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곡동(釜谷洞)
-부곡동은 법정동 이름이며 행정동도 부곡동이다.-
조선시대에는 안산군(安山郡) 군내면(郡內面) 부곡리(釜谷里)와 신리(新里)였다가, 1912년 2월 5일 부곡리로 통합ㆍ변경되었다. 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1914년 3월 1일 안산군이 시흥군(始興郡)에 통합되었고, 같은 해 4월 1일 군내면이 수암면(秀岩面)에 통합ㆍ개칭되어 시흥군 수암면 부곡리가 되었다. 그 후 법률 제3798호에 따라 1986년 1월 1일 안산시(安山市) 부곡동(釜谷洞)이 되었다. 부곡동은 진주유씨 누대의 세거지인데 시랑골·신촌 등 남부지역은 폐동되어 택지 및 시낭운동장·제일컨트리클럽 등이 들어섰고, 개멸·벌터 등 북부지역은 자연취락이 현존하나 영동고속도로가 마을 중앙을 관통하고 있다.
∙개멸[釜谷]
옹기마을 동쪽으로, 마을 남쪽에 있는 산이 풍수로 보아 가마를 엎어놓은 형국(伏釜形局)이므로 가마산[伏釜山]이라 했고, 그 후 취락이 형성되자 산이름을 취해 가마골[釜谷]이라 불렀는데, 후대에 내려오면서 ‘개멸’로 변음되었다. 원부곡(元釜谷)이라고도 하는 이 마을은 진주유씨 누대의 세거지로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조선 선조(宣祖)와 정빈 홍씨(貞嬪洪氏)의 소생인 정정옹주貞正翁主(1595~1666)가 동갑인 유적柳頔(1595~1619)과 혼인하기로 약정되었으나 12세 때 시아버지가 될 유시행柳時行(1566~1606, 교리)이 별세하자 3년상을 치렀고, 14세 때 뜻밖에 선조가 돌아가자 다시 3년상을 치른 후인 17세에 이르러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군인 유적이 몸이 허약해 25세에 죽자 청상이 되었다. 한편 유시행은 본래 선산인 충북 괴산에 예장을 치를 계획이었으나 서울에서 3백 리 이상이나 되는 원거리였으므로 이곳에 사패지를 하사받아 묘역을 조성하면서 후손들이 묘하에 모여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개멸 북쪽지역은 나무가 많고 숲이 우거진 곳이라 하여 만수동(萬樹洞)이라 부르는데, 경기도인정 전통종가인 경성당(竟成堂)이 있다. 동쪽지역은 골짜기 안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안골 또는 유석柳碩(1595~1655, 관찰사)의 묘가 능과 같이 크다 하여 능안이라 칭하였다. 개멸이라고 하면 보통 능안을 지칭한다. 매년 음력 10월 1일과 3일 사이에 길일을 택해 마을 뒷산인 곤우봉(昆牛峯)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경기도문화재자료 제94호 청문당(淸聞堂)이 있다,
∙ 벌터ㆍ질우지(叱牛地)
이곳은 들이 넓어 밭을 가는 농부가 소를 크게 꾸짖는다는 뜻으로 질우지(叱牛地)라고 했는데, 기로지(耆老地)라 쓰기도 한다. 1910년대 안양의 후두미에 살던 유원형(柳元馨)이 농작(農作)을 위해 세거한 후, 개멸·시랑골 등 거주 주민들이 분가를 하면서 호수가 늘기 시작했다. 정재초등학교 북쪽에 위치한 벌터는 영동고속도로와 서해안고속도로의 인터체인지로 편입되었다.
∙능안
개멸 위쪽에 늘어진 골짜기라는 설이 유력하다.
∙안말
개멸 안쪽의 마을이다
∙ 새말, 새마을
새로 생긴 마을이라 붙은 이름이다. 벌터와 장상동 동막골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6·25 직후 황해도 옹진·신천 등 난민들이 정착하면서부터 취락이 형성되었다. 마을에서는 1986년 이전까지만 해도 음력 10월 1일~3일 사이에 개멸 뒷산인 곤우봉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 시랑골[侍郞谷]
조선 선조의 따님 정정옹주와 그 부군인 진안위 유적의 묘가 부곡동 동쪽 옛 정자동[亭子洞 : 제일컨트리클럽 앞]에 있는데, 유적이 생전에 이부시랑(吏部侍郞)의 관직을 역임했다 하여 ‘시랑골[侍郞谷]’이라 칭한다고 구전으로 전해온다. 시랑골은 신촌과 시낭운동장 사이에 있던 마을로 유시행(柳時行)의 후손인 진주유씨의 세거지이다. 그 후 경주이씨, 평창이씨, 초계정씨 등이 세거해 38가구가 살다가 1982년 폐동되어, 현재는 택지로 조성되어 있다. 시랑초등학교, 시낭운동장이 들어섰다.
∙신촌(新村)
조선시대에는 신동리(新洞里)라 했다가 조선 말엽에 이르러 신리(新里)로 개칭된 마을로, 시랑골과 제일컨트리클럽 사이에 있다. 신촌(新村)은 개멸·시랑골 등지에 살던 유시행의 후손이 분가를 하면서 터를 잡고 살았으며, 그 후 나주나씨, 초계정씨, 파평윤씨 등이 세거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졌다. 폐동 전에는 모두 26호가 살았는데, 신도시개발로 폐동되고 1980년부터 민가가 들어섰다.
이곳에는 유시행柳時行(교리), 정정옹주貞正翁主(선조의 딸), 유적柳頔(진안위), 유영柳潁(응교) 등의 묘와 제일컨트리클럽이 있다.
∙ 옹기마을[店村]
벌터와 개멸 사이에 있는 마을로, 한국전쟁 직후 수암동 출신인 유일성 등이 이 마을 초입에서 옹기를 구웠으므로 ‘옹기마을[店村]’이라 칭하였다. 당시 옹기를 굽던 옹기장(甕器匠)들은 대부분 천주교인들로, 이들은 1970년대에 이르러 도시화로 옹기가 사양길에 접어들자 이곳을 떠났고, 옹기를 굽던 가마터는 현대식 가옥들이 들어섰다. 1986년 이전에는 해마다 음력 10월 1일~3일 사이에 길일을 택해서 개멸 뒷산인 곤우봉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 정재골[靜齋谷]
벌터와 신촌 사이에 있던 마을로, 조선 숙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유명현柳命賢(1643~1703)이 현 반월정수장 밑에 살았다는 연고로 그의 아호를 따서 ‘정재골[靜齋谷]’이라 했으며, 그 후 그의 아들 유래柳徠(1687~1728, 안동판관)가 이곳에 사당을 지은 후(일제강점기 때 폐사)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졌다. 1971년에는 당시 안산국민학교장(사학규)의 요청으로 후손인 유진형이 교지(校地)로 3,500여 평을 희사해 정재초등학교가 세워졌다. 정재골은 폐동(1984) 전에는 19호가 살았으나 원주민 대부분이 부곡동 이주단지(신촌)로 이주했다.
∙ 너구리산
수리산 자락의 한 봉으로 너구리굴이 있다고 하여 너구리산이라고 한다.
∙ 태마당밭
태를 묻은 밭이라는 말이 전해온다. 현재는 택지로 변모했다
∙ 등넘어
안산공고 앞 주택단지를 말하며 예전에 작은 고개가 있었다.
∙ 동그란산
산의 모습이 동그랗게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 끝섬
마을 끝에 있는 섬처럼 생긴 산을 말한다
∙ 두벌서낭당
안산공고 건너편 작은 산에 서낭당이 있었는데 장상동 서낭당(하늘공원) 다음에 있는 것이라 두벌서낭당이라고 하였다.
∙ 옻우물
정재골에 있던 우물로 옻오른 사람이 이물로 씻으면 낫는다고 하였다. 현재는 택지로 변해 우물이 메워졌다.
∙만수동(萬樹洞)
경성당이 있는 마을로 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속칭 매미골이라고 부른다
∙곤우봉(崑牛峯)
개멸에 있는 수리산의 한 봉우리로 소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 절골
제일골프장 제일 위쪽 골짜기로 예전에 절이 있었다.
∙ 오능가리
능자리 다섯 개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부곡종합시장이 들어섰다.
∙ 능안
정정옹주 묘가 있는 곳의 마을이름
∙ 삼신우물
능안에 있었던 우물로, 아기를 못낳는 여인들이 삼신우물물을 먹으면 아기를 낳는다는 설이 전해오던 우물이다. 택지로 변모하며 메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