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추자도 황경한 묘
제주도 제주시 추자면 신양리 산 20-1
두 살에 유배당한 황경한의 애절한 사연이 깃든 추자도
지금은 천혜의 관광지로 이름난, 제주도는 조선 시대에는 중죄인을 세상과 격리시키는 유배지였다. 바로 이곳 하추자도에 황사영의 아들 황경한(黃景漢)의 묘소가 있다.
백서(帛書) 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黃嗣永)은 1790년 진사시에 급제한 해에 다산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丁若鉉)의 딸인 정난주(丁蘭珠, 본명 命連)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여 1800년 아들 경한을 낳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백서 사건으로 체포되어 11월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후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 정난주는 제주도로, 외아들 경한은 추자도로 각각 유배되고, 가산은 모두 몰수당해 한때 명문 세도가였던 가문은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
남편을 잃은 정난주가 아들을 데리고 하염없이 뱃길을 가야 했던 곳이 바로 제주이다. 게다가 겨우 두 살 난 젖먹이 아들 경한을 데리고 떠나는 유배의 길은 너무나도 외롭고 고통스런 일이었다. 죄인으로 제주 땅을 밟으면 자신은 물론 아들마저 죄인의 자식으로 평생을 멸시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정은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궁리를 거듭하던 정난주가 호송선의 뱃사공에게 뇌물을 주어 매수하고 사공은 다시 두 명의 나졸에게 술을 먹여 역시 그들을 매수한 뒤 젖먹이를 하추자도 예초리(禮草里) 서남단의 황새바위에 내려놓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나졸들은 뱃길에서 아이가 죽어 수장(水葬)했노라고 보고함으로써 이 일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하추자도에 남겨진 경한은 오씨(吳氏) 성을 가진 한 어부의 손에 의해 거두어졌다. 경한이 추자도에 떨어뜨려졌을 때 그가 입고 있던 저고리 동정에서 나온 이름과 생년월일에 의해 그가 바로 황경한임을 알게 되었고 오씨의 아들로 키워졌다고 한다.
낯설고 외로운 유배지에서 생을 다한 황경한은 사망한 후 신양리 남쪽 산의 중간 산등성이에 묻혔다.
그런데 “일성록”(日省錄)이나 “사학징의”(邪學懲義) 등에 의하면 황경한이 추자도로 오게 된 것은 “나이가 2세 이하로 어려 법에 따라 교수시키지 않고 당시 영광군 추자도에 노비로 유배 시킨다”는 판결문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황경한의 아버지 황사영이 쓴 백서는 1801년 신유박해로 수많은 교우들을 희생되었고, 체포령이 내려진 황사영이 박해의 손길을 피해 서울을 빠져 나와 충청도 제천 배론으로 숨어들어
배론의 옹기가마 골에서 숨어 지내며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에 대해 기록하던 중, 주문모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게 된다. 낙심과 의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가는 모필로 명주천에 적는다. 옷 속에 이 비밀문서를 품고 중국으로 가던 황심이 붙잡힘으로써 백서는 북경 주교에게 전해지지 못한 채 사전에 발각되고 황사영은 9월 29일 체포된다. 이것이 유명한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황경한의 어머니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가 맞이한 첫 번째 신앙인으로 기록되며,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大靜)에서 관비(官婢)가 되어 천수를 다한 뒤 모슬포(慕瑟浦) 뒷산에 묻혔다.
당당한 모습으로 천주를 증거하고 목숨을 바친 남편은 비록 천상의 영복을 누릴 것을 의심치 않았기에 영광이요 환희이기도 하겠지만 인간적으로는 엄청난 고통과 실의에 빠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제주목 관노로 정배된 정 마리아는 온갖 시련을 신앙으로 이겨냈으며,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주민들을 교화시켜 노비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서울 할머니’라 불리우며 이웃들의 칭송 가운데 살아갔다. 신앙만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고 37년 동안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살다가 1838년 병환으로 숨을 거두자 그녀를 흠모하던 이웃들이 유해를 제주 대정에 안장하였다.
정마리아의 삶은 그 자체가 복음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신앙 증거의 연속이었기에 우리는 그녀를 ‘신앙의 증인’으로 부르는데 부족함이 없다.
황경한과 어머니, 정난주 마리아는 순교자는 아니다.
그래서 그 두 곳이 왜 성지로 선포되었는지 궁금해 하는 교우들도 있다.
그렇지만 그분들의 삶 자체가 복음 전파와 신앙증거의 모범이었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데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가족과 명예와 부를 모두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만을 따랐던 그분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여 신앙의 모범으로 받아들이며, 또 얼마나 실천에 옮길 수 있을지?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는 결코 쉽게 풀 수 없는 숙제 중의 숙제일 것이다.
묵상
자식과 부인, 남편과 자식을 하느님과 바꾸신 두 분의 영성에 비하여,
현재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