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기 686년 봄.
고구려 평양성이, 대동강 흐르는 물에 모란봉 꽃잎이 날아와 떨어지듯 역사 흥망의 물속에 잠기고, 유서 깊은 부여성에서 고중상의 고구려 군과 당나라 잔류군의 처절한 일대 혈전이 벌어진지도 어언 열여덟 해가 지났다.
당나라 계성薊城(북경동편)의 이른 봄은 아직 매서웠고 분위기는 냉랭했다. 그곳에는 망해버린 고구려와 백제의 후예들, 신라인, 말갈인靺鞨人, 한족, 거란인, 해족 등등 다양한 민족이 더불어 살아가며 힘에 의해 외견상의 안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사람들의 내부는, 차가운 외부와 달리 화산의 속처럼 들끓고 있었다.
고 가 장 高 家 莊.
계성의 북문 밖에서, 거대한 반산盤山 산악 줄기를 등에 지고 고즈넉이 앉아있다.
깎아 세운 듯한 기암들과 기기묘묘한 절경에 수천 년의 신비곡神秘谷까지 담고 있는 반산은, 북쪽의 김해호金海湖를 반기며, 옛 가야의 후예들이 개척한 땅인 듯한 상상을 자아낸다.
반산은 장엄 위태한 풍경으로 주위를 압도하는 한편, 넉넉하고 풍요로운 토양으로 인간에게 많은 열매를 선사하는 낙원의 땅이다. 반산 지역에서 생산되는 감, 밤, 대추, 배 등이 주변 수 백리 지역의 인민들을 먹이고도 넉넉하게 남았다고 한다.
낭만과 풍요와 천험과 기이함을 동시에 배태하고 있는 반산의 남쪽 기슭에, 그와 동일한 분위기를 나타내는 고가장이 우뚝 서 있다.
고가장에는 어떤 낭만의 시와 음악이 있고, 천험의 무예가 있고, 풍요와 부강함과 기기묘묘한 이국의 신비로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고가장은 그곳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다. 그곳은 누가 보더라도 한눈에 고려나 신라 사람이 사는 대저택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팔작지붕, 사랑채와 안채, 문간채, 기타 전각들의 질서정연한 배열, 드높은 용마루와 추녀마루, 하늘로 치솟은 치미와 처마, 대문의 삼태극三太極 문양, 단청丹靑 등이 이를 웅변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울창한 숲이 장원을 에두르고 있었는데, 환꽃나무 군락과 모란의 바다가 일품이었다. 환꽃(무궁화)은 단군 이전 신시神市(환웅임금의 도읍지로서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뜻) 배달국 시대부터 우리 겨레가 애지중지하던 하늘의 꽃이다.
그러므로 우리 조상들은 이 꽃을, 하늘이 점지해 주신 꽃, 하나님을 가리켜 주는 꽃이라는 의미에서 천지화天指花라고도 불렀다. 환꽃은 나라의 얼이자 민족의 표상이었다.
모란은, 대부여 임금 해모수와 번조선 공주 기진의 후예이자, 고주몽의 혈통이기도 한 고가장의 노장주老莊主 고승高丞의 가문이 선대로부터 대대로 소중히 가꾸어오던 가문의 꽃이다.
모란 줄기의 투박한 거칠음과 모란꽃의 황홀 미려함은 심한 대비를 이룬다. 고난 중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라는, 즉 괴로운 역경을 이기고 찬연한 심성과 학문, 무예의 꽃을 발현시키라는 선현들의 암시가 그런 애호 속에 담겨 있었다.
훗날 대진발해국인들은 환꽃과 모란을 몹시 중시해 집집마다 이를 길렀으며 부유한 집은 정원을 환꽃과 모란의 바다로 만들곤 했는데, 이런 전통은 그 땅을 차지한 신라 김씨 왕족 후예 김金나라(금나라) 시대까지 이어졌다<송막기문松漠紀聞>.
바야흐로 붉은 색과 황색의 모란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이 다가오면, 계성 북문 밖, 반산 아래 고가장은 아름다운 낙원처럼 보일 터다.
고가장의 서남쪽 관도 상에서 한 젊은이가 아직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건마 위에 위풍당당하게 앉아 반산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무예로 단련된 듯, 칼날처럼 번득인다. 꿈에도 그리던 고가장은 산등성이에 막혀 아직 그의 시야에 나타나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뭉클한 가슴을 부여안고 한참동안이나 계성과 반산을 둘러보다가 다시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허리에 찬 보검에서 검수劍穗가 바람에 펄럭이며 한 떨기 꽃을 그린다.
인마人馬가 혼연일체 되어 몇 리를 달리자 이윽고 산기슭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고가장이 안전眼前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고가장원을 바라다보는 젊은이의 눈빛이 마치 낙원에라도 들어가고 있는 듯 희열과 설렘으로 반짝거린다. 삼태극 대문이 드디어 그의 눈앞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그는 대문 앞에 서자마자 소리를 지르려다 말고 호흡을 한 차례 가다듬은 후 주변을 찬찬히 둘러본다. 이태 전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무성한 환꽃나무 군락, 모란나무 바다. 고가장의 화려영묘하고 위풍당당한 정취. 가슴을 펴고 그는 고향의 향취를 마음껏 호흡했다.
그의 입에서 다소 떨리는 목소리가 힘차게 흘러나왔다.
“할아버지!”
하인 부르는 소리보다 “할아버지” 소리가 먼저 나왔다.
안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리며 하인의 얼굴이 나타난다. 그는 눈앞에 서 있는 준수한 젊은이를 잠시 동안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꿇어 엎드려 절한다. 하인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거린다.
“아이고! 소장주님小莊主님 아니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노장주님께서 아침 일찍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
젊은이는 말을 하인에게 넘기고 줄달음질을 친다. 나이 팔십여 세 되어 보이는 미목이 청수한 한 노인이 사랑채 건물 안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가 젊은이의 얼굴과 위아래를 훑어보며 말한다.
“영榮아가 많이 컸구나. 그래 태항산太行山의 노사老師는 건강하시냐?”
“네, 할아버지. 할아버지께 안부 여쭙는다고 이르셨습니다.”
“그래, 그래. 어서 들어가자.”
노인은 젊은이를 데리고 자신의 처소로 가는데, 젊은이가 대견스러운 듯 연신 전신을 훑어본다.
“그 동안 무슨 공부를 했느냐?”
할아버지의 물음에 젊은이는 겸손히 대답했다.
“글공부 외에 무예를 더욱 깊이 익혔습니다.”
“태항산의 노스승께서 뭐라 하시더냐? 어느 정도 진보를 이룩했는지 묻는 말이다.”
“스승님께서는 제가 할아버지께 무예의 기초와 학문의 터전을 이미 완숙하게 닦았으므로 자신은 별로 가르칠 게 없다고 이르셨습니다.”
“그래? 과장이 심했구나. 그럼 새로운 것은 전혀 배우지 않았다는 말이냐?”
“네. 그냥 두루두루 책을 읽고, 다물임금의 <행심록幸心錄>과 해모수 임금의 <삼극팔괘무학三極八卦武學>을 더 깊이 연마했습니다. 특히 군사를 운용하는 병법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재작년 그곳에 처음 갔을 때 스승님께서는 제게 이걸 주시며 머릿속에 완전히 외우라고 이르셨습니다.”
그는 등에 걸머지고 있던 보따리에서 책 세권을 꺼내어 노인 앞에 내려놓았다. 책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행심록의해 幸心錄義解
노인은 책을 아무데나 펼쳐서 훑어보았다. 다물 임금의 <행심록>은 문장이 매우 압축적이고 문의文意가 심오해 해석하기가 극히 곤란한 글이었다. 이 책은 <행심록>의 글 자자구구를 아주 상세하게 풀어놓고 있었다.
글을 읽는 노인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가득해졌다.
“오, 이런! 이 글 속에 이런 심오한 뜻이 있었구나. 난 미처 터득하지 못했는데, 그 늙은 여인네가 어찌 이토록 깊게 통달했단 말인가?”
“할아버지, 저의 스승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제가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알 필요 없다. 단지 그분은 일개 여인이지만 남자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학문과 무예를 익힌 분이란 것만 알고 있으면 된다.”
노인이 잘라 말했다.
“제가 떠나올 때 스승님은, 이제 다시 자신을 찾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스승님은 그곳을 떠나가신다고 하셨어요.”
노인은 그 말에 다소 충격을 받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가 신음소리를 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떠나갈 테면 떠나라지. 이미 한 번 떠났는데 어디로 가든 무슨 상관일까?”
아마도 노인은 젊은이의 스승이라는 그 여인과 무슨 깊은 인연이 있는 듯했다.
노인이 잠시 상념에 잠기다가 젊은이에게 물었다.
“영아야, 네 나이가 올해 몇이냐?”
“네, 스물입니다.”
“그렇군. 네가 열여덟 살 이맘때에 태항산으로 떠났는데, 꼬박 이태가 지났구나. 세월이 무심無心하다. 아, 하지만 또 너를 이렇게 훌륭한 헌헌장부로 키웠으니 세월은 유심幽深하기도 하구나.”
노인은 얼굴에 일말의 허무감과 아울러 기대감을 잔뜩 지닌 채 젊은이를 응시했다.
“그럼 할아버지, 세월은 좋은 건가요, 나쁜 건가요?”
“늙은이에게는 나쁜 거고, 어린이에게는 좋은 것처럼 생각될 수 있지. 하지만 세월은 해歲와 달月을 이르는 게 아니더냐? 해와 달이 나쁜 거냐 좋은 거냐?”
“만물을 기르니 참 좋은 겁니다.”
“그래. 세월은 아주 좋은 거란다.”
젊은이가 다소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묻는다.
“연세 많은 할아버지 같은 분들에게는 세월이 원망스럽게 느껴지지 않나요?”
“허허,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지혜가 장성하고 또 그 심령이 이 땅보다는 돌아갈 저 하늘에 맞는 체질로 바뀌어 가니, 세월은 누구에게나 참으로 소중하고 좋은 거란다.”
“그래도 지금의 세월은 우리 고려(고구려)인들에게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 같습니다.”
“사실이다. 그래서 너희 같은 젊은이가 이제 좋은 세월을 만들어가야 한단다.”
“저 같은 필부가 어찌 세월을 바꿀 수 있습니까?”
“필부라 하지 마라. 너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고려의 당당한 대장부다. 알겠느냐?”
노인이 엄숙한 표정으로 힐책했다.
“네, 할아버지. 조심하겠습니다.”
노인은 곧 안면을 펴며 인자하게 웃는다.
“세월은 원래 좋은 거니, 악한 세월을 원래대로만 바꾸어 놓으면 된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젊은이는 노인의 말이 쉽사리 납득되지 않았으나 이내 굳건하게 대답했다.
“불초손이 명심하겠습니다.”
노인이 얼굴에 만월 같은 웃음을 가득 담아냈다.
“영아야, 며칠 쉬었다가 모처럼 나와 함께 사냥을 나가지 않겠느냐?”
조영祚榮은 금새 명랑한 빛을 띠며 환호성을 질렀다.
“야호!”
“원, 녀석도 사냥이라고 하면 옛날부터 사족을 못 쓴다니까. 그동안 갈고 닦은 네 기마술과 활솜씨도 보여 줄 수 있겠지?”
“할아버지를 실망시켜 드릴까 심히 염려됩니다.”
노옹의 인자한 얼굴에 웃음이 가득 번진다.
고가장의 미명未明은 여느 때나 다름이 없었다. 거대한 장원의 칠흑 속 웅크림은 여러 마리 흑호黑虎 무리와 같다. 그 곳에 서서히 새벽빛이 비쳐오면, 점차 위압감이 줄어들지만, 그래도 장엄한 자태는 한층 돋보이고 완연히 날이 새면, 장엄미와 함께 섬세미, 화려미가 사람들의 이목을 심하게 잡아끈다.
이런 진전이 이루어지기 전, 활과 검으로 무장한 한 무리 인영이 경쾌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새벽을 알리는 듯, 거대한 흑호의 무리 속에서 빠져나와 북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조부와 함께, 무예로 단련된 장정 몇 명을 거느리고 계성의 북문 밖 별천지를 향해 말을 달리는 조영의 얼굴은 아름답게 상기되어 있었다. 조영은 말을 타고 가면서 온갖 위험천만한 말 타기 기술을 선보였다.
말 위로 올라서는가 하면 달리는 말 위에서 물구나무를 서고, 말 아래 배로 내려가 있다가 다음 순간 말 등으로 올라오고 전후좌우 자유자재로 몸을 돌리며 여러 자세를 취함과 동시 화살을 날리는 시늉을 했다.
조영이 말 위에서 갖은 기교를 부리자 뒤를 따라 달리던 그의 조부는 대견하고 만족스러운 듯 얼굴 가득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일행이 반산동편의 산악 줄기를 따라 수십 리를 지나자 드디어 웅장한 장성長成의 관문에 도달한다. 황애관黃涯關이다.
황애관은 북제北齊(550-577) 때에 축조되었다고 한다. 북제는 고구려 왕족 발해 고高씨의 후예인 고양高洋이 세운 국가다. 그의 아버지 고환高歡은 발해 수현 사람이었다.
관문을 나서면 아름다운 산악의 풍경이 안전에 끝없이 펼쳐진다. 아직 곳곳에 눈이 녹지 않아 하얀 얼룩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조영은 홀연 호연지기가 끓어올라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었다. 나뭇가지에 앉아있던 새들이 놀라 푸드득 날았다.
“오늘은 웬일인지 기분이 아주 좋은 게 꽤 귀중한 사냥감을 얻을 것 같구나.”
조영이 옆에 바짝 따라 붙은 시종에게 말했다.
“작은 나리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빕니다.”
“넌 사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조영의 엉뚱한 질문에 시종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사냥은 들짐승과 새 따위를 잡는 것이 아닙니까?”
“왜 그것을 잡지?”
“먹기 위해서나 팔기 위해서요.”
“단지 그 이유뿐이라면, 우린 먹을 것과 돈이 부족해서 이 일을 한다는 뜻이겠지?”
“아, 네. 그럼, 인생의 흥미와 즐거움을 높이고 생의 의욕을 고양시키기 위해서요? 아니면, 전쟁 대비 훈련을 위해서요?”
“그것도 맞겠지. 하지만 말이다. 난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네.”
“······?”
“진짜 사냥은, 사람을 잡는 거라고.”
“네?”
하인이 놀라 펄쩍 뛰었다.
“사람을 잡다뇨? 무슨 말씀입니까?”
조영이 시종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글쎄. 나도 그 뜻을 모르겠어.”
“오늘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잘못하다가 화살로 사람이라도 잡는 날엔 우린 모두 저승행입니다.”
“글쎄다. 그런 생각은, 전에 한 번도 뇌리에 떠올려 본 적이 없는데, 참으로 이상하단 말이다. 네 말대로 불길한 조짐이 아닐까?”
“우리가 조심한다면 별 일이야 있겠어요? 어쩌면 사냥하다가 좋은 사람을 얻을지도 모르죠.”
“좋은 사람?”
“작은 나리의 안마님이요.”
“예끼, 이놈아, 사냥터에서 어떻게 얌전한 규수를 만난단 말이냐?”
“하하하! 누가 알아요? 산야를 휩쓸고 다니는 젊은 여장부를 만날지도.”
조영과 동갑내기이자, 이태 전 태항산까지 동행했던 시종이 반 농담으로 스스럼없이 자기 속을 털어놓았다.
이튿날, 조영 일행은 점심을 먹은 후 할아버지와 다른 시종 둘이 한 조를 이루고 조영과 그의 시종이 또 한 조를 이루어 서로 흩어져서 산중으로 들어갔다. 조영과 시종은 꿩을 여러 마리 잡고 노루도 잡았다.
그들이 산 중턱을 따라 오솔길로 내려오고 있을 때다. 앞쪽에서 흰 꿩 한 마리가 갑자기 날갯소리를 내며 날아올랐다. 활에 살을 재어 이리저리 겨누고 있던 조영이, 때를 놓칠 세라 신속히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그 하얀 꿩에 적중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 마리의 보라매가 날아오더니, 공중에서 꿩을 낚아채는 것이었다. 그건 찰나지간에 일어난 일이다. 꿩이 화살에 맞고 보라매가 꿩을 낚아챈 것은, 간발의 차였다. 그리고 그 때를 맞춰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휘이익, 휘이익!”
휘파람 소리와 함께 꿩을 낚은 해동청이 어디론가 날아갔다.
깜짝 놀란 조영과 시종은 보라매가 날아간 방향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가 휘파람 소리가 그쪽에서 들려왔음을 깨닫고 그 곳으로 신속히 달려 내려갔다.
잠시 후에 조영이 눈여겨 앞을 바라보니, 뜻밖에도 마치 눈 속에서 나온 듯한 한 여인이 수목 사이로 자태를 드러냈다.
조영이 자세히 살펴보니, 그녀는 갈기와 꼬리가 파르스름한 백색 청총마靑驄馬 위에 하얀 색 옷을 입고 머리에 담비털인 듯한 털모자를 쓴 채 의젓하게 앉아 있었는데, 허리에는 활과 전통箭筒을 걸었으며 다른 쪽 허리에는 장검을 차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약 십팔구 세가량 밖에 되지 않은 듯한 마상의 어여쁜 여인은 차가운 기운에 고귀한 기품을 풍기고 있었다. 그녀가 매서운 눈초리로 이쪽의 조영을 쏘아보더니, 말없이 왼손을 말 뒤쪽으로 내밀었다.
조영이 그녀의 뒤를 주시해보니, 한 준수하고 건장한 사나이가 역시 마상에 버티고 앉아, 부리부리한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사나이의 어깨에는 머리와 등이 새파란 한 마리 청매가 앉아있었고, 사나이의 손에는 흰 꿩이 들려 있었다.
청총마 주인에 청매를 얹은 종이라.
이효광李孝光의 <요인사렵도遼人射獵圖>에 나온다는 시구는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읊은 것이리라.
美人貂帽玉驄馬 미인초모옥총마
誰其從之臂鷹者 수기종지비응자
담비 모자 미인이 백마를 탔구나
따르는 자 누구인가 팔위에 송골매라
그 꿩의 몸에는 화살 한 대가 꽂혀 있었다. 조영은 그 꿩이 바로 자신이 잡은 사냥물임을 직감했다.
백마상의 여인이 뒤로 손을 내밀자, 눈이 부리부리한 이 사나이는 그녀의 뜻을 알아차린 듯, 말에서 내려 그녀 곁으로 다가와 손에 잡고 있던 꿩을 공손히 두 손으로 받들어 그녀의 좌수에 올려놓았다.
그녀가 손에 잡은 꿩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이쪽을 향해 물었다.
“이 꿩은 당신의 화살로 잡은 건가요?”
의외에도, 그녀의 말은 거란족 언어였다. 조영은 그 말을 알아들었다. 조영의 어머니가 거란의 한 부족 왕녀였으므로 그는 어머니에게서 거란어를 배워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영은 거란어를 쓰지 않고, 고구려말로 대답했다.
“그 화살을 내가 직접 확인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오.”
고구려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 백마 상의 백의녀는 인상을 약간 찌푸리더니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종인 듯한 사나이를 바라다보았다.
그녀가 사나이에게 몇 마디 말을 하자, 사나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아가씨, 저 사람은 고려 사람인 듯한데, 유감스럽게도 저는 고려 말을 잘 모릅니다.”
마상의 백의녀가 다시 조영을 바라보며, 이번에는 한어漢語로 물었다.
“당신은 혹시 거란 말이나 한어를 아시나요?”
조영이 그녀의 한어를 알아듣고 역시 고려어로 대답했다.
“음, 안다고도 할 수 있고 모른다고도 할 수 있소.”
“에이, 도대체 무슨 말이죠?”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다가 생각난 듯 또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여미아麗美雅! 여미아는 어디 있니? 이리 빨리 와봐라.”
그녀의 말끝에 한 여인이 뒤에서 올라왔다. 그녀는 앞 두 사람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으므로 조영은 뒤에 여인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마상에 앉은 여인의 왼편에 서서 허리를 숙이며 거란어로 대답했다.
“아씨, 부르셨습니까?”
“여미아, 너는 아직 고려어를 잊지 않고 있느냐?”
“예, 약간 할 수 있사옵니다. 아씨.”
“그럼 네가 통역 좀 해 봐라. 이 사람에게 물어다오. 이 꿩을 잡은 것이 본인인지 아닌지.”
여미아라 불린, 청총마 여주인의 몸종인 듯한 여인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조영 쪽을 바라보며 목례를 한 후 고려어로 말했다.
“공자님, 저희 아씨께서 물으십니다. 이 꿩을 잡은 게 공자님 본인이신지를.”
조영이 그녀를 보니, 그녀는 얼굴을 깊이 가린 너울을 쓰고 있었고, 거의 눈만 내보이고 있었다. 겉에는 털옷을 입고 있었는데, 목에는 뜻밖에도 물고기 모양의 노리개가 달린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이런 목걸이는 조영의 어머니도 소지하고 있었으므로, 조영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은 경교도景敎徒(당나라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신도들) 여성들이 흔히 사용하는 목걸이였다.
(다음회로 계속)
**********
샬롬.
2023. 5. 27. 아직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