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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선집 45권 6편
신앙의 표준 (훈독본) 8870
1971.06.27 (일), 한국 전본부교회
기 도
말 씀
어제보다도 오늘, 오늘보다도 내일이 더 빛날 수 있는 것을 찾아 나가는 것이 우리 인간의 삶입니다. 신앙길에 서 있는 우리들은 오늘이 있었으면 내일을 입증할 수 있는 신앙의 터전을 확보하려 하고, 또한 내일이 우리 앞에 오게 될 때는 보다 높은 차원의 미래를 약속하고 다짐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생활을 우리는 해 나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소원
우리들 각자는 성품이 각각 다릅니다. 각자의 성품은 다르지만 가는 목적은 하나가 되어야 될 것입니다. 또, 그 목적의 귀결점은 악이 되어서는 안 되고 선이 되어야 됩니다. 그 선의 기준은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일대에서만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을 하는 데 있어서도 어제보다도 오늘에는 선을 중심삼고 하고자 하고, 행동을 하는 데 있어서도 보다 가치적인 선을 중심삼고 하고자 하고, 절대적인 선과 일치될 수 있는 자리에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생활인 것입니다.
역사는 변해도 선의 기준은 변하지 말아야
역사는 변하더라도 우리 인간이 바라고 있는 선의 기준만은 절대적이어야 됩니다. 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환경적인 내용에 있어서 달라지는 무엇이 있더라도 그 목적, 귀결점은 언제나 같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
그러면 역사의 주인이 누구냐? 오늘날 변하기 쉬운 인간들만을 역사의 주인으로 긍정할 수 있겠느냐?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역사는 인간들만이 꾸며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배후에 어떠한 절대적인 선의 주체가 되는 절대자가 있어 가지고 그 분이 변함없이 역사의 과정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기준에 일치되어야
하나님이 계시다면 변천하는 시대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모된 방향을 바로잡아 나가면서 변천하는 입장을 대해 나오신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신앙에도 '이래야 된다'는 어떠한 표준이 있을 것입니다.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를 중심삼고 하나님이 '여자는 이래야 된다. 남자는 이래야 된다'고 하며 바라보시는 기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절대적인 표준을 중심삼고 하나님은 섭리의 목적을 추진시켜 나가실 것입니다.
양심작용은 절대적인 표준에 일치시키는 작용
그 절대적인 방향에 우리가 일치되어 흡수될 수 있는 길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한 방향에 일치시킬 수 있는 내용이 우리 자체내에 있어야 하는데 그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양심작용입니다. 이 양심작용이 있기 때문에 그 하나의 표준과 상충되지 않고, 그 표준을 통해서 부활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양심이 바르다, 혹은 양심이 바르지 않다고 하는 것은 그 순수한 본성이 바라는 목적과 방향에 일치될 수 있는 선을 중심삼고 규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남자면 남자로서, 여자면 여자로서 살아가는 그 생애에는 반드시 표준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원리로 말하면 창조이상, 창조목적이 그것입니다. 창조이상세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창조목적을 이루어야 됩니다.
신앙의 표준은 절대적인 하나님
하나님에게도 반드시 개인이면 개인, 가정이면 가정, 종족이면 종족, 민족이면 민족, 국가면 국가에 대한 절대적인 표준이 있는 것입니다. 그 표준과 더불어 일치해 나가느냐, 안 나가느냐에 따라 가지고 그 사람이 완성할 수 있는 길을 빨리 가느냐, 못 가느냐, 지름길로 가느냐, 돌아가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신앙의 표준이라는 것은 가장 귀한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종교들은 어떤 특정한 사람을 중심삼고 그 사람 마음대로 가르친 내용이 표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중심삼고 보면,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 주류사상은 하나님의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불교사상도 석가모니가 믿을 수 있는 인격적인 기준을 갖추었다고 보지만, 그 주류사상은 만민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는 박애라든가, 자비의 사상입니다. 자비라는 것은 자기 일대로 끝나지 않고 역사를 넘어 영원한 인연을 남길 수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종교를 중심삼고 볼 때, 그 종교의 종주(宗主)가 있으면, 그 종주의 인격도 인격이지만, 그 내용에는 반드시 신이 개재되어 있습니다.
신은 사회환경이 비록 복잡다단하지만 어떻게든지 주체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수습하고, 하나의 목적권을 이룰 수 있는 주체력을 가진 신인 것입니다.
통일교회 신앙의 표준
그러면 우리 통일교회를 두고 봅시다. 통일교회 신앙의 표준이 되는 분이 문선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에 신앙의 표준이 문선생이라는 사람이라면, 그 문선생은 이 땅 위에서 오래 살아야 1세기 이내를 살 사람이 아닙니까?
이렇게 볼 때에 문선생이라는 한 사람이 그 내용이 되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문선생은 가더라도 문선생의 일이 문선생의 일로만 끝날 것이 아니라 문선생이 간 후에까지 하나님의 일로 남겨질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만, 오늘날 통일교회가 변하는 역사시대에 있더라도 변하지 않고 영원히 남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선생님이 신앙의 표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 통일교회가 가는 길을 중심삼고 볼 때 역사와 더불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는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확정적이고,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가 가야 할 절대적인 표준이 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표준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
아무리 통일교회를 10년 혹은 20년을 믿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지금까지 개인적인 표준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면, 그 사람은 개인완성의 기준을 중심삼고 노력한 사람이지 가정완성이라든가, 민족, 국가, 세계의 완성을 위해서 노력한 사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개인완성, 즉 개인의 표준에 일치되는 것은 물론이고, 개인의 표준에 일치된 후에 가정의 표준에 일치되는 것입니다. 가정의 완성을 이루어 가지고 종족이라든가, 민족이라든가, 국가를 완성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자기 나름대로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자기 개인 앞의 신앙의 표준을 대해 어떻게 추구하고, 자기가 대상의 입장에서 그 추구되는 목적을 어떻게 성사해야 되느냐 하는 문제를 알지 못한 채 지금까지 신앙해 온 사람들이 태반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신앙의 표준에 접근하는 방법
그렇다면 신앙의 표준과 일치될 수 있는 공통적인 생활방법은 무엇이냐? 종교의 가르침을 두고 보면, 자기를 위해 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남을 위해 살라고 했습니다. 자기에게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목적을 두는 것입니다.
우리 집이 있다 할 때, 그 집이 선한 집으로 남아지기 위해서는 남을 위하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신앙의 표준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목적을 위해서 내가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표준에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은 그 절대적인 목적을 자기 자체에 두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제3자에게 두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남이 좋아진 뒤에 내가 좋아져야 됩니다. 이러한 생활이 희생의 생활, 희생의 길입니다.
영원히 남아지는 사람이 되려면
자신이 장구히 남아질 수 있는 공을 남기기 위해서는 개인보다도 가정을, 가정보다도 종족을, 종족보다도 민족을, 민족보다도 국가를, 국가보다도 세계를 위하라. 더 큰 것을 위해서 희생하고, 더 큰 것을 위해서 극복하라 하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걸 볼 때, '큰 분야에서 희생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나가라'고 하는 종교가 고차적인 종교입니다. 고차적인 종교는 자기 민족만이 아니라 세계 만민을 위하는 종교입니다. 과거의 죄를 속죄하고 현실의 죄를 속죄해 가지고 미래에 죄 없는 세계를 만들자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세계적인 것입니다. 고차적인 종교일수록 세계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끝날이 되면 끝날이 될수록 어떤 시대가 오느냐? 끝날이 되면 될수록 세계의 표준이 일치화될 수 있는 때가 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표준이 세계적으로 일치화할 때가 올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일치될 수 있는 표준의 때가 되면, 어느누구든지 세계 사조의 움직임에 보조를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낙오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계를 구원하는 것
하나님의 목적은 뜻을 중심삼고 볼 때, 세계를 구원,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때가 되려면 반드시 세계를 잘살게 하기 위해서 희생하는 시대가 와야 될 것입니다.
그러한 사상을 지니고, 그러한 사상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더불어 그 표준에 일치화하는 운동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가 모색되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그러한 종교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노력해야 됩니다.
이제는 세계를 향하여 나아갈 때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개인의 생활이 세계를 위하는 뒷받침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가정도 종족도 민족도 세계의 표준에 일치될 수 있는 민족으로 남아져야 됩니다. 희생하면서 세계를 위하라, 세계를 위해 극복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세계를 하나로 만든다는 문제를 중심삼고 볼 때, 통일교회 사람보다 세계를 더 사랑한다는 사상을 가져야 합니다. 그 누구를 돌보는 것보다도 세계를 돌보는 것이 선이라는 공통적인 사상이 주류를 이루어 가지고 나간다면, 우리 통일교회는 세계적인 종교가 될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신앙의 표준을 세우지 말라
신앙의 표준을 자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앞날에 있어서 세계적인 사조로 갈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 할 진대 끝날이 되면 될수록 세계를 위해서 살아야 할 종교면 종교, 국가면 국가가 나와야 합니다. 세계를 위할 수 있는 종교, 세계를 위할 수 있는 민족은 남아지지만, 자기 민족을 중심삼고, 자기 종교를 중심삼고 세계가 자기들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해 가지고 나가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해야 할 통일교회
오늘날 이 세계 국가 가운데에서 세계를 자기 국가보다 더 존중시하면서 세계를 위해 희생하는 국가가 있으면, 그 국가는 세계를 지도하는 세계의 중심국가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국가를 창건하기 위한 어떠한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 뜻을 가려 가고자 하는 것이 통일교회 사상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역사상의 지혜로왔던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런 사람들은 성현들인데, 세계를 위해서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보다 고차적인 세계를 위해서…. 민족주의 관념을 넘어섰다는 것입니다.
또한 세계적 관념권내에서 박애사상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너와 내가 다르다고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전부 공통한 입장에 놓고 자기 형제 이상으로 사랑하려고 한 그 사상을 중심삼고 세계를 수습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삼은 민주세계권내의 사상적인 기반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민주세계의 사상적인 터전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닦아진 것이라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오늘날 이 통일교회가 국가 민족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국가 민족이 복귀되지 않은 때에는 세계를 위해서 희생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국가는 망하더라도 통일교회로 말미암아 세계가 다시 살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면, 통일교회로 말미암아 한민족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국가는 달라질는지 모르지만 한민족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우선 대한민국을 위해서 묵묵히 희생하는 것입니다. 선두에 선 사람일수록 원수가 많은 것입니다. 원수가 많기 때문에 희생하는 데는 될 수 있으면 소문 내고 희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선이 가려 나온 작전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무슨 영예로운 출세, 영전, 좌천, 그런 관을 갖지 말라는 겁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생각입니다.
통일교인들이 지녀야 할 주류사상
앞으로 통일교회 교인들이 어떤 주류사상을 지니고 가야 되느냐? 세계를 위해서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는 데는 상대방을 위해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일생동안 그렇게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서 계시지 않습니다. 자식들을 위해서…. 타락한 이 인간들을 위해서, 탕자와 같은 자식들을 위해서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위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계셨는데 거기는 비참한 자리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비참했느냐? 자식 때문에 비참했다. 자식 때문에 비참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나를 위해 수고하고 희생하신 아버지셨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것만이 타락한 우리 인간을 복귀시킬 수 있는 폭발적인 동기가 될 수 있지 그것이 없어 가지고는 복귀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까운 자리에 선 아들일수록 희생해야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농토에 나가서 하루종일 일하고 돌아오면서 아버지가 아들을 바라보며 '너, 수고 많았구나, 야 고맙다' 그럴 수 있어요? 아버지일수록 그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수고한 줄 알면서도 속으로만 '이 녀석, 또 수고했구만' 이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나 수고했는데 왜 몰라줘요' 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면 그보다 더 수고를 할 때에는 그에게 값을 치러 주어야 된다는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에서 끝장입니다. 그런 사고방식은 안 됩니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세계를 위해서 가는 길임에 틀림없고, 하나님이 가시는 길이 그렇게 가시는 길임에 틀림없다. 이 길이 아니면 하나님이 가실 길이 없다. 내가 인류를 대신해서 첨단에 서 가지고 누구보다 정성을 다할 때 이 일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거다' 하며 갑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세계를 위해서 생활하라! 세계에 필요한 사람이 되라! 세계를 위한 영원 불변한 사람이 되라!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를 위해서 보다 희생할 수 있는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선과 악
악이 선을 쳤으면 맞은 선이 가는 길을 악은 머리를 숙이고 따라가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도 거지 노릇을 하면서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선은 주인 노릇을 하면서 맞고 가지만, 악은 선을 쳤기 때문에 거지 노릇을 해야 된다 이겁니다.
신앙의 표준을 자신에게 두지 말라
하나님이 절대적인 하나님이라면 절대적인 상대권을 남겨 놓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우리는 한계선에 도달했으니만큼, 신앙의 표준을 자신에게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정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디에 가서 통일교회 교인이 세상 사람과 싸우는 것을 보게 되면 먼저 통일교인을 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선 안 돼요. 상대방을 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통일교인이 잘했느냐 잘못했느냐를 살펴보기 전에 상대방이 잘했느냐 잘못했느냐를 살펴보고, 상대방이 잘못했더라도 통일교회 교인은 다 잘했느냐를 살펴봐서 다 잘 했다 하더라도 잘못한 사람을 우선 책망하지 말고, 통일교인에게 '네가 선한 입장에 서 가지고 그래 악한 사람을 대해 이것이 뭐냐? 고 충고해 주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위해서 그렇게 충고해 주면, 또 상대방이 그것을 알게 되면 저절로 분립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꽉 잡아라
통일교회 교인으로서 참된 길을 가는 사람은 하늘을 붙들고 땅을 붙들고 놓으려고 해도 놓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길을 찾아 나가는 사람은 통일교회 문선생이 아무리 짓궂게 하더라도 놓을래야 놓을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도 이 세계를 복귀하기 위해서는 문선생을 놓을래야 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손을 잡았다 하면 꽉 잡아라 이겁니다. 꽉 잡고 이것을 이루어야 된다는 거라구요. 세계 사람들도 그래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잡으면 하나님이 '꽉 잡아라' 하시는 겁니다. 세계 사람들이 안 쥐어 주면 '아이구 쥐어 주십시오'라고 할 수 있는 내적인 운동이 지속되지 않으면 천주주의를 완성시킬 수 없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지 말고 뜻대로 살려고 해야
여러분이 개인표준이나 가정표준을 다 달성할 수는 없습니다. 수천년 동안 하늘땅이 인류를 동원해서 만들어 가지고 나온 것을 일대에 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 큰 세계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희생하자는 것입니다. 희생하고 나서 잘살자는 것입니다. 잘살되 '나 혼자 잘사는 것은 싫다. 아버지와 전체가 잘살아야 한다'고 해야 됩니다. 이것이 뜻의 길입니다.
아직까지 세계가 우리와 손을 못 잡았고 세계를 위할 수 있는 한계점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분은 세계를 위해 희생하는 길을 가야 됩니다. 세계를 위해서 희생하기 위해서는 나라를 위해서 빨리빨리 다리를 놓아야 되겠습니다.
통일교인은 뜻 마음대로 할 사람이지, 자기 마음대로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본연의 인간으로 남아질 수 있는 빠른 길은 세계를 위해, 더 큰 것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희생하여 세계적인 일체권내에서 여러분이 이것을 정복해 보십시오. 가정 전체, 사위기대 전체, 통일교회 축복받은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통일교회 전체, 민족 전체가 한꺼번에 세계를 위해서 통일할 수 있는 때가 되면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가 종적으로 탕감해야 될 역사적인 사실을 통일교회가 일시에 탕감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통일교인이 개인적 기준, 가정적인 기준, 종족적인 기준, 민족적인 기준에서 탕감하지 못하면 선생님 자신이 해야 됩니다. 여러분 개인을 희생시켜서 가정에 투입하고, 가정을 희생시켜서 교회에 투입해야 됩니다.
만일 통일교회 여러분들이 못 하게 될 때는 어떻게 되느냐? 여러분을 중심삼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선생님의 직계 자식들을 중심삼고 이루어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여러분은 불쌍한 무리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종으로 끝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새는 선생님이 선생님의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될 수 있으면 자기 전에 자식들을 위해서 마음으로 기도해 줍니다. 왜 그러느냐? 여러분을 누구보다 더 사랑했다 이겁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책임을 못 하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계대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 선생님이 여러분을 사랑하던 그 사랑을 자식들에게 주더라도 천적인 사랑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기 도
말씀선집 45권 6편, 원문
신앙의 표준
1971.06.27 (일), 한국 전본부교회
[기 도]
아버님, 이달의 마지막 안식일 이 아침, 당신이 사랑으로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전국에 널려서 이 본부를 우러러보며 생명의 길을 추구하고 있는 자녀들 위에 당신이 긍휼과 사랑으로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전세계에 널려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이 한국 땅을 바라보면서 생명의 인연을 다짐하는 곳곳마다 아버지께서 지도와 각별한 사랑으로 같이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니다.
아버님,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이 역사적인 한이 탕감되기를 소원하고 있사오니, 이 터전 위에 당신의 무한하신 긍휼과 자비와 용납이 같이하시어서 이 땅 위에 해원성사의 한 터전을 넓힐 수 있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이 땅에 살고 있는 만민들이 가야 할 한 방향의 도상 위에, 생명의 길을 가리지 못하는 수많은 군상들 위에 당신이 직접적인 사랑의 손길로 같이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이 운행하시는 지도의 노선을 펴시어서 당신이 기뻐하실 수 있는 방향에 일치되게 인도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리하여 사망권내에 있는 인류들이 부활의 은사에 힘입어 생명의 혜택을 받아서, 이 땅 위에서 당신의 무한한 행복과 생명에 인연됨을 감사할 수 있는 생애를 살아가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 아침에 당신의 자녀들이 각자의 사정과 형편은 다를지라도 아버지의 심정을 따르는 그 마음과 당신의 소원을 성취해 드리겠다는 마음만은 아버지의 마음과 일치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천태만상의 사연이 저희 앞에 있다 하더라도, 저희들이 고달픈 사망의 세계에 인연되는 인생길을 세우지 않고, 생명의 세계에 인연되고 영원히 남겨질 수 있는 아버지의 후하신 사랑이 넘치는 곳에 인연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며 모이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자리에 부복한 모습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이제 아버지의 존전에 엎드렸습니다. 저희들이 영원한 사랑과 긍휼과 존엄한 권위를 가지신 아버지 앞에 서서, 저희 개체가 아들의 명분을 가지고 명령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약속의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웠던 마음을 갖고 여기에 엎드린 자녀들이 있사오면 당신의 그리움을 향한 은사가 이렇게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생명의 고갈을 느끼고 이 자리에 엎드린 자녀들이 있사오면 당신의 생명의 부활의 권능이 이렇게 놀랍고 크다는 것을 체휼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흑암권내에서 생사의 기로를 판정짓지 못하고 내일의 소망을 앞두고 암담한 자리에서 허덕이는 자들이 있사옵니까? 그들에게 긍휼의 손길을 펴시어서 내일의 소망을 이루는 총아가 될 수 있게 축복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흘러가는 역사적 세월 앞에서 자기가 일생행로에 그리고 남겨야 할 생애의 가치적인 위업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느끼면서, 그 가치는 인간을 위하여 사는 데서보다 아버지를 위하여 사는 데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체휼하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흘러가는 세월 앞에 부족한 자신을 놓고 탄식할 것이 아니라, 부족한 자신을 아버지 앞에, 자아의 심정 앞에 접근시킬 수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전세계에 당신의 사랑이 어서 속히 충만케 하시옵고, 이 땅 위에 생명의 인연이 어서 속히 편만(遍滿)하게 하시어서, 당신이 원하시는 선의 주권을 성취하는 영광의 한 날을 차지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특히 지금 전국을 순회하고 있는 특별순회반을 지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들이 만나는 곳곳마다 그리움이 사무치게 하여 주시옵고, 거기에 당신의 간절한 마음과 인연이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끼리 상봉하는 자리에는 분열이 남아질 것이오나, 당신의 참다운 사랑을 중심삼은 생명의 길을 따라 상봉하는 자리에서는 부활과 새로운 재창조의 역사가 빚어질 줄 알고 있사오니, 친히 같이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인간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사오니, 가는 길길마다 지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더욱이 일선에 있는 당신의 어린 딸들을 지키시옵소서. 통일의 가문을 대신하여 나선 그들이 그들의 행로를 길이 빛내게 아버지께서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그들에게 역사의 인연을 다짐시키고 생활적인 인연을 고취시켜서 당신의 영광의 기준 앞에 이끌어 올릴 수 있는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절망적인 이 시대 앞에 우리들이 해야 할 책임과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을 가려 가지고 당신이 칭찬하시지 않을 수 없는 귀한 행로를 남기고 갈 수 있는 당신의 딸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새로이 교회를 책임진 교회장들 위에 영원하신 사랑의 손길로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과거를 반성하면서 의미 있는 내일을 기약하는 자리에서 새로이 다짐할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전체가 하나되어 당신이 원하시는 소원의 터전을 넓히고, 당신이 지상에 활동하실 수 있는 기쁨의 터전을 마련할 것을 기약할 수 있는 이번 기간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이 시간 저희들을 친히 살피시어서 내일의 소망하는 세계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아들딸이 되고, 현실 앞에 착실한 자신이 되게 하시옵소서. 악과 분별된 자리에서 생활해 나가고, 내일의 생명의 노정을 가는데 있어서 당신이 입증하실 수 있는 거룩한 생활적 자아를 찾아 아버지께서 소원하시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친히 같이하여 주실 것을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인간들은 헛된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늘 어제보다도 오늘, 오늘보다도 내일이 더 빛날 수 있는 것을 찾아 나가는 것이 우리 인간의 삶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앙길에 서 있는 우리들은 더더욱 이런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이 있었으면 내일을 입증할 수 있는 신앙의 터전을 확보하려 하고, 또한 내일이 우리 앞에 오게 될 때는 보다 높은 차원의 미래를 약속하고 다짐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생활을 우리는 해 나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소원
갑이라는 사람은 자기 나름의 소망을 갖고 있는 것이요, 을이라는 사람은 을 나름의 소망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는 성품이 각각 다릅니다. 각자의 얼굴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성품도 각자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성품이 다르니만큼 요구하는 것도 다른 것이요, 바라는 선의 기준도 다른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런 것을 좋아하면 혹자는 저런 것을 좋아하고, 여러 가지 환경의 여건을 극복하는데 있어서나 생활하는 면모에 있어서 각각 성격에 따라서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각양각색의 성품을 가졌다고 해서 각양각색의 길을 가야 되겠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각자의 성품은 다르지만 가는 목적은 하나가 되어야 될 것입니다. 또, 그 목적의 귀결점은 악이 되어서는 안 되고 선이 되어야 됩니다. 그 선의 기준은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일대에서만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내가 한 일이 변천하는 역사시대에 규명받을 수 있는 것보다는 변천하지 않는 역사 시대에 확립시킬 수 있는 무엇을 바라는 것이 우리 인간의 상정(常情)인 것입니다. 누구나 보다 가치 있는 기준을 바라고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을 하는 데 있어서도 어제보다도 오늘에는 선을 중심삼고 하고자 하고, 행동을 하는 데 있어서도 보다 가치적인 선을 중심삼고 하고자 하고, 절대적인 선과 일치될 수 있는 자리에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생활인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생활도 그러하지만 우리의 일생 행로, 전체 생애를 두고 볼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루기를 바라는 생애의 목적은 일시적인 과정에 묻혀 버리는 생애의 내용이 아니라, 역사를 초월하는 가치를 지닌 내용으로서, 그 생애에 나타난 결과가 수많은 역사시대에 반응을 일으켜 주기를 바라고, 무엇인가 보다 보람 있는 가치의 내용을 남기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 인간의 소원인 것입니다.
역사는 변해도 선의 기준은 변하지 말아야
이 세상은 변천하는 세상입니다. 언제나 변천하면서 발전해 나갑니다. 그러면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현재 바라고 있고 찾고 있는 선도 역사와 더불어 변천해 갈 것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때, 그 선이 역사와 더불어 변천해 나간다면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선을 추구해 가지고 남기고자 하는 그 목적이나 소망의 기준도 달라질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역사는 변하더라도 우리 인간이 바라고 있는 선의 기준만은 절대적이어야 됩니다. 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변한다 하더라도, 환경적인 내용에 있어서 달라지는 무엇이 있더라도 그 목적, 귀결점은 언제나 같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직선을 인류가 바라는 표준으로 볼 때, 사방으로 엇갈려 원형을 이루어 돌아가는 때도 있지만 그 귀결점에 가서는 선(善)을 중심삼은 공통적인 절대적 기준에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인류가 지금까지 바라며 나가는 소망이라든가 행복의 여건이라든가 하는 것은 보장받을 수 없을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 변하면서 발전해 나오는 것은 인정되지만 선의 기준은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변할 수 없는 그 절대적 기준을 중심삼고 직행하느냐, 혹은 우행하느냐, 좌행하느냐 하는 방향의 차이는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 결과에 있어서는 절대적 가치와 상응한 기준을 중심삼고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무엇이 없다 할진대는 오늘날 역사과정을 통해서 인류가 바라며 나오는 소망이라든가 최고의 선을 다짐하기를 바라는 우리 양심의 작용은 목적점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절대적인 선의 기준은 반드시 역사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남아져야 된다 하는 것을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의 주인이 누구냐? 인간이 역사의 주인입니까? 인간은 상시 변하기 쉬운 것입니다. 어제는 저랬다가 오늘은 이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결심한 것을 내일 보장할 수 없고 금년에 결심한 것을 10년 후에는 자신할 수 없는, 변하는 우리 인생 행로인 것을 생각할 때, 변하는 사람에 따라 목적을 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만으로서 역사를 꾸며 나가고 인간만으로서 선의 절대적 기준을 찾아 나간다면, 변하는 인간으로서 절대적 한계선에 이르기에는 너무나 미급하고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
역사의 주인을 중심삼고 생각해 볼 때, 인간이 역사를 책임지고 꾸며 나가는 것 같지만, 인간만이 역사의 주인이 된다 할진대는 역사의 종말은 완전한 하나의 목적점으로 결정지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 자체가 변모하기 때문에 그 목적도 동요될 수 있는 결과에 부딪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오늘날 변하기 쉬운 인간들만을 역사의 주인으로 긍정할 수 있겠느냐? 여기에 자신을 가질 수 없는 우리 인간인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주인이 인간만이라면, 우리 인간이 바라는 선과 목적은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절대적인 선이라든가 절대적인 목적을 바랄 수 없는 자리에 있다고 하면, 인간에 있어서 최고의 행복의 기준을 찾을 수 없다는 입장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이 찾고 소망하는 행복의 기점을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인간들이 역사를 꾸며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배후에 어떠한 절대적인 선의 주체가 되는 절대자가 있어 가지고 그 분이 변함없이 역사의 과정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 있어서 무상한 변화를 거쳐 나가되, 그 변화되는 모형은 단계적인 발전도상을 거쳐서, 변치 않는 역사의 근본이 되시는 주인의 뜻 앞에 일치될 수 있는 방향으로 가려 나가는 입장에 서야만 인간이 그래도 변하는 자신을 붙들고 절대적인 선의 표준을 중심삼고 소망을 바라보며 나갈 수 있지, 그렇지 못하게 될 때는 변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절망밖에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여기에 어떠한 표준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이 살아 나가는 데에는 어떤 표준이 있을 것입니다. 한국에는 한국의 역사적 배경이 있고 문화적 배경이 있느니만큼 한국에서 사는 사람은 한국의 역사적인 배경과 문화적인 배경을 중심삼고 살아가는 표준이 있을 것이요, 일본 사람이면 일본을 중심삼고 그 기준이 있을 것이고, 미국사람 이면 미국을 중심삼고 그 기준이 있을 것입니다. 나라마다 살아가는 생활 기준은 다소 차이가 있을는지 모르지만 방향은 같습니다. 그 방향이 어긋나게 될 때는 국가면 국가들이 바라는 소망, 혹은 우리들이 말하는 천국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기준에 일치되어야 완전한 기쁨이 될 수 있어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도 기필코 어떤 표준을 중심삼고 우리 민족이면 민족을 대해 나오실 것이고, 세계면 세계를 대해 나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해 나오시는데 있어서도 변천하는 시대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환경이라든가 생활환경이 변해 나가는 데 대한 방편으로, 혹은 그 목적하는 기준을 이루어 나가는데 있어서 방향이 일치되지 않을 때에 그것을 일치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변모된 방향을 바로잡아 나가면서 변천하는 입장을 대해 나오신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기준에 그 방향이 일치되게 하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려 가지고 나가지만 만민이 바라는 최후의 표준은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 표준에 접근시킬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지, 방향을 새로이 제시하는 수단과 방법은 아닌 것입니다. 그 방향을 공고화시키고 그 방향에 접근시킬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은 있을 수 있지만, 방향을 변화시킬 수 있는 수단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변천은 없을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기준이 있을 것이요, 표준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이 오늘날 한국 백성을 대해 '한국 백성은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을 것입니다. 혹은 세계 인류를 대해 '세계 인류는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하는 절대적 기준이 있을 것입니다.
세계 인류가 살아야 할 절대적 기준과 한국 백성이 살아 나가야 할 절대적 기준과는 차이가 없어야 합니다. 그것이 같은 입장에서 일치되어야 됩니다. 그 일치점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세계 인류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이요, 한국 백성이 기뻐할 수 있는 것이요, 우리 개인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절대적 기준에 도달하게 될 때 거기에서 우리가 행복이면 행복, 기쁨이면 기쁨을 느낄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자리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맞이한 기쁨이라면, 그 기쁨은 정지되어야 할 기쁨이요 미급한 자리의 기쁨이기 때문에 완전한 기쁨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쁨을 다짐시키기 위한 과정적인 여건은 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하늘 땅이 기뻐하고 인류가 기뻐하고 내가 기뻐할 수 있는, 전체가 기뻐할 수 있는 기준에는 아직까지 미달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신앙에도 '이래야 된다'는 어떠한 표준이 있을 것입니다. 표준이 있어야 됩니다. 오늘날 타락한 인간을 중심삼고,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를 중심삼고 하나님이 '여자는 이래야 된다. 남자는 이래야 된다'고 하며 바라보시는 기준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기준, 남성은 이래야 되고 여성은 이래야 된다고 하는 기준을 중심삼고 오늘날 30억 세계 인류가 갈라져 있습니다. 그 기준을 중심삼고 이 세계가 동서남북 사방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 기준을 중심삼고 매일같이 발전을 바라면서 생활해 나가고 있는데 그 기준 앞에 일치될 수 있는 하나의 표준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절대적인 표준을 중심삼고 하나님은 섭리의 목적을 추진시켜 나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어떤 절대적 기준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특정 종교를 세우셨으면 그 종교를 세우신 목적에도 반드시 어떠한 하나의 기준이 있을 것입니다. 그 기준은 미급한 때의 기준이 아니라 완성한 때의 기준, 변화시킬 수 없는 기준, 도외시할 수 없는 기준인 것입니다.
그 기준과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일치하느냐 하는 것이 행복할 수 있느냐 불행할 수 있느냐, 혹은 성사할 수 있느냐 미급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결정하는 요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그 표준에 항상 맞추어야 되는 것입니다. 방향도 어떤 한 방향을 중심삼고 맞추어야 되는 것입니다. 지남철이 변하지 않는 한, 고장나지 않는 한, 그것이 순수한 지남철이라면 언제나 북극을 향하여 방향을 맞추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방향이 틀어지게 된다면 그 본질에 있어서의 방향이 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적인 여건에 의해서, 장애물에 의해서 방향이 달라질 뿐이지 본질적으로는 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양심작용은 절대적인 표준에 일치시키는 작용
그 절대적인 방향에 우리가 일치되어 흡수될 수 있는 길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 길의 소성에 따라, 소성이 바라는 바 대로 그 방향에 언제나 일치되어 가지고 발전해야 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방향에 일치시킬 수 있는 내용이 우리 자체내에 있어야 하는데 그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양심작용입니다. 이 양심작용이 있기 때문에 그 하나의 표준과 상충되지 않고, 그 표준을 통해서 부활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양심은 바르다'고 하는 말은 어떤 기준을 중심삼고 하는 말이냐? 상하를 말할 때는 하늘땅을 중심삼고 바르다고 하는 것이요, 평면적인 면에서는 동서를 중심삼고 바르다고 보는 것입니다. 무엇이 바르다고 할 때 표준 없이 바르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르다는 것은 반드시 우리 자신들은 모르지만 어떤 표준에 의해 가지고 바르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 표준기점이 어떤 것이냐? 직선이 되는 것입니다. 동서로 직선이 되느냐, 남북으로 직선이 되느냐? 그 무엇인지 모르지만 직선이 되는, 일치되는 방향을 지니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양심이 바르다, 혹은 양심이 바르지 않다고 하는 것은 그 순수한 본성이 바라는 목적과 방향에 일치될 수 있는 선을 중심삼고 규정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선의 길에 어긋나게 될 때에는 바르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양심이 발라야 한다고 하는 말도 표준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남자면 남자로서, 여자면 여자로서 살아가는 그 생애에는 반드시 표준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원리로 말하면 창조이상, 창조목적이 그것입니다. 창조이상세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창조목적을 이루어야 됩니다. 창조목적을 이루지 않고는 창조이상세계가 나올 수 없습니다. 창조목적을 이룬 실체를 중심삼고 생활권을 갖추지 않으면 이상세계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목적을 이루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창조목적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입니다.
신앙의 표준은 절대적이어야
우리 통일교회 원리 가운데 개성완성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개성완성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내 마음대로 해 가지고 개성을 완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누구도 요동시킬 수 없는 절대적인 기준에 일치될 때 개성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이면 가정을 중심삼고 '완전한 가정이다. 사위기대를 완성한, 창조이상이 완성된, 창조목적이 완성된, 사위기대를 완성한 가정이다' 할 때 사위기대를 완성한 가정에도 반드시 표준이 있을 것입니다. 그 표준이 있어야 됩니다. 가정이 그러하면, 그 가정들이 합한 사회도 반드시 어떤 명백한 기준이 있어야 됩니다. 국가면 국가를 중심삼고도 표준이 있어야 됩니다. 그 표준에 응하는 국가여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중심삼고 남자면 남자로서의, 개인적인 남자로부터 가정적인 남자, 사회적인 남자, 국가적인 남자, 세계적인 남자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는 기준이 있을 것입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적인 면에 있어서 개인으로부터 세계까지 가야 할 본래의 길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러한 표준이 있어야 됩니다. 그 표준이 아침 저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역사과정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지배해 나가야 합니다. 사회의 공의를 심판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것이어야 됩니다. 그러한 절대적인 표준이 있어야 됩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가를 중심삼고 볼 때에도, 국가를 형성하는 데는 반드시 헌법을 만들어 가지고 그 헌법의 기준을 중심삼고 국가의 모든 체제를 형성해 나가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완전하면 완전할수록 그 완전한 기준을 중심삼고 사회의 제도가 세워지고 그 제도에 일치된 생활이 벌어지게 되면, 그 국가는 반드시 헌법이면 헌법을 제정한 그 목표에 일치될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나라, 그 민족이 바라는 이상적인 국가가 형성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게도 반드시 개인이면 개인, 가정이면 가정, 종족이면 종족, 민족이면 민족, 국가면 국가에 대한 절대적인 표준이 있는 것입니다. 그 표준과 더불어 일치해 나가느냐, 안 나가느냐에 따라 가지고 그 사람이 완성할 수 있는 길을 빨리 가느냐, 못 가느냐, 지름길로 가느냐, 돌아가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신앙의 표준이라는 것은 가장 귀한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종교들은 신앙의 표준을 어디에 세웠느냐? 각자 자기 마음대로 신앙의 표준을 세웠습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을 중심삼고 그 사람 마음대로 가르친 내용이 표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특정한 사람이 가르치는 데는 반드시 하나님을 중심삼고 선을 목적으로 하고, 변치 않는 하나의 발전적인 표준을 중심삼고 가르쳐야 합니다. 종교면 종교에서 그러한 추앙을 할 수 있는 대상자를 세우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중심삼고 보면,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일관된 사상의 흐름을 두고 볼 때, 예수님이 '이것은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다. 나를 보낸 자의 뜻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보여 주신 대로 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예수님이 이 땅 위의 인간들이 신앙의 중심으로 믿을 수 있는 인격은 갖추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주류사상은 예수님의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불교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석가모니가 믿을 수 있는 인격적인 기준을 갖추었다고 보지만, 그 주류사상은 무엇이냐 하면 만민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는 박애라든가, 자비의 사상입니다. 자비라는 것은 일대의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일대로 끝나지 않습니다. 역사를 넘어 영원한 인연을 남길 수 있습니다. 또 선이라는 것은 자기 일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일대에 나타난 모든 것이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절대적인 선을 표준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선은 인간이 사는 일생, 백년이면 백년 이내의 생애에서도 존경받을 수 있는 인격을 중심삼은 내용보다도 역사의 전철을 넘어서, 시대적인 환경에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지배할 수 있는 특권적인 자리를, 영원을 중심삼은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볼 때, 그것에는 인간만이 아니라 반드시 신이 개입되어 있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한 종교를 중심삼고 볼 때, 그 종교의 종주(宗主)가 있으면, 그 종주의 인격도 인격이지만, 그 내용에는 반드시 신이 개재되어 있습니다.
신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는 신이 아닙니다. 역사의 변함이 있더라도 그 변함을 움직여 가지고 완성으로 이끌 수 있는 신입니다. 복잡다단한 사회 환경에서 주체적인 권한을 상실한 입장에 있는 신이 아니라, 사회환경이 비록 복잡다단하지만 어떻게든지 주체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수습하고, 하나의 목적권을 이룰 수 있는 주체력을 가진 신인 것입니다. 종교가 그러한 신을 신앙의 모체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신앙에는 반드시 표준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신앙의 표준
그러면 우리 통일교회를 두고 봅시다. 통일교회 신앙의 표준이 되는 분이 누구냐 할 때, 일반 신앙을 하는 사람들은 통일교회의 신앙의 표준은 문선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문선생이 신앙의 표준이 될 수 있겠느냐? 만일에 신앙의 표준이 문선생이라는 사람이라면, 그 문선생은 이 땅 위에서 오래 살아야 1세기 이내를 살 사람이 아닙니까? 1세기가 지나면 이 땅 위에는 없을 사람입니다. 우리가 주장했던 신앙의 목적이 1세기 이내에 다 이루어진다면 모르지만, 1세기 이후에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바랄 수 없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문선생이라는 한 사람이 그 내용이 되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문선생은 가더라도 문선생의 일이 문선생의 일로만 끝날 것이 아니라 문선생이 간 후에까지 하나님의 일로 남겨질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만, 오늘날 통일교회가 변하는 역사시대에 있더라도 변하지 않고 영원히 남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선생님이 신앙의 표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게 됩니다.
선생님 자신도 생활을 해 나가는 데, 신앙을 해 나가는 데도 반드시 어떤 표준을 중심삼고 거기에 일치될 수 있는 행로를 걸어가야 됩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표준이니만큼 절대적인 자리, 심각한 자리에서 대해 나가야 됩니다. 만일 그 표준과 방향이 엇갈리게 될 때는 통일교회도 멀지 않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환경에 있어서나, 역사시대에 있어서나, 언제나 개인이 하나의 표준을 중심삼고 일체가 되지 않을 때에는 제거당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만일 갑이라는 사람이 어떠한 표준을 중심삼고 나가다가 그 표준과 일치되지 못하고 중간에서 끊어지게 될 때에는 자기보다 그 표준에 더 가까운 자리에서 일치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그 자리를 넘겨줘야 됩니다. 이렇게 해서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통일교회가 가는 길을 중심삼고 볼 때, 여기에는 개인으로서 가야 할 길이 있을 것입니다. 개인 개인으로서 신앙해 나가야 할 길이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가정이 가야 할 통일교회의 어떠한 표준이 있을 것입니다. 통일교회 식구면 식구로서, 씨족이면 씨족으로서, 통일교인들이 가야 할 길의 표준이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통일교회 교인들이 이루어야 할 사회가 있으면 사회로서의 가야 할 길이 있을 것이요, 통일교회 교인이 이루기를 바라는 나라로서 가야 할 변함없는 표준이 있을 것입니다. 그 표준에 일치될 수 있는 국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그리는 이상의 나라, 즉 지상의 천국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역사와 더불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는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확정적이고,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가 가야 할 절대적인 표준이 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통일교인으로서 가야 할 길을 어떻게 가야 하느냐? 개인이 가야 할, 개인은 이렇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개인의 표준이 있을 것입니다. 가정은 이렇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가정의 표준이 있을 것입니다. 혹은 국가면 국가의 표준이 있을 것이요, 세계면 세계의 표준이 있을 것입니다. 그 세계의 표준과 하나님의 표준이 일치되게 될 때 하나님의 뜻의 성사와 우리 인류의 뜻의 성사가 일치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에, 여러분이 통일교회 교인으로서 개인적 표준에 일치될 수 있는 생활을 하느냐, 가정적 표준에 일치될 수 있는 생활을 하느냐, 혹은 씨족이 가야 할 표준에 일치될 수 있는 생활을 하느냐, 혹은 민족으로서 가야 할 표준, 국가로서 가야 할 표준, 세계로서 가야 할 표준 중의 어떤 표준에 일치될 수 있는 생활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신앙자에 있어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표준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
아무리 통일교회를 10년 혹은 20년을 믿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지금까지 개인적인 표준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면, 그 사람은 개인완성의 기준을 중심삼고 노력한 사람이지 가정완성이라든가, 민족, 국가, 세계의 완성을 위해서 노력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잖아요? 만일 가정완성을 위해서 노력했다 할 때는, 아무리 완성했다 하더라도 가정완성의 표준에 일치한 생활을 한 것이지 민족이라든가 국가라든가 세계라든가 혹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될 수 있는 기준에서 생활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욱이나 타락권내에서 한 단계 한 단계 점진적인 발전과정을 가려 나가야 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보게 될 때, 이것은 고립된 입장에서의 생활권을 가진 것이지 전체의 완성을 위해서 노력한 생활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개인완성, 즉 개인의 표준에 일치되는 것은 물론이고, 개인의 표준에 일치된 후에 가정의 표준에 일치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가정의 완성을 이루어 가지고 종족이라든가, 민족이라든가, 국가를 완성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 표준을 확실히 알았느냐 하면 지금까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개인이면 개인이 이렇게 가는 것이 절대적인 표준의 생활이다 하는 그 기준이 나와 있느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가정이면 가정이 이렇게 가는 것이 가정의 절대적 기준이라고 어떤 종교가 가르쳐 주었느냐? 가르쳐 주지 못했습니다. 혹은, 민족이면 민족이 이렇게 하는 것이 민족의 절대적 기준이다 하는 것을 가르쳐 주지 못했고, 국가면 국가가 이렇게 하는 것이 국가의 절대적 기준이다 하는 것을 가르쳐 주지 못했다 이겁니다.
이렇게 볼 때 자기 나름대로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자기 개인 앞의 신앙의 표준을 대해 어떻게 추구하고, 자기가 대상의 입장에서 그 추구되는 목적을 어떻게 성사해야 되느냐 하는 문제를 알지 못한 채 지금까지 신앙해 온 사람들이 태반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이냐? 뻔한 것입니다. 개인의 표준에 개인이 일치하지 못할 때는 개인의 표준을 중심삼은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완성권내에 있지만, 가정의 표준을 중심삼고 노력해서 거기에 일치하지 못 할 때는 가정의 표준을 중심삼고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표준에 접근하는 방법
그렇다면 우리가 이것을 피해 갈 수 있는 길은 없느냐? 이것을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겠느냐? 선이면 선, 어떠한 신앙의 표준이면 표준과 일치될 수 있는 공통적인 생활방법, 그 길을 가려면 이래야 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방향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 방향을 어떻게 잡아가야 우리가 개인의 기준을 무난히 넘어갈 수 있고, 가정의 기준에 접근할 수 있는 요건을 많이 갖출 수 있겠느냐? 가정에서 종족으로, 종족에서 민족으로, 민족에서 국가로 접근할 수 있는 공통적인 방향의 길이 무엇이냐? 우리는 이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그 방법이 무엇이냐? 그것은 자기를 위해 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좁혀 갈 수 있는, 거기에 접근해 갈 수 있는 공통적인 길이 무엇인가 찾아보게 될 때, 종교의 가르침을 두고 보면, 자기를 위해 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남을 위해 살라고 했습니다. 생애의 목적을 자기에게 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두었다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살라 이겁니다. 거기에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 있다면 그것은 남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사는 데는 적당히 사는 것이 아니라 희생하며, 이익을 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손해를 보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 길밖에 없습니다.
공통적인 길에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길을 모색한다면 그 길이 무엇이냐? 그 길은 자기를 위주하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목적을 두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목적은 자기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두는 것입니다. 목적을 상대에게 두어야 하는데, 상대에게 두는 데는 누구를 중심삼고 두느냐? 물건도 아니요, 세계도 아닙니다, 사람을 중심삼고 두는 것입니다. 사람 중에서도 제3의 사람, 다른 사람에게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라는 권내에 두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두어야 된다 이겁니다.
우리 집이 있다 할 때, 그 집이 선한 집으로 남아지기 위해서는 남을 위하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그 집은 선한 집이 못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집은 거기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 사느냐? 3자권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자기 자체의 목적을 추구하는 자리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목적을 추구하는 자리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그 길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종교 전체를 두고 볼 때, 거기에 공통적인 내용의 길이 되는 것은 그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선 여러분이 이걸 알아야 됩니다.
신앙의 표준에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냐? 목적을 자기에게 두지 않는 것입니다. 목적은 내 목적이지만 그것을 상대에게 두는 것입니다. 목적을 위해서 내가 희생해야 그 목적이 이루어지지 목적을 위해서 상대방을 희생시키면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열만한 목적을 위해서는 열만한 목적 앞에 열만한 희생의 대가를 내가 부가시켜야지, 거기에서 끌어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표준에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은 그 절대적인 목적을 자기 자체에 두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제3자에게 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가는 방향은 어떠해야 되느냐? 남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남이 좋아진 뒤에 내가 좋아져야 됩니다. 이러한 생활이 희생의 생활, 희생의 길입니다. 이렇게 희생하면…. 좋아지는 데는 내가 먼저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목적이 먼저 좋아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상대를 위해 희생하면 희생을 하는 사람보다도 상대가 좋아지는 것입니다. 상대가 좋아져야 합니다. '몇천 년, 몇만 년 후에 너와 내가 기쁠 수 있는 목적을 위해서 너도 이용한다' 해 가지고 나가면 다 좋아집니다. 그렇지 않아요?
우리 통일교회 자체에서는 민족복귀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민족복귀를 하면 민족복귀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민족이 복귀되면 나도 복귀됩니다. 이중의 목적이 성사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 일대 내에 민족을 복귀해 가지고 우리가 잘살아야 되겠다고 해 가지고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면, 이용당했다는 결론이 벌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신앙자로서 언제나 생각해야 할 문제는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표준이 있다 하는 것입니다. 개인이면 개인을 중심삼고 바라는 기준, 가정이면 가정을 중심삼고 바라는 표준, 사회면 사회를 중심삼고 바라는 표준, 국가면 국가를 중심삼고 바라는 표준, 세계면 세계를 중심삼고 바라는 표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표준 앞에 어떠한 무리가 남아지느냐? 남아질 수 있는 무리는 어떠한 무리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영원히 남아지는 사람이 되려면
자기만을 위해서 움직이는, 자기 하나의 행복을 바라고 자기를 중심삼고 움직이는 사람은 자기를 중심삼고 끝나는 것입니다. 남을 중심삼고 움직이면…. 만일 내가 가정을 중심삼고 움직인다면 내가 쓰러지면 가정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의 움직임이 친척이라든가 이웃 동네에 영향을 미쳤다 할 때는, 영향을 받은 종족이면 종족, 혹은 동네가 망하지 않는 한 영향을 미쳐 준 가정의 사상은 남아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한 개인이 국가면 국가, 민족이면 민족 앞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상을 가지고 희생의 대가를 치러서 공인받을 수 있는 일을 했다면 그 국가와 민족이 망하지 않는 한 그 사상은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그 개인이 만일 세계 인류가 좋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상을 갖고 있다면, 그 개인은 위대한 사상가가 될 수 있는 것이요, 위대한 종교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상이 세계적으로 판도를 넓혀 가면서 1세기, 2세기, 혹은 수천 년을 가더라도 남아지게 될 때, 그것은 반드시 새로운 사상으로 등장하는 것이요, 새로운 종교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개인을 위해서 희생하고 개인을 위해서 노력하기보다도 가정을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희생하고 노력하기보다도 종족을 위해서, 종족보다 민족을 위해서, 민족보다도 국가를 위해서, 국가보다도 세계를 위해서 희생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제일 클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세계적으로 남아지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다면 그는 세계를 위해서 희생해야 됩니다. 국가적으로 남아지고 싶다 하면 국가를 위해서 희생해야 됩니다. 국가를 위해서 희생하게 되면 국가적으로 남아집니다. 애국자는 국가를 위해서 희생한 대표자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상을 중심삼고 민족적으로 남아질 수 있는 생애를 살았다면, 그 민족은 그 사람의 사상을 민족사상으로 추대할 것입니다. 그 사상은 그 민족이 없어지지 않는 한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 자신이 장구히 남아질 수 있는 공을 남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개인보다도 가정을, 가정보다도 종족을, 종족보다도 민족을, 민족보다도 국가를, 국가보다도 세계를 위하라. 더 큰 것을 위해서 희생하고, 더 큰 것을 위해서 극복하라 하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개인이 완성되지 못했지만 가정완성을 위해 노력했다면, 개인이 개인적 표준에는 미달했지만 가정의 표준에 도달하기 위해서 노력했다면 개인의 표준에 도달하기 위해서 노력한 것보다도 몇 배나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표준을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도 가정의 표준을 위해서 노력한다면 그 가치는 몇 배나 되는 것입니다. 개인의 표준에 도달하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보다도 도리어 가정의 표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남아집니다. 개인은 망하더라도 그 개인이 세운 공은 가정 앞에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가정은 망하더라도 그 가정이 종족을 위해서 희생했으면, 그 가정은 미완성이 되어도 종족을 중심삼고 남아지는 것입니다. 종족은 망하더라도 민족이 남아질 수 있고, 민족은 망하더라도 국가는 남아질 수 있고, 국가는 망하더라도 세계는 남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더 큰 것을 위해서 희생하고, 더 큰 것을 위해서 자기 일신을 투입하면 남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표준의 범위에 가까와지는 것입니다.
이걸 볼 때, '큰 분야에서 희생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나가라'고 하는 종교가 고차적인 종교입니다. 고차적인 종교는 자기 민족만이 아니라 세계 만민을 위하는 종교입니다. 과거의 죄를 속죄하고 현실의 죄를 속죄해 가지고 미래에 죄 없는 세계를 만들자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세계적인 것입니다. 고차적인 종교일수록 세계적인 것입니다. 사상가도 국가, 민족을 위주로 하는 사상가보다도 세계 만민이 공통적으로 잘살 수 있는 사상을 가진 사상가가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적이어야 합니다.
그럼 왜 세계적인 것을 바라느냐? 그것은 남아지기 때문입니다. 내 개인적인 것은 아무리 이루어 놓았다 하더라도 내 개인이 사라지게 되면 나와 더불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세계를 위해서 희생하고, 세계를 위해서 공을 들였다면 그것은 세계와 더불어 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반드시 세계 가운데서 세계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움직이기 때문에, 그 섭리의 방향을 중심삼고 언제든지 상응할 수 있고 언제든지 상대적인 환경을 거쳐 나가는 사람은 표준에 일치될 수 있는 거리가 가까와지고 세계적 완성권에 미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끝날이 되면 끝날이 될수록 어떤 시대가 오느냐? 끝날이 되면 될수록 세계의 표준이 일치화될 수 있는 때가 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표준이 세계적으로 일치화할 때가 올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일치될 수 있는 표준의 때가 되면, 어느누구든지 세계 사조의 움직임에 보조를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낙오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계를 구원하는 것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개인권을 중심삼고 살 때는 개인이 있고 가정이 있고 종족이 있고 민족이 있고 국가가 있기 때문에, 개인이 망하더라도 가정권을 중심삼고 다시 노력해서 나갈 수 있었지만, 세계를 중심삼은 세계적인 완성권 시대에 있어서는 세계를 중심삼고 노력하고 거기에 보조를 맞추지 않으면 남아질 수 없습니다. 세계적인 완성의 표준에 일치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이냐? 뜻을 중심삼고 볼 때, 그것은 세계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완성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런 때가 되려면 반드시 세계를 위해서 사는 때가 와야 될 것입니다. 개인이 개인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잘살게 하기 위해서 희생하는 시대가 와야 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사상을 지니고, 그러한 사상 밑에서, 그러한 사상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더불어 그 표준에 일치화하는 운동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가 모색되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한 종교가 어떠한 종교가 되느냐? 우리 통일교회가 그러한 종교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가 가야 할 길은 어떤 길이냐? 통일교회의 가정을 위해서 나가는 통일교회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통일교회가 남아지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을 위주로 나가는 통일교회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대한 민국을 넘어 세계를 위해서 나가야 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늘땅을 위해서 나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먹고 사는 생활 전체가 최고의 기준, 최고의 신앙의 표준이 될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이 완성하는 때를 위해, 그 세계적인 기준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노력한 것이라면 그 노력한 것은 세계와 더불어 남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국가를 위해서 노력했다 하더라도, 그 국가의 표준이 세계의 표준과 다르게 될 때는 그 국가를 위해서 한 노력은 사라지게 됩니다. 또 아무리 종족을 중심삼고 노력했다 하더라도 종족의 기준이 국가의 기준과 다르게 될 때는 그 종족의 노력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노력하는 데 있어서도 국가권내에 있는 가정을 중심삼고 노력했다면, 국가권의 기준이 사라지게 될 때 그 가정을 중심삼고 노력한 것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노력해야 됩니다.
세계를 위해서 걸어 나온 하나의 변치 않는 표준, 반드시 개인을 거쳐 나왔고, 가정을 거쳐 나왔고, 종족을 거쳐 나왔고, 민족을 거쳐 나왔고, 국가를 거쳐 나온 변치 않는 전통적인 인연을 이어받아 가지고 세계까지 나가는 그러한 족속이 있어야 되고, 가정이 있어야 되고, 개인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무슨 사상이냐? 이스라엘 사상입니다. 선민사상입니다.
이제는 세계를 향하여 나아갈 때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선조로부터 내려온 유대교의 사상을 이어받았고, 오늘날 통일교회는 유대교의 사상을 이어받은 기독교사상을 이어받았습니다. 지금까지는 기독교가 막연하게 세계를 위해 나왔다면, 이제는 구체적으로 세계를 향하여 나갈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을 가지고 세계적인 입장에 서서 노력해야 할 때인데, 그런 길이 오늘 통일교회가 가야 할 길입니다.
세계를 살리기 위해서는 국가도 희생해야 됩니다. 세계를 살리기 위해서는 민족도 희생해야 됩니다. 종족은 물론이요, 가정은 물론이요, 개인도 물론입니다. 이 세계를 살리기 위해서 수많은 세기를 거쳐왔습니다. 6천년, 60세기를 거쳐온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1세기 내의 생활이요, 1세기 내의 생애를 삽니다. 이 생애를 사는 우리들은 무엇을 표준으로 삼고 살아야 되느냐? 1세기 내의 자기 생애를 중심삼고 살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세계적 생애권을 중심삼고 살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일수록 세계적인 인물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이, 우리 통일교회가 가야 할 길은 내 개인을 희생하고 내 가정을 희생하고 우리 통일교회를 희생하더라도 대한민국을 위하는 길입니다. 대한민국이 통일교회의 사상을 중심삼고 하나되어 가지고 희생하면서 세계를 위해서 살고, 세계를 위해서 극복해 나간다면 망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이 세계를 위해서 희생했다 하는 사실이 세계적으로 공인되게 될 때 대한민국은 세계의 중심국가가 아니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개인의 생활이 세계를 위해서 사는 생활과 동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세계를 위하는 뒷받침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가정도 세계를 위해 사는 생활과 동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세계를 형성할 수 있는 가정의 표준에 일치될 수 있는 입장에서 나가야 됩니다. 혹은 종족도 세계의 표준에 일치될 수 있는 종족으로 남아져야 되고, 민족도 세계의 표준에 일치될 수 있는 민족으로 남아져야 됩니다.
그러나 그걸 일일이 따져 가지고 그때그때에 맞추어 타 가기에는 시간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생해 나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희생하면서 세계를 위하라, 세계를 위해 극복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개인 고개도 넘는 것이요, 가정 고개도 넘는 것이요, 국가 고개도 넘는 것이요, 세계까지 접할 수 있는 기준이 설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여러분들이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 한민족이면 한민족이라는 그런 감정을 중심삼고 '애국사상을 가져야 된다. 민족을 사랑하라'고 하는데, 민족만 사랑해 가지고 되겠어요? 민족만 사랑해 가지고 세계가 하나되느냐? 하나 안 됩니다. 보라구요. 민족만 사랑해 가지고 세계가 하나될 것 같아요? 하나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공산권을 중심삼고 보더라도 소련이 슬라브 민족을 중심삼고 공산권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데, 영속적으로 그렇게 나가게 되면 다른 민족은 거기에 흡수되지 않습니다. 희생해 가지고 '그럴 수 있는 가치와 내용을 지녔다. 당신들은 이러이러한 추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일시뿐만 아니라 영원을 중심삼고 절대적 표준에 일치될 수 있는 전통적 사상의 기원을 당신 민족 전체가 만들었기 때문에 그것이 당연하다' 하게 될 때는, 그 민족이 스스로 원하지 않더라도 환경이 원해서 거기에 흡수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세계를 하나로 만든다는 문제를 중심삼고 볼 때, 통일교회면 통일교회 사람이 통일교회 사람을 더 사랑한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통일교회를 넘어서 통일교회 사람보다 세계를 더 사랑한다는 사상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끼리는 냉대하고 우리끼리는 돌보지 않더라도, 그 누구를 돌보는 것보다도 세계를 돌보는 것이 선이라는 공통적인 사상이 주류를 이루어 가지고 나간다면, 우리 통일교회는 세계적인 종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를 희생시켜 가지고 통일교회 사람끼리 사랑하자. 이것이 통일사상의 주류다' 하면 망합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는 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앞으로 통일교회가 가야 할 길에 있어서 국제결혼 문제는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한국과 일본을 중심삼고 볼 때, 한국과 일본은 국가적으로 원수입니다. 나 자신을 중심삼고 보더라도 일본 사람은 참으로 잊을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원수입니다. 그 원수를 원수로 남길 수 있는 그런 주장을 하는 통일교회 사상이라면, 그 사상은 원수 앞에는 필요 없는 사상입니다. 이것은 원수가 배척할 사상이지 원수를 흡수할 수 있는 사상은 못 되는 것입니다.
원수들까지도 필요로 할 수 있는 그런 사상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원수를 사랑해야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원수를 믿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원수의 한계선이 국가간이기 때문에, 세계를 중심삼고 볼 때 이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계를 찾기 위해서는 너와 나 둘이 손을 맞잡아야 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생각하면 원수를 용서하고도 남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사람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의 간부들, 본부면 본부의 간부들로서 물론 위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위신을 갖는 데 있어서 '사무적인 내용, 혹은 명령계통을 중심삼고 위신을 세워야 되겠다. 너희들은 나중에 들어왔으니, 우리의 지도를 받아라' 하는 사고방식은 버려야 합니다. 또 간부들 가운데 '지도를 받아라' 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안 되는 것입니다. 새로 들어온 사람들, 외국 사람이면 외국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들이 희생해야 되는 것입니다. 본부에 있는 사람으로서 그 사람들에게 위하는 것을 보여 줘야 합니다. 한국 민족 앞에 보여 준 것은 그 사람들 앞에 실지로 보여 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소문을 통해서 알게 되었으니 그 아는 것이 실현될 수 있는 과정이 있어야 될 것 아니예요?
그러므로 본부에 있는 사람들은 본부를 찾아온 외국 사람들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계를 위해서 희생한다고 했으면, 세계를 대표한 외국 사람들이 찾아올 때, 그 개인 개인을 대해 희생하는 정신 자세, 생활 자세를 보여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과거에 이랬으니 오늘에 와서 뜻을 따라온 너희들은 우리 앞에 순종해라' 해서는 안 됩니다. 보여 주고 나서 그래야 됩니다. 보여 주어서 순종하게 해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 간부들 가운데는 인사이동을 시키게 되면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승진이니 뭐니 좌천이니 해 가지고 섭섭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계를 위해 일하는 데 있어서 승진이 어디 있고 좌천이 어디 있습니까? 낮을수록, 낮은 데서 충성할수록 그 사람은 애국자가 될 수 있고, 세계적인 성인의 반열에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알아주는 데서 충성하는 것보다 몰라주는 데서 충성하는 것이 더 가치 있습니다.
'내가 과거에는 이랬는데 지금은 이래야 되느냐'고 하는 사람을 보면 내가 기분이 나쁩니다. 이번에도 그런 사람이 있으면 들어 보라구요. '내가 들어오기도 먼저 들어왔고, 혹은 실적을 봐도 이런데 그럴 수 있느냐' 여기에 최창림 같은 사람을 보면 그런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협회장을 불러다가 뭐 몇 번씩 말했다나요? 그런 사람들은 용서할 수 없다 이겁니다. '선생님이 지금 뭐 뭐' 이러고 있어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면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누구는 뭐 어떻고, 실장은 누구를 시키고, 뭐 어떻고 어떻고, 우리 체면이 무엇이 되느냐' 한번 그렇게 건의했으면 됐지 두 번씩이나 불러 가지고 말하고, 그래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는 여기 협회장부터, 선생님 자신부터 지방으로 가려고 합니다. '지구장이 되어야 좀 어떻고…' 하기 때문에 지구장제를 철폐해 버린 것입니다. 지구장이 되어야 좋고 지역장은 틀렸다고…. 그건 누구를 위한 거예요? 누구를 위해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위해 한다면 하나님 앞에 드러내서 간판을 가지고 해야 하나님이 칭찬해 주느냐 이겁니다. 말없이 해야 됩니다, 말없이. 알아주든지 말든지….
자기를 중심삼고 신앙의 표준을 세우지 말라
자기의 생각에 '나는 세계를 위해서 충성해야 된다'고 하겠지만 아직까지 세계를 위해서 살지 못했지 않느냐 이겁니다. 여기에 있는 간부들, 통일교회 협회간부로서 세계를 위해서 한 게 뭐 있어요? 뭐 했어요? 한국의 통일교회 간부라고 해서 일본에 가서도 통일교회 간부 시켜 줄 줄 알아요? 천만에. 앞으로 일본에 승공연합 지부를 만들려고 하는데, 그때도 여러분이 내가 한국 본부에서 왔으니 나와 의논해야 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말없이 뒤에 서 가지고 그 나라를 위해서 본을 보여야 됩니다. 본을 보여 주어 가지고 그들이 비로소 문의하러 찾아와서 '당신이 지도해 주십시오'할 때 지도해 주면 모르지만, 본부에서 왔다고 해서 '이렇게 해라'하는 생활태도를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신앙의 표준을 자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표준은 세계입니다. 보라구요. 개인을 위해서 아무리 충성했다 하더라도, 개인의 성과는 가정이 충성한 성과를 못 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은 접어두고 가정을 위해서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도의 길이요, 선이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가정을 위해서 충성했다 하더라도, 가정이 씨족이면 씨족, 민족이면 민족을 위해서 충성하는 것을 못 당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가정이 망하더라도 종족은 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종족이 망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개인이 희생되는 한이 있더라도 가족들은 망해서는 안 됩니다. 가정을 남기기 위해서는 개인이 희생해야 되는 것입니다.
가정이 남아지기 위해서 종족을 희생시키고, 문중을 희생시켜요? 그건 안됩니다. 문중을 남기기 위해서는 가정이 희생하는 것이 선이 아니겠느냐? 그렇게 되면 그 가정은 문중의 주류 가정, 중심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또 민족을 남기기 위해서는 씨족이 희생해야 된다 이겁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는 김씨 문중이면 김씨 문중이 망해야 됩니다. 망하는 것이 도리라는 것입니다. 응당히 그래야 됩니다. 세계를 살리기 위해서는 한민족이 망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야 됩니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앞날에 있어서 이러한 세계적인 사조로 갈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 할 진대 끝날이 되면 될수록 세계를 위해서 살아야 할 종교면 종교, 국가면 국가가 나와야 합니다. 자기 종교를 위해서 사는 종교는 망합니다. 세계를 자기 종단을 중심삼고 몰아내겠다는 종교는 망합니다. 자기 민족을 중심삼고 세계를 몰아내겠다고 하는 민족은 망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위할 수 있는 종교, 세계를 위할 수 있는 민족은 남아지지만, 자기 민족을 중심삼고, 자기 종교를 중심삼고 세계가 자기들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해 가지고 나가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기독교는 한계점에 도달했습니다. 기독교는 성경을 절대시하고 기독교를 절대시하는, 생명의 터전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것이 국가 민족을 중심삼은 사상, 이스라엘 국가 민족을 중심삼은 사상이 되었는데, 그것이 세계적인 사조권내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기독교가 되었기 때문에, 기독교를 위주한 세계는 찾아왔지만 세계를 살리기 위한 기독교, 세계를 살리기 위해 예수같이 희생해야 하는 기독교의 입장을 망각했기 때문에 기독교는 망한다 이겁니다.
미국도 그렇습니다. 미국이 오늘날 선진국가로서 기독교 사상을 중심삼고 민주주의 국가를 지도하는 국가가 되었지만, 미국을 위주로 한 세계주권, 세계 민주주의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위한 민주주의는 있을 수 있지만…. 미국이 민주세계를 살리고 세계가 공동적으로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게 될 때는 미국이 민주주의의 주도국가로서 남아질 수 있지만, 자기 국가를 중심삼게 될 때에는 분립되는 것입니다. 그 주인은 탈락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표준, 영원한 세계적 승리의 표준을 바라보고 가야 할 우리들은 개인생활을 표준하고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하는 사람보다도 가정을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염려하지 않고 가정을 위해서 희생하고 염려하는 사람은 자기 개인의 생활, 자기 개인의 신앙의 표준, 자기 개인의 섭리적 표준, 인격완성의 표준을 넘어갈 수 있습니다. 자기 개인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가정을 위해서 희생했으면, 자기를 위해서 일생 동안 희생한 사람보다도 남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가정이 자기 가정을 위해서는 하나도 희생하지 못했지만 종족을 위해서 희생했다면, 희생한 그 가정은 종족과 더불어 남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종족이 자기 종족을 위해서는 희생하지 않았고 종족을 위해서는 수고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민족을 위해서 살았다고 할진대는 그 종족은 반드시 민족과 더불어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해야 할 통일교회
오늘날 이 세계 국가 가운데에서 세계를 자기 국가보다 더 존중시하면서 세계를 위해 희생하는 국가가 있으면, 그 국가는 세계를 지도하는 세계의 중심국가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국가를 창건하기 위한 어떠한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 뜻을 가려 가고자 하는 것이 통일교회 사상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를 위해서 희생했다 할진대는 대한민국 자체내에서 이루어야 할 개인적이요, 가정적이요, 종족적이요, 민족적인 기준을 위해서, 일대 혹은 일생을 통해서 희생하지 않았더라도 일차적으로 세계를 위하는 분야에서, 세계적 기준을 완성할 수 있는 자리에서 희생하게 되면, 그것으로서 국가적인 이념권을 넘어설 수 있는 승리의 터전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잖아요? 살인 강도라 하더라도 국가의 비상시에 적진에 들어가서 민족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희생하게 될 때는, 그 민족은 그 사람을 개인의 이름으로 죽이지 않습니다. 민족은 그를 원수와 대결해 싸운 기준을 중심삼고 평가하지 과거에 지은 죄를 중심삼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역사상의 지혜로왔던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런 사람들은 성현들인데, 그 성현들은 어떤 사람이냐? 세계를 위해서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역사적인, 몇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무엇을 위해 살았느냐? 세계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인류를 위해서 살았다 이겁니다. 보다 고차적인 세계를 위해서…. 민족주의 관념을 넘어섰다는 것입니다.
또한 세계적 관념권내에서 박애사상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너와 내가 다르다고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전부 공통한 입장에 놓고 자기 형제 이상으로 사랑하려고 한 그 사상을 중심삼고 세계를 수습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삼은 민주세계권내의 사상적인 기반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민주세계의 사상적인 터전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닦아진 것이라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오늘날 이 통일교회가 국가 민족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국가 민족이 복귀되지 않은 때에는 세계를 위해서 희생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국가는 망하더라도 통일교회로 말미암아 세계가 다시 살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면, 통일교회로 말미암아 한민족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국가는 달라질는지 모르지만 한민족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우선 한국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입니다. 묵묵히 희생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찾아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했기 때문에 이것을 알아주소'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시련이요 하나의 수련이요, 미래의 세계를 위한, 보람 있는 그 때를 맞기 위한 준비기간으로 알고, 이때에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랑할 수 있는 미래의 그 때를 위해서 가야 합니다.
선두에 선 사람일수록 원수가 많은 것입니다. 원수가 많기 때문에 희생하는 데는 될 수 있으면 소문 내고 희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문 내지 않고 말없이 희생하라! 이것이 지금까지 선이 가려 나온 작전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무슨 영예로운 출세, 영전, 좌천, 그런 관을 갖지 말라는 겁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생각입니다. 세상은 돌아가는 게 이치라구요.
만일 통일사상을 중심삼고 국가적인 책임을 했다면 다른 민족 앞에 나갈 때는 그 책임은 그대로 적용하지 못합니다. 그 민족들이 이것을 알고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상대관계를 갖추어 나간다면 적용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모를 때에는 적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 대한민국이 아니라 일본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닦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모르는 민족 앞에 갈 때는 또다시 개척해야 됩니다. '내가 대한민국 혹은 아시아에 이런 기반을 닦았으니 알아다오' 하면 누가 알아주느냐 이겁니다. 그것은 분야가 다른 것입니다. 그 분야가 넓으면 넓을수록 맨 밑창에서부터 접선시켜 나가야 됩니다.
오늘날 선교사를 내보내는 것은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각 나라에 선교사들이 들어가서 '우리 통일교회가 이러이러하니 당신 나라도 이러한 것을 인정해 주시오'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것을 보고서 그 나라가 인정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목적을 위해서 하는 것이냐, 중국이면 중국, 일본이면 일본을 위해서 하는 것이냐를 보는 것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도 그래요. 지금 일본에서 바라보기를 '이것이 한국에서 나온 것이니 한국을 주체국가로 만들기 위한 사상이 아니냐' 이럽니다. 들이치려고 한다구요. 그들이 '한국을 주체 국가로 하려는 사상이 아니다. 아시아를 위한 사상이다'할 때는 남아진다 이겁니다. 한국 사람이, 한국에 있는 통일교회 교인도 한국을 위주로 하는 것보다도 아시아를 위하고, 더 높은 것을 위주로 하게 될 때는 남아진다는 겁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역사 형성에 있어서 원칙으로 되어 있습니다.
통일교인들이 지녀야 할 주류사상
이렇게 볼 때, 앞으로 통일교회 교인들이 어떤 주류사상을 지니고 가야 되느냐? 세계를 위해서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는 데는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희생해야 됩니다.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그렇게 살아야 되느냐? 일생동안 그렇게 살아야 됩니다.
부모는 그렇잖아요? 부모는 자식을 낳은 그날부터 자식을 위해 사는 거라구요. 죽을 때까지. 자식을 길러 줄 때까지가 아니라구요. 백 살 난 부모가 여든 살 난 아들에게 '아가 아가' 그런다는 거라구요. 길 떠나게 될 때에는 차를 조심하라고 주의를 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출발서부터 끝까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하시냐? 왜 만민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좋아해야 되느냐? 하나님이 그러신다는 거라구요. 처음부터 끝까지라구요. 과정에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구요. 누구를 위해 계시느냐?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계시지 않습니다. 자식들을 위해서…. 자식이 되어야 할 입장에서 타락한 이 인간들을 위해서, 탕자와 같은 자식들을 위해서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위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계셨느냐? 이렇게 이렇게 계셨는데 거기는 비참한 자리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비참했느냐? 하나님 때문에 비참했다면 다 고개를 숙이는가 보라구요. 그러나 누구 때문에 비참했느냐? 하나님 때문에 비참한 것이 아니고 자식 때문에 비참했다. 타락하여 이지러진 자식 때문에 비참했다는 것을 알게 될 때는 도리어 그 아는 심정으로 말미암아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수고하고 희생하신 아버지셨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것만이 타락한 우리 인간을 복귀시킬 수 있는 폭발적인 동기가 될 수 있지 그것이 없어 가지고는 복귀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도 그렇습니다. 선생님이 선생님의 이익을 위주해서 살면 통일교회는 끝장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수단 방법을 동원해 가지고 노력한다 해도 끝장난다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를 인도해 나가고 있지만 통일교회를 잘되게 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을 잘되게 하기 위해서 통일교회 교인을 희생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교회가 가야 할 표준과 일치될 수 있는 길입니다. 이 범위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세계를 위해서, 세계가 전부 일원화될 때까지 우리를 희생시키고자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대신 입장에 세우셔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시니까, 하나님의 아들도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까운 자리에 선 아들일수록 희생해야 됩니다. 희생시키고 나서, '야, 너 수고했다' 그럽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농토에 나가서 하루종일 일하고 돌아오면서 아버지가 아들을 바라보며 '너, 수고 많았구나, 야 고맙다' 그럴 수 있어요? 아버지일수록 그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수고한 줄 알면서도 속으로만 '이 녀석, 또 수고했구만' 이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나 수고했는데 왜 몰라줘요' 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면 그보다 더 수고를 할 때에는 그에게 값을 치러 주어야 된다는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에서 끝장입니다. 그런 사고방식은 안 됩니다. '무슨 부장에서 뭐가 되고, 뭐 어떻구, 나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 이러는 사람에게는 그 이상의 일은 못 시킨다 이겁니다. 위에 올라갔던 사람을 밑창에 처박아 놓았을 때 그 차이가 크면 클수록 그 사람은 높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한 단계 낮추어졌다고 해서 눈물을 흘리고 입으로 조잘거리는 사람은 짧은 사람이라구요.
보라구요. 나는 이렇게 나왔어요. 하나님이 선생님에게 한 약속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건 여러분에게 말을 다 못합니다. 세계가 너를 위해서 있고, 얼마 기간이면 하늘땅이 전부 이렇게 된다고 하시면서 하늘 끝까지 쳐들어 올려 주셨어요. 그러나 그것만 바랐다간 망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통일교회가 망하지 않는 것은 그 반대적인 길을 걸어왔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서려면 든든한 기초공굴을 해야 됩니다. 공굴(콘크리트)을 하려면 저 바다 밑을 깊이 파고 들어가서 남모르는 기반을 닦아야 됩니다. '그 기초공굴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지, 하나님이 해줘야지'라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이용해 먹겠다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내가 해야 됩니다.
높은 빌딩을 짓기 위해서는 기초를 튼튼히 해야 됩니다. 강한 철재, 강한 쇠붙이 같은 것을 들이박아야 되는 것입니다. 박을 때, '아이고, 시끄럽다. 거 귀가 찢어지겠구만' 이래 가지고 동정해서 되겠어요? 무자비하게 내리쳐야 합니다. '이놈아, 들어가라 쑥 들어가라' 해야 하는 겁니다. 거기에서 삐뚤어져 나가면 안 돼요. 삐뚤어져 나가다가는 큰일난다는 것입니다. 똑바로 나가야 돼요 똑바로. 하나님이 여지없이 들이치더라도 삐뚤어져 나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꺾여지면 안 됩니다. 똑바로 들이치는 일이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지주를 박는 것입니다. 감옥에 처넣어 가지고도…. 세상에 그 이상의 망신살이 없는 거라구요. 별의별 수모를 받는 자리에 처넣는 것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내가 약속한 것을 이어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아무리 수모를 당해도 불평해 본 적이 없어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생님이야 뭐, 철근 같은 사나이인데 뭐, 피곤한 줄도 모르고, 언제나 기운차고 언제나 자신만만해' 하지만, 자신 만만할 게 뭐 있느냐 이겁니다. 아직까지 할 일을 다 못 했다는 것입니다. 할 일을 못 하고 죽으면 큰일납니다. 그렇잖아요? 할 일을 못 하고 죽으면저 나라에 가서 면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일대에 국가뿐만이 아니라 세계를 인연짓기 위해서 가야 됩니다. 지금 내가 일을 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를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전혀 생각하지 않는 일을 지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다가 무너지느냐 안 무너지느냐, 혹은 실패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실패해도 할 수 없다 이겁니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세계를 위해서 가는 길임에 틀림없고, 하나님이 가시는 길이 그렇게 가시는 길임에 틀림없다. 이 길이 아니면 하나님이 가실 길이 없다. 내가 인류를 대신해서 첨단에 서 가지고 누구보다 정성을 다할 때 이 일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거다' 하며 갑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안 될 것 같은데도 끝에 가서는 골인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여러분이 나가야 합니다.
세계를 위해 희생하면
아직까지 통일교회 교인들이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해야 할 일이 많으면 써야 할 돈도 많은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이 많을 때에는 경제적 지원도 많아야 합니다. 그 경제적 지원은 어디서 해줄 것이냐? 그것은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 중에서 제일 귀한 것을 세계를 위해서 먼저 다 주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연보할 때도 귀한 것은 전부 내놓았다가 '이건 우리 아들딸에게 물려줘야지. 아들딸이 시집 장가갈 때 물려줘야지' 합니다. 그런 사람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아들딸은 물론, 가족 전체, 종족 전체, 민족 전체를 끌어다가 세계를 위해서 희생시키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을 때, 유대교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 되었다면 어떻게 하셨을 것이냐? 그 다음에는 로마를 위해서 싸우게 하셨을 것입니다. 싸우게 하는 데는 칼을 가지고 싸우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를 위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로마를 위해서 멋지게 희생시키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작전을 써서 세계를 구원해 내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게 될 때에, 앞으로 우리는 신앙의 표준을 어떻게 세워야 되느냐? 자기 개인을 중심삼고 사는 사람, '내가 이렇게 해야 구원받지' 하는 사람은 시시한 사람입니다. 통일교회식으로 말하면 '내가 이렇게 해야 축복받지' 하는 사람…. 그 축복은 누구를 위해서 받아요? 나를 위해서 받아요? 나를 위해서 받는 축복이 세계와 무슨 상관이 있어요?
오늘날 통일교회 문선생을 중심삼고 탕감복귀 역사를 해 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르지만 지금도 그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무엇 때문에? 내가 사는 것은 문선생 일생권내에 살고 있지만, 하는 것도 문선생 일생권내에서 하고 있지만 왜 세계와 관계를 맺느냐? 여러분이 이걸 생각 해야 됩니다. 그 목적이 대한민국이 아니라 세계다 이겁니다. 그 일의 목적이 대한민국이 아니고 우리 가정이 아니고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땀을 흘리고 노력하는 그것이, 들이 맞부딪치는 그 장면이 개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해서다, 이 일만은 남아야 된다, 이 세계 인류가 사라지더라도 남아야 된다' 하며 나가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그렇게 결정한 것은 아무리 누가 그치게 하고 깨려고 해도 절대 안 깨지는 것입니다. 오히려 깨려고 하는 사람이 망합니다. 틀림없어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 나오는 데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더구나 이번에 우리가 청평에 땅을 구매해서 앞으로 세계적인 국제 수련소를 지어 국제 수련생을 중심삼아 가지고 세계를 위해서…. 선생님 일대에 땅을 살 때에 처음으로 정성을 들이는 거예요. 그것은 대한민국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를 위할 수 있는 때가 맞선다는 것입니다. 운세도 세계적인 운세, 천운이 선생님과 맞서고, 땅도 다 선생님과 맞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말만 틀리면 꺾여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대한민국이 통일교회를 반대하는데, 하나님은 왜 통일교회 사람들 중에 이 길을 못 가는 사람들은 그저 망하게 하고 통일교회 반대하는 사람들을 들이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통일교회는 이 대한민국을 넘어서 있습니다. 통일교회가 대할 상대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세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은 이미 넘어 섰기 때문에 뒤에서 야단하는 거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에 대해서 무슨 칼질하고 뭐 그렇게 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앞에 오는 원수도 막아내야 되고 또 대비를 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은 참 무섭다는 거예요.
요번에 우리가 청평에서 약 8개월 동안 약 90명의 주인들로부터 땅을 샀습니다. 이틀 사흘에 한 건씩 계약을 한 것입니다. 세상에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게 하나님이 역사해 주신 것입니다. 반대하던 사람이 많이 희생되었습니다. 우리 때문에 한 7,8명이 꺾여 나갔습니다. 땅을 안 팔겠다고 반대하던 사람에게는 몇 개월 후에 부인이 무슨 이름 모를 병이 나 가지고 배를 째게 되는 이런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것을 볼 때, '아, 하나님은 계시는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때가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등등을 보게 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럴 수 있는 상대자를 세계적으로 남기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첨단에 서 가지고 그런 뜻을 받을 수 있는 무리가 나와야 되는데, 그럴 수 있는 무리가 누가 될 것이냐? 통일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통일교인은 그런 무리가 못 되더라도 통일교회 선생은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널려 있는 고차적인 영통인들은 통일교회 문선생을 증거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국가의 운세가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세계의 운세, 세계가 하나된 나라, 이상세계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이미 영계에서는 그런 권내에 있는 사람들의 동족권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리에까지 나오게 되면…. 선생님이 지금까지 편안하게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녹음이 잠시 중단됨 )
책임자의 어려움
오늘부터 장마철에 들어가게 되는데, 장마철이 되면 기분이 나쁩니다. 천막을 쳐 놓고 목사들을 모셔다가 수련하는 것은 우리 일생에 처음인데, 비가 오고 구질거리는데 천막만을 들락날락하게 되니 참 안 됐거든요. 천막으로 하려면 한 십오만 원이면 끝나는데, 다른 숙소를 지으려니 90평 가량 되게 지어야 되는데 90평의 건물을 지으려면 못해도 180만원, 200만원에 가까운 돈이 있어야 됩니다. 그 200만원에 가까운 돈을…. 통일교회 교인 가운데 연보하는 사람도 없다구요. 지금까지 선생님 위하려는 사람 어디 있었어요? 자기가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허덕거리고, 자기가 안타까우면 안타까와서 허덕거리지, 선생님이야 뭘 하든 자기와 관계없이 딴 나라 사람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겁니다. 그러니 할 수 없이 빚을 지고라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어제 전반적인 계획을 세워 가지고 7월 8일까지 수련소를 지으라고 했습니다. 어제 내가 그랬어요. 이런 지경에 일하는 사람들을 어떻게든지 모아야 하는데, 이번에 한 30명을 지방으로 인사 이동함으로 말미암아 지구장 아래에 있던 부장급의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당장 올라오라 해 가지고 청평에서 땅을 파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수련회를 하고 사흘동안 땅을 파라고 해 놓고 누가 어떻게 하나 가만히 두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 내가 시켰으니 할 수 있어요?
어저께 아침에 선생님이 척 일어나니까 날이 좋지 않아요. 기분이 참 좋지 않아서 이층에서 가만히 있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어요? 까딱 잘못했다가는 사고날 것이 뻔하거든요. 사고 생기면 큰일난다구요. 그래서 가 보고 오자 해서 조금 늦게 나섰습니다. 내가 운전수에게 오늘 주의하라고 해 가지고 천천히 40킬로미터 정도의 속력으로 갔어요. 보통 때 같으면 40분이면 가는데 한 시간 반이나 걸렸어요, 가는 데만. 가는데 비가 오는 거예요.
비가 오는데 거 뭐하러 가느냐? 안 갈래야 안 갈 수 없는 거라구요. 그저께도 갔다 오고 어제 저녁에도 갔다 왔는데 뭐 하러 또 가느냐? 그 사람들에게 일을 시켜 놓았으니, 별의별 궁상 다 하고 있을 게 아니예요? 그러니까 가는 거예요. '선생님은 뭐 일을 시켜 놓고 나타나지도 않고, 뭐 이렇구 저렇구…' 그러니 할 수 없지요. 그래서 책임자는 힘든 거라구요. 선생님이 떡은 못 사주고 좋은 예물은 못 갖다 주더라도, 비가 오는데 우산도 안 받고 배를 타고 갔다 오는 그것으로 그 수십 명이 고단한 것을 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는 그런 놀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가야 할 길이 오늘 이 일만이 아니라구요. 현재 청평에서 땅 파는 일만이 아니라구요. 이것은 통일교회를 위한 일입니다. 그렇지요? 통일교회를 위한 일을 하고 있지 않느냐? 여러분은 나라를 위한 일을 해야 됩니다. 나라를 위해서는 삼팔선도 넘어야 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위해서는 소련의 첩보원들과 싸워야 할 때도 와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럴 수 있는 일을 하게 되면 그것이 마지막 길이 아니겠느냐 이것입니다.
이것은 중간과정인데 여기에서 떨어져 가지고 통일교회 문선생을 걸고 넘어가면 곤란하다 이겁니다. 걸고 넘어가더라도, '누구보다도 불쌍한 분이 통일교회 문선생님 아니냐? 저분 대해서는 걸 수 없다' 하면서…. 그래 가지고도 걸고 넘어가면 할 수 없습니다. 만일에 책임자가 걸리게끔 해 가지고 세 사람 이상이 참소하게 되면 그는 길이 막힙니다. 길이 막힌다구요.
오늘날 통일교회에서 떨어진 사람들이 말이예요. 나가 가지고…. 떨어져 나간 사람들 중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래 왔어요. 유협회장이 욕 많이 먹었지요. 그렇게 나왔지만 통일교회 문선생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반대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반대하면 몽시로 가르쳐 준다구요. 그러니 이게 골치 아프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하나 자신을 갖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뭐냐? 내가 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나도 망할 수 있는 거라구요. 국가적 책임이라든가, 세계적 책임을 중심삼고 가는 길의 선두에 선 선생님은 무엇 하나라도 잘못 결정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하늘땅이 녹아날 수 있는 입장에 선생님이 서 있습니다. 잘못 결정했다가는 문제가 큽니다. 일년에 갈 것을 십년, 백년 돌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내 감정을 중심삼고 결정하지 못합니다. 중대한 일을 결정할 때는 반드시 여러분 모르게 기도를 해야 돼요. 내가 무엇을 하자 할 때는 그저 아무렇게나 생각해 가지고 기분에 따라 하는 것이냐? 천만에요. 여러분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내적인 결정을 짓고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하늘 꼭대기에서 인정하지 않으면 뭐가 되겠습니까? 꼭대기에서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리 큰 일을 했다 하더라도 간신이 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뜻, 둘째는 세계의 뜻
내가 뭐 이렇고, 저렇고 그런 얘기를 안 하지만 말이예요. 이러쿵저러쿵 하는 사람들은 선생님 앞에 칭찬받는 입장에 서지 못합니다. 그런 뭐가 있다는 거라구요. 아침에 척 일어나면 벌써 오늘 좋은 일이 있겠는지, 나쁜 일이 있겠는지 압니다. 또 여러분이 보고를 하러 들어오면 척 벌써 압니다. '아, 이 사람이 오늘 좋지 않은 일을 했구나' 하고 말이예요. 그런 것이 있다구요. 사람에게는 전파가 있습니다.
혹은 사람에게서 냄새가 나지요? 그 냄새는 후각을 중심삼고는 못 맡는 것입니다. 영적인 면에 여러분 각자의 자력선과 같은 파장이 있어서 좋고 나쁜 체취 같은 것을 대번에 안다는 것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대번에 압니다. 가만히 앉아 가지고 대번에 안다는 거예요. 그 사람의 경지에 내가 딱 들어가는 거예요. 알려고 안 해도 벌써 그 사람의 마음이 반응되어 들어옵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인지 아닌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싸우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망하느냐, 흥하느냐 하는 길을 따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망하는 것이요, 이렇게 하면 흥하는 것이다 하는….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나갈 때는 망하는 거라구요. 어디까지에도 그 길은 남아 있습니다. 777가정 축복 때 선생님의 집 살 돈을 마련해 주었는데도 내가 집을 못 샀습니다. 양심상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러고 싶은데 순서가 있는 거예요. 내가 이 순서를 알고 있는데, 하늘의 섭리의 뜻을 먼저 내가….
뜻이라는 것이 뭐냐? 첫째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둘째는 세계의 뜻입니다. 세째는 뭐냐 하면 후손, 자손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면, 하나님을 위한 뜻이 아닙니다. 세계를 위한 뜻입니다. 또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일대를 위한 뜻이 아니라 후손을 위한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세계를 위한 것이요, 후손을 위한 것입니다.
뜻을 위해 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뜻대로 살아야 되는데, 세계가 뜻의 목적지이기 때문에 세계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세계를 위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내가 오늘 잘되어 가지고는 내가 남아지는 게 아닙니다. 후손을 위해서 남기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뜻을 중심삼고 가는 사람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 교인으로서 신앙적인 표준을 정하는 데는 어떻게 정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뜻은 세계입니다. 이 세계의 주권, 선의 주권을 어떻게 세우느냐? 일구월심, 자나깨나 그것을 위하여 나가야 됩니다. 세계의 소식을 듣게 될 때, '아, 그 자리로 세계가 다시 돌아오는구나' 하면서 그것을 바라보고 저울질해 나가야 됩니다.
세계를 위해서 생활하라! 세계에 필요한 사람이 되라! 세계를 위한 영원 불변한 사람이 되라!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를 위해서 보다 희생할 수 있는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세계를 책임지는 자리에서 희생하려면 반드시 세계를 위하는 데 있어서 부정이냐, 긍정이냐 하는 결과를 결정지어야 합니다. 보다 나은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결과를 타진하지 않고는 세계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길을 못 가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이렇다 하는 결정을 짓고 가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 자리는 무의미한 자리가 아니라 심각한 자리입니다. 심각한 입장에서, 결정적인 입장에서 출발하는 자리가 희생하는 자리더라 이겁니다.
희생할 때 그냥그냥 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의 어지러움을 박차고 헤치고 나서는 것이 가치 비례를 중심삼고 볼 때 그 어떠한 것보다도 가치적인 내용을 갖기 때문에, 현실적인 모든 것을 끌고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으로부터 자기의 모든 환경까지를 끌고 나갈 수 있는 요건이 뭐냐? 가치 기준에 있어서 세계를 위하는 것이 보다 가치 있다 하는 기준이 결정나야 합니다. 그래야 현실적 환경을 처리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또 다음은 뭐냐? 세계입니다. 후손을 위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앞으로 세계적인 본부가 되어야 합니다. 본부라고 해서 청파동의 본부가 세계 본부가 아닙니다. 내가 요번에 외국 사람들한테 이 본부는 이러이러한 역사를 중심삼은 무엇을 지닌 곳이기 때문에 초라하지만 여러분이 이 곳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지만, 이 곳이 세계본부가 될 수 없다구요. 세계본부라는 것은 제일이다 하는 의식을 주어야 됩니다. 또 세계본부는 새로운 곳에 만들어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의도에 땅을 사게 된 거예요. 땅을 사는 데는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곳에 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 세계본부를 만들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위해 세계본부가 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세계본부가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는 뭐냐? 세계 사람을 위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세계 사람을 위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뭐냐? 청평입니다. 청평에다 국제 수련장을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앞으로 거기에다가는 무엇을 하느냐? 각국의 선교본부가 있는 블록, 일본이면 일본 블록, 미국이면 미국 블록을 만들 것입니다. 방대한 지역을 사 가지고 거기에 있는 가로를 경계로 해서 미국이면 미국인들에게 떠맡기는 거예요. 미국인들이 와서 수련받으려면 미국인들의 취향에 맞는 도시, 마을을 만들고…. 각 나라의 문화를 총합할 수 있는 환경적 도시, 종합 촌락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앙에 우리 수련소를 만든다는 겁니다. 그래서 외국에서 수고한 사람들은 반드시 본부에 와서 수련을 받게 하고, 본부에 와 가지고 수련받고 돌아가는 것을 영광으로 알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경치가 좋아야 됩니다. 그리고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순회를 하게 될 때, 그들의 인상에 남을 수 있는 곳을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곳을 한 곳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순회하는 데 두달 혹은 석달은 걸릴 수 있는 코스, 몇 개월이라도 머무를 수 있는 코스를 우리가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니 명승지를 잡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명승지라야 일주일 혹은 열흘씩 지내 보고 '야! 한국이 이렇게 멋지구만' 하는 거예요. 이런 곳을 만들어야 합니다.
앞으로 세계 각 나라에서 한국에 왕래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어느 단체의 사람들이 많을 것이냐? 대한민국의 어떤 기관, 대사관 혹은 외국 공관에 관계된 사람들보다도 통일교회와 관계된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외국 손님으로 많이 찾아올 것은 틀림 없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외국 사람들이 왕래하는 이런 주류적인 입장을 책임져야 할 단체가 통일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 외국 사람들은 한국에 처음 왔다 가는 사람들이니만큼 한국을 소개하는 데 있어 선두에 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수련소를 좋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들이 '야! 가는 곳곳마다 절승이다. 명승지다. 대한민국은 참으로 아름다운 나라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지 않을 수 없는 나라다'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래 가지고 일주를 쭉 할 수 있도록, 여기서부터 동해안, 서해안, 남해안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명승지에 앞으로 우리가 반드시 휴식처를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한바퀴 삥 돈 다음에는 제주도로 가는 것입니다. 지금 제주도 서귀포에도 호텔을 지을 땅을 사 놓았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르지만, 거기에 박자를 맞출 수 있는 지역을 선정해 가지고 지금 이런 저런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모르지요? 그저 밥이나 먹으면 좋구, 편안히 잠이나 자면 좋다고 생각하지만 난 그렇지 않다구요. 여러분은 선생님을 돕기 위해서 따라온다고 생각하겠지만, 선생님은 여러분이 선생님을 돕기 위해서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고달프게 하기 위해서 따라온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고요.
앞으로 외국 사람들이 한번 쭉 왔다 가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그렇잖아도 한국은 신앙의 조국이요, 자기들의 이상적인 모국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자랑할 건데기가 없어도 자랑하려고 할 텐데, 자랑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추었으니…. 그렇게 되면 사돈의 팔촌까지 전부 다 데려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전부 다 소개해 가지고 몰려오게 되면, 우리는 관광사, 호텔을 만들어서 그 사람들을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국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게 되면 자연히 이 나라를 관광국가로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외국 사람들이 울상을 하고 오는 것보다 웃으면서, '야, 가고 싶었다' 하며 진짜 소망을 가지고 올 수 있는 이런 나라를 만들어야 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지금 통일교회 문선생을 보고 뭐가 그렇게 편안치 않아서 그런 일을 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뭐 돈이나 생기면 지금 못살고 있는 통일교회 교인들 월급이나 주고 잘 먹여 줘 가지고, 동네방네 친척들이 '아이구, 우리 누구, 우리 아들딸 통일교회에 잘 들어갔어, 잘 들어갔어, 또 들어가라' 하게끔 하지 않느냐는 거예요. '통일교회에 들어가서 시집장가 간다고 하더니 이 녀석아, 이 년아 너희들 그게 뭐냐, 통일교 문선생이 결혼시켜 줘서 너희들 요렇게 됐다'는 등의 별의별 소문을 듣고 다 알고 있어요.
그러나 아무리 대한민국내에서 욕을 먹지만 대한민국에서 욕먹는 대가로 세계적으로는 칭찬받을 사람의 수가 더 많아진다구요. 알겠어요? 가만히 저울질해 볼 때, 대한민국에는 마이너스이지만 세계적으로는 플러스입니다. 그러니 세계를 위하는 사람이 할 일을 대한민국에서 야단한다고 해서 안 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지방에 가게 되면 어떤 사람은 선생님을 만나겠다고 몇 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갔을 때는 아파 가지고 '아이쿠. 내가 이럴 때 아프다니' 하며 통곡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 사람은 선생님을 만나면 항의하려던 사람이라구요. '우리 딸 결혼식장에서 결혼 잘한다고 동네방네 다니며 선전을 잘해 놓았으니 이제는 반대도 할 수 없고,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겠다' (웃음) 이러고 있다가 '우리는 이제 결연해 가지고 통일교회 절대 반대하려고 그런다' 이겁니다. 동네방네 다니면서 칭찬하고 좋은 선전을 했기 때문에 하늘의 공신으로서 그 명단이 엄연히 올라가 있는데, 이것을 뒤집어 놓으면 선조들이 안 따라 준다 이겁니다. 선조들이 있으면 그의 모가지를 눌러야 돼요. 이런 것을 생각할 때, 그가 스스로 아프기를 잘했지 안 아팠으면 어떻게 됐겠어요?
대한민국을 세계의 주체국으로 남기자
이러한 등등의 문제를 두고 볼 때, 선생님은 망하지 않는 것이 절대적입니다. 온갖 정성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선생님 자신이 그냥 그냥 이럭저럭 가는 사람이 아니라구요. 정성들이며 가는 것입니다. 그제는 6·25동란이 일어났던 날입니다. 그 전날이 무슨 날이냐 하면 우리가 목사들을 데려다가 제7차 원리 공청회를 마친 날입니다. 이렇게 딱 맞아 들어갑니다. 이때는 통일교회가 넘어가는 때입니다. 단숨에 넘어가는 때입니다. 넘어갈 때에는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럴 때에는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섭리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금년이 6·25 21주년 되는 해인데 이것과 통일교회 선생님 21년노정 기간하고 어떻게 이렇게 맞아떨어지고, 7수에 해당하는 목사 장로들의 제7차 공청회 기간이 그렇게 맞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까지 3일 기간은 좋지 못한 기간입니다. 오늘이 27일이지요? 24, 25, 26일은 불길한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알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금년 6월에는 대한민국에서도 이렇게 변천이 벌어지지요? 우리 통일교회도 체제를 개편하여 새로운 체제로 죽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게 될 때, 하나님은 살아서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를 끌고 나가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목적점이 어디냐? 현재 이 자리가 아니예요. 이 자리는 낳은 자리입니다. 낳은 자리라구요. 낳은 자리에서 살아서는 안 되는 거라구요. 여기서 기원해서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이냐, 언제까지 갈 것이냐 하는 문제를 여러분은 모를 거예요.
이런 등등의 문제를 중심삼고 볼 때, 김일성이의 한계점을 왜 명년 1972년도까지로 잡느냐? 김일성이가 1972년도면 회갑을 맞습니다. 4월 15일이 생일이라구요. 이 녀석, 너 60세만 넘어 봐라, 이놈의 자식아! 그때까지 통일교회가 대한민국에서 민족을 걸고 가정과 개인이 희생할 수 있는 책임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공산당들이 나라를 중심삼고 충성하는 것 이상의 조건을 세워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세계에 없는 가정 출동, 가정의 아주머니 출동이라는 문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또 어떤 일을 시킬지 모른다고 지금도 야단하는데, 이제 그 아주머니들한테 '너희 아들딸까지도 같이 데리고 가서 희생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까지 생각해야 됩니다. 자기가 벌어 가지고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가서 3년 동안 나라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지금까지 통일교회가 제물 되기 위해서 왔지만 나라를 위해서 희생해라 할 때는 그 일을 해야 되는 거라구요. 이러한 등등의 길이 아직까지 여러분 앞에 남아 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표준이 무엇이냐? 국가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이 아니예요. 이런 말을 들으면 '아이구…' 할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라는 사람은 대한민국 사람 아닙니다. 대한민국에만 매여 있으면 세계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앞으로 세계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계주의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대한민국이 세계의 주체국가로서 남아질 수 있는 일을 하자는 것이 통일교회 문선생의 사상입니다. 통일교회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느냐? 대한민국을 이끌고 가 가지고 절대적으로 희생할 수 있어야 됩니다. 세계적으로 희생시켜야 됩니다. 세계를 위해 희생하며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세계가 빚을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잖아요? 여러분의 직장에서도 그렇지요? 직장에서 희생하면 희생한 만큼 올려 주는 것입니다. 올려 주는데도 내려가겠다면, 반동작용으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양심세계의 사조의 내용입니다.
인간이 망하지 않는 길을 가기 위해서는…. 더더구나 종교를 중심삼고 가는 길에서 개인을 위해 사는 사람은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개인을 위해 사는 사람은 열 번 수고하면 열 번 쪼그라들어요. 알았어요? 개인을 위해 고생하면 그저 폭싹 녹아 죽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은 고생하고 고생해도 지치지 않습니다. 보람이 있다는 거예요.
통일교회 패들의 얼굴을 보면 팽팽하다는 것입니다. 어저께도 박봉애씨가 와 가지고 누구를 만나서 얘길 하는데 왜 이렇게 젊어졌느냐고 하더라는 거예요. 자기 아들딸 위해서 먹고 살겠다고 까박까박하는 사람은 숨을 쉬어도 답답해 가지고 절벽강산으로 막힌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늙게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남을 위해서 살면 지금은 고생하더라도 앞으로의 생활이 훤히 트인 생활이기 때문에, 숨을 쉬어도 마음놓고 깊은 숨을 쉴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여건에 있어서 남보다 잘 되어 가는 겁니다.
우리 할머니들을 내 가만히 보게 되면 말입니다. 여기 석온 할머니를 보면 쪼글쪼글한 것이 보기에 견딜 수 없을 정도이지만, 한참 은혜에 취해 있을 때 척 보면 아주 미인으로 보일 때가 있다구요. (웃음) 인물을 보게 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다른 일면, 마음에 소망을 갖고 있는 얼굴을 보면 저런 할머니도 있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세상 할머니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자기 개인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가면 갈수록 절망이지만 남을 위해서 살면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다른 교회와 다른 것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들이 신앙의 표준을 어디에 정할 것이냐? 통일교인들은 자그마치 천주(天宙)에 정해야 됩니다. 천주주의입니다. (판서하심) 천주주의가 뭐냐? 한 손으로는 하늘을 붙들고 한 손으로는 땅을 붙들고 산 제사를 드린다 할 때에, 하늘땅이 내 안에서 갈라지면 큰일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갈라지면 복귀가 안 됩니다. 하늘이 갈라질 수 없고, 땅이 갈라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갈라 놓겠다고 하게 되면 하나님도 야단이시고, 땅도 야단할 수 있는 입장입니다. 이것이 천주주의입니다. 이런 운동을 하자는 주의라구요.
그러면 통일교회 문선생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통일교회 교인들은 지금은 과정에 있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사람 사태가 날 것입니다. 두고 보라구요. 지금은 사람이 그리워서 별의별 놀음 다 하지요? 기성교회 목사들, 통일교회를 반대해 보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거지, 상거지가 되면 그들도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총무부장이나 협회장한테도 이야기 했지만 말이예요. 그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악이 선을 쳤으면 맞은 선이 가는 길을 악은 머리를 숙이고 따라가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도 거지 노릇을 하면서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선은 주인 노릇을 하면서 맞고 가지만, 악은 선을 쳤기 때문에 거지 노릇을 해야 된다 이겁니다.
기성교회가 왜 그렇게 된 줄 알아요? 통일교회를 반대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내놓고 당당히 얘기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럴 때가 왔습니다. 통일교회를 반대하던 기성교회들, 두고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래기를 주워 먹던 것같이 그렇게 굶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구요. 목사들이 돈 몇백 원에 자기 체면을 팔아먹을 수 있는 자리까지 가는 것을 볼 때 기가 막혔습니다. 닭을 잡아서 해주니까 자기 것을 다 먹고 들어오지 않은 사람 몫의 닭다리까지 물고 나가는 목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기가 막혔습니다. 그런 것이 남의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따지고 보면 나하고 원수라구요. 지금까지 수십년 동안 강단에서 통일교회 문선생을 때려 잡으라고 하고 통일교회 가지 말라고 벽돌담을 쌓아 놓던 목사들이 아닙니까? 이제라도 그 담을 툭 터놓으면 한꺼번에 다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건 틀림없습니다. 이건 목사들이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있는 데에 기성교회 목사나 장로, 집사들만 불러다 놓으면 찰떡에 팥고물 묻듯이 들이닥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구요.
조금만 더 얘기하자구요. 요즈음에 기독교가 하나되겠다고 무슨 회의를 하고 하지만, 아무리 회의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회의를 열게 했으면 그것이 통하지만, 하나님이 무시해 버리면 아무리 회의를 해도 하면 할수록 뿌리가 전부 갈라진다 이겁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내가 기성교회 한 천 개를 한꺼번에 흡수할 것입니다. 알겠어요? 기성교회 한 천 개를 흡수한다 이겁니다.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전도하느라고 고생했지만 한꺼번에 지금 통일교회 이상 많이 들어올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월급을 만 원 받는다고 할 때 만 오천원을 주겠다고 하면 입 벌리고 달려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불원한 장래에 사람 사태가 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그때 가서 무엇을 가지고 수습할 것이냐? 일대일로 수습할 것이냐? 수습할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많은 사람이 들어오면 그들을 무엇으로 지도할 것이냐? 여러분이 거기서 뗄 수 없는 하나의 사상이 무엇이냐? 세계를 위한 사상이요, 후손을 위한 사상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아까 얘기한 여의도나 청평에 하는 것은 세계를 위해서 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후손을 위해서 교육기관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지금 대학교를 세우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도 바쁘다구요. 여러분들을 보게 되면 여러분도 지금 급해 가지고…. 어떤 사람은 뜻을 위해서 수고하다 보니 결국은 나 하나 남아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더 고생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뭐 출세한 사람이라구요? 지금도 낙오자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뜻이라는 것은 세계를 위하는 것이요, 뜻을 이루는 것은 후손을 위해 남기고 가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통일교회가 다른 교회와 다른 것입니다.
통일교회에도 신앙의 표준을 두지 말라
오늘날 여러분이 선생님을 따라오는 데 있어서 선생님에게 그러한 면모가 엿보이는 한, 여러분이 가는 길 앞에 있어서 선생님을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생님을 비판할 수 없습니다. 비판하면 여러분이 비판받게 됩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민족이 반대하고 교회가 반대하고 수많은 교파들이 들이쳤지만 통일교회 문선생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요전에 주간 선데이 서울에 강원용 박사 얘기가 실려 있었지만, 몇 번을 때리면서 저 사람이 남아지겠나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저들이 통일교회 문선생 패를 들이 때리면 남아질 것 같아요? 생각해 보라구요. 몇 번 안 때려서 폭싹할 것입니다. 그러나 통일교회 문선생은 별의별 누더기 감투를 썼지만 안 망했습니다. 오히려 못살게 굴던 사람들이다 망했어요.
그것은 왜 그러냐? 통일교회가 망했다가는 큰일나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이것이 주류사상이라고 하면 하나님편 사람들이 다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현세에 있어서 세계적인 사조를 중심삼고 볼 때, 통일교회가 가는 방향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세계를 수습할 대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하나님이라면 절대적인 상대권을 남겨 놓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남겨 놓지 않으면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우리는 한계선에 도달했으니만큼, 신앙의 표준을 자신에게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정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어디에 가서 통일교회 교인이 세상 사람과 싸우는 것을 보게 되면 먼저 통일교인을 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선 안 돼요. 상대방을 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통일교인이 잘했느냐 잘못했느냐를 살펴보기 전에 상대방이 잘했느냐 잘못했느냐를 살펴보고, 상대방이 잘못했더라도 통일교회 교인은 다 잘했느냐를 살펴봐서 다 잘 했다 하더라도 잘못한 사람을 우선 책망하지 말고, 통일교인에게 '네가 선한 입장에 서 가지고 그래 악한 사람을 대해 이것이 뭐냐? 고 충고해 주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위해서 그렇게 충고해 주면, 또 상대방이 그것을 알게 되면 저절로 분립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 책임자들을 잘살게 해야 되겠어요, 기성교회 책임자들을 잘살게 해야 되겠어요? 생각해 보라구요. 자, 주류사상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표준을 갖고서 가인을 복귀해야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가인을 복귀하기 전에 아벨이 잘살 수 있어요? 잘살 수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성교회 목사들을 잘살게 해야 통일 교회 책임자들이 잘살 수 있다 이겁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나라를 위해서 희생해야 나라도 그 희생의 길을 따라서 희생의 제물의 대가를 치러 가지고 탕감해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길이 미래의 국가가 가야 할 길인데 그걸 누가 책임져야 하느냐? 현정부의 위정자들은 믿을 수 없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내가 가만있지 않으려고 그런다구요. 선생님이 1974년도까지는 언론기관을 만들려고 합니다. 1974년도까지 강력한 언론기관을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지금 종교신문 나오는 거 알죠? 「예」 나라를 올바로 세우려면 종교계를 올바로 이끌어야 됩니다. 그것이 끝나면 신문을 올바로 지도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이 그것을 지금 준비하고 있는 것을 알고, 우리 통일교회가 이렇게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신앙계나 종교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하나의 좋은 계기가 된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이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더 큰 발전을 위해서 준비해야 되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신문을 몇만 부를 발행했다 하게 되면 여러분이 팔아야 됩니다. 통일교인 전원이 안 보면 안 됩니다. 할머니들도, 알겠어요? 밥을 못 먹으면 못 먹었지…. 세 끼니 먹던 것을 두 끼니만 먹으라구요. 여러분이 종교기관을 협조하는 의미에서 한 부씩 사 봐야 되겠습니다. 할머니들, 알겠어요?「예」 우리 남자들은 구경해야 되겠어요?「아닙니다」 그래 가지고 십만 부를 넘겨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무엇을 하든지간에 내가 신문사를 만들겠습니다. 신문으로 두들겨 맞았으니 신문으로 탕감복귀해야 됩니다. 그렇지요? 종교계에서 두들겨 맞았으니 종교로 탕감복귀해야 됩니다. 통일교회가 돈이 없다고 천대받았으니 앞으로 돈으로 탕감복귀해야 됩니다. 모든 것이 탕감복귀입니다. 문선생이 지금까지 벌거벗고 춤춘다고 소문났지만, 이제는 언론기관을 통하여 춤추게 해 놓고 구경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기어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그렇게 될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다짐해야 할 주의는 천주주의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꽉 잡아라
통일교회 교인으로서 참된 길을 가는 사람은 하늘을 붙들고 땅을 붙들고 놓으려고 해도 놓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길을 찾아 나가는 사람은 통일교회 문선생이 아무리 짓궂게 하더라도 놓을래야 놓을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도 이 세계를 복귀하기 위해서는 문선생을 놓을래야 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손을 잡았다 하면 꽉 잡아라 이겁니다. 꽉 잡고 이것을 이루어야 된다는 거라구요. 세계 사람들도 그래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잡으면 하나님이 '꽉 잡아라' 하시는 겁니다. 세계 사람들이 안 쥐어 주면 '아이구 쥐어 주십시오'라고 할 수 있는 내적인 운동이 지속되지 않으면 천주주의를 완성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려면 민족을 초월해야 됩니다. 선생님은 판국 사람인데 일본 사람이 선생님을 보고 '우리의 선생님이 대한민국 사람, 옛날에 우리의 식민지 국가로서 우리의 통치를 받던 저개발국가의 국민이 아니냐? 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안 잡아 줄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아무리 밉더라도 꽉 잡아 주십시오'라고 해야 합니다.
불평의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몰라줘서 불평이라는 것입니다. 그건 괜찮습니다. '선생님이 날 몰라줘서, 안 잡아 줘서 불평이지, 내가 안 가겠다고 하나?'합니다. 통일교인들이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되어야 돼요. 방향이 남북으로 되어 있던 것이 거꾸로 되어야 됩니다. 거꾸로 한바퀴 획 돌아와야 됩니다. 다시 돌아와야 된다구요.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당신이 이렇게 죽다니, 이게 웬 말이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가지 마세요'하고 막을 때 예수님이 뭐라고 그랬어요? '하나님이여, 어서 오십시오'라고 했어요? '사탄아,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이미 때가 늦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이렇게 가려고 그러는데 '그거 안됩니다, 안 됩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선생님이 그 사람을 놓고 가지, 데려갈 것 같아요?
통일교회 문선생이라는 사람이 고집이 세다면 누구 못지않게 센 사람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보고도 내가 가끔 '어쩌면 그렇게 아버지를 닮았느냐? 핏줄은 어쩔 수 없구나'라고 합니다. 흥진이를 보나 세 살 난 현진이를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자기가 한번 말한 것을 못하면 자기 체면이 서지 않기 때문에 아버지 체면은 모른다 하고 아버지 앞에 와서 버티고 서 있는 것입니다. 한번 한다 하면 절대 굽히지 않는 성질입니다. 그런 면이 있습니다. 고집이 세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강한 사람이라구요.
또 말을 안 듣는 데는 누구보다도 말을 안 듣는 사람입니다. 그르다 할 때는 코를 꿰어 가지고 아무리 잡아 끌어도 안 듣고, 옳다 할 때는 가지 말라 해도 가는 거라구요. 그런 성질이 있다 이겁니다. 여러분 중에 선생님이 우리 말을 잘 듣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계산을 잘못 했습니다. 그 사람은 잘 들어주는 것같이 해주어야만 일을 하겠기에 그렇게 해주는 거라구요. 그렇다고 언제나 그렇게 해주느냐? 선생님의 본의는 딱 정해져 있습니다.
복귀의 길은 본래 딱 정해져 있습니다. 그 프로는 단 일보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일보도 양보할 수 없어요. 그것을 알고, 여러분 중에 적당히 작전해 가지고 자기가 출세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라지라구요. 내가 거기에 말려들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처음에는 얼마만큼 보조를 맞춰 주지만, 결국에 가서는 그가 이용당했다는 결과에 떨어지게 하면 했지, 내가 이용당해 가지고 나가자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통일교회 문선생 개인의 목적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와 하늘땅을 위해서입니다. 이 사상을 여러분이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지 말고 뜻대로 살려고 해야
여러분이 개인표준이나 가정표준을 다 달성할 수는 없습니다. 다 못해요. 여러분 일생 동안에 그것을 다 할 수 있어요? 이만큼 나오는데 6천년이 걸렸습니다. 수천년 동안 하늘땅이 인류를 동원해서 만들어 가지고 나온 것을 일대에 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해야 하느냐? 더 큰 세계를 위해서 죽어라, 뜻을 위해서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희생하자는 것입니다. 희생하고 나서 잘살자는 것입니다. 잘살되 '나 혼자 잘사는 것은 싫다. 아버지와 전체가 잘살아야 한다'고 해야 됩니다. 이것이 뜻의 길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희생을 하고 하고 또 하더라도, 망할 것 같은데도 안 망하는 것입니다.
어저께 나까무라 목사가 와서 선생님보고 하는 말이 참 이상하다는 거예요. 일본 정계 원로인 모씨들과도 연고가 깊은 박모라는 한국 사람이 있는데, 그와는 재산 문제 때문에 관계되어 가지고 일본에서 처음 만났답니다. 그 사람은 불교를 믿는 사람인데 하루는 자기에게 기도를 받고 싶다고 해서 기도를 해주었답니다. 기도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경련이 일어나고 하는 역사가 벌어졌다는 거예요. 담배를 피우고 술을 잘먹는 알콜 중독자여서 풍기(風氣)가 있던 사람인데, 한바탕 구르고 넘어지고 하는 역사가 있고 나서 거꾸러졌다는 것입니다. 나까무라 목사는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안수를 해주고 하던 예순 몇 되는 노 목사인데 지금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선생님을 생각하고 이렇게 해보니 하나님이 살아 계시더라는 거예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목전에 볼 수 있더라는 겁니다.
또 내가 전 일본의 47개 내지 50개 도시에서 순회부흥회를 할 것을 지시했었어요. 그래서 순회 부흥회를 하고 돌아왔다는 거예요. 그러고 나니까 이제 일본에서 아주 유명해졌다나요? 지금 현시대에 살아 남은 교역자라는 그 꿈 같은 이야기가…. 맨 처음에 시작할 때는 막막했는데, 이것이 마지막 판이라고 생각을 하고 하다 보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같이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지금 한국과 일본과 중국을 연결하는 교단을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뭐 여러분이 몰라도 괜찮아요. 요전에 일본의 크리스찬 신문에도 그게 났어요. NCC권내의 일본 목사들을 상대로 전부다 한국을 중심삼은 침투공작을 통일교회에서 한다고 신문에 나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야단한다는 거예요.
그는 세상이 뭐라 하더라도 자기는 목숨을 내놓겠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이제 당장에라도 통일교회 간판을 내세워 가지고 발표하라면 발표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그건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일러주고 있지만 말이예요. 여러분들은 지금 '꿈 같구만' 하고 있지만, 새로운 사람을 중심삼고 볼 때, 실제로 지금 불이 붙을 수 있는 환경이 되어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대한민국내에서가 아니고, 세계적으로 그렇게 되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래서 내가 이번에 외국에 나가게 되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날 만나리라고 보고 있어요. 그러니까 결국은 무엇이냐면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이겁니다. 여러분들은 무슨 일을 해야 되겠다고 하면, '또 일이구먼, 아이구' 이러는데 그래서는 안 됩니다. 아직까지 세계가 우리와 손을 못 잡았고 세계를 위할 수 있는 한계점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분은 세계를 위해 희생하는 길을 가야 됩니다. 세계를 위해서 희생하기 위해서는 나라를 위해서 빨리빨리 다리를 놓아야 되겠습니다.
이 나라가 어떻게 북괴를 능가할 수 있는 사상으로 무장해 가지고, 강철같이 단결하여 세계 공산권을 제압하느냐? 세계 공산당을 제압하게 될 때는, 민주세계는 그 기준이 올라가지 말래도 푹 올라가기 마련이 아니겠어요? 우리가 이 조그마한 한국 땅에서부터 유도탄기지로 삼아 가지고 한번 싸워 보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생각입니다. 알겠어요? 「예」 여기에 재료가 되고 한 터전이 되어 가지고 보조를 맞추고 싶어서 모인 무리가 통일교회 교인들이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인은 자기 마음대로 할 사람이냐? 뜻 마음대로 할 사람이다 이겁니다. 그렇지요? 뜻 마음대로 할 사람이지, 자기 마음대로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뜻대로 하게 할 사람이 누구냐? 통일교회 문선생이다 이겁니다. 문선생이 여러분을 전도시켜 가지고 등쳐먹고 여러분의 신세를 져 가지고 잘살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는 지금 내가 먹고 살 것을 옛날에 다 만들어 놓았습니다. 누구도 부럽지 않다는 거예요. 내가 여러분의 신세를 진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내 신세를 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관계를 맺으면 맺을수록 내가 여러분에게 신세를 지우고 왔지 내가 여러분의 신세를 지지 않았다 이겁니다. 그러니 당당하다구요. 여기에 이의 있어요?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세계를 위해 희생하는 길
세계를 위해서 가는 길로 더 내몰아야 되겠습니다. 더 내몰아야 되겠어요. 안 내몰아야 되겠어요? 남자들 대답해 보라구요. 내몰아야 되겠다는 겁니다. 만일에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입장에서는 거예요. 세계를 위해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예」가는 길은 단 하나입니다. 세계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입니다. 목적을 성사하려고 하는 사람이 그 목적을 위해서 얼마만큼 희생의 대가를 치르느냐에 따라서, 상대적권내에 그것이 얼마만큼 흘러들어가게 하느냐에 따라서 목적성사의 기일이 단축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내가 의무적으로 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세계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세계를 위해서 살려면 대한민국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이 세계를 위하지 않으면 오늘날 우리가 세계를 위해 살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고스란히 나와 같은 신앙적인, 사상적인 사람을 만들어 가지고, 혹은 그런 후손을 만들어 가지고 천년 만년 후대에 이와 같은 사상을 남겨 줄 수 있는 터전이 남아지는 한 통일사상은 세계에 새로운 문화세계를 창조할 사상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선생님의 관이요 하나님의 관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알고, 개인으로서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보다도…. 본연의 인간이 남아질 수 있는 빠른 길은 세계를 위해, 더 큰 것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희생하여 세계적인 일체권내에서 여러분이 이것을 정복해 보십시오. 가정 전체, 사위기대 전체, 통일교회 축복받은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통일교회 전체, 민족 전체가 한꺼번에 세계를 위해서 통일할 수 있는 때가 되면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가 종적으로 탕감해야 될 역사적인 사실을 통일교회가 일시에 탕감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섭리관입니다. 알겠어요?
통일교인이 개인적 기준, 가정적인 기준, 종족적인 기준, 민족적인 기준에서 탕감하지 못하면 선생님 자신이 해야 됩니다. 여러분 개인을 희생시켜서 가정에 투입하고, 가정을 희생시켜서 교회에 투입해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지방에 가게 되면 어머니가 고단하다고 해도 가자고 하는 겁니다.
만일 통일교회 여러분들이 못 하게 될 때는 어떻게 되느냐? 여러분을 중심삼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선생님의 직계 자식들을 중심삼고 이루어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여러분은 불쌍한 무리가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종으로 끝납니다. 그렇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새는 선생님이 선생님의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될 수 있으면 자기 전에 자식들을 위해서 마음으로 기도해 줍니다. 왜 그러느냐? 여러분을 누구보다 더 사랑했다 이겁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책임을 못 하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계대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 선생님이 여러분을 사랑하던 그 사랑을 자식들에게 주더라도 천적인 사랑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기 도
그 누가 잘나서 오늘 이 자리까지 통일교단이 남아져 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지 않을 수 없었던 역사적인 비운의 그늘과 당신께서 6천년 동안 섭리도상에서 비운을 벗어날 수 없었던 역사적인 사실이 그냥 그대로 남겨져 있사옵니다. 이것을 현세를 살고 있는 실체 들을 통하여 해원성사해 드리지 않으면 안 될 엄숙한 과제와 책임이 통일교단에게 부과되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자나깨나 그 일을 감당해 내야 될 것이 오늘 여기 서 있는 자식의 책임이요, 이 자식을 따르고 있는 자녀들의 책임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말없이 참아 나오셨습니다. 통일교회도 지금까지 말없이 걸어왔습니다. 당신의 용모를 갖추어 가지고 비참하였던 선의 역사를 드러내어 만민 앞에 선포하여, 만민이 가슴 가슴을 헤쳐 가지고 거기에 하늘로 메울 수 있는 날은 어떻게 오게 할 것인가, 이것이 오늘날 통일가가 해야 할 책임인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미지의, 미개의 민족을 깨우쳐야 할 사명이 저희에게 남아 있는 것을 알게 될 때, 한 날이 얼마나 바쁜 생활을 해야 할 날이요, 한 시간이 얼마나 귀한 생활을 해야 할 시간인가를 저희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기의 나이가 더해 가는 것을 한탄할 것이 아니라, 뜻 앞에 미급한 자신인 것을 한탄할 줄 아는 통일교단의 사람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이제 6월이 다 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6월의 마지막 안식일이옵니다. 이 1971년 6월을 슬픔의 달로서 흘려 보낼 것이 아니라 기쁨의 달로서 아버지 앞에 봉헌해 드려야 할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 이달이 추억의 달이 되고 기쁨의 달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7월을 맞으면, 저희들은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세계를 향하여 새로운 출발을 해야 되겠습니다. 7월은 전국에 있는 자녀들을 새로이 출발하는 40일 전도 노정에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될 때이옵니다. 저희들이 계속되는 지루한 싸움터에서 그칠 수 없는 싸움의 전선을 펴고 있는 지금, 언제나 스스로를 감정해 가지고 긴장된 입장에서 하루의 생활을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될 자리에 선 자신을 보게 될 때는 불쌍한 모습이지만, 자신의 불쌍함보다도 민족 앞에 불쌍한 운명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넘어가기 위해서 저희들이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역사적인 탕감 노정을 알았기에, 이러한 도상에 들어서는 저희들을 불쌍히 보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아버지가 계시는 것을 알고, 감사하며 생활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이 저에게 바라시는 생활의 표준이 무엇이냐, 가정의 표준이 무엇이냐, 종족 민족 국가의 표준이 무엇이냐고 묻기 전에, 세계를 위할 수 있는 희생의 표준, 희생의 대가를 치러 가는 데 있어서의 기준이 무엇이냐고 물어야 되겠습니다. 이 기준이 지금 때에 문제가 되옵니다. 세계를 위한 공신이 되게 될 때는 국가의 공신은 이미 되어진 것이요, 종족 가정 혹은 개인의 완성기준도 이미 넘어선 것이라는 사실을 아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의 역사과정에서 세계기준을 중심삼고 나오셨사옵니다.
끝날이 오는 것도 세계의 때를 마련하기 위해서요 심판날이 오는 것도 세계의 때를 마련하기 위해서임을 생각하게 될 때, 당신은 세계를 움직여온 무대를 표준해 가지고 지금까지 지루한 역사과정을 참아오신 것을 생각 하게 될 때, 이것은 세계를 상속할 수 있는 하나의 아들딸을 찾기 위한 아버지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임을 저희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이제 눈이 뜨였으면 세계를 바라보고 울부짖는 감정을 일으킬 수 있는 일이 있거든, 내 개인을 위하여 감정을 격동시킬 것이 아니라 세계를 대한 섭리 앞에 원수를 대하여 감정을 격동시킬 수 있는 그날을 위하여 참고 또 참아야 할 것이 통일가에 속한 무리들의 사명인 것을 알고 있사오니, 부디 이와 같은 사명을 절감하고 내일의 희망과 더불어 세계 인류와 더불어 천국의 개문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는 기수들이 되어, 당신이 바라시는, 세계의 인간은 이래야 된다는 절대적 기준을 제시하고도 남을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러한 무리가 처해 있는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을 것이요, 그러한 무리가 이 세계에 처해 있다면 이 세계는 망하지 않을 것이요, 그러한 무리가 이 땅 위에 남아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로 말미암아 해원 성사할 수 있는 기원이 세워진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고, 저희들이 이 기준에 따라서 가기 위해 마음을 다하고 몸을 다하고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저희가 흘러가는 세계의 사조와 더불어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자기 개인의 사정 때문에 급급하는 불쌍한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사옵니다. 세계의 슬픈 노정이 저희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미래의 터전을 위하여, 현실 과정에서 이것을 극복하고 타개하기 위한 싸움을 누구보다도 심각한 자리에서 계속할 수 있는, 당신이 보람 있게 느끼실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할 것을 이 시간 깨달았사오니, 오늘날 저희들이 이것을 위한 신앙의 표준을 갖고 나가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희들은 세계의 천국을 위해서, 아버지께서 안식하실 동산을 위해서 가야 되겠사옵니다. 오늘 자기 가정이 아버지 앞에 안식된 가정이 되었다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 환경이 가정의 표준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환경을 개척하여야 할 사명을 절감하면서 극복해 나가겠다고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만 나라 앞에 남아질 수 있는 가정이 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았사오니, 그러한 책임을 지고 나가겠다고 새로운 결심을 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 누구를 믿겠습니까? 그 누구를 바라보겠습니까? 이 땅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보잘것없는 저희들이 하늘땅이 바라보고 있고 인류가 바라보고 있고 후손이 바라보고 있는 엄청난 초점상에 서 있는 자신을 결정지을 수 있는, 내일의 패배의 쓴잔을 마시면서 낙망하고 사라지는, 사망권내에서 허덕이는 무리가 될까봐 이것을 두렵게 생각하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를 악물고 극복하고 자기 생명을 다하는 한이 있더라도 승리의 결과를 다짐하여, 하늘땅이 기뻐할 수 있는 환희의 날을 맞이할 수 있는, 영광스런 아들의 모습으로 등장할 수 있는 시간을 바라보며 싸워 남아지는 무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그럴 수 있는 생활감정, 그럴 수 있는 생활태도를 갖고 나가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세계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사무칠 수 있는 이들이오니 이제 이들이 세계를 구해 줘야 할 때가 와야 되겠습니다. 세계 민족과 상봉하기를 그렇게 바라왔지만 소원이 이루어진 그날이 아직 오지 않았기에, 그 날을 맞기 위해서 세계본부를 중심삼고 서로서로 만날 수 있는 때를 당신께서 준비하고 계시는 것을 알고, 그날과 그때를 위해서 현실생활에서 부끄럼 없는 자신으로 연마시키고, 책임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노력을 다할 수 있는 아들 딸들이 되게 하여 주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통일교회가 걸어온 이 길은 개인적으로 볼 때 슬픈 길이요, 그 누구 앞에 형용할 수 없는 비참한 길이었습니다. 여기에 서 있는 아들도 대한민국 삼천만 민족을 대하여 말을 하자면 할 말이 많사옵고, 수많은 교단을 대하여도 할 말이 많사오나, 아버지의 참으신 마음을 알고 있기에, 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 말할 수 없음을 느끼옵니다.
남기신 복귀의 한의 고개, 세계를 위할 수 있는 제물의 한계점을 어떻게 넘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볼 때, 그것을 넘는 데는 외로이 혼자 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교단을 끌고 민족을 끌고 넘어야 할 사명이 이들에게 있는 것을 생각하고, 이 일을 생애노정에서 결정짓고 가지 않으면 안될 운명의 복귀의 길을 가는 이들임을 생각하고 있사오니, 아버님이여, 갈 길을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들이 저주를 받아서는 안 될 것이요, 이들이 망해서는 안 되겠기 때문에 이 길을 염려하고 이 길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이들을 보시며 이들을 용납하시옵소서. 이들이 아버지의 은사권내에 서기를 바라는 것이 당신의 마음인 것을 생각할 적마다 불쌍하신 분은 아버지이심을 느끼옵니다. 그러한 아버지와 같은 입장에 있는 무리가 있다면, 그 무리가 주체요,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주는 무리요, 모든 전체의 동기의 원천을 마련하는 무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무리로 말미암아 세계는 새로운 천국의 방향을 갖추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지금까지의 신앙의 표준은 자기 개인구원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허덕이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가정의 구원보다도 종족의 구원을, 종족의 구원보다도 민족의 구원을, 민족의 구원보다도 세계의 구원을 맡을 수 있는 입장에 서 가지고, 일구월심 스스로의 환경을 망각한 채 자신의 생애노정을 잊어버리고 가는 사람이 되었다 할진대는, 그가 죽더라도 그 터전은 남아진다는 사실을 이 시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이 여기에 서 있는 이 자식을 필요로 하는 것은 제가 누구보다도 아버지 앞에 가까이 가겠다는 욕심이 있기 때문이 아니오라 아버지를 위해 누구보다도 더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이옵니다. 당신이 그러한 사람을 중심삼고 수습하시는 원칙적인 기준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들도 그 발판을 통해서 아버지 앞에 가기를 원하여 이 자식을 필요로 판다는 것을 아오니, 이들이 그런 사상을 본받아 가지고 자기 종족과 민족을 위해서 그런 길을 가기에 온갖 정성을 다하고 충성을 다할 수 있는 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가 죽게 될 때 민족의 앞날이 좌우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통일교회 교인이요, 그 단체가 절망하게 되면 민족이 절망할 수 있는 그런 단체가 될 때 그 단체는 민족을 주도하는 것이요. 그 나라가 낙망하면 세계 국가가 낙망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서게 되는 그런 나라가 되면, 그 나라는 세계를 주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이제 그러한 표준을 바라보고 나갈 수 있는 이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공부하는 학생이 있거든 자기 일신의 뜻을 위해서 공부할 것이 아니라 인류의 이익을 위해서 하고, 개인이 하루하루 가정 생활을 영위하는 것도 자기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오늘날 교단의 형성도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뜻에 남아질 수 있는 그 목적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철석같은 신앙의 표준을 이 아침에 새로이 갖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과연 자기 일신을 얼마나 나라 앞에, 자기 가정을 얼마나 나라 앞에, 자기 자식들을 얼마나 나라 앞에 희생시키고자 했는가를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여, 저는 통일교단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 교단이 비참하게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서슴지 않고 이 나라와 세계 앞에 내놓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제단 위에 올려진 이삭과 같이, 통일교단에 속한 무리들이 서슴지 않고 불평불만하지 않고 제물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게 될 때, 이 단체는 민족이 복귀될 수 있는 터전이 될 것이요, 세계가 복귀될 수 있는 터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들이 확고히 믿고 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 기준을 중심삼고 새로운 각오와 결의를 가지고 이 6월을 보내고, 7월을 비롯한 새로운 달들을 힘차게 맞아 나갈 수 있는 통일가의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옵고, 이 나라 이 민족과 세계가 바랄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오며,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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