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청시대
예천의 장소성과 인문魂을 찾아서
<9>생거별동 사거능동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이라는 옛말이 있다.
'살아서는 진천
땅에,
죽어서는 용인 땅에
묻힌다'는
말이다.
필자가 이 버전을 흉내 내
'생거별동(生居別洞)
사거능동(死居陵洞)'이라는 말을 한 번 만들어
봤다.
'살아서는 별동에서
기거하고,
죽어서는 능동에
묻혔다'는
뜻이다.
그 주인공은 조선 초 16년간 성균관 대사성[지금의 서울대 총장]을 역임했고,
예문관 제학을 지냈던 예천
출신 윤상(尹祥)이다.
배경 무대는 예천
군내에서도 가장 중핵지에 해당하는 예천읍의 진산(鎭山)인 봉덕산(鳳德山)이다.
그는 봉덕산의 남쪽 골인
별동에서 태어나 북쪽 골인 능동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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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산 지맥(위)과 봉덕산 지맥(아래).
봉덕산 지맥 능골의 환포성이 잘
드러난다. |
요즘 봉덕산에 올라보면 잘 단장된 데크 길과
전망대 정자,
향토 출신 시인의
시비(詩碑),
체력 단련 운동 기구 등
다양한 시설물이 눈길을 끈다.
눈 아래 펼쳐지는 아름다운
시가지와 넓은 들판은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뚫어주며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진취적인 기상을 심어준다.
그러나 마음속 어딘가에
허전한 구석도 동시에 느껴진다.
장소혼(魂)의 부재 때문이다.
예천은 경북의 도청
소재지이다.
경북은 우리나라 정신문화의
본향임을 표방한다.
그렇기에 예천의 작은 유물
하나,
전해오는 얘깃거리 하나
허투루 보아 넘길 수 없다.
그 자체가 예천의 역사적
장소 정체성을 강화시켜 도청 소재지다운 정신문화적 품격을 고양해 줄 수 있는 생원소이기 때문이다.
봉덕산의 별동 선생
유적지도 잘만 활용하면 '예천다움'의 장소성과 인문혼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훌륭한 '장소
자산'이 될 수
있다.
◆생거별동(生居別洞)
봉덕산의 별동 선생 유적지를 논하기 전에 먼저
산이름과 동네 이름부터 검토해 봐야 할 듯싶다.
봉덕산[덕봉산]은 원래 지금의 흑응산(217m)을 지칭했다.
예천초등학교 뒤의 흑응산성
터에서부터 청하루가 세워져 있는 봉우리까지가 원래의 봉덕산이었고,
현재 우리가 일컫고 있는
봉덕산(373m)은 예전에는 서암산(西菴山:西庵山)이라 불렀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1939년에 이동락이 펴낸 『예천군지』에 그렇게 나온다.
그런데 1964년 9월 조윤제가 작사한 「예천초등학교 교가」에 느닷없이 ‘흑응산’이 등장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덕봉산'과 '덕봉산성'으로 표기됐던 것이,
이동락의
『예천군지』에서 '덕봉산'과 '덕봉산성 또는 흑안성[흑응산성]'으로 변용되더니,
이제는 숫제
덕봉산[봉덕산]을 서암산을 대신하는 산명(山名)으로 밀어내고 그 자리를 흑응산이 차지해버린
것이다.
아마도 불교식 지명인 '서암산'이 유교식 지명인 '봉덕산'으로 바뀔 때,
옛
덕봉산[봉덕산]은 그 산에 있었던 덕봉산성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흑응산성에서 '성(城)'
자를 빼고 흑응산으로 고쳐
불리어진 듯하다.
‘흑응[검은 매]’보다는 ‘봉황’이 훨씬 좋지만 예전에 예천 조상들이 봉황이 알을
품고 날아가지 말라고 만들었던 봉란산(鳳卵山)이나,
봉황을 기쁘게 하기 위해 세웠던
‘연빈루(燕賓樓)’
같은 풍수
비보물(裨補物)들이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버린 점을 감안하면
봉덕산을 종산(宗山)으로,
흑응산을
주산(主山)으로 의미부여하는 것도 그리 나쁜 개념 설정은
아닌 것 같다.
어쨌거나 옛 덕봉산[지금의 흑응산]
남쪽 기슭은 지금과 달리
동서 방향으로 발달된 능선에서 남북 방향으로 뻗어 내린 작은 지맥들이 호혹골,
향사당골,
안웅골,
사마골,
군방골,
관석골,
향교골 같은 수많은
골짜기를 이루고 있었다.
골짜기[골]는 한자어로 '곡(谷)'으로 많이 표현되었지만,
때로는
동(洞)으로 표기되기도 했다.
예컨대 강세황이 그린 「도산서원도」의 해설에,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앞쪽에 탁영담,
반타석 등의
점경(點景)을 강류를 따라 그렸으며,
왼쪽 곡류상의
별동(別洞)에 분천서원,
애일당,
진강촌 일곽을
그렸다'는 말이
나온다.
여기에서 말하는
'별동'은 '다른 골짜기'를 뜻하는 보통명사다.
현재의 서본리 예천초등학교 서쪽과
북쪽으로는,
지고개로 넘어가는 길 옆의
기와집골,
서악사로 넘어가는
절골,
흑응산성으로 올라가는
향사당골과 상시당골,
그리고 향사당골 서북쪽의
호혹골[속골]
등 수많은 골짜기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별동[별골]'이라는 별칭을 지녔던 골[골짜기]은 향사당골이었다.
향사당[별동]
마을 바로 서쪽에는
근대까지 섬내,
서읍내(西邑內),
기와집 골이라 불린 마을이
있었는데,
그 마을의 조선시대 이름은
서별동(西別洞)이었다.
1373년[고려 공민왕22년]
별동에서 출생하여 조선
초기 우리나라 유림의 종장(宗匠)으로 숭앙받았던 분이 바로 별동
윤상이다.
자신이 태어나고 살았던
덕봉산 남쪽의 한 골짜기 이름인 '별동'을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윤상은 원래 양반 가문
출신이 아니었으나,
예천 관아에
사동[사환]으로 있을 때부터 열심히 학업에
정진했다.
그러다가 1392년에 역성혁명을 반대해 예천에 유배돼 온 정몽주의
문인 대성리학자 조용(趙庸)
선생을 만나면서 획기적인
인생 전환점을 맞게 된다.
조말생,
배환,
배강 등과 함께 그의
제자가 되었는데 그 해[20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생원시에 합격한
후,
24세[1396년]
때 드디어 문과
12인방(人榜)에 급제를 하였다.
그의 인생 항로는 이후 78세에 퇴직을 하고 고향 예천으로 돌아올 때까지
탄탄대로의 순항을 하게 된다.
필자가 이 글에서 윤상
선생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은 그가 지녔던 인간애(愛)·고향애·생명애라는 세 가지 정신이다.
생명애는
'사거능동'
편에서 다루기로 하고 먼저
인간애와 고향애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서거정은 자신의 저서 『필원잡기』에서,
"윤제학[윤상]의 학문은 정밀하여 태학(太學)의 학도들이 다투어 제자 되기를
원하였고,
그는 해가 질 때까지
친절하고 꿋꿋하게 강의하여,
지금 조정의 대관들과 명망
있는 사람들이 모두 공의 제자이니 국조(國朝)로부터의 사표(師表)로는 선생이 가장 으뜸"이라고 칭송했다.
당시는 이 땅에 유학이 뿌리를 내리던 때여서 유학
관련 서적도 많지 않았을 뿐더러 학문하는 사람도 매우 귀한 시기였던 점을 감안하면 그의 열성적인 학문 전수는 직분과 소임을 넘은
'인간사랑'의 한 일면으로까지 승화될 수 있을
법하다.
윤상은 외직에 파견될 경우 가능한 한 고향 가까운
곳에 근무하면서 부모님을 섬기려 애썼으며,
'예오상재향(醴吾桑梓鄕:
예천은 나의
累代의 고향 땅이다)'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고향 땅을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상재는 옛날에 누에를 치는
데 쓸 뽕나무와 가구를 만드는 데 쓸 가래나무를 집 담 밑에 심어 자손들에게 조상을 생각하게 했던 데서 온 말이며,
상재지향은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고향을 뜻한다.
고향애는 그가 남긴 '창밖의 오동나무(窓外梧桐)'라는 시에서도 잘 드러난다.
‘밤비에 막 이파리
뒤집히자(夜雨飜新葉)
/ 가을바람은 삭정이마저
털어낸다(秋風拂老枝).
/ 불 켜진 창문 아래
있는 나그네는(一燈窓下客)
/ 걸핏하면 고향생각이
난다(偏動故鄕思).’
그는 83세를 일기로 1455년에 고향 예천 땅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2백여 년이 지난
1650년에 향현사(鄕賢祠)가 세워질 때 조용·권오복·정탁 등과 함께 배향되었다.
원래 그 터에는 고을의
풍속을 규찰하고 백성을 예속(禮俗)으로 인도하며,
활쏘기로 무예를 단련하면서
군수를 보좌했던 유림들의 집회소인 향사당(鄕射堂)이 있었으나 그 후 없어지고 그곳에 향토 선현을
기리는 제향공간이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만약 영혼이 있다면 네 사람의 선현 중 이때 가장
극적인 소회를 느끼셨을 분은 아마도 별동 선생이었을 성싶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생가가
있는 바로 그 마을에서 향토의 숭앙받는 인물로 모셔져 해마다 예천군수가 초헌관이 되어 올리는 제사상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향현사가 보본숭현(報本崇賢)을 실천하는 신성한 공간임을 감안하면 그 안에
모셔진 인물의 일생은 거의 성현 수준에 이를 만큼 타의 모범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요즘과 같이 자신의 이익만
챙기거나 권력을 이용해 온갖 갑질을 해대는 사람이라면 설령 그 사람이 아무리 높은 관직에 올랐을지라도 공적인 제향시설의 주인공은 되지 못했던
것이 당시의 불문율이었다.
문제는 제향행사를 통해 향촌 교화와 향토 자긍심
앙양에 이바지해 오던 그 향현사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사우(祠宇)
철폐령 때 훼철되어
사라졌다는 것이다.
물론 그때 국내의 향현사
대부분이 철거되었지만,
강릉시가
1921년에,
진도군이
1933년에 각각 향현사 사우를
재건했고,
근래에는 제주도가 2007년에 향현사를 복원하고 2014년부터 제향을 봉행하고 있는
등,
향현사를 향토 역사공간으로
지혜롭게 복원 활용하는 지자체도 적지 않다.
예천군의
경우,
별동 윤상이나 약포 정탁과
관련된 각종 창극과 문화제는 열리고 있지만 향현사 복원에 대한 논의는 아직 전무한 듯하다.
서본리 옛 향현사 터도 좋고 아니면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읍내 한복판 그 어디에라도 사당을 복원해 놓고 평상시라도 누구든지 오가다가 향불을 올려 고향 선현의 아름다운 인문혼과 교감할 수 있는
역사적인 명소 하나 만들면 어떠랴.
복원된 향현사와 능골 윤상대감 묘역을 잇는
흑응산성 뒤 고갯길을 '별동로(別洞路)'로 명명하고 유서 깊은 역사도시 예천고을의 인문
탐방로로 삼으면 또 어떠랴.
그리되면 필자도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 사당에 향불을 지피고 묘소에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놓아드리고 싶다.
◆사거능동(死居陵洞)
능동은 동네 이름이 아니다.
별동이라 할 때의
'동(洞)'처럼 '골'
또는
'골짜기'의 뜻으로 사용되었으니,
능동은
'능골'이나 '능곡(陵谷)'과 같은 의미이다.
능동은 봉덕산 줄기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원래는 이 골짜기에
삼국시대 초기 호족의 무덤인 듯한 거대한 석실고분이 있어서 능골이라 불렀지만,
별동 윤상이 이 골짜기에
영면하면서부터는 '별동
선생의 묘소가 있어서 능골이라 부른다'는 말도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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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뒤가 2대조 묘이고 가운데가 별동 선생 묘, 그리고 맨 앞쪽이
정경부인 묘 |
별동 선생의 묘는 풍수 교과서에 나오는
명당판국도와 거의 흡사한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나라에서 파견한
국풍(國風)이 터 잡았는지 아니면 예천 고을 명풍수가 터
잡았는지는 지금 알 길이 없지만 어찌됐든 풍수를 잘 아는 사람이 그 터를 잡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묘역에서는 우거진 솔숲 때문에
앞·뒤쪽 어느 방향이든 전체 지형이 잘 조망되지
않지만 위성사진이나 1:2만5천 지형도를 참고하면 그 일대의 지세 윤곽이
확연히 드러난다.
봉덕산 능선 남쪽 기슭의
예천읍기가 일종의 횡룡입수 터라고 한다면 별동 선생 묘는 전형적인 직룡입수의 형태를 지녔다.
할아버지[宗山]격의 봉덕산 큰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내리면서 세
갈래의 지맥을 만들었는데,
좌청룡 지맥은 좌에서 우로
길게 감아 돌며 본신 안산(案山)을 이루고,
흑응산 줄기는 우백호가
되어 한천변까지 달려 예천여고 서쪽에서 청룡지맥과 만나 명당판국의 출입문을 만들었다.
그 판국 안에 성북산[城北山
또는
妹音山]이라는 중앙 중심 지맥[중출맥]이 서에서 동으로 뻗어
있는데,
그 지맥 위에 별동 선생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
산세(山勢)의 환포성과 중출맥의 중심성이 뚜렷하니
수세(水勢)
또한 그에 못지않게
빼어나다.
우선 묘역
좌측[북쪽]
용화사 쪽
골물[谷水]과 우측[남쪽]
능골지 쪽 골물이 묘역
앞에서 1차적으로 합수하고,
그 물은 또 명당판국 안의 소지맥이 만든 첫 번째
관쇄[자물쇠로 잠근 듯함]
지점을 빠져나간
후,
밤나무골 쪽에서 나오는
물과 2차적으로 합수한다.
명당의 큰 판국 안에서 두
번 합쳐진 내수[主水]는 최종적으로 수구를 빠져나가
외수[客水]인 한천(漢川)과 합류한다.
내·외수를 합해 세 번이나 합수되는
귀격(貴格)의 삼합수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더욱 빼어난 점은 명당 판국 안에서는 외수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판국 바깥쪽에 금곡천과
한천이 흐르지만 좌우 용호 지맥이 명당을 잘 감싸 안아 찌르는 듯한 물 기운[沖煞
水氣]을 막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두 하천수를
암공수(暗供水)로 만들어 보국(保局)의 명당 품격을 높이고 있다.
암공수란 보이지 않는 물이 명당을 감싼
지맥[산줄기]
바깥에서
흘러오거나,
둘러
흐르거나,
모이는 것을
말한다.
명당에서 빤히 보이는 물은
대살(帶殺)하기 쉽지만 암공수는 해롭지 않기 때문에
유정(有情)한 것으로 해석한다.
별동 선생의 묘역은 단묘(單墓)가 아닌 가족 묘원이다.
유교의
남존여비,
장자(長子)
우선의 종법제가 묘역
공간구성체계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조상 묘가 후손 묘보다 위쪽에,
남편 묘가 부인 묘보다 더
위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가통 승계 원칙에 따라
중출맥 상의 별동 선생 묘역 아래쪽에는 청송교수를 지낸 맏아들 백은(伯殷)
부부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이들 분묘들은 지맥이 동쪽으로 뻗어 있는 까닭에
유좌(酉坐),
경좌(庚坐),
곤좌(坤坐)
등 대부분
동향(東向)으로 앉아 있다.
절대향(絶對向:태양향)인 남향이 아닌 지세향(地勢向)인 상대향(相對向)을 선택했다는 의미다.
이런 설명은 사실 풍수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다소
흥미롭겠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무료하기 짝이 없는 얘기라는 것을 필자는 잘 알고 있다.
이제 본론으로 한 번
들어가 보도록 하자.
별동 윤상 선생의 묘역은
소박하다고 할 정도로 단출하다.
동자석 크기의 많이 마모된 문인석과 망주석 두
개,
그리고
1974년에 다시 세운 커다란 비석이
전부다.
6백여 년이 다 돼가는
묘역이다 보니 자연스러운 퇴락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문화재 지정 기준인
역사성,
학술성,
예술성 등의 측면에서
점수를 얻기는 영 틀려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묘역을 탐방하는 것은 웅장하고
호화롭게 꾸며진 겉모습을 보려는 게 아니라 그 속에 묻힌 사람의 생전의 인간적인 향기[인문혼]를 느껴보기 위함이다.
별동 선생의 묘역 석물이
어떻다느니,
또 그 묘역의
지세·물형·좌향 같은 풍수적 특성이 어떻다느니 하는 것은
장소의 경관,
즉 외관을 보는 것이지 그 장소 속에 내재된
혼(魂)을 보는 것은 아니다.
장소의 정체성은 외부로
드러난 경관과 그 속에 내재된 장소의 혼이 함께 어우러져서 형성된다.
장소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경관 속에 내재된 장소의 혼을 반드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2009년에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데는
기내(畿內:도읍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뿐더러
무인석·병풍석·난간석도 없고 능묘와 정자각과의 방향도 달라
참배객이 능의 옆구리를 향해 절을 해야 하는,
소위 말하는
접근성·볼거리·형식성 등 모든 기준에서 왕릉다워 보이지도 않는
영월의 장릉(莊陵)이 오히려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고
한다.
유네스코 현지 실사단이 서울 주변의 왕릉들을 다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장릉에 오게 됐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시큰둥해
하던 심사단이 비극적인 「단종애사」
스토리를 듣는 순간
분위기가 완전 역전됐다는 것이다.
단종의 애틋함이 배어 있는
장릉에 그만큼 더 큰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더라는 얘기다.
만약 단종의 비(妃)였던 정순왕후가 묻힌 남양주의
사릉(思陵)으로 이들 실사단을 데리고
가서,
단종이 영월로 유배된 후
왕후가 궁궐에서 쫓겨나 82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매일 산봉우리에 올라
영월 땅을 바라보며 17살에 죽임을 당한 단종을 그리워했다는 얘기를
덧붙여줬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실사단의 감동이 최소한 몇
곱절은 더 컸을지도 모른다.
문화유산은 이같이 눈에 보이는 형식상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그 안에 서린 인문정신까지 말할 수 있을 때 진정한 가치를 얻는다.
하지만 그런 내재된
스토리는 현장 안내판에 쓰여 있거나 아니면 옆에서 누가 직접 말해주지 않으면 모른다는 데 문제가 있다.
오죽했으면 세계유산위원회가
우리의 왕릉 현장에 보다 깊이 있는 설명을 제공하는 관람 안내 체계를 만들어 놓도록 권고하였겠는가.
별동 선생의 스토리는 군청 사동에서 시작해 온갖
고난을 참고 대사성까지 오르는 드라마틱한 ‘인간 승리’의 표상을 넘어,
21세기 온 인류에게
필요한 ‘생명 존중’의 일화까지 전해지고 있어 우리를
감동시킨다.
바로 그 유명한
‘거위와 구슬[진주를 삼킨 거위]’
이야기다.
구슬을 찾고 거위를 살린다는,
이른바
‘멱주완아(覓珠完鵝)’
얘기는 원래는
『대장엄론경』에 나오는 불교 설화다.
이 이야기는 명나라
주굉(袾宏)이 엮은 『치문숭행록(緇門崇行錄)』에도 소개되어 있고,
우리나라 문헌설화에는 조선
초 대제학을 지낸 전북 고창 출신 윤회(尹淮:1380~1436)대감의 일화로도 기록되어
있다.
이긍익이 야사를 모아 편찬한
『연려실기술』에도 윤회가 그 주인공으로
나오지만,
필자는
유신(儒臣)들이 불교설화를 유교식으로 윤색한 이 스토리를
어느 특정 유자(儒者)와 결부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윤상과 윤회
대감이 동시대에 집현전과 성균관에서 일한 유학자들이기에 스토리의 주제만 좋으면 됐지 그 주인공이 두 대감 중 누구를 가리키는가를 굳이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능골지 옆 별동대감의 묘역
재사(齋舍)
마당에
'거위와
구슬'
스토리와 관련된 그림과
요약문을 적은 안내판을 세우고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역사 인물 탐방 유적지'로 삼는다면 그 생동감 넘치는
'장소혼'이 주는 파급효과가 적잖을
것이다.
세계적인 미래학자 롤프
옌센은 "정보화시대가
지나면 소비자에게 꿈과 감성을 파는 '드림 소사이어티(Dream
Society)'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견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가까이에 있는 보배를
지키며,
훌륭한 일을 한 조상을
자랑하고 숭배할 줄 알아야 한다.
장소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수백,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살아온 자취와 숨결이 녹아 켜켜이 쌓인 역사의 혼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별동 선생의 인문정신이 깃든 향현사를 복원하고
묘역의 장소혼을 깨어나게 한다면 예천은 새천년 신도청 소재지다운 ‘뿌리와 장소성’을 갖춘 보다 정체성 뚜렷한 역사문화도시로 거듭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별동[별유동천],
미호리(眉湖里)
78세에 은퇴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별동 선생은
5년 후 타계할 때까지 생가가 있던 읍내의
향사당골[별동:별골]에 거주하면서,
내성천변에 있는 보문면
미호리[眉湖里:미울]의 한 명구(名區)를 별서지로 삼았던 듯하다.
이는 문헌기록도 없을뿐더러
종손들도 명확히 모르는 내용이어서 그의 묘소와 불천위사당이 위치해 있는 곳을 근거로 필자가 추론한 것이다.
그의 묘소는 생가와 마찬가지로 봉덕산
일우(一隅)에 있지만 불천위사당인
윤별동묘(尹別洞廟)는 읍내에서 20여 리 떨어진 보문면 미호리에
있다.
예천윤문의 대종가인
미호파가 세거지로 삼고 있는 곳이다.
원래는
미흘사(彌屹寺)가 있어 '미흘'
또는
'미울'이라 불러 온 곳인데 유학자들이 살러 들어오면서
미호리로 바뀌었다.
6백여 년에 가까운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필자가
처음 접한 미호리의 기색(氣色)은 '생동감 넘치는 기운'
그
자체였다.
푸른 산의 짙은 녹음과
하얀 백사장,
눈썹같이 마을을 감돌아
흐르는 내성천의 맑은 물은 땅이름 그대로 '미호'였다.
여기에서
호(湖)는 물론 내성천을 가리킨다.
어디 강줄기만
미호이던가.
예천윤문과 쌍벽을 이루는 미울의 김해김문
율은공파는 미산(眉山)이라는 이름으로 학사를 지어 후진양성에 발 벗고
나섰다.
산과 물과 사람이 하나로
어우러지니 '별유천지'란 바로 이런 곳을 두고 하는 말일
게다.
별동선생을 모시는
'별동묘'가 '별유동천'
같은 경승지에 자리 잡게
된 것도 필연적인 귀결인 듯싶다.
그러나 이것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느끼고 싶은 것만 느끼고픈
필자의 ‘선택적인 바라봄’의 결과일 뿐,
보통 사람의 눈에 비치는
미호리의 풍광은 여기저기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미호마을은 본디 북쪽의
나지막한 야산 기슭을 따라 동서로 길게 놓여 있으면서 남쪽 가까이 흐르는 내성천 강물을 내려다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촌이었다.
그런데 경북선 철로가 마을 앞쪽으로 길게 놓이면서
그 터에 있던 고풍스런 기와집들이 많이 사라지는 바람에 마을 규모가 크게 축소되었음은 물론 강과 마을 사이가 차단되어 산수의 조화가 크게
망가져버렸다.
설상가상 현재는 마을 앞 강변 너머로 아름답게
펼쳐진 나지막한 안산 위에 골프장이 들어서 있고,
마을 남쪽으로는 튼튼하고
높다란 교각으로 무장한 보문교가 내성천을 가로지르며 고즈넉한 마을 풍광을 짓누르고 있다.
그나마 별동 선생의 유덕과
장구지소를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웠다는 청심대(淸心臺)에 오르니 약간은 숨통이
트인다.
1920년에 세워진 이 청심대도 원래는 강 가까이
있었으나 1964년 경북선 개통으로 뒤쪽 높은 언덕으로 옮겨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위패를 옮길 수 없다’는 뜻으로 부조묘[不祧廟:不跳묘:불천위사당]라 불리는 ‘별동묘’의 처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듯해 더
안쓰러워 보인다.
원래는 마을 중심 지맥 위에,
그것도 내성천 맑은 물을
굽어보는 명혈처(明穴處)에 자리 잡은 듯하건만 지금은 높다랗게 쌓은
철롯둑이 30여 미터 전방에서 시야를 차단하며 보는 이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어찌하랴.
경북도유형문화재
293호로 지정돼 이따금씩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곳이고
보면 이곳 안내판에도 관람객에게 보다 쉽고 흥미롭게 다가갈 수 있는 별동 선생의 스토리들을 적어두면 좋을 것 같다.
별동 선생이 말년에 이 별유동천 같은 명승지에서
유희이(劉希夷)의 「대비백두옹가(代悲白頭翁歌)」에 나오는 '해마다 해마다 피는 꽃은
그대로인데(年年歲歲花相似)
해마다 해마다 그 사람은
아니네(歲歲年年人不同)'라는 시구를 읊었을 것인즉,
사람이든 장소든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변역(變易)의 진리를 우리 모두가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사진 자료를 제공해 주신 예천윤씨
18대손 윤기호님께 감사드린다.
[이몽일 경북환경연수원
객원교수·풍수학박사]
첫댓글 (정정) 제.실수로 18대손을..19대손으로 오기를.. 죄송합니다.
기호님 이런 기고문을 쓰실수 있도록 협조하여 주신것을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