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떡잎으로 세상에 나온 나는 그늘에 가려 빛도 보이지 않는
담장 아래 태어났다는 사실에 실망한다.
온몸 밀어 땅을 뚫고 나온 수고를 생각하며 풀이 죽는다.
그때, 담쟁이가 빛과 화려한 꽃들로 환한 담장 밖 세상을
들려준다. 꿈을 품는 순간이다.
2. 상대적으로 빨리 자라는 담쟁이와 비교하며 지쳐 우는
내게 그늘진 데서 이슬을 흘리면, 몸이 차가워져 얼른
자라지 못한다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자신은 한 번도 울지 않았다 말하고
담쟁이는 담장을 넘어가 버린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하며 자신을 괴롭힌다.
나도 계속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놀랍게 잊는다.
3. 담장 너머 양지바른 꽃밭의 세계를 드디어 보게 된 날.
내 몸에도 꽃이 필까?
상상하며 가슴 한켠이 밝아옴을 느낀다. 꿈은 키워보는
것이다. 현실을 잊게 하는 성분이 나오니까.
감기 같은 증상을 얼마 동안 앓다가 꿀벌의 부딪힘으로
내 몸에 꽃이 피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타인을 통해 나의 존재를 알게 되지만,
그런데, 나는 어떤 꽃일까?
4. 여기저기 자신의 모습을 묻는다.
그러나 태어나 처음 보는 꽃이라며 꿀벌도 잠자리도
지나는 바람도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처럼 처음이자 끝이다.
이전에 없었고 이후에도 없는 유일한 꽃.
타인에게서 나를 알고자 할 때 그들은 모르기 때문에
귀찮을 뿐이다.
5. 내가 거기 있는 줄 모르고 치고가는 바람.
꽃으로 있고자 해도 방해하는 것은 언제나 있다.
실제일 수도 있고, 내 마음이 그렇다고 느끼는 것일 수도
있는데 그들이 내 존재를 무시하거나 알아채지 못하는 게
속상하다.
자존감이 없는 이들은 끊임없이 타인을 통해 존재 이유를
찾으려 한다.
6. 얼굴에 수심이 생기고 쌀쌀해진 태도로 주변을 대하게
되니 외토리가 된다.
혼자만 외롭고 고통스러운 것 같아 눈물을 흘리며 앓다가
낯선 목소리를 듣는다.
애써 싹을 내밀려 하면 비가 오고, 밀려든 흙이 입구를
막아버려 세상에 나가지 못하는 처지를 이야기하는
씨앗.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씨앗 즉, 누구나 품고 있는 내면의
소리다.
씨앗은 자신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잠깐 보았던 세상이
얼마나 눈부셨는지,
그것들이 보고 싶어 견딜 수 없고,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몰라 더 간절하다고 말한다.
남들도 다 힘들게 살고 있다고. 심지어 언젠가는 너만의
색을 가질 거라고 용기를 주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 일은 아픔을 동반할 거니 그래도 씩씩하게
견디라고. 무엇보다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7. 새벽부터 내린 비에 목소리를 주던 풀은 다시 흙에
파묻히고, 나는 추워지는 몸을 버티며 환하고
따스한 햇빛을 그리워한다.
'저 손길을 한 번 느낄 수 있다면.'
며칠 계속된 비로 양달에 핀 꽃들이 속절없이 꺾여 쓰러진
것을 보게 된다.
쓰르라미 우는 계절이 온다.
누구나 자신만의 계절이 있다 말한다.
8. 밤하늘이 얼마나 깊은지 달빛은 얼마나 부드러운지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표정은 밝아지고,
달아진 꿀을 찾아 벌이 오고 나비들이 왔다.
주변의 기쁜 일 슬픈 일을 살피고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문득문득 외로움이 오면 얼굴 모를 풀을 생각했다.
세상을 생생한 눈으로 사랑하는 법을 알려 준 풀을 잊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다.
9. 점점 뜨거워지는 몸을 앓던 어느 날, 또 다른 눈이 생긴 듯
어둠 속 사물들이 또렷하게 보였다.
밑동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피어오르는 느낌.
나에게 드디어 빛깔이 생긴 걸까?
그런데, 그게 무슨 색일까?
캄캄한 마음을 갖고 지냈는데 그 시궁쥐 색깔이면 어쩌나.
10. 동이 트고 아침바람에게, 꿀벌에게, 나비에게 묻는다.
그러나 그들은 놀라기만 할 뿐.
그때 저만치 담장 밑에서 연록빛 새싹이 미소 지으며
태양꽃이라 불러준다.
태양처럼 샛노랗고 태양보다 눈부신.
우리는 그러한 존재라고 알려준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을 볼 수 없다.
회오리바람이 내 꽃잎을 한움큼 잡아채 허공으로
흩뿌리기 전에는. 꽃가루가 산산이 흩어지기 전에는.
아름다운 것들은 그래서 덧없다 했던가.
언젠가 그 순간을 만나게 될 때 짓기 위해 연습해왔던
따뜻한 웃음을 지을 뿐이다.
'밀고 나오느라 여기저기 멍투성이 떡잎'
'단단하게 땅을 짚고 걸어 다니는 담쟁이'
'담쟁이의 눈과 귀는 얼마나 먼 데까지 뻗어나갔을까?'
등 풍부한 은유와 생동감 있게 의인화한 표현, 시적 감성으로 충만한 문장들 덕분에 한강작가의 동화를 감상하는 내내 싹이 나고 자라는 생생한 과정과 그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 아픔을 함께 경험할 수 있었다. <내 이름은 태양꽃>을 읽는 동안, '우리는 자신을 잘 모른다.'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주변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려 든다. 직접 묻기도 하고 나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기도 한다. 무심하게 넘기기도 하지만, 예민하게 대응하며 점차 보여지는 나에 비중을 두는 쪽으로 변해왔다. 좋은 옷과 장신구로 치장하는 것은 기본이고 기술의 도움을 받아 얼굴에 이런저런 시술이나 수술도 흔한 이야기가 되었다.
하지만 동화의 내용처럼 다른 이들은 나를 잘 모른다. 심지어 자꾸 물으니 귀찮아하기까지 한다. 우리는 왜 그렇게 보이는 모습에 집착할까.
나만큼 나에게 관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나만큼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도 없는데. 타인에게 불편이나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니라면, 우리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바라는 마음이지만, 우선 나부터 타인의 외모나 차림새, 치장에 대해 평가하는 일을 조심하게 한다. 물론, 누군가의 좋은 겉모습을 보면 좋은 말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만, 자제한다. 그런 말은 주변의 누군가를 자극할 수 있고, 대개 그와 같아지기를 부추기는 마음이 들게 할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설가 김연수는 이 동화를 어둠 속에 들어가면 누구나 묻게 되는 질문에 답하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눈물은 왜 짜고 씨앗은 왜 단단할까? 눈물과 씨앗은 왜 모두 아래도 떨어지기만 하는 것일까? 그 낮고도 어두운 곳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 것일까?
나는 요즘 내면을 들여다보고 이야기하는 일을 좋아한다. 동화에서 새싹은 자라면서 몸이 아프고, 외로울 때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 우리 가슴 속에는 이런 씨앗, 다시 말해 자신을 안내하는,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힘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그곳에서 나온다고 말하고 있다. 묻고 싶을 때는 자신에게 물으라는 것이다. 시를 읽고 쓰는 과정을 통해 내면의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한다. 그 과정의 즐거움은 다른 일을 잊게 한다. 그래서 주변에 글을 쓰라고 자주 권한다. 함께 느끼고 싶다. 집중할수록 오는 자유를.
첫댓글 와!!! 저도 읽고 감명 받았던 책입니다. 상세한 리뷰를 읽으니 책을 읽었던 기억이 되살아 납니다. 우리 마음속에 묻혀 있는 씨앗들! '색깔을 가질 때 아플거야"라는 말이 내내 가슴에 남았습니다. 자신만의 개성이 필요한데, 그 개성이 두드러질 때 조심스럽다는 말 같았어요. 그렇지만, 자신이 원하고 하고 싶은 일을 당당하게 해 나가라는 응원처럼 들렸거든요. 나는 무슨 색깔일까를 생각했습니다. 가끔, 타인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내가 위축되기도 하지만, 나만의 색을 사랑하자는 결론을 주었던 책이었습니다. 태양꽃, 해바라기 친구라는 생각도요. 한강 작가님의 동화 다시 읽는 마음으로 깊은 사유가 담긴 정말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부회장님^^많은 독서량과 열심히 글쓰시는 모습 따라해보려고 하는데 저는 너무 어렵습니다😅 부족한 글인데도 올릴 때마다 이리 감탄해주시고 격려 댓글 주시니 그것도 고맙고. 정말 대단하십니다.
한강작가님 글은 문장 하나하나가 암시 같은 세밀함이 있어 한 줄만 읽어도 두근거리고 비밀을 알게 된 듯 차오르는 무엇이 있습니다. 꿈을 꾸고 키워가고 드디어 그곳에 다다르지만, 스치고 지나간다는 사실이 참 재미있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내 이름은 태양꽃'을 다시 떠 올리게 해줘서 고마워요.
작가의 다양한 내면을 대하는 것 같아서 곱씹어 보곤 하는데 이렇게 세심하게 글 올려주니 너무 좋습니다.
꿈을 키워보는 것이나, 타인을 통해 나의 존재를 알게 되는 장면들은 독자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지요.
동화를 읽고 시를 감상하고 수필이나 소설을 읽는 이유를 저마다 다른 차원에서 내면에 간직하게 되는 것도 생각하게 됩니다.
심도 있게 접근하여 정성껏 펼쳐준 좋은 글 잘 감상했습니다.
회장님~^^♡아직 생각도 설익고 표현도 투박한데 마음으로 품어주셔서 감사합니다~날이 많이 춥습니다.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
'보여지는 모습에 집착'
맞아요 참 타인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고 내가 어떻게 비춰질까 하는 조바심에 우린 갇혀 살곤하지요
그래서 저도 한번 갇힌 사고의 틀을 깨보고자 노력해 볼랍니다
그래서 지인을 만나도
친구를 만나도
참 한결 같습니다
그대로세요
세월이 비껴가는가 봅니다
이게 인사법입니다
나를 돌아보게 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한결같습니다
그대로세요
세월이 비껴가는가 봅니다~
참 좋은 인사법 같습니다👍
저도 배워 써 보겠습니다^^
저는 댓글 쓰기가 어렵던데 이렇게 마음 다한 글 주시니 따뜻해지는 오늘 아침입니다.
선생님 따라 다니면 기분좋은 일이 주렁주렁 열릴 거 같아요~🤗
두손 모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