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사 다섯 번째 강의
고려 전기 문학
* 창업과 쟁패의 신화적 표현
신라 말에는 반란세력의 지도자들이 웅거하였습니다. 그 대표적 예로 원종, 애노, 기훤, 양길, 견훤, 궁예가 있습니다. 나라를 세우는 데까지 이르자면 설화가 민중 영웅의 전설에 머물지 않고 건국신화까지 발견해서 건국의 유래와 정당성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견훤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 : 상주 가은현 사람이며,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견훤을 얻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신라황실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내세우는데 그 계보가 장황한 것이 인상적입니다. 고기에 그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네 가지 형태로 전해지고 모든 전승의 공통적 내용은 견훤이 미천한 처지에서 태어났으나 비범했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견훤의 영웅성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궁예의 이야기 :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아들로 전해지나 비정상적인 출생과 한쪽 눈을 잃는 불행을 겪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신화시대 이후의 신화가 정치적 목적과 관련되어 조작될 때 부딪히는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뒤이어 왕건의 6대조 호경, 5대조 간충, 4대조 보육, 3대조 진의, 할아버지 작제건, 아버지 용건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전한 것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신화라 할 수 있는 증거로 신과 사람을 동일시했다는 것이며 선조의 내력을 이야기하는데 혼인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보육이 오줌이 천하에 넘쳤다고 위대한 아들을 낳는다는 설화를 통해 생식력을 암시해주고, 용건이 미인을 아내로 맞이한 것을 통해 여성의 생식력과 아름다움을 가문의 번영을 암시하며, 호경이 성골 출신의 장군임과 작제건이 당나라 숙종의 아들임을 강조한 것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궁예와 마찬가지로 다소 억측에 지나지 않으나 왕건을 소재로 삼은 설화가 거의 전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려의 태조 왕건이 세상을 떠날 때 통일이 불완전하고 왕권은 안정되지 못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명분이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고려 건국설화는 선조들만 신화의 주인공으로 삼아, 신화적 상징을 통해서 북돋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왕건 조상의 이야기를 통해 왕건의 조상들 역시 역사의 영역에 속하도록 했으며 이는 합리적 통치의 설득력을 아울러 갖출 수 있게 하는 장치가 됩니다.
현종은 이 영향을 받아 <현화사>라는 거대한 절을 지어 왕실불교와 귀족불교의 아성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렇듯 선조들의 이야기에서 보이던 무속적 성향, 태조 왕건이 표방한 무속과 풍수지리설이 혼합된 불교가 현종 대에 이르러 발전하는 계기가 됩니다.
* 향가의 전통과 그 행방
한시와 향가가 아울러 존재했던 신라 문화의 이원성이 고려조에 와서도 유지됩니다. 한시를 통해 중세의 보편주의를 구현해 귀족 상호 간의 정감을 전달하였습니다. 향가를 지어 민족문화의 독자성을 보여주고 귀족과 민중 사이의 교류를 담당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발표된 작품들은 이러합니다.
<보현시원가> : 이 작품은 화엄경(華嚴經)에 근거를 두고 그 한 대목을 노래로 풀이한 것입니다. 균여(均如)가 스스로 이름을 정해놓지 않아 <보현십종원왕가>라고 하는 노래 열한 수 가운데 열 수는 제목도 화엄경에서 그대로 따왔습니다.
한시는 중국말로 지으면서 5언 7자로 다듬고, 향가는 우리말을 3구 6명으로 배열하였습니다. 현종이 절을 완공하며 지은 <향풍체가>, 신하로 하여금 찬양하게 하는 <사뇌가(詞腦歌)> 이 두 작품은 현존하지 않으나 둘 다 향가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도이장가(悼二將歌)>는 예종이 서경에 가서 팔관회를 보는데 허수아비 둘이 관복을 갖추어 입고 말을 타고 뛰놀면서 뜰을 돌아다니더라고 했더라는 내용과 행사의 내력들이 <장절공유사(壯節公遺事)>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는 사뇌가의 범위에 속하고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져 민요에 다시 접근하는 특징을 가집니다. 4줄 향가로 추정하나 두 부분으로 나뉘어 형식의 불일치를 보입니다. 쇠잔기의 향가 또는 향가의 잔존형태에 해당한다는 견해가 타당성을 갖고 있는 것도 엿보입니다.
예종은 <벌곡조>라는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뻐꾸기를 소재로 삼아지은 노래라고 전해지나, 유래만 전해질 뿐. 사설은 전해지지 않아 이 곡의 행적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에 <유구곡(維鳩曲)>이라고도 하고 <비두로기>라고도 하는 노래가 전해져서 그것이 바로 예종이 지었다는 <벌곡조>가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합니다.
<악학궤범>에 전하는 <삼진작>은 곡조를 따서 <정과정곡>, <정과정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정과정곡>이 사뇌가의 잔존형태라는 견해의 근거인 다섯 줄을 볼 수 있으면서도 사뇌가 본래의 격식과 달리 감탄구가 놓인 위치로 보아 사뇌가의 해체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니미 나를] 하는 말 앞에 와야 할 감탄구가 [아소 님하]에 들어가 있는 것이 그 예입니다. 형식면에서는 위와같이 나와 있고 내용면에서는 <원가>와 같습니다.
* 불교문학의 방향 모색
이 시기에 불교통합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광종의 승과제도 창설, 승려 직위 공인, 현종의 현화사 창건이 그 예입니다. 불교교리를 둘러싼 논란은 문화일반에 대한 의식과 연결되어 있고, 문학론이 전개될 수 있는 서로 다른 근거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에 균여와 의천이 문학을 통해 한문과 우리말 사이의 간격, 사변적인 글과 문학작품이 서로 보완적인 구실을 해야 뜻하는 바를 다양하게 펼 수 있다고 생각하여 실천에 옮깁니다.
균여는 글로 쓰지 않고 말로 풀이하는 방식을 택해 성상융회(성은 없음의 영역이고, 상은 있음의 영역)로 집약할 수 있습니다.
제관(諦觀)은 <천태사교의>라는 책을 남겼습니다. 이 책은 석가가 설법을 한 단계에 관한 것과 수행방법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어 회삼귀일(사람의 등급을 셋으로 나누지만 어느 쪽이라도 함께 성불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보살과 같은 경지에 이름)로 집약합니다.
의천은 논술하는 글을 남기던 단계와 시를 중요하게 여기는 단계의 중간 위치에 있어, 교관병수(교라고 하는 이론과 관이라는 실천, 교종에서 힘써 하는 공부와 선종에서 내세우는 수행을 함께 해야 비로소 그 어느 쪽에서도 막히지 않는다)로 집약합니다. <기현거사>, <자계>와 같은 시를 남겼습니다.
그 밖에 의천 이후 계응, 혜소가 있었고 탄연은 선종의 승려였습니다.
참고문헌
* 국문학사(개정판), 조동일․서종문,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