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교황과 한국
교황의 존재가 우리 민족에게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1614년이다. 한역 서학서를 처음으로 도입했던 이수광(1563~1628)이 저서 「지봉유설」에서 마태오 리치가 쓴 「천주실의」를 소개하면서 "그 풍속에 군(君)을 교화황(敎化皇)이라 하고 혼인하지 않은 독신으로, 세습해 계승하지 않고 현자를 가려 세운다"고 소개했다.
▨알렉산데르 7세 우리 민족의 소식을 처음으로 접한 교황은 알렉산데르 7세(재위 1655~1667)였다. 제사 금지를 완화하고 중국 복음화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1660년에 조선을 '남경교구'에 예속시켜 선교를 권장했다.
▨클레멘스 11세 클레멘스 11세(재위 1700~1721) 교황은 1702년 조선 재치권을 남경에서 '북경교구'로 이양했다. 그는 1715년 제사 등 선교 지역 관습을 받아들이는 것을 금지하는 칙서를 반포, 중국 청나라와 조선 왕조가 천주교를 박해하는 결정적 빌미를 제공했다.
▨비오 6세 재임 중 프랑스 혁명을 겪은 비오 6세(재위 1775~1799) 교황은 1784년 조선교회가 창설된 다음 해인 1785년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선교사 도움 없이 탄생한 조선교회의 소식을 듣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교회를 돌보고 보호할 임무를 위임하고 하루빨리 조선 땅에 선교사를 보낼 것을 명했다. 그리고 교황 축복과 함께 은화 500냥을 조선교회 선교자금으로 내놓았다.
▨비오 7세 비오 7세(재위 1800~1823) 교황은 1801년 신유박해로 초토화된 조선교회 재건을 위해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해 말할 수 없는 괴로운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는 1814년 8월, 조선교회 신자들이 1811년 음력 10월 24일 자로 자신에게 보낸 서한을 받았다. 조선 신자들은 이 서한에서 "목자를 잃은 이 나라의 양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빨리 선교사를 보내시어 구세주 예수의 은혜와 공로가 전파되고, 저희의 영혼이 도움과 구원을 받고, 천주의 거룩하신 이름이 어디서나 찬양되게 하소서"라고 교황에게 호소했다. 프랑스 혁명군에게 파리 인근 퐁텐블로에 구금돼 있던 그는 이 서한을 읽고 북경 주교에게 "가능한 한 빨리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낸다. 편지를 써 보내는 것이 구금 상태에 있던 그가 조선교회를 위해 취할 수 있었던 최선의 행동이었다.
▨그레고리오 16세 포교성성 장관으로 재임하다 즉위한 그레고리오 16세(재위 1831~1846)는 교황직에 오르자마자 조선 선교지 문제를 직접 나서서 해결했다. 그는 1831년 9월 9일 '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초대 대목구장으로 파리외방전교회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하는 칙서를 반포했다. 그는 조선 선교 책임을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하고, 조선교회 발전을 위해 조선대목구장에게 승계권을 지닌 부교구장 주교를 선정할 권한을 부여해 박해로 인해 대목구장직이 공석이 되는 일이 없도록 했다.그는 또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조선교회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비오 9세 비오 9세(재위 1846~1878) 교황은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말로 작성하고 최양업 신부가 라틴말로 옮긴 「기해박해 순교자록」을 처음으로 접한 후, 곧바로 1857년 9월 24일 조선 순교자 82명을 '가경자'(하느님의 종)로 선포했다. 이로써 그는 한국 교회 순교자들을 처음으로 대우한 교황으로 역사에 남게 됐다. 그는 또 1866년 12월 서한을 보내 병인박해를 겪고 있는 조선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비오 10세와 비오 11세 비오 10세(재위 1903~1914) 교황은 1911년 조선대목구를 '서울'과 '대구'대목구로 나눴다. 비오 11세(재위 1922~1939)교황은 전주지목구(1937년)를 설정, 최초로 한국인 성직자에게 자치를 맡겼는가 하면, 평양(1927년)ㆍ연길(1928년)ㆍ광주(1937년)ㆍ춘천(1939)지목구를 설정, 한반도의 지역교회 틀을 마련했다. 그는 또 1925년 7월 5일 한국 순교자 79위를 복자로 선포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26년 뮈텔 주교를 대주교로 임명, 한국교회 최초의 대주교를 탄생시켰고, 1931년에는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개최된 한국교회 첫 공의회에 무니 대주교를 교황사절로 파견하는 등 한국교회에 각별한 애정을 표시했다.
▨요한 23세 요한 23세(재위 1958~1963) 교황은 1962년 3월 10일 한국교회 '교계제도'를 설정했다. 한국교회는 이로써 지난 130여 년간의 선교지 교구에서 벗어나 정식 교구의 자격을 갖추게 됐고, 한국교회 주교들은 교황의 대리인이 '사도의 후계자'로서 교구 관할 전권을 행사하게 됐다. 아울러 한국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정식으로 초대돼 보편교회의 당면 과제에 협력하고, 중대 사안을 함께 결정하는 완전한 형태의 지역교회로 인정받게 됐다. 요한 23세 교황은 교황 즉위 이전 주프랑스 교황 대사로 재임하면서 1948년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 한국 대표단을 적극 지원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 바오로 6세 바오로 6세(재위 1963~1978) 교황은 1968년 10월 6일 한국 순교자 24위를 복자로 선포했다. 그는 시복식 강론을 통해 한국 순교자들의 용덕과 신덕을 극찬하고, "유럽 신자들은 한국 순교사를 연구해 한국 가톨릭의 훌륭한 모범을 본받으라"고 촉구했다. 바오로 6세는 1969년에 김수환 대주교를 추기경에 서임, 한국교회가 교회의 최고 통치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해 줬다. 아울러 1963년 12월 대한민국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도 했다.
▨요한 바오로 2세 요한 바오로 2세(재위 1978~2005) 복자 교황은 1984년 5월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해 사상 처음으로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이다. 그는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시성식을 주례, 103위 한국 순교 성인을 탄생시킴으로써 한꺼번에 1백 명이 넘는 성인을 교황청 밖에서 시성하는 첫 기록을 남겼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89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때 다시 방한, 한국교회와 우리 민족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표현했다. 그의 두 차례 방한은 민주화를 갈구하던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한국교회 교세 성장에도 일조했다. 그는 또 한복을 입은 한국인 신자를 만날 때면 "찬미 예수님"이라며 먼저 인사하고, 수시로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세계 교회에 호소해 우리 민족에게 가장 친숙한 교황으로 사랑받고 있다.
▨베네딕토 16세 베네딕토 16세(재위 2005~2013) 교황은 재위 중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 이산가족과 북한의 인도주의적 지원 문제 등에 꾸준한 관심을 보였다. 2007년 9월 30일 교황은 삼종기도 후 "지금 한반도에서 남북 대화의 중요한 진전이 이뤄지고 있으며, 화해를 위한 노력이 강화돼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에 이바지하리라는 희망을 낳고 있다"며 전 세계 신자들에게 성공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기도해주길 당부했다. 또 그는 2009년 교황청을 찾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식량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북한 주민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며 "남북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해 나가자"고 말하기도. 그는 또 한국의 큰 행사나 사건이 있을 때도 전문을 보내 관심을 표명했다. 그는 김수환 추기경 선종, 김대중 대통령 서거와 2008년 1월 40명이 사망한 경기 이천 냉동창고 화재 참사 때도 전문을 보내와 한국민을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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