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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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도현 -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1981년 〈대구매일신문〉,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서울로 가는 전봉준》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운 여우》 《바닷가 우체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등. 《연어》 《관계》 《짜장면》 《증기기관차 미카》 등의 어른들을 위한 동화, 산문집 《외로울 때는 외로워하자》 《사람》 등이 있음.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소월시문학상, 원광문학상, 노작문학상, 이수문학상 등 수상. 현재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
1981년 〈낙동강〉으로 등단한 후, 낭만적 정서를 뛰어난 현실감으로 포착하여 유려한 시의 질감을 보여준 안도현 시인. 그는 언제나 작은 것에 대한 각별한 통찰력으로 삶의 깨달음을 시인 특유의 생뚱맞고도 능청스러운 입담을 통하여 질박하게 그려왔다. 시인이 시의 길을 여는 조타수가 되려면 선천적인 재능보다 자신의 열정을 믿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그가, 자신의 시세계를 2010년의 마지막 ‘문학의 현장’에서 풀어 놓았다. | |
휴대전화 증후군이란 말이 있다. 벨 소리로 착각하여 수시로 폴더에 눈길이 가거나 휴대하지 않고 외출했을 때 좌불안석이 되는 등, 휴대전화와 관련하여 나타나는 징후들을 통칭한다. 휴대전화 없는 시인을 마중 가는 몇 분간이 그랬다. 모종의 불안감이 신사역 8번 출구 앞에 서 있는 초대시인을 발견하자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막 전주에서 상경한 시인은 전주의 기온에 맞추어 옷을 입은 까닭에 추워 보였다. 빌딩 사이로 몰려다니는 바람은 잠깐 사이에 황소바람으로 돌변하곤 하였다. 날씨에 대해 미리 언질을 주었더라면 좋았을 성싶었다. 성인 인구 대비 98%를 웃도는 1인당 1 휴대전화 시대에 안도현 시인은 휴대전화가 없다. 최근 등장한 스마트폰은 손안의 컴퓨터로 급속도로 가입자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속도를 따라가기에 급급한 사람들 사이에서 속도를 거부하는 시인의 아날로그적 삶의 태도가 흰 그늘의 음영으로 다가온다. 시류의 풍속과 속도에 어깃장을 놓으며 독자적 시간을 사는 안도현 시인을 초대한 11월 문학의 현장에는 내내 훈향이 감돌았다.
‘연탄시인’이란 수식
여기 계신 청중이 같은 시인이라서 좀 조심스럽습니다. 저는 시 쓰는 방법에 관해 말하기보다 나는 시를 이렇게 썼다는 말로 시작할까 합니다. 저는 자녀가 둘이 있습니다. 둘째 아이가 과묵한 편인데 중학교 다닐 때 어느 날 아빠 시를 학교에서 배웠다고 말하더군요. 말로 표현한 것은 아니지만 자랑스러워하는 빛이 역력했습니다. 〈우리가 눈발이라면〉이라는 제목의 시인데 아이가 물었습니다. 이 시에서 대조가 되는 2개의 시어를 말해 보라는 거였죠. 진눈깨비가 되지 말고 함박눈이 되자. 뭐 그런 시였는데 대조법과 관련하여 확대해 나가다 보니 시를 쓴 당사자가 중학생보다 맞히지를 못하였어요. 학교 교육이 시를 배울 뿐 ‘시적인 것’을 공부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여전히 시를 잘 모르겠고 시적인 것이 무엇인지 두리번거리는 도정에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시적인 것은 두 개가 아닌 오직 하나라는 것이지요. 유일무이한 형상과 유일무이한 언어를 찾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에게는 ‘연탄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닙니다. 연탄에 대한 시가 4~5편에 불과하고 풀잎, 바람, 나무, 뭐 그런 소재의 시를 더 많이 썼습니다만 저를 ‘연탄시인’이라고 불러줍니다. 앞으로 누가 연탄을 소재로 시를 쓴다 할지라도 연탄시인은 제가 선점을 했습니다. (웃음) 제가 연탄을 선점하게 된 경위를 말해 보겠습니다. 〈너에게 묻는다〉는 시의 ‘너’는 바로 저 자신입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전문
독자들은 이 시를 읽으면서 속이 뜨끔했다고 말합니다만 말씀드린 바대로 저 자신에게 묻는 것입니다. 검은 것이 다 타버리고 재만 남는 연탄의 속성을 떠올리며 쓴 시이죠. 글자 수가 30자가 겨우 넘습니다만 사람들은 그 시의 제목을 각각 다르게 부릅니다. 그중에 ‘연탄재’로 알고 있는 경우가 단연 많더군요. 제가 고등학교에서 근무할 때입니다. 가을이면 학교에서 백일장을 엽니다. 아이들에게 ‘가을’을 소재로 시를 써 보라고 하면 귀뚜라미, 황금 들녘, 코스모스, 낙엽, 단풍, 뭐 그런 제목으로 시를 써내는데 눈곱만치도 감동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연탄에 대해 써 보라고 말했습니다. 연탄이 보이면 가을이잖습니까. 그런데 학생들은 제 말을 접수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의 가을 이미지에 연탄은 없는 것이죠. 그때 쓴 것입니다. 시 쓰는 행위에서 중요한 점은 남들이 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발견하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시적인 것을 찾으려는 마음이죠.
똥침 놓기
시적인 것은 남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질서에 대해 의문을 가져보고 어깃장을 놓아 보고 똥침을 놓는 것입니다. 어깃장 놓는 심정이 시적 양분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 쓰기보다 즐겁고 신 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시를 쓴다고 존경받는 것도 아니고 시 써서 돈을 잘 버는 것도 아니지만, 평소에 하지 못한 똥침 놓기를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시를 쓰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이 제게는 철없어 보였습니다. 그 철없음에 헌신하고 그에 복무하는 것, ‘간절하게 참 철없이’가 제 글쓰기의 지침인 셈입니다. 김수영은 시의 언어는 배반의 언어라고 했지요. 약속의 언어가 아닌 배반의 언어가 시적인 언어입니다. 올봄에 중남미 코스타리카에 다녀왔습니다. 세계시인대회가 그곳에서 열렸습니다. 코스타리카는 중남미 국가이지만 미국과 가까워서 미국적인 요소가 많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코스타리카의 어느 여성 시인이 말하더군요. “나는 좌익이 아닌 시인을 알지 못한다.” 그 말에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때의 좌익이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이 세상에 어깃장을 놓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시인과 비평가들이 있는데 그녀의 발언과 유사한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백석은 중요한 나사
제가 좋아하는 시인은 백석입니다. 백 번 물으면 백 번 다 백석이라고 대답합니다. 제가 읽고 배웠던 시인들 중에 백석은 중요한 나사와 같습니다. 시가 잘 안 써질 때에 저는 백석의 시들을 읽습니다. 너무 좋아하다 보면 베끼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나는 백석을 베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의 시 중에 ‘외롭고 높고 쓸쓸한’이란 구절이 있습니다. 나의 시집 제목이기도 한데, 누구나 외롭고 쓸쓸하다는 말을 할 수 있으나 그 가운데 ‘높고’라는 말을 넣을 줄 아는 시인이 백석입니다. 고독을 넘어 정신의 한 지점이 녹아 있는 것이지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에 나오는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라는 대목의 구조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개는 눈이 내려야 그리운 사람이 그립다거나 해서 만나게 되는데, 1930년대 백석은 눈이 내린 뒤에 만나자는 상투성을 뒤집은 것입니다. 나타샤의 입장에서 보면 나를 사랑해서 온 세상에 눈이 내리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고은의 초기 시 〈사치〉에도 “누님이 더욱 아름다웠기 때문에 가을이 왔습니다.”라는 시 구절이 있습니다. 백석을 의식해서 쓴 것은 아닐지라도 같은 구조입니다. 저의 시 〈사랑〉도 그렇습니다.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도 같은 구조의 패러디입니다.
‘사이’에 있는
그동안 쓴 저의 시는 ‘사이’에 끼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극단(極端)에 서 본 적이 없고 늘 사이에 있었습니다. 저는 80학번으로 습작기 때에 시인의 사회적 기능, 역할에 대해 학습과 여러 계기를 통해 토론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시집을 옆에 끼고 다니면 천하게 보던 시절이었습니다. “시는 가슴으로 써야 해.”라고 말하던 선배가 있었는데, 열정적으로 뜨겁게 써야 한다는 그 말을 그때 저는 제대로 접수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만 가슴을 강조하던 선배도 그렇고 다른 선배들도 시를 쓰지 않더군요. 그래서 저는 가슴과 손끝으로 시를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슴이 손끝에서 현현되기까지는 행위가 따라야 합니다. 가슴도 없이 손끝으로 쓰는 시는 또한 온당치 않습니다. 저는 습작할 때부터 ‘문학인가 삶인가’라는 화두를 가졌습니다. 저도 후배들을 만나면 “문학이 뭐가 중요해! 잘 살면 그만이지.” 그런 말을 한 적도 있습니다. 잠깐이지만 저의 시가 문학사에 단 한 줄도 남지 못해도 문학이 세상을 바꾸는 도구가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해직교사 시절이었지요. 제가 쓴 시는 골방과 광장 사이에 있습니다. 시라는 것은 누구와 상의하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공간 속에서 씁니다. 그러나 바깥세상에 무심하다면 골방이 눅눅해지거나 곰팡이가 슬 것입니다. 저는 골방의 시를 바깥광장 쪽으로 이동시키려고 했습니다. 또한 시라는 것이 광장 한복판에만 있어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시와 멀어질 테니까요. 골방에서는 현미경으로 광장에서는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것이 좋습니다. 골방에서는 광장을 망각하지 말아야 하고 광장에서는 골방을 그리워할 줄 알아야 하겠지요. 어느 순간부터 우리 시가 전혀 광장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30년 전의 카프나 김수영식으로 광장에서 시류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 이제는 광장의 시를 미적으로, 비판도 미적으로, 분노도 미적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1990년 중반 이후에 저의 시가 어떻게 미적인 형식을 가질 것인가 고민하게 되더군요. 시적인 것은 하나님과 창녀 사이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때 창녀는 문자적 의미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저의 이름이 절에 올려져 있습니다만 저는 스님이나 신부님 목사님 모두와 잘 놉니다. 특정 종교가 없습니다. 믿지 않으면 하나님과 부처님과 동격이지만 믿으면 수그려야 하지요. 시가 발 딛고 있는 곳은 창녀, 다시 말하자면 이 속된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위쪽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음식처럼 연애처럼
제게 자랑할 것이 있다면 시를 많이 읽는다는 것입니다. 한 달에 거진 천 편은 읽을 것입니다. 이틀에 한 권꼴로 읽는데 보내주는 시집은 다 읽고 잡지에 수록된 시도 다 읽으니까 그렇게 되더군요. 저는 그간에 9권의 시집을 출간하였습니다만 시를 시원시원하게 쓰지 못하는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 펜을 들면 초고라도 쫙 써내려가고 싶은데 그래 본 적이 없습니다. 좀 치사하게 쓰는 셈입니다. 멋지게 술술 쓰는 사람들도 있던데 쥐어짜듯이 좀스럽게 쓰는 거지요. 음풍농월하던 시절에 태어났더라면 시를 한 줄도 쓰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음식을 만들듯이 시를 쓴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데 닭개장을 특히 잘 만듭니다. 어렸을 때 가끔 어머니가 닭개장 만드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곤 했지요. 아버지가 닭을 잡아 더운물에 닭을 넣어 털 뽑고 배를 가르면 알집, 간, 닭발, 똥집은 아버지 술안주로 따로 지지고 몸통을 삶아서 고사리, 토란, 파 등을 넣고 끓이는 것이지요. 음식은 단순히 혀를 즐겁게 하고 배를 채우는 것만이 아니라 조리 과정에 모든 행위가 만들어내는 감각들이 다 들어 있는 것이지요. 음식을 먹을 때에도 내용물을 자세히 봅니다.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요소들, 냄새, 밀가루 반죽의 촉감들을 관찰합니다. 수산시장에 가면 시장사람들과 대화를 잘합니다. 내가 먹었던 음식을 기억하듯이 풍경, 사물, 대화 등을 스쳐보는 것이 아니라 잘 기억했다가 써야 하는 것이지요. 시를 잘 쓰려면 삼겹살을 잘 뒤집어야 한다는 비유를 들겠습니다. 식사에 초대한 그날의 주인공은 이를테면 삼겹살을 구울 때 잘 익었는지 뒤집어 보고 불 조절도 하고 그럽니다. 라면 하나 끓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면과 스프만 넣고 끓이는 것이 아니라 김치, 파, 계란에 해당하는 요소들을 첨가하는 것은 시적인 구사와 다르지 않습니다. 또 하나, 시를 쓰는 마음은 연애하는 마음과 흡사합니다. 연애를 하면 사랑하는 사람한테 최대한 정성을 들입니다. (신달자― 연애는 싸우는 것 아닌가요?) 그것은 그다음의 일이고요. 첫 마음은 잘해 주고 싶고, 늘 시간이 모자랍니다. 황진이는 동짓달 긴긴 밤을 한허리 베어내어 정든 임이 오면 쓰고 싶다고 했지요. 시를 쓸 때가 그럴 것입니다. 시간이 늘 모자라지요. 시를 쓰는 일이 늘 즐거운 것은 아닙니다. 괴로움과 즐거움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시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연사가 잠시 말을 멈추자, 신달자 시인이 시낭송 제안을 했다. 그러자 무대 장악력이 있는 김추인 시인이 낭랑한 목소리로 안도현 시인의 〈어느 빈집〉을 낭송했다.)
드러눕고 싶어서 나무는 마루가 되었고, 잡히고 싶어서 강철은 문고리가 되었고, 날아가고 싶어서 서까래는 추녀가 되었겠지 (추녀는 아마 새가 되고 싶었는지도) 치켜 올리고 싶은 게 있어서 아궁이는 굴뚝이 되었을 테고, 나뒹굴고 싶어서 주전자는 찌그러졌을 테지
빈집이란 말 듣기 싫어서 떠나지 못하고 빈집아, 여태 남아 있는 거니? ―안도현 〈어느 빈집〉 전문
안도현 시인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낭송하니까 시가 더 돋보인다는 말로 치하했다. 이어서 박소향 시인이 〈바닷가 우체국〉을 낭송했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 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 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 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 바다를 건너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 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 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안도현 〈바닷가 우체국〉 전문
저의 고향은 예천이고 안동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중고등학교는 대구에서 다녔고 20살 이후부터 전주에서 살았습니다. 경상도, 전라도 두 개의 언어를 맛보고 살았지요. 전라도에는 ‘싸드락싸드락’ 또는 ‘싸묵싸묵’이라는 부사가 있는데, 가령 마실 갔다 올 때의 걸음은 어떤 표현이 좋을까 저는 오랫동안 잔머리를 굴리지요. (청중 웃음) 싸드락싸드락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눈을 밟는 소리로 보폭의 정도를 느끼게 하지요. 눈 밟는 소리가 처음부터 싸드락싸드락 외롭게 내리다가 나중에 폭설이 되고 그러잖아요. 송어회를 썰 때도 보면 포를 뜨는 경우와 조근조근 채 썰 듯이 써는 것이 다르듯이 말이지요. 인도의 《수바시따》라는 잠언집에 보면 “타인의 심장을 뚫지 못하는 화살과 시, 대체 무슨 소용인가!”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내 가슴의 유일무이한 언어가 독자의 심장을 꿰뚫을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은 일종의 과대망상이겠지만 그것이 시를 쓰는 힘이 될 것입니다. 시라는 화살로 누가 심장을 관통할 것인가! 과제입니다. 여기 계신 경쟁자들 앞에서 허점을 가능하면 드러내지 말아야 하니까 이만 줄이겠습니다.
청중과의 대화
―문학적 화제 말고 부인하고 연애할 때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 대학 때 만났습니다. 집사람과 같은 학교를 다니다가 결혼했는데, 지역감정을 타파하기 위해서 결혼했다는 말을 농담처럼 하곤 합니다.
―중고등학교 때에 백일장을 휩쓸었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 고등학교 다니던 내내 책 읽고 시 쓰는 데 푹 빠져 있다시피 해서 성적이 내리막이었지요. 고등학교 때 담임이 기록한 생활기록부에 “특기 계발보다는 학과 공부에 힘쓸 것.”이라고 단 한 마디로 적혀 있더군요. 지금 와서 보면 학과 공부에 힘쓰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낭송할 때 배경음악이 시를 품격화한다고 생각지는 않으십니까. 배경음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시와 음악의 연계성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 코스타리카에 갔을 때 일입니다. 시민공원이나 학교, 공공기관에서 시낭송을 했는데 배경음악이 없었습니다. 청중이 시낭송을 유심히 듣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즐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시가 주는, 시가 내장하고 있는 리듬을 내용보다 즐기는 것은 아닌가 싶더군요. 시낭송 전문가 모임에 가보면 시낭송 전문가의 낭송이 시의 효과를 상승시키기도 하고 하강시킬 때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배경음악도 그렇습니다. 배경음악 없이 낭송하는 것이 시의 느낌을 더 잘 살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들어 현대시가 음악성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지만 시와 음악을 기계적으로 결합하기보다 시 자체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해 마음을 쓰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모님 외에는 연애 안 하십니까? ▶ 안 하고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청중 가운데서 좀 숨기는 것 같다는 말이 터져 나왔고 웃음과 함께 문학의 현장은 마무리되었다.)
이어서 하모니카 촌장의 하모니카 연주가 이어졌다. G20 정상회의에 연주자로 초청되기도 한 장만수 하모니카 촌장은 김수환 추기경이 좋아했다는 〈사랑이여〉와 〈얼굴〉을 연주했다. 청중으로부터 앙코르 요청이 있자 〈숨어 우는 바람소리〉로 분위기를 돋우었다. 여기저기서 따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쉬웠지만 하모니카 연주를 끝으로 유심 문학의 현장 공식행사가 마무리되었다. 곧이어 다과가 마련되어 자리 이동 없이 담소를 즐길 수 있었다. 가을밤이 시향의 여운으로 더욱 그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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