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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연재물은 취금헌 박팽년 선생 탄신 6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순천박씨충정공파종친회가 발행하고,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송은석이 지은 [충정공 박팽년 선생과 묘골 육신사 이야기]라는 책의 원고이다. 책의 처음부터 순서대로 차근차근 시간 나는대로 게재토록 하겠다. 강호제현들의 많은 관심과 질책을 기다린다.
3. 귀신 없단 소리 못한다. 묘골 육신사
앞서 ‘묘골·묘골·묘골’ 스토리에 대해 이야기한 바가 있다. 이번 이야기는 이 ‘묘골·묘골·묘골’ 스토리 중 하나인 ‘묘(廟)골’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마을에 사육신을 모신 큰 사당이 있어 마을이름을 ‘묘골’이라고 했다는 그 스토리 말이다. 앞서 다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여기에서 한 번 다루어보기로 하자.
1. 꿈에 사육신이 나타났다
사육신 중 유일하게 직계 혈육이 살아남아 지금까지 560년 세월을 대를 이어 번창해온 종중이 있다. 바로 박팽년 선생의 직계 후손인 순천 박씨 충정공파이다. 대구권에서는 이 종중을 별칭으로 ‘묘골 박씨’라 칭한다. 세상에서 양동마을의 이씨를 ‘양동 이씨’, 하회마을의 류씨를 ‘하회 류씨’라 하듯이 순천 박씨 중에서도 충정공파[박팽년 직계]를 특별히 ‘묘골 박씨’라 칭하는 것이다.
육신사 외삼문. ‘六臣祠’ 편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편액이다.
이는 묘골 박씨 종중(宗中)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존경심의 표현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묘골 박씨 스스로 자신들이 사육신 박팽년(朴彭年) 선생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사육신 사건 당시 박팽년 선생의 유복손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던 박일산. 그는 슬하에 외아들 박연손(朴連孫)을 두었다. 박연손은 다시 박계창(朴繼昌)[1523-?]과 박필종(朴必種) 두 아들을 두었으니, 이들은 박팽년 선생의 현손(玄孫)[손자의 손자]이 된다. 이중 장손(長孫)인 박계창(朴繼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지금으로부터 450년 전, 그가 꾸었다는 꿈 이야기가 이번 이야기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박계창이 꾸었다는 꿈 이야기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줄거리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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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은 자신의 외가인 묘골에 99칸 종택을 짓고 정착했다. 이후 박팽년의 증손인 박연손을 지나 현손인 박계창에 이르렀으니 때는 선조 임금 시절이었다. 하루는 박계창이 꿈을 꿨다. 꿈속에서 자신의 고조부인 박팽년의 사당 문밖에서 몰골이 초췌한 다섯 분의 선비가 서성대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다가가 누구인지를 물으니 각각 “성삼문·이개·류성원·하위지·유응부”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박팽년 저 친구는 손자를 남긴 탓에 기일날 밥이라도 챙겨먹는데, 우리는 배가 너무 고프다네. 배가 너무 고파.” 하더라는 것이다.
꿈에서 깬 박계창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날이 바로 자신의 고조부인 박팽년의 제삿날이었기 때문이다.
‘아! 우리 고조부님과는 달리 저 다섯 분의 어른은 여태껏 제삿밥조차 얻어 자시지를 못하셨구나.’
그날부터 박계창은 자신의 고조부를 비롯한 다섯 분의 신위를 고조부 사당에 함께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인근 성주의 큰 선비 정구(鄭逑)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사가(私家)의 사당에서 여섯 분의 신위를 모두 받들어 모시는 것은 아무래도 예(禮)에 미안한 감이 있습니다. 만약 여섯 분의 제사를 다 받들고 싶다면 기존의 고조부 사당은 그대로 두고 별묘(別廟)를 하나 세워 사육신 여섯 분을 별도로 모시는 것이 예에 옳을 것 같습니다.”
정구(鄭逑)의 이 제안은 그 뒤에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이렇게 하여 기존의 박팽년 사당 외에 별도로 세워진 별묘가 지금의 묘골 육신사의 모태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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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340년 전에 처음 세워진 별묘 하빈사(河濱祠)가 현재의 육신사로까지 변모해온 과정은 그리 녹록치가 않다. 참고로 「낙빈서원기」에 따르면 1675년[숙종 1]에 선생의 사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낙빈사[낙빈서원기에는 하빈사가 아닌 낙빈사(洛濱祠)로 되어 있다.]’를 세웠으며, 1694년[숙종 20]에 비로소 ‘낙빈서원(洛濱書院)’으로 사액되었다고 한다. 그 후 1866년[고종 3]에 낙빈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된다. 훼철 당시 그 동안 모셔왔던 여섯 위패는 서원 뒷산에다 묻었는데 지금의 낙빈서원 바로 뒤편이다. 이렇게 하여 수 백 년 내력의 낙빈서원은 빈 터의 상태로 58년이란 세월을 무심히 흘려보냈다.
일제(日帝) 강점기였던 1924년, 낙빈서원은 지금의 자리에 사당 없이 작은 규모로 복원이 되었다. 그리고 1998년에 다시 중수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하지만 지금도 낙빈서원은 강당만 복원되었을 뿐 사당과 동·서재 등은 미복원 상태이다. 참고로 낙빈서원은 조선 조 대구에 다섯 개 밖에 없었던 사액서원 중 한 곳이다.
어쨌든 1924년에 복원된 낙빈서원에는 사당이 없다. 하지만 사당이 없다하여 제사를 모시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석채례(釋菜禮)’라고 하여 향사(享祀)보다는 격이 조금 낮지만 사육신에 대한 제사는 여전히 이곳 낙빈서원에서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왔다. 그러던 중 1982년 5월 20일, 무려 11년여에 걸친 묘골 육신사 유적정화사업이 최종 결실을 보았다. 이로써 낙빈서원에서 행해오던 사육신에 대한 제사가 육신사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가 지금으로부터 450년 전 박계창의 꿈에서부터 시작된 육신사의 내력이다.
‘박팽년 사당→하빈사[낙빈사]→낙빈서원→철폐→낙빈서원→육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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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빈서원기(洛濱書院記)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말하기를 “오위는 사삿집에서 향사(享祀)함은 제례(祭禮)에 마땅치 않으니 마땅히 별묘(別廟)를 세워서 함께 향사(享祀)함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숙종 원년[1675년]에 사림(士林)이 박 선생의 사당에서 멀지 않는 이곳에다 낙빈사(洛濱祠)라는 별묘(別廟)를 세워 향사(享祀)를 지내오다 숙종 20년[1694년]에 도내 유생(儒生)들의 소청(疏請)으로 사액(賜額)을 받아 낙빈서원(洛濱書院)이 되었다.
고종 3년[168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毁撤)되었으며 그때 여섯 선생의 위패는 서원 뒷산에다 매혼(埋魂)하였다. 그 후 1924년 유림(儒林)에 의해 이 자리에 낙빈서원(洛濱書院)이 복원되었으며 다시 이곳에서 육선생의 향사(享祀)를 지내오다, 1974년 충효유적(忠孝遺蹟) 정화사업에 따라 묘골 구 종가 터 뒷산에다 육신사(六臣祠)를 짓고 거기에서 매년 추향(秋享)을 봉행(奉行)하고 있다.
순천 박씨 충정공파 파보「권지1」, 184-1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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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00년 전 옛 시에 나타난 ‘묘동(庿洞)’과 ‘육신사’
필자는 묘골 육신사에서 해설사로 근무하면서 묘골이라는 마을이름의 유래에 대해 수없이 많이 해설을 해본 경험이 있다. 대체로 이런 식의 해설이다.
“현재 묘골은 한자로 ‘竗谷·竗洞’으로 씁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묘할 妙자와는 좀 다르지요. 竗자는 땅이름 묘라는 글자인데 그 의미는 妙자와 비슷합니다. 여하튼 묘골이라는 동명(洞名)은 묘하다는 뜻에서 묘골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옛 사람의 생각에는 어쩌면 자신이 사는 동네 이름에 ‘女’자가 들어가는 것을 꺼렸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妙가 竗로 대체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요. 어쨌든 묘골은 풍수지리적으로도 묘하고, 박일산[박비]이 이곳에서 태어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것도 묘하고, 그로 인해 이곳이 560년 내력의 묘골 박씨 세거지가 되었다는 사실 또한 묘하죠. 이처럼 묘골은 이것저것 다 묘하다고 하여 묘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혹자는 묘를 ‘사당 묘(廟)’로 보아 ‘묘(廟)골’이라고도 합니다. 옛날부터 이곳 묘골에 사육신을 모시는 큰 사당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대부분 동명(洞名)의 유래가 그러하듯이 ‘묘골’ 역시 그 유래에 대한 명확한 정답은 없다. 따라서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조금 황당한 스토리라 할지라도 동명의 유래로 취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특히 필자와 같은 문화관광해설사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해설사는 학자가 아닌 이야기꾼이기 때문에 이런 류의 유혹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가끔씩은 해설사의 이러한 ‘말랑한’ 또는 ‘무모한’ 도전이 일을 내기도 한다. 물론 망신살(?)이 뻗칠 때도 있지만 때로는 프로(?)로 인정을 받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묘골과 육신사라는 명칭은 이제 거의 고유명사로서 자리를 잡았다. 앞서 살펴본 대로 육신사는 1675년[숙종 1] 별묘인 하빈사로 출발하여, 1694년[숙종 20]에 낙빈서원으로 사액되었다가 1866년[고종 3]에 훼철되었다. 이후 1924년에 낙빈서원은 다시 복원이 되었지만 사당과 동·서재가 없는 미완의 복원에 그쳤다. 그 후 1970년대 초에서 1980년대 초까지 10년여의 세월을 거치면서 지금의 육신사가 탄생, 낙빈서원의 오랜 전통을 잇고 있다.
그런데 묘골 육신사 유래에 의하면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육신사라는 명칭은 1970년대 중반에 붙여졌다는 것이다. 당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원 아래 전국적으로 ‘충효위인유적정화사업’이 한창 진행될 때였다. 이곳 묘골에서도 ‘충효위인유적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대규모 추모시설이 건립되었는데, 그때 붙여진 이름이 육신사라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각종 자료은 물론이고 묘골 박씨 문중에서도 별다른 이론 없이 수긍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말이다. 만약 이보다 수 백 년이나 더 빠른 시기에 이곳 묘골에 이미 육신사라는 존재가 있었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래는 유회당(有懷堂) 권이진(權以鎭)[1668-1734]의 시이다. 참고로 그는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외손자이자 명재 윤증(尹拯)의 문인으로 동래부사·호조판서·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조선 후기 문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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當年朴婢事如何(당년박비사여하) 옛날 박비의 일은 어찌된 것인가
祠屋嵬然起洛阿(사옥괴연기낙아) 사당이 낙동강가에 높이 솟았도다
自是聖朝崇節義(자시성조숭절의) 이는 선대 조정에서 절의를 숭상한 까닭이니
莫言天道佑忠多(막언천도우충다) 하늘이 충신을 도왔다고 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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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유회당집「권1」에 나오는 시로서 그 저작시기가 시의 서두에 분명하게 밝혀져 있다. ‘계사[1713년·숙종 39] 3월 6일, 옥산서원을 출발해서 육신사·회연서원·동계묘를 지났는데, 모두 시를 남겼다.’라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중에서 필자의 눈을 사로잡는 아주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바로 위 시에 달려있는 주(註)가 그것이다.
‘우묘동육신사재대구(右庿洞六臣祠在大丘)’
해석하면 ‘오른쪽[앞]의 시는 묘동 육신사인데 대구에 있다.’라는 뜻이다.
유회당집「권1」. 붉은 표시 안에 묘골 육신사 시(詩)와 함께 ‘묘동육신사재대구(庿洞六臣祠在大丘)’라는 주가 보인다. [자료출처: 한국고전종합DB]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평소 필자의 주장이었던 ‘竗洞·妙洞·廟洞’이 아니라 듣도 보도 못한 ‘庿洞’으로 되어 있다. 또한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인 1713년에 지은 시임에도 불구하고 낙빈서원이 아닌 육신사라고 표기되어 있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낙빈서원은 1679년[숙종 20]에 이미 사액서원으로 승격된 상태였다. 물론 이 유회당집이 목판으로 정식 간행된 것은 19세기 초, 선생의 손자인 권상서에 의해서이다. ‘大邱’를 ‘大丘’로 표기한 것을 참고하면 유회당집 간행은 아무리 늦어도 19세기초에 간행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어떻게 ‘낙빈서원’이 아닌 ‘육신사’라는 표현이 나올 수 있었을까?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한편 ‘庿洞’이라는 표현에서는 마치 가뭄 끝에 만난 한줄기 소나기마냥 기쁨과 반가움이 있다. 庿자는 ‘사당 묘(廟)’의 고자(古字)[옛 글자]이다. 따라서 庿洞은 사당이 있는 동네라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그 동안 묘골 육신사 해설사로서 써먹었던 ‘묘[廟]골’ 스토리텔링은 영 거짓말은 아니었던 셈이다.
묘골은 그 이름만큼이나 정말 묘한 곳이다. 하나의 사실이 밝혀지면, 그와 동시에 두세 가지의 또 다른 의문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골치 아픈 것이 싫다면 묘골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하지만 프로와 아마추어가 나뉘는 갈림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 프로는 머리통이 터지더라도 물러나지 않고 진리탐구를 위해 매진한다. 그러나 아마추어는 복잡해지기 시작하면 일단 ‘스톱’한다. ‘이쯤만 해도 충분할거야’라면서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인 1713년[숙종 39]에 지어진 시에 등장하는 ‘六臣祠’와 ‘庿洞’. 이 두 단어를 붙들고 어떻게 할 것인지 오늘도 고민 중이다. 더 파고들 것인지, 아니면 이쯤에서 스톱할 것인지…
‘아! 골치 아프다. 庿洞과 六臣祠 때문에…’
3. 에필로그
묘골 육신사는 전국의 향교(鄕校)·유도회(儒道會)를 비롯한 각종 유림단체 등에서 답사를 자주 오는 곳이다. 그런데 가끔씩 벌어지는 이상한 일 때문에 많은 사람이 놀라곤 한다. 2015년 봄에 있었던 일이다. 모 유림단체 서울지회에서 관광버스 2대를 이용해 묘골 육신사를 방문했다. 유림단체와 일반 답사객 사이에 있어 가장 큰 차이점은 아무래도 ‘알묘(謁廟)·봉심(奉審)’에 있다. 알묘란 사당에서 간단하게 예를 표하는 것이며, 봉심은 사당 내외의 이상 유무를 살펴보는 것이다.
육신사 경내에서 답사객을 상대로 해설을 하고 있는 필자.
숭정사 내에서 답사객을 상대로 해설을 하고 있는 필자.
그날은 답사팀이 유림단체인 만큼 알묘와 봉심을 행했다. 그런데 그때 그 이상한 일이 또 일어난 것이다. 답사객 중 두 명이 갑작스럽게 극심한 두통을 호소한 것이다. 그들은 곧장 일행의 부축을 받아 사당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그들이 내삼문 밖 배롱나무 아래쯤에 이르니 두통이 씻은 듯 사라지는 것 아닌가! 그것도 두 사람이 동시에 말이다.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마냥. 그날 알묘·봉심을 마친 답사객 사이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정말. 귀신 없단 소리 못하겠네. 저 양반들 둘 다 압구정[한명회] 어른 직계 후손이거든.”
첫댓글 감사히 보고 갑니다...
네...
저의 글에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