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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지석묘와 유물들이 발견되는 마을
일로읍 광암1리 광암 마을
광암리는 일로읍에서 몽탄쪽으로 811번 지방도로를 타고 3㎞ 쯤 가다 마주치게 되는 일로농협미곡처리장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만나는 마을이다. 몽탄면 양장리와 접하고 있으며 옆 마을인 산정리에는 일로농공단지가 있다. 예전에 마을 앞으로는 호남선 철도가 지나갔으나 현재는 폐선부지로만 남아있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노촌면 廣巖里로 나오며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일로면 光岩동으로 나온다. 지명의 유래는 마을 뒤에 넓은 바위가 있다하여 광암 또는 반동이라 불렀는데 일제시대 들어와 廣巖이 현재의 光岩으로 바뀌어져 쓰이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운동, 석정, 등림동, 진사동, 반동, 산정리 일부를 병합 광암리라 하여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었으나 현재는 광암 등림 등 두 개의 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광암은 광암1리에 속하는 마을로 마을 뒷산에 넓은 바위가 있어 주민들은 이 바위에서 마을일을 의논하고 흥겹게 놀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은 매봉산줄기를 배경으로 하여 상광암, 하광암, 청운동(천동이라고도 부름)으로 이루어졌다. 마을 형성 당시에 마을에서 마주 보이는 월출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마을 앞에 샘을 파 비보하기도 하였으나 현재에는 지하수 개발로 샘이 없다.
입향유래나 마을의 형성과 관련된 사실은 자세하지 않지만 주민들은 처음에 인동장씨가 살았으며 그 후에 전주 이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마을에는 장씨와 이씨에 관련된 흔적들이 남아있다. 그리고 현재 살고 있는 나주임씨, 밀양박씨, 이천서씨 등은 200여년 전에 차례로 들어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무안지망집을 보면 일로읍 광암리 나주 임씨 입향조로 林 타(1593 - 1664, 선조대 사람, 호-몽촌, 나주인)를 기록하고 있으나 나주임씨중앙화수회에서 발행한 ‘몽촌 임타 유고집’에는 말년에 일로 복용리에 관해정을 짓고 유유자적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 광암리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입향시조와 성씨자료에는 이 마을 밀양 박씨 입향조로 박상진(朴商鎭, 자-명수 순조 代 사람)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나주 삼도면에서 세거하다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곳으로 왔다. 자료에서 ‘공은 문장이 화려하고 지절이 고상하여 청운의 계획을 일삼지 아니하고 향리의 자제들을 가르치며 이단에 유혹되지 아니하고 세상을 은거하며 마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에게는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같은 마을로 淸雲洞(靑雲洞)이 있다. 지명의 유래는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바다 안개가 마치 구름과 같은 형상이 되어 피어오른다 하여 청운동이라 하였다’ 한다. 박씨들이 광암 마을에서 분가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얼마 전까지 마을에 삼향면 유교리의 나상옥과 비교되는 임성택이라는 천석꾼이 살았다. 주변사람들이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답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집에는 네 개의 문이 있을 정도로 넓고 규모가 컸다. 현재는 사랑채 등은 없어지고 6칸의 본채만 남아있다.
마을의 지형이 남향의 소쿠리 형으로 아늑한 느낌을 준다. 영산강 둑이 막히기 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지형이다. 그러한 이유때문인지 마을 주변에는 지석묘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노루바윗재라 부르는 미곡처리장 주변에 12기의 지석묘와 바윗재라 부르는 인동장씨 민묘 주변에 9기의 지석묘가 있다. 또한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한 자료를 보면 마을 뒤 밀양박씨 선산에 6기의 지석묘를 확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잡목이 우거져 있어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중에서 큰 지석묘는 길이가 4미터 70이 되는 것도 있다. 또한 지석묘 위에는 선사시대인들이 별자리를 관측하던 흔적으로 보이는 구멍들이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마을 주변의 등성이에는 고총(古冢)들이 흩어져 있어 가끔 경운기가 빠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특히 마을 뒤의 밭에서는 빗살무늬 토기를 비롯하여 화살촉, 돌도끼, 접시 그리고 특이한 형태의 기왓 조각 등이 많이 발굴되었다. 마을에서는 이렇게 발굴된 각종 유물들을 마을에 있는 일로동초등학교에 보관하여 아이들 교육용으로 전시하여 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유물들이 도난당했거나 소실되어 현재는 보잘 것 없는 유물들만 전시되어 있다.
마을에 있는 일로동초등학교는 처음 환학동에서 시작하여 1946년에 용산리 농장마을에서 일로남국교로 개칭한 뒤, 1957년에 현재의 자리에서 일로동국교로 그리고 얼마 전에 일로동초등학교로 개칭했다.
마을 주변에 남아 있는 지명들이 많이 있다. 마을 앞 잔등인 거문고등, 향나무가 있다 해서 상나무(향나무)골이 있으며 예전에 배가 들어왔던 곳을 나타내는 배들이. 방고동, 구수둠벙 등이 있다. 또한 청운동 주변을 이문안들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전주이씨들의 문중 들[野]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마을에 흉년이 들었을 때 개떡 한 덩이와 논 한 방구를 바꿨다는 개떡배미, 골짜기가 옥동자처럼 생겼다 해서 옥산골, 장구처럼 생겼다 해서 장구배미 등이 있으며 초분골, 개들, 금태(석정)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마을 앞에는 광암정사라 이름 한 개인집도 있다.
78세대 211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숲속에 등잔불이 켜 있는 것 같이 보이는 마을
일로읍 광암2리 등림 마을
光岩里는 일로읍에서 몽탄 쪽으로 811번 지방도로를 타고 3㎞ 쯤 가다 마주치게 되는 지역으로 일로농협 미곡처리장 주변에 마을들이 있다. 몽탄면 양장리와 접하고 있으며 옆 마을인 산정리에는 일로농공단지가 있다. 예전에 里 앞으로 호남선 철도가 지나갔으나 현재는 폐선부지로만 남아있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노촌면 廣巖里로 나오며 일제강점기에 廣巖이 현재의 光岩으로 바뀌어져 쓰이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운동, 석정, 등림동, 진사동, 반동, 산정리 일부를 병합 광암리라 하여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었으며 현재는 광암 등림 진사동 등 세 개의 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광암 마을의 노루바윗재라 부르는 미곡처리장 주변에 12기의 지석묘와 등림마을 바윗재라 부르는 인동장씨 민묘 주변에 9기의 지석묘가 있다. 또한 진사동 뒤 개산은 동학과 관련된 사건이 있었던 곳이다.
숲속에 등잔불이 켜 있는 것 같이 보이는 마을
등림은 광암2리에 속하는 마을로 검태 마을과 같은 행정구역으로 언젠가는 숲으로 올라간다는 지명 유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 유래는 登林이라는 지명의 한자에 맞춰 풀이한 것으로 보인다. 마을유래지에서는 ‘마을 뒷산에 숲이 우거져 있어 이곳에서 마을 어른들이 모여 자주 마을일을 의논하며 여러 성씨가 의좋게 지내므로 마을 이름을 등림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 마을이 등잔에 불을 켜놓은 것같이 생겼다 하여 등림이라고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마을회관 앞 표지석에도 ‘이웃 마을에서 보기에 숲속에 등잔불이 켜 있는 것 같이 보인다 하여 등림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나주 정씨이다. 산정리에서 살던 정씨가 옆 마을인 검태를 거쳐 이 마을에 정착한 것이 130여 년 전으로 보인다.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려 했으나 족보를 볼 수 없어 정리하지 못했다. 마을유래지에서는 ‘입향유래는 자세하지 않으나 대략 300년 전에 나주 정씨, 여양 진씨 등이 숲이 울창하고 농사 짓기에 알맞은 곳이라 여겨 터를 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회관 앞 표지석에도 400여년 전에 자리를 잡았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었다.
문헌으로 살펴 본 마을의 역사는 짧다. 조선시대 각 마을의 지명을 정리했던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나오지 않는다. 1912년의 자료에 비로소 일로면 等林洞으로, 이어 1917년의 자료에도 일로면 等林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후 1987년의 자료에는 현재의 한자 표기인 일로읍 登林으로 나온다.
등림은 매봉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마을의 지형이 쥐가 샘을 찾아 물을 마시러 오는 형국이다. 해서 지금 살고 있는 터도 새암골(새앙쥐골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라 하고 있다.
전국에서 최초로 취락구조 개선 사업을 실시
이 마을은 원래 마을 앞 811번 도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곳에는 세 가구가 살고 있는데 1978년 새마을 사업 중 주택개량 사업의 일환으로 정부 지원을 받아 현재의 자리로 이주한 것이다. 당시 지원금은 200만원으로 전국에서 최초로 취락구조 개선사업을 실시한 것이다. 현재도 등림마을은 주거환경 개선의 새마을 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하는데 모범적으로 시행한 마을로 알려졌다.
당시 새터라 불리던 현재의 자리에 16가구가 이주했는데 당시의 세대수가 지금도 변하지 않고 16가구를 유지하고 있다. 집의 구조도 18평과 20평이었는데 당시 주민들이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던지 200만원의 융자금을 생전에 갚을 수 있을까 염려할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은 융자금도 다 갚고 가구당 빚이 없는 마을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811번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 좌우에 효열각이 있다. 하나는 1935년에 세운 함평이씨열부비각이다. 이씨는 어려서부터 효순한 성품으로 규문의 덕을 쌓았다. 정계교에게 출가 와서는 시부모를 정성으로 모시고 먹고 싶은 음식이 있다하면 어떻게든 구해드리고 마음을 편하게 해드렸다. 시집 온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이 병에 걸려 자리에 눕자 후원에 단을 쌓고 밤마다 목욕재계하며 낫기를 기원했다. 남편 사후에도 시부모를 정성스럽게 모셨으며 아들 교육에도 혼신의 힘을 다했다. 손자가 후일 이런 할머니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또 하나는 풍천임씨효열비각이다. 임씨는 정기백 처로 그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1977년 세웠다. 또한 아직 비각이나 효열문은 세우지 않았으나 3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시부모를 극진히 모셔 효부상을 받은 사람도 현재 거주하고 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때 일로 제일의 농악을 자랑한 농악대가 있었다. 원래 일로 농장 마을의 농악을 알아주기는 하나 이 마을에 미치지는 못한다고 한다. 특히 주민들은 이 농악대의 노력으로 광암 마을의 일로 동 초등학교 설립 비용을 마련한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당시에 일주일 동안 농악대가 마을마다 다니면서 설립 비용을 마련한 것이다.
마을 앞 구길 주변에 고인돌이 있다. 바윗등이라 부르는 곳에 9개의 고인돌이 있는데 원래는 도로 양측에 20여기가 있었으나 농업진흥공사 현장사업소가 들어서면서 11기의 지석묘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가장 큰 지석묘의 형태는 장방형이며 길이 310 × 220의 규모이다. 진사동을 제외한 광암리 주변에는 수십 기의 고인돌이 산재해 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복개산 간대골 연지나무골 검바윗골(검밧골) 너릿바웃재 배다리 등의 이름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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