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우리사회 노동자 계급운동의 역사적 분출과 쇠퇴의 한 순환이 매듭 지워져가고 있는 현 시기의 노동자문화에 관한 문제의식을 정리해본다. 이글은 그동안 필자가 표명해 온 노동자 문화와 교육에 대한 관심들을 간략하게 요약 정리하는 성격의 글임을 밝혀 둔다. 일부 내용은 “노동자문화와 노동자정치”, ꡔ현장에서 미래를ꡕ, 73, 2002.1, pp.42-58; “노동자조직과 관료주의,” 현장에서 미래를ꡕ, 2002, 10, pp.57-70에서 볼 수 있다. 즉, 우리사회 노동자들의 집합적 행동에서 핵심적인 특징으로 드러나는 엘리트주의적 의미 생산과 대중동원 방식의 문제점, 그리고 그 조직적 귀결로서 노동자 조직들에서 일반적으로 드러나는 제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1. 노동자 문화를 말한다는 것
우리가 어떤 사회의 역사적인 변화를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는 그 사회가 처한 정치적, 구조적 위기와 그것들을 해결하려는 조직적 역량에 대해 분석해 보아야 하며, 동시에 당시의 이데올로기적 구성체나 그것이 역사적 주체들의 능동성에 작용하는 양식에 대해 분석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변화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역사적 이데올로기적 구성체들은 주어진 위기의 상황적 조건하에서 특정 주체들이 조직적인 자원들을 이용할 수 있는 역량에 크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노동자문화를 말하는 것은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구성체들의 작용양식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며, 주체적인 변화의 가능한 조건을 모색해 보려는 하나의 시도일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기는 자본의 이데올로기 위기의 시기인 동시에 지속적인 자본의 공세 하에서 취약해진 노동자 계급 및 그 조직들(노조 및 정당 등)의 이데올로기 위기의 시기이다. 신자유주의적 정치 이데올로기적 공세 하에서 노동자 계급은 지난 시기 투쟁의 성과들을 상당히 빠르게 잠식당해가고 있다. 물론 개별 사회구성체의 특수성이 작용하지만, 노동운동 및 노동조합운동의 정치적 조건 역시 상당히 위축되어 온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정치, 경제적 조건하에서 노동자 계급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공세가 더욱 거세었고, 사실상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 계급 운동의 이데올로기적 위기가 악화된 상태임은 주지하는 바이다. 이런 가운데 노동자 계급 및 운동조직들 역시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적 통치하에서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다양한 형태로 종속되어 가는 위기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자본의 위기의 국면에 적절한 이데올로기 투쟁과 대중적 노선을 견지하지 못하거나, 노동자들의 투쟁의 열망을 담아내지 못하는 이데올로기 및 조직의 위기 역시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시기에 왜 노동자 문화와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다음 책들을 볼 것. 신병현, ꡔ작업장문화와 노동조합ꡕ, 현장에서미래를, 2000. 신병현, ꡔ노동자문화론ꡕ, 현장에서미래를, 2001. 이 책들에서는 특히 가족주의와 조직 활동에서의 유사가족주의, 엘리트적 분파주의, 노동물신주의, 가부장주의 등이 주목되었다. 운동 혹은 정치를 말하고자 하는가? 노동자 계급이 역사적으로 형성하고 변형시켜 온, 독특한 삶의 방식, 노동자 계급만의 독특한 의미체계, 일상적 삶을 지배하는 정서 및 가치 지향성, 규범과 윤리체계, 행동방식 및 문화적 형식들로 표현되는 계급적 차이들에 주목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은 관심과 관련되어 있다. 첫째로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의 노동자 계급은 다른 계급들과의 관계 속에서 상이한 물질적 조건과 사회적 환경 및 소통관계 아래, 뚜렷이 구분되는 일상적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둘째, 그러한 삶의 조건들에 기초한 독특한 문화적 표현형식들을 역사적으로 발전시키며, 셋째, 여타 사회 계급들과의 관계 하에서 노동자 계급의 삶의 조건은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변형되어 왔고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고, 넷째, 그러한 (지배 및 종속 혹은 저항 및 이탈) 관계의 자본주의 역사를 염두에 둔다면, 노동자 계급의 ‘문화’를 독자적으로 범주화하는 것은 노동자 계급 주체형성이라는 특정한 정치적 기획 혹은 경향성과 관련된다. 첫 번째의 관심을 논외로 한다면, 두 번째 및 세 번째 관심과 관련해서 볼 때, 역사적으로 노동자들의 일상적 삶을 지배해온 이질적이고 생태적 조건에 밀착된 생활방식과 행동유형들은 ‘문명화 과정’(civilizing process)의 절대군주 치하로 종속되어간 기사계급이나 귀족층들 간의 ‘궁정사회’의 예절과 규범, 그리고 권력에서 소외되어있던 부르주아 및 자유주의적 중간계층들의 사회적 기획으로서 발전하였던 ‘시민적인’ 교양과 예절(civilité)의 정착과 확대과정. 외부에서 내부로 서서히 편입, 동화되거나, 모방되는 과정 속에서 변형되어 왔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박미애 옮김, 「문명화과정 Ⅰ」, 한길사, 1996. 사실 중간층은 언제나 자신들의 정치적 무기력성을 사상 이념 및 문학 예술적 차이를 강조하고 드러내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사회적 기획을 추구해왔다. 노동자 계급은 하나의 사회세력으로서 이러한 부르주아 및 프티 부르주아들과 그들의 생활방식 및 사회적 기획들에 대한 저항과 투쟁 및 동화의 관계 속에서, ‘빈곤의 문화’, ‘도덕경제’ 등으로 특징 지워질 수 있는 ‘민중적’ 삶의 문화적 형식들을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그러한 ‘문명화 과정’은 때로는 급격한 혁명의 과정에서 역전되어 야만화 되거나 새로운 문화적 형식들로 대체되기도 했음을 역사에서 볼 수 있다. 네 번째 관심과 관련해서 보면, 영국의 노동자 계급이 양차대전을 거치면서 국민으로서 호명되고 국가에 동일화, 종속되는 과정에서도 잘 볼 수 있듯이, 혁명적 반역이나 전쟁에의 동원, 선거권 획득투쟁, 또는 노동운동, 종교적 개종, 계급적 타협, 불황기의 빈곤의 경험 등 특정한 역사적 계기들을 통해 노동자 계급은 국가 성원의 외부에서 시민적 권리 주체로, 혹은 민족의 외부에서 내부로, 혹은 가부장제적 질서 내부로 호명되고 종속되는 과정 속에서, 사회제도 및 관행들의 타협적 수용을 통해 그들의 무의식적 욕망과 환상을 충족시키고자 했다. 경제관계의 자본주의적 독점화와 근대국가의 형성과정 속에서, 혁명적 투쟁과 실패의 역사적 과정은 노동자 계급이 차별적으로 종속되거나 배제되는 가운데, 국가 및 시민적 주체로 동일화되거나 종속되어 온 과정의 역사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동원되는 것이 바로 ‘문화’ 담론이다. 그래서 문화란 용어는 사회, 정치적 기획으로서 이중적 가치를 갖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사회적 통합의 사회적, 집단적 기획으로서 그 긍정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민족, 국가 등 몰 계급적 통합과 종속을 꾀하는 기제들과 관련된다. 흔히 저항문화와 지배문화를 구분하거나, 지배계급의 문화와 피지배계급의 문화로 구별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구분은 문화에 지나치게 통합적인 힘을 부여하고, 타 집단, 계층, 계급의 문화와의 차이만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지배 이데올로기에 종속된 다양한 차이들로서 문화란 용어를 사용함을 앞에서 보았듯이, 그것은 분석적이지 못하며, 집단이나 계급 내적인 차이와 갈등 및 모순적 경향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이처럼 ‘문화’는 사회, 정치적 기획의 현실화와 관련된 이데올로기적 과정으로서의 기본적인 성격을 갖는다. 우리가 ‘노동자 문화’를 말할 때에도 역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과정, 즉 노동자문화운동 혹은 노동자의 일상적 삶에 대한 정치적 관심, 계급적 주체형성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신병현, 윗책, 2001. ‘노동자 문화’는 노동자들의 다양하고 이질적이고 특이한 대중적, 계급적 경험과 가치나 풍속 등 삶의 방식과 그들이 생산하고 표현한 산물들이기 때문에 그 고유한 모순들을 담고 있으며, 전통적 잔재들과 동시에 추구해야할 ‘이상’을 담고 있기 때문에 또한 모순적인 과정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 또한 노동자들이 처한 구조화된 삶과 관련된 지배적인 제도들(노조나 당, 지역공동체 등)과 관련되는 동시에 그를 둘러싼 다양한 노동자 정치 기획들의 이데올로기 투쟁과정이기도 하기에 그 자체의 모순과 한계를 갖고 있다. 노동자 정치 운동 및 문화운동의 투쟁의 영역은 바로 이러한 모순의 지점들일 것이다. 이하에서는 이러한 노동자문화의 관점, 즉 노동자 계급 주체형성이란 관점에서 우리 사회의 노동자 조직들에서 지배적인 문화적 경향들을 엘리트주의적 ‘민주’노조운동과 그 조직적 제도적 귀결에 초점을 두고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이런 시도는 물론 노동자 계급의 상태와 그 문화적 형식들에 대한 문화에 대한 포괄적인 조사 없이 단편적인 조각 맞추기식 접근일 수밖에 없는 가운데서 시도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분히 인상적이거나 저자의 원망 투사 형식으로 그칠 위험이 있다. 하지만, 이런 시도가 현재의 노동자 계급운동의 위기 상태에 대한 ‘솔직한’ 진단에 조금이라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2. ‘민주(Min-ju)’ 노조 운동: 엘리트주의적 의미 생산과 제도적 귀결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노동 운동은 자본과 정권으로부터 ‘독립적(자주적)인(independent)’ 노동조합의 체계를 세우고자 하는 노조 ‘민주화’ 투쟁을 슬로건 삼아 아주 빠르게 성장했다. 페레스트로이카와 포스트모던 열풍이 거세게 불어 닥쳤던 1990년대 초반을 거치고, 과거 사회 민주화 투쟁에 몸담았던 엘리트층과 화이트칼라 고학력 노동자들의 탈정치화와 이념적 분화라는 거센 폭풍을 거스르면서, 한국사회 ‘민주’ 노조운동은 노동해방을 기치로 내걸었던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과 공공부문 및 대기업 노조 세력들과 함께 ‘민주노총’이란 노동조합 운동의 전국 센터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노동운동 세력들은 조직발전 전망을 둘러싼 치열한 주도권 경쟁을 벌였고, 전국적 계급 역관계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주요 파업들에 대한 비판적 평가와 전투적 노조주의 비판, 업종 및 공공부분 대규모 노조들의 집단 세력화, 기업별 노동조합 조직의 한계에 대한 인식의 공유, 그리고 IMF와 96,97 총파업 등을 거치면서, 노동자 계급의 정치 세력화 혹은 정치적 대변을 위한 대중적 정당 건설운동의 조건을 매우 신속하게 창출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전국적 조직으로서의 합법화 달성과 정치세력화 과정에서 이루어진, 노동조합주의 세력과 부르주아 정치권력 간에 이루어진 암묵적인 정치적 거래, 그리고 그 이면에서 경향적으로 관철된 노동자 계급운동의 ‘선택’은, 노동시장의 전 산업적 재편과 대기업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광범한 주변적 노동자 집단을 배제하는 효과를 예상하는 산별노동조합화를 포함하는 노동시장의 제도화. 조합주의적 참여라는 제도적 결과를 초래하였다. 제3세계 노동조합 운동에서 일반적으로 드러나듯이, 국가의 억압에 반대하는 독립 노조 건설 운동은 한국사회에서 민주노총의 합법화로 그 정점에 이르고, 96,97 총파업 이후 일련의 총파업 전술 구사 과정 속에서 드러났듯이, 조합원 대중과 이반된 상층 엘리트 정파 중심의 관료조직에 의해 지배되는 노동조합주의로서의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이에 대해서는 대표적으로 김세균, “한국의 ‘민주’노동운동: 평가와 전망”, ꡔ진보평론ꡕ, 13, 2002, 가을, pp.11-53을 참조할 것. 이런 변화 과정에서 드러났던 몇 가지 슬로건과 그 의미를 검토함으로써 우리사회의 노동자 계급의 집합적 행동에서 드러난 엘리트주의적 노동운동의 문화적 편린들을 살펴보자.
1)‘민주’ 노조운동에서 ‘민주’의 의미와 제도적 귀결
(1) ‘민주’의 의미들과 그 가치의 변질 과거 독립적인 ‘민주’ 노조 운동 시기와는 엄연히 구분되는 시기인, 제도화된 민주노총을 둘러싸고도 여전히 가치 있게 유통되는 ‘민주’라는 어휘의 몇 가지 의미작용에 주목해보자. 첫째, ‘민주’ 노조운동에서 ‘민주’는 과거 어용노조와 대비되는 의미의 독립적 노조라는 곧, 자본과 정치권력의 통제로부터 자주적인 노동조합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노조에 주어진 의미이다. 둘째, 또 다른 측면에서, 인간주의적 열망을 갖고 신생 노조의 건설과 노조민주화 투쟁에 투신한 엘리트 활동가들과 이들이 주도한 노조사수투쟁이나 생존권투쟁 등이 우리 사회의 형식적 민주화를 달성하는데 주도적으로 기여했다는 측면에서 자연스럽게 가치를 부여받은 의미가 있다. 셋째, 소위 ‘전노협 정신’으로 표현되는 변혁적 노조 운동에 부여되는 의미로서, 냉전체제의 검열을 회피하기 위한 특별한 가치를 갖는 ‘민주’라는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보편적인 가치로서 보통선거와 여성참여, 생존과 복지 등 일반적 인권의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운동에서 노조운동이 수행했던 중요한 역사적 역할들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모든 노동조합들이 모든 시기, 모든 나라에서 동일하게 그러한 보편적인 인권을 옹호하거나 평등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점도 분명한 사실이다. 어쩌면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주변적이고 냉전 체제적 제약들이 사회의 ‘민주화’를 추구하는 운동들에 다양한 가치들을 투영시키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 하에서 이루어진 형식적 민주화 조치와 소련의 몰락이후, 그리고 김영삼 문민정부의 등장은 두 번째 의미의 ‘민주’가 갖는 가치를 탈색시켰다. 특히 김영삼 정부 등장 이후 진보운동 전반에서 진행되었던 이념적 분화와 더불어 노동조합 운동가들 사이에서도 노동조합 운동 노선과 조직발전 형식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들이 전개되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노동운동 엘리트 제 정파간의 일정한 타협의 산물로서 등장한 것이 민주노총이기도 하다. 물론 ‘민주노총으로의 총단결’ 구호는 조직적 구심력을 확보하기 위한 신생 전국 연합체의 조직정비 상 반드시 필요한 구호였던 것 같다. 노조운동에서의 엘리트 정파 간 이념 노선의 차이는 그동안 ‘민주’ 노조운동의 역동적인 모습으로 비추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경영전략 반대, 반세계화, 반국가경쟁력 강화론 투쟁에서의 형식적인 대안부재 논쟁, 특히, 유연화 전략반대 투쟁과 노동법 개악반대투쟁, 96,97 총파업과 IMF 외환 위기 시기와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을 거치면서 ‘민주’노조운동은 어떤 특정한 노동조합주의 모델을 중심으로 조직을 관료주의적으로 구체화하려는 경향을 드러낸다(독일, 스웨덴 등 유럽의 사민주의). 물론 이 과정에서 정부와 자본의 노사정위 줄다리기를 통한 유혹이나 노동통제 시도 등의 ‘암묵적인’(?) 지원이 무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상 이런 경향은 김영삼 정부 이후 전투적 노동운동 노선에 대립하는 합리적 노동운동 노선(크게는 합리적 좌파로 포괄되는 경향) 분화 과정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었던 경향이었다. 게다가 총파업과 신자유주의 반대 및 고용보장을 둘러싼 노동자 대중의 분출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분위기를 형성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념적 좌파에 대한 정치적 자유의 부분적인 허용과 민주노총 엘리트 세력의 좌, 우, 중앙의 정치적 3정립 구도는 과거의 ‘민주’ 노조운동에 부여되었던 세 번째 의미의 ‘민주’라는 어휘가 갖는 의미의 장을 크게 축소시키는 효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민주’ 노조의 의미도 마찬가지로 크게 변화했다. 전노협 시기까지만 해도 노동조합운동의 독립성, 자주성을 위한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투쟁은 한국노총 산하 노동조합들을 전노협 산하 노조로 견인하는 모습이 있었음을 주지하는 바이다. 김세균, 윗글. 동시에 현대계열사 노동조합을 비롯한 주요 대기업 노조들과 업종 및 공공부문 노조들의 독립성 쟁취 운동은 여하튼간에 민주노총이라는 독립적인 전국조직을 탄생시키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총파업 및 주요 연대 투쟁에서 일부 노조들의 분열과 파행에서도 드러나듯이, 다양한 노선으로 분화된 현 시기에 노조 활동가들에게 어용이 아닌 ‘민주’ 집행부를 선거 운동을 통해 선출하고 집행부를 구성하는 것은 더 이상 과거와 동일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조합원 대중에게 민주파는 더 이상 차별화된 활동가 집단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으며, 조합원들에게 ‘민주’라는 가치는 더 이상 중요한 고려 요인이 되지 못한다. 물론 노사협조주의적인 집행부와 ‘민주파’ 현장조직 노조집행부가 사용자 측과의 교섭방식이나 파업성향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소위 ‘민주파’일지라도 파업 시 조합원 대중과의 개방적인 정보 소통의 부재나 비밀주의적 관행, 중요한 사안의 배후 결정과 직권조인의 사후적 합리화 시도 등 ‘조합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행태를 보이는 일이 적지 않다. ‘민주’ 노조운동은 위원장 선거와 중요한 사안에 대한 조합원 총회를 통한 결정과 같은 ‘민주주의적’ 형식을 ‘민주’ 노조운동의 중요한 문화적 형식으로 발전시켜 왔다.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민주노총에서 마저도, 관료적인 전문성이나 합리성, 그리고 대중적 불참 등을 정당화의 근거로 내세우면서, 조합원들의 총의에 바탕을 두지 않은 집행간부들만의 직권적인 결정이 자주 내려짐으로써 ‘총회 민주주의’라는 중요한 가치가 심각하게 침식되어 왔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세 번째의 변혁적 노조운동 엘리트 세력을 제외하곤 기존의 ‘민주’ 노조운동의 의미를 그대로 전유할 수 없는 세력들이라는 비판을 모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세 번째의 변혁적 노선의 경우에는 다른 더 중요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모두가 독립적 노조의 발전과 변혁적 노조운동을 추구해온 세력임을 자임할 수 있는 역사를 공유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노동조합 운동의 정치적 노선을 둘러싼 대립 과정에서 어느 세력만이 독자적으로 ‘민주’ 세력임을 주장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들은 노조운동의 ‘민주성’에 관한 한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내부에서도 이념적 성향의 차이에 따라서 노동조합운동의 ‘시민권’을 말하거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그리고 민족주의적인 우파의 경우에 내세우는 슬로건은 ‘민주’가 아닌 ‘시민’, ‘국민’으로 변해왔다. 김세균, 윗글. 따라서 ‘민주’의 ‘정통’을 고수하려는 세력은 노동조합내의 정치적 주도권 장악 경쟁에서 열세인 좌파 계열 엘리트들임은 자명하다. 그리고 그 의미도 어용과 대립된 ‘민주’가 아닌 의미로서, 노조 상층 집행부 엘리트들 일부의 관료주의에 반대하는 실질적인 조합 내 ‘민주주의’를 강조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노동자 계급 내 ‘민주주의’의 상징적 의미와 그것의 제도화 형식은 애초의 변혁적 민주주의 주장과는 다른 부르주아 형식 민주주의에 기초한 주도권 다툼이라는 협소한 형식과 의미로 전위되어 있는 것 같다.
(2) ‘민주’노조운동의 제도적 귀결 노동자 대중에게 있어서는 ‘민주’라는 어휘는 대체로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하나는 과거 노동조합이 없었거나 어용적인 노조와는 다른 의미의 독립적 노조를 쟁취하기 위한 대중적 노조 운동의 고양기를 경험한 일반 노동자들에게 ‘민주’ 노조는 회사측의 병영적 노동통제에 대한 보호 장치로서 상대적인 가치를 갖는 노동조합 즉, 회사로부터 자주적인 활동을 통해 일방적이거나 자의적인 해고와 전환배치, 작업장 통제와 같은, 노동시장을 부분적이나마 규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비교 대상으로서의 노동조합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 시기에는 소수의 신생 노조의 경우를 제외하곤 일반화시키기 곤란하다. 다른 하나는 노동자 대중들은 과거 노조 민주화 투쟁 시기를 경험한 선진 노동자층 중 지속적인 노조운동에 투신하고 있는 일부 전투적인 노동조합 활동가나 학생출신의 노조 운동가들의 활동을 ‘민주’노조 운동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이 운동에 투신하고 있는 활동가들은 ‘노동자들을 위해 희생적으로 운동하는 사람들’이며, ‘보통 사람들로는 하기 어려운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들’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대중들은 활동가들의 문화적 권위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들의 활동은 단지 ‘그들의 할 일’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제 노조운동의 엘리트들과 대중들의 삶과 감성적 투심의 우선순위는 상당한 거리를 갖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으로 활동가들은 단위 사업장을 중심으로 볼 때, 운동 과정에서의 도구주의적 인간관계의 경험과 가족주의적이며 서클주의적인 집단관계, 엘리트적 자부심과 모멸의 경험, 분파주의적인 노조정치로 황폐화되면서, 신병현, 윗책, 2000, pp.149-163. ‘민주’노조 운동의 경쟁 세력으로 상호 분리되는 양상을 드러낸다. 그리고 최근의 신자유주의 반대를 위한 연대 파업 혹은 총파업 전술의 실패나 공공부문 노조의 연대 파업 파행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주요 이념적 세력들의 현장 영향력을 특정한 사안과 연결시켜 본다면, 상층 엘리트들의 첨예한 이념적 노선 차이와 논쟁이 단위 사업장의 활동가 집단에게 얼마나 이해되고 실천되는지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인 것 같다. 박성인, “민주노조운동과 대중파업”, ꡔ진보평론ꡕ, 3, 2000, 봄, pp.69-85.
이러한 모습은 한편으로는 한국사회 노동조합운동이 대중들의 주어진 시기별, 사안별 집합적인 분출과 더불어 소수 지식인 출신 엘리트들의 의미생산의 정치를 통한 대중동원 방식과 그 경험의 유사-가족주의적 조직화와 신병현, 윗책. 분파적 주도권 경쟁을 통해 성장해 왔다는 점을 생각하도록 한다. ‘민주’노조운동에서의 민주화라는 어휘를 통해 생산하고 동원해온 의미는 합법적인 전국적 노조센터를 세워내는 데 중요하게 기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형식적 민주주의를 이용한 노조 정치주의 게임이 조직적으로 구축된 구조인 동시에 정치적 노선이 다른 제 엘리트 세력들의 각축장화 한 측면이 크다. 1987년 이후 지난 15여년 간 ‘민주’노동운동의 궤적은 계급적 분출과 타협의 한 순환을 보여주는 듯하다. 더 이상 민주(democratic)는 없고, 역사적 퇴적물로서 ‘민주’(Min-Ju)만이 있을 뿐이다.
2) 슬로건화를 통한 동원과 의미 생산의 제도적 귀결 ‘민주화’와 더불어 ‘민주’ 노조운동에서 지배적인 슬로건은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산별노조’, ‘총파업’ 슬로건이다.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슬로건은 민주노총 1기 지도부의 출범과 함께 ‘사회개혁투쟁’, ‘정치세력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상층 간부 엘리트층의 노조 운동노선을 집약적으로 표현하는 어휘였다. ‘산별노조’ 슬로건은 민주노총 출범 이전부터 ‘가장 발달된’(?) 노조 조직형태로서 인식되어 왔고 ‘민주’노조운동의 중요한 관심사였으나, 본격적인 대중적 구호로 제기되는 것은 민주노총 출범 이후 그것도 단병호 집행부 시기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과거 1980년대 말이나 전노협 초기이후에 일반적이었던 대규모 전략적 사업장 위주의 상징적이고 전선적인 대립 투쟁 형식과 달리, ‘총파업’ 슬로건이 노동자 대중투쟁의 새로운 형식으로 ‘민주’노조운동에 재등장한 뒤 민주노총 투쟁의 전형인 것처럼 된 것은 96,97 총파업 이후이다.
(1) 시민권 슬로건 먼저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슬로건은 시민운동 단체들과의 연대와 더불어 사회 각 부문의 개혁과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강조하면서, ‘전노협 정신’ 혹은 ‘전투적, 대중적 조합주의 노선’에 거리를 두는 동시에, “정책 결정 과정에의 참여 및 제도 정치권으로의” 김세균, 윗글, p.37. 진출 가능성을 염두에 둔 노조운동노선을 표현하고 있다. 이 슬로건은 ‘온건 합리주의’ 이미지를 대외적으로 표방하면서, 대내적으로는 공공부문의 전문직, 사무직을 포함하는 광범한 노동자 상위층을 통합해 내고자 하는 노조 집행부의 노선과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국의 경우 이러한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대거 참여가 야기한 노선상의 변화에 대해서는 J.Kelly, Labour Union and Socialist Politics, London: Verso, 1988, pp. 85-127을 볼 것.
이 슬로건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국민’이라는 기표에 따르는 의미작용이다. 즉, 국민과 함께하는 노조운동은 ‘국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거나 인정받을 수 없는 사회적으로 주변화된 혹은 고립된 ‘노동자’들의 운동이었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노조운동에 대해 거리를 두고 있거나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서, 노조운동이 ‘시민’의 운동으로서 정당하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신뢰를 보여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나아가 한국사회와 같이 레드 콤플렉스가 심각하게 문제되고 있고, 노동운동을 비롯한 진보적 사회운동 자체가 주변화된 상황에서는 ‘시민권’을 확보할 수 있는 즉, 법적, 제도적 보장을 획득하기 위한 의도를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노동자들의 상태와 노조운동의 상태가 ‘사회적 소수자’로서 위치지워지고 있으며, 그것도 다른 사회집단의 시각으로 읽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회변혁의 기획을 주체적으로 담지한 계급으로서 노동자라는 이미지에 타자가 보는 열등하고 고립된 주변적 집단으로서 노동자의 이미지가 중첩되고 있는 것이다. 국민정부의 등장과 더불어 국가경쟁력 강화, 세계화 담론이 지배적인 경제 이데올로기의 슬로건으로 제기되었던 정치적 맥락 하에서 ‘국민’ 혹은 ‘시민’과 노동자라는 정체성이 ‘민주’노조운동에 투신한 엘리트들 사이에서 경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진보적 이론가들에게, 노동자에게 나라는 무엇인지를, 그리고 국민 혹은 시민이란 법적인 주체로의 종속이라는 이론적이고 역사적인 문제가 단지 ‘계급의식’을 거론하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검토되거나 다루어지지 않는 문제임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E. Hobsbawm, "Notes on Class Consciousness," Worlds of Labor, London: Weidenfield and Nicholson, 1984, pp.15-32.
사회적 소수 세력으로서 ‘민주’노조운동의 자기 인식에서 가장 두드러진 지표로 작용하였으리라 추정할 수 있는 것은 합법성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고, 또한 과거의 민주노조운동의 전통 및 정신과 거리가 있거나 이해가 상충될 수 있을 새로운 집단 세력이 조직의 성원으로서 가담하였다는 변화된 조건도 고려된 듯하다. 서구의 신사회운동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도 추정할 수 있으나, 당시는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지 않았고 주요 기업들이 구조조정의 기회만을 엿보던 시기였고, 비정규직이나 외국인 노동자층, 여성노동자가 주목되지는 않았던 시기였으며, 그 이후 민주노총의 정책과 행동은 핵심노동자층의 보호에 주로 초점이 맞춰져 왔기 때문에, 그렇게 보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결국 이 슬로건이 궁극적으로 의도한 것은 합법적 제도화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앞서도 지적했듯이, ‘민주’노조운동의 대의 손상과 주변적 노동자층의 희생과 노동시장의 핵심노동자층 중심의 새로운 재편을 대가로 치러야 했다.
(2) 산별노조 슬로건 ‘산별노조’ 슬로건 역시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슬로건과 동일한 맥락에 위치지워 볼 수 있다. 조직력, 사용자와의 교섭력의 취약성이나 대규모 단위노조들과의 연대투쟁 곤란성과 같은 기업별노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조직적 대안으로서 오래 전부터 유력한 것으로 인식되어 온 것이 산별 조직형태이다. 산별 노조형태는 노동시장에 대한 강력한 개입능력을 특징으로 하며, 막대한 조직력과 자금력을 기반으로 하여 정치적 참여 가능성도 높여 주는 형태로 소개된다. 그것은 아마도 거의 모든 ‘민주’노조운동이 당면한 장애를 극복할 수 있을 만병통치약으로서의 성격을 갖는 기표일 것이다. 노동운동계의 ‘산별노조’ 논의는 대체로 산별 자체의 필요성에 대한 당위적인 인정에 기초한 ‘성급한’ ‘조직 형식주의적’ 산별조직화 방법론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런데 서구 산업국들의 경우 산별노조 조직형성과 기능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다면, 우리사회의 ‘산별노조’ 담론에서 드러나는 정치 구호적 성격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법하다. 우선 국민정부 말기의 노사정위원회는 산업별 노조 형태에 매우 부합되는 네오-코포라티즘적 성격을 갖는 제도이다. 또한, 산별조직은 독일과 북구라파의 후진 산업국에서 일찍부터 일반화된 형태이고, 노동시장의 일정한 재편과 더불어 국가와 사용자 등 위로부터의 국민적 통합과 포섭의 정치적 기획 하에 이루어지는 개입이 없이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형태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적 공세를 통한 노동시장의 재편 시기에 조응하는 유력한 조직형태가 산별 형태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산별노조화에 관한 이와 관련된 논의로서 Bo Strath, The Organization of Labour Markets: Modernity, Culture and Governance in Germany, Sweden, Britain and Japan, London: Routledge, 1996. 이렇게 보면, ‘산별노조’ 슬로건에서 투쟁을 위한 위력적인 조직형태라기 보다는 교섭과 참여에 유리하고 노동시장 규제자로서의 위상이 중요시되고 있다는 것도 읽어낼 수 있다. 실질적으로 산별논의에서 초점이 되어야 하는 것은 비정규직 혹은 불안정 노동자들의 조직화 문제일 것이다. ‘민주’ 노조 운동은 과연 그러한 방향으로 초점을 두고 있는가? 그렇다면 ‘산별노조’ 슬로건은 과연 어떤 것을 의도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정치적 참여의 가능성과 동원기반을 형성하고자 하는 의도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민주’노조운동 엘리트 집단에서 노선 차이를 불문하고 동일한 관심을 갖는다. 그 제도적 귀결은 노사정위 참여와 노조 상층 중심의 분파적 정치세력화이고 운동노선 간 경쟁적인 ‘깃발 꽂기’ 게임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좌파 노조 엘리트 및 활동가들의 기회주의적 속성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3) 총파업 슬로건 ‘총파업’ 슬로건은 특히 96,97 총파업 이후 ‘민주’노조운동에서 일상적으로 관행화된 투쟁전술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러나 ‘위력적인 총파업’을 통한 신자유주의 분쇄 혹은 국면의 돌파 등에 관련된 구호들은 실제로 대중들의 파업 열망이나 투쟁의 조건들과 이미 거리가 멀어진 공허한 구호로만 남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총파업은 심각한 실정과 정책실패, 대중들의 열악한 경제적 위기상태 등 다양한 조건들 특히 정부의 폭력적 탄압과 같은 특정한 계기, 구체적 정세에 대한 구체적 분석 없이는 좀처럼 거론하기 힘든 투쟁전술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상층에서 기획되고 남발되고 있다. 또한 그 결과를 두고 ‘민주’노조운동의 엘리트 집단 간에 치열한 평가 논쟁이 벌어진다. 사실상 ‘민주’노동자 운동의 전형적인 문화형식을 든다면 집회와 파업의 일상적 문화형식들일 것이다. 그동안의 노동자 조직의 성장과정은 한국사회 노동자 계급 운동에 독특한 문화형식들을 형성, 발전시켜 온 과정이기도 하다. 노동조합운동의 파업과 집회, 시위, 그리고 전투적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삶과 투쟁의 일상적 모습이 보여 준 독특한 문화적 형식들과 그것이 담고 있는 생동성은 일부 지식인으로 하여금 한국사회의 노동자 계급 문화에 대한 관심을 고무시키기도 했다. 파업과 집회시의 ‘노동해방’, ‘평등세상’과 같은 노동자 세상에 대한 희망을 표현하는 슬로건들은 노동자들의 집단적 권력의 상징으로서 ‘민주’ 노동조합 집행부의 권위를 세워내고, 다양한 상징적 형식들을 통해 노동자 계급이 집단적으로 추구하는 희망을 표현하고자 해왔다. 다른 한편으로 신자유주의 시기 노동자 계급과 노동자 운동조직들의 전반적인 상태가 지속적인 자본의 공세 속에서 더욱 더 취약해지고, 노동자 계급 대중들의 상태가 더욱 열악해지고 동시에 노동자 계급의 도덕적, 정서적 불균등성 역시 실천적, 이론적 관심에 들어오게 됨에 따라 계급적 주체형성에 대한 정치적 관심이 등장했다. 최형익, “한국 선진노동자의 사회ㆍ경제적 조건과 계급정체성,” ꡔ현장과 이론ꡕ, 한노정연, 2001, pp.91-118; 박해광, “담론의 정치, 경영이데올로기와 노동자 수용,” 윗책, pp.146-171. 대중적 일상의 차원에서 보면, “생산적이고 자율적이며, 창조적인” 고몰입, 고헌신적인 주체를 생산하려는 기업가 문화(enterprise culture)와 기업 문화적 통제(corporate culture) 공세를 통한 작업장 규율화 시도, 온 대중을 주식 투기꾼으로 몰아가는 대중투기문화(mass investment culture)의 조성 시도, 대량소비문화의 홍수 속에서 노동자 계급 문화의 형성 조건은 더욱 더 취약해갈 수밖에 없었다. 신병현, 윗책, 2000;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계급정치와 작업장 지배체제,” ꡔ현장에서 미래를ꡕ, 69, 2001, 8, pp.4-10.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그동안 노동자 운동에서 발전시켜 왔던 다양한 문화적 형식들이 아주 빠른 속도로 노조 관료화된 엘리트들의 획일화되고 사전에 검열된 형식들로 정형화되는 모습을 보여 왔다는 점이다. 노동시장의 합법적 규제자이며 자본과 정부의 ‘노사정’ 파트너로서 ‘법적인’ 책임을 자임하면서 민주노총은 노동자들의 파업과 집회 시의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행동을 과잉 규제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대표적으로 임인애, “실패한 상흔은 오래 남는다”, ꡔ진보평론ꡕ, 3, 2000, 봄, pp.105-126를 참조할 것.
최근 들어서 거의 일상화되고 있는 (총)파업 투쟁의 양상을 조금만이라도 가까이 접근해서 살펴보면, 현 시기의 ‘민주’ 노조운동의 총파업 및 연대파업은 ‘조합간부 혹은 위원장들만의 파업’일 뿐이라고 얘기되고 있을 정도로 노동자 대중의 관심과는 거리가 있다. 극단적인 예로 연대 파업 참여는 교육시간을 할애해서 사측에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단위노조에서 행사로 치뤄지고, 연대파업은 조합원들에게 지겨운 작업장으로부터의 잠정적인 탈출의 시간으로 받아들여지고, 화려한 복장을 갖추고 나와 ‘눈도장’만 찍은 후 동료들과 유흥장으로 가는 날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또한 사측의 탄압과 해고의 위험 속에서 수많은 좌절을 경험하는 가운데 철저한 사전 준비와 조합원 대중의 교육과 문화프로그램을 기획하여 성공한 일부 파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파업은 상층간부나 활동가 조직들의 연합(소위 파업 대책위원회 등)을 통한 조합원 투표를 통한 가결과 선언, 그리고 소수 엘리트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한 파업브로커나 정부 및 회사 측과의 흥정, 사후적으로 조합원들에게 인준 받아 마무리된다. 이런 형식적인 파업 관행은 극단적인 엘리트주의적 문화적 관행인 동시에 조직민주주의와 개방적 소통에 기초한 조직 운영의 벽이 된지 오래다. 이러한 풍토는 한편으로 파업을 소수 엘리트들의 전술적 기획을 통한 대중동원과 노조의 세 과시 의례로 편협하게 인식한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인식 하에서는 파업투쟁이 힘있게 전개되지 못한 것은 산별노조와 같은 조직력, 자금력이 앞선 조직형태를 갖추지 못해서라고 환원주의적으로 정당화하거나, 다른 노선의 영향하의 단위노조를 희생양 삼는 의례적인 노선 논쟁으로 상황을 일시적으로 모면하는 것이 관례다. 파업이라는 시ㆍ공간은 노동자 계급의 새로운 세계 창출을 위한 즉, 공산주의 ‘되기’의 시ㆍ공간으로서 노동자문화 이해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노조운동 엘리트들의 정치적, 전술적 산술에서 이런 인식은 순진한 자유주의적 낭만성의 발로로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파업에 대한 편협하고 추상화된 도식적 인식이 어떻게 보면 파업투쟁의 성공과 실패를 탓할 근거로 유예시키는 한 방식이라고 의심받을 수도 있다. 파업이 엘리트들의 ‘전문성’에 기초한 전술 구사의 시ㆍ공간으로만 환원되는 경향은 한편으로 노동운동에서 꾸준히 강화되어 온 관료주의의 대표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3. 노동자 운동조직의 이데올로기와 관료주의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노동자 계급의 주체형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한국사회 노동자 계급운동은 전형적으로 소수 엘리트 분파 집단들의 사회ㆍ정치적 기획들만이 경쟁하는 각축장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대중들의 분출은 단지 수사학적으로만 묘사되고 활용되어 왔을 뿐 계급운동 자체에 현실화되지 못했던 것 같다. 신자유주의 공세 하에서 노동자 계급조직들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엄밀한 이론적 인식과 그것이 갖고 있는 모순에 대한 천착이 부재한 가운데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요해 왔다. 아주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단지 슬로건을 통한 대중동원의 의례에 의존하거나 대중들의 우연한 분출에 편승하는 파행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여 왔을 뿐이다. 나름대로 엄밀한 국면분석과 확고한 강령을 준비하여 조직화 하였겠지만, 노동자 계급운동 조직들에서 엿볼 수 있는 경직된 조직원리와 분열적인 조직 운영 관행들은 미셀 페쇠(M.Pecheux)가 유형화한 자본주의적 발전의 ‘프러시아적 길’과 ‘아메리카적 길’을 생각하게 한다. 보다 자세한 논의는 신병현, “노동자조직과 관료주의,” ꡔ현장에서 미래를ꡕ, 2002, 10, pp.57-70
현 시기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처한 노동자 운동이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위기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페쇠가 말하는 기존의 요새형 예속형태 뿐 아니라, 아메리카적 예속형태의 기본 속성을 주목하지 못하고 실천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하나의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미셀 페쇠, “이데올로기에 대한 두 가지 성찰,” 에티엔 발리바르 외 지음, 윤소영 편역, ꡔ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ꡕ, 326-339쪽. 노동자문화에 대한 정치적 기획이 더욱 중요시되는 것도 바로 이런 자본주의적 예속형태의 이중적 성격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예속형태들은 노동자들의 일상적 삶 및 조직적 실천들 속에 다양한 실천 이데올로기적 반향을 갖는 방식으로 물질화된다. 민족주의와 사회민주주의와 같은 전형적인 부르주아 및 프티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형태들 이외에, 가족주의 및 유사가족주의, 노동물신주의, 가부장제, 그리고 기업조직 내 관행과 제도들 등에 물질화된 실천 이데올로기적 반향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신병현, 윗책, 2000, 2001. 이것들이 노동자 문화운동과 정치적 실천이 계급운동 조직 내적인 반성과 동시에 일상적으로 노동자들의 삶과 의식적 각성에 동시에 주목해야 할 이유이다. 과연 우리 사회 노동자 계급운동의 이데올로기적, 조직적 상태는 어떠한가? 과연 조직원리와 일상적 조직운영 방식은 어떠한가? 이하에서는 노동자 문화 창출의 중요한 매개인 다양한 노동자 운동 및 그 조직들을 잠식해가는 대표적인 이데올로기 형태와 조직 모순을 보자.
1) ‘‘민족적 계급’ 운동: 노동자조직운동의 민족주의와 사민주의 하나의 특정한 역사적 체제로서 ‘민족적’, ‘사회민주주의적’ 유형의 정당은 신자유주의 대두와 더불어 지속적으로 위기에 처해져 왔다. 사회적 조합주의 전통의 붕괴, 즉 노동자 계급의 포섭체제의 점차적인 붕괴와 동시에 시장논리의 확장을 통한 대자본의 독점 강화의 성격을 띠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그 자체로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적 위기의 증후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주요 선진 산업 국가들에서 볼 수 있듯이, 자본주의에 대한 프티 부르주아적 반감(반자본주의적 반감)은 민족주의와 사민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형태들을 매개로 노동자 계급 및 노조운동에 더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국의 경우도 역시 동일한 경향이 노조운동 및 노동운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게다가 한국의 경우는 분단의 특수한 상황을 이용한 고전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형태인 민족주의가 노동자 운동에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 역설적인 현상이 전개되고 있다. 한국사회의 노동자 계급 운동에서는 특이하게도 소수 엘리트 중심의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와는 달리 분단 상황으로 인한 매우 조악한 프러시아적 형태의 후진적이고 파시즘적인 민족주의가 학생운동과 대중운동에 뿌리를 내려 요새적인 형태로 현실화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사회민주주의는 노동자 계급 전반에 대중적 기반을 갖고 있고, 노동자 문화 전반에 걸쳐, 즉 실천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뿌리깊은 물질적 기반을 갖고 있다. 특히 노동조합이나 당을 매개로 하여 부르주아적 정책형태의 계급적 타협을 수행하는 기능을 갖는 것이 이와 관련된다. 따라서 사회 민주주의적 의회 정당 및 노동조합주의는 하나의 역사적 민족적 제도로서 ‘국가장치’의 일부를 구성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그래서 사회 민주주의적 유형의 정당은 대체로 계급 타협적 입장에서 부르주아 정책을 수행하는 노동자 정당의 유형을 취한다. 여기서의 계급은 ‘민족적 계급’일 뿐이다. 사회 민주주의적 입장의 ‘정치주의’는 그 현실성과 언어의 급진성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계급의 중립화와 수동성을 조장하며, 나아가 민족, 국가 혹은 시민적 주체로서 대중을 호명하는 주요한 정치적 경향이며, 역사적인 이데올로기 형태인 것이다. 사회 민주주의적 유형의 정당은 비록 전형적으로 관료화되고, 조직 내부의 계층적 차이와 갈등으로 지속적인 해체의 위기를 겪을 지라도, 계급적 타협의 기능을 일관되게 다양한 형태로 수행한다. 예컨대, 파업브로커나 정치가들의 개입과 의존 형태.
우리 사회의 엘리트주의적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이 ‘일정하게’ 수행해왔던 이와 같은 ‘민족적 계급 통합’ 기능은, 민주노총이 제도화된 이후 노조상층간부나 노동 및 시민운동 단체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수행되어 왔으나, 엘리트 세력들 간의 상호 견제로 말미암아 안정적으로 수행되지는 못했다. 최근 들어서는 정치세력화 슬로건 아래 사민주의적 대중정당을 추구하는 민주노동당 혹은 노무현과 같이 명망성을 가진 노동 브로커 정치가들에 의존하여 보다 안정적인 대중적 대표 구조를 갖추고자하는 흐름들이 대선과 총선 국면에서 노동운동계를 주도하고 있는 듯하다. 유럽 자본주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부르주아의 승리와 근대국가 형성, 혁명적 노동자 운동의 세계적 패배, 노동자 계급의 타협 및 종속과 맥을 같이 한다. 최근의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들이 특정한 나라들에서 시행될 때도 역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적 국가 통합이 예외 없이 등장했다. 엘리트주의적 노동자 계급운동은 노동자 계급주체형성을 말하면서도 역사적으로 종교와 민족이 계급과 대중 주체화의 주요 경쟁 세력이었음을 덜 중시하는 것 같다. E. Hobsbawm, "Religion and the Rise of Socialism", 그리고 “What is the Workers' Country?", 윗책, pp.33-48; pp.49-65. 그것은 아마도 근본적인 계급 주체형성의 이론적, 전략적 반성이 지체된 가운데, 슬로건을 통한 대중동원에 중심을 둔 경험주의적 엘리트 집단들 간의 정치주의적 이합집산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2) 노동자 조직의 관료주의 최근 들어 노동운동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단어 중의 하나가 관료주의다. 96,97총파업 시기나 그 이후 민주노총 상층의 보수적이고 특정 성향의 정치주의적 행태나 발전노조 파업시의 직권조인 사건 등에 대해서 여러 노조 활동가들이나 좌파 블록에 속하는 단체들로부터 노조 관료화라는 비판이 거세게 일고 있다. 대표적으로 김세균, 윗글; 신병현, “노동자조직과 관료주의,” 현장에서 미래를ꡕ, 2002, 10, pp.57-70를 참조할 것. 관료주의 문제가 한국사회 노동조합운동 내부 논쟁의 주요 화두로 대두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노동조합이 계급적 적대관계 속에서 투쟁의 산물로서 노동자 계급에 의해 스스로 만들어지는 노동자 조직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노동자 정치 형태가 발전하기 보다는, 왜 항상 관료주의적 방식으로 조직되며, 노조와 노조 리더쉽은 조합주의, 개량주의, 보수주의, 사회민주주의적 경향을 띠게 되는가? 이는 맑스주의 운동에서 아주 오래된 쟁점으로서 이행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성격의 질문이기도 하다. 여기서 문제는 사실상 추구하고자 하는 대중적, 운동 실천적 이상 혹은 그와 관련된 이행 과정에 대한 인식들의 차이일 것이다.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사회민주주의에서도 역시 방법은 다르더라도 사회의 점진적 전화를 말한다. 노조 간부의 관료제 옹호도 단계론이나 정세분석 차이에 근거한 전술상의 차이나 의회주의적 방법 등의 방법적인 차이로 환원될 위험이 여기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도대체 운동이 추구하는, 아니 만들어가는, 궁극적인 상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물어야 한다. 발리바르, “비동시대성: 정치와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이론, 1993, 163-190. “공산주의 이후에 어떤 공산주의가 오는가?,” 윤소영(편저),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소련사회주의」, 공감, 2002, pp.59-79. 신자유주의 공세 하에서 조직적 실천 및 이데올로기적 동요가 현저하게 드러나는 자본과 노동의 위기의 시기인, 현 시기에 역사적 경험들과 현존하는 다양한 조직적 실천의 문제들을 견주어 보는 것은 유의미할 것이다. 노동자 조직의 관료주의 문제는 현 시기 운동의 문제인 동시에 운동의 미래가 걸린 관건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에 대해 단순히 방법주의적,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역사적 실패를 반복하는 일일 뿐이다. 최근의 발전노조 '직권조인'과 같은 사건은 수준은 달라도 단위 노조의 단체교섭과 파업타결과정에서 그동안 아주 많이 있었던 것이다. 대개 논란이 되었던 직권조인 사건들은 조합원들의 투쟁열기와 간부(일부 활동가 조직)들 간의 상황인식 차이에 기인하거나, 위원장 등 간부들에 대한 회사와 정부 측의 뇌물을 통한 회유나 육체적, 심리적 위협이나 가족에 대한 압박, 그리고 사민주의적 노동단체나 정당, 노동브로커들의 매개와 설득 등에 의해서, 결국에는 막후 거래 사실의 은폐와 동시에 대중적 집회를 통한 봉합 등의 형태로 조합원 대중의 기대를 저버리거나 하였다. 이에 대해서 관료주의, 노조민주주의, 노동자들의 실천이데올로기와 노조운동의 사회민주주의 성향, 엘리트와 대중관계 등 아주 여러 측면에서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조합원에 대한 간부 엘리트들 간의 관계문제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을 매개하는 것이 조직이며, 이것을 관료주의 프티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및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정당화하고 조직운영 실천에 체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과거 조직실천에 대한 반성들에서 다양하게 제기되었듯이, 노동자 대중이 노조조직으로, 그리고 노동자 계급이 당조직으로 환원되는 모순과 근원적으로 관련된 문제인 것이다. 조직이 운동을 대체하고, 운동이 계급을 대체하고, 조직적 실천과 계급 및 이론을 단지 상상적으로만 동일화하는 운동의 긍정적/부정적인(유산이면서 장애) 관행과 조직관과 관성적인 운동의 실천들이 관련된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논쟁과 이론적 반성이 실천 활동에서 배제되고 소수에게 독점됨으로써 발생하는 조직 실천 운동의 역사에 공통적이었던 조직들의 모순이다. 역사적으로 노조의 조직구조나 관행에 대해서 조직적으로 다른 대안들이 그리 많이 모색되지도 못했고, 개선책도 제시되지 못한 점이 운동의 큰 문제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노동자 계급 조직들은 기업이나 정부 조직의 관료제를 전형으로써 거의 무의식적으로 모방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단순히 대중을 추수하지만은 않으면서도, 공산주의 되기의 새로운 형태를 창출해가는 노동자 계급운동은 무망한 것인가? 새로운 대안과 혁신의 모색은 항상 극소수의 제출된 대안에 대한 토론으로 되어 다른 가능성은 배제되고 단기적인 대중적 검증을 통해 유행처럼 확산되는 경향이 강하다. 이것은 대개 실천적 실용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즉 형식적으로만 보편주의적 외관을 띠지만, 실질적으로 부르주아적 형식이 갖는 이데올로기적 위험성에 대한 검토 없이 실용적으로 조직구조와 관행, 정책, 기법들을 채용하고 그것을 대중성으로 보완하는 것이다. 조직 정비가 잘되면 될수록, 안 되면 안 될수록 이런 경향은 관료주의적 정치주의나 헤게모니 장악 논리를 실질적으로 더욱 더 합리화, 강화하고 대중이나 활동가들을 억누르거나 주체성을 억압하는 경향을 보일 것이다. 관료주의 내부의 반 경향으로서 대중성의 강조는 이런 경향과 궁극적으로 타협하고 그 내부에서 급진적 기회주의로 전락하고 만다. 한국의 좌파 블럭 활동가들에게서 보이는 것이 이런 좌파 기회주의이다. 여기서 강조해야 할 점은, 활동가나 연구자 모두가 같이 대중들의 실천적 이데올로기에 우선 주목하고, 연구하며 교육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고, 이 과정에서 형성되고 변형되는 노동자계급 문화와 그것의 대중적 운동을 통한 조직적 확산과 교육이 주요한 노동자 계급운동의 정치적 실천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것이 바탕되지 않은 채, 현실 실천의 긴박성이 운동에서 강조된다면 그것은 단지 상상적이고 허구적인 것일 뿐이다. 결국 운동에서 논쟁과 반성, 대중적 계몽이 올바르게 실천될 수 있어야 한다.
4. 맺음말 주지하다시피 96,97 총파업과 IMF 이후 대중들의 고용보호 투쟁 분출에 편승한 노동운동 엘리트 집단들의 정치적 조직화는 가속화되었다. 이 글에서는 사실상 이처럼 급속한 정치적 조직화의 이면에는 후진국 엘리트 집단들의 관념론적 조급성과 슬로건에 기초한 대중 정치관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런 해석에서 좌파 엘리트 집단들의 경우도 예외라고 할 수 없다. 특히 이 집단들은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을 슬로건화 하는데 성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의 본질적인 성격에 대한 엄밀한 논의와 노동자 계급의 상태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그에 기반한 노동자 대중의 일상에 천착한 장기적 안목의 새로운 운동 실천의 개발은 뒤로한 채, 여전히 슬로건을 통한 정치 동원과 정치 조직화의 형식적 모델 추구, 그리고 도식적 전술들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또한 대부분의 정치조직 역시 대중조직과 다르지 않게 관료주의적 조직모델에 근거한 조직 형식화와 더불어 권력 물신주의에 빠진 파행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정치 세력화에 대한 관심 속에서 실종된 것은 노동자 계급 상태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다. 이런 상황 하에서는 설사 노동자 상태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나온다고 해도 당장 이용할 만한 슬로건이나 조직화를 위한 정책안으로 구체화하지 않는 경우에는 전혀 주목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정치운동의 거의 유일한 교사로 간주되고 있는 레닌의 경우에도 러시아 농민의 상태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수행한 바 있지 않는가? 그러나 레닌 이후 1세기가 지난 현 시기에 구체적인 분석과 논의 없이 즉, 운동 실천의 별 다른 내용 없이 어떻게 변혁적 정치운동이 가능할까 의문스럽다. 그 귀결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아주 가공스러운 그 어떤 역사적 경향의 반복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런 질문은 서구논의 엿보기, 베끼기만 일삼고 수사적 기교에만 치중하는 좌파 연구자 집단에게도 마찬가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구체적 연구와 논의의 실종은 운동에서 ‘대중’이나 ‘현장’이 구호로서 강조되지만 결코 현실화되거나 극복되지 않는 대중과의 괴리 혹은 계급 주체형성의 곤란이라는 문제로 드러난다. 마치 단위노조나 연대투쟁 파업들이 노조간부나 노동운동 엘리트들만의 파업이 되고 말듯이, 정치 세력화 혹은 정치적 조직화는 단지 노조운동을 비롯한 소수 정치운동 엘리트들만의 상상적 실천으로 그치고 만다. 엄밀한 이론과 구체적인 분석의 결여는 마치 아나코-생디칼리스트들처럼 결코 혁명적이지 않은 상황 하에서 마치 혁명적인 상황인 것처럼 급진적으로 행동하게 하거나, 반대로 혁명적인 시기에 안정적인 시기의 행동패턴을 답습하는 우를 범하게 할 수 있다. 자신이 보고자하는 경험적 증거에만 의존하는 실용주의적 운동관행은 노동자문화와 노동자 교육의 실천적 중요성을 보지 못하게 한다. 현 시기 이론 및 실천운동에 필요한 것은 엘리트적 관념성에 빠진 채 지나쳐버린 10년의 실종된 기간을 반성적으로 검토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과 이를 극복하려는 치열한 노력이 아닐까? 노동자 계급 대중들의 일상적 삶의 모습이 ‘실제로’ 어떠하고, 희망하는 삶과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이며, 그들의 실천적 이데올로기들은 어떤 것들이 있으며, 또한 어떠한 문화적 형식들을 형성해 왔으며, 제 계급들과의 관계에서 어떠한 정체성을 중심으로 자아를 주체화해 왔으며, 경제적 상태는 어떠한지에 관한 연구들이 너무나도 부족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