 해가 뜰 무렵 3중대는 산개했다. 도시의 북쪽을 향하여 가던 중 한 작은 마을에서 총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일제 사격을 가하고 밀고 들어가자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 마을을 수색한 끝에 민간 복장을 한 중국인 청년 세 명이 지하실에서 발견되었다. 세 명은 모두 무장을 하고 있었다. 일본군에게는 포로라는 것이 없었다. 포로라는 것은 귀찮은 존재였고, 그렇다고 살려둘 수도 없었다. 그래서 잡히는 대로 적은 사살되었다. 공격을 앞두고 적을 체포했다는 것은 확실히 기분좋은 일이었다. 그들을 직접 체포한 공은 오오에 오장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사실은 대치 외에 역시 같은 조선 출신인 권동진(權東鎭)의 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서른이 넘은 전형적인 일본 군인인 오오에 오장은 학교라고는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사내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학도병, 그 중에서도 조선 출신 학도병을 본능적으로 싫어했다. 그런 나머지 위험한 일에는 언제나 학도병을 앞장세워 내보내곤 했다. 최대치와 권동진이 위험을 무릅쓰고 지하실에 숨어 있는 중국인들을 체포하게 된 것도 오오에의 명령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은 언제나 오오에에게 돌아가게 마련이었다. 오오에가 속해 있는 3중대 1소대는 조선 출신 학도병으로 대치와 동진 두 사람이 있었다. 이들은 학교는 다르지만 고향이 같았고, 그래서 서로 가까운 사이였다. 같은 날 입대한 그들이 같은 소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운 좋은 일이었다. 오오에는 중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중국인들을 고문했다. "낙양에는 병력이 얼마나 있느냐?" 통역은 중국어를 잘하는 대치가 했다. 중국인들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끄덕도 하지 않았다. 오오에는 그들의 무릎을 밟아댔다. "대답하지 않으면 죽여버린다! 너희들은 어디 소속이냐?" 중국인들은 고통에 얼굴을 이그러뜨렸다. 그러나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침내 오오에의 얼굴에 살기가 올랐다. 그는 총을 거꾸로 들더니 개머리판으로 중국인들의 얼굴을 후려쳤다. 퍽퍽 소리가 나면서 중국인들이 쓰러졌다.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 그들은 땅위에서 꿈틀거렸다. 중대 장교들은 오오에의 행동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말은 안했지만 그들은 모두 만족해 하는 눈치였다. 전장에서 적을 잡았을 때 이용가치가 없으면 일차적으로 그 처벌은 수훈을 세운 자가 마음대로 할 수가 있었다. 이것은 규칙은 아니었지만 어느 틈에 불문율로 되어 있었다. 장교라 하더라도 가능한 한 이 불문율을 깨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오오에 오장은 대치와 동진에게 명령했다. "실제 총검술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너희들, 솜씨를 보여봐!" 대치와 동진을 앞으로 나섰다. 전장에 나온 지 수 개월이 되었지만 아직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는 그들이었다. 묵묵히 따라다니는 데만 익숙해진 그들은 어느 사이에 자신의 생명이 위태롭지 않는 한 중국인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나의 믿음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중 키의 오오에는 가슴을 떡 벌린 채 그들 앞에 우뚝 서 있었다. 튀어나온 광대뼈와 찢어진 눈초리가 군모 밑에서 돌 같은 차가움을 던져주고 있었다. "뭣들 하는 거냐?" 우물쭈물하는 그들을 향하여 오오에의 고함이 터져나왔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자 오오에는 그들을 발로 걷어찼다. 대치는 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 중국인을 내려다보았다. 중국인은 눈을 크게 뜬 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공포의 빛이 역력했다. 그러나 여전히 입은 굳게 다물고 있었다. 이건 내 죄가 아니다. 나를 원망할 필요는 없다. 나도 살아야 하니까 할 수 없다. 나는 살야야 한다. 미운 것은 왜놈들이다, 특히 오오에 이놈이야말로...... 대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총검을 높이 들어올렸다가 중국인의 가슴을 향하여 그것을 푹 내려찍었다. "아악!" 짧고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나왔다. 중국인은 부르르 떨다가 곧 뻣뻣이 굳어갔다. 대치는 눈을 떴다. 피가 튀어 군복에 묻어 있었다. 중국인은 눈을 뜨고 죽었는데 두 눈은 흰창만이 보였다. 대치는 오오에 오장을 쏘아보았다. 오오에는 조금 당황한 듯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 시선은 비웃음으로 변했다. 저 자식이 나를 비웃고 있구나. 네 놈도 별수 없다는 뜻이겠지. 개 같은 자식. 대치는 획 몸을 돌렸다. 분노와 함께 사람을 찔러 죽였다는 사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이제 동진의 차례였다. 그러나 그는 총검을 든 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못하겠다는 거냐? 명령을 거역하긴가?" 오오에는 대신 총검을 들고 다가왔다. 명령을 거역하긴가, 이것은 오오에가 잘 사용하는 말이다. 명령을 거역하는 데 대한 보상이 어떠한 것인가를 미리 암시해 주는 듯한 말투다. 이 말 끝에는 반드시 상당한 기합이 뒤따른다. 동진은 초조하게 중국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총검을 들어올리는 듯하다가 도로 내려버렸다. 사람을 많이 죽여 본 노병들이 여기저기서 킥킥거리고 웃었다.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치자 동진은 눈은 감았다. 죽으면 죽었지 저 가슴을 어떻게 칼로 찌른단 말인가. 기합을 주면 받을 수밖에 없다. 포기하는 거다. 이때 오오에 오장의 벼락치는 소리가 들렸다. "비켜, 이 병신 새끼야! 너 같은 죠센징은 우리 황군(皇軍)에 필요 없다!" 오오에 오장은 동진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동진은 힘없이 푹 쓰러졌다가 일어섰다. 그는 먼지를 털면서 두려운 시선으로 오오에를 바라보았다. 오오에는 기계적으로 총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얏!"하는 기합과 함께 중국인의 가슴에 총검을 박았다. 마침 포소리가 크게 들려왔기 때문에 비명 소리는 거기에 흡수되어 버렸다. 오오에는 피묻은 총검을 중국인의 옷에다 닦았다. 새파랗게 질려 있던 동진의 시선과 부딪치자 그는 눈에 쌍심지를 켰다.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죠센징 놈들을 학대한다는 것은 언제나 기분좋은 일에 속한다. 이렇게 계집처럼 겁이 많은 자식을 골려주는 것이 훨씬 재미있다. 이 자식은 줏대도 없고 자존심도 없는 전형적인 죠센징이란 말이야. 이런 자가 어떻게 대학을 다녔을까. 아마 똥구멍으로 배운 모양이지. 오오에는 대학을 다녔다는 못난 죠센징과 자신과를 비교하면서 스스로 만족했다. 이런 사나이냐말로 자위(自慰)할 수 있는 일거리를 찾아내야만이 직성이 풀리는 법이다. 중대는 소대별로 산개해서 나갔다. 한길을 뿌연 먼지에 휩싸였다. 적은 의외로 완강해서 사단으로부터 지원병력이 오고 있었다. 섬서성(陝西省) 성도(省都) 서안(西安)을 공략하려면 낙양의 방어선을 뚫어야 했다. 중국군으로서도 낙양에서 일본군을 막아내야 했다. 낙양이 떨어지면 서안의 운명은 풍전등화격이다. 낙양 4km 전방에서 일본군 두 명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각 소대는 곧 부대별로 산개했다. "이봐! 너희들은 나를 따라다녀!" 오오에는 두 학도병을 불렀다. 대치와 동진은 그 옆으로 뛰어왔다. 그들은 앞으로 뛰어갔다. 총알이 핑핑 소리를 내면서 귓전을 스쳐갔다. 도시 남쪽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남쪽은 뚫린 모양이었다. 오오에는 힘껏 뛰었다. 대치도 지지 않고 곁에 바싹 따라 붙었다. 오오에가 돌아보니 동진을 멀리 뒤쳐져 있었다. 오오에는 뛰면서도 대치 이등병이 은근히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이 자식은 시키는 대로 척척 말을 듣는다. 절대 거역하는 법이 없다. 이것이 오히려 얄미운 것이다. 언제나 겁을 집어먹거나 나가 떨어지기를 기대했지만 이 자식은 그러기는 커녕 당당하게 부딪쳐 온다. 대치의 이러한 태도가 오오에에게는 하나의 도전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이었다. 죠센징은 겁이 많고 비굴한 족속들이다. 또 그래야만 조센징에 어울리는 것이다. 그런데 대치 이등병 이놈은 품종이 다른 놈이다. 정말 혼내줄 놈은 이 자식이다. 이 자식, 얼마나 견디어내나 어디 두고 보자. 네놈은 나를 조롱하고 있겠지. 너 같은 놈 백 명이 달려들어도 이 오오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자신이 모욕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자 오오에는 화가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그는 엎드려 총을 쏘았다. 중국군은 이중삼중으로 낙양을 에워싸고 있었다. 2개 사단병력이 진을 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 소문이 정말인지 무너진 남쪽 방어선은 금새 중국군으로 채워졌다. 오오에도 결사대를 조직해서 방어선을 돌파했지만 금방 다시 물러나고 말았다. 아무리 죽였지만 중국군의 인해전술 앞에는 일본군의 돌격정신도 무력하기만 했다. 아침에 시작된 공방전을 밤까지 계속되었다. 중국군은 미군기까지 동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피해는 막대했다. 그러나 밤이 되자 사태가 달라졌다. 비행기의 폭격이 뜸해지자 일본군들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총공세를 취했다. 중국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해 왔지만 용감한 일본군의 공세에 차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한번 몰리기 사작하자마자 마치 둑이 무너지듯 방어선은 떨어져 나갔다. 시가는 금방 불에 휩싸였다. 밤하늘은 불빛으로 휘황찬란했다. 무너지는 도시의 비명 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퍼졌다. 침략군이 나타나자 중국인들은 몸을 피하려고 아우성을 쳤다. 마차와 인력거가 부딪치는 소리, 그 사이를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치는 아녀자들의 아우성, 총탄 소리, 마이크 소리, 호루라기 소리...... 이런 것 등으로 거리는 온통 아비규환이었다. 피난민의 물결은 거리를 꽉 메웠다. 밟혀서 죽는 사람들의 수가 부지기수였다. 일본군들은 닥치는 대로 발포하고 찔러 죽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