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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과 함께 몰락이 시작되다
일찍이 안두희의 아버지 안병서는 광산왕으로 유명한 평안도 갑부 최창학과 함께 압록강토지개량주식회사를 경영했다고 한다. 그때 압록강 하구 용암포를 개간한 땅 수십만 평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안두희가 신의주상업을 다닐 때 일찌감치 10정보를 안의 몫으로 떼 두었다. 돌아온 안두희에게 안병서는 이 땅의 문서와 여기서 나온 수익금이 예금된 통장을 주었다. 그래서 안두희는 용암포에다 자리를 잡았다.
일제 말기에는 보국대의 징용을 피하기 위해 아버지의 주선으로 군청의 용원으로 들어가 일하기도 했다. 고향에 돌아와 재산도 얻었지, 박옥례와의 결혼도 인정받았지, 징병․징용도 면했지 이제 안두희에겐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해방만 되지 않았더라면 갑부 안병서 일가는 이제껏 그래왔던 대로 도탄에 빠진 동포는 아랑곳없이 누대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을 것이며, 안두희 또한 쾌락을 쫒으며, 허장성세의 야망을 키우며 잘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이 되었다. 안두희에게 날벼락 같은 몰락이 닥쳐오기 시작하였다. 그 ‘원통한’ 사연을 『시역의 고민』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나에게는 일찍 부친으로부터 분배받은 전답이 용암포에 있었다. 해방 직전에 보국대의 징용을 면하기 위해 군처 고원(雇員) 노릇을 하면서부터 자리 잡은 곳이, 즉 이 재산의 연고지인 용암포였다.
시대는 바뀌어 적구(赤拘)들이 도량(跳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은근히 월남을 뜻 두고 바로 토지개혁 직전 이 토지를 팔기로 했다. 일찍 아버지께서는 슬하의 자식들에게 각자 독립 생계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정도로 미리 소지재산을 분배하여 연령의 장유에 차별 없이 즉시로 각각 재산권을 확정시켰다. .... 이런 유래의 토지를 팔게 되매 아버지나 형님의 심정은 어떠하였으랴. 아버지는 나를 불효자식이라 꾸짖고 형님은 나를 탕아라 규정지었다. 그러나 생각한 바를 꺾지 않고 용암포 시내에 있는 3천 평의 과수원을 20만 원의 현금을 받고 이 토지를 팔아 버렸다.
이러하여 토지를 처분하는 데까지는 용기를 내었으나 현금 20만 원을 가지고 월남의 단행만은 끝내 단념하고 아버지의 눈물의 만류를 이기지 못하여 하는 수 없이 새로 마련된 과수원을 안주지로 삼게 되었다.
이 과수원의 명의이전 수속이 끝난 지 며칠 후에 토지개혁이 실시되었으나 과수원만은 이 강탈령을 모면하였으며 당시 북한 동포들은 38선의 철폐가 목척지간에 달린 줄고 생각하고 3개월 내에 이남의 구원군이 입북할 것처럼 희망적인 밀담을 주고받는 심정들이라 토지개혁이니 무엇이니 하는 것은 일장악몽으로 돌리고 있었다. 아버지도 이런 희망에서 굳이 나의 기분의 진정을 종용하여 왔으므로 나는 할 수 없이 쥐었던 현금 20만원을 던져 가지고 이 과수원내에 현대식 아담한 주택을 짓기로 했다.
이 과수원은 도심지대에 위치하면서도 우거진 아카시아 울타리 사이로 가옥이 둘러 막혀 있어 경내에 들어오기만 하면 도회지와는 원격(遠隔)된 별장지대의 감이 든다. 여기다가 환경에 조화되는 집까지 서고 보니 인근의 찬사대로 정말 도원경이었다.
그러나 입주한 지 불과 반년에 시불리혜(時不利兮:때가 불리하구나)의 한을 남기고 적도의 손에 방기하고 떠나게 되었으며 가옥 신축비의 무리로 밀려온 부채 ‘달련’(원본에는 ‘달련’으로 되어 있으나 ‘닦달’의 뜻을 잘못 쓴 것 같다-편집자)은 극도에 달하였고 적도들의 압박과 감시는 촌보를 옮길 수 없는 경지에 함입하였던 것이다.
알다시피 해방 후 북한에선 대대적인 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작업이 시작되었다. 특히 대지주의 경우, 그가 연고지에 계속 주거하게 되면 지주와 소작이라는 이전의 관계 때문에 토지를 분배 받은 농민들이 심리적인 압박을 받게 된다고 해서 소개 정책을 폈다.
안병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처음엔 신의주에서, 그 다음엔 역시 자기 땅이 있던 청천강에서, 또 그 후엔 의주 고향에 갔다가 쫓겨났다. 여기저기 토지가 많았으니 한 군데서 쫓겨나면 다른 지역으로 옮겼다가 문제가 되면 또 쫓겨나곤 했던 것이다. ‘나중엔 결국 금덩어리를 가지고 이남으로 나오려고 하다가’ 누군가 밀고하는 바람에 잡혀 들어가 문초를 받고 나왔다고 한다. 이때부터 안병서는 자식들을 하나씩 하나씩 월남시켰는데, 안두희가 1947년 제일 먼저 월남한다.
권중희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민족정기구현회
40 서청 시절
안두희만 먼저 단신으로 월남해, 처제의 집에서 묵고 있던 중 이듬해인 1948년 처 박옥례가 아이들 둘을 데리고 월남해 합류한다. 그리고 시청 뒤에 있던 태평로 피난민 아파트에서 살림을 꾸렸다. 갑부의 아들 안두희로선 처음 당해 본 ‘모진 가난’이었다. 피난민 아파트란 ‘판잣집 같은 데’로서 한 세대가 한 방씩 쓰게 되어 있었다. ‘방이래야 한 칸이 딱 다다미 두 장이고, 신발 넣을 수 있는 요만한 장이 있고 또 연탄아궁이까지 있어 몸 돌리기도 어려운 조그만 것’이었다. ‘거기서 애들까지 네 명이 겨우 잤으며’ 그나마 그 방도 ‘처제 집에서 겨우 방 하나 얻어 살고 있던 중 뒤이어 형의 아들과 며느리가 월남해 와서 내주고 방이 없어 쩔쩔매니까 서청 부위원장 김성주씨가 얻어 준 것’이라고 한다.
바로 이 피난민 합숙소에 월남한 서북 지역 청년들이 많이 몰려들어 있었던 까닭에, 서청 종로지구 태평로 특별분회가 들어서게 된다. 안두희의 말로는 “불량배 20여 명을 홍종만이가 시청 뒤뜰에 데리고 있었는데, 시청 청소부들과 맨날 옥신각신 트러블을 일으키고 해서, 홍종만이가 김성주한테 서북청년단 간판 하나 달아 주면 잘 관리하겠다고 조건 붙여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
이 시절의 일을 이야기할 때마다 안두희는 눈물을 흘렸다.
“먹고 살 게 없어 가지고, 여편네가 제주도까지 가서 토종꿀을 사다 파는 행상을 했다. 그러느라 유산도 했다. 여편네랑 자식들 먹일 것도 없으니 참 속상했다.”
그래서 ‘자학적인 심리, 자기비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암살까지 저질렀다고 이야기했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친구에게 돈을 얻어 북경으로 가면서도 ‘곧 죽어도 식당 칸에서 맥주를 마시며 기분을 내야’했던 안두희로선 절절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우리 민족의 생활상이 모두 얼마나 곤궁했지는지를 생각지 못하는 것, 거기에 비추어 자신의 ‘모진 가난’이란 도리어 상대적으로 얼마나 행복한 것이었는지를 돌아보지 못하는 것. 그것이 안두희의 운명적인 한계이다. 안두희가 눈물을 흘릴 때는 자신과 가족의 ‘부당한’ 고통을 토로할 때뿐이었다. 안두희는 남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울 줄을 모른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안두희는 자백 중에 박옥례가 유산한 이야기를 하며 번번이 한참을 흐느꼈다. 미국으로 떠난 처가 그리워 그럴 수도 있고, 자신의 지금 처지가 너무나 비통해 그럴 수도 있으려니 생각하면 가련한 느낌도 잠시 든다. 그러나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밖에는 슬퍼해 본 적이 없는 인간임을 생각하고 그 눈물을 대하노라면 참으로 추하다. 잠시의 통정심에서가 아니라 정말로 불쌍한 존재로 느껴진다.
안두희는 1947년 월남한 뒤 곧바로 ‘빨갱이를 때려잡는’ 서북청년단에 들어갔다. 이제야말로 ‘반공 사상’을 뼈에 새긴 ‘의식분자’가 된 것이다. 처음엔 창경원 뒤 성균관대 근처에 있던 서청 행동대원 합숙소에서 사감 노릇을 했다. 행동대원의 수가 약 30여명쯤 되었다고 한다.
“나는 서청 행동대원 합숙소 사감 일을 하면서 서청 본부 총무부장으로 있었다. 문봉제씨가 위원장, 김성주씨가 부위원장, 내가 총무부장이었다. 사람들이 날보고 다들 서드 맨(third man)이라고 했다.”
안두희가 서청에서 일한 것은 분명한데 직위가 그의 말대로 본부 총무부장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실제로는 종로지부 사무국장을 잠시 맡았다가 포병에 입대했다는 증언이 있다.
안두희와 동향으로 같이 암살 음모에 가담했던 홍종만은 암살 전모를 밝히면서 이렇게 증언했다.
“안두희는 서청 종로지부 사무국장으로 있다가 포병에 입대했다. 안두희의 처가 우리 고모의 딸의 딸이다. 둘 다 고향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서청 본부의 총무부장은 이수복이었다고 한다.
또한 『시역의 고민』에서도 ‘내가 사관학교에 입교하기 전 서북청년회 종루지부의 간부로 있을 때’라는 구절이 나온다. 안두희를 미화시키려는 이 책의 실제 필자들이 안두희의 직위를 실제보다 낮추었을 리는 없다(그런데 『시역의 고민』후반부에 가서는 이와 상치되는 묘사도 해 놓고 있다. 153쪽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당시 내가 총본부 총무부장의 직에 있다 하여 동(同)분회 동지들로부터 윗사람의 대우를 받으면서 군대에 들아간 후....” 겸직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증거들이 아니더라도 월남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서청 본부의 핵심간부로 발탁되었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게다가 안두희는 그 이전에 무슨 내세울 만한 공식적인 경력도 전혀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안두희는 진술 도중에 누군가 자기를 지칭해 부른 대목을 인용할 때 반드시 ‘안총무’라는 표현을 썼다.
권중희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민족정기구현회
41 포병 입대
어쨌든 서청에서 ‘대이북 정보 공작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던 안두희는 1948년 11월 포병이 되기 위해 육사 8기 특3반으로 입교하게 된다. ‘서청에서 엘리트이고 의식분자인 안총무가 포병에 들어가면 다 따라서 들어갈 것이라는 부탁을 받고 군대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앞서한 바와 같다.
이 이야기는 안두희의 허세를 감안해 새겨듣기로 하고, 당시 서청원들이 대거 군에 입대케 된 경위를 『시역의 고민』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것을 쓴 극우반공론자들의 과장된 미사여구만 빼고 읽으면 당시의 정세를 파악할 수 있다.
<생각하면 내가 군문(軍門)을 두드린 동기부터가 하루 이틀에 마련된 것이 아니요, 입대 후 군인으로서 기울인 정성 또한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대공원심(對共怨心)을 품어 3년, 하지 중장의 용공정책 태반 위에서 자라던 요소의 잔재가 군경기관의 체내에서 가시기를 초조히 기다리던 차에 일찍 서청 도량(道場)에서 연마된 순국정신을 실지로 발휘할 날이 왔으니 때는 작년(1948년) 여수․순천 국군 반란이라는 충격 그것이었다.
‘서북 건아들이여! 빨리 군문으로 집결하라. 대공전선으로 총진군이다!’
열광된 서청 간부들은 모병(募兵)의 기치를 휘두르며 용산으로, 마포로 천막촌을 달렸다. 깡통 보자기, 양담배 목판을 메어다치고 숨가쁘게 대오를 찾는 흥분의 분류는 실로 우리 건국사를 장식할 찬연한 사재(史材)였으니 지금 우리 국군 포병진의 기간 세력을 이룬, 작년 12월 7일 서울 세종로 대도를 뒤덮고 쏟아져 나온 1,800명 헐벗은 청년의 행진도 그 역사적인 한 장면이었다.
아아, 그날! 감격도 새롭다. 아무리 초라할망정 이북 사람이라고 가족이 없었으랴. 다 떨어진 고무신발을 끌고 등의 아기를 달래면서 남편의 대열 옆에 따라 서는 아내의 그 모습, 남편의 목소리를 따라 부르는 그 서북청년 행진곡, 그것 그대로가 행군이었고 그 합창 그대로가 젊은이의 고함 그대로였다.
우리는 서북 청년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아가 나아가 38선 넘어
매국노 쳐버리자
진주 우리 서북 지옥이 되어
모다 도탄에서 해매고 있다
동지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서북에
(이 노래는 [독립군가]의 가사만 바꾼 것이다-지은이)
장엄하다고 할까. 처절하다고 할까. 중앙청 창문에서 노랫 소리를 들으며 이 광경을 조망하던 한 사람이 눈물을 흘려 가며 곁에 섰는 이북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오늘 저 광경을 보고 솔직히 인식을 달리했다. 나는 지금까지 서북 사람, 개중에서도 서북청년회원을 볼 적에 그저 이북서 쫓겨나온 하나의 감정에서 날뛰는, 시국을 빙자한 테러단, 즉 불량배에 가까운 존재들이라고 백안시하였음을 자백한다. 그러나 국가가 아무리 위기에 임하였다고 해도 아직 전화(戰禍)를 입지 않은 전래의 주거와 생활 실력을 보유하고 있고 부모니 형제니 후견의 당당한 가족까지 영유한 이남 사람들이 아직 움직이지 않는 이때에 무의무탁한 타향에서 그날그날 품팔이로 연맹해 나가는 신세에 제 가족을 천막 속에 남겨 두고 총 메러 나설 줄은 참말 뜻밖의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과연 그들의 외침은 구두선(口頭禪)이 아니었다는 것을 높이 찬양하는 바이다.”
이 말이 어찌 이 알지 못할 한 사람의 지나가는 말에 그치랴. 양심적인 사가(史家)라면 사기(史記)에도 이 주석을 달기를 꺼리지 않을 것이다.
이때 우리 간부들 중 조건이 미치는 사람들은 사관학교로 몰려들었다. 나도 이때 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이 글 속에서 우리는 그 당시 서청이 일반 국민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고 있었는지, 그런 원성을 사면서도 어떤 명분으로 존속할 수 있었는지, 이승만 정부가 서청을 어떻게 이용했는지 대강의 윤곽을 짐작할 수 있다.
42 권중희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민족정기구현회
극우 특공대 서청의 선택, 안두희
서북청년단은 반공단체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조직이었다. 그들은 좌익들이 주도하는 집회나 파업을 폭력적으로 파괴하고 다니면서 그 대가로 극우 정치인이나 기업인들로부터 돈을 뜯어냈다. 한민당과 이승만은 일찍이 미군정 때부터 서청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즉 경찰력만으로는 국민들의 저항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소위 ‘문제지구’에 서청을 파견하여 좌익 철퇴의 선봉대로 이용하였다. 법에도 없는 경찰 보조기능을 부여하면서도 생활은 현지에서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내버려두는 바람에 서청이 가는 곳마다 민폐도 컸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서청 기관지나 이승만 사진, 태극기 등을 강매하고 다녔으며, 안두희도 인정한 대로 돈푼깨나 있는 집의 아들이나 조카, 심지어 먼 친척 중에라도 좌경적인 사람이 있으면 그것을 약점 삼아 두고두고 괴롭히며 돈을 뜯어냈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서청 사무실에 끌어다가 불문곡직 두들겨 패면서 빨갱이 아니냐, 빨갱이와 내통하지 않았느냐는 식으로 추궁했다. 그런 와중에 불구가 되거나 맞아 죽는 사람도 생겨났다. 그래서 국민들은 경찰보다도 서청을 더 무서워하며 행여 끌려갈까 봐 벌벌 떨었다. 반공을 내세운 서청의 광기 어린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제주 4․3항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저지른 만행이다.
요컨대 서청은 해방 후 미군정을 등에 업고 권력을 장악한 이승만 정권의 이데올로기였던 극우 반공 친미 사대주의의 전위 부대요 특공대였다. 전민족의 단결․통일․자주독립을 모든 주의․주장․사상에 앞세웠던 김구 선생을 쏘아 넘어뜨린 자가 이러한 서청에서 나왔다는 것은 필연이었다.
이 필연성 위에서 안두희가 암살자로 선택된 것이다. 주관적인 엘리트의식과 도착된 영웅심, ‘대부호의 아들 안두희’를 ‘월남 실향민’으로 전락시킨 공산주의에 대한 맹목의 적개심, 부잣집 탕아로 살아오며 몸에 익힌 후안무치와 대담함, 간교함, 그리고 무엇보다 역사와 민족에 대한 범죄적 무지와 비례(非禮), 수많은 서청원들 가운데 하필 안두희가 선택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43 권중희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민족정기구현회
2. 발로 밝힌 백범암살사건의 진상
암살의 동기
암살자 일당의 자술서, 『시역의 고민』
백범 살해사건은 ‘민족 분단에 앞장 선 이승만 매국정권이 민중들의 광범위한 저항에 부딪히자, 권력 유지에 불안을 느낀 권력핵심층, 즉 친일파, 극우 반공 세력, 친미 사대주의자들이 미국과 이승만의 직접적인 교사 또는 암시 아래 연합하여 통일된 자주독립 국가를 염원하는 애국진영의 최고지도자를 모살한 사건’이다.
나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단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살인사건에 관한 경험 법칙이 그렇게 웅변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수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백범 살해사건은 하나의 ‘살인사건’이다.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수사관들은 먼저 그것이 일시적인 충동 때문에 저질러진 우발 범행인지 아니면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사전에 계획하여 저지른 범행인지를 가린다.
그리고 동기가 무엇인지를 가려낸다. 원한 때문일 수도 있고, 치정 때문일 수도 있고 재산을 차지하려는 욕심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라도 범인을 잡기 위해서는 수사관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질문은 ‘누가 이 살인으로 이득을 얻게 되는가’이다. 범인은 대개 그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백범 암살사건도 그 단순한, 그러나 엄정한 법칙에서 비껴 나 있지 않다.
누가 백범을 미워하였나. 백범이 죽음으로써 가장 이득을 볼 사람은 누구인가. 백범 암살의 진상을 밝히는 길의 출발지는 바로 여기이다.
그런데 백범을 미워한 자들, 백범이 죽음으로써 이득을 취한 자들이 제 손으로 살해의 동기를 밝혀 놓은 책이 있으니 바로 『시역의 고민』이다.
『시역의 고민』은 1954년 10월 25일자로 출판된 안두희 명의의 수기이다. 정확히 말하면 암살 다음날인 1949년 6월 27일부터 재판이 열리기 전날인 8월 2일까지의 안두희의 일기 모음이다.
이 책은 정식으로 출판되기도 전부터 구설에 올랐다. 책의 서문인 ‘아버지께 올리는 편지’만 안이 직접 쓰고 나머지는 육군사관학교의 아무개 중령과 헌병사령부에 있는 공보장교가 호텔에 묵으며 썼다는 소문이 출간 전부터 공공연하게 떠돌았다. 이 수기를 펴낸 자들도 세간의 이런 풍설이 마음에 걸렸는지 후기에다 이런 구차한 말을 달아 놓았다.
‘내 신경과민인지는 몰라도 이 책 출판 준비에 착수하자 들리는 풍설이 이것은 부러 일기체로 꾸며 가지고 당시의 옥중기로 가장하여 최근에 창작한 위조품이다라고 한다는 데는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 비례(非禮)의 말이나 당시 일기를 매일 검열하던 관계관들이 아직 생존해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간직하고 있는 골라 보기 힘들만치 썩어빠진 원고뭉치가 무엇보다도 이 글이 원고에 충실하였다는 사실을 겸하여 밝힐 수 있는 산 증거물일 것으로서, 의심하시는 분에게는 언제든지 보여 드릴 수 있는 귀물(貴物)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실린 글에 계속된 당년 8월 3일 이후의 부분은 중간 원고 일부가 남아 있을 뿐 거의 전부가 6․25동란 때 육군형무소에서 타 버렸으나”, 이 부분만 용케 남아있게 된 것은 “판결을 받고 형무소로 이송되는 날 옥바라지 온 처에게 보관시켰던 것으로 6․25사변 당시 처가 후퇴할 때에 이것을 유지에 싸서 살던 집 마루를 뜯고 땅 속에 파묻었다가 9․28수복시 집 터전 잿더미 속에서 발굴”한 덕분이라고 밝혀 놓았다.
권중희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민족정기구현회
44. ‘시역의 고민’
이 책이 출판되자 헌병사령부를 비롯한 군당국이 전국적으로 배포를 담당했다. 언론사를 비롯한 주요 기관에는 무료로 송부되었다. 또한 안두희는 자신의 지인들에겐 직접 사인을 해서 책을 보내 주었다.
그러나 ‘잿더미 속에서 발굴한 이 기적적인 유물’은 결국 창작품임이 판명되었다. 안두희 스스로가 1992년 9월 23일 “나는 다 쓴 원고뭉치만 대강 읽어 보았을 뿐, 쓴 사람은 따로 있다.”고 고백했다.
실제로 이 원고를 쓴 사람은 안두희와 동향으로서 인천 특무대장으로 있던 김일환, 그리고 육군특무대장으로서 암살 배후로 지목되었던 김창룡 밑에 있던 장아무개 대위라고 한다. 물어 보지도 않았는데 안두희가 스스로 “오늘 내가 세 가지 새로 밝힐 게 있는데 그중 하나가 『시역의 고민』에 대한 것”이라며 말문을 연 것이다.
“내가 서청에 있을 땐데 하루는 어떤 군인이 지프차를 타고 나를 찾아와선 ‘형님, 저 모르겠습니까’했다. 고향 후배인 김일환이었다. 천복이라고 인천의 서청에서 일하던 친구가 있었다. 그 패거리가 대단해서 천복이 하면 다들 아이구야 했다. 아무도 못 건드렸다. 근데 그 천복이랑 내가 잘 아는 사이였다. 걔 외가가 내 외가와 같은 동네라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지냈다. 그 천복이가 자기한테 와서 ‘서청 총무부장에 안두희가 된 걸 아십니까’하며 소식을 전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 지금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유명한 중국집 ‘아서원’에 가서 회포를 푼 적이 있었다. 근데 내가 형무소 있을 때 처가 면회 와서 하는 말이 어떤 군인이 와서 쌀이랑 고기랑을 자꾸 갖다 놓고 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지프차번호라도 좀 알아 놓으라고 했더니 처가 번호를 적어 놓았다. 확인해 보니 김일환이었다. 나중에 책 내기 전에 김일환이가 와서 다 된 원고뭉치를 보여 주었다. 김창룡이가 아마 동향이라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김일환이를 시켜 장대위하고 같이 쓰게 했거나 아니면 장대위하고 제3자가 쓴 걸 김일환을 통해 내게 보여 준 것으로 생각된다. 원고를 내놓으면서 ‘몇 달 만에 만들었다’며 어떠냐고 물었다. 그리고 돈을 좀 주었다.”
『시역의 고민』은 바로 그들의 창작품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들이 지은 것이니만큼 이 책은 암살 내막의 실체적 진실과 관련해서는 참고할 만한 아무런 사실도 담고 있지 않다. 어차피 암살의 진상이야 우리가 파헤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들의 창작품에서 암살의 구체적 진상과 관련된 그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백범을 암살한 일당들의 논리, 즉 분단 고착 세력들의 생각과 노선을 그대로 담고 있다. 또한 무엇 때문에 김구를 암살하게 되었는가, 어떤 시나리오 아래에서 안두희에게 암살을 연출시켰는가에 대해서는 더 할 수 없이 명쾌하게 자술(自述)하고 있다. 바로 그들의 시나리오를 안두희의 일기로 각색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암살 동기와 시나리오에 대한 일당들의 자술서나 다름없다. ‘나(안두희)는 이러저러하게 생각했다’는 대목은 ‘우리는 안두희가 이러저러하게 행동한 걸로 짰다’로 해석해 읽으면 된다.
암살 음모의 진상을 낱낱이 파헤치기 위한 길잡이로서 이 장에서는 우선 암살 동기, 암살 시나리오, 그리고 암살 이후 그들이 얻게 된 이익을 『시역의 고민』에 적어 놓은 그들 자신의 말을 그대로 빌려 밝혀 보고자 한다.
권중희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민족정기구현회
45 제 발이 저린 도둑들
먼저 이 책을 출간하게 된 동기를 그들은 안두희가 이북에 있는 아버지께 올리는 편지 형식을 취하고 있는 서문에서 이렇게 솔직하게 밝혀놓고 있다.
범행 자체가 비록 우둔하였으나마 순수한 나 자의의 행동이었고 필형(畢刑)의 경위 또한 혼란 중에서도 소정의 법 절차를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일부의 방담자들은 ‘모 고위층 인물에 사주된 범의(犯意)’이니 ‘모 군부의 지령에 의한 범행’이니 ‘불법한 석방’이니 하는 별의별 왜곡된 풍설을 유포시키고 있사오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 두희 자체만에 대한 욕설이라면 무슨 말이라 쓰다 하오리까마는 아직도 항간에 유포되고 있는 낭설이란 단지 두희를 저주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역시 ‘사주한 것’이니 ‘지령한 것’이니 하는 따위의 무고한 제3자의 위신과 명예에까지 오명을 입히는 언어도단의 중상임에야 어찌 귓가로 흘려버리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책을 쓴 자들은 바로 이 ‘무고한 제3자’들임을 금방 알 수 있거니와 그들은 특히나 본문 중에서 이러한 사죄를 올리고 있다.
‘이대통령의 사주’라니 될 말인가. 참으로 뼈가 저리다. 대통령께서 이 말을 들으신다면 얼마나 신금(宸襟)이 어지러우시랴. 나는 김구선생을 살해한 죄에만 그치지 못하고 또 한 가지 대통령의 위신을 더럽힌 죄를 겸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 개의 목숨 가지고 어찌 이 중죄를 사할 수 있으리.
46 궈중희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민족정기구현회
기(起) - 입당
이 책에 따르면 안두희는 ‘한독당 조직 공작원이자 같은 피난민 아파트에 사는 홍종만의 소개로 감학규(한독당 조직부장)를 알게 되었고 그 두 사람을 통하여 한독당에 가입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김구 선생의 총애를 받게’된다. 그것도 평당원이 아니라 ‘비밀당원’으로서 3월 상순에 입당 절차를 밟았다고 적어 놓았다. 입당한 뒤 안은 선생의 극진한 사랑을 받게 된다.
나만치 앙모하고 나만치 숭배한 이도 드물 것이요. 나만치 사랑받고 나만치 귀여움 받은 이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한때 경교장 사람들은 그 극진하신 총애를 지나치시다 생각했고 심지어는 질투에 가까운 눈으로 보는 듯하였다.
이런 총애를 받으며 안두희는 경교장을 ‘내 집같이 무상출입’한다. 구실이 붙는 대로 자주 찾았고 일요일은 거의 예외 없이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선생님께서는 만나면 만날수록 친밀히 응해 주셨다.. 친필 족자를 두 폭이나 받았다. 나는 대포탄피로 만든 화병 한 쌍을 선물했다. 포병대내에서 유위한 비밀당원을 포섭하라는 지령을 받고 그 후보자 명단도 작성하여 조직부에 바쳤고 김학규로부터 그 운동비로 몇 차례 용돈도 받아썼다.
승(承) - 한독당의 ‘전율할 대음모’
그런데 ‘이럭저럭 한 달 넘어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 안두희는 한독당의 ‘전율할 대음모’를 간파하게 된다. 한독당은 경찰과 군대 내에 무시무시한 비밀조직을 침투시키고 있었으며, 안두희 자신도 어느새 포병대 당당 지하세포책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건국실천원양성소는 무엇이며 백범정치학원은 무엇이며 혁신탐정사는 무엇하는 곳인가? 이 기관들은 모두가 그들이 호장(豪長)하는 말 그대로 무시무시한 정치성의 태반 위에서 자라고 있는 명찰 있는 비밀결사이며 살기(殺氣)를 간직한 행동부대임에 어찌 놀라지 않을 손가. 나는 벌써 은근한 위협과 협박을 받았다. ‘당의 조직 지령은 절대적인 것이며 이 지령에 움직이지 않는 자는 반동이다. 탈당의 자유란 없다. 반동자의 등 뒤에는 오로지 죽음의 제재만이 따라 설 뿐이다’라는... 전라도의 모 경위가 암살당했고 모 부대의 모 장교가 행방불명이 되었고, 모 관청의 모 인이 고기밥이 되었다고 하는 등등 전율할 사실의 강의를 여러 차례 받았다.
환언하자면 나도 이미 탈당의 자유를 박탈당한 사람이요, 지령의 철쇄에 얽힌 수인 아닌 수인이 되고 만 것이다. 다시 파고들면 가공! 이 비밀당원의 조직망은 일익(日益) 만연되어 경찰진에도 상당한 세력으로 침투되고 있거니와 특히 기(其) 주력은 군대다. 군대 중에서도 행정적으로 절대적인 성능을 영유한 아아대를 비롯하여 xx대, xx대. 그러면 포병계에서는 내가 부지불식간에 영예로운 지하세포책의 인수(印綬)를 받게 된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되고 보니 안두희에게는 김구와 한독당에 관련된 ‘천 가지 만 가지가 다’ 의심스럽고, 돌이켜 생각되었다. 그런데 문든 그 전 해 어느 때인가 남한의 정계 사조를 평론한 책을 읽은 기억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 책은 ‘어느 한민당 간부의 저서’였다.
‘공산계열을 제외한 남한에 놓인 우익 진영의 대세는 미주파(이박사계), 중국파(임정계), 국내파(한민계)의 정립이다’라는 그 책의 논(論)을 수긍한다면 한독당은 망명 생활 사십 성상 즐퐁목우(櫛風沐雨)의 정신력의 긍지를 교재 삼아 국내 동지를 재빠르게 규합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내걸고 어떤 형태로든지 김구 주석에게 대권을 장악시키기 위하여 미주파를 사대주의 화신으로 규정짓고 국내파를 친일잔재로 몰아세우면서 자파 세력만의 신장 확충을 꿈꾸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항간의 논정 그대로 송진우, 장덕수 양씨는 이 국내파 주동 세력 서거 작전에 희생된 것이 분명할 것이다.
그러자 ‘지난번 선생님께서 족자 두 폭을 써 주신 날이 하필 각각 윤봉길 의사의 기념일이며 안중근 의사의 기념일’이었던 것도 의아했다. 안두희는 이러한 의혹을 풀기 위해 당간부들이나 선생께 의논할 기회를 가지려 애썼지만 ‘좀처럼 시원스러운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오히려 ‘지하 조직 공작에 정신(挺身)하라는 지령’만 날이 갈수록 심해지더니 드디어는 ‘8․15 광복절을 전후하여 중대 행동 지령이 내릴지 모르니 여기에 대비하도록 태세를 갖추라는 무시무시한 명령까지 받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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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轉) - 안두희의 번뇌
이 ‘비밀이 되어서는 안 될 이 비밀’을 알고 나서 안두희는 번민하고 고뇌하느라 ‘주야로 기름은 빠지고 뼈는 말랐다’. ‘정열적이요 박력 있던’ 사람이 ‘무기력하고 음울한’ 사람으로 변해 갔다. ‘김학규나 홍종만이 찾아오는 것이 싫고 무서워서 일요일 날 집에 다녀오는 것도 마음에 내키지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엔 한독당과 김구를 분리시켜 생각해 보려 애쓴다.
김구 선생님은! 김구 선생님은!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공산주의자는 못될 것이며 공산당을 좋아하실 수도 없을 것이다. 나쁘다면 보필하는 놈들, 주위의 놈들이 나쁠 것이다. 엄항섭(嚴恒燮)이가 그런 놈이요, 김학규가 그런 놈일 것이다. 놈들이 혜안을 가리고 민이(敏耳)를 막아 선생님을 거세하여 버리고 그 큰 그늘 밑에 나칩하여 갖은 흉계를 꾸며내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직접 속 시원한 대답을 듣고 싶어 이것저것 의문거리를 들고 가 백범을 만났다. 그러나 백범도 안두희의 동요하는 심정을 눈치챘음인지 예전과 달리 ‘군인이면 군인답게 군무에나 충실할 것이지 네 따위가 정치를 알아서는 무얼 하느냐’고 귀찮게 대할 뿐이었다.
본의 아니게 알게 된 전율할 대음모 때문에 ‘폐병 환자처럼 변해 가면서’도 안두희는 한편으로는 은근히 ‘사법 당국의 처사’를 기다렸다. 그러나 사법 당국은 감히 경교장을 건드리지 못하고 손을 놓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불온한 정치 사범도 정체를 캐 들어가다 보면 그 ‘배후 관계의 꼬리’가 늘 ‘경교장으로 숨어 버려’ 수사기관원들이 ‘비명’을 지르는 상황이었다.
결국 합법적인 방법으로 한독당의 음모를 부수기는 바랄 수 없이 되었고 ‘8․15 대기라는 무서운 음모는 나날이 무르익어’갔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때에 설마설마하며 믿었던 선생이 안두희의 발등을 찍고 말았다. ‘지방을 순회 유세하시면서 수만 대중 앞에서 공공연하게 정부를 공격하고 대통령을 공격하며 시책을 반대하여 민심을 선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내게만은 언론의 자유가 있다. 내가 아무리 비방하고 욕설을 한다 할지라도 감히 손댈 놈은 없다. 아직 무슨 위원단이니 사절단이니 하는 외국 손님이 내 집을 드나드는 한 국제적인 체면을 보아서라도 감히 손을 댈소냐’하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게 아닌가.
드디어 안두희는 ‘신과도 같이 양모해 온 세기의 거성, 역사적인 위인 김구 선생님’의 과거 행적까지 비판하게 된다.
참된 겨레들의 직간 읍소를 물리치시고 도망치다시피 경교장 뒷문을 빠져 나가시면서 ‘초지를 관철치 못하면 귀로에 삼판선을 베고 누워 죽고 말리라’는 맹서를 남기고 월북하셨던 선생님이 협상에서 무엇을 얻으셨는지 무고히 삼팔선을 되넘으셔서 귀경하신 후 뚜렷한 진상발표와 심경의 피력도 없으신 채 일관하여 미 정책을 박대하시며 UN의 처사를 치소하시며 미군 철퇴를 주장하셨고 미의 대한원조를 중상하여 심지어는 그렇게도 미덥고 향기로우시던 이 박사님과의 금란(金蘭)의 교(交)도 끊으셨으니 슬프다. 5․10선거를 거부하고 부통령의 취임 권고까지 뿌리치실 줄이야 알았으랴.
급기야 안두희의 심정은 폭발 직전까지 가게 되었다. 그는 경교장을 들렀다 오는 날이면 길거리를 오가는 시민들을 항해 마음속으로 이렇게 절규하였다.
‘국민들이여! 여기 공공연히 국가를 중상하고 국시를 훼방하며 국책을 반대하고 민심을 선동하는 이적 행위자가 있다! 그는 바로 우리의 위대한 영도자이시오, 국부이시오, 애국자이신 김구 선생이시다. 이 이가 김구 선생이기에 정부, 아니 우리의 엄연한 법도 손을 못 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권중희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민족정기구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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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結) - 숙명의 결심
이렇게 부글부글 끓고 있는 안두희의 분노에 결정적으로 불을 댕긴 것은 ‘국회 소장파 의원 사건’이었다.
<악착스럽게도 의사를 단절하려고 발호하는 반동배, 소위 국회 소장파의 노선과 한독당의 지론이 어쩌면 그렇게도 부합될 법인가. 공산당 프락치 국회 소장파 주도배의 본거이며 참모부가 경교장이라는 세론도 중상만이 아닐 것이니 그렇게도 패악스러이 세인의 감정을 물어 뜯던 노일환 이하 국회 소장파 6명이 일거에 구속되고 김약수는 피신하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모 신문은 ‘김약수는 김구씨 보호하에 은신’이라는 뉴스까지 버젓이 실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더라도 ‘신성불가침인 경교장’으로 숨었다면 경찰도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안두희는 걱정이 앞섰다. 안두희의 ‘우국충정’은 깊어만 간다.
<북방의 괴뢰들은 금방이라도 남침을 강행할 듯이 군비 증강에 광분중인데..., 미군은 철퇴하고, 주고 간 군수물자는 0할이나 적이 훔쳐 갔고, 게다가 미국의 원조 루트마저 단절된 현실에 있어서 공공연히 정계를 교란하고 있는 국회 프락치들과 호흡을 같이 하는 세력이 남이 아니라 외국인으로부터 군의 조종력을 장악하였다고 규정받는 김구 선생이시며, 무서운 음모를 내포하고 목하 지하조직을 확대 중인 한독당인데는 어찌 몸서리치지 않으랴, ..... 장차 이 나라의 운명과 이 민족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밤잠을 자지 못하고 번뇌하던 안두희는 드디어 결론을 내린다.
이 정체를 폭로시킬 역할은 나를 두고는 할 사람이 없을 것이며 금후 선생님의 심경에 추한 촉수를 제지시킬 수 있는 사람도 나 하나뿐이 아닌가? 피치 못할 임무요, 운명이다, 숙명이다!>
<이리하여 숙명의 과제를 짊어진 안두희는 ‘드디어 역사적인 비극의 날’ 1949년 6월 26일 ‘오늘은 결단코 선생님의 심정을 똑똑히 규명하며 실태를 분명히 파악하여 만고에 충언이 끝내 헛되게 되면 다음 시간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연히 당원증을 내던지고 이 마굴의 정체를 일거에 폭로하는 동시에 선생님 주위에 야합칩복(野合蟄伏)된 악당들을 일망에 타진하여 그 파괴적이며 반역적인 전율한 음모 사실을 일일이 척결하여 놓으리라’는 결심을 하고 경교장을 방문하여 선생을 살해하였던 것이다.
주인공 안두희가 ‘가장 숭배하옵는 스승’을 ‘운명의 작희’로 말미암아 살해하게 되었다는 이 비극 대본은, 주인공이 스승을 죽인 뒤 자신도 죽을 마음으로 총구를 이마에 댔다가 아직도 남아 있는 자신의 책무, 즉 ‘한독당의 음모’를 아직 폭로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죽음을 뒤로 미루는 것으로 이윽고 끝이 난다.>
권중희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민족정기구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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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작전의 두 이판본(異版本), 『시역의 고민』과 수사발표문
이 대본은 어설프기 짝이 없는 작위성을 곳곳에서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안두희가 3월 상순에 비밀당원으로 입당했다는 대본의 내용을 그대로 따른다 하더라도 그때부터 암살이 일어난 6월 26일까지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4개월이다. 그 동안에 ‘선생님의 총애’도 입고, ‘전율할 음모’도 간파하고, 탈당하면 없애 버린다는 협박 속에서 번민하느라 기름도 빠지고 뼈도 말랐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안두희가 백범을 처음 만난 것은 4월 중순이다. 결국 이 모든 일들이 2개월 동안에 이루어진 셈이다. 내세울 전력조차 하나 없는 새파란 육군 소위 안두희를 김구 선생이 ‘다른 당원이 질투할’정도로 총애하였다는 것도 소가 웃을 이야기다. 더구나 평소 정객들과 공식적인 자리에서 회담을 할 때조차 말수가 적기로 이름난 김구 선생을, 서른한 살 새파란 포병 소위의 아픈 데를 건드리는 질문에, 평소의 다정한 태도를 표변시켜 물건을 집어 던지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노인네로 묘사해 놓은 암살 직전의 대목에 이르러서는 할 말을 잃게 된다.
내가 만약 ‘무고한 제3자’ 가운데 하나였다면 이런 지나친 각색으로 대본의 사실성을 나락으로 처박은 각색자에게 책임을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1949년 7월 20일 군 수사당국은 백범 암살의 최종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안두희는 김구의 가장 신뢰하는 측근자로서 누차에 걸쳐 직접 지도를 받아 오다 점차 한독당과 김구의 사상 및 정치 노선에 회의를 품게 되었으며 특히 8․15를 기해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감지케 되어 한독당을 탈당하려 하였으나 테러를 당할 위험 때문에 그러지도 못하고 있던 중, 암살 당일 김구를 찾아가 노선을 둘러싸고 언쟁을 벌이다 격분한 나머지 순간적으로 범행을 저지르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이 최종 수사 결과 발표문보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시역의 고민』을 더 잘 요약할 글이 있을 수 있을까. 『시역의 고민』은 최종 수사 결과 발표문에 살을 갖다 붙인 것에 불과하다. 수사 결과 발표문과 『시역의 고민』은 결국 암살자 일당이 꾸몄던 ‘안두희를 미리 한독당에 입당시켜 김구를 살해한 뒤 한독당 내분의 결과로 꾸며 한독당까지 없애 버린다’는 작전 계획의 대국민용 각색판인 것이다. 하나는 짧고, 하나는 길 뿐 동일한 지침 아래 쓰여진 이판본이다.
오리지널 시나리오, 즉 암살 음모에 짜 맞추어 쓴 것이다 보니 각본의 군데군데에 복선을 깔아 놓은 것도 너무나 훤히 들여다보인다. 친필 족자를 받은 일, 탄피로 만든 꽃병을 선사한 일, 비밀당원, 군대내의 세포조직, 심지어 족자를 받은 날이 안중근․윤봉길 두 의사의 거사일이었다는 치졸한 장치까지 해 놓았다. 수사 결과 발표 시에 친필 족자는 김구선생의 ‘총애’의 증거로, 탄피 꽃병은 안두희의 ‘숭모’의 증거로 각각 제시되었고 포병대에 소속되어 있던 십여 명의 서청 출신 군인들은 사건 직후에 자신들이 군부에 침투한 한독당의 비밀당원이었음을 고백하여 한독당의 음모를 폭로하고 신문에 요란한 탈당 선언문을 게재했다.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권중희 민족정기구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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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의 동기
한편, 안두희가 입당 후 김구 선생의 행적과 한독당의 노선에 대해 회의하고 번민하는 대목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암살 배후 세력들이 왜 김구를 제거하려 했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안두희가 김구와 한독당에 대해 품은 불만과 의혹의 내용은 책의 이곳저곳에서 몇 차례나 다른 형식으로 되풀이 강조되고 있는데 요약하면 이러하다.
백범과 한독당은 미국과 이승만의 남한 단정 수립 정책에 반대하여 ‘미군 철퇴를 주장하고, 미의 대한 원조를 중상하고, 일관하여 미국의 정책을 박대하고, UN의 처사를 조롱’하였으며 ‘급기야 5․10선거까지 보이코트’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부 수립 뒤에도 ‘공공연히 반미적․반이승만적 언동을 일삼음으로써 국시를 훼방하고 국책을 반대하고 민심을 선동하는 이적 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 모든 이적 행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내걸고 대권을 장악하기 위한’ 야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독당은 ‘공산당보다 더 무서운 당’이라고 결론짓는다. 한독당이 ‘국시를 훼방하고 국책을 반대하고 민심을 선동한’ 구체적 사건으로는 송진우․장덕수 암살사건, 여순 반란사건, 강소령․표소령 월북 사건, 국회 소장파 사건을 들고 있다. 이 모든 사건을 백범과 한독당이 뒤에서 ‘교사․사주했다’는 것이다.
특히 열거된 여러 사건 가운데서도 ‘국회 소장파 사건’에 대해선 가장 극심한 적대감을 노출시키고 있다.
나는 지난봄 별러 별러 국회 방청을 간 적이 있다. 이것은 중상이 아니라 회의 진행 솜씨부터가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가 지난날 해보던 서청 중집(中執)이 훨씬 모범적이라고 생각키워질 정도였으니, 기대가 지나치게 컸던 탓도 있겠지만 갑자기 받은 밥상, 민주주의 성찬이라 젓갈 댈 데를 몰라 어릿어릿할 수 도 있으리라. 그러나 역연히 반국가적인 행동을 취하고 있는 소수 분자에게 회의를 리드당하고 있는 꼴이야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국회를 점잖게 나무라다가 본격적으로 소장파 이야기로 옮겨가면 ‘국회의 충치’ 운운하며 원색적인 공격이 쏟아져 나온다.
언론의 자유를 방패로 정부를 중상하고 UN을 비방하고 미국을 모함하고 공산당을 찬양하며 지각없는 기분파 소위 소장 그룹 40명을 휘동구사(麾動驅使)하면서 끝내 국회를 천단(擅斷)하려고 발악적인 전술을 감행하여 왔던 것이 아닌가....
동양 평화의 교두보로서 세계 민주 우방의 각광을 받은 이 땅에서 전운이 걷히기 전에 미군은 왜 갔는가! 멸공전의 선봉군으로 인방(隣邦)의 기대를 한 몸에 걸머진 우리 국군에 대하여 입안되었던 원조계획은 왜 좌절되었는가?....... 정부의 위신을 국제적으로 매장시키고 국가의 신망을 세계적으로 실추시키려던 것이 군들의 작전 그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이 문제야말로 김구와 한독당이 품고 있던 음모의 핵심적 부분인 양 “생각하면 선생님의 비위를 거슬린 질문 중에는 한독당 자체의 이야기보다 늘 이 소장파 문제가 앞서곤 했다”고 적어 놓았다. 소장파 이야기만 꺼내면 선생이 안색을 바꾸고 예민하게, 때로는 급소를 찔린 듯 신경질적으로 반응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백범 선생의 눈을 가려 놓고 나중에는 죽음의 함정으로 차 넣는 것’도 바로 이 소장파 의원들이라고 주장한다.
소장파가 왜 그토록 격렬한 증오의 표적이 되었을까?
권중희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민족정기구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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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소장파와 이승만
국회 소장파란 1949년 5월 18일 반공법 위반으로 경찰에 검거된(소위 ‘국회 프락치 사건’) 이문원, 최태규, 이귀수 의원과 이어 6월 19일 육군 헌병대 특별수사대에 의해 보안법 위반 혐으로 구속된 노일환, 서용길, 김병희, 김옥주, 박윤원, 강욱중, 황윤초 그리고 이때 수배되었다가 6월 24일 검거된 국회부의장 김약수 등 10여 명의 의원을 중심으로 한 국회내의 소장 의원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 소장파 의원들은 당시 국회내에서 이승만의 독선적이고 권위적인 통치에 굴복하지 않고 사사건건 정면으로 맞서 싸우고 있었다. 반민족 행위 처벌법(반민법) 제정․심의 과정에서는 법안의 내용을 약화시키려는 이승만과 한민당의 연합 세력에 반대하여 오히려 그 강화를 주장했고, 미국에서 제공한 최초의 차관인 이른바 ‘캔디차관’이나 서울시 서대문구 정동(지금의 중구 정동 -지은이) 부근의 토지 매도에 반대했고, 국가 보안법에 대해서는 일제 시대의 치안 유지법과 같다고 철회를 주장했고 귀속 재산 처리법에 대해서는 일부 특권층의 사복을 채우는 것이라고 반대했으며 농지 개혁법을 놓고는 지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한민당과 정면 충돌했다. 이승만과 한민당으로서는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이러한 소장파가 문자 그대로 같은 하늘을 지고 살 수 없는 원수와도 같았다.
1948년 7월 17일 정부 수립 후 국회는 3년간의 미군정 기간 동안 미루어 둘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법률들을 시급히 제정해 국정의 지침을 세워야 했다. 반민족 행위처벌법, 농지 개혁법, 귀속 재산법이 바로 그런 중대한 법안들이었다.
반민족 행위 처벌법은 일제의 식민 통치에 유린당하는 동안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민족정기를 되살린다는 점에서, 농지 개혁법은 반봉건적인 식민 통치 아래에서 가혹하게 수탈당해 온 국민들에게 생존의 터전을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귀속 재산법은 새로이 들어선 정부의 재원을 확보하고 산업자본의 기틀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정부가 감당해야 할 민족 부흥의 과제를 핵심적으로 상징하고 있었다.
권중희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민족정기구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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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한민당은 반민법을 싫어했다.
국민들은 일제가 패주하고 나면 친일 반역배들이 모두 소탕될 줄만 알았다. 35년 동안의 간악한 식민 통치는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산업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또한 자주와 자존의 민족정신을 훼손하여 우리 민족의 골수에까지 깊은 상처를 남겨 놓았다. 이런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의미의 독립이란 불가능했다. 과거 식민통치 아래에서 개인의 영달만을 위해 민족을 팔아먹었거나, 일제에 아부․협력했던 민족 반역자․친일파들을 사회 각 분야의 지도적인 지위에서 말끔히 몰아내는 것이야말로 그 상처를 치유하고 민족정기를 회생시키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나 사정은 오히려 정반대였다. 미군정은 행정의 편의성만을 앞세워 식민 통치 기구에 종사했거나 협력적이었던 사람들을 ‘행정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대거 군정청 관리로 임명하였다. 특히 국민들의 증오의 표적이 되고 있던 일제 때의 경찰 관리들까지 그대로 유임시켰다. 그중에는 일제 때 고등경찰로서 독립운동가를 검거․고문한 악질적인 매국노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최운하․노덕술 같은 자들이 대표적인 예였다.
이때 미군정과 적극적으로 손잡고 영향력을 발휘한 게 바로 한민당이었다.
한민당은 중산 지주 계급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도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했던 그들은 대체로 학력도 높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대부분 영어를 쓸 수 있고, 기독교 계통이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한민당내 8명의 총무 가운데 한 사람이던 조병옥은 이때 경찰력을 통솔하는 경무부장에 취임하였다.
경찰 조직을 위시해 군정청의 주요 행정 부서를 장악한 한민당은 이를 정권 장악을 위한 기회로 적극 활용하였다. 경찰을 동원하여 자당의 조직을 확대하고 여타의 모든 반대 세력을 무력으로 탄압했던 것이다.
한편 국민들 사이에 명망은 높았으나 주로 미국에 머물며, 미 정부를 향한 ‘호소외교’에만 치중했던 탓에 국내에 뚜렷한 조직 기반이 없던 이승만은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한민당과 손을 잡았다. 이리하여 친일 분자들은 한민당을 통해 이승만의 정치 자금을 제공하고 이승만은 자신의 위선적인 독립 운동 경력으로 그들을 보호해 주는 공생 관계가 구축되었다.
한민당과 손을 잡음으로써 친일파와 밀착하게 된 이승만은 이에 그치지 않고 대통령에 국회 간접 당선된 뒤로는 더욱 적극적으로 친일파들을 끌어들였다.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기는 했지만 이승만은 항상 정치적으로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 단독 정부 수립에 결사반대하여 5․10선거를 보이코트함으로써 원내에서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지만, 여전히 국민들의 절대적인 존경을 받고 있던 김구와 임정 계열은 이승만을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는 정치 세력이었다. 또한 김성수를 위한 국내파, 즉 한민당 계열도 이승만으로서는 만만찮은 라이벌이었다. 한민당과 손을 잡으면서 약속했던 내각제 도입을 헌신짝 버리듯 저버림으로써 권력을 놓고 한민당과도 이미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승만에겐 자신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독자적인 정치 기반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승만은 그러한 방편의 하나로 친일파들을 군․경찰․행정부의 구석구석에 끌어들여 요직에 기용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헌국회에서는 미군정 기간 동안 유보되었던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는 문제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9월 22일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 공포되었다. 이어 동 법에 의거해 반민특위(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1949년 1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반민법이 제정됨과 동시에 친일파들의 집요하고 악랄한 방해 공작도 시작되었다.
반민법이 국회에서 심의될 때부터 ‘친일파를 엄단하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빨갱이’라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던 친일 및 극우 단체들은 이후로도 관제 데모, 특위 위원에 대한 중상 모략, 삐라 살포, 테러, 암살 모의 등으로 방해 공작을 계속했다. 이런 모든 방해 공작 뒤에는 친일 전력의 경찰 간부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경제계를 움직이고 있던 친일 기업가들, 정계 요로에 기용되어 광범위한 정보 조직을 가지고 있던 친일 관료들이 모두 한패였다.
그리고 그들 뒤에는 이승만이 있었다. 친일파를 자신의 정치 기반으로 삼고 있던 이승만은 당연히 반민법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고 앞장서서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고 견제했다.
악질 왜경 출신으로서 전 서울시경 수사과장이었던 노덕술이 1949년 1월 26일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자 그 이튿날 이승만은 특위위원장 김상덕 등 6명의 특위 위원을 불러 노덕술을 석방하라고 강요했다. 노덕술은 ‘해방 이후 군정 경찰에 투신, 치안 확보에 힘써 온 경찰의 큰 공로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특위가 이를 거부하자 이번엔 반민특위 활동이 헌법에 위반된다는 어기지 담화문을 발표하였으며, 나중엔 반민법 개정안까지 제출하였다.
이승만의 이러한 방해와 견제에도 불구하고 반민특위는 애국지사들을 체포․고문․학살한 고등계 형사들을 비롯, 반민족 행위자들을 계속 잡아들이며 왕성한 활동을 폈다.
반민법을 제안․심의․제정하는 과정이나 반민법을 무력화시키려는 이승만 및 친일 세력들의 방해 공작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가장 앞장 선 의원들이 바로 문제의 소장파 의원들이었다. 따라서 ‘친일 연합’이라 할 수 있는 이승만․한민당․극우 반공 세력들에겐 이들이 그처럼 증오스러운 ‘국회의 충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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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승만을 ‘국부’라고 떠받드는 사람들이 ‘애국’한답시고 설치고 있다. 세상 거꾸로 돌아간다. 친일 망국노들의 청산 없이 독립국가 없다.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권중희 민족정기구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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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한민당은 농지개혁을 싫어했다.
한편 농지 개혁법을 둘러싸고도 이와 유사한 공방이 되풀이되었다. 조선조 500년간의 봉건적 착취에 연이어 일제의 반봉건적 수탈에 시달려 온 까닭에 해방 당시 우리 나라 농민 가운데 자작농이 차지하는 비율은 고작 13.8%였다. 그리고 나머지 대다수의 소작․반소작 농민들은 최고 70%에까지 이르는 고율 소작료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 동안 지주들의 봉건적 수탈을 비호해 주었던 일제가 물러나면서 농민들 사이엔 당연히 그간의 가혹한 수탈에 대한 반발심과 더불어 토지개혁에 대한 욕구가 비등했다. 뿐만 아니라 북한에서 ‘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이 급속히 진행되면서 토지개혁은 남한에서도 피할 수 없는 기정사실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토지개혁이 기정사실화하는 듯하자 일제의 비호를 받으며 농민을 수탈해 왔던 지주 계층은 이에 조직적으로 저항하였다. 즉 토지개혁을 둘러싼 논의를 지연시키고 그 동안에 토지를 방매함으로써 토지개혁으로 인한 피해를 모면하고자 하였다. 지주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던 한민당계 의원들은 국회에서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면서 토지개혁 법안의 핵심을 흐려 놓고 있었다.
그렇게 지주 출신 의원들이 심의를 지연시키고 법안의 내용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환골탈태시키는 동안 지주들은 소작지 강매에 열중하였다.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소작인들은 소나 가재도구를 팔아 억지로 땅을 사야 했고, 그나마 토지를 사려는 사람이 많아 땅 값도 2배씩이나 올랐다. 그래서 돈이 모자라면 계약금만 내고 나머지 돈을 연 2할의 이자를 물어 가며 빚으로 떠안는 사례까지 비일비재했다. 이러한 사실은 실제로 농지 개혁법에 의해 분배된 토지가 33만여 핵타르, 즉 1945년 12월 현재 소작지 총면적이었던 144만 7,339핵타르의 16.5%에 지나지 않았다는 자료로 입증되는 바이다.
농지개혁에 가장 소극적이었으며 기회 있을 때마다 법안의 심의․통과를 지연시키고 내용을 지주층에 유리하도록 추진한 것은 한민당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매수지 보상을 20할 10년불로 하겠다는 정부안을 심의 과정에서 30할로 올리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소장파에서는 농지 개혁법이 아니라 ‘지주의 토지 처분법’이라고 부르는 게 타당하다는 비판까지 나왔다. 이 농지 개혁법을 둘러싼 공방에서도 한민당의 심의 지연․법안 수정 책동에 맞서 가장 결연히 싸운 것은 소장파들이었다.
54권중희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민족정기구현회
이승만과 한민당은 귀속 재산을 빨리 나누고 싶어 했다
귀속 재산 불하를 둘러싸고도 이승만과 소장파는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해방이 되었을 당시 우리나라에 있는 기업체의 80% 이상이 일인 소유의 소위 적산이었다. 이 재산이 36년간 일제에 강탈당한 우리 민족의 피와 땀인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이 재산을 제대로 불하하여 민족 경제를 회복하는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게 전민족의 당연한 바람이었다. 미군정은 적산을 접수한 다음 이것을 미군정의 귀속 재산으로 규정하고 다시 특정 한국인들에게 관리시켰다. 이 과정에서 친일 매판 기업인들을 비롯하여 온갖 정상 모리배들이 판을 쳤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사바사바’니 ‘통역정부’(미군정 기간에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요직을 맡아 남한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이권을 챙겼음을 빗대는 말)니 하는 유행어들이 다 이때 생겨난 것들이다.
이승만 정권은 1949년 예산 편성 과정에서 이 귀속 재산을 불하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국회에서 소장파 의원들은 “귀속 재산 처리법이 정식으로 국회를 통과하기 전에는 일체 불하를 할 수 없다.”고 반대했다. 그런데도 행정부에서 6월부터 불하를 시작할 태세를 보이자 국회에서는 이를 견제할 목적으로 귀속 재산 임시조치법을 통과시켜 버렸다. 여기서도 선봉에 선 것은 역시 소장파들이었다.
“소장파는 곧 김구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1948년 정부 수립 후, 적어도 국회내에서는 이승만․민국당(한민당은 1949년 2월 당명을 민주국민당으로 개칭했다)을 정점으로 하는 매국 세력들의 가장 큰 적이 이들 소장파 의원들이었다.
달리 표현하면 친미 반공 세력과 애국 진영 사이의 전선이 국회 안에 형성되어 있었고, 그 최전방에 국회 소장파가 포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고한 제3자’들이 『시역의 고민』에 쏟아 놓은 격렬하고 원색적인 비방은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특히 소장파와의 관련성을 물을 때 유난히 당황하고 화를 냈다’고 김구 선생을 모략하고 있는 것도 원내의 이 ‘목의 가시’를 그보다 더 큰 원외(院外)의 가시와 함께 묶어 제거해 버리려는 음모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소장파와 김구는 하나였다. 제헌의회에서 초대 대통령을 선출할 때 이들 소장파들은 김구 선생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 하였다. 그들은 원외의 김구가 원내의 소장파를 조종하고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소장파에 대한 그들의 증오는 다름 아닌 김구 선생에 대한 증오였다.
그들은 왜 백범을 그토록 증오하고 두려워하였는가. 백범은 그들에게는 염라대왕의 거울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반공을 부르짖으며 ‘친일’의 흔적을 지우려 해도 백범이라는 거울 앞에 서면 친일에서 친미로 변신하여 민족을 분단시킨 그 흉악한 사대주의자의 모습이 그대로 비쳐지는 것이었다. 백범이라는 존재는 온 민족의 양심을 비춰주는 달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것은 이승만이 미국을 등에 업고 추구하고 있는 민족 분열적 정치를 가로막는 거대한 걸림돌이었다. 그들은 이 돌이 언제 자신들을 덮칠지 몰라 두렵고 불안하였다.
55권중희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민족정기구현회
위기에 처한 이승만 매국정권
실제로 1949년 봄, 이승만 정권은 엄청난 위기에 빠져 있었다. 반민족적이고 반민중적인 이 정권의 학정에 국민들은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적산 처리를 둘러싸고는 온갖 정상 모리배들이 들끓어 민족 경제의 기초를 망가뜨려 놓았으며, 토지개혁이 늦어지는 바람에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들은 토탄에 빠져 있었다.
게다가 정부 관리들의 부정․부패도 극에 달해 있었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일제 시대 때 민족을 팔아먹는 자라 하더라도 반공만 부르짖으면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 호령을 하는 판이니 사회 정의니 민족정신을 운위할 여지가 없었다.
미군정 때부터 시작된 국민들의 저항도 계속되고 있었다. 제주의 4․3항쟁은 잔혹한 토벌 작전에도 불구하고 정부 수립 후에도 계속되고 있었고, 진압은커녕 오히려 진압 명령을 거부하는 군반란이 일어났다. 바로 『시역의 고민』에서 자주 거론하는 ‘여수․순천 반란 사건’이었다. 주민들은 동족을 죽이라는 명령을 거부한 이 반란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고 항쟁은 엄청난 규모로 발전했다.
장교들이 휘하의 군인들을 데리고 집단으로 월북해 버리는 사건도 심심찮게 터져 나왔다. 『시역의 고민』에서 한독당의 공작의 결과라고 뒤집어씌워 놓은 ‘강소령․표소령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미국의 힘으로 권좌에 오르기는 했지만 극소수 매국노들을 뺀 대다수의 국민들로부터는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그 동안 허약한 정권을 보호해 주려고 철수를 지연시키고 있던 미국이 1949년 1월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소련이 일찌감치 철수한 데 비해 미국이 계속 철수를 지연시키자 국제여론이 들끓고, 미국 내 여론조차 조기 철수를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끝까지 미군철수를 반대했지만 미국은 1949년 6월까지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철수하기로 계획을 확정지었다.
민중의 저항은 계속되는데 미국은 떠나고, 새로운 통치 구조를 위해 꼭 필요한 악법들은 소장파들이 그악스럽게 반대를 하고 권력의 중추인 친일 관료, 친일 경찰, 친일 자본가들을 반민특위가 박살내려 하고 있고 인기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1949년의 봄은 이승만 정권에겐 그렇게 잔인한 계절이었다.
1950년엔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1952년엔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당시의 추세대로라면 재집권은 결단코 불가능했다(그리고 1950년 5월에 있었던 국회의원 선거에서 실제로 이승만은 참패했다. 이승만 지지세력은 겨우 30석을 얻는 데 그쳤다.)
56권중희‘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민족정기구현회
‘반민족 연합전선’의 총공세
그런데 바로 그때 김구 선생의 암살이 일어나 음모자들의 표현대로 ‘객관 정세가 반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반전’은 결코 ‘급격한’것은 아니었다. 암살 전후의 정가일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면 우리는 암살이 일련의 일정표에 맞추어 일어난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것은 치밀하게 계획되어 암살 한 달 전부터 작전 개시된 대반격의 절정이었을 뿐이다. 백범 암살을 전후한 약 두 달간은 ‘반민족 연합전선의 총공세’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공세는 소장파 의원에 대한 공격으로 개시되었다.
5월 20일 소장파 의원 3명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었다. 그들이 남로당의 프락치라는 것이었다. 그때 국회에서는 농지 개혁법, 귀속 재산 처리법 등이 한창 심의 중에 있었으며 소장파의 치열한 반대에 부딪혀 이승만과 한민당은 법안 통과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어 6월 4일에는 서울시경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포위하고 무기를 압수하는 한편 반민특위의 활동을 빨갱이 짓으로 비난하는 친일 세력들의 극성스런 데모가 연일 계속되어 조사해 본 결과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 등 현직 경찰 간부가 시위를 사주한 게 드러났다. 그래서 반민특위가 그들을 구속하였더니 경찰이 특위 사무실에 난입해 기물을 파괴하고 특경대를 무장 해제시켜 버린 것이다. 이 대담한 도발은 이승만의 직접 지시에 따른 것임이 밝혀졌다.
이어 6월 19일에는 소장파 의원들에 대한 2차 검거가 이루어졌다. 김약수 부위원장을 비롯, 노일환, 서용간, 김병회 등 8명의 의원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육군 헌병대 특별수사대에 구속된 것이다. 그리고 사흘 뒤인 21일에 소장파들로부터 ‘지주들의 토지 처분법’이란 비난을 들었던 농지 개혁법이 공포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6월 26일 반이승만 반한민당 세력의 총본산으로 지목되었던 김구 선생이 암살된 것이다.
‘건드릴래야 건드릴 수 없는 불가침의 거목, 백범이라는 우거진 나무를 배어 넘김으로써 한독당이라는 울타리를 허물어 버리고 그 나무 그늘 아래서 준동하는 요마들을 없애 버린’ 안두희는 특무대의 영창 아닌 영창에 갇혀 ‘김구 선생 서거의 여파’를 이렇게 평가하였다.
<미국의 대한 정책이 불시에 반전되어 저번 거부했던 일억 오천만 불 원조 계획을 재심케 되었고, 태평양 동맹 문제도 이대통령께서 제창하신 바대로 단원(團圓)의 서광이 비치어졌으며, 또 최근에 이르러서는 국내 민족진영의 결속이 태동되는 등 자못 명랑한 신국면이 전개되고 있다 한다.....
반갑다! 우려되는 국가 장래를 위하여 참으로 경하스러운 일이다....>
어떤 외국 신문은 사설에서 논평하기를 ‘오늘의 한국은 어제의 한국이 아니다. 하루 사이에 정세는 일전된 것이니 미국의 대한 정책도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새로운 인식을 강조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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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무엇을 얻었나
‘오늘의 한국’에서 전개된 ‘명랑한 신국면’은 구체적으로 이러하였다. 백범 암살 뒤, 한독당은 사건을 맡은 군 수사당국으로부터 ‘군대 내에 비밀 세포 조직을 침투시켜 정부 전복을 노려 온 친공(親共) 노선의 당’이라는 집중 공격을 받고 급속히 와해되어 버렸다.
7월 7일에는 소장파 의원들의 구속으로 사면초가에 빠진 반민특위 위원들이 총사퇴하고 애초에 반민특위를 반대했던 이인(李仁)이 새 위원장으로 들어섰다. 그는 반민족 행위자의 공소시효를 1년간 단축하여 반민특위 활동을 사실상 끝내고 말았다.
군 내부에서는 숙군 선풍이 몰아닥쳤다. 조금이라도 정부 정책에 반감을 가진 사람은 모두 솎아 내졌다. 그 결과 장병 수백 명이 체포, 투옥되었다(김창룡은 이때 숙군 작업을 진두지휘하여 ‘숙군의 마왕’이란 별칭을 얻었다.)
그리고 12월엔 귀속 재산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반민족 연합전선의 총공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살인자들은 살인을 통해 무엇을 얻었는가? 모든 것을 얻었다. 소장파도, 김구도, 한독당도, 반민특위도 모두 ‘어제의 한국’으로 묻혀 버렸다.
태산이 무너지더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말고,
사졸과 더불어 즐거움과 어려움도 같이하며,
나아가고 물러남을 범과 같이 하며,
남을 알고 저를 알면 백번 싸워도 지지 아니하리라.
백범 선생이 병서를 읽다가 깊이 감명 받은 문구 -『백범일지』
권중희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민족정기구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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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년 6월 26일, 네 발의 총성
권중희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민족정기구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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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소위의 방문
1949년 6월 26일 오전 11시경 경교장 정문 경비실에 육군 소위 한 사람이 뚜벅뚜벅 다가왔다.
“백범 선생님을 좀 뵈오려고 왔는데요.”
경비경찰관은 그전에도 몇 번 출입한 듯한 낯익은 얼굴인데다가 군복을 입고 있는 군인이어서 무심히 통과시켰다. 경교장에는 현역 군인들이 인사차 들르는 일이 제법 잦았기 때문이다.
경비실을 통과한 그는 아래층 응접실로 들어가서 거수경례를 했다.
안에서는 선우진․이국태․이풍식 세 비서가 잡담을 나누고 있다가 예고 없는 방문객에게 눈길을 보냈다.
“누구신지....?”
선우진 비서는 상대방을 알아보지 못했다.
“포병 사령부의 안두희 소위입니다. 얼마 전에도 뵙지 않았습니까?”
“아, 그래요? 알아보지 못해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워낙 많은 사람을 상대하시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어떻게 오셨습니까?”
“선생님을 뵙고 군대 얘기를 좀 드렸으면 해서 왔습니다.”
이때 이풍식 비서가 안두희의 얼굴을 유심히 보다 그제야 누구인지 알았다는 듯 물었다.
“지난번에 탄피로 만든 꽃병을 가지고 오셨지요?”
“네, 그렇습니다.”
포탄껍질로 만든 꽃병 이야기가 나오자 선우진, 이국태 비서도 그제야 기억이 나는 듯 안두희 소위에게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권하였다.
“조금 기다리셔야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선객(先客)이 있어 면담중입니다.”
두 통의 전화
바로 이때 전화 벨이 울렸다. 선우진 비서가 수화기를 들었다.
“비서실이오? 나 김덕은(金德銀)이오. 거기 무슨 일 없소?”
“무슨 일이라니요?”
“누가 그러는데 지금 경교장과 적십자병원 근처에 군복 청년과 수상한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다는데 혹시나 해서 말입니다.”
“아무 일도 없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오늘은 교회도 안 가시고, 지금 서재에서 글을 쓰고 계십니다.”
“그래요.... 별일 없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다음에 또.....”
김덕은(전 고대 교우회장) 씨는 한독당 선전부장 엄항섭(嚴恒燮)씨의 보성전문 동창으로서 심산(心山) 김창숙의 소개로 백범의 측근이 된 사람이었다. 그는 이날 자신이 경영하는 인쇄소에 출근을 하다가 길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에게서 경교장 밖의 이상한 분위기를 전해 듣고 불길한 생각이 들어 인쇄소 사무실에 도착한 즉시 경교장에 전화를 걸어 온 것이었다. 친구의 말인즉 서대문 근처에서 오는 길인데 적십자병원 근처에 헌병들이 많이 집결해 있고, 이상해서 경교장 부근엔 가보니 그곳에도 젊은 사람들이 서성거리더란 것이었다.
그때 백범은 자신이 서울 염리동에 세운 창암학원(昌巖學院)의 여선생을 불러 학원 경영문제를 의논하고 있었다(백범의 아명[兒名]이 창암이었다). 이 학원은 금호동의 백범학원(白凡學院)과 더불어 이북 피난민 자제를 위해 세워진 것으로서 백범이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김덕은의 전화가 온 지 2~3분쯤 지났을까. 다시 전화 벨이 울렸다. 이때는 이풍식 비서가 전화를 받았다. 안두희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다른 두 비서는 웬 전환가 싶어 전화를 받는 이풍식 비서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네, 경교장입니다.”
“여기는 교통부장관실입니다. 누구 비서 좀 바꿔 주십시오.”
“제가 이풍식 비서입니다만...”
“선생님 지금 계십니까?”
“네, 계십니다.”
“혹 어디 여행 가시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계십니다.”
“찾아가 뵈도 되겠습니까?”
“네, 그러십시오.”
전화를 끊으며 이풍식 비서는 잠깐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화를 한 목적이 무엇인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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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희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민족정기구현회
박동엽과 안소위
이때 비서실 전화 벨이 또 울렸다. 경교장 앞 자연장다방에서 걸려 온 박동엽씨의 전화였다. 그가 경교장에 도착한 때는 11시 50분 조금 지나서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날따라 경호원이 면회를 허락하지 않아 자연장다방으로 가서 전화로 비서실에 연락한 것이었다.
박동엽은 임정 시절 때부터 백범을 가까이서 모셔 온 사람으로서 임정 정무위원회 비서부 차장을 지냈으며 당시는 대광고등학교 교감으로 재직 중이었다. 그는 어제 저녁에도 경교장엘 다녀간 터였다. 평북 의주에 있는 신성학교에 재직할 때의 제자 김정진 소령으로부터 백범 암살에 관한 무시무시한 정보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암살행동대의 대장인 오병순 소위(그 역시 박동엽의 제자였다)가 동창인 김정진에게 전해 준 이 정보에 따르면 23․24 양일간 두 차례에 걸쳐 이미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 26일 밤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암살을 단행한다는 것이었다. 또 26일 밤의 3차 시도는 반드시 성공시키기 위해 26일 오전 중에 한독당에 침투한 암살행동대의 간첩 홍종만이 동정을 탐지하러 경교장에 나타날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 정보를 듣고 사지가 떨리는 몸으로 30여 년간 백범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김승학옹을 찾아갔다. 그리곤 함께 경교장으로 달려가 숭덕학사(崇德學舍) 고학생들에게 졸업 선물로 준다며 『백범일지』에 서명을 하고 있던 백범에게 그 정보를 전했다.
그러나 선생이 워낙 범상스레 받아들이기에 박동엽은 하는 수 없이 물러 나와 마침 아래층에 함께 있던 아들 신(信)과 이상만 목사에게 같은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곤 조심하라는 부탁만 남기고 돌아갔던 것이다.
백범이 워낙 범상스레 받아들여 집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김정진 소령에게 전해들은 오병순과 홍종만의 이름을 몇 십 번씩 외어 보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날이 새자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교회에 잠시 들렀다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경교장으로 또 달려온 것이었다. 만약 홍종만이 정말 경교장에 나타난다면 그 정보는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므로, 그때는 비서들과도 의논해 대책을 세우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들여보내라”는 비서실의 지시를 받은 경비 경찰관은 박동엽을 통과시켰다.
현관으로 들어선 박동엽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바로 옆 소파에 비서 이국태와 같이 앉았다.
“신(信)이 있나?”
“오늘 새벽 옹진으로 출정 갔습니다.”
맞은편 비서실(현관 바로 옆방) 문이 열려 있기에 박동엽은 무심코 방안을 건너다보았다. 이풍식․선우진 비서, 그리고 웬 낯모를 군인이 한 사람 있었다. 그들은 군대며 대포 이야기를 주제로 잡담을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저 군인이 누구지?”
“김장군님(김학규 조직부장을 말함)이 소개한 군인인데 그전에도 몇 번 왔었고 또 얼마 전엔 포탄껍질로 만든 꽃병도 선생님께 선사했습니다.”
암살행동대 일당에 안소위가 있다는 말을 언뜻 들었던 기억이 난 박동엽이 불길한 생각에 다시 이국태에게 물었다.
“여기 안소위라는 군인이 출입하나?”
“군인들이 평소에 많이 출입하는데 누가 안소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박동엽은 비서와 이야기하면서 군인의 동정을 살폈다. 그는 모자창을 만지작거리며 안전부절 못하는 표정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무엇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태도였다. 박동엽은 자꾸만 수상쩍은 생각이 들어 이국태에게 재촉하듯 일렀다.
“저기 앉아 있는 군인, 이름이 뭔지 가서 좀 알아보겠나?”
강홍모의 등장
괘종시계가 12시를 알리고, 응접실 뒤편에 있는 주방에서는 도마질 소리가 울려 나오고 있다. 김구 선생의 조카뻘 되는 김계화(金桂花)씨는 이날 점심으로 만두를 준비하고 있었다. 김구 선생은 고기만두를 무척 좋아하셨다고 한다. 라디오에선 정오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때 경교장 현관에 또 한 사람의 군인이 나타났다. 그는 헌병대 소속 강홍모 대위였다.
강홍모(姜弘模)대위는 중국에서부터 백범을 따르던 사람이고 경교장에도 자주 들르는 편이라 비서들과는 잘 아는 사이였다.
선우 비서가 일어서며 인사를 했다.
“아니, 일요일 날 웬일이십니까?”“이거, 죄송합니다. 실은 문산에서 오는 길인데 도중에 휘발유가 떨어졌지 뭡니까. 휘발유 좀 얻어 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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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홍모 대위를 둘러싸고 사건 당시부터 여러 가지 의혹이 제기되었다. 암살 음모에 가담한 혐의가 짙다는 것이었다. 그를 의심하는 측의 주장은 이러하다.
“강홍모가 문산에서 왔다고 하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는 그때 문산 헌병대 소속으로 있었는데, 그 부관이, 강대위는 석 달 동안 한 번도 문산에 온 적이 없다고 말했다. 당시 헌병 부사령관 전봉덕이 헌병대 안에 소위 특별수사대라는 걸 만들어 장흥 사령관을 제치고 수사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강홍모는 거기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날 그가 경교장에 나타난 것은 안두희에게 2층에 아무도 없으니 올라가도 좋다는 신호를 하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한편 재미있는 것은 『시역의 고민』이 이 강홍모 대위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역의 고민』은 안두희가 2층으로 올라가기 전 ‘강홍모 대위가 먼저 와 백범을 만나고 있으니 잠시 기다리라’는 비서의 말을 듣고 강대위에 대해 인사 교환은 아직 없었지만 이 응접실에서 여러 번 과면(過面)이 있는 사람으로서 나와 같이 ‘비밀당원이나 아닌가?’ 하고 혼자 생각을 했다고 묘사해 놓고 있다.
그런데 안두희는 1992년 9월 23일 나에게 이렇게 밝혔다.
“그 전날 장은산이는 6월 26일 12시라고 암살시간까지 정해 주었다. 그런데 12시가 돼도 아무런 기척이 없으니까 상황도 살필 겸 나를 재촉하기도 할 겸해서 그를 보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사람을 몇 번 경교장에서 보았지만 정식으로 수인사한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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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러십시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강홍모 대위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선우진은 경교장에서 허드렛일을 보던 정태운을 불러 휘발유 한 초롱을 넣어 주라고 지시했다. 정씨가 휘발유를 넣어 주려고 밖으로 나간 사이, 2층에서 백범 선생과 면담 중이던 여선생이 내려왔다.
그러자 강대위는 “온 김에 선생님께 인사나 드리고 가야겠습니다.”며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으로 올라간 강대위는 오래지 않아 내려왔다. 강대위는 계단을 내려오면서 휘발유를 넣어 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이어 지프차 발동 거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자 선우진이 안두희를 향해 말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올라가시죠.”
안두희는 옆에 풀어 놓았던 권총을 다시 허리에 차고 혁대 끝을 두서너 번 바로잡고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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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우진씨를 비롯한 비서진들이 백범 암살에 관한 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본다. 당시의 정치 정세가 극도로 험악했고 선생을 헤칠 것이라는 이야기가 늘 떠돌아 다녔다는 점을 헤아린다면 측근들은 당연히 신변 보호를 강화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면회자들에게 별 신경도 안 썼고 심지어 권총을 찬 안두희를 그냥 올려 보냈다. 권총을 벗어 놓고 올라가게만 했어도 암살은 막을 수 있었다. 통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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