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essa
들깨 나무
박금아
어제야 들깨를 뽑았다.
지난해 늦봄에 절로 돋아나 여름내 향긋한 잎을 내어 주고, 가을엔 꽃을 피워 초겨울까지 식탁을 풍성하게 해 준 식물이었다. 보리밥 짓고 강된장 만들어 깻잎 몇 장 따 쌈 싸서 올리고, 하얀 꽃숭어리는 찹쌀 풀에 발라 들깨보숭이로 만들면 멀리서도 향이 깊었다.
겨울에 들면서 줄기를 흔들어 대는 바람에는 어쩔 수 없이 몸피가 말라갔다. 이파리도 꽃도 줄더니 오래도록 기척이 없었다. 김장 머리였다. 김치를 담그고 남은 파가 많았다. 심을 곳을 찾다가 들깨를 뽑으려고 보니 뻣뻣해진 가장귀에 쌀밥 같은 꽃잎 하나가 돋아 있었다. 마침 빈 화분이 있어서 심고, 들깨는 그대로 두었다.
새해 첫날 늦은 오후였다. 베란다 창틀 난간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는데 한참이 지나도 가지 않고 있었다. 무척이나 추웠던 날이어서 창을 열어 주었다. 새는 베란다로 들어와 요란한 날갯짓으로 퍼덕이더니 들깨 우듬지에 날개를 접고서 오래도록 고요했다. 연둣빛 섞인 회색 날개에 흰 뺨과 흰 배를 하고서 목에 검은색 굵은 넥타이를 맨 모양새가 성년에 든 수컷 박새였다.
다음날부터 새는 해거름이면 자기 집인 양 들어와서는 들깨 가지에 앉았다 갔다. 설날이 지나자 들깨는 선 채로 화석이 된 것 같았지만, 삼짇날이 돌아와 앞산 딱따구리가 집을 짓느라 요란스러워도, 뻐꾸기와 산비둘기가 불러 젖혀도 새는 대꾸질 한 번 하지 않았다.
앞산의 큰 나무들을 마다하고 베란다 속 작은 푸새를 찾아든 연유가 궁금했다. 바람 한 점 실어 내지 못할 성싶은 여린 가지에 세상을 날다 돌아온 새의 고단한 날개가 깃들일 줄이야. 머리를 열 시 방향에 있는 산목련 나무를 향하고서 먼 곳을 쳐다보는 새의 눈빛이 상념에 잠긴 듯했다. 나는 산 너머로 내리는 석양을 보며 새를 따라 아득히 먼 데를 그려 보곤 했는데 그러면 내 안에도 단단한 고요가 한 줌씩 고이곤 했다.
호미질로 흙을 갈아 꽃씨도 심고 상추와 오이, 고추 등의 모종을 심을 때였지만 새의 보금자리가 된 들깨를 파내어 버릴 수 없었다. 어느 날 보니 들깨 아래에서 새순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딱딱한 흙에 숨이 막힐 것 같아 들깨를 뽑으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스티로폼 상자에서도 뿌리를 깊이 내린 듯했다. 자세를 고쳐 줄기를 움켜잡고, 있는 힘껏 당겼다. 갈고리처럼 생긴 뿌리가 흙덩어리를 안은 채 뽑혀 나왔다. 몸피를 잡았던 손에 진한 들깨 내음이 났다. 내 몸에 들깨 한 포기가 옮겨 심어진 느낌이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다가 뒤늦게 박새 생각이 났다. 흙갈이에 열중하느라 새가 왔다 갔는지 기억조차 없었다. 들깨가 없어진 걸 보았다면 얼마나 당황했을까. 일어나 산길로 나갔다. 다행히 깻대는 버려진 채로 있었다. 들깨 대를 그러모아 베란다 본래 자리에 꽂아놓고 나니 박새가 기다려졌다.
놀란흙에서 피어난 들깨 향이 밤공기를 흔들었다. 일년생 풀 한 포기가 남긴 향이 이리 짙을진대 팔십여 년을 서 있던 사람의 자리에 남는 흔적이야 오죽할까, 싶었다. 달빛 아래에 선 마른 들깨 대를 보고 있자니 요양병원 침대에 누워 계신 어머니의 다리가 떠올랐다. 평생을 숨구멍 하나 없는 가시밭에 서 있어 뼛속이 텅 비어버린 두 다리였다.
산골 처녀였던 어머니는 시집오던 날, 한 포기 풀로 섬 집 마당에 옮겨 심긴 후 그 자리에서 한 치도 비켜선 적이 없었다. 서자의 아내로 어장 일을 하며 층층시하에서 자식 여섯을 낳아 기르는 동안 사시사철 불어오는 소금바람을 견뎌내야 했다. 침묵은 어머니가 밀양 박씨 문중의 종부가 되면서 터득한 삶의 방식이었다.
바다에는 땅의 끝자리에서 떠밀려 온 인생들이 많았다. 식솔들은 물론 섬사람들은 어머니를 찾아와 눈물, 콧물을 찍어내며 속내를 털어놓곤 했다. 고향을 잃고 가족을 잃고 뿌리를 잃어가던 뱃사람들도 고기잡이철이 끝나면 누이처럼 어미처럼 깃들었다.
제 속에서 피워낸 향내로 오갈 데 없는 박새를 깃들이게 한 들깨처럼, 어머니가 신묵(愼默)으로 살아낸 생(生)은 당신이 서 있던 자리에 향기 한 줌 남기는 일이었을까.
들깨가 한 그루 큰나무로 느껴졌다. ‘들깨 나무’ 그림자 속으로 발 하나 들였을 뿐인데 어머니의 전생(全生)에 든 듯했다.
박금아| 경남 삼천포 출생으로 201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해양문학상, 등대문학상, 천강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수필집 『무화과가 익는 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