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4 : 32 - 37절
“한마음 한뜻이 되어”
부모 된 입장에서 자식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모습이 있다면 서로 사이좋게 하나 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싸우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참 행복해 지는 게 부모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믿음의 공동체를 가장 기뻐하실까?”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엄청나게 큰 교회도 아니고, 열심히 일 잘하는 교회도 아닙니다. 먼저는 그 믿음의 공동체가 하나 되어서 서로 돌보고, 사랑하고, 기도해 주고, 힘이 되어주고, 위로가 되는 그런 공동체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것이지 교회가 아무리 커도, 아무리 일 잘 해도, 아무리 고린도 교회처럼 특별한 은사와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한마음, 한 뜻을 품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하나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도 하나님 한 분이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분도 예수님 한 분뿐이시고, 또 우리는 성만찬을 통해 한 몸과 한 피를 먹고 마신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가게 될 천국도 하나이고, 믿음도 하나이고, 소망도 하나이고, 사랑도 하나이기 때문에 도저히 나눠질 수 없는 것이 교회인데 작은 교회조차도 하나 되지 못해서, 한마음 한 뜻을 품지 못해서 하나님을 속상하게 만드는 교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난주에 봤던 말씀도 그냥 소리만 높여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되고 한마음으로 소리를 높여 기도를 하니까 진동을 하고 성령 충만함을 받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1812년에 노환으로 임종을 앞둔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라는 사람에게는 걱정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평생을 노력해서 축척한 부로 인해 다섯 명의 아들이 분열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자신이 축척한 부를 잘 지켜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걱정거리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다섯 명의 아들을 불러놓고 유언 대신 평소에 즐겨 들려줬던 ‘다섯 개의 화살’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들려줬습니다. ‘다섯 개의 화살’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죽음을 앞둔 왕이 아들들을 불러 놓고 화살 다발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고는 꺾어 보라고 하자 아무도 꺾지 못했다. 하지만 다발을 풀어 하나씩 주자 쉽게 부러뜨렸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는 형제가 결속하여 가문을 대대로 번성시켜 줄 것을 유언으로 남긴 것입니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다섯 아들은 다섯 개의 화살이 되어 프랑크푸르트, 런던, 파리, 빈, 나폴리 등에서 막대한 부를 쌓으며 하나의 네트워크로 뭉쳐 국경을 초월한 세계적인 금융네트워크를 구축하게 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 로스차일드 가문은 형제간의 화합을 통해 유대인 최고의 명문가를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교회나 가정이 하나 되어서 서로를 배려하고 사랑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도 없고 더 강력한 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부자이고 대형교회가 되어도 하나 되지 못하면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 나타나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보세요.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회는 이렇게 시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으로 하는 이가 하나도 없는 모습으로 교회가 시작 되었던 것이고 또 시작뿐만 아니라 지금도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을 모델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되었더니 어떤 결과가 나타났는지 보세요. 34절에 보면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다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봤던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는 말씀도 신기한데 34절 말씀에서는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부자와 가난이라는 개념은 사실 주관적인 생각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부자라고 생각을 하는데 자신은 전혀 부자가 아니라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하다고 생각을 하는데 자신은 가난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주관적인 생각 속에서도 초대 교회 성도들은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설사 모든 성도들의 재산을 공평하게 똑같이 나눴다고 해도 이런 주관적인 생각 때문에 분명히 어떤 사람은 자신은 가난하다고 생각하며 불평을 했을 것인데 그런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냐면 초대 교회 성도들은 자족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입니다. 서로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밭과 집을 팔아서 가져 오는데 어떻게 만족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감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경험하게 되니 자족하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그런 은혜 속에 살다보니 자신을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재산을 가져 온 사람들이 참 대단한데 이 사람들은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없었다는 것이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의 의식에는 청지기 의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청지기의 뜻을 보면 “주인이 맡긴 것들을 주인의 뜻대로 관리하는 위탁관리인”을 의미합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이 자신의 공로나 실력으로 얻게 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우리에게 맡겨 놓으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청지기 의식이 교회를, 가정을 얼마나 만족스럽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교회나 가정의 불화를 보면 자기 권리, 자기주장이 강해서 생기게 되는 것이 태반입니다.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맡겨 놓으신 은혜와 복을 흘려보내면 되는데 욕심 때문에 움켜쥐고 있으니까 다툼이 생기고 싸움이 생겨서 서로 만족함이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음과 한 뜻이 되는 교회와 가정을 만드는 것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36, 37절을 보세요.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나바라는 사람이 등장을 하는데 바나바라는 사람의 모범적인 행동 하나가 예루살렘 전체의 분위기가 되고 문화가 되어서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 부유한 노부인이 저명한 심리학자를 찾아가 자신의 마음을 괴롭히는 고민 상담을 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삶에 아무 불편이 없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요리사가 해주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힘든 집안일은 가정부와 집사가 해결해 주며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운전기사가 있어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좋아하는 꽃을 가꾸며 여유 있게 살 수 있습니다." 노부인의 말을 들은 심리학자가 부드럽게 질문했습니다. "그렇게 평안하고 쾌적한 삶을 누리고 계시는데 부인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노부인은 한숨을 쉬며 말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었지만 행복하지 않아요. 항상 마음이 공허하고 외롭습니다." "그러면 부인이 가장 아끼는 아름다운 꽃들을 아무도 모르게 마을 사람들에게 선물해 보세요. 그러면 얼마 안 가서 행복해질 것입니다." 반신반의하던 노부인은 심리학자의 말을 믿고 매일 아침 마을 여기저기 현관 앞에 꽃을 심은 화분을 선물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 다시 심리학자를 찾아간 노부인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동안 살면서 이렇게 즐겁고 행복한 때는 처음이에요. 아침에 현관을 나가보면 직접 구운 쿠키, 손으로 만든 목도리, 아름다운 시를 쓴 카드가 종종 놓여 있는데 오늘은 또 어떤 작지만 근사한 선물을 받을지 설레어서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심리학자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정원에 꽃씨를 뿌리면 아름다운 꽃으로 돌아옵니다. 부인이 마을 사람들에게 뿌린 씨앗이 꽃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그게 바로 행복입니다. 행복은 돌고 돕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부자니까 나누는 것이 가능하다는 편견을 갖게 됩니다. 부자라서 더 많은 것을 나눌 수 있는 것은 많지만 부자만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토미라는 한 아이가 어머니를 잃게 됩니다. 토미의 아버지는 혼자의 힘으로 아들을 키우려 노력했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토미는 심각한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었고 그 때문에 말을 할 수도 없는 아이였고 그로 인해 가난한 노동자였던 토미의 아버지는 아들을 위한 적절한 교육을 더욱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소식을 알게 된 한 소녀는 토미를 돕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장애아동을 돕고 교육하는 것에는 많은 돈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용돈을 모두 모으고 알고 있는 모든 지인에게 토미의 소식을 알리고 함께 돕자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렇게 소녀의 편지를 받은 사람들과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정성을 모았습니다. 그 결과 당시로는 거금인 1,600달러의 성금이 모였고, 토미는 보스턴에 있는 퍼킨슨 농아학교 유치원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이 토미를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섰던 11살 소녀가 누군지 아십니까? 볼 수 없었고 들을 수 없었고 말할 수 없었던 3중고의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살았던 헬렌 켈러입니다.
많이 있어야 나눌 수 있다는 말은 어쩌면 나누기 싫은 핑계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은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도 청각장애인을 도왔지 않습니까? 문제는 마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풍성한 은혜를 서로 나눌 수 있었던 것도 한마음과 한 뜻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 그럴 마음이 없었다고 오늘 말씀과 같은 모습을 절대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주 크고 위대한 것도 아주 작은 마음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마음만 있으면 청지기의 사고를 가지고 청지기의 삶을 능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마음인데 우리는 자꾸 마음이 아닌 여전히 만족함을 못 누리고 살고 있는 물질이나 재물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니까 핑계를 대면서 나눔에 인색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명절의 끝자락이지만 명절 동안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 명절부터가 아니라 오늘 당장 한마음과 한 뜻을 품고서 이미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들을 나누기 시작을 한다면 그 꽃씨가 아름다운 꽃이 되어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바나바 한 사람의 헌신과 모범이 예루살렘 교회 전체의 분위기가 되고 문화가 되었던 것처럼 누군가의 헌신과 모범이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님들의 분위기가 되고 문화가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청지기의 마음을 가지고 베풀고 나누는 일에 최선을 다 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고, 그렇게 성도님들이 뿌린 꽃씨들이 아름다운 꽃이 되어서 기쁨을 나누는 교회와 성도님들의 가정에 풍성하게 되돌아오는 은혜를 경험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