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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 4 | |
혼인의 영속성: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혼인의 거룩한 상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의향은, 오늘날 혼인하는 사람들이 작은 글자로 인쇄해 놓은 탈출 문구(법적인 서류에 사인하는 일)로 혼인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혼인 생활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바라십니까? 혼인 예식서의 대답은 다음과 같은 인용문으로부터 분명합니다.
혼인 제정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께서 오늘날에도 서로에게 남편과 아내를 주신다고 믿습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장중에서 하나가 되었으므로, 아무것도 이생에서 이들을 나누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그의 영광을 드러내셨을 때도, 혼인을 존중하셨습니다. 그는 혼인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제도이며, 깨뜨려서는 안 된다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19:6)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혼인을 이렇게 강력한 유대 관계로 만드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19:9)라고 말씀하시면서 이혼을 미워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인용된 본문은 마태복음 19장 6절과 9절입니다.
혼인 서약
결과적으로 신랑과 신부 두 사람은 “당신은 좋을 때나 좋지 않을 때나,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 당신 두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서로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답하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태초에
앞장에서 다루었듯이, 혼인 예식서의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신랑 신부의 대답은 전혀 놀랍지 않습니다. 주 하나님이 남자를 창조하시고, 그를 에덴동산에 두셨고, 그다음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다”라고 결론을 내리셨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돕는 배필”(창2:18)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담이 그의 아내를 유기하거나, 아내가 없어도 혼자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아내를 돌려보내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이해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상황을 다르게 분석하셨기 때문입니다. 비슷하게 하와도 자신이 남편 곁에 있을 수 없다거나, 아니면 더 많은 자유를 원한다는 근거로 남편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남자를 위해 그녀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장 24절에서 성령께서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하신 말씀은 혼인 관계를 끝낼 여지를 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남자와 아내가 끝도 없이 서로 달라붙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혼인 제도를 창조하셨을 때, 그는 분명히 출구 전략을 의도하지 않으셨습니다. |
죄 가운데로 떨어진 뒤에 혼인이라는 거룩한 상태에 막대한 파괴적인 결과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금지하신 실과를 먹은 일에 대해 하나님이 물으셨을 때(창3:12), 아담은, 자신이 하와의 머리임에도, 하와를 아주 쉽게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분명히 에덴동산의 그림이 아니라, 실제로 타락한 모든 인류의 특징이 되어버린 이기심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각기 타락하여 공히 자기중심적인 두 죄인이 이제 불행한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지가 제공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대선지자이며 교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세기 2장에 계시된 하나님의 규범이 여전히 이 타락한 세상에 유효하다고 주장하시는 말씀을 읽으면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새인이 예수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막10:2∼9)라고 물었습니다. 예수의 답변 요지는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였고, 예수께서 이어서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였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어떤 본문을 인용하셨는지 잘 압니다. 예수께서 창세기 2장에 계시된 하나님의 규범이 죄 가운데로 떨어진 뒤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주장하십니다! 타고난 죄성에도,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꼭 달라붙어야 합니다. 관계가 불행해지면 물러서도 된다는 개연성의 여지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 2장에 대해 앞에서 말했던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이것은 주님께서 혼인이 영구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넉넉히 증명합니다. 따라서 혼인한 사람은 그들의 연합이 합법적으로 빠져나갈 문이 있다는 가정 아래에서 혼인식 때 서약한 것이 아닙니다.
이혼은 혼인 예식서가 작성되었을 당시에도 잘 알려진 실체였습니다. 그래서 혼인 예식서를 만든 분들이 이 예식서에 이 주제에 대한 하나님의 교훈의 중요한 사항을 포함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이혼법의 자유화로, 이혼이 서구사회에 일상이 되어 혼인한 많은 사람이 “죽음이 신랑과 신부를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그들의 서약을 고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의 하나님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도 이런 추세가 영향을 끼칩니다. 따라서 혼인의 영속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더 자세하게 살펴보는 것이 유익합니다. 이어지는 바에서, 나는 독자가 먼저 간략하게 교회사를 개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다음 우리는 성경에 묘사된 대로 하나님의 유비를 상고하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혼(과 재혼)과 관련된 특수한 본문들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합니다.
교회사에서 혼인의 영속성
초대교회
초대교회 때부터 혼인이 영속적이었다는 데 분명한 일치가 있었습니다. 일단 배우자에게 헌신하겠다고 맹세하자마자, 수없이 마주하는 제각각의 도전에 이 맹세로 굳게 결속해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에서 이혼이 허락된 유일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마태복음 19장에서 말씀하신 바대로, 간음이라는 문맥 안에서만 가능했습니다. 사실상 일부 교부들은 간음이라는 사건에서, 신실한 배우자가 이혼 소송을 제기해도 되고, 그다음에는 혼인하지 않은 채로 지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3세기 동안, 로마 가톨릭교회는 혼인을 성례로 만들었습니다. 가톨릭교회가 이렇게 하면서, 효과적으로 간음의 상황에서도 이혼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는 열악하게 혼인 생활하는 사람이 계속 혼인 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너무 힘들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불행에 대한 동정심과 상식을 근거로, 에라스무스는 이혼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비슷하게 이혼 후에 독신으로 살도록 제한하는 것도 너무 힘들기에, 이혼한 사람에게 재혼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종교개혁
사람으로 사람에 대한 공감과 목회적인 필요가 주된 개혁자들로 이혼(과 재혼)을 허용하도록 촉진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배우자의 간음과 유기와 성관계를 지속해서 거부할 때, 이혼이 성립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다른 개혁자들은 이혼이 허용될 수 있는 사유를 더 길게 만들어 제출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혼인 생활을 파기하는 두 가지 근거만 성경과 일치하게 유지되었습니다. 하나는 마태복음 19장 9절의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토대를 두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고린도전서 7장 15절의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라는 바울의 말에 토대를 두었습니다. 두 가지 사항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4항에 들어있습니다.
5. 약혼 후의 간음이나 간통은 혼인 전에 발각되면 순전한 편에서 파혼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가 된다. 혼인 후에 범한 간음의 경우 순결한 편에서 이혼 소송을 제기해도 합법적이며 이혼 후에 마치 불결했던 자가 죽은 것처럼 다른 사람과 혼인해도 합법적이다.
6. 비록 인간의 타락함이 커서 연구할 논란의 대상이 되고 하나님이 혼인으로 짝지어 주신 자들도 부당하게 나누어지기 쉽지만, 간음 또는 교회가 국가 행정기관도 구제할 길이 없도록 고의적으로 버린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혼인 유대를 취소할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다. 이혼할 때는 공적이요 순서 있는 절차를 밟아서 하고 관계된 사람들이 자기 뜻대로 하거나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일을 처리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이 전체적인 유형 교회에, 그리스도께서는 사명과 예언과 하나님의 규례들을 두셨으니 이는 성도들을 불러 모으고 이생에 있는 성도들을 세상 끝날까지 완전하게 하려 하심이다. 그리고 그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자신의 임재와 성령에 의하여 그 모든 것이 역사하게 만드신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간음과 고의적인 유기, 두 가지 근거로 이혼을 허용할 때, “무죄한” 배우자를 위해 재혼의 문을 열어둔다는 사실도 주목하십시오.
최근
16세기 종교개혁 이래로 400년 동안, 서구 기독교 세계는 일관되게 이혼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단지 아주 드물게 이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불가피하게 당해 가정에 오명을 남겼습니다. 세계 2차 대전 후 속화로 이혼에 대한 대중의 평가와 혼인의 영속성에 대한 필요도 변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들어, 이혼이 더 흔하게 되면서, 세 쌍이 혼인하면, 한 쌍은 이혼합니다. 세상에서 혼인과 관련하여 이런 쇠퇴가 교회 안에서 예측할 수 있는 결말을 낳아, 최근에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이혼율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혼율이 증가하면서 하나님이 실제로 혼인의 영속성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셨는지를 재고하도록 합니다. 두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해보십시오.
▶ 긴장으로 인해 그리스도인 남편과 아내가 갈라선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은 간음하고자 하는 유혹과 맞서 싸웁니다. 역사적인 이해에 의하면, 이혼은 성경에서 허용되지 않았고, 그래서 재혼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독신으로 살든지 아니면, 화해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해야 했습니다.
▶ 긴장으로 인해 그리스도인 아내를 다른 남자의 품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역사적인 이해에 의하면, “무고한” 남편은 아내의 간음 때문에 이혼 송사를 통해 재혼할 수 있고, 지금 이후로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는 집요한 죄를 통해서, 합법적인 재혼의 문을 열어놓았습니다. 역으로, 아내는 그의 연약한 시기를 통해서, 전남편에게 합법적인 재혼의 문을 열어놓았습니다.
혹자는 여기에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것입니다. 1993년에 우리 화란 자매 교회 총회는 성경이 실제로 이혼과 재혼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를 연구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몇몇 위원회가 다음 몇몇 총회에 보고서를 낸 후에, 2005년 총회는 몇 가지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주님이 혼인을 제정하셨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강력한 유대 관계가 사람들에 의해 단절되어서는 안 됩니다(창2:24;말2:14∼16;마19:3∼12;고전7:10∼11). 이혼은 가능한 한 막아야 하고 저지되어야 할 심각한 죄악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에 일치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혼인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어려운 현실에서, 우리가 화해와 관계 회복을 위해 애써야 한다는 뜻입니다.
2. 만일 혼인이 죄의 결과나 죄 가운데로 떨어지는 일로 손상된다면, 회개와 죄 용서와 화해를 통해서 혼인 관계의 유대 회복을 추구하거나, 아니면 자기 부인을 통해 가능한 한 혼인 유대 관계를 유지하여 예수를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혼을 묵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분명해질 수 있습니다.
3. 혼인의 유대관계가 사실상 끝난 형편에서, 형식적으로 혼인 관계를 여전히 유지하고, 또 배우자가 (공식적으로) 함께 합의하거나, 별거를 결정하는 해결책을 선택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왕국과 가장 일치하는 태도입니다.
4. 심지어 위에 언급된 형편에서라도, 혼인 서약 맹세는 배우자 두 사람이 생존하고 있는 한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래서 이혼 후 재혼은 원칙상 그리스도의 왕국 스타일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5. 원칙적으로 이전 혼인이 이혼을 통해서 종료되었다면, 후속 혼인에 대한 교회의 제재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런 추이가 네덜란드 개혁교회에 의해 문서화로 남겨진 일을 환영합니다. 사회가 이혼의 문을 활짝 열고 재혼할 기회를 충분히 주었던 반면에, 자매 교회의 총회는 이혼을 크게 좌절시켰고, 교회에서 재혼할 문을 효과적으로 차단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하나님 계시를 훨씬 더 정당하게 다루는 것입니다. 다음 글을 통해 이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유비에서 혼인의 영속성
주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창1:27)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류(이는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별 짓는 것이기도 하다)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세상에 반영하는 큰 특권을 위탁받았습니다. 거룩한 혼인이라는 상태에서 남자와 그의 아내는 하나님의 품성의 일부를 반영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죄인된 백성을 거부하지 않으셨고, 그들에게 하신 약속을 취하하지도 않으셨습니다. |
족장들
주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관계에서 어떤 분이십니까? 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그를 “큰 나라”로 만드시고,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참으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2∼3) 아브람이 받은 약속은 참으로 과분했습니다! 기근으로 인해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갔고, 그의 생명에 위협을 느껴 그의 아내에게 “너는 나의 누이라고 말하라”(창12:13)라고 명했습니다. 아브람의 속임에도 불구하고 주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셨고(창15장), 자녀를 주시겠다고 반복해서 약속하셨습니다(창16장). 아브람의 간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을 취소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고 그가 아브람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17장). 요지는 이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무가치함과 죄됨에도, 주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을 고수하셨습니다. 주 하나님은 자신을 자비롭고 신실하시고, 그의 약속과 관련하여 변함이 없는 신뢰할만한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적인 품성들이 하나님이 야곱에게 다가가실 때 똑같이 드러납니다. 야곱의 유아 시절, 주 하나님이 야곱과 더불어 사랑의 언약을 세우셨고, 태어난 지 8일만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주장하신다는 표와 인으로 할례를 베푸셨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의 형 에서가 궁지에 내몰렸을 때, 그에게서 장자권을 가로챘고(창25:29∼34), 나중에 장자권의 복을 받기 위해서 그의 아버지를 속였습니다(창27장). 그의 경건하지 않은 행동에도 불구하고, 주 하나님이 야곱에게 하신 그의 약속을 취소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그의 돌봄과 복으로 그를 계속 감싸셨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언약으로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그들은 압제로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수24:24). 하지만 주님은 그의 죄된 백성을 제거하지 않으셨고, 그들에게 하신 약속을 무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한없는 자비로 그의 말씀을 고수하시고, 이 백성을 종살이에서 건져내셨고, 이스라엘과 다시 언약을 세우셨고, 약속의 땅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약속하셨던 그대로 말입니다.
이스라엘과 혼인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고수하시는 그의 신실하심이라는 이 주제는 하나님이 친히 혼인에 대해서 이를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관찰할 때 훨씬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를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16:8) 옷으로 어떤 이를 덮었다는 것은 혼인 관계에 들어갔다는 상징적인 표현이었습니다(룻3:9).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과 세우신 언약은 효과적으로 이 백성과의 혼인 유대관계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예레미야 3장 14절에서 “나는 너의 남편이니라”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이런 부부관계라는 실재가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언어 선택에 영향을 끼쳐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실 때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혼인한 직후인 이미 시내산에서, 주님은 그의 백성에게 모세를 통해서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라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면 반드시 죽이되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 나도 그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그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이는 그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어서 내 성소를 더럽히고 내 성호를 욕되게 하였음이라 그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는 것을 그 지방 사람이 못 본 체하고 그를 죽이지 아니하면 내가 그 사람과 그의 권속에게 진노하여 그와 그를 본받아 몰렉을 음란하게 섬기는 모든 사람을 그들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레20:2∼5)라는 경고를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여기에서 “음란하게”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계신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음란하다는 단어는 자구적으로 창기라는 뜻입니다. 암몬 족속의 신인 몰렉에게 자녀를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을 영적인 간음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이미 혼인 언약으로 자신이 묶여 있는 남편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죽기 전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의 백성의 장래의 행실이 이렇게 될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신31:16). “너는 네 조상과 함께 누우려니와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요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라.” 사실상 이스라엘이 진짜로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처신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그들이 그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며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길에서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더라.”(삿2:11∼17) 이 문맥에서 하나님이 음행하며(창기노릇하며)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그들의 죄된 마음과 이스라엘의 남편이 받은 상처도 묘사합니다. 여기에 간음, 고통, 그리고 분명히 그의 배우자에 대한 신부의 불신실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죄의 고통은 그의 남편이 그를 버리고, 새 반려자(모압 족속이나 중국이나 터키)와 관계를 맺도록 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약으로 반려자가 된 이스라엘에 일관되게 신실하셔서, 사사를 보내어, 그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은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어 경고하시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난날에 “결단코 버리지 않으며, 좋은 날이나 궂은 날이나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 버리지 않겠다”리고 약속했던 약속을 고수하시기 위해 그렇게 많은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이 문맥에서 하나님이 “창기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그들의 죄된 마음과 이스라엘 남편의 상처를 모두 설명합니다. 여기에 분명하고도 솔직하게 그의 배우자에게 불신실한 신부 즉 간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
하지만 주님이 그의 약속을 고수하실 때도, 이스라엘의 행실에서 회개를 초래하도록 모종의 극단적인 조치를 하셨습니다. 주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호1:2)라고 명하셨습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통해서 자녀를 낳아, 그의 이름이 예언적으로 하나님이 그의 불신실한 아내에게 어떻게 하시고자 하시는지를 선언하셨습니다. 한 자녀는 로루하마라는 이름을 받았는데, 히브리어 의미로 “사랑받지 않은 자”라는 뜻입니다. 또 다른 아이는 히브리어로 로암미, 즉 “나의 백성이 아니다”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이 이름들은 그의 기만적인 신부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을 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이혼할 준비를 하고 계신다는 것을 암시하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는 경이로움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그[이스라엘] 수치를 그 사랑하는 자의 눈앞에 드러내리니”(호2:10)라고 하시면서, “바알들을 섬긴 시일대로 내가 그에게 벌을 주리라”(호2:13)라고 하셨다고 하더라도, 주님은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호2:14∼15)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신실하지 못한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또 그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셨을 때 맹세하신 약속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이혼
선지자 예레미야는 훨씬 더 예리하게 이 문제를 짚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과거와 관련하여, 주님께서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그의 소산 중 첫 열매이니 그를 삼키는 자면 모두 벌을 받아 재앙이 그들에게 닥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의 집 모든 족속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네가 옛적부터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종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너는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렘2:2∼5,20)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드디어 북 10지파에게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까지 주셨습니다.”(렘3:8) 북이스라엘을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실 때도, 그의 불신실한 신부에게 손을 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배역한 이스라엘은 반역한 유다보다 자신이 더 의로움이 나타났나니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라”(렘3:11∼13)라는 메시지를 선포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은 이 이혼을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끝내고자 의도하지 않으시고, 신부에게 얼마나 절실히 회개하고 행동을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수단으로 의도하셨습니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렘3:14;54:5∼8;사62:4∼5)
이것이 주님께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내어 버리신 이유가 아닙니까? 그들의 영적인 간음을 포함하여, 이스라엘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 위에 두시고, 이 죄가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이 그리스도에게 쏟아졌습니다. 십자가에서 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대속자와 이혼하셨고, 이렇게 하여 예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라고 외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거절당하셨기에, 이스라엘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불신실한 신부에게 여전히 신실하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신약
신약에, 하나님은 여전히 혼인 이미지를 사용하여, 그와 그의 백성의 관계를 설명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자신을 “신랑”(마9:15)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11:2)라고 했습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 혼인이 “심오한 비밀”라고 썼습니다. 그 이유는 혼인이 “그리스도와 교회”(엡5:32)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늘에 있는 엄청난 군중이 주님께서 성취하신 사역에 대해서 즐거워하면서,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계19:7;21:2,9)라고 노래했습니다. 하지만 신부가 하나님이신 그의 남편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신약 교회는 구약 교회보다 더 신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그의 신부를 위한 신랑의 갈보리 십자가의 희생 때문에, 신랑이 친히 신부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19:8)을 줄 수 있었습니다.
교훈
이스라엘의 남편과 아내들은 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했었습니까? 신약시대 남편과 아내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혼인에 어떻게 반영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배우자에게 신실하지 못할 때 하나님을 닮는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만일 배우자가 삼자와 관계를 맺는다면, 무죄한 배우자가 혼인에서 손을 씻어버리고 자유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 손을 씻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스라엘의 남편으로서 그의 책임을 계속 수행하신 것처럼, 이스라엘의 남편과 아내들도 완고한 배우자에 대해서 손을 씻을 자유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서 손을 씻지 않으신 것처럼, 이스라엘의 남편들도 길을 잃은 배우자에게서 손을 씻을 자유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 그의 손을 씻지 않으셨듯이, 이스라엘의 남편들도 완고한 그들의 배우자에 대해 손을 씻어서는 안 됩니다. |
이 사실이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그의 신부인 교회를 교회가 마땅히 받아야 할 바대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누가 감히 교회가 오늘날 영적인 간음에서 자유롭고, 이성이나 부나 대중의 존경심이라는 우상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오늘도 그의 신부에게 자비를 베풀고 계신 것처럼, 남편과 아내는 혼인 식에 서약했던 바를 기억하고 지키십시오, 시편 15편에 나오는 다윗의 말은 인상적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이 신실하지 못한 신부와 관련하여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놀라운 일은 맹세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풍성히 부어지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갈5:22) 하나님은 혼인을 얼마나 영구적이도록 의도하셨습니까? 하나님은 혼인을 “우리 두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영구적으로 의도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를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롬7:2∼3)라고 적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같은 사실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말2:16)라고 했습니다.
성경 본문에 나타난 혼인의 영속성
혼인과 이혼을 이야기하는 개별의 본문들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패러다임을 확증합니까, 폄하합니까? 우리는 구약성경의 두 구절을 검토한 다음 신약성경으로 눈길을 돌리고자 합니다.
구약
먼저 주님의 말씀 어디에도 이혼을 명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이 파산된 삶에서 이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인식하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님께서 제사장이 “이혼한 여인과 혼인해서는 안 된다”(레21:14;레22:13도 참조하라;민30:9)라고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24장
이혼과 관련하여 주님께서 특별히 지시한 본문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신24:1∼4)
예수님 당대에 바리새인들은 이 본문을 읽고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막10:4)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허용하는 것보다도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이혼이 일어났을 때, 일어난 일을 규제하는 그 이상의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구절은 두 가지 조건을 설명합니다.
1. A라는 남편이 그의 아내와 이혼한다면,
2. 이 여인이 재혼하여, 남편 B와도 이혼한다면(아니면 죽는다면), (그리고 이것은 이제 이 본문에 들어있는 율법인데) 남편 A는 다시 이 여인을 아내로 취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모세(모세에게 영감하신 주 하나님)는 이혼을 승인하지 않았지만, 이혼할 상황에 놓이게 될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의 한 측면을 규제합니다. 예수께서 신명기 24장의 명령을 이렇게 설명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19:8∼9)
에스라 9∼10장
혼인의 영속성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주의가 필요한 또 다른 본문들은 에스라 9장과 10장입니다. 포로 귀환자 가운데 많은 사람이 “외국 여인과 혼인했습니다.”(스10:2,10,44) 에스라는 백성들에게 “우리 하나님 앞에 언약을 세워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라”(스10:3)라고 했습니다. 에스라의 행동이 성경 본문에 개혁으로 묘사되어 있고, 하나님의 승인을 받은 것으로 나오니, 이 본문이 이혼을 지지하지 않습니까? 이에 대해 다음 사항을 유의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히브리어는 사람들이, 예를 들어, 아브라함과 사라가 혼인했던 것처럼 혼인한 것을 말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그런 유형의 용어를 찾을 수 없습니다. 대신에 이 두 장(스10:2,10 14,17)에서 혼인이라는 문맥에서 성경 다른 곳에서 사용된 적이 없는 용어(느13:23,27을 제외로 하고, 문맥은 9장과 10장이 동일하다)를 발견합니다. 사용된 어휘는 자구적으로 “살도록 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혼인이라는 매듭을 묶지 않고 한 여인이 집에서 “거주하게”할 수 있다고 이해합니다.
“살도록 하다”라는 어구 외에도, 이 두 장은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이 외국 여인들에게 한 일을 설명하기 위해 “데려와”(스9:2;10:44)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두 번째 단어는 성경에서 여러 여자를 데려오는 행위(대하11:21;13:21;24:3)나 사랑에 대한 언급이 없이 여자를 데려가는 행위(삿21:23)를 묘사하기 위해 다양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뭔가 주리고 있다는 느낌을 풍깁니다.
다시 히브리어는 이혼에 대한 특수한 단어가 있습니다(신24:1∼4). 그러나 에스라 10장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우리는 “나가도록 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를 발견합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혼인하지 않고 동거하던 여인을 그 집으로부터 나가도록 했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다시, 우리 번역은 이 장에서 “아내들”(9:2;10:2,3,10,11,14,18,19)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우리로 다시 혼인에 대해서 생각하게 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어에서 “아내”를 뜻하는 단어는 똑같이 “여자”를 의미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이 단어가 반드시 혼인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9장 1절은 이스라엘이 “이웃 민족”(가나안 족속이나 헷 족속이나 기타 등등)의 “혐오스러운 행실”에 따라 처신했다고 합니다. 만일 우리가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혼인했다면, “이웃 민족”의 “혐오스러운 행실”에 대한 언급은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그 이유는 혼인을 혐오스러운 행실로 간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방인과 혼인하는 것이 가나안 족속이나 헷 족속과 같은 이방인들의 혐오스러운 관례로 간주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역겨운 일은 간음이나 성적인 방종이나 혼인의 불신실함과 같은 행위입니다.
영어 역본이 혼인이라고 말하는 곳에서, 이 용어는 번역자들에 의해서 삽입되었습니다. 9장 2절에서, 새흠정역은 이 단어를 필기체로 “아내”라는 단어로 배치했습니다. 새국제역과 영어표준역은 단순히 이 단어를 영어 본문에 통합합니다. 필기체는 두 단어 “아내로”는 원문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번역가들이 본문을 더 분명하게 하고자 추가했습니다. 본문 자체는 이스라엘 남자들이 “자신들과 아들들을 위해 딸들 중 일부를 데려갔다”라고 간단히 말합니다. 9장 14절에 나오는 혼인이라는 언급은 에스라가 하나님의 율법을 요약한 부분으로, 반드시 그 당대 이스라엘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서술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관찰은 에스라 마지막 두 장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형식적인 의미에서 주변 민족의 여자와 혼인했다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혼한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에스라 9장 10장은 대신에 이스라엘의 몇몇 남정네들이 이미 혼인했거나, 아니면 혼인을 안 했거나, 외국 여인을 그들의 집으로 데려와 동거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들은 첩입니다. 에스라의 개혁 사역이 이 여인들을 돌려보낸 것은 이해할만 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혼인이 여하튼 “죽을 때까지 헤어지지 않는다”라는 개념에 도전하는 본문으로 사용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언급하시면서 자신의 요지를 설득하셨습니다. |
신약
신약성경에 특별히 우리에게 필요한 두 구절이 나옵니다. 이 두 구절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언급되어 이혼의 두 가지 근거와 병행합니다.
신실하지 못한 혼인생활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한 번은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마19:3)라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합법적인 이혼 사유로 간주해야 하는 것에 대한 두 랍비, 샴마이와 힐렐 사이의 논쟁에서 일어났습니다. 전자는 이혼 사유를 제한적으로 허용했지만, 후자는 예를 들어 저녁 식사를 태우는 일과 같은 경미한 일로도 이혼을 허용했습니다. 예수께서 여기에 창세기 1장 27절과 2장 24절에 호소하시면서,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마19:4∼6)라고 하셨습니다. 이 대답으로 예수님은 샴마이와 힐렐 학파의 흠을 잡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혼인에서 벗어날 출구를 만들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또 다른 질문으로 반박했습니다(7절).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이 질문에 대해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8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어떻게 창조 사역에 대한 언급으로 그의 요지를 설득하셨는지를 주목하십시오. 다시 말해서 태초에 하나님이 혼인을 영구적인 것이 되도록 의도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혼인한 모든 사람은 혼인 생활을 괴롭히는 죄와 약점에 상관없이,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혼인 생활을 유지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죄로 인해 파산됨으로 인해 오는 고통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장은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19:9)입니다. 마가와 누가는, “음행한 이유 없이”라는 문구가 없이,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비슷한 말씀을 기록합니다(막10:11,12;눅16:18). 두 복음서는 “음행한 이유 외에”라는 문구가 없다는 것은 삼자가 (이혼 후에도!) 혼인 관계에 끼어드는 일이 항상 간음에 해당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합니다. 어떤 이유로 혼인 관계를 중단하고 다른 배우자와 다시 관계를 시작하는 것은 이혼 전에 제3자를 그 관계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만큼이나 확실히 간음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내와 이혼하는 사람은 그의 아내를 “간음하게 하는”(마5:32)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대에, 우리가 아는 바처럼 사회 보장제도가 없었기에, 이혼한 여자는 그저 생존하기 위해서 다른 남자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이 효과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혼하는 남편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태복음 19장 9절(5장 31,32절)에서 발견된 예외조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음행한 이유 없이”라는 예수의 말씀이 이혼의 여지를 남기지 않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간음 때문에 예레미야 3장에서 이혼하셨듯이, 이스라엘은 불신실한 배우자와 이혼할 수 있었습니다. 수 세기 동안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간음이 이혼을 위한 합법적인 근거라고 이해했습니다.
주님이 이 본문에서 간음으로 인해 이혼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재혼하는 것을 허용하십니까? 그렇다고 받아들여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에 반대하는 근거가 몇 가지 있습니다.
이것이 간음에 근거한 이혼 후 재혼(삼자와)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유일한 본문입니다.
이른바, 마태복음 19장 9절의 예외 조항에 대한 원문은 자구적으로 “혼인 생활의 불신실함 때문이 아니라not for marital unfaithfulness”인데, “음행한 이유 외에except for marital unfaithfulness”라고 억지로 번역해놓았습니다. 이 사실이 본 구절이 실제로 이혼을 허용하는 예외 구절로 번역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구심이 제기됩니다. 분명히 하자면, 마태복음 5장 32절의 헬라어는 마태복음 19장 9절의 헬라어와 실제로 다르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영어 번역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
바울은 예수님의 교훈을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전7:10,11)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바울은 “내가 아니라 주시요”라는 구절로, 이 구절에서 자신의 가르침이 예수의 가르침에 의해서 똑바르게 세워져 있다고 말합니다. 고린도 신자들은 그리스도가 가르치는 바를 들었던 사람들로부터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수년에 걸쳐 이 가르침이 네 복음서에서 기록되어 왔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또 이와 관련된 구절들을 읽고 얻은 결론은 바울이 영감받은 결론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위에서 논의했던 바와 같이 교부들의 역사적인 이해와 하나님의 실례의 패러다임을 이 목록에 추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간음으로 이혼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게 재혼할 수 있다는 결론은 이 한 본문 위에 세워서는 안 됩니다. 비록 이러한 결론이 우리가 서로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바람과 소망과는 분명히 상반되지만, 우리는 성경이 성경으로 해석하도록 해야 하며, 따라서 더 쉬운 구절과 전체 성경에 비추어 더 어려운 구절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혼인식에서 힘차게 외쳤던 서약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계속 신실해야 하며, 합법적인 이혼 뒤에도 계속 유효합니다. 비록 두 사람이 사이가 틀어지고 이별하기에 이르렀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모범은 그들이 서로를 위해 계속 기도하고, 기회가 오면, 여전히 화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가지고 상대방에게 손을 뻗쳐야 합니다.
배우자가 불신자일 경우
혼인이 정의상 영속적이지 않다고 주장하기 위해 사용된 다른 성경 본문은 고린도전서 7장 15절입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통해서 그 도시의 이교도들 중 일부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믿는 배우자가 더 이상 이전 사람이 아니기에, 한 배우자가 회심한 상태에서 긴장이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회심이 그의 태도와 행동을 바꾸어놓았습니다. 믿지 않은 배우자가 혼인 생활에서 벗어나기를 원할 때, 그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울의 조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고전7:12∼16).
바울은 이 말씀으로 독자들에게 주 예수께서 지상에서 사역하실 때 고린도에서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 특정한 명령을 내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님의 일반적인 가르침에서 그 대답을 발전시켜야 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구약성경에서 혼인에 관해 밝혀놓은 것을 가지고 다루어야 했습니다. 바울은 이미 10∼11절에서 혼인에 출구가 없는 영속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분명히 했습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바울은 만일 불신 배우자가 기꺼이 당신과 함께 살고자 한다면, 그대로 살고, 이혼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불신 배우자가 신자 배우자를 떠나겠다고 고집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결국 그를 머물게 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얻는 것은 마찰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15절에서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요지는 이제 이혼할 자유가 있다(이렇게 하면 10∼11절에서 그가 가르치는 바와 충돌된다)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배우자가 강제로 집에 머물게 하거나, 아니면 믿지 않는 배우자에게 새로운 주소로 이사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믿는 남자나 여자는 그런 상황에 구속되지 않는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자는 불신 배우자의 어떤 이혼 시도에도 저항하도록 강요받지 않았습니다. [죄로 인한] 삶의 파산을 묵인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혼을 묵인하는 것은 스스로 이혼을 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입니다. 사도는 단순히 후자를 금지했습니다.
바울의 대답이 이혼한 사람이 더 이상 배우자에 대한 의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물론 합법적인 이혼은 이전 배우자에게 아무런 책임이 남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혼인 관계가 종료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혼한 사람이 이전 배우자에 대한 도덕적인 의무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은 한평생 혼인 유대 관계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하신 모범은 이혼한 그의 백성들에게도 회개하도록 요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혼인의 연합이 이혼으로 깨어질 수 있지만, 이전 배우자의 회개(혹은 회심)을 위해 기도할 필요성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혼인식에서 내뱉은 서약은 이혼한 사람을 이전 배우자에게 계속 구속되게 합니다.
결론
“아무것도 이생에서 그들을 갈라놓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예식서는 말했습니다. “혼인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제도여서 파기되어서는 안 됩니다”라고도 예식서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혼인을 이렇게 강한 유대감으로 만드셨기에 이혼을 싫어하십니다”라고 예식서가 말했습니다. 경건한 남자 청년과 경건한 여자 청년은 거룩한 울타리 안에서 하나가 되고자 해야 하지만, 그들이 들어가는 제도의 순수한 영속성 자체가 억압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해결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여러분 두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즉 이것은 참으로 지독하게 긴 기간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교훈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을 답습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마19:10)
혼인의 연합은 이혼으로 깨어질 수도 있지만, 이전 배우자의 회개(그리고 대화)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주님 안에서 혼인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고무적입니다.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마19:11) 이 말을 받는 사람들은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성령에 의해 중생했던 타락한 피조물들입니다. 비록 그들이 본성상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 반영하도록 변화되었고, 그래서 경건한 신랑과 신부는 상대방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혼인 생활에서 서로의 유익을 위해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5:22∼23)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산출합니다. 혼인 생활에서 간음이나 중독의 참혹함을 마주하든, 사고나 질병의 참상을 마주하든, 우리의 죄를 위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롬8:32). 이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분은 십자가를 통해서 지혜 안에서 그의 백성에게 짊어지라고 주신 십자가가 무거울지라도, 그분의 은혜는 항상 넉넉할 것입니다(고후12:9).
토론 사항
1. 긴장된 혼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으로 이혼과 재혼을 허용해야 한다는 에라스무스의 주장을 평가해보십시오. 배우자가 질병이나 사고로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겠습니까? 에라스무스의 생각은 로마서 5장 3∼5절과 야고보서 1장 2∼3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합니까?
2. “하나님의 형상으로”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배우자가 “좋은 날이나 궂은 날이나,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건강한 날이나 병이 들 때나, 둘 다 살아 있을 때까지” 어떻게 “진실한 것”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어떻게 반영하는지를 설명하시오. 이것이 타락한 세상에서 이룰 수 있습니까?
3. 모든 혼인 생활에서 긴장감이 분명히 생길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실례에 비추어, 부부가 마찰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토론해보십시오.
4. 에스겔 선지자는 성경 역사에서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몇 가지 교훈을 주었습니다. 두 가지 설명을 위해서 에스겔 16∼23장을 읽어보십시오, 두 장이 이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a) 이스라엘이 젊었을 적에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있었는가?
b) 이스라엘이 그의 혼인 생활에서 신실했는가?
c) 이스라엘의 처신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5. 혼인 생활에서 극심한 역경과 마찰이 있을 때도, 배우자에게 충실할 수 있도록 우리 청소년들을 어떻게 훈련해야 합니까?
6. 본 장에서 제시한 자료에 비추어 볼 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말하는 이혼과 재혼에 관한 내용을 평가해보십시오. 마찬가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비추어 본, 본 장의 이혼과 재혼에 대한 평가를 여러분이 재평가해보십시오. 하지만 반드시 성경에 토대해서 평가하십시오.
7. 밴담 박사는 그의 저서 『이혼과 재혼』(Cornelis van Dam, Divorce and Remarriage, Winnipeg: Premier Publishing, 1996)에서 나와 다른 결론을 내립니다. 이 장에 제시된 자료에 비추어, 밴담 박사의 주장을 읽고 평가하십시오. 마찬가지로 밴담의 주장에 비추어 나의 논증을 평가해보십시오.
8. 혼인식에서 서로 죽을 때까지 신실할 것을 맹세하면서도 몇 년이 지난 뒤에 혼인 생활을 그만두고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우리 주변에 믿지 않은 세상은 어떤 메시지를 받겠습니까? 이런 처신이 그리스도인에 대한 하나님에 대해 어떤 인식을 일으키겠습니까? 이런 처신이 선교와 봉사에 도움이 됩니까, 아니면 방해가 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