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구간
(매요리-사치재-아막산성-복성이재)
1.
일시
8월17일(3일째)
2,
참석인원
6개팀
12명
원래
무박 백두대간 종주자들은 고기리에서 새벽에 출발하여 사치재를 통해 귀가 한다 사치재를 지나 복성이재를 향하는 대간 길은 참으로 순하다.
마을길도(매요리) 지나고 사치재까지 완만한 능선의 푹신한 소나무 숲속 길이 이어진다. 매요리에서 사치재 까지는 두가지 방법이 있는데 618고지를
통과하여 야생동물들이 통과하는 88고속도로 지하 통로를 이용하여 진행하는 방법과 88고속도로를 구름다리를 이용하여 사치마을을 통과하는 도로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사치마을을 통과하는 길은 백두대간 주능선길이 아니며 구간 종주하는 대간꾼들이 이용하는 등산로다 사치마을을 통과하는 길은
매요휴게소를 지나 삼거리에서 좌측 방향으로 길을 잡아 진행하면 사치마을이 나타나고 마을을 통과하여 계속 직진을 하면 사치재 표지판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지리산 휴게소 방향으로 고속도로를 따라 아곡마을 쪽으로 진행하면 된다
우리는
618고지를 통과하는 주능선으로 가기로 하고 매요마을회관 지나자마자 왼쪽 골목길로 가니 유치삼거리의 목재소 나온다. 목재소 옆으로 난 능선길이
사치재 가는 길이다 618고지를 지나 88고속도로로 내려오면 우측으로 50m만 가면 밑으로 지날 수 있는 길(동물통로)이 나오고
이통로를 통과하자마자 좌측으로 100여m 가다 사치재 표시판에서 우측능선으로 붙어야만 시리봉 가는 길이다 우축 능선으로 올라서니 묘등이 나온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음 산행을 계획 했다 여기서 철수 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산행을 할 것인가 우리는 계속하기로 하고 산에
오르고 있다 무척 가파르다 언제 산불이 났는가는 알 수 없지만 산불로 인한 잔해 들이 여기저기 있다 한참 가파를 길을 오르니 능선이 나온다 아마
시리봉 능선인가 보다 이 능선에서 밑을 바라보니 88고속도로 휴게소가 바로 밑에 보이며 고남산 통신 중계소가 저멸리 보인다 잡목만 우거진 대간
길을 따라 계속오르니 시리봉이다 시리봉에서 조금 내려오니 소나무 숲이 나온다 우리는 여기서 점심을 하고 계속 복성이 재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
한참
가다보니 또 천둥소리가 나고 먹구름이 낀다 오늘도 어재와 마찬가지로 비가 올려나 보다 계속 오르니 아니나 다를까 비가 온다 오늘 비는 어재 비와
달리 빗방울이 굴거지고 꾀나 많이 내린다 비를 맞고 걸으니 온몸에 한기가 느낀다 한참 오르니 헬기장이 나오고 아막성터가 나온다 아막성터 잔해가
남북으로 나있다 .
아막성터는
운봉고원(雲峰高原)과 황산(荒山)의 산줄기로 구획되어 있는 아영고원(阿英高原)으로 백제의 아막산(阿莫山), 신라의 모산성(母山城) 등으로 불리던
곳이다. 행정상으로는 아막성이 독립되어 있다가 1391년(공양왕 3)에 운봉현에 예속되었다. ‘아막’이란 주성(主城)·주곡(主谷)을 뜻하는데,
이 지역이 섬진강의 계곡분지를 나타내는 지형상의 특색과 중요한 방어진지라는 데서 나왔다. 이 성은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 간에 격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총길이 633m에 달한다. 602년(무왕 3)에 백제가 아막성을 공격하여 신라 장군 무은(武殷)이 전사하자, 그 아들인 화랑
귀산(貴山)이 추항과 함께 나아가 백제군을 물리쳤으나 둘 다 전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성터는
동북쪽을 접한 사각형을 이루는데, 북변 수구에 북문지(北門址), 서변 중앙에 서문지(西門址), 동남우(東南隅)에 가까운 동변에 동문지(東門址)가
남아 있다. 길이 208.1m, 주위 총 632.8m에 이르는 북변은 곡선의 성벽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동변과 서변은 각각 길이 147.1m,
126.9m이며 거의 직선이다. 성 안에 삼국시대의 기와조각과 백제의 자기조각 등이 퇴적되어 있는데, 북문지 수구 동편에는 지름 1.5m의
원형석축(圓形石築) 정호지(井戶址)가 있다. 1977년 12월 31일 전라북도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되었다.
아막성터를
뒤로하고 내리막을 계속 내려다보면 또 다른 오르막이 기다리고 있다 그곳을 넘어서니 복성이재다 복성이재까지 오던 중 장교수는 벌에 쏘였다고 한다
우이가 없었으면 큰일 날번 했다고 하며 벌때를 만나다고 한다 그래서 남들은 돈 주고도 맞는데 자연산 벌침을 맞았으니 얼마나 좋겠냐고 놀려주니
허허하고 웃는다
북성이재는
아래 인월의 성산리와 아영의 성리가 흥부마을로 알려져 있다. 흥부가의 발상지인 흥부마을로 알려진 북성이재 동쪽의 두 마을에는 흥부전을
연상시키는 지명들이 많이 있다. 성산리에는 제비가 흥부집을 맴돌았다는 마을 뒷산 연비봉, 흥부가 도승의 말에 따라 집터로 잡아 부자가 됐다는
흥부네 텃밭, 흥부가 놀부에게서 쫓겨나 짚신을 털며 아픈 다리를 움켜쥐고 신세를 한탄했다는 신털바위, 흥부가 제비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놓았다는
연하다리 등이 있다. 성리에도 흥부전과 관련된 지명과 설화가 있다. 지명으로는 놀부가 부자가 된 흥부에게서 화초장을 얻어 돌아가던 중 쉬었다는
화초장바위, 도승이 춘보에게 잡아준 집터인 고둔터, 춘보가 허기져 쓰러졌다는 고개인 허기재 등이 있다.
흥부전에
등장하는 중심인물은 흥부지만, 놀부가 차지하는 비중도 그에 못지않게 크다. 흥부와 놀부는 각기 다른 인생의 자세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흥부를
도덕적 인물로, 놀부를 반도덕적 인물로 평가한다. 그러나 흥부는 가난을 타개할 의지도 정열도 없이 주어진 운명에만 자신을 맡기는 소극적
인물이고, 놀부는 재산을 모으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는 적극적 인물로 보기도 한다.
현재
성리마을에는 흥부마을로 조성 작업이 한창이며 마을 어귀에 흥부가 박타는 모습의 조각을 세웠고 아막성 들머리에 흥보각이라는 정자도 세었다 또 마을
사람들은 마을 뒷산에 제법 널찍하게 소공원을 조성 관광객들을 끌어 모우고 있다 또 이마을은 큰 부자가 망한 박첨지 설화가 전하고 있는데
마을사람들은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흘 자시에 당산제를 지내고 난 뒤 후덕한 부자를 기리는 춘보제를 지내고 있다한다 이것이 모두 흥부전과 연관이
되어 있지 안았나 생각이 든다
복성이재에서
철쭉산장을 향해 내려오니 흥부 집터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판을 지나 한참 내려오니 철쭉산장이다 여기서 대간꾼들은 민박을 한다고 한다 이곳 철쭉식당
아주머니는 비교적 친절하다 막걸리 안주로 내온 김치 맛이 일품이다 우리는 여기서 대충 싯고 남원에서 1박하고 귀경하기로 하였다 남원에 도착하니
장대 같은 비가 내린다 24시 찜질방을 이용 1박한 후 그 유명한 남원추어탕에 아침을 때우고 광한류를 구경한 다음 서울로 향하는 고속버스에 몸을
싫었다 복성이재에서 중재까지는 해야 하는데 조금 아쉬움이 있었으며 덕유산 육십령까지는 무리였다는 것을 알았다 이번 백두대간 종주 길에 같이
고생하신 회원님들에게 너무 무리하게 진행하여 미한 할 따름이다 다음 종주 길을 기다리며.....
8월21일
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