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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의 메시야시 : 22편
시편 22편의 특성
신약성경을 잘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시편을 읽을 때 이스라엘의 많은 옛 노래들이 어떤 식으로든 그리스도를 예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언어를 포함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복음서에는 많은 곳에서 그리스도에게 시편을 인용하거나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한다. 이러한 자료들로 인하여 몇몇 노래들은 메시야 노래들로 불린다.1)
시편에서 22편은 이 ‘메시야 시’에 해당한다. 시편 22편은 다윗이 지은 시로, 장차 야곱의 자손뿐만 아니라 온 땅의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섬기게 되며 여호와께서 통치하는 온전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러한 일이 있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온 땅의 사람들은 전혀 무가치한 자들이며,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온 땅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와 주님으로 삼고 주님을 영원히 섬기며 그분의 크신 은혜를 전하여 그분을 높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시편 22편은 신약성경에 있는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들에서 자주 인용되거나 언급됨으로써 메시야 노래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까닭에 ‘메시야 시’에 속하는데, 메시야의 고난을 가장 현실감 있게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시편 150편 중 수난자의 고통을 내외적으로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시이다. 이 시를 비평적 혹은 합리적 입장에 있는 사람은 다윗이 자기의 과거의 경험을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히스기야 왕의 경험일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하고, 혹은 예레미야의 고통이라는 주장을 하며, 혹은 바벨론 포로시기에 어떤 무명 시인의 수난 경험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하여 단순한 개인의 수난시로 보는 견해에 있기도 하지만, 이 시는 다윗의 개인적 체험을 일차적으로 하고, 성령께서 다윗의 경험을 근거로 앞으로 장차 오실 메시야의 고난을 묘사하셨다는 견해가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전해 오는 가장 유력한 견해이다. 그런가 하면 다윗의 경험이 배제된, 오직 메시야 수난에 대한 다윗의 예언시라고 보는 견해가 있기도 하다. 그럴지라도 이 시가 메시야의 고난을 언급한 시라는 점만은 매우 분명함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이 시의 첫 구절을 말씀하셨고, 기타 본 시에 기록된 다른 사항들도 역시 그리스도의 수난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 22편은 31절로 되어 있으며, 내용의 단락 구분에 의해서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ㆍ1-11 / 버림당한 메시야의 탄원
ㆍ12-21 / 고난에 에워싸인 메시야의 탄원
ㆍ22-31 / 온 땅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나라에 있게 할 메시야 예언
시편 22편 해설
2-1. 버림당한 시인의 탄원(22:1-11)
시편 22편의 첫 단락인 1-11절은 버림당한 시인의 탄원을 다루고 있다. 이곳에서 버림당함에 있는 시인의 모습은 내용의 구분에 의해서 셋으로 분류하여 볼 수 있다. (1)하나님에게서 버림당함에 있는 시인의 탄식(1-5절) (2)사람들에게 버림당함에 있는 시인의 탄식(6-10절) (3)도움을 구하는 시인의 탄원(11절).
2-1-1. 하나님에게서 버림당함에 있는 시인의 탄식(22:1-5)
1.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아얠렛샤할(사슴이란 곡조)에 맞춘 노래.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5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시편 22편의 시에는 첫 절에 ‘표제’가 나와 있다. 이 표제는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아얠렛샤할(사슴이란 곡조)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어 이 시가 다윗의 저작이란 사실과 더불어 지휘자의 인도를 받아 연주된 제의 음악임을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이 시를 지은 시인은 다윗이다. 그리고 여기서 ‘아앨렛샤할’은 ‘새벽의 (암)사슴’(the dear of the dawn)이다. ‘아이옐레트’는 ‘암컷’‘(암)사슴’을 뜻하는 단어와 '여명’, ‘동틀녘’, ‘아침’을 뜻하는단어가 결합된 형태로 동틀녘 무렵에 이른 ‘새벽’을 뜻한다. 따라서 ‘새벽의 사슴에 맞춘 노래’가 표제인데, 히브리인들은 노래를 부를 때 이 ‘새벽의 사슴’이라는 곡에 맟추어 불렀다. 칼빈은 “이것이 내가 보기에는 한 민요의 첫 구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시편 22편의 표제는 히브리어 성경 원문에서는 1절로 되어 있으며, 한글성경에서 표제와 함께 나오는 1절 문장으로 되어 있는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는 2절로 분리되어 있다. 즉, 한글성경에서 1절은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표제가 1절이며, 표제에 이어지는 문장은 2절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글성경에서는 시편 22편의 성경 구절이 31절이나, 히브리어 성경 원문에서는 시편 22편이 32절이다.
한글성경에서 표제에 이어 1절에 두 번 거듭하여 나오는 “내 하나님이여”와“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병렬에서 매우 고통스러운 갈등을 마주하고 있는 억눌리는 긴장감이 시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자로 생각하며, 그가 크게 부르짖으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아무런 응답을 하시지 않으신다. 시인이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묻는 것에서 ‘어찌’에 사용된 단어는 전치사에 의문사가 결합된 형태로 ,‘왜’, ‘무엇 때문에’를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거듭 찾으며 이 의문사 또한 두 번이나 거듭 사용되어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물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음에 있는 시인이 무엇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지에 대해 그 답을 알지 못한 채 있으며, 그 이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여기서 “어찌”가 사용된 것은 무슨 연유에서인지를 알지 못하여 알고자 하는 것에서가 아니다. 이 시에서 탄원하고 있는 시인은 일차적으로는 자신이 직접 당하여 겪고 상황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시인은 그것을 메시야 언약과 연관하여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와 그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담당한 수난에 의한 구속 사역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예언하는 것에서이다. 곧 시인은 메시야를, 시인이 당한 고난은 메시야의 고난을 함축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으며 부르짖는 탄원은 메시야 사역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고난 받음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받음에 있음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시적 표현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메시야 사역을 수행함은 그 아들의 성육신에서 불리는 ‘예수’란 이름(마 1:21)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이며, 이는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시는 것에서 있게 된다(마 20:28; 막 10:45; 딤전 2:6).
이는 선지자 이사야에 의해서 예언되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6, 11, 12) 라고 함으로써, 죄인을 구속할 메시야로서 죄를 대신 담당하여 속죄를 위한 제물로 자신의 몸을 나무(십자가)에 달린 자가 되어 죄인에게 쏟아질 저주를 다 받으심에 있게 될 것 또한 예언을 통해 약속되어 있었다(신 21:23).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도들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라고 말씀해 주신 것에서도 확인 된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라고 말함으로써 십자가에 달린 자가 되어 죽음의 고난을 당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시는 것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실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하시는 것이라고 알려주었다(갈 3:13).
그러한 하나님의 아들의 탄원은 시인을 통해 죄인인 당할 하나님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여 속죄 사역에 있게 될 것을 잘 아시고 그 하나님의 뜻을 받듦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저주에 버려짐에 있는 고통을 드러내시는 표현으로“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하신 것이다. 이는 2절에서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함으로써 메시야가 당할 고통이 얼마나 크며 심한 것인지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르짖고 있다는 표현 속에서 잘 나타난다. 이러한 것에서 시편 2편은 첫 절에서부터 이 시가 ‘메시야시’로 있는 ‘탄원시’인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에 따라서 시인의 이 탄식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린 자가 되어 구속주가 되신 것에서 외치게 된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막 15:34)
1-2절에서의 시인의 탄식은 3-5절에서는 과거 이스라엘 열조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회고하는 것을 전환된다. 이는 앞서의 탄식에 있는 고난에서 있을 하나님이 주되심과 구원으로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을 굳게 신뢰하고 그 의존에 있는 것에서 이다. 그러한 것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찬송을 받으시는 분이셨다며, 자신의 조상들이 이방의 열방으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을 깊이 의뢰하여 왔음을 들어 자신 또한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실 주 하나님을 의뢰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기도에 있음을 나타내었다. 이렇게 시인은 자기 열조의 역사를 회상하면서 그들이 곤경 속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권념하셨던 것과 자기의 기도를 동일시한다. 그럼으로써 그 기도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기대에 있음을 나타내었다. 이는 이 시에 예언된 메시야 사역에서 하나님께서 아들이요 그리스이신 예수님을 결코 죽은 자 가운데 두고 썩음을 당하게 하지 않고 제삼일 만에 부활시키시는 권능을 행하심에서 온전히 성취되는 응답에 있다.
2-1-2. 사람들에게서 비방과 조롱당함에 있는 시인의 탄식(22:6-10)
6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7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9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10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탄원문의 두 번째 연인 6-10절도 앞 연과 같은 구조를 띤다. 6절 상반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로 내몰려 사람들에게 비방과 조롱당하는 자신의 비참한 모습에 있는 심경을 처절하게 토로한다. 그런 그는 자신을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벌레’는 지렁이나 곤충 등의 미물을 가리키는데, 시인은 사람들이 극히 혐오하는 구더기를 의미하는 것에서 사용하였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몹시 혐오하고 있다는 것에서 이다. 욥 또한 하나님이 허락한 고난 속에서 극한 고통의 고충을 겪을 때 자신을 타조와 이리의 형제라고 하면서 짐승에 비유하여(욥 30:29) 자신의 모습을 낮추었는데, 이곳에서 시인은 그보다 더욱 비하시켜 구더기에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자신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벌레란 말을 사용함에 있는 함축된 의미인 비참함의 모습을 선명히 드러냈다.
6절 하반절에서 8절은 사람들이 시인을 어떻게 사람이 아닌 벌레 취급하듯 대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사람들은 시인을 보는 이마다 “비방하며 조롱하는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어 대며 빈정거리기를 ‘네가 그동안 하나님을 믿고 기대었으니 그 하나님이 너를 구원해 주지 않겠느냐? 과연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면 너를 건져주시겠지 가만히 두고만 보겠느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보는 사람들에게서 비방과 조롱당함에 있는 시인이 겪는 탄식은 시인을 향한 것에서 장차 오실 메시야를 향한 비방과 조롱으로 나아가 메시야가 겪는 비방과 조롱이 된다. 그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 것으로 판결이 떨어지자 온갖 비방과 조롱, 모욕과 멸시가 가해진다.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마 20:19)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마태복음 27:26-31)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 27:38-44)
이렇게 시인을 향한 비방과 조롱은 메시야를 향한 비방과 조롱에서 이 시가 담고 있는 메시야 예언의 성취에 있게 된다. 그러면서 이는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한 자들을 향한 비방과 조롱으로 치닫게 된다. 이는 메시야 예언의 성취는 종말적인 관점을 바라봄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을 것이나, 또한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에 참예한 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을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0-12)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음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자들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조롱을 당하며 채찍질, 결박, 투옥을 당하고, 죽음까지도 당한다. 그리스도인은 사는 것과 함께 죽는 것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생명에 있는 복임을 알기에 살아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뿐만 아니라 죽임 당함을 통하여 자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있는 참생명을 드러냄에 기꺼이 자신을 바친다.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행 17:32)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히 11:36)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한편, 시인은 자신을 향한 비방과 조롱에 대한 탄식에서 전환되는 내용을 전달한다. 시인은 자신을 비방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9-10절에서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주이신 하나님께 갖는 굳은 믿음을 나타낸다. 여기서 ‘오직 주께서’는 그 뜻이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한 것에서 ‘틀림없이 당신이니이다’(Surely it is thou who)를 말한다. 그러한 것에서 칼빈은 ‘분명히 주께서’라고 번역하면서, 이 구절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다윗(시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혜택을 간략하게 열거하고 있는데, 그는 이 혜택을 통해서 오래 전부터 그분께서 자신의 아버지라는 점을 배워 알고 있었다. 그렇다. 그는 자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보여주셨기에 현재는 사망의 흑암으로부터 압도되고 있지만 그분으로부터 생명에 대한 소망을 얼마든지 바랄 수 있다는 점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실한 자들이 공포와 고통에 처하게 될 때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여러 증거를 모아서 그것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북돋우고 보강하는 지혜를 가르쳐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너그러우심을 나타내시는 데 있어서 결코 지치는 법이 없으며, 그분께서 베푸시는 것이 제아무리 풍성하다 해도 그분의 재물이 탕진되는 법은 없으므로, 우리가 아주 어릴 적부터 그를 아버지로 체험했듯이, 그분께서는 우리가 고령이 되어 죽을 때까지라도 우리에게 변함없으신 분으로 나타나실 것이라는 점을 하나의 확정된 원칙으로 삼아야 마땅하다. 그가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모태에서 나오게 하셨으며’, ‘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비록 유아들이 자연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고 어머니의 젖으로 양육 받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경이적인 섭리가 밝게 빛나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기적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배은망덕이 우리의 눈에 우매의 휘장을 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어린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저마다 경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수백 번 타락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하나님의 은밀하고 신비한 능력에 의해서, 무덤 속에서 살아 있게 하시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그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난 뒤에도 무수한 불행을 당할 수밖에 없으며 그 불행을 막을 조금의 힘조차 없는데도, 자기를 도와달라는 어떤 손 짓 하나도 할 수 없는데도 만일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의 품으로 그를 양육하고 보호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단 하루라도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갓난아이가 주를‘의지하게’된다는 말은 아주 당연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어린 젖먹이들을 먹이시고 유모의 모든 임무로 돌보시지 않는다면 태어나는 그 순간에라도 그들을 순식간에 질식시키는 수백 번의 죽음에 직면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하나님께서‘내 하나님이 되셨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보기에는 짐승에게까지도 여기서 송축되고 있는 선하심을 보여주시지만 그가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이 아버지되심을 보여주는 것은 인류에게 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장 젖먹이들에게 자신에 대한 지식을 부여하지지 않지만 하나님이 ‘의지하게 하신 분’으로 묘사된 것은 실제로 그가 그들의 생명을 보살피신다는 점을 보여주심으로써 어떤 의미로는 그들을 하나님께로 이끌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도다”(시 147:9)라는 말씀 그대로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자시의 은혜로 말미암아 유아들이 아직 이성이 있기 이전에 그들의 모든 것을 예상해 주신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하나님께서 종들이 탄원하고 부르짖을 때 그들의 소망을 좌절시키지 않으실 것이라는 점이 확실해진다. 이것이 다윗이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서 분투했으며 노력한 요지인 것이다.
칼빈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태에서 나오게 하신 자체가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이었다. 또한 모친이 젖을 먹여 그 연약한 인간을 성장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이었다. 실제로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생명과 형체를 주시고, 부모라는 도구를 통하여 이 땅에 태어나서 살아가게 하셨다. 한 인간이 부모를 통하여 태어나고 자라나는 것 모두가 하나님의 간섭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한 인간을 향하여 계획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적을 이루어 가게 하셨다. 시인은 신앙을 가지고 이것을 재확인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미의 태에서부터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셨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께서 맡긴바 되었다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잉태됨과 그로 인한 출생 모두에서 하나님의 손에 맡겨졌다는 전적 의존에 있는 절대 주권 신앙을 갖게 된다. 이에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2-1-3. 도움을 구하는 시인의 탄원(22:11)
11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메시야의 예언을 담은 시인의 탄식은 이제 11절에서 이제까지 호소에 따른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탄원에 있는다. 그는 자신을 덮고 있는 환난으로부터 도울 분이 하나님 한 분이심을 잘 알고 있다. “…도울 자 없나이다”는 시인이 처한 환난으로부터 도울 자가 주위의 사람에게서는 아무도 없고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라는 의미에서 이다. 칼빈은 “시인은 자기 눈앞에 성경이 어디에서나 증거하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비참한 자들을 도와주시고 우리가 더 큰 괴로움을 받을수록 그만큼 더 우리를 도와주시려고 하신다는 하나님의 구원을 제시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절망 그 자체도 그의 마음을 경건하고 열렬한 기도의 연단으로 그의 마음을 향상시키는 중개 역할을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고통에 대해서 가지는 감정도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피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도움을 허용함으로써 그가 우리의 안녕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멀리 계시지 않으시니 그의 간구를 듣지 못하심이 없으며, 환난이 닥쳐 있으나 그에게로부터 영원히 치워 없애버리실 것이다. 해서, 시인의 이 탄원은 십자가에서 메시야의 예언 성취에 의한 선언으로 연결된다. “다 이루었다!”(요 19:30) 그에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6:22-23; 롬 8:1-2) 라고 말하였다.
2-2. 고난에 에워싸인 시인의 탄원(22:12-21)
시편 22편의 두 번째 단락인 12-21절은 고난에 에워싸인 메시야의 탄원을 다루는데, 이곳에서는 그 내용을 둘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1)고난에 에워싸인 시인의 탄식(12-18절) (2)구원을 위한 시인의 탄원(19-21절).
2-2-1. 고난에 에워싸인 시인의 탄식(22:12-18)
12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13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14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19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0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21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12-18절은 두 개의 연으로 되어 있으면서 첫 번째 연인 12-15절은 황소, 바산의 힘센 소, 사자, 그리고 개의 동물 표상을 사용하여 자신을 둘러싸고서 위협하는 것들의 포악함으로 겪는 고통을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라는 과장법을 사용하여 호소한다. 그들은 힘센 황소와 같고, 굶주린 사자 같고,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개와 같다. 여기서 등장하는 동물 표상 중에서 첫 번째로 언급되는 ‘많은 황소’와 ‘바산의 힘센 소’그리고 ‘나를 에워싸며’와 ‘나를 둘러쌌으며’는 서로 평행을 이룬다. 따라서 ‘많은 황소’는 곧 ‘바산의 힘센 소’를 일컫는 것으로, 시인은 바산의 많은 힘센 황소 떼에 에워싸임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렇게 시인을 에워싸고 있는 힘센 많은 황소가 있는 바산은 므낫세 반 지파에게 주어진 곳으로 요단강 동쪽 다산으로 알려진 곳인데, 요단강 지류로서 갈릴리 바다와 사해 사이에 있는 얍복강 북쪽, 헬몬의 국경에까지 펼쳐 있는 참나무 숲이 무성하고 목초가 풍부한 곳이다. 이곳은 목초지가 풍부한 지역으로서 그곳에서 자라는 소는 살찌고 힘세기로 유명하였다(겔 39:18; 암 4:1). 이러한 황소, 곧 바산의 힘센 소는 21절에서는 ‘들소’로 표현되고 있는데, 시인의 대적을 가리키는 은유이다. 그런데 시인을 비방하고 조롱하며 괴롭혀 고통을 주는 대적자들을 황소, 바산의 힘센 소, 들소로 비유한 것은 그들의 건장함과 힘 때문으로, 여기에서 직접적으로 의도하는 바는 시인을 대적함이 짐승적인 것에 가까웠던 때문이다(참고. 암 4:1).
그런가 하면 사자가 입을 벌려 으르렁대며 달려들어 잡은 짐승을 갈기갈기 찢는 모습으로, 또한 사냥개를 동원하여 사냥감을 몰아 둘러싸 공격하고 몰이꾼들은 날카로운 창 등으로 무참히 찔러 잡은 동물의 다리를 묶어 의기양양하게 내려오는 모습으로 묘사하는 이것은 20절에서는 시인을 대적함에 있는 ‘칼’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에 의해서 시인은 쏟아진 물처럼 기운이 빠져 버렸고, 뼈마디가 모두 어그러졌으며, 마음이 촛물처럼 녹아내려 절망에 빠졌으며, 입은 옹기처럼 말라 버렸고, 혀는 입천장에 붙어 있을 정도로 타들어 가고, 뼈마디 하나하나가 다 셀 수 있을 만큼 앙상하게 드러나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표현되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원수들은 크게 즐거워하며, 시인의 겉옷을 나누어 가지고, 속옷도 제비를 뽑아서 나누어 가지는 것에서 시인은 15절에서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다”라고 죽음에 직면한 절망의 탄식에 있는다.
이렇게 적나라하게 시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표현은 시인이 직접 당한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여 자신이 어떤 수난을 당한 것인지 그 사실성을 드러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령 다윗이 사울왕의 시기를 받아 10년에 이르는 긴 세월을 박해 속에 있은 것(삼상 18: 이하)에서나, 셋째 아들 압살롬의 반역(삼하 15:1-18:8)에서 겪은 수난이 시적인 영감을 받은 재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다윗은 시를 통해 자신에게 있은 일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한 다윗은 장차 메시야에게 있을 수난의 계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시적으로 예언하는 것에 있은 것이다.
그러한 것에서 시인의 시는 메시야 예언시로서 이 시에 묘사되고 있는 시적인 표현은 선지자 이사야에 의해서 예언된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을 말해주고 있다.
이사야 53:1-12 / 1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10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11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12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자신을 두고 예언한 다윗의 시에서 묘사되고 있는데 수난에 따라 십자가형으로 처형당하며 그의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서 비방과 조롱, 모욕과 멸시를 당하였으며, 머리는 가시관으로 찔려 피가 흐르고 두 손과 두 발은 못 박혀 피가 흐르고 허리는 창에 찔려 피가 흐르는데 물과 피를 다 쏟음에 있어 16절에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라고 하신 성경을 응하였으며,2) 또한 17절에서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라고 하신 것에서 보게 되는 온 몸의 각 마디마디 뼈들이 고통으로 견딜 수 없이 아픔에 있음에서 온 몸은 상함을 입어 남아 있는 기력이 모두 사라지고 매말랐으니, 요한복음 19:28에서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에서 보는 대로 예언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예수께서 ‘내가 목마르다’하신 것은 단지 심한 갈증에 있으셨다는 것을 의도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15절 중반절에서 예언된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라고 하신데 따른 것으로, 혀가 잇틀에 붙을 정도로 입이 타고 목이 마르다는, 목숨을 잃는 극한 상태의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18절에서는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라고 말씀하여 수난에 있는 메시야의 몸에 걸에 걸치고 있는 겉옷과 속옷까지 빼앗김을 당하 것이 예언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십자가형으로 처형하는 군인의 몫으로 돌려지는 것에서 예수님을 골고다 언덕에 있는 처형장으로 끌고 가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는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라고 한 것에서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함”에 있는 것이었다(요 19:23-24).
이상에서 보는 바, 메시야의 고난에 대한 묘사는 시인인 다윗에 의해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이것은 마치 사실인 것처럼 예언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장차 메시야에게서 있게 될 사실이 예언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하신 성경을 응함에 메시야 사역이 있었다. 시인이 이를 상세한 묘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의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며, 자신의 몸을 통하여 메시야가 나타나서 고난당하실 것을 내다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
2-2-2. 구원을 위한 시인의 탄원(22:19-21)
19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0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21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첫 번째 단락과 같이 두 번째 단락에서도 시인의 탄식(22:12-18)은 시인의 탄원(22:19-21)으로 이어진다. 탄원에 앞선 탄식에서 시인은 황소, 사자, 개로 비유되는 원수들에 에워싸여 고통당하는 모진 고통에 절규했었는데, 이제 그 절규는 하나님께로 향하여 신속하게 자신을 구원하여 주실 것을 간곡히 요청하는 부르짖음으로 바뀌었다. 그 탄원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 곧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는 기도이다. 시인의 탄원은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하는 기도로 시작된다. 그런데 기도에는 우리 한글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접속사인 '그러나'(But)와 ‘당신’(you)을 의미하는 2인칭 대명사가 결합된 형태의 단어로 시작하고 있어 ‘그러나 당신’이란 말이 들어가 있다. 그래서 “그러나 당신(주님)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NIV, But you, O Lord)를 말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 '그러나'라고 하는 접속사가 사용된 것은 앞선 12-18절에서 탄식하는 시인(다윗)의 시선이 원수들을 향해서 있었던 것을 이제 하나님께로 옮겨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2인칭 대명사 '당신(주님)'이 사용된 것은 시인이 하나님과 갖는 관계가 매우 친밀한 것을 나타내는 것에서이기도 하고, 또한 강조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오직 여호와이신 하나님만이 시인의 희망이 됨을 시사한다.
그러한 시인은 여호와이신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의식한다. 그러므로 “멀리하지 마옵소서”라고 자신을 멀리하지 말 것을 간청하여 구한다. 또한 “나의 힘이시여”라고 여호와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힘이심을 의식한다. 그러므로 “나를 도우소서”라고 자신을 속히 도우실 것을 간청하여 구한다. 이처럼 시인이 하나님께 탄원의 기도에 있으면서 구한 것은 원수들에 에워싸여 죽음에 직면한 시인의 ‘생명’3)으로, 이와 짝을 이루는 표현인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유일한 것’이다.
시인이 이처럼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구함에 있는 것은 그의 일생에서 위급한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여 그의 생명을 구한 사실에 기인한다. 그러기에 시인의 기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신실히 의존하고 있는 것에서 확신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이는 다음에서 잘 나타난다.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시 22:20-21). 여기서 시인은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어 이미 구원을 얻은 것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번역은 “주께서는 들소의 뿔로부터 나를 구원하실 것을 나에게 응낙하셨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에서 자신에게 있을 하나님의 구원을 이미 얻은 성취의 시점에서 대다보고 시제를 다루는 것에서 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그리스도)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히 5:7-10).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간구와 소원의 응답은 시편 22편에서 시인의 탄원에 예언된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응낙에 있다. 그 그리스도는 그를 따르는 믿음에 있는 그리스도인 모두가 성령 안에서 구하여 하나님께 올리는 탄원의 대표가 되신다(롬 8:23, 2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구하는 구원론적인 기도는 시인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응낙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 응답받아 “다 이루었다”에 있으신 구속 사역의 성취에 있다.
2-3. 온 땅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나라에 있게 할 메시야 예언(22:22-31)
22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23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24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25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26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27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28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29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30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31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시편 22편의 마지막 단락인 세 번째 단락 22:22-31에서 시인은 ‘온 땅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나라에 있을 것’의 예언에 있는다. 시인의 탄원에 대한 응낙에 있는 메시야에 의해서 성취될 하나님의 구원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는 날이 됨으로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는 노래가 불리는 날이 된다. 그럼으로써 이제까지 탄식과 탄원에 있어 왔던 시는 찬송시로 바뀐다. 그런 까닭에 혹자는 본 시를 서로 다른 성격의 두 시가 하나로 결합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에서 주의 이름이 선포되는 대상인 ‘형제는 이 뜻 외에도 ‘친척’, ‘친족’ 또는 ‘같은 부족’, ‘동류’를 뜻하기도 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공동체를 친근감에 있게 나타내는 것으로 쓰였다. 그러한 것에서 주를 찬송함에 있는 ‘회중’은 곧 이스라엘 공동체이다. 그리고 이는 곧 뒤따르는 23절에서 ‘야곱의 모든 자손’인 '이스라엘’임이 밝혀지고 있다. 26절에서 그들은 가난하다 하여 단 한 사람도 외면되지 않을 것이어서4) 그들 모두 모여 한 곳에서 주님을 찬양할 것이니, 가난한 사람들도 배불리 먹고 음료를 마시며 잔치를 즐길 것이며, 주님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주님을 찬양할 것임이 표현되고 있다.
그러면서 주의 이름이 선포되고 회중이 찬송에 있음이 무엇으로 말미암는 것인지가 24절에서 예언되고 있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에 의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예언되었는데, 이 구절은 일차적으로는 시인이 극심한 팝박을 받았음에 있었던 자신에 의해서, 또는 자신과 동일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여서 시인이 하나님을 표현할 때 그분은 결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나, 이를 통해서 메시야가 당할 고난을 예언하는 것에 있는 것이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사 53:7-9).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라고 예언하여 ‘여호와의 종’이 고난 받음에 있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보게 되는 후손 – 하나님의 아들들 – 들의 날이 장구한 영생의 날에 있게 하실 것을 뜻하셨음을 알리셨다. 따라서 22-24절은 메시야가 당하는 고난에 작정되어 있는 영생하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 예언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의 이름이 선포되고, 회중이 찬송에 있게 되는 대상은 이스라엘에 한정되지 않고 ‘땅의 모든 끝’으로 확장되니 곧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으로 확대된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함께 온 이방인에게 주의 이름이 선포되고, 이를 통하여 유대인과 함께 온 이방인이 하나님의 한 백성이 된다. 이러한 사실을 잘 이해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이스라엘의 선택과 함께 이 속에 이방인을 편입시키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룸을 통해 유대인 및 이방인 모두인 온 세상의 인류를 구원해 가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있는 하나님의 심오한 섭리를 말해 주었다.
그에 따라 27-31절에서는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뭇 백성이 생각을 돌이켜 여호와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을 찾아 모여들어서 꿇어 엎드려 예베 – 경배 -에 있게 하실 것을 예언하였다. 이는 나라와 그 나라를 이루고 있는 민족 모두는 다 하나님의 것이어서 주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잔치에 함께 자리를 같이 하는 기쁨을 누릴 것이어서,5) 모든 약한 자들도 극심한 고생에 시달리는 자들도 모두 그 혜택의 은총을 누릴 것이다.6)
그리고 나서 시편 22편은 이 시를 통해서 예언하고 있는 중심인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준다. 한글성경의 대부분의 번역이 30-31절인 “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에서의 ‘후손’을 후손, 곧 후세의 자손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킹제임스흠정역은 “한 씨가 그분을 섬기리니 주께서 그것을 한 세대로 여기시리라. 그들이 와서 앞으로 태어날 한 백성에게 그분의 의를 밝히 드러내되 그분께서 이것을 행하셨음을 드러내리로다”라고 하였고, 한글킹제임스는 “한 씨가 그를 섬길 것이요, 그것이 주께 한 세대로 여겨지리라. 그들이 와서, 태어날 백성에게 그의 의를 선포하리니, 이는 그가 이것을 행하셨음이라”라고 번역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여기에서 ‘후손’에 사용된 단어는 ‘씨'로 곡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쓰일 때는 종자의 ‘씨’이나, 이것이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자손’, ‘후손’을 나타낸다. 그러한 단어가 하나님의 메시야를 예언하는 것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직 ‘한 아들’을 의미하는 것에서 쓰였다(갈 3:16). 시편 22편에서 시인은 온 세상의 사람들을 메시야 한 분에게로 불러 모으셔서 하나님의 한 자녀요 한 백성 삼으실 것에서, 그 씨(아들)가 주님을 섬길 것이며, 그리고 그 씨(아들)로 인해서 있게 되는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아들(메시야, 곧 그리스도)과 함께 주님을 섬김에 있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해서, 30절에서의 “후손이 그(주 하나님)를 섬길 것이요”에 있는 ‘후손’은 시편 22편이 메시야 예언시인 것에서 보게 되는 ‘메시야’인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며, 그리고 또한 그를 통해서 주님을 섬김에 있게 될 모든 하나님의 아들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한 것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시인(다윗)을 향한 구원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구원하시는 것에 있으셨으니,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제삼일에 다시 일으키시는 부활에 있게 하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은 온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저희의 죄로부터 구원하실 것과 그럼으로써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는 부활에 있게 하실 것의 확실한 증표가 된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것임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영생에 있을 것에 의혹을 갖고 의심하거나 부인하지 못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주님을 섬김에 있으면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자신들의 믿음이 있음을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게 이야기하여 전하고 또 전함에 있으니, 이는 장차 태어날 아주 먼 미래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끊이지 않고 길이길이 전해질 지금부터 세상 마지막까지 계속될 하나님의 복음이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과 함께 하며 마지막 모습을 보이시고서는 그들에게 지상대위임명령을 내리셨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그리고는 이를 반드시 실현해 나가실 것에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어 권능 있게 해 나가실 것을 말씀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그에 따라서 오순절에 성령 강림이 있었으며, 성령의 말하게 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증거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여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에까지 전파되어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마 16:18)라고 하신 성취에 있게 되는데, 이는 장차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올 새하늘과 새땅, 곧 새예루살렘으로 천상의 실체를 온전히 드러내게 되어 이곳에서“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하는 경배의 찬송이 가득할 것이다(참조. 계 4: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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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몇 가지 기준들이 메시야 노래들을 확인하는 데 사용된다. 첫째, 신약성경이 시편에 있는 어떤 노래의 한 특징을 그리스도에게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있다면, 그 노래는 메시야적인 것이다. 둘째, 메시야 노래의 특징은 ‘기름붓다’는 낱말의 상ㅇ에 있다. 이 낱말은 히브리어에서 ‘메시야’(‘메시아흐’)라는 용어의 배경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어떤 메시야 노래들은 어떠한 인간도 이룰 수 없는, 그러나 그리스도에 의해 사실상 성취되었거나 장차 그에 의해서 성취될 위업들을 과장된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그것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넷째, 무수한 제왕 노래들(royal psalms)이 고대 이스라엘의 다윗 왕권에 관해서 언급하는데 이는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메시야 신학으로 활짝 꽃을 피우기에 이르렀다(Cragie). 따라서 초기 기독교인들이 이 노래들을 그리스도를 대망하는 메시야적인 시각에서 읽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2) 6절에서의 ‘그들이 내 손과 발을 찔렀나이다’는 수 세기 동안 격렬한 논쟁이 있어 온 것으로,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비추어볼 때 메시야적인 의미를 강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그들이 내 손과 발을 찔렀나이다’란 히브리어 원문은 다양한 방식으로 번역하다 보니 폭넓은 번역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해석에 어려움을 갖게 되는데, “나의 손과 나의 발이 쇠약해졌나이다”(Cragie)라고 번역하거나 “그들이 나의 손과 발을 묶었나이다”(Kaltner) 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사자와도 같이 내 손과 발이 오그라들었나이다“(strawn) 라고도 번역하기도 한다.
3) 개역한글성경에서는 20절의 ‘내 생명’을 ‘내 영혼’으로 번역하였다. 이는 ‘생명’은 ‘영혼’으로 비견되는 것에서 이다.
4) 26절에서의 ‘겸손한 자’는 원문이 ‘괴로움을 당하는 자’,‘가난한 자’란 뜻이다. 이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 측면 모두에서 심각한 어려움에 처한 자를 말한다.
5) 29절 상반절의 “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공동체인 절기에 의한 제사생활을 하는 것에서 갖게 되는 공동식사를 염두에 둔 표현인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은 제사를 드린 후 제사 드린 자가 온 가족과 함께 이웃이나 친구들뿐 아니라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함께 제물로 갖는 식사를 가지며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심의 공동식사에서 제사에 의해서 얻는 즐거움을 같이 누린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주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풍요한 복을 같이 한다. 그러한 것에서 본 절의 표현은 앞절에서의 ‘경배할 것이요’란 어구와 연결되어 있다.
6) 29절 하반절의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를 한글성경들은 ‘흙(진토)으로 내려가는(돌아가는) 모든 이들’(가톨릭성경, 현대인의성경, 바른성경, 우리말성경, 한글킹제임스, 킹제임스흠정역), ‘먼지 속에 내려간 자들’(공동번역), ‘무덤 속에 내려가는 자’(새번역성경), ‘한낱 먼지로 되돌아갈 인생들’(현대어성경)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는 ‘진토’에 사용된 단어가 ‘흙’, ‘땅’, ‘진흙’, ‘먼지’, ‘티끌’이란 뜻을 가진 때문에 이 단어가 지닌 문자적 의미를 그대로 살려서 해석한데 따른 것으로 흙(먼지, 무덤)으로 돌아갈 인생들,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들이 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할 것이라는 번역의 입장을 취하는 것에서이다. 이러한 번역을 취해도 해석의 의미가 손상되지는 않으나 이는 문맥적인 의미를 고려하지 않아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란 표현은 앞에서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와 대조되는 것에서 그와 상반된 상태의 모습에 있는 자들인 허약한 자들 또는 가난으로 심하게 허덕이며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고생하는 자들을 고려하고 있는 시적인 문학적 표현인 것임을 의식하고서 번역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가 의미하는 바인 죽을 지경에 처한 자와도 맞는다. 더욱이 29절은 이스라엘과 함께 온 땅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는 축복의 잔치에 참여하게 하실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어 알려주시고 있는 것에서 주시고 있는 예언적 계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