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길
황 순 자
코로나19로 멈춰진 일상
멈추면 보인다더니
차로 오분거리의 숲이 보인다
이 동네에 사십년 넘게 살았는데 이제야
3월의 야산 숲길은
햇볕 쏟아지는 하얀 길
겨우내 결핍되었던 비타민D의 보급로다
사월의 숲길은
생강나무 목련 산벚이
줄지어 꽃 그늘 이루더니
오월엔 숲 터널
햇빛 비타민도 과하지 않은
아카시아 꽃길
하얀 찔레꽃도 한창이다
굽이굽이 비탈길도
더러 가파른 오르막도
숨이 찰라치면 순한 길도
마치 우리 살아온 그 길 같은
숲길에서 마주하는
숲향기, 새소리, 숲이 내는 바닷소리
꽃비, 꽃그늘, 짙고 옅음의 온갖 푸른 빛
숲길 밖에는 없는 보물이다
들어서기만 하면 임자가 된다
문득, 아버지가 땅콩 좀 캐다 애들 줘라 하실 때
서너 포기 캐고 힘들다며 호미던지다가
아, 아버지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세상에 만복을
뿌려 놓으시고 거두는 자의 것이거늘
깨달았지.
숲에서 아버지들을 만난다
매일 그 꽃길을 걸으며
머위의 노래
황 순 자
어둠 속에 있다가 불끈 머리 쳐들어
땅바닥에 바싹 꽃을 피워본다
세상이 어떤가 간을 보면
이어서 식솔들이
뜨뜻한 기운 따라 볕 보려
아기 손바닥 같은 얼굴을 펴 본다
아직 솜털도 없다
생살이라 멍 빛이듯 엷은 보라 줄기
춘분 께 날 알아보는 모진 할멈 만나
잎자루채 베이면
휘모리 장단으로 흩어진다
우리게 하동치가 맛나다며
완주 봉동에서 남녘까지 와서는
구례 문척 우체국에 멈추더니
한밭까지 실려 왔네
이 이는 순수를 좋아해
봄맛은 머우맛이라던 아버지
그 입맛 돋구던 엄마를 그리며
된장 참기름 만으로 날 다루더니
황잣으로 호사시키더이다
봄의 첫 맛은 내맛이라며
까만 기억 하얀 기억
황 순 자
외래예약은 오후 3:40
당일 아침까지 세 번의 알림톡
맘속으로 알았대두 했다
그 시간에
병원으로부터의 전화
소스라치게 놀란다
오전에 문해교실 자원봉사
비낀 정오에 묵직한 대화로 오후가
까맣게 지워졌다.
그에의 깊은 공감 때문이었을까
하루에 한가지만인 데 용량초과였을까
내가 아직 50대였을 때
60대 노교수가 시험감독시간을 깜빡했다며
하얗게 지워졌다 했다
그럴 수가 있을까 했었지
지금 네가 그렇다
너는 지금 사삼 세기를 통과중
기억은 무슨 색깔이기에
잊혀진 기억은 하얗기도 까맣기도 할까
대전문학관 뒤 숲이야기
황 순 자
근디 우리 큰애가 말이유
저는 밥 먹으믄 일 없응께
에미더러 왜 양치 안하냐고
왜가리같은 소리로 몇시에 갈거냐며
어찌 보채쌌는지
내사 돌밥돌밥하는 역병 시절을 사니
아침 설거지함서 보채는 소리 들어가매
세 식구 점심도시락 장만해
연구실 채비하려니
여간 대간한게 아녀유
철부지 가가 성미한질라 급해
차도 세우기전에 내림서 차 오는거도
살피잖고 불불불 내빼듯
한 삼십도나 구배진 숲길을
앞동질러 앞이 안보이게 싸게 가니
야산서 잃어버리께미
숨차게 쫓아가유 그러니께
지 뜀박질은 여적 끝나지 않응기유
지가 이리 애닳을 때
그 으른 -실상 그 인간이라해야 옳지만유-
어디 기시냐구유?
지 잔소리에 전디지 못하니 헬쓰
착실히 댕기다가 이참 코로나땜에
두 달이나 못가고 때마침 불어닥친
선거바람에 선거운동이 운동인줄 알어유
요새 발목이 시큰한지 파스 바르며
운동댕겨유
그려도 그 양반 그러거니
지는 지 길 간디
숨차게 서둘러 11시경
숲에 가믄 산길을 훑어오는
싸한 숲 바람에 솔향기 새소리
볕 따라 일되고 늦피는 산수유 개나리
목련 산벚 개복숭아
야들은 돌림노래하듯 피구유
묵은 낙엽더미에서 콩나물같이
솟아나는 애기 적단풍
말로 할 수 없이 존겨유
이불솜같이 폭삭한 솔잎 낙엽
산길에 꽃비마져 보태주니
시방 여기를 뭐라고 일러야 하남유
방에서 부엌으로
부엌에서 거실 갈적에는
무릎 편할대로 찌그덕 대도
여그 숲길로만 들어스믄 걸음이
반듯해 진다니께유
뭔 치유의 숲 그런거보담두
기양 챠밍스쿨이 돼유
젊은 날 한 때 챠밍스쿨 등록하고 싶었쥬
뒷태가 진짜 멋인줄 알았으니께유
지는 다시 숲챠밍스쿨 학생여유
학교가득기 매일 가니께유
울엄니 이불 꼬매실 적에 폭삭한
그 위에서 재주넘고 딩굴며 성가시게
굴믄 저리 안가니! 성화를 대셨쥬
솔잎 낙엽 쌓인 문학관 뒤 산길에서
불현듯 엄마두 만나네유
참말로 지는유 이 숲길에
빠져버렸어유
문학관 숲 이야기 후기
작은 딸이 초등 2학년 무렵 ‘비둘기’란 제호의 가족신문을 십여년 간 37호를 만들었는데 90년대 그 무렵 아동문학가 차원재교장이 내 글을 보고 ‘쓰고 싶어서 쓴 글’이라 했습니다. 자신은 청탁받아 마감에 쫓겨 종종 부득이지문( 不得而之文)이 될 때가 있는데 글은 쓰고 싶어서 쓰는 글이 살아있는 글이라고 했습니다.
권나현 시인의 「봄 바람난 년들」이란 시 - “ 아! 보소/ 자네도 들었는가/ 아랫말 매화년이 바람이 났당께요/ 고추당초보다 맵다던 겨울살이/ 잘 견딘다 싶더니/ 남녘에서 온 수상한 바람넘이/ 귓가에 속삭댕께/ 안넘어갈 재주가 있당가/ 아이고 말도 마소/ 어디 매화년 뿐이겄소/ 봄에 피는 꽃년들은 모조리 궁딩이를 들썩대는디/ ” - 걸쭉한 남도 말의 정겨움과 산길의 정경에 취해 있던 차에 충청도 버전으로 단숨에 쏟아 버렸습니다. 쏟아진 글에서 뼈있는 몇자를 건져봤습니다. 뜀박질, 챠밍스쿨, 학생, 엄마가 그것입니다.
귓속말로 속삭댈 내 생의 멍에, 난산의 후유증으로 인한 고통과 한을 웃음과 해학으로 눙쳐버릴만큼 살았나봅니다. 글로는 75세에 처음으로 발설했습니다. 눈물조차 마르고 숨가뿐 여정의 그 뜀박질은 이규희의 소설집 「그 여자의 뜀박질은 끝나지 않았다」에서 차용한 것입니다.
실제 나의 챠밍스쿨은 수영장입니다. 50대 초부터 이십년 넘게 ‘접배평자’를 섭렵했지만 최종 종목은 배영입니다. 부력을 최대로 받기 위해서는 몸을 쫙 펴 ‘저 바다에 누워’ 자세여야 합니다. 최전성기에는 한 시간에 50미터 레인을 서른 바퀴씩 돌았는데 어느날 물과 하나되어 논스톱으로 열일곱 바퀴를 돌더라구요. 숨은 남았는데 그냥 멈췄습니다. 그 무렵 스피드를 잰 적은 없지만 전성기를 넘겨 68세에 모교 개교기념수영대회에서의 50미터 자유형 기록이 1분13초16이었습니다. 주 2회 수영만으로는 운동이 부족했는데 문학관 뒤 숲챠밍스쿨 주1회 추가로 뜀박질이 더 늘어났습니다.
저는 이래서 제 삶을 만년 고3생이라거나 만년 학생이라고 되뇌곤 합니다. 늘 이 일이 끝나면 저 일이 줄서 있고 또 학생이기를 좋아하기도 합니다. ‘Teaching is learning’, 가르치는게 곧 배움이라 했듯이 교사가 곧 학생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아버지를 따라 성묘를 간 적 있는데 할아버지 비석에 ‘學生懷德 黃公***’ 이라 쓰여 왜 학생이냐고 여쭤보니 특별한 벼슬이 없었던 사람에게는 그렇게 쓴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좋게 여기는 학생 칭호를 망인의 최고 예우로 쓰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듀이의 진보주의 새교육 철학사상을 배운 20세기 후기의 교육학도가 선인들의 심오한 사상과 마주한 것은 아버지를 통해서였습니다.
아버지는 70세 쯤부터 당뇨가 있었는데 이천년에 82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지금이야 TV를 켜면 건강정보가 넘쳐나지만 그때만해도 그런 정보는 빈약했고 제가 젊으니 관심사도 아니었던 터였습니다. 아버지는 보리 안 넣었다고 역정을 내시면 강한 엄마는 “뭔 소리여 밥은 쌀밥이 젤이지!” 요즈음은 밥도 약이라 갖가지 곡류를 섞어 먹으니 밖에서나 쌀밥을 먹는 시대지만 그때 저라도 아는게 있었더라면 엄마께 일러드렸을 텐데 정보부재의 무식으로 티격태격하시던 그 모습이 떠오릅니다. 답답하셨을 아버지! 그립습니다. 전편에선 기승전 엄마였는데 후기에선 기승전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프로필
학력 대전 여중 여고 졸
이화여대 교육학과 문학사, 문학석사
충남대 대학원 교육학 박사
경력 전주교육대학교 재직, 명예교수
기타 대한민국전서예대전 초대작가
문해학교 청춘학교 자원봉사중
당선소감
황 순 자
제가 교육대학에 재직했을 때 제자들에게 교사이되 시인, 교사이되 화가, 교사이되 서화가, 교사이되 연주가 되기를 권했는데 그 말이 내게도 씨 떨어져‘시인’이란 악세사리를 달게되어 기쁩니다.
나이드니 어떤 장신구도 값나가는 가방도 다 귀찮아져 무장해제 수준인데 악세사리 하나 보람으로 여기겠습니다. 강단 떠난지도 십여년이 되었으나 여전히 글안약을 넣어야 하루가 마감되는 일상의 보람으로 말입니다.
큰 격려로 알고 늦터진 말이지만 누군가의 가슴을 울리는 글 되도록 정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