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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영국 ·네덜란드보다 뒤늦게 동남아시아에 진출했으나, 그 목표로 선정한 곳은 이들 양국의
세력이 아직 미치지 않고 또한 중국과 근접한 위치에 있는 베트남이었다. 1802년 응우옌 푹 아인[阮
福映:쟈롱帝]이 새로운 왕조를 세울 때 프랑스 선교사들의 도움이 있었던 관계로 이후 베트남과 프
랑스의 밀접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베트남은 쇄국정책을 취하고 가톨릭 선교
사를 탄압했으나 이것은 오히려 나폴레옹 3세에게 제국주의적 진출의 구실을 준 결과가 되어 1859
년 드디어 프랑스군의 침입을 받았다.
프랑스는 그 결과 비옥한 메콩 삼각주를 중심으로 하는 코친차이나를 영토로 하고, 메콩강의 항행권
(航行權)을 얻었으며, 같은 시기에 캄보디아도 보호국으로 하였다. 이에 따라 사이공을 기지로 하는
인도차이나 식민지화의 기초를 다졌으며, 프랑스는 다시 메콩강을 거슬러 올라가 중국내륙으로 진
출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프랑스 탐험대의 탐험 결과 메콩강에는 콩폭포(瀑布) 등이 있어 하구에
서 상류로 직접 소항(溯航)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다음으로는 중국에 보다 가까운 지역, 즉 북(北)
베트남을 노렸다.
1882년 프랑스는 전에 인정받은 송꼬이강 항해가 부자유하다는 구실로 또다시 전쟁을 일으켜 베트
남을 식민지화하였다. 이에 대해 청(淸)나라는 역사상으로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宗主權)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여 분쟁이 일어나 결국, 청 ·프전쟁(1884)으로 발전했으나 청나라가 패하여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화를 인정해 주었다. 이와 같은 정세에서 베트남에 인접한 라오스도 또 타이의 지배권에
서 벗어나 프랑스에 합병되고 프랑스는 이들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합하여 이른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연방’을 형성하였다(연방 성립은 1887년, 라오스 합병은 1893년).
예로부터 베트남을 ‘화남의 순치(脣齒)’라 불러왔으나, 이 순치를 빼앗은 후부터 프랑스는 중국 화남
지방에 대한 제국주의적 진출에 박차를 가하여 광시[廣西] ·윈난[雲南] 2성(省)에서의 광산채굴권 ·
철도부설권의 획득, 광저우만[廣州灣]의 조차(租借) 등이 잇달아 이루어졌다. 프랑스의 식민지화정
책에 따라 인도차이나는 크게 변모하였는데 그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것은 베트남이었다.
종래의 중국 영향과는 달리 이것은 식민지주의에서 이루어진 유럽 근대국가와 아시아의 전통적 ·자
급적 벼농사 국민과의 접촉이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받은 영향도 심각하였다. 예를 들면 종래에는 베
트남왕이 전국토의 토지소유자였고 농민은 그 사용권을 가지는 관계에 놓여 있었으나 프랑스의 사
유재산제도가 시행됨에 따라 토지제도에 근본적인 변혁이 일어나 프랑스인이나 베트남인 상류층
(주로 관리) 사이에 대지주가 나타난 반면, 토지 없는 농민대중이 형성되었다.
이 때문에 인구조밀한 북베트남에서는 이농자(離農者)가 속출하고, 이들은 신개척지 메콩 삼각주에
서 소작농이 되었다. 한편, 프랑스는 메콩 삼각주를 일대 곡창으로 개발하여 쌀을 재배하고, 쌀이 인
도차이나 전체 수출의 70%를 차지하였으나 그 이윤은 프랑스인 지주나 화교가 독점하여 농민의 빈
곤화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이와 같이 프랑스는 베트남의 식민지적 개발이나 착취에 주력하는 한
편, 캄보디아나 라오스에 대해서는 거의 방임주의(放任主義)를 취했기 때문에 이들 지역은 별다른
발전이 없었다. 그 밖에 원주민에 대하여는 차별대우를 일삼고, 교육을 도외시하여 인도차이나는 문
화적으로도 후진지역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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