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로 읽는 역사 이야기⑤
시 한 수 탓에 목숨을 잃은 조선 중기의 시인 권필
조해훈(시인·고전평론가)
대궐의 버들은 푸릇푸릇 꽃은 어지럽게 날리는데
도성 가득한 관원들의 행차에 봄빛이 아름답네.
조정에서 태평세월의 즐거움을 다 하례하는데
누가 위험한 말이 포의의 입에서 나오게 하였던가?
宮柳靑靑花亂飛(궁류청청화란비)
滿城冠蓋媚春暉(만성관개미춘휘)
朝家共賀昇平樂(조가공하승평락)
誰遣危言出布衣(수견위언출포의)
위 시는 조선 중기 선조 때의 시인인 석주(石洲) 권필(權韠·1569~1612)의 「임무숙의 삭과 소식을 듣고(聞任茂叔削科)」로, 그의 문집인 『석주집(石洲集)』에 수록돼 있다. 그는 이 시로 인해 고문을 받고 유배를 떠나다 객사했다.
이에 이번 글에서는 위 시가 어떤 문제가 있어 권필이 죽음을 맞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대개 조선조 제14대 왕인 선조 연간을 목릉성세(穆陵盛世)라고 한다. 그만큼 뛰어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뜻이다. 제제다사(濟濟多士)한 문사들 가운데서도 한국 한시사에서는 권필을 으뜸으로 꼽는다. 그는 선조의 재위기간(1568~1608)을 꽉 채워 살다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4년 만에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버렸다. 그래서 선조의 능인 목릉(穆陵) 이름을 빌려 목릉성세라고 하는 명칭에 가장 부합하는 문사이기도 하다.
본관이 안동인 그는 승지를 지낸 권기의 손자이며, 권벽의 다섯 째 아들로 서울 마포의 현석촌(玄石村·현 현석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 안동 권씨는 조선을 대표하는 명문이다.
현석촌 앞에 중국 사신들이 오면 뱃놀이를 하던 서호(西湖)가 있다. 서호 강변에 토정 이지함이 토정(土亭)을 짓고 살았고, 유몽인도 인근에 살았다. 권필과 친하였던 조위한과 이정구, 이안눌 등도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서호 인근에 우거한 바 있다.
권필은 송강 정철의 문인이었는데 스승 정철이 이산해 등 동인세력에 의해 밀려나게 되자 실의에 빠졌다. 게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그는 이곳저곳으로 피란을 다니다가 1592년 5월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천일과 합류하였고, 이듬해 의병을 따라 강화도로 들어갔다.
전쟁이 끝난 후 1601년 권필은 이정구의 추천으로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행차의 제술관으로 발탁되었다. 1603년에는 윤근수의 추천으로 동몽교관이 되었으나 벼슬살이가 맞지 않아 팽개치고 다시 강화도로 돌아갔다. 고려산 아래 앵두파(櫻桃坡)에 초당을 짓고 조용하게 살았다. 경기도 관찰사를 지내던 이정구를 비롯해 송연과 성로도 자주 그의 집을 찾았다.
그러던 중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황혁이 순화군의 아들 진릉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역모를 꾸몄다는 것이 김직재 옥사다. 순화군의 장인이자 황정욱의 아들인 황혁이 대북파의 우두머리인 이이첨을 풍자하는 시를 썼다 하여 일어난 이 사건은 광해군 때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대북파가 소북파를 제거하려 한 음모라고 평가받는다.
이 옥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1612년(광해군 4) 2월 황해도 봉산군수 신율이 어보(御寶)와 관인을 위조해 군역을 피하려고 했던 김경립을 체포한 뒤, 유팽석을 시켜 관에 무고하여 일으킨 옥사인 무옥(誣獄)을 꾸미게 한 데서 발단이 되었다.
신율은 체포된 김경립에게 8도에 각각 대장과 별장을 정해 불시에 서울을 함락시키고자 하였으며, 김경립 자신도 여기에 가담하였다고 허위진술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또 김경립의 아우 김익진에게는 팔도도대장이 김백함이며, 김백함은 아버지 김직재의 실직(失職)에 대한 불만을 품고 모역하였다고 진술하게 하였다.
신율은 김백함의 할아버지 김흠이 왜적에게 희생되자, 희생된 흠의 원수를 갚기 위해 흠의 아들인 직재가 아버지 상중에 종군해 술과 고기를 먹은 사실 때문에 대간의 탄핵을 받아 실직한 과거 사실을 알고 이를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김직재와 김백함 부자는 물론 직재의 사위 황보 신(皇甫信) 및 일족이 모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김백함은 모역에 대해 극구 부인하다가, 끝내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이 모역의 주동자라는 허위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연흥부원군 이호민, 전 감사 윤안성, 전 좌랑 송상인, 전 군수 정호선, 전 정언 정호서 등 수십 인과 모의하여 날짜를 정해 서울을 침범하려 하였다고 억지 자백하게 하였다.
이 사건은 박동량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옥사가 강행되었다. 결국 그들이 추대하려는 왕이 순화군의 양자인 진릉군 태경이라고 하였으며, 이이첨 등의 대북파를 제거하려 하였다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 사건으로 김직재·김백함 부자와 황보 신 등이 처형되고, 김척·유팽석·김일승·정몽민 등은 심문 중 사망했다. 권필을 비롯해 유선·황혁·조수륜·황상·김덕재·김삼함·김강재 등은 고문 끝에 사망하였다.
또한 송상인·황석·신희업 등이 위리안치되고, 양원·김용·김여준·신경상·김제·유열·유문석·이징수 등이 먼 섬으로 유배되는 등 벼슬에서 쫓겨난 자도 많았다. 그리하여 옥사에 희생된 자만도 100여 명에 달하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결국 이 옥사는 출세욕에 눈이 어두운 신율에 의해 조작되고 대사간 이이첨·유인길 등이 당시 불평이 많던 김직재의 일족을 희생물로 삼아 소북파 유영경 등의 잔당을 제거하려고 꾸민 무옥으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권필은 이 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관련인물들에 대한 가택수색을 하는 중에 황혁의 처남 조수륜의 집에서 권필의 시가 하나 나왔다. 그 전해에 권필은 벗 임숙영이 전시(殿試)에서 외척이 횡포를 부리고 후비(后妃)가 정사에 간여하는 것을 비판한 글을 올렸다가 과거 보는 규정을 어긴 사람의 급제를 무효로 하여 그 명단에서 삭제하는 삭과(削科)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조정의 버들(宮柳)’에 빗대어 외척 유씨(柳氏)을 풍자하는 위의 시를 지었던 것이다.
이 시가 사람들에게 알려지자 외척인 유희분이 권필에게 보복을 하려했으나 그럴만한 꼬투리를 잡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조수륜의 집에서 표지에 권필의 위 시가 적여 있는 책이 나왔던 것이다.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다 싶으면 엮어 넣었다.
이에 광해군이 권필을 직접 심문하였다. 광해군은 임금을 업신여기고 도리를 저버렸다며 권필의 죄를 물었다. 권필은 포의의 선비인 임숙영이 바른 말을 했다가 욕을 보게 되자 위로하는 마음으로 시를 지었다고 말하였다. 광해군과 유 씨들은 이 시의 시어인 ‘궁류(宮柳)’가 외척 유시를 가리키며, 조정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춘휘(春暉)’ 즉 봄볕과 같은 임금의 뜻에 아부한다고 해석한 것이다. 그 시어 앞의 ‘미(媚)’자는 아름답다는 뜻이므로 봄볕이 아름답다는 듯으로도 해석되고, 봄볕에 아부한다는 뜻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광해군은 권필의 변명에 더욱 화가 나서 형벌로 신문하게 하고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를 보내도록 지시하였다. 1612년 4월 1일 국문을 받았고, 2일 유배가 결정되었다.
그는 4일 유배지로 길을 나섰다. 하지만 심문 도중 맞은 매를 이기지 못하였다. 걸어가지 못하고 동대문 밖 길가의 인가에 누웠다가 7일 저녁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귄필은 현 일산의 황룡산 동남쪽 기슭의 상감천 마을의 선산에 묻혔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인조는 광해군의 실정을 바로잡으면서 권필에게 다시 제문을 내려 그 영혼을 위로하였다. 살아서는 변변한 벼슬 한번 하지 못했지만 저승에서 사헌부 지평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권필의 4대손 권직이 그가 살던 강화도 초당 터에 작은 유허비를 세웠다.
권필의 저서로는 『석주집(石洲集)』과 한문소설 「주생전(周生傳)」이 현전한다.
(참고자료 : 『석주집』, 이종묵(2006) 『조선의 문화공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준철(2004) 「권필 시의 정신지향과 의상의 구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