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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때의 諸宰(여러재상)들 중 70세이상 되신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십삼명이 계를 모아 어머니를 즐겁게 해 드린 잔치를 열어(1605년) 그림으로 남겼는 데 이것이 병화로 소실되어 50년 후(1655년) 다시 그렸는데 그것이 바로 본 慶壽宴圖이다.
남원윤씨 13세 공조판서 휘 돈(暾 /찬성공 휘 극신의 二子)은 貞夫人 完山李氏와 두 아들 衡俊, 衡哲을 대동하고 어머니 貞敬夫人 固成南氏(당시八十 歲)을 모시고 참석했음. (원본사이즈24*34 / 고려대박물관소장).
慶壽宴節目(경수연절목)
乙巳(1605)四月 日
잔칫날 辰時에 모두 모여서 稧員들이 가마를 타고, 大夫人을 모시고 오고 여러 子弟들이 해뜰 무렵에 와서 모이면 여러 大夫人의 相見禮를 자리 위에서 禮를 행한다.
여러 大夫人이 參拜하는 禮貌.
여러 大夫人이 자리를 정 한 뒤에 차례로 서서 한번 절한다.
稧員 및 여러 子孫들의 參拜하는 禮貌.
먼저 인사를 드린 후에 堂에 올라가서 두 번 절하고 獻壽한다. 稧員에 한해서 모두 獻壽한 뒤 매양 두 사람씩 짝이 되어 들어가 춤을 춘다. 여러 夫人의 獻壽 與否는 날씨를 보아서 그 臨時해서 의논해서 처리한다. 모든 禮節과 致辭는 모두 늙은 醫女로서 한다. 각 宅의 侍婢와 侍側은 두 사람을 지나지 않는다.
大夫人의 자리 次序
晉興君의 大夫人 坡平尹氏 貞敬夫人 癸未生.
李同知의 大夫人 仁川蔡氏 貞夫人 甲子生.
錦溪君의 大夫人 善山林氏 貞敬夫人 辛卯生.
尹判書의 大夫人 固城南氏 貞敬夫人 戊戌生.
洪同知의 大夫人 聞慶白氏 貞敬夫人 戊子生.
韓參判의 大夫人 平山申氏 貞夫人 壬辰生.
南參判의 大夫人 居昌申氏 貞夫人 丙申生.
驪興君의 大夫人 李氏 貞夫人.
尹僉知의 大夫人 漢陽趙氏 貞夫人 甲申生.
權僉正의 大夫人 金氏 貞夫人 戊寅生.
次夫人의 座席順序
晉興君의 夫人 東萊鄭氏 貞夫人 乙巳生.
李同知의 夫人 全義李氏 貞夫人 戊戌生.
錦溪君의 夫人 驪興閔氏 貞敬夫人 庚午生.
尹判書의 夫人 完山李氏 貞夫人 癸丑生.
洪同知의 夫人 安東金氏 貞夫人 甲寅生.
韓參判의 夫人 昌原黃氏 檜山府夫人 辛酉生.
南參判의 夫人 羅州丁氏 貞夫人 壬戌生.
驪興君의 夫人.
尹僉知의 夫人 淸州韓氏 淑夫人 乙卯生.
權僉正의 夫人.
稧員
晉興君 姜 紳 字는 勉卿 號는 東皐 丁卯司馬試에 壯元으로 及第, 丁丑 別試에 壯元으로 及第, 癸卯生 晉州人.
錦溪君 朴東亮 字는 子龍 號는 梧窓 己丑司馬試에 及第 庚寅增廣 試에 及第. 己巳生 羅州人.
判 書 尹 暾 字는 汝昇 號는 竹堂, 己卯司馬試에 及第. 乙酉式 年試에 及第. 辛亥生 南原人.
同 知 洪履祥 字는 元禮 號는 慕堂 癸酉司馬試에 及第했고 己 卯式年試에 壯元及第 己酉生, 豊山人.
參 判 韓浚謙 字는 益之 號는 柳川 己卯生員試에 壯元及第 丙戌 別試에 及第 丁巳生 淸州人.
參 判 南以信 字는 子有 號는 直谷 戊子司馬試에 及第 庚寅增廣 試에 及第 壬戌生 宜寧人.
同 知 李 遽 字는 仲尙, 號는 南村 壬子司馬試에 及第 癸丑庭試 에 及第 壬辰生 新平人.
晉昌君 姜 絪 字는 仁卿 己丑司馬試에 及第 乙卯生 晉州人.
驪興君 閔中男 字는 直夫 辛酉司馬試에 及第 壬申別試에 及第 庚 子生 驪興人.
僉知 尹壽民 字는 仁叟, 號는 洛濱 壬午司馬試에 及第, 癸未謁 聖試에 及第 乙卯生 坡平人.
僉正 權 詗 字는 仲悟 號는 一直 戊辰司馬試에 及第 己亥別試 에 及第 辛丑生 安東人.
主簿 李 薳 字는 彦尙 癸卯生 新平人.
翊衛 姜 紞 字는 聞慶 己未生 晉州人.
入侍한 子弟
李僉知 文筌 字는 子馨 辛酉生 新平人.
李奉事 文蘭 字는 佩應 庚午生 新平人.
李康翎 文昌 字는 季馨 己卯生 新平人.
韓都事 善一 字는 克敬 癸酉生 淸州人.
尹參奉 衡哲 字는 應明 丁丑生 南原人.
洪監役 汝亮 字는 潛甫 丙子生 南陽人.
尹獻納 讓 字는 士謙 癸酉生 己亥庭試及第 坡平人.
權宣傳 若 字는 敬由 丁卯生 安東人.
執事의 일을 본 子弟
李紋蓂 字는 明應 戊午生 新平人. 李文賓 字는 韶應 乙丑生 新平人.
姜弘德 字는 處厚 丙寅生 晉州人. 洪汝翼 字는 直甫 壬申生 南陽人.
尹衡俊 字는 應任 壬申生 南原人. 金 鑊 字는 大仲 壬申生 順天人.
李文憲 字는 樂而 新平人. 洪 雴 字는 景時 丁丑生 豊山人.
韓會一 字는 亨甫 庚辰生 淸州人. 姜弘勣 字는 君懋 庚辰生 晉州人.
姜弘定 字는 而靜 辛巳生 晉州人. 沈廷和 字는 寅甫 辛巳生 靑松人.
洪 潗 字는 景澤 壬午生 豊山人. 洪 霙 字는 澤芳 甲申生 豊山人.
洪 寶 字는 汝時 乙酉生 豊山人. 韓興一 字는 振甫 丁亥生 淸州人.
南斗瞻 字는 汝昻 庚寅生 宜寧人. 權 勛 字는 汝嘉 庚寅生 安東人.
南斗煥 字는 可晦 辛卯生 宜寧人.
예조에서 올리는 글(禮曹啓辭)
乙巳(1605)四月初九日에 禮曹에서 글을 올리는데 晉興君 姜紳, 工曹判書 尹暾. 同知 洪履祥. 吏曹參判 韓浚謙. 刑曹參判 南以信. 驪興君 閔仲男. 兵曹僉知 尹壽民, 掌樂 僉正 權詗의 이름도 적어 올렸다.
“엎드려 아뢰옵건 데 엎드려 뵈오니 李遽의 母親 貞夫人 蔡氏가 금년에 나이가 一0二歲이온데 특별히 養老하는 恩寵을 입었사오니 榮光됨이 비할 바가 없사옵니다. 紳등도 또한 偏母가 있아온 데 모두 七十歲가 지났사오니 紳의 어미 貞敬夫人 尹氏는 나이가 八十三歲이 옵고, 暾의 어미 貞敬夫人 南氏는 나이 八十歲 이옵고 履祥의 어미 貞夫人 白氏는 나이 七十八歲이옵고, 浚謙의 어미 貞夫人 申氏는 나이 七十四歲이옵고, 以信의 어미 貞夫人 愼氏는 나이 七十歲이고, 中男의 어미 貞夫人 李氏는 나이 八十四歲요, 壽民의 어미 趙氏는 나이 八十二歲 이옵고, 詗의 어미 金氏는 나이 八十八歲입니다. 이들은 모두 聖世의 孝道로 다스리는 때를 當하여 나라의 祿으로 奉養하는 영화를 얻게 되었사오니 한번 契를 모아서 함께 나라의 恩惠를 즐기겠다하오니 이는 聖人의 정치의 風化 속의 한 가지 좋은 일인가 하옵니다. 청컨대 聲樂을 禁하지 마시어 區區한 어버이를 위하는 孝誠을 펴게 하시어 크게 孝道로 다스리는 風化를 열어 주는 것이 어떠하오리까?” 했더니 임금은 狀啓대로 시행하라고 했다.
백세채대부인(百歲蔡大夫人)의 경수연도서(慶壽宴圖序)
대체로 南極星이 빛을 더하면 세상에 高齡이 많은 것은 곧 사람이 복을 후하게 받아서가 아니고 실상은 時運이 좋은 때를 만나서 한 시대의 큰 德化가 있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옛날 宣祖 萬曆 癸卯(1603) 봄 正月에 禮曹參議 李公 遽의 大夫人 蔡氏의 나이 百歲가 되었는데 宣祖께서 厚하게 상을 내리시고 또 李公을 嘉善大夫에 승진시켜 漢城府右尹을 除授해주시고 또 이로서 先代에게 영화를 더하여 公의 아버지 世純에게 吏曹參判을 贈職하고 蔡夫仁을 參判公의 벼슬에 맞추어 貞夫人에 封했다.
이에 公은 謝恩箋을 올리자 임금은 가상히 여기는 批答을 내리고 史官에게 명령하여 史草에 기록하라 하시니 한세상이 이를 영화롭게 여겼다. 얼마 안되어 公은 刑曹參判이 되었는데 이 해 가을 九月에 公은 성대하게 잔치를 벌여 大夫人의 長壽를 축하하기 위하여 널리 이름난 公卿大夫들을 초대하자 온 조정이 모였으니 이는 聖恩을 자랑스럽게 여긴 때문이었다. 子孫들이 衣冠을 차리고 잔치의 음식을 바치는 자가 또한 수십 명이었다.
이에 그 일을 그림으로 그려서 傳家의 보물로 삼았더니 三年이 지난 乙巳여름 四月에 西平府院君 柳川 韓公이 마침 參判이 되어서 여러 宰相들에게 통고하기를, “우리가 각자 어머님을 받들고 있으니 百歲의 夫人을 모시고 獻壽하는 것이 마땅하다”하자 모두 좋다고 했다.
이리하여 늙은 어머니가 나이 七十歲 이상인 자의 子弟들이 함께 契를 모았는데 이들은 晉興君 姜公 紳, 錦溪君 朴公 東亮,
判書 尹公 暾, 同旨 洪公 履祥, 參判 韓公 浚謙, 參判 南公 以信, 晉昌君 姜公 絪, 驪興君 閔公 中男, 僉知 尹公 壽民, 僉正 權公 詗, 翊衛 姜公 紞과 李公의 아우 主簿 薳등 모두 十三名이었다.
이 일이 朝廷에 알려지자 특별히 八道에 令을 내려 잔치에 쓸 諸具를 돕게 해 가지고 長興洞 좋은 집에 모이니 이를 慶壽宴이라 했다.
蔡 夫人이 百歲로서 북쪽 壁에 앉고 晉興君의 大夫人이 命婦로서 자리를 같이하여 主壁이 되고 그 나머지 여덟 분의 大夫人이 次序대로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 앉고 여러 夫人의 數도 또한 大夫人의 數와 같이 각각 大夫人의 뒷줄에 나누어 앉았다.
이때 그들이 타고 온 가마가 골목을 메웠고 여러 가지 風樂을 모두 울리는 데 여러 宰相들이 차례로 앞에 나와 잔을 들고 차례로 일어나서 獻壽하니 보는 자들이 부러워해서 말하기를 “세상에 없는 장한 일이다”했다.
대개 百歲의 上壽는 진실로 절대로 없는 일로서 드물게 있는 일인데 더구나 一堂에 모인 그밖에 慶宰相의 大夫人의 나이 七十歲 이상인 분이 아홉 분에 이르렀으니 어찌 얼마나 장하단 말인가. 여러 家門의 福祿의 높은 것은 실로 하늘에서 받은 것이지만 이는 또한 聖君의 시대에 繁昌 한때를 當하여 함께 長壽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宣祖大王께서 이를 襃獎하고 恩惠를 내려 주었으니 또한 천년동안의 드문 대우라 하겠다.
蔡夫人은 열다섯 고을의 고을살이를 하는 子孫의 奉養을 누리다가 103세에 病들지 않고 卒했다. 끝의 아들은 主簿로서 아홉 번이나 고을을 다스렸는데 한 아들이 있으니 文憲으로 여러 번 郡邑을 다스리다가 나이 八十에 嘉善大夫에 오르자 그 아들 灌에게 이르기를 “내가 百歲 大夫人의 孫子로서 慶壽宴 때를 당해서 일을 보는 子弟들의 班列에 參與해서 장한행사를 친히 보았는데 불행히 그 그림이 兵火에 없어지고 당시에 일을 보던 子弟들도 또한 모두 죽었고 오직 내가 아직 살아있을 뿐이나 이에 늙으니 이제 그 지난 자취를 전하지 못하면 후세에 보여줄 것이 없다. 그러니 그림을 그릴 畵工을 請하여 그림을 그리고 그 일을 기록하여 帖을 만들어 오래도록 傳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 너의 責任이니 너는 힘쓰라”하였다.
이에 李公 灌이 나에게 序文을 請하는데 나는 재주가 없으니 어찌 충분히 그 사실을 펼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감동한 바가 있으니 우리 형제도 또한 일찍이 兩親을 모시는 즐거움이 있었고 仁祖朝 때에 여러 공들 중에 兩親을 모시고 있는 자와 함께 壽宴의 자리를 마련하기로 약속했다가 마침 가뭄이 몹시 심해서 避殿의 下敎가 있어서 한번 도 자리를 열지 못했고 계속해서 初喪을 당해서 함께 일찍 父母를 여윈 아픔을 가졌고 子弟의 생존한 자도 또한 많지 않아서 그 당한 운수가 전후가 다를 것이 없는데 어찌해서 그 다행하고 불행한 것이 서로 다를 것인가.
두 어버이를 모시는 것이 큰 慶事이기 때문에 造物主가 시기해서 방해하는 것인가. 나같이 不肖한 자가 정성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같은 慶壽宴의 장한 행사를 듣고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이에 차마 그 간절한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드디어 눈물을 거두고이 서문을 쓰노라. (完山 後人 李景奭씀. )
경수연도서(慶壽宴圖序)
萬曆 35년(1607/만력30년 1602년의 착오 인듯함) 가을에 承政院에서 아뢰기를 前 參議 李遽가 늙은 어머니가 있어 이제 나이 99歲이오니 聖人의 다스림에 있어 마땅히 養老하는 恩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임금이 感動하시어 厚하게 賞을 내리시고 다음해 正月에 이르러 傳敎를 내려 말하기를 “李遽의 어미가 올해 百歲라 하니 금년 첫봄에 祿米를 내려 해마다 주도록 하고 그 아들에게 벼슬을 더하여 상으로 주라했다. 이에 李公은 嘉善大夫에 進級해서 同中樞를 거쳐 右尹 을 삼고 三世를 推恩해서 大夫로 加資가 되었고 이내 刑曹參議가 되었다가 드디어 京畿觀察使가 되었다.
이에 그 해9월에 잔치를 베풀고 獻壽하는데 여러 公卿大夫와 百官의 長들이 모두모여서 그 慶事를 보니 서울에서 노래가유행하기를 “어머니로 해서 아들이 貴하게 되고 아들로 해서 어머니가 貴하게 되었으니 아름답도다. 壽하는 어머니에 그 아들은 高官大爵일세”했다.
이때 卿士大夫중에 大夫人이 있어 奉養하는 자가 십여 집이 되었으니 晉興君, 錦溪君, 尹判書, 韓參判, 洪中樞, 南參判, 李中樞, 晉昌君, 驪興君, 尹僉知, 權少政, 姜翊衛, 李主簿 등 모두 열세사람이었다. 이들은 이듬해 四월에 큰잔치를 베풀어 그 壽를 축하하기로 하고 이것을 이름하여 慶壽宴이라 하고, 이로 인해서 임금께 고하자 임금은 상을 더 내리시고 各道로 하여금 그 잔치에 쓸 물건들을 돕게 했다.
그 날이 되자 춤추는 사람과 樂工을 내리시어 즐겁게 해주었다.
그 자리의 차례는 百歲의 大夫人이 上壽로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았으며 姜相國의 大夫人 貞敬夫人 尹氏가 命婦로서 가장 귀하기 때문에 함께 큰방에 南向으로 앉고 그 아래 여덟 부인은 각각 나이 순서대로 차례를 정해서 東西로 서로 마주보고 앉았으며 잔치를 모시는 여러 夫人들은 각각 大夫人 뒷줄에 차례로 앉아서 이에 次序를 잡고 禮가 끝나자 晉興君 이하 여러 公들이 모두 당에 올라 두 번 절했다.
이때 대체로 자손들이 衣冠을 하고 잔치를 모신이가 18人 인데 僉知 李文筌과 獻納 尹讓이 가장 벼슬이 높았다. 거기에 執事의 班列에 있던 자가 또 19人 인데 각각 次序대로 잔을 올려 祝壽하니 風樂이 바야흐로 울리고 管樂과 絃樂이 절도에 맞게 불고 치는데 노래 소리는 위로 올라오고 춤추는 자는 아래로 내려간다.
당시의 일은 史官이 이미 모든 史冊에 기록했고 그 일이 많이알려 져서 민간의 父老들이 서로 전하여 美談으로 여긴지 이에 50여년이 되었다. 이제 韓參判은 仁祖反正후에 이르러 왕후의 아버지로서 귀한 벼슬인 領敦寧에 이르고 尹僉知는 大司憲이 되었고 權少政은 掌令이 되었고 李中部公은 嘉平太守가 되었고 尹獻納은 中書가 되었고 李僉知는 節度使가 되었으며 여러 執事들의 子孫도 또 政丞이 된 자가 한사람이요 朝服을 입고 벼슬에 오른자가 7人이요 臺省이 된 자가 한사람이요 시골고을에 守領이 된자가 6人이다.
그러나 지금은 諸公이 모두 죽었고 오직 李中樞 와 南錦山 만이 세상에 있는데 李中樞公은 百歲夫人의 親孫子로서 이제 나이 八十二歲인데 일찍이 두어 고을에 守領을 지냈고 壽職으로 벼슬이 승진되어 中大夫(嘉善)가 되었다. 錦山公은 南參判의 큰 아들로 나이가 가장 적으나 또한 白髮로 刑曹의 參議를 거쳐서 일찍이 錦山 太守가 되었다.
百歲夫人은 前古의 名人 蔡公 壽의 姪女로서 弘治甲子(1504)에 나서 萬曆丙午(1606)에 卒하였으니 三萬六千 甲子를 살아서 나이가 103歲가 된다고 한다.
觀察公은 77歲에 죽었고 두 누님이 모두 96歲가 넘었으며 中樞公이 또 80餘歲가 되었으니 가위 長壽하는 집이라 할 것이다.
中樞公의 아들 灌이 그 아버지의 명령으로 그 일을 그림으로 그리고 또 여러 공들의 官爵과 성명 年次를 기록해 가지고 陽川 許穆에게 序文을 부탁해 왔다. 崇禎紀元後 乙未(1655) 五月 許穆 씀.
慶壽宴圖影印刊行後記
南原尹氏는 坡平에 그 근원을 두었는데 高麗 壁上三韓翊贊功臣 三重大匡 太師公 諱 莘達의 七代孫 이신 國字司業 湖南廉察使 西京留守尙書右僕射 諱 威께서 南原으로 本貫을 삼으시니 南原尹氏의 始祖이시다.二世 金紫光祿大夫判戶部尙書政堂文學修文殿太學 文平公 諱 克敏.三世 侍中 咸安公 諱 敦, 四世 閤門祗候判民府事 禮曹典書公 諱 英贊, 五世 門下評理公 諱 守均, 六世 匡靖大夫 門下評理 行 工曹典書 諡 忠簡公 諱 璜, 七世 嘉靖大夫 咸吉道 觀察使公 諱 臨,八世 繕工監奉事公 諱 之得,九世 贈 左承旨 行 軍資監判官公 諱 訔,十世 贈禮曹參判 行 光州牧使公 諱 時英으로 이어졌으며, 孫子十三世 資憲大夫 工曹判書 諡 孝貞公 諱 暾은 1551년에 태어나시고 1579년에 生,進俱中하고 1585년에 文乙科에 登科하시어 觀察使, 工曹判書,禮曹判書를 지냈다.
을사(1605년)四월에 判書 尹 暾이 대부인이신 정경부인 固城南氏(당시 팔십세)를 모시고 경연에 참석하였는데, 判書 暾의 부인 정부인 完山李氏(계축생)과 두 아들 衡俊(갑술생), 衡哲(정축생)을 대동하였다. 判書公 暾은 실전 되었던 忠簡公 諱璜의 의 묘역을 尋墓하여 諱 璜을 비롯한 諱 臨등 여러 조상의 묘를 찾고 墓表를 세워(만력35년/1607년)오늘까지 보존되고 있다. 본 종중에서는宜寧南氏傳家敬翫圖 (의령남씨전가경완도/고려대박물관소장) 도록을 底本으로 영인본을 간행하게 되었다. 禮曹啓辭, 慶壽宴節目, 慶壽宴圖序등의 國譯은 풍산홍씨 대종회에서 복간한‘宣廟朝諸宰慶壽宴圖’의 내용을 引用하였음을 밝혀둔다.본 영인본을 편집제작하신 長燮監事께 감사드립니다.
남원윤씨판관공(은)파종중
회장 윤 철 호
첫댓글 장섭 감사님, 귀한 자료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돈자 할아버지께서는 복 받으신 분인 것같아요. 어머니모시고 두아들 데리고 경연에 참석하셨으니 얼마나 행복하셨을까요..
앞쪽 그림이 기존의 이미지보다 한층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이 도록을 저본으로하여 경수연도도첩을 제작중입니다. 경수연도도록을 직접 구입하시어 보내주신 철호회장님, 정호간사께 감사드립니다.
3월13일 이면 며칠 안 남았네요.. 대부님 수고많으셨습니다.~`
10월26일 영인본 영사전에 2층 전시실에 전시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