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ring 외 4편
정가을
어둠 속에서 생각한다 아주 어두워졌을 때 박수가 튀어나오고 박수가 튀어나오자 불이 켜지고 그때 모두가 웃고 있었다 짝을 이루어 현관에 하나둘씩 도착한다 다리 없는 등산화 두 짝 낮은 발등 구두 네 짝 나머지는 까만 운동화 소고기뭇국이랑 잡채랑 맛있게 먹는다 초 가득한 케잌에 불이 켜지고 생일축하 노래 뒤 후우 후우 여러 번 흔들리며 어두워지는 달의 밑창을 보며 닳은 밑창 어제 풀린 끈 누군가 게워 놓은 욕정 밟지 못하는 하중의 딜레마 누군가 몰래 토해내고 있는 노란 한숨 급하게 집으로 향하는 노을 당신인가요? 엘이디 조명이 박히며 더 짙어진 구름, 당신인가요? 키 따라 앉은 책들과 바퀴와 바닥이 연결된 중고 자동차들이 서로 겹쳐져 나란해질 때 화장실을 찾아 일어났다 간이 화장실 구멍들이 물소리를 내며 열렸다 닫혔다 (간이 화장실 구멍들이 물소리를 내며 열렸다 닫혔다) 신나 보이는 개들은 수만 개의 신발에 심장이 뛰는지도 모른다 배를 내어주고 선량하게 웃고 있는 눈꼬리 사랑한다며 눈꼬리를 매만지는 그를 본다 개나리는 몸이 부서지고 벚꽃은 낡은 종이 조각이 되어 떨어진다 유리창 안 사람들 나를 보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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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점집
1.
봄이 오면 햇볕에 바람에 사라질거라 생각하는 나는 대문이 없는 골목 끝 잔뜩 웅크린 나에게 '너는 나무'라 이름 짓고 내게서 작은 초록 잎들이 빠져나오는 것을 허락 한다 구멍가게 보일러 연통 연기 두꺼운 양말, 희고 까만 격자무늬 털목도리 극세사 오렌지색 이불에서 거품 꽃 터지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키 큰 목련가지 얼굴을 뒤덮은 점무늬 얼굴보다 작은 거울에 이마, 왼쪽 볼, 오른쪽 볼, 입가를 채워보는 나는 얼룩 고양이 너의 등 뒤에 그려진 마나우스의 고무나무 봄이 오면 햇볕에 바람에 사라질 거라 생각하는 나는
2.
수챗구멍에서 달걀 썩은 내가 난다고 하는 마을이 있다 이백아흔아홉 예각 75도의 계단 스윽스윽 그려놓은 차가 지나가는 시멘트 턱 까만 봉지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연년생 아이들의 파란대문집 사내도 한 번은 꼭 쉬어간다는 노래기길 양 다리로 뻗어있는 계단들 그 끝에 까맣거나 열려있거나 주황색, 초록색의 입을 가진 고단한 집 마을지기 골바람의 삼십구 년 개근 꼬마 민들레를 부지런히 모셔온다 주욱 뻗지도 바짝 오므리지도 못하는 다리에 흙을 흩치며 투덜거림 고개를 들고는 새벽, 허기를 채우기 위해 오두막을 나서는 내가 사랑한 세링게이
3.
사납게 짖어대는 멜라닌 접시 위 농익은 오렌지 속을 조각조각 올린다 아래 위 짠물 한 올 없음을 눈으로 확인 할 것 그저 태양열 초침의 호흡을 하고 누구에게나 투명한 플랑크톤으로 살찌었을 뿐 혀로 탐하고 형체가 사라질 때 머리 속에 남는 특별한 향 울타리를 품은 풀밭에서 오윌의 따가운 햇볕을 마주치면 작은 가슴을 드러내고 누군가 봤을 어제의 웃음 짧은 금발이 따가울 때까지 젖은 발톱 뿌리가 바삭해질 때까지 흐르는 강물의 숨소리에 떨리지 않는 심장을 배위에 얹고 손에 묻은 제비꽃 마시멜로 잎처럼 펼친 혓바닥에 적는다 두 손 없는 앵두가 두 손을 들어 안아줄,
4.
어느 날 그는 폐허를 발견하게 되었다 처음에 그것은 파란 점이었다가 반 지하 단칸방 곰팡이 쓸 듯 커져 쓸쓸한 구멍이 되었다 작은 키가 한 뼘 더 작았을 때 귀에서는 눈물이 꿈틀대며 배어 나와 손이 닿지 않은 직조공장 날선 발받침에 올라 짠 것은 끝없는 졸림 한 줄과 집을 위한 끝없는 배고픔 한 줄이 만들어낸 실크 고막이었다 위로 위로 올라가는 누에의 고단함과 모서리의 어지러움 되돌이표가 엉키고 엉켜 ‘시작’과 ‘끝’의 점이 사라질 때 그는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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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질토마토
분명한 것은 눈 감지 않는 얼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이인지 분명한 것은 빨간 쟁반 위, 껍질째 곱게 썬 사과처럼 올려진 얼굴 분명한 것은 찬장 안, 겁에 질린 얼굴 문을 닫는다 놀라지는 않았지만 다시 문을 연다 그림자 무거운 컵 뜨거운 커피는 발끝에 모이는데 자꾸 갈증이 나는 페치카 목소리를 잃어버렸다 주인 없는 입술이 할 수 있는 것은 날선 수첩에 목소리를 적는 일 목소리는 뜨거워졌다 길 건너 N모텔 하얀 네온이 곁을 지키는 공장 바닥의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으로 오갈 때 손등과 손바닥이 반씩 공존하는 영역에서 끈끈한 뭔가 흘렀고 사각 사각 서걱 서걱 벤치 위 롱패딩 둘 지하철 플랫폼 바닥에 떨어진 물음표 발이 없는 스타킹, 발목 없는 양말 사이 무지개 색 두루마리가 잽싸게 나왔다 잽싸게 들어갔다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나요?” “... 따뜻한 밥이 있는... 집이요.” 23시 58분, 누군가 마지막 전철이 왔음을 큰소리로 알렸고 뛰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잠시 뒤 전원이 꺼졌다 차근차근 구멍으로 채워지는 챕터 탁탁탁탁탁 가운데 손가락으로 두들기고 있는 ‘ㅇ’자판 탁탁탁탁탁 달궈진 바늘을 깊지도, 얇지도 않게 눈이 눈을 사랑한다면 뜨고 있는 눈에 아메바 징표를! 탁탁탁탁탁 누구 없어요? 귀에 아이들의 목소리가 탁탁탁탁탁 massage 지울 수 있는 아니 웬걸 검은 우산 머리에 검은 마스크 귀가 패이도록 신고 그때 비가 내리며 입모양은 흘러내린다 신발코로 판 돌 무더기 속 웃고 있는 나의 유채꽃 걸어도 걸어도 노랬다 “엄마 이것 좀 봐.” 유채꽃이다. 제일 가까이서 보게 되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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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 번쯤은 웨이브를 추고 싶다
아침부터 불안한 사람이 있다. 한쪽 손으로 봉을 쓰다듬고 다리는 웨이브를 치고 있다. 다른 한손에 쥐고 있던 커피를 몇 번이나 떨어뜨리고 손잡이를 잡으려고 허공에 손짓을 하고 심지어 내리려 서 있는 사람 머리를 만지기도 한다 (요즘은 세상이 뒤숭숭해서 그런지 약을 했나 하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백팩을 고쳐 메고 대학이 있는 곳에서 내리는 걸 보니 멈추지 않고 아침까지 마신 대학생인 모양이다 취하라, 다시 취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나도 한 번쯤은 웨이브를 추고 싶다) 지하철 앞줄에 앉아 있는 여섯 사람이 모두 운동화를 신었고 운동화색이 여섯 중 다섯이 흰색이다 이제 슬슬 여름을 준비해야 하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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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허가서
쏴 아
빗소리 들리지 않는 비 꿰매러 나서는 중이야
엄나무 바닥을 더듬는 손바닥으로
흑단을 헤집는 구부정한 손톱 끝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소리가 보여
봐-- 하 아 – 늘
앞에 놓인 커피가 입 꿰매고 있어
뙤약볕 새까만 손
방 울 방 울
일 달러의 맛을 모르는 혀
바들바들 떠는 땀구멍 꿰매 만든
빨간 비늘과 단단해진 검은 마디
가장 안전한 곳으로부터 흩어져야하는 타란튤라
살아남은 삼천 분의 이
발에 백만 구천구백 톤의 무게를 얹고
꿰맨다면서
자꾸만 후비는
춘분의, 발톱의, 거미의 달리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