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再會)
구 은 주
비행기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공항 라운지 안내 화면에 뜬 지 한 시간 반이 지났다. 다른 승객들은 삼삼오오 혹은 한두 명씩 카트를 밀며 게이트를 빠져나오는데 건갑이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먼 이국땅에서 큰딸을 만났던 일들이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열세 시간을 비행기로, 세 시간을 버스로 달려 목적지에 닿아 그토록 그리던 딸을 만났다. 딸은 결혼식을 마치자마자 바로 제 남편이 공부하고 있는 미국으로 함께 갔다. 곧장 아기가 들어서면서 손주를 기다리던 시부모님께 기쁨을 안겨드렸다.
병원에서 아기의 몸무게가 평균보다 작다고 산모와 아기를 위해 유도분만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도착한 다음 날 바로 입원해 예정일보다 며칠 빠르게 해산했다. 유도분만은 오랜 시간 산고를 다하고도 자칫하면 제왕절개수술을 할 수도 있다는데 힘든 스무 시간의 오랜 산고를 이겨내고 무사히 자연 분만을 했다. 딸이 참으로 장해 보였다. 나도 아이 셋을 낳았지만, 딸이 낳은 아기를 품에 안는 일은 가슴이 벅찰 정도로 놀랍고 신기하기만 했다.
내가 도착하기 전부터 2월의 일리노이주 날씨는 춥고 흐렸다. 그러나 아기가 태어나는 날 아침은 마치 아기의 탄생을 축복하듯 파란 하늘에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아기는 그 밝고 맑은 햇살의 기운을 받으며 우렁찬 울음을 터뜨리고 세상에 나왔다. 사위가 의사에게서 가위를 받아 탯줄을 자르는 동안 나는 고마움과 감격이 북받쳐 올라 창문가로 가 소리 죽여 울었다.
사위는 아기가 건강한 갑이 되라는 의미로 태명을 ‘건갑’이라고 지어 불렀다.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사회에 나가서는 훌륭한 인격과 성품을 가진 갑이 되라는 뜻이라고 했다. 이름을 지을 때까지 우리는 모두 건갑이로 불렀다.
딸의 몸조리뿐 아니라 사위 식사와 아기를 돌보는 일에도 정성을 다했다. 잠을 거의 한두 시간 자는 것으로 하루를 버텼다. 미리 각오는 하고 온 터였지만 해산바라지가 보통 일이 아님을 몸소 겪으며 알게 되었다. 내가 큰애를 낳고 친정어머니가 내 몸조리를 위해 애써주시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 힘들고 고단한 날들을 보내셨을 어머니가 새삼스레 돌아보였다.
하루 종일 엄마가 일하는 것을 지켜보는 딸은 한 번씩 바깥바람이라도 쐬고 오라고 하지만, 혼자 커피숍에 가서 책을 보는 일도, 더구나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거리를 걷는다는 것이 썩 즐거울 일도 아니어서 마트를 가는 일이 아니면 혼자서는 잘 나가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딸은 마음이 불편한지 힘들어했다. 나는 나대로 다르게 힘들었다. 딸은 결혼 전의 자기 일을 가진 당차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이 아니라, 밤늦게까지 공부하다 잠든 남편을 위해 아침마다 불편한 몸을 일으켜 차(茶)를 준비하고 말 한마디도 따뜻하게 하려고 온 마음을 썼다. 하지만 내 눈에는 자기 몸 돌보는 일은 뒷전이고 남편한테 너무 신경 쓰는 모습이 마냥 좋게만 보이지 않았다.
2주가 지날 무렵, 우리는 서로 불편한 마음을 트기 위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제는 이 아이가 예전처럼 살가운 나의 딸만이 아닌 한 남자의 아내, 다른 집안의 며느리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가슴속의 얘기를 나누기 전까지는 변해버린 딸이 마뜩잖게 여겨져 물설었는데 현실 앞에 놓인 삶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맞춰가려는 딸의 마음이 가상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친정어머니도 그러셨을지 모른다. 어려운 집안의 장남이었던 사위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도무지 세상을 모르는 듯했지만, 딸을 사랑하는 마음과 장래성 하나만 보고 결혼을 허락했다. 힘든 살림을 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딸을 기특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런 엄마의 애틋한 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사위는 모든 바쁜 일을 제쳐두고 멀리까지 와서 수고해주는 장모를 위해 시카고 여행을 하자고 했다. 공부하는데 바쁘고 아기를 온종일 딸이 돌봐야 한다는 안쓰러움에 싫다고 했지만, 두 사람의 배려로 사위와 둘만의 여행을 하게 되었다. 바람의 도시 시카고에서의 여행은 사위를 더 잘 알게 하고 든든하게 응원할 힘을 가지게 해준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한 달 보름간 딸의 산바라지를 하고 돌아오는 날은 3월 말이었지만 날씨가 차가웠다. 새벽이라 건갑이는 잠들어있었고 나는 솜을 넣어 아기 이불을 꿰매는 마지막 손길을 마치고 있었다. 머리도 감지 못한 채 겨우 세수만 하고, 딸과 짧은 이별의 포옹을 하고 차 시간에 쫓겨 집을 빠져 나왔다. 시카고공항까지 나를 배웅한 사위는 다시 곧 만날 거라고 위로해 주며 먼 발길을 돌렸다.
좀 더 오래 딸을 안아주고 올 걸, 건갑이를 한 번 더 꼭 품어주고 올 걸. 라운지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열세 시간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일상으로 돌아온 날들 속에서도 내내 그 아릿한 허전함과 안타까움은 해일 같은 그리움으로 나를 눈물짓게 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날들이 길어지고 있었다.
삼 개월이 삼 년 같이 지난 오늘, 아기와 딸과 사위가 이제 인천공항에 도착해 곧 모습을 드러낼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헌칠한 사위 모습이 먼저 보이고 예쁜 건갑이를 안은 딸이 연달아 클로즈업되었다. 사부인은 제일 먼저 달려가 며느리에게 미리 준비한 축하 꽃다발을 안기고 건갑이를 받아 안았다.
스물네 시간을 넘게 집을 떠나 여행하며 지쳐 투정을 부릴만한 데도 안는 사람마다 건갑이는 방긋방긋 어여쁜 웃음을 보이며 식구들을 행복에 젖게 했다. 건갑이가 내 품에 안겼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렇게 나의 사랑하는 손자와 딸과 사위는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왔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엄마를 위해 건갑이 사진을 보내준 딸이 더욱 고맙게 다가오는 재회의 순간이었다.
07재회[구은주].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