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깊고 어두운 블랙홀, 인류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다
<KISTI의 과학향기> 제3347호
2019년 4월 10일, 지구에서 오천만 광년 이상 떨어진 은하 M87에 위치한 거대한 블랙홀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링 형태의 가스, 그리고 중심부에 존재하는 어두운 그림자의 모습은 과학자들이 상상했던 블랙홀과 매우 흡사했다. 이 위대한 성과는 세계 각지에 위치한 8곳의 전파망원경을 연계시켜 200명 이상의 과학자로 이루어진 국제 연구팀의 공적이다. 어떻게 이 거대한 국제 프로젝트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그 뒷이야기를 함께 살펴보자.
사건의 지평선 너머를 엿보기 위해
이 위업은 말 그대로 아인슈타인의 그림자를 쫓아 얻어낸 성과였다. 1919년 아서 에딩턴이 이끄는 탐사대가 서아프리카에서 빛이 휘어진다는 증거를 확보했다. 이 발견은 위대한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근거였다. 일반상대성 이론은 우주 어딘가에 엄청난 중력을 지닌 초거대 천체, 블랙홀이 존재할 것이라 예견했다.
블랙홀은 그 거대한 밀도와 중력 때문에 시공이 뒤틀린 천체다. 엄청난 중력 때문에 한 번 빠지면 빛조차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따라서 블랙홀 관측을 위해서는 빛이 탈출할 수 없는 경계선, ‘사건의 지평선’ 너머를 훔쳐보아야 한다.
은하 중심부에 위치한 블랙홀은 가스를 빨아들이기 직전에 수천억 도에 달하는 뜨거운 열을 분출한다. 이것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예측한 거대한 형태의 ‘사건의 지평선’을 그려낼 실루엣이다.
사진 1. 블랙홀을 포착하기 위해 모인 EHT 연구팀이 드디어 블랙홀 관측에 성공했다.
사진의 블랙홀은 우리가 어렴풋이 상상했던 대로 고리 형태의 구조와 어두운 중심부가
있다. (출처: EHT 공동연구진)
8대의 전파망원경을 하나로 묶다
지구에서 블랙홀을 관측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크기가 지구에서도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커야 한다. 거기에 가능하다면 가까울수록 더 좋다. 일반적으로 질량이 큰 블랙홀이 그 크기도 크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여러 블랙홀 중에서 지구에서 가깝고 무거운 ‘궁수좌A’ 블랙홀과 처녀자리 은하단에 위치한 ‘M87은하’ 중심부의 블랙홀을 관찰 대상으로 점 찍었다. 두 블랙홀은 태양보다 65억배 더 무거운 어마어마한 질량을 지닌 초거대 블랙홀이다.
빛을 반사하지 않기 때문에 직접적인 관찰은 불가능하다고 어겨졌던 블랙홀이다. EHT 팀은 어떻게 불가능을 뛰어넘어 이번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을까?
연구팀이 관찰대상으로 삼은 블랙홀은 가깝다 하더라도 여전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저 멀리 떨어진 천체다. 이번 프로젝트의 난이도는 뉴욕에 있는 사람이 로스엔젤레스에 위치한 골프 홀 속에 붙은 먼지 숫자를 세는 것과 비견될 정도였다. 지금까지 없었던 엄청난 해상도와 정확도를 지닌 천체망원경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구만큼 커다란 크기의 렌즈가 필요했다.
물론 지구 크기의 렌즈를 만드는 시도는 현실성이 없다. 과학자들은 미국 애리조나, 하와이, 그리고 스페인, 멕시코, 칠레, 마지막으로 남극에 위치한 8곳의 전파망원경을 연동시켜 가상적으로 지구 규모의 거대한 사건의 지평선 망원경을 실현했다. 그리고 초장기선 간섭 관측법(VLBI: Very Long Baseline Interferometry)이라 불리는 기술을 사용해 멀리 떨어져 있는 복수의 망원경이 수신한 전파를 서로 간섭시켜 합성 사진을 제작했다.
사진 2. EHT 공동연구진은 블랙홀을 포착하기 위해 미국, 칠레,
멕시코, 남극 등지에 있는 8개의 망원경을 이용했다. (출처: EHT 공동연구진)
이론은 위와 같다. 하지만 초거대 블랙홀을 관측하기 위해서는 8개의 망원경을 나노 세컨드 단위로 완전히 동기화시켜 각각 특정한 방향을 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세계 규모의 안정된 연동을 실현시키기 위해 EHT팀은 1억년에 1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매우 정밀한 원자시계를 도입했다. 이를 통해 완전히 싱크로 된 8개의 망원경은 블랙홀에 초점을 맞춘 하나의 거대한 안테나처럼 움직일 수 있었다.
여기에 행운도 뒤따랐다. EHT 팀이 관찰한 블랙홀이 분출하는 초고온 가스는 1mm 전후 주파수에서 가장 밝게 빛난다. 이 주파수는 지구의 대기나 은하에 존재하는 가스 물질의 방해를 받지 않고 블랙홀을 관찰할 수 있는 황금 주파수에 해당한다.
2017년 4월까지 EHT 팀은 8개의 망원경으로부터 5페타바이트 (1페타바이트 = 1테라바이트)의 데이터를 수집했다. 온라인으로 전송하려면 7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소요되는 엄청난 양이었다. 21세기에 온라인보다 오프라인이 더 빠른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했다. 연구팀은 관찰 데이터를 담은 하드디스크를 직접 항공기로 공수하기로 결정했다. 그 무게는 500kg에 달했다. 이 때문에 연구가 반년 정도 늦어졌다고 한다. 남극에서의 관찰은 겨울에 끝이 났지만, 하드디스크 운반을 위해선 항공기가 접근할 수 있는 여름까지 기다려야 했다.
연구팀은 거대 데이터를 분석하기 위해 클라우딩 기술을 활용했다. 데이터 분석과 관련해서만 6편의 논문을 출판했으며 미국 동해안과 서해안에 위치한 구글 데이터 센터에서 20대가 넘는 강력한 가상의 연산 머신을 작동시켰다.
500kg의 하드디스크에 원본 사진 위에 찍힌 모습은 노이즈와 블랙홀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어 화면 위에 떠오른 대상이 블랙홀이라고 믿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이 희뿌연 흔적에서 노이즈를 제거하는데 케이티 바우만(Katie Bouman) 박사가 제안한 알고리즘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당시 MIT에 재학 중이던 바우만 박사는 수 개의 전파망원경으로부터 얻어낸 화상 데이터를 상호 간 참조하여 노이즈와 관찰 대상을 구분하고 이미지를 추출하는 계산 알고리즘을 고안해냈다. 그녀는 보안을 위해 가족에게도 정확히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비밀로 해왔다고 한다.
사진 3. 자신이 만든 알고리즘으로 드디어 완성된 블랙홀 사진을
보고 있는 케이티 바우만. (출처: 케이티 바우만 트위터)
아인슈타인이 또 한번 옳았다
일반 상대성 이론을 활용하면 블랙홀의 형태와 크기를 매우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이번에 실제로 관찰한 M87의 모습은 이론을 통해 상상한 것과 거의 판박이였다. 완전한 원을 그리며 주변부에 강력한 가스 구름을 거느리고 있는 블랙홀이 찍힌 사진은 일반상대성 이론을 지지하는 또 하나의 강력한 증거이다.
이번에 발표한 사진은 EHT가 밝혀낼 가능성의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연구팀은 1.3mm 주파수의 전파뿐만이 아니라 X선, 감마선을 통해서도 블랙홀을 관측하고 있다. 우리 은하의 중심에 위치한 블랙홀에 대한 데이터는 이미 취득을 끝내고 분석 중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의 고향에 자리 잡은 블랙홀이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글: 이형석 과학칼럼니스트/일러스트: 유진성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