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_이덕인열사15주기_101119최종.hwp
❚ 이덕인 열사 15주기에
장애빈민운동가 이덕인 열사의 끝나지 않은 죽음을 기억하고
장애, 빈민, 민중해방을 투쟁의 현장에서 쟁취해나가자!
어린 시절 탈골로 지체장애인이 되었지만 활기찬 성격으로 생활했다는 이덕인 열사. 이십대의 그는 직접 노동하며 자립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당시에도, 지금도 우리 사회는 결코 녹록치 않았다. 우리는 스물아홉 이덕인 열사의 삶을 통해 이 사회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이, 노점을 하고 노동하며 산다는 것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열사는 1995년 6월,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와 전국노점상연합회에서 활동하며 인천 아암도에서 장애인 자립 기반 마련을 위한 노점을 시작했다. 지금은 세계 몇 위라 떠들썩했던 인천대교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말끔한 공원으로 바뀐 아암도. 95년에 인천시는 군사보호시설 지구 철조망을 제거했고, 노점이 들어서자 아암도에 친수공간을 조성한다는 이유를 들어 철거를 집행했다.
수십 명의 노점상, 장애인들은 생존을 위해 인간다운 삶을 위해 망루에 올라가 투쟁했다. 그러나 초겨울 매서운 추위에도 인정사정없이 집행된 당시 철거의 장면은, 지난해 겨울 용산참사 장면과 다르지 않았다. 초겨울 추위에 폭포처럼 퍼붓는 물대포, 경찰과 1,500여 명의 용역들, 포크레인의 공격. 외부와 차단된 망루에는 음식은 물론이고 물마저도 반입이 차단됐다. 열사는 당시 고립된 상황을 외부에 알리고자 망루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11월 28일 열사는 망루 근처 아암도 앞 갯벌에서 주검으로 돌아왔다. 그가 발견되었을 때 그의 두 팔과 두 손은 죄수를 묶는 포승으로 묶여진 채였다. 연안부두로 수영을 해 가다가 지쳐서 죽었다는 경찰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은, 다음날인 11월 29일 병원 영안실 콘크리트벽을 부수고 들어와 열사의 시신을 도둑질해 제멋대로 부검을 해버린 것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의문사 사건은 거짓이 없다. ‘거짓말을 하는 바로 저놈들’이라는 이덕인 열사 아버지의 말이 가슴에 남는다.
1995년 열사의 죽음은 150여 일 동안의 장애인, 노점상 단체의 격렬한 장례 투쟁으로 이어졌고, 15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의 부모를 의문사 투쟁에 서게 했다. 2002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덕인은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사망하였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2008년 민주화운동명예회복보상심의위원회는 ‘이덕인의 죽음에 대해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사망으로 볼 수 없다’고 불인정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의문사 사건의 조속한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농성이 진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결국 그의 부모는 이덕인 열사 사건을 철회하기에 이른다. 법정 활동시한이 끝나가면서 사실상 폐업 절차에 들어간 진실화해위와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신과 저항을 강하게 표출한 것이었다.
2010년에도 장애인, 노숙인 등 최저생계도 보장받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추운 세상에 맞서 거리에서 농성을 진행하고 있다. 또 가진 자들의 권리만을 좇으며 권력의 눈치만 살피는 국가인권위원회와 정부에 맞서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여전히 가난한 노점상들은 거리 구석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알량한 장애인복지 예산에, 일상생활을 살아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활동보조서비스와 쥐꼬리만한 장애인연금에 장애인의 삶은 고통 속에 있다.
열사가 떠난 지 15년이 지났지만,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세상은 아직도 열악하다. 15년 전 이덕인 열사가 열망했던 자립과 노동의 삶.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의문의 죽음으로 남아있는 그의 삶 앞에서 우리는 다시 몸과 마음을 추슬러야한다. 열사가 온몸으로 바랐던 장애인, 노점상, 이 땅의 모든 민중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저 오만한 권력과 자본에 맞서 힘찬 투쟁을 해나갈 것이다.
2010년 11월 19일
이덕인열사15주기추모제준비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