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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바랜 짤막한 고검古劍한 자루와 몇 권의 낡은 두루마리가 나왔다. 해모수는 물건들을 꺼내면서 속으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칼은, 자신이 넣어두었던, 부친의 하사품인 청동단검이 아니었고, 책들도 부친이 전해준 <행심록>이 아니라 엉뚱한 서적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물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을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그가 고검을 들어 살피면서 말했다.
“해모수야, 이 검 한 자루로 너의 어머니가 젊었을 적, 아리하(송화강)의 동서남북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니며 뭇 사내들을 치마 밑에 굴복시켰단다.”
여을이 먼 옛날을 회상하는 듯 눈을 들어 천정을 바라보았다.
“빼어난 미모와 지혜, 학식, 무예로 세간의 남성들 가슴을 무던히도 설레게 했지. 수많은 총각들이 그녀에게 접근하고 청혼했으나 그녀의 호감을 산 사나이가 있었다는 소리는 아직 듣지 못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그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해로운과 해모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어때? 내 말이 믿어지느냐?”
“네? 네.”
“그녀를 만나기 원하는 남성은, 일단 그녀와 무예를 겨루어야 했단다. 재미있지 않느냐?”
“······?”
“내가 그녀의 소문을 들었을 때는 혈기 방장한 때였지. 내가 조금만 더 젊었더라도, 무예라면 남에게 절대 지기 싫어하는 내 성격상 아마 그녀를 반드시 찾아갔을 거다.”
여을은 흥이 난 듯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어느 날 뜻 밖에도 그녀가 나를 찾아오지 않았겠느냐? 그것도 늦은 밤, 내가 청사 안 바로 이 자리에 불을 켜고 책을 보며 홀로 있을 때였다.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나, 관아의 초병들과 청사의 번병들도 눈치 채지 못하게 바람같이 나타났지.”
그는 옛 일을 회상하는 듯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 때 점심식사가 들어왔다. 세 사람은 한 상에 둘러 앉아 음식을 나누며 옛 이야기 한 토막을 나누었다.
갑작스런 복면인의 출현에 깜짝 놀란 여을이, 그러나 낮은 목소리로 침착하게 물었다.
“누군데 남의 허락도 없이, 한밤중 남의 집 안방에 도깨비처럼 잠입한단 말인가?”
복면인은 키가 작고 몸이 호리호리한 게 여인 같았다. 한밤의 침입자는 아무 대꾸도 없이, 신발을 벗고 방안으로 성큼 들어서더니, 여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성주가 두 눈을 부릅뜬 채 노려보고 있는 사이, 그는 천천히 복면을 벗었다.
방안의 불빛에 한 고혹적이고 아리따운 여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녀의 땋지 않은 머리칼이 삼단처럼 쏟아졌다. 그녀가 여을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머리칼을 쓸어 올려 묶은 후 말했다.
“여을 장군님, 저를 모르시겠어요?”
그녀의 표정은 사뭇 긴장되어 있었다.
“네? 누구시더라?”
여을이 주춤거리며 물었다.
“알아 맞춰보세요.”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뭔가 간절한 눈빛으로 여을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젊은 아가씨가 자신을 잘 알고 있자 여을은 내심 몹시도 놀랐으나,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 어디서 본 듯한 낯이었다.
“아! 이런! 혹시 묘정 장군의 따님인 고미향 아가씨가 아니신지요?”
“아직 절 잊지 않으셨다니, 천만 다행이에요.”
그녀의 웃는 얼굴에서 다소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벌써, 무심한 세월이 이렇게 흘러, 너무나도 고운 아가씨로 성장했군요.”
긴장했던 여을도 잠시 숨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고미향, 고미향 하면서 입이 닳도록 아가씨를 칭송하더군요. 바로 그 고미향이 아가씨인가요?”
“네, 천첩의 이름이 너무 천해서 땅에 막 굴러다니는 군요.”
“천하다니요? 얼마나 많은 영웅호걸들이 아가씨의 방명을 사모하는지 아가씨는 모르실 겁니다.”
“하지만 제손帝孫이신 여을 장군님은 저 같은 천한 계집애가 안중에도 없었겠죠?”
“······?”
“실은, 지난 십여 년 동안 여을 장군님을 잊은 적이 없답니다.”
그녀가 다소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여을로서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뜻밖의 말이었다.
“네?···”
“하지만 지금은 생사를 예측할 수 없는 일개 천녀일 뿐입니다.”
그녀가 다시 여을의 얼굴을 쳐다보았는데, 뭔가 애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아름답기 짝이 없고, 뭇 남성들이 꿈에라도 사모해 마지않는 아가씨께서 생사를 예측할 수 없다니요.”
“장군님, 아니 성주님께 마지막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찾아왔습니다.”
갈수록 모를 소리였다.
“무슨 일인지 모르나, 낮에 와서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지금은 시간이 좋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저의 정체와 얼굴을 알리기가 싫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밤중에 찾아뵈었습니다.”
여을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기탄없이 얘기하세요. 제가 힘이 닿는다면 성심껏 도와드리겠습니다.”
묘고미향은 한참 방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이윽고 여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을의 표정은 무척이나 따스해 보였다. 용기를 얻은 그녀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비록 의지가지없이 강산을 홀로 떠도는 몸이지만, 아직 장군님을 가슴 속에서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대담하게도 그윽한 눈빛으로 여을의 얼굴을 빤히 쏘아보았다.
여을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는 청춘이 구만리 같은데 그 무슨 말씀이오? 그리고 나는 알다시피 처자식이 있고 또 이미 반백半百의 중늙은이가 되었소. 아가씨의 말을 감당하기가 어렵소.”
그녀의 낯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그녀는 잠시 여을을 노려보다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춤에 감추어 차고 있던 단검을 풀어냈다. 고색이 창연한 검이었다.
“이 검은, 저의 증조부 묘장춘 장군의 유품입니다. 지금은 저의 소유물이죠. 이걸 받아주세요. 받지 않으시면 아마도 이 칼이 분노해서 누군가의 가슴을 찌를 겁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은, 바로 천첩일 거예요.”
묘고미향은 단검을 양손에 받쳐 들고 여을에게 정중하게 내밀었다. 그녀의 두 팔이 떨리고 있었다.
깜짝 놀란 여을은 추상같은 묘고미향의 낯을 살피며 엉겁결에 단검을 받아들었다.
“그 검 아래, 숱한 영웅들이 무릎을 꿇었어요. 이 검을 가지는 남자가 일평생 저의 낭군이 될 거라고 일찍이 삼신일체 상제께 맹세했답니다. 하지만 이 검을 제 손에서 빼앗은 사람이 없습니다. 장군님과 또 다른 어떤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건 제가 빼앗은 게 아니라······.”
여을은 무심결에 넋 나간 말을 하고 있었다.
“맞아요. 제가 자발적으로 드린 거예요, 장군님. 장군님은 저의 마음을 빼앗았으니까요.”
이윽고 그녀는 허리를 숙여 절하며 공손하고도 간절하게 말했다.
“절을 받아주시고, 저를 받아주세요. 제가 이렇게 빕니다.”
“아가씨의 장래를 생각할 때, 저는 이 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장차 극히 훌륭한 낭군을 만나 행복한 미래를 여실 터인데 어찌, 처자식이 있는 저 같은 사람에게 생을 의탁한단 말입니까?”
그녀는 다시 엎드려 절하며 간곡히 말했다.
“저 같은 천녀는 임금의 자손이신 장군님을 모실 수 없다는 뜻인가요?”
여을이 말없이 바라보자 그녀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그럼 제가 갈 길은 단 하나 뿐입니다.”
그녀의 표정이 몹시 침울해 보였다. 여을이 보니, 그녀의 얼굴엔 섬뜩한 사망의 칼날이 번득이고 있었다. 흠칫 놀란 여을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아가씨의 뜻을 잘 알았으니, 내일 다시 찾아오시오. 내가 관아와 청사의 초병들에게 일러두도록 하겠소.”
“제 청을 허락하신다는 뜻인가요? 장군님의 뜻이 그렇다면 제가 대낮에 초병들에게 이름을 알리고 관아를 방문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저는 이 자리에서 바람같이 사라져 이슬처럼 없어질 것입니다.”
여을이 조용히 머리를 끄덕여 수락의 뜻을 표했다.
이튿날 다시 만난 묘고미향은 자신의 신상지사身上之事를 여을 앞에 세세히 털어놓았다.
여을은 긴 한숨을 내쉬며 창문 밖에 귀를 기울였다. 가을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실내에는 잠시 정적이 감돈다.
“벌써 이십여 성상이 지나 이제는 아름답고도 괴롭고도 슬픈 추억이 되었구나.”
여을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아남성 욕살 여을은 해모수가 보자기에서 꺼낸 고검을 손에 들고 말했다.
“이 검이, 너의 어머니가 내게 건네 준 바로 그 검이란다.”
해모수는 그 검을 아버지 손에서 다시 받아들고 깊은 감회에 잠겼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워 해모수의 눈에도 어느 새 눈물이 고였다. 임종 직전까지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아버지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그 책들도 너의 어머니가 평소 애지중지하던 것들인데, 그 동안 내가 간직하고 있었다.”
여을의 장남 해로운은 부친이 해모수의 보따리를 풀어 보여주며 옛이야기를 들려주자,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부친은 자신의 모든 의도를 간파하고 있음이 명백해 보였던 것이다.
‘부친이 해모수에게 전해준 게, 천하의 둘도 없는 보물이라 들었는데, 어째서 이런 썩어빠진 물건들뿐인가? 필시 여기엔 극비의 변동과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해모수는 해모수대로 부친에게 받은 소중한 유품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보자기에서 엉뚱한 물건들이 나오자 당혹감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부친의 일거수일투족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틀림없이 부친의 무슨 안배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자 한편으로는 적이 안심되기도 했다.
그 때였다. 누군가가 문 밖에서 헛기침을 했다.
“나리, 부탁하신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가지고 들어오게.”
한 노인이 보자기를 들고 들어왔다. 여을의 관사 청지기였다. 그는 욕살 앞에 보자기를 공손히 내밀었다.
보자기를 받아든 아남성 성주 여을은 내용물을 확인하지 않고 곧장 마주 앉은 그의 장남인 아남성 수비대장 해로운에게 건네었다.
“너에게 아주 요긴한 물건이 될 것이다. 네가 직접 풀어보겠느냐?”
깜짝 놀란 해로운은 엉겁결에 보자기를 받아들고 천천히 풀어보았다.
보자기 안에서 황금빛이 가득한 단검 한 자루와 두루마리 한 권이 나왔다. 해로운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단검을 손에 들었다.
욕살 여을은 그가 단검부터 먼저 손에 집어 들자 얼굴에 미묘한 기색을 잠시 나타냈다가 곧 평소의 빛을 회복했다.
“그 검이 어떤 검인지 알고 있느냐?”
“아버님, 소자의 천학淺學무식을 용서하소서. 혹시 세간에 유전되는, 이른 바 천명검이 아닌지요?”
“바로 맞혔느니라. 그 검은 원래 선대 임금, 다물 천자께서 전해주신 유품이다. 그분의 아들이신 보을 임금이 물려받았다가, 보을 임금이 후사가 없자<단군세기>, 조카인 나에게 극비리에 전해준 것이니라.”
해로운은 단검의 내력에 관한 부친의 설명에 가슴이 벅차오르며 호흡이 곤란해짐을 느꼈다. 이거야말로, 획득하는 자가 천하를 얻게 된다는 바로 그 비의전승의 명검이 아닌가. 어떻게 해서 이런 천하의 보물이 자기 수중에 난데없이 들어온단 말인가.
한편으로는 황홀하기 짝이 없었으나 너무나도 뜻밖에 얻은 행운인지라 불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불안해 할 필요가 없느니라.”
여을은 해로운의 마음을 꿰뚫고 있는 듯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 두루마리 <행심록>도 다물 임금의 저술이다. 검보다는 오히려 그 책이 천하에 극히 희귀한 보물이니, 그 내용을 잘 터득해, 너의 증조부 여루 임금의 쌍둥이 형이신 다물 임금의 진전眞傳을 이어받도록 해라.”
곁에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해모수는 가슴이 떨리고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저건 얼마 전에 부친께서 자신에게 주신 유물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하여 자기에게서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회수해 장형에게 넘겨준단 말인가. 그것도 자신이 보는 앞에서. 해모수의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해모수의 그런 심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부친은 해로운에게 다시 자상한 설명을 덧붙였다.
“그 책의 진수를 터득하는 데는, 심법心法이 가장 중요하다. 이 두루마리는 잘 살펴보면 알겠지만, 무예보다 마음을 닦는데 중점을 두고 있느니라. 그 책에 수록된 무예는, 먼저 심령이 닦이지 않으면 결코 진수를 터득할 수 없게 되어 있단다. 너도 들었을 테지만, 다물 임금의 무예는 천하에 적수가 없었다. 국내에서 적수가 없었으니, 저 화하(중국)나 삼도三島(일본)에서는 두말할 나위도 없지.”
여을은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 해로운과 해모수의 얼굴을 번갈아 살펴보았다.
“그가 그토록 고절한 경지에 올라선 것은, 그가 닦은 심법이 뒷받침을 했기 때문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느냐?”
해모수는 부친의 말뜻을 알 듯 말 듯했다. 작고하신 모친에게서 무예를 배울 때 그런 소리를 몇 차례 듣긴 했으나 아직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감을 잡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므로 <행심록>에 수록된 무예를 무작정 흉내 낸다고 하여 그 묘를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란다. 먼저 심법을 터득해야 해. 책의 저자이신 다물 임금이 심령의 호흡, 즉 삼신일체 하나님 기운 마시기를 그토록 강조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거기에 있단다.”
하나님 기운 마시기에 대해선 해모수도 어머니로부터 전해 듣고 상제 하나님을 향한 지극한 신심信心을 모아 실천해 보기도 했으나 말처럼 그리 호락호락한 게 아니었다.
부친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삼신일체 상제를 향해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심법을 터득할 수 없고, 심법을 익히지 못하면 다물 임금이 그 책에서 말한 지혜와 지식과 명철, 심령의 평안, 신향神鄕(천국)의 행복을 누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무예의 도道에도 통달할 수 없느니라.”
여을은 창문 밖 먼 곳을 응시하듯 고개를 들고 몇 차례 심호흡을 한 후 해로운에게 무언가를 촉구했다.
“그 책의 진수를 얼마만큼 터득하느냐는 삼신일체 상제 하나님을 향한 너의 성심에 달려 있다. 알겠느냐?”
“네, 아버님, 명심하겠사옵니다.”
“마음을 악하게 쓰는 자에게는, 눈먼 장님이 그림을 구경하듯, 그 책이 무용지물임을 잊지 말거라.”
여을은 말을 하면서 해로운과 해모수를 일일이 확인하듯 바라다보았다.
“네, 아버님!”
해로운이 고개를 조아리자 해모수도 얼떨결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너, 해모수.”
“네, 아버님.”
해모수는 부친이 자기 이름을 부르자 움찔 놀랐다.
“당분간은 형 밑에 기거하며 잡생각을 버리고 심령과 학문, 무예를 닦는데 전념해라. 알겠느냐?”
“네, 아버님, 명심하겠사옵니다.”
해모수는 속이 몹시 뒤틀려 있었으나 감히 내색하지 못했다.
“됐다. 둘 다 나가봐라.”
해모수가 맏형의 저택에 딸린 자신의 작은 처소에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좀 상심한 낯으로 방에 들어간 해모수는 부친이 전해준 어머니의 유품 보자기를 어깨에서 벗겨 내팽개치듯 방구석에 던지고 자리에 털썩 누웠다.
근래에 일어난 일들을 머리에 떠올려 보았다. 곰곰이 생각하니 기가 막히고 한편으로는 분노가 치솟아 오르려 했다. 형 밑에서 꼼짝 못하고 잡혀 있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부친은 웬일인지 자신에게 준 청동단검과 <행심록>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쪽같이 다시 회수해 맏형에게, 자기 눈앞에서 주고 말지 않았는가.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아무 말도 못하고 부친 앞에서 물러나온 자신의 꼬락서니가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해모수는 한쪽에 내팽개친 어머니의 유품 보따리를 찾아 등에 걸머지고 검과 활을 챙긴 후 애마인 적호를 타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
대문에서 하인이 어디 가는지 물었으나 잠깐 바람을 쐬러 나간다고 대답하고 말이 가는대로 길을 맡겨두었다. 성을 벗어난 후 말은 주인의 뜻을 알았는지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말이 찾아간 곳은 그의 옛집이었다.
이튿날 어머니의 묘소에 들른 해모수는 그 앞에서 큰 절을 올리고 중얼거렸다.
“어머니, 어머니, 여기 어머님의 유품을 들고 하나 밖에 없는 이 아들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지금 어머니를 떠나면 언제 다시 올지 알 수 없습니다.”
어느 샌가 해모수는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아버님은 형에게 의탁하라 했으나, 어쩐지 형에게 의탁하려니 마음이 너무나도 심란하고 몹시도 답답하며 아주 꺼림칙합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오나 형은 제게 좋은 감정을 품고 있지 않은 듯합니다.”
해모수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하늘을 쳐다보며 빌었다.
“하나님, 하나님, 삼신상제 하나님, 아버님께 버림받고 형제들에게도 미움받은 이 몸이 마땅히 가야할 곳을 가르치소서. 어디로 가든 저를 지켜주소서······.”
한동안 하나님께 빌고 나니 마음이 다소 후련해졌다.
해모수는 묘를 떠나려다 말고 어머니가 그리워 묘 앞에서 어머니의 유품을 다시 풀어보았다. 검을 꺼내던 그의 손길이 놀람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아버님이 주신 어머니의 고검古劍이 아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황금빛 찬란한 검 집이 눈을 쏘았다.
“아니, 이건?”
자세히 살펴보니, 부친이 전에 준 청동단검이었다. 두루마리를 펴보니 아버지가 준 <행심록> 한 부와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옮겨 적은 사본들 두부였다. 이런 기가 막힐 노릇이 어디 있나. 책이 요술을 부리는 것인가?
보자기의 색깔은 동일했다. 무언가 의심이 일면 그것을 끝까지 규명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 해모수는 보자기를 자신의 옛집에 은밀하게 감춘 후 다시 말을 타고 아남성으로 향했다. 큰형의 저택에 도착해 자신의 거처로 정해준 방에 들어가 사방을 살펴보았다.
과연, 한쪽 구석에 똑같은 보자기가 놓여있었다. 풀어보니, 부친이 형과 함께 식사할 때 청사에서 준 바로 그 모친의 유품이었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부친이 누군가를 시켜, 나의 단검과 <행심록> 보따리를 여기에 가져다 놓았음에 틀림없어. 난 그것도 모르고 아무 보따리나 손에 잡고 나간 것이고.’
이렇게 생각하며 해모수는 자신의 세심하지 못함과 부주의함을 자책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다시 의문이 피어올랐다.
‘그럼, 부친이 맏형에게 준 청동단검과 <행심록>은 무어란 말인가?’
‘어쩌면 바로 그걸 거야. <행심록>에서 청동단검은 한 쌍이라고 말했는데, 그 중 하나를 부친이 장형에게 주었는지도 몰라.’
그의 추측은 옳았다. 그의 부친이 장남 해로운에게 준 청동단검은, 한 쌍의 단검 중 천명영검天命靈劍이었다. 다물 임금의 소유물이었던 천명영검은 남녘 매아리와 그 사이에 태어난 아들 보을 임금에게 전해졌는데, 그는 후사後嗣가 없었으므로 그의 조카이자 여루 임금의 손자인 여을에게 이 검을 은밀하게 유증했다. 아남성 성주 여을은 바로 이것을 그의 장남 해로운에게 전해준 것이다.
청동단검의 다른 한 짝인 천명신검天命神劍은, 여루 임금이 태자 시절 매화현설과 의맹서義盟誓를 하며 그녀에게 넘겨준 검이었다(<살 美 아름다워>의 “청동단검의맹서” 참조). 이 검도 그들의 손자인 아남성 성주 여을에게 유전되고, 여을은 이것을 막내아들 해모수에게 물려주었다.
해모수는 고검과 서적 등 모친의 유품을 다시 잘 갈무리했다.
‘그간의 곡절이야 어찌 됐든 삼십육계 줄행랑이 상책이렷다.’
장형의 집에서 지내라는 아버지의 부탁이 한편으로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아버지의 은밀한 배려를 생각할 때, 그건 아버지의 본심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자신에게는 장형이 모르도록 청동단검과 <행심록>을 전달해주지 않았는가? 이런 내밀한 조치에 의거해 볼 때, 자신을 장형의 집에 맡겨두는 게 과연 아버지의 진심인지 의심스러웠다. 장형과 함께 있게 된다면, 언젠가는 아버지가 내게 청동단검과 <행심록>을 은밀히 전해주셨다는 게 탄로 날 터인데.
어쩌면 장형 앞이라, 또 장형이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려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더구나 일전에 준 편지 말미에서, 형들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삼신일체 상제 하나님께 너 자신을 의탁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여러 가지 상황을 이모저모로 분석하던 해모수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해모수는 혹시 맏형의 가신들이 언제 다시 들이닥칠지 몰라, 집에 들러서 청동단검과 <행심록>, 그리고 전에 누군가가 맡기고 갔다는 금화와 은전들까지 모조리 챙긴 후, 하인들에게 집을 부탁하고, 속으로 ‘걸음아, 날 살려라,’ 아니, ‘하나님 저를 살리소서’ 소리 지르며, 아남성과는 정반대 방향인 남쪽을 향해, 세찬 바람에 구름 날아가듯 말을 몰았다.
한참을 정신없이 달리다가 해모수는 불현 듯 삼삼촌 칠칠동 생각을 뇌리에 떠올렸다.
‘아, 그렇지. 내가 거기에 가보기로 했다가 도중에 아불한 일행에게 걸려 한바탕 홍역을 치렀구나.’
(다음 장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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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1. 11. 19. 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